시인 손진은과 그의 네번째 시집 《그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른다》
‘하트 모양 발굽 향기를 찍으며’
손진은(孫晋殷) 시인의 시집 《그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른다》(걷는사람 刊)는 유쾌한 시들의 노래집이다. 돋보기(혹은 현미경 혹은 망원경)를 든 시인은 일상의 자잘한 대상을 세밀하게 혹은 큰 그림을 그리듯 붓질한다. 심각한 대상이나 사건까지도 부드럽게 소화하는, 목넘김이 좋은 시들로 가득하다.
마치 리얼리스트처럼 자연주의 느낌이 드는 사실적 묘사를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고 낭만파의 서정(자연과의 교감)도 깊게 배어있다. 거대한 대(大)서사의 리얼리즘 대신 소(小)서사의 일상 속에서 삶의 정수를 포착한다. 시집 겉장에 ‘2021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이라는 귀한 훈장까지 달았다.
손진은 시인은 이 시집에 대해 “과묵했던 문학소년을 길러 낸 고향의 정경과 일상의 자잘한 사건들을 내 ‘몫’의 말들로 풀어낸 무늬들”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시종 뜨거운 사랑가를 부른다. 국도변에서 조우한 노루, 겨울 염불암 길에서 만난 청딱따구리, 멀리 서풍과 구름기차 타고 온 민들레, 소리 물고 파닥이는 물방울과 만나 노래 부른다. 자신의 노래를 두고 시인은 “분화구보다도 뜨겁고 죽음마저 따뜻한 체온으로 녹이는 사랑이 있음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서정적 동일화의 작동 체제는 ‘인간이 사람과의 교감을 넘어서서 자연, 사물로 공감을 넓히는데, 그런 공감의 축에서 시적 상상력이 발동한다.’(이숭원 문학평론가)
발을 헛디뎠을까
차가 향기의 벼락 속으로 뛰어든 걸까
지품에서 지보로 넘어가는 국도변에
만삭의 노루가 앉은 듯 누워 있다
금방 어린것이 나올 듯 황갈색 배 꿈틀거리며
기품 있는 목은 든 채
하트 모양 발굽 향기를 찍으며
-‘점박이꽃’ 중에서 일부
타탁 탁탁탁 타타타타
타자기보다 경쾌한 울림 공중에 흩뿌릴 때마다
나뭇결 어둔 속은 조금씩 파헤쳐져
보드랍게 부스러기들 떨어지고
바람이 고루 숲에 뿌려 주는 그 향기에
벌레들은 또 달려들 것이다.
으늑한 적막 부푸는 골짝에
이내 사라져 버리는 말의 장단 끝없이 새기는
불붙는 부리의 내공도 내공이지만
선한 눈빛의 저이는 날 멈춰 세우고
기어코 나무의 내면까지 들어가려는가 보네
-‘딱따구리 소리는 날 멈춰 세우고’ 중에서 일부
둥둥, 구름이 힘찬 팡파레를 울리는 아침나절
배꽃의 즐거운 혼례가 한창이다
머릿결 빗기는 바람 잉잉거리는 벌 떼가
면사포의 원광 두른 신부의 소식을
실어 나르느라 분주하다
턱시도 말쑥하게 차려입은 까치들과
노랑 넥타이 성장盛裝한 개나리의 안내로
멀리 서풍과 구름기차 타고 온
민들레 합창단 똥그란 입술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나비 떼 더불어 품 넓은 하늘 속으로 울려 퍼진다
-‘사월의 혼례’ 중에서 일부
사랑의 프리즘으로 세상을 보면 아무리 비극적인 장면도 슬프지 않다. 시 ‘추석날 아침’에서 보듯, 덤프 트럭이 신나게 페달을 밟는 소년을 셔틀콕인 양 튕겨 올리지만 시인은 ‘새들이 퍼덕인다’거나 ‘옥색의 공기들이 화들짝!’이라고 표현한다. 아찔한 장면을 녹이는 감각의 바탕에는 시인의 따스함이 흐르고 있다.
두어 달 전 명절 끝날 산책길
인적 뜸한 고향 신작로를 지나다 들었네
점잖지 못하게 왜 그랬어?
오빠란 놈이 동생을 그렇게 하면 어째?
