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한 아이러니
- 1차대전의 경우
늦가을이다. 이맘때면 생각나는 풍경이 있다. 햇살이 희미한 잿빛하늘에 길가의 나무들은 메마른 가지를 드러내고 습기없이 갈색이 된 낙엽들은 힘없이 바람에 날려 아스팔트나 보도위를 뒹굴때 누군가가 버버리 코트자락 날리며 걸어가면 그 멋스러움에 시선이 따라가던 시절이 오래전에 있었다. 버버리코트는 가을패션의 절정이었다. 영화속에서 배우들도 폼나게 입었다.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나 애수(Waterloo Bridge)의 로버트 테일러가 생각난다. 그런데 우리가 버버리코트라고 부르는 이 옷의 원래 명칭은 그리 낭만적이지도 못하고 처음 만들어져 사용되었던 때를 생각하면 끔찍하다. 정식명칭은 트렌치코트(Trench Coat), 트렌치는 말 그대로 참호, 도랑이라는 의미로서 이 옷은 전쟁중에 군에 납품된 전투복의 일종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우리처럼 아시아인들이 크게 관심을 갖지 못한 전쟁이었다. 전쟁기간인 1914년에서 1918년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국가들이 유럽의 주연급 전쟁당사국들과 일본의 식민지상태였기 때문에 정신없이 착취당하는 처지여서 그 당시에 유럽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기가 어려웠다. 아시아국가중 일본은 영일동맹을 핑계로 삼국협상(영국, 프랑스, 러시아)쪽에 살짝 발 담궜다 하지만 전투는 하는둥 마는둥하고 종전후에 독일이 갖고 있던 중국의 조차지나 태평양지역의 도서들을 꿀꺽하고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정도로, ‘흘린 피’에 비해서 큰 이득을 본 나라다.
한편 ‘1차대전’하면 쉽게 생각나는 명사가 ‘참호전’이다. 독일이 슐리펜 계획에 의거해서 벨기에를 돌아 프랑스로 밀고 들어가다 마른전투에서 연합군의 반격으로 주춤하면서 그때까지 점령한 지역의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참호를 파기 시작한 게 참호전의 시작이다.
1차 대전중에 판 참호의 길이가 북해에서 스위스까지 대충 2700km가 된다고 한다. 경부고속도로의 길이가 500km정도이니 얼마나 긴지 짐작이 된다. 독일에서는 참호파는 기계도 만들어서 전장에 투입했다고 한다. 참호앞에는 철조망을 낮게 여러겹으로 깔아놔서 사람이 함부로 진입하기가 힘들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공격하는 쪽에서 포를 먼저 쏜 후 공격개시를 알리는 호각소리에 맞춰 병사들이 대검을 총에 꽂고 돌격한다. 참호앞까지 뛰어오던 병사들은 철조망때문에 멈출 수 밖에 없다. 이때 전쟁을 지배한 무자비한 살인기계 ‘맥심기관총’에서 총탄세례가 퍼부어진다. 전투라기보다는 학살에 가까웠다. 단 하루의 전투에서도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들판에 시체가 늘려있다보니 쥐들이 살판났다. 시체를 많이 뜯어먹고 살이 쪄서 크기가 고양이보다 더했다. 사람고기에 맛을 들여 살아있는 병사들한테도 대드는 바람에 휴식도 제대로 취하기 힘들었다. 전투가 없어도 비가 오면 배수가 되지 않고 참호에 물이 고여 생긴 습한 웅덩이의 세균에 발이 썩고 추우면 동상에 걸려서 참호족(Trench Foot)이라는 전쟁질병이 생겼다. 말그대로 생지옥이었다. 트렌치코트는 장기간 이어지는 참호전에서 비와 추위로부터 병사들를 보호하기 위해 영국 디자이너 토머스 버버리(Thomas urberry)가 개발해서 공급했는데 지금처럼 가을의 낭만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전장에서 생존하는데 약간의 도움이 되는 정도였을 것이다.
1차대전과 연관해서 엉뚱하게 발명되거나 대중화된 물건들이 또 있다.
초콜릿은 원래 남미의 원주민들이 카카오빈에서 추출해서 약용으로 쓰던 쓴 음료이다. 스페인의 이사벨 1세가 이슬람 왕국들을 멸망시키고 스페인을 통일하는 레콩키스타(Reconquista)를 완성시킨 후 할 일이 없어진 깡패무사집단, 콩키스타도르(Conquistador)들이 돈 벌려고 남미에 갔다가 그 음료를 알게 되어 유럽에 들여왔다. 워낙 먼 곳에서 원료를 가져오다 보니 비싸서 가난한 사람들은 먹기 힘들었다. 하지만 미국이 손대면 달라진다. 미국은 초콜릿을 전쟁보급품으로 공장에서 대량생산해서 군인들에게 보급했다. 이후로 민간인들에게도 싸게 판매되었다. 한국전쟁때 미군들이 헐벚은 우리나라 아이들에게 초콜릿을 던져줘 알려진 과정과 비숫하다고 보면 된다.
1차대전은 그 이전의 다른 전쟁과 달리 엄청난 사상자가 나왔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기관총의 살상력이 무서웠다. 대략 1천만명의 군인들이 죽고 부상자는 2천만명이 훨씬 넘었다고 한다. 부상병들을 치료하는데 많은 의료용품들이 필요했겠지만 그중에서도 외과적처치에는 항상 솜이 필요해 미국조차도 그 수요량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미국 킴벌리 클락(Kimberly Clark)사는 소량의 솜과 나무의 펄프 섬유소를 이용하여 수분 흡수력이 뛰어난 셀루코튼이라는 재료를 개발해서 환자치료용으로 군에 납품했다. 당연히 엄청난 돈을 벌었다. 전쟁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았지만 1918년 11월 11일 독일제국이 항복함으로써 1차대전은 끝났다. 킴벌리사는 창고에 셀루코튼을 가득 쌓아놓은 상태였으므로 항복한 독일이 원망스러웠다. 남아있는 셀루코튼을 손해보지 않고 소진할 것을 고민하던중 야전병원에서 간호사들이 셀루코튼을 생리대로 활용하는 것에 착안해 1회용 생리대로 변형시켜 상품화시켰는데 이것이 생리대 하면 킴벌리를 연상할 정도로 대박쳤다. 참고로 1회용 생리대가 대중화된 계기가 어떻든간에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여성들이 생리로 인해 겪는 고통과 불편을 덜어준 일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전쟁에서는 지는 쪽이 일방적으로 거의 모든 것을 뺏기는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급박하게 전개되는 전황속에서 이기는데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신속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렇다보니 전투기나 탱크같은 무기말고 우리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들중 전쟁과 관련해서 발명되거나 일반상품화된 물건들이 있다. 이것들이 지금은 우리 일상에서 편리용품이거나,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참혹한 전쟁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첫댓글 인터넷부터가 냉전의 산물이죠.
1,2차 대전은 특히 국가 총력전들이었기 때문에 어느 나라건 리소스 몰빵이었던지라.. 전후에도 예상치 못한 산물을 많이 만들어냈죠. 어떤 편리한 기술이나 물건이 결과물로 나올지라도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란건 누구나 공감할꺼라고 생각합니다.
뭐 일단 현대의 남자 옷들은 거의 대부분의 원형이 군복이었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