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아침을 맞는다는 건 너무 좋은데 순간 기쁠 것도 없다는 김새는 생각이 서너 번 왔다 갔다 하면서 이불킼을 날렸어요. 살갗 온도계가 영하권이란 느낌이 들었고 분말 미역국 컵 밥을 떼고 햇반을 익히면서 막연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아침입니다. 6:05분에 일어난 걸 보니 어제 일찍 잤을 것입니다. 관심을 어디에 두느냐가 우리의 사고와 행동 패턴을 결정하는 것 같습니다. 관심이란 것이 어떤 것에 마음이 끌려 신경을 쓰거나 주의를 기울이는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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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에 관심을 갖게 되면 다른 것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 하게 되지요. 물론 관심의 결과로 형성된 삶의 내용이 미래를 결정한다고 봅니다. 예닐곱 살 무렵엔 수렵과 만화 그리기에 관심이 많았어요. ‘15소년 표류기’같은 유를 좋아했고 손오공-차돌바위-보물섬-수호지-삼국지-도깨비 감투 등등의 만화 제목이 아직까지 생생합니다. 어느 것도 현실화 시킬 수가 없었던 나는 만화책 주인공들을 노트에 베끼면서 내 포트폴리오를 만들어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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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까지 냇가에서 민물고기를 수렵하며 보냈고 고 삐리 시작과 동시에 껄렁해지기 시작하더니 당구, 패션, 미술, 짤짤이, 연애 등등이 관심사였을 것입니다. 일도 녀석을 통해 서클의 마력에 빨려 들어가면서 질풍노도기를 천방지축 살았습니다. 고1 때(17세) 광주 항쟁을 온 몸으로 겪었고 18살 무렵(고2)에는 내장산에 들어가 철 장사(민박집)를 하면서 적자생존 법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19살(고3)엔 기어코 변산 해수욕장까지 내몰리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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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나는 고2 때부터 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어린 것이 그 험한 곳에서 살아남았다는 것 아닙니까? 아인 당구장과 올림픽 당구장을 거점으로 2년 동안 여자-파벌 싸움-소년 가장-대학 생활까지 징글징글한 질풍노도기를 보내야 했어요, 21살에 군 입대를 했고 논산-종행교-수방사-3군단을 거치면서 악의 축으로서 모든 커리큘럼을 이수했어요. 촌년 이선희가 "J에게'로 히트할 때 잠실 CK에 면회를 와준 여친이 있었고 죽을 고비를 3번 쯤 넘긴 후 23살 늦은 겨울에 전역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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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실미도 684대원들의 억울한 죽음을 '꼬꼬무'를 통해 새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시대까지도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하면 개죽음을 당한 사건이 비일비재 했으니 내 비록 영창은 갔지만 군 33개월 동안 살아남은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만기 전역 후 대우자동차(주)에 입사를 했고 질풍노도의 절정을 쳤을 것입니다. 이때 만난 친구가 임 규탁 장로입니다. 아마도 정체성에 대한 갈등을 처음으로 하지 않았나 싶네요. 여친이, 나 아닌 다른 남자(KBS)에게 시집을 간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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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혼란스러웠어요. 뭐라도 붙잡고 싶었어요. 나이 25살이면 지금 우리 예주랑 같은 나이에요. 성석 교회에 나갔어요. 천국이 있으면 이곳이 천국일 거예요. 동생 진호가 열심이었으니 딴 생각을 안 했어요. 내가 의심이 많아서 남을 잘 믿지 않는데 이단인지 아닌지 고민하지 않고 열심을 냈다는 뜻이에요. 프리 한 생활을 접겠다는 의지로 대우자동차를 그만 두었어요, 도피처가 필요했을 까요? 무조건 복학을 했었어야 해요. 조금은 억울해요. 누구에게 진로를 물어볼 사람이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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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결혼 작전을 시도했고 25살 7.17에 만나 26살 5.25에 결혼에 골인했어요. 1월에 약혼식을 하고 같이 살았으니 6개월 만에 모든 것을 해치운 셈입니다. 결혼을 마치고 한 달 후에 광주 기아자동차 프레임 공장으로 귀촌을 하게 됩니다. 일은 너무 힘들었어도 아내와의 결혼 생활 20년 중에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합니다. 가장의 위치를 확보하는 길은 안정된 직장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했지만 사회는 역시 녹록지 않았어요. 살면서 가장 절실했던 때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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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천 교회(일도 삼촌)를 나갔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큐 티, 티-칭을 했어요. 직장(기아자동차)에서는 깡패를 했고 주일은 예배를 드리면서 처음으로 깡패보다는 티-칭이 좋았어요. 내 과거를 모르는 청년들에게 한국교회의 무당 신학을 실컷 씹으면서 p.b.s에 미쳐 살았어요. 산달이 가까워지자 아내를 왕십리로 보냈는데 어느 날 전화가 걸려왔어요, 아내가 오늘 출산을 한다는 겁니다. 그날 전화를 받고 밤차를 탔으니 오늘(11.29) 이 맘 때쯤 에스더와 처음으로 만났을 것입니다. 두근 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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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설렘은 정확히 표현할 수가 없네요. 착잡하기도 하고 뭔가 무거운 책임감 같은 것이 나를 엄습했을 것입니다. 밤 차를 타고 올라가면서 혼자 "에스더 아빠!"를 몇 번 불러보았는데 내가 생각해도 낯설고 어색했어요. 강동성심병원에서 에스더를 낳고 너무 기뻐서 엉엉 울었어요. "강-남-입-성 내가 제일 잘나가! (제 제 제일 잘 나가) 2024.11.29.FRI. 사랑하는 아빠가" 출산 내내 일주일 정도 병원에서 각시랑 껌딱지가 되어 살았어요, 어쩌면 옆 사람들이 흉을 보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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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을 하자마자 아내가 도저히 광주 생활은 못하겠다는 겁니다. 어쩌라고? 귀농 6개월 만에 급히 방을 빼서 인 서울을 했습니다. 작년에 신안동 그 집을 찾아보려고 두 번이나 가보았는데 도시 정비를 해 버려서 찾을 수가 없었어요. 만약 내가 그때 아내 말을 듣지 않았다면 다른 건 몰라도 이혼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그 시절이 그리운 건 왜일까요?
I'm thinking of trying to memorize 10 words a day with only 10 sentences for a year.
2024.11.29.fri.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