아침 공기 잔잔히 물들이는 어떤 중년의 음성
그 오빤 보이지 않고 하,
누렁이 한 마리가 고갤 숙여
그 말 고분고분 듣고 있는 곁엔
누운 암탉 한 마리
(아마 옛 버릇을 참지 못하고
유순하던 개가 닭을 물었던 모양)
머릿수건을 쓴
그의 아내인 듯한 환한 여인은 또
왜 암말도 안 하고 아궁이에 장작불만 지피고 있었는지 몰라
가축 두어 마리, 가금 대여섯
키 낮은 채송화 분꽃, 해바라기와 사는 필부인
그 사내 부부의 울타리 너머
꿈결같이 들은 그날의 음성과
실수 때문에
가책받은 얼굴로 고갤 숙이던
그 착한 개의 표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가 다 죄인인 듯 마음이 저려 온다네
알아듣기나 했으려나 그 말?
메아리 소리 곱게 울리던 그날 아침
아 참, 내가 진정 못 본 건 또 무얼까?
-‘개의 표정’ 전문
민완의 탐정처럼 돋보기를 든 ‘노래하는 시인’은 인간과 자연 사물의 외형만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사연 많은 내면까지 포착한다. 그에게 한번 포착되면 무엇이든 발가벗겨질지 모른다?
시인 김기택은 그의 시를 읽고서 ‘손진은의 시선이 닿으면 보잘것없는 것들은 극적인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긴장감으로 무장한다’고 설명한다. 별 볼 일 없는 사물이나 흔히 빠진 장면을 놀랍고 신기한 사건으로 만드는 아이의 호기심처럼, 그의 상상력은 지루한 일상을 마법적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자정이 넘은 설산의 휴양림
깊은 골 따라 랜턴을 비추다
씨앗처럼 심긴 눈동잘 기어이 캐내고야 만다
신음처럼 켜져
무겁게 숨소리마저 보내는
내 몸에도 흐르는 저 살별들을 나는
밤의 창이라 부르고 싶었다
허나 맞부딪는 두 빛이
현 위에 닿는 활의 설렘일 거라는 예감을 이내 뉘우친다
어떤 빛은 파닥이는 지느러미 같은 불씨를
찌르기도 하는 것이어서
날갯죽지나 뱃가죽 아래 두근거리는
여린 뼈와 가슴이 내는 저 흐르는 빛의 발광發光은
소심하거나 격렬한 영혼에 더 가깝다
어둠의 옆구리에 손 질러 볼 필요도 없이
못 보던 빛줄기가 그 영혼을 간섭할 때
머루알처럼 또렷이 켜지는 구멍은
때론 표정 감추기 위해 초조를 절반쯤 깨물고 웅크린 창窓이다가도
피로가 더해지면 찌를 태세로 불붙는 창槍!
-‘그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르겠다’ 전문
손진은 시인의 귀한 시집들
시를 여러 번 읽게 만드는, 인생 전반을 ‘병(病)의 위계’로 그려낸 ‘오래 병에 정들다 보니’도 명작으로 꼽힌다. 이 시를 음미하자니 ‘질병은 지혜로운 신의 섭리가 인생의 컵에 섞여 있는 쓴 잔에 불과하다(Illness is merely the bitter, which a wise Providence mingles in the cup of life)’는 서양 속담이 생각난다.
세상에는 무병장수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앓는 중에 또 다른 병이 겹쳐 생기기 마련이다.(病上添病) ‘큰병’(정든 병)이 유순해지면 ‘밀사들’(작은 병들)이 얼른 고개를 들어 세력을 다툰다. 때로 ‘버려진 마음’과 ‘병’이 서로 암수를 이루기도 한다. 그런 ‘통보도 없이 왔다 간 환후의 연혁’을 엑스레이를 통해 뒤늦게 알게 된다. 고통과 아픔, 슬픔을 멀리하려 했던 ‘파란만장했던 술과 국밥, 울음과 다정을 흘러보냈던 목구멍의 뻔뻔함!’을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병이야 말로, ‘병의 위계’야 말로, 시인과 함께 세월을 견디게 만든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래 병에 정들다 보니 알겠다
병에도 위계가 있다는 걸
사막의 사자처럼 센 놈이 늑골언덕 깊숙이 사무치면
위아래서 빼꼼히 얼굴 내밀던 치들은
얼른 엎드린다는 걸
그러다 그 정든 병 유순해질 즈음이면
꼬리뼈에 핏줄에 마음의 살들에 숨어 살던
밀사들 얼른 고갤 들어 세력 다툰다는 걸
때로 다른 불우의 습격에 스러져 간 놈들,
내 영토는 버려진 마음들과 병이 암수가 되어
식구를 들이고 곁에 눕고 몸을 내줬다는 걸
지금도 엑스레이를 보면
내 몸의 왕국 점령하고 나부끼며 쇠락해 갔던,
때로 통보도 없이 왔다 간 환후의 연혁 아련히 남아 있다는 걸
그런 줄도 모르고 미망과 헛것에 골몰했던 불모의 영지에
파란만장 술과 국밥, 울음과 다정 흘려보냈던 목구멍의 뻔뻔함!
