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젯밤 '세마역' 부근에서 군대 동기를 만났다.
'신병 훈련소'부터 친하게 지냈던 동기였다.
그는 키가 컸고 떡대가 산만 했다.
나는 그의 옆에 서면 고목에 달라붙은 한 마리의 매미에 불과했다.
인상도 약간 험상궂은 친구였다.
그가 우리들 옆에 서 있기만 해도 어느 누구도 말을 걸려하지 않았다.
백이면 백, 모두가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지나갔다.
그의 눈에선 광채도 났지만 때때로 살기도 느껴졌다.
지금은 부드러워졌지만 젊었을 땐 안광이 지면을 철할 정도였다.
청년기에 그는 '격투기'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수원, 안양, 오산, 화성 지역에선 그의 이름만 대도 먹어줄 정도였다.
힘 깨나 쓰는 사내였고 거칠 게 없이 호방했다.
85년 8월 7일.
나는 '해병대'에 입대했다.
'신병 훈련소'에서 그를 처음으로 만났고, 그 만남은 서로에게 운명적인 인연으로 이어졌다.
'운명'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는 나보다 머리가 하나 더 있었다.
키가 컸다.
떡 벌어진 어깨도 나의 한 배 반 정도나 됐다.
한마디로 헐크 같았고 우람했다.
'격투기' 훈련으로 다져진 몸이라 그에게 해병대 '신병 훈련소'는 그야말로 껌이었다.
나도 6개월 간 집중적으로 몸을 만든 뒤에 입대했던 터라 '신병 훈련소'는 식은죽 먹기였다.
우리는 '키다리'와 '땅따리'였지만 서로 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싸움으로는 내가 그와 대적할 수 없었다.
백전백패일 게 뻔했다.
하지만 투철한 군인정신과 각자의 확고한 스피릿은 서로가 흡사했고 언제나 견줄 만했다.
한마디로 '주이불비'였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며 지냈다.
신병 훈련소를 수료할 무렵, 특수부대에 2차로 지원해서 칼 같은 군대생활을 하자며 서로 뜨거운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큰 키 때문에 자신의 소망을 이룰 수 없었다.
곧바로 '헌병대'로 끌려갔다.
신병들의 입장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해병대 식 '차출'이었다.
'특수부대'와는 거리가 먼 보직이었다.
'헌병대'는 군대 내 '보안관' 역할이었다.
헌병대로 끌려갈 때, 똥 씹은 듯 울상인 그의 표정을 보았다.
안타까움과 속상함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그때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는 '헌병대'로 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다고 했지만 군대의 준엄한 인사명령을 대놓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항명은 곧바로 영창일 뿐이었다.
그는 무지막지하고 혹독한 훈련을 받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해병대에 지원했노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했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모든 신병들이 편안한 보직을 희망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은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죽기를 각오하고 끝까지 지원하는 놈들도 있었다.
그런 야무진 괴짜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나도 그런 부류의 인간들 중 하나였지만 그 친구도 그랬다.
그는 선천적으로 강골이었고 '특전용사'의 기질이 온 몸에 흐르고 있었다.
그는 타고난 해병이었다.
그러나 마음과 영혼은 너무너무 순수했고 투명했다.
눈물도 많았고 정도 깊었다.
한마디로 '단순무식'이었다.
그래서 한번 신뢰하면 죽음의 계곡까지 흔쾌하게 같이 가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나와 DNA가 같았다.
비슷했고 서로의 가치관이 흡사했으니까 40여 년을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있을 터였다.
군 복무 3년 내내 그는 나를 부러워 했다.
각종 고강도 훈련으로 날이 새고 날이 졌다.
뛰고 구를 땐 죽을 맛이었고 때때로 입에서 개거품이 풀풀거렸다.
무지 힘겹고 고달팠다.
그래도 그 길이 '장부의 길'이라며 차해병은 나에게 늘 힘찬 박수를 보내주곤 했었다.
서로가 건강하게 전역했다.
그는 헌병대에서 만기 전역한 것에 대해 늘 아쉬움을 토로했다.
'헌병대'가 '훈련부대'는 아니었으니까.
전역한 뒤에 일을 하면서 돈을 조금 모으자 곧바로 '스카이 다이빙 스쿨'에 입교했다.
각자의 회비로 헬기를 렌트하여 주말에 점프 훈련을 하는 외골수들의 집합체였다.
모두가 미친 놈들이었다.
