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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집권(1967~) | |||
일시 |
행한 일 |
주관 |
비고 |
1967 |
이순신 동상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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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시 자산공원 |
1968. 4. 27 |
광화문 충무공 이순신 동상 설립 |
정부산하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 서울신문사의 공동주관 |
박정희 대통령 지시 |
1969 |
충무사 중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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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 |
1973 |
충무공 이순신 석상 세움 충무공 이순신 석상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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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삼천포시 노산공원 4월 중앙청 |
1974 |
충무공 이순신상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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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목포시 |
1975 |
한산도 제승당 성역화 사업 착수 이충무공 군사훈련 유적비 세움 이충무공 사천해전 승첩비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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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한산도(1966~1974) 7월 진양군 수곡면 원계리 12월 사천군 선진리 |
1979. 10 |
한산대첩 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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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
박정희 대통령 집권 종료 후(1979~) | |||
1979. 12 |
거북선 복원하여 진수 |
해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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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4 |
충무사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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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군 내발리 |
1982 |
이충무공 모부인 유적비 당항포대첩 기념탑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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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여천시 웅천동 8월 고성군 당항리 |
1987 |
송충당, 충무공 기념관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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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고성군 당항리 |
1988 |
오충사 사적비 세움 신성포 전적비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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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해남 오충사 순천시 신성리 |
1989 |
충무공 해전 유물 발굴 추진 지시 충무공 해전 유물 발굴단 창설 |
노태우 대통령 |
4월 7일 8월 7일 |
1990. 4 |
이충무공 유적 기념비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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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고금도 |
1990 |
우수영국민관광단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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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대첩 기념 공원 |
1991. |
이충무공 사모비 세움 명량대첩 기념비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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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여천시 웅천동 해남 |
1994. 8 |
임진왜란 당시 사용한 대형 총통을 복원하여 발사시험 |
해군사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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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6 |
옥포대첩기념공원 |
거제시? |
거제시 아주동 |
1996 |
충무공 해전 유물발굴단 해체 해군 충무공 수련원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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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1일 12월 1일 진해 |
1997. 5 |
사천해전 상황도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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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사천 선진리 |
1998. 12 |
순국 400주년 계기 ‘충무공 유언비’를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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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관음포 전몰 유허지 |
1999. 9 |
노량해전 상황도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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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관음포 전몰 유허지 |
2005 |
통영 충무공 이순신 동상 |
충무공 이순신 동상 건립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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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1 |
충무공 리더십 센터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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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수련원을 모체로 함 |
2008. 10. 11 |
진도 명량의 충무공 이순신 동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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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년부터 사업 실시. 30미터, 국내 최대 |
사천 용해면 선진리에도 충무공 동상이 있습니다(건립 년도 미상)
박정희 대통령의 시기를 1967년에서 1979년까지 12년간으로 보았을 때 10건에 해당합니다. 거의 1년에 한 번씩 이루어지는 꼴이죠.
다른 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단순 무식하게 주먹구구식으로 추산하면,
조선왕조시기 : 35건 (300여년간) -> 1년당 0.1건
일제강점기~박정희 집권 전 : 34건(50여년간) -> 1년당 0.6건
박정희 집권 간 : 10건(12년간) -> 1년당 0.8건
현재까지 : 22건(발굴단 해체는 제외) (30여년간) -> 1년당 0.7건
조선왕조시대의 경우는 제쳐두고서라도, 일제강점기나 박정희 시기, 그리고 그 이후의 빈도수는 그다지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습니다. 물론 어디까지 저 '추산'의 결과가 빈약한 저의 조사로 이뤄진 것이니만큼 정확하지 않은 데이터이고, 정확하지 않은 데이터를 통해 나온 정확하지 않은 평균입니다. 저야말로 "이겄시 진실입니톼!"라고 강변할 생각은 없습니다-_-
그러나 따로 정리된 자료를 구하지 못한 이상, 이러한 부실한 데이터를 토대로 결론을 내려보겠습니다(어쩔 수 없)
분명히 박정희 대통령 집권간에는 타 시대보다 약간 높은 비율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해하고 계신 분들의 말처럼 유별나게 높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시기가 대한민국이 한창 이런저런 이유로 경제가 급성장하고 있는 시기인 것을 상기해 보세요. 일제강점기와 해방직후 전세계 최빈국을 랭킹한 대한민국에서, 그리고 한국전쟁 와중에서도 충무공에 대한 추모 사업은 계속 되었습니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 한민족이 단체로 미쳐서 충무공을 잊거나 멸망하지 않는 이상 계속 될 겁니다.