오오래 병과 뱃동서 하다 보니 알겠다
비 온 후 공터에 키를 늘이던 잡초의 생몰처럼
내 영토에 머물다 간 그들 잘 건사하지 못했던 불우가
지난 왕국의 역사였다는 걸
-‘오래 병에 정들다 보니’ 전문
따스한 감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은 분명 ‘뮤즈’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다. 우연히 찾아온 것인지, 회귀와 귀환의 법칙(주문)이 따로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그에게 영감과 재능을 불어넣는 예술의 여신이 틀림없이 존재하리라. 그의 뜨거운 내면, 민완의 탐사력이 무척이나 부럽다. 뮤즈는 시인에게 ‘예기치 않은 한 손님’이다.
그때 예기치 않은 한 손님이 찾아왔다
내가 쓴 문장 속 식구들이 서로의 목소릴 내며
문 닫고
등 기대어 돌아앉아 있을 때
그는 외계에서 온 것도
문을 따고 들어온 도둑도 아니었는데도
식구들은 몰랐다
공기인 듯
물줄기인 듯
식구들 틈으로 스며들어
모를 소리를 풀어내고 뚫어내고 녹여내는 그의 발걸음을
그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은 더더욱
거짓말같이 한방 가득
맑은 기운이 퍼졌다
오래 후에 그들은 눈치챌 것이다
가는 길은 분명 하나가 아니었지만
그 때문에 모르는 사이에 얼려 가는 길이
하나 열렸다는 걸
때로 한 말은 죽어 다른 말을 당기는 법이다
무심코 넝쿨을 끌어당겼을 때
흙 속 여기저기서 딸려 나오는 고구마처럼
-‘시’ 전문
경북 안강이 고향인 손진은 시인은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199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경주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시집으로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가 있다. 시와경계문학상, 대구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끝으로 손진은 시인이 추천하는 시 ‘느티나무 화초장’을 소개한다. 65년 동안 경주 손씨 안락당파 종부의 안방에 있는 낡은 화초장에 대한 송가(頌歌)다.
이것은 인자한 어른에 대한 이야기다
열여덟 새댁이 상주에서 모시고 온 연둣빛 하늘이다
예순다섯 해 경주 손씨 안락당파 종부의 안방
바람과 되약볕 빗줄기와 눈발 송글송글 들이던 이마로
기제사 까까머리 의젓한 절 귀애하던 분이시다
욱실욱실한 손들 살뜰한 마음과 꿈
텃밭 바랭이 수염과 쇠비름을 주름에 다져 넣으시던 분이시다
농지기 사성보 저고리 의관들
골목과 수염과 한낮의 태양을 빳빳이 풀 먹여 개키시던 분이시다
꼿꼿이 앉아
다듬이 책 읽는 소리 축음기 소리
적막해진 집안 묵힌 잡초와 떠도는 구름
안쓰러이 안으시던 어른이시다
살짝 들린 어깨선,
앞가슴에 휘늘어진 난蘭 가지 더운 이슬 위에서
여치들 그네를 타고 달은 부풀고
제 살 비벼 여린 빛으로 울음 틔우는 매미
수선화문의 광두정 곰보 얽듯 깔리고
제비초리 경첩 쌍버선문에
동백기름 참빗질을 하시는 분…… 헌데
저분은 누구신가
고층 장손집 네거리 나무 그늘에서
쬐그만 숨 몰래 내쉬는 저분은
그 집 주인 부부의 마음을, 머릿속 생각까지 눈치챈 듯한 표정으로
차라리 새파라니 한 그루 나무였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시는 저! 저!
저분은 누구시란 말인가
기분이 상하셨나 세월 탓인가
아무튼
이것은 모시기가 참 난감해진 어른에 대한 이야기다
-시 ‘느티나무 화초장’ 전문
원문 보기 [詩集 신간] 손진은의 《그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른다》 : 월간조선 (chosun.com)
*출처 : 푸른 시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