모르는 사람이나 외국인들이 제가 지금까지 정리한 도표를 보면서 마치 누군가가 주기적으로 충무공 기념 사업을 주기적으로 하라고 따로 지시나 지침을 주지 않았는가 의심할까봐 오히려 걱정입니다(........)
- 진단학회가 설마 반공 이데올로기, 더 나아가서 이어질 독재 체제를 옹호하기 위해 기념 논문집을 냈을까요?
- 김구 선생이 할 일이 없어 친필로 시비를 세웠을까요?
- 역대 임금이 심심해서 충무공을 찬양하고 모든 군사-행정 정책의 비교 대상으로 삼아 신하들을 갈궜을까요?-_-
- 이순신을 찬양한 선비들이 쓴 시는 이충무공전서에 잔뜩 실려 있음...이거 또 왕이 시켜서 썼다고 주장 할 사람들 있겠지
- 사포 김만중, 우암 송시열...이 선생들 당파가 어디인지 아시죠?
- 원균의 말만 듣고 이순신을 본의 아니게 욕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한 이덕형의 당파는?(실록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음)
- 선조 사후 선조실록 작성의 주관자인 농담정승 이항복 대감의 당파는?
- 평소에 흰옷을 입고, 알아서 제사를 모신 남해안 백성들은 근대 민족주의 국가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영웅을 존경해서 입었을까요?
- 심지어 북한에도 충무공 훈장이 있습니다(............)
결론 : 충무공은 이미 한민족 내부에 자리잡은 영웅이었다. 오히려 현대에 와서 과소평가 되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태여 영웅화, 성웅화를 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본좌다-_-
만들어진 영웅 이순신[1/3]
만들어진 영웅 이순신[2/3]
[참고자료]
<<이순신 파워인맥>> : 도표의 상당부분은 <<이순신 파워인맥>>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현충사 사이트
충무공 이순신 사이트
덕수 이씨 종친회
네이버 백과사전
PS : 이런 글을 한 포스팅에 몰으려고 했다니, 지금 생각해 보니 미친짓(...........)
PS 1 : 예전부터 정리해 보고 싶었는데 <<이순신 파워인맥>>에 도표가 잘 정리되어 있어 베이스는 그것으로 해서 이곳저곳에서 참조해 증강시켰습니다^^
이제 박정희에 의해 이순신은 신격화 되었다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그리고 원균을 옹호하는 소리도 그만 나왔으면 좋겠군요.
충무공이 전사하자 울부짖으면서 통곡한 백성과 장졸들.
공의 운구가 아산으로 행하는 길마다 모여서 울면서 "공이 우리를 살렸는데 이제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오"라고 운구 행렬을 막은 백성들.
이런 조상들 욕먹이는 소리입니다. 이분들은 바보라서 충무공을 존경했나요?
현종인가...아무튼 그쯤가면 충무공의 기일에 맞춰 알아서 흰옷을 입은 백성들이 나옵니다.
원균?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칠천량 해전 이후) 원균은 하삼도 백성들, 특히 남해안 백성들에게 원수 중의 원수로 기억되었습니다.
참으로 다행인게 임진왜란이 조선시대에 일어나서 다행입니다. 그 시대의 기록문화에 의해 우리는 순전히 상상력이나 현대인의 짐작과 상식으로 구성된 잘못된 주장들을 논파할 수 있으니까요-_-
첫댓글 역시 이순신 장군님은 히어로 오브 히어로 이군요 ^^
히어로 오브 히어로라니요...; 갓오브 워 입니다...ㅋ
우리역사의 자랑이라는!!!
역대 임금이 심심해서 충무공을 찬양하고 모든 군사-행정 정책의 비교 대상으로 삼아 신하들을 갈궜을까요 == 정조때 박문수님이 당한걸 보면...돈좀 주세요~ 하니까 바로 아놔 님하가 알아서 해야지 그런걸로! 하고 처벌하라고까지 했으니...
문수형은 좀 심하게 갈군 감이-_-;;;;
아 이건 정말 문수공이 심히 불쌍한 대목이네요....ㅜㅜ
덕분에 몰랐던 내용들을 많이 알게되었네요. 저도 박정희의 과대포장론을 조금이나마 의심했었는데, 제 생각이 틀렸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