그 친구도 주 중엔 일하고 주말엔 '스카이 다이빙'에 미쳐 지냈다.
결혼 후 가정을 꾸린 뒤에도, 사업이 힘들어져 아들 분유값이 없을 때에도, 그는 점프를 거르지 않았다.
놀라운 집념이었다.
어쩌면 한풀이 일 수도 있었다.
'스카이 다이빙' 뿐만 아니라 '스쿠바 다이빙', '프리 다이빙'까지 섭렵했다.
심심풀이 취미활동 수준이 아니었다.
'점프 마스터'와 '스쿠바 인스트럭터'까지 남다른 경지로 자신을 끌어올렸다.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반열이었다.
뭔가를 시작했으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다.
이것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격투기 분야의 초창기 멤버로서 '불혹'까지 현역으로 링에 올랐고 늘 15-20년 어린 놈들과 맞짱을 떴다.
한마디로 차해병은 뜨거운 심장이었다.
강철 같은 체력과 정신력을 갖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얼마 전에 '풍'을 맞았다.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던 중국 내 화장품 사업이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의 심신도 같이 무너져 내렸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처참한 형극이었다.
그젯밤, '세마역'에서 차해병을 만났다.
여전히 체구는 크고 우람했지만 걷는 게 약간 불편했다.
말도 어눌했다.
대화를 하는데 가끔씩 침을 질질 흘렸다.
사업의 실패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가 '풍'의 원인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나와 김해병은 막걸리를 마셨지만 차해병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점프'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몇 번 그런 얘기를 되풀이 했다.
그의 눈빛은 더 많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간절했다.
더 다양한 도전과 모험을 위해 '이순'이 지났어도 자신의 심장이 박동하는 한 미지의 세계로 계속 전진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현재의 망가진 몸으론 어림 없었다.
바로 그 점이 되게 슬펐고 아렸다.
내가 친구에게 '탠덤점프'라도 해보는 게 어떠냐고 했다.
그는 단호하게 내 말을 잘랐다.
"해병대가 쪽팔리게, 무슨 '탠덤'이냐"
나와 김해병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열 수 없었다.
역시 차해병은 차해병 다웠다.
그는 분명한 자신만의 인생 기준을 갖고 있었다.
(참고 / 탠덤점프 : 초보자와 고수가 함께 강하하는 동반 점프, 하네스가 연결되어 있어 한 몸처럼 점프할 수 있음)
그의 간절한 눈빛을 잘 알고 있었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그의 냉혹한 육신의 현실과 애틋한 소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쪽팔리게 '탠덤'은 하지 않겠다고 말하던 그때, 그의 땡그런 눈동자에 어느새 회한의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음을 보았다.
그는 밥도 절반을 남겼다.
양이 많이 줄었다고 했다.
역 앞에서 우리는 서로를 뜨겁게 포옹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전철에 탑승했고, 차해병은 집으로 돌아갔다.
헤어지면서 차해병이 우리 두 사람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동기야. 쪽팔리게 살지는 말자"
이 한 마디가 우리 세 사람의 골수에 흐르는 유전인자였다.
내년이면 입대 40주년이다.
전철 안에서 김해병이 그랬다.
직장에서 '공장장'이란 막중한 직책을 갖고 있지만 금년 12월 말에 사직서를 쓰겠다고 했다.
2025년도는 우리들 입대 40주년이다.
그 해를 기념하기 위하여 대한민국 100군데 섬 탐방을 포함해 산과 강 그리고 대표적인 트레일을 따라 총 15,000 킬로 국토 대장정에 나서겠다고 했다.
혼자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떠나겠노라고 했다.
1년이 걸릴지, 그 이상이 걸릴지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 그런 사내가 바로 김해병이지"
김해병의 그 스피릿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30년 전에도 각각 입대 30주년, 20주년,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혼자서 먼 길을 나섰던 친구였으니까.
그는 매 10년마다 그렇게 한번씩 직장을 옮겼다.
자신만의 확고한 프로젝트 실행 때문이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바를까.
무엇을 먹고 마실까.
그런 소소한 일상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다 죽을까에 대해 더 숙고하며 고민하는 사내였다.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외롭게 비탈길을 걸어가는 한 마리의 산양이었다.
표시 나지 않게 봉사와 나눔에도 진력하는 멋진 남자였다.
김해병과 헤어졌다.
나도 전철역에서 내렸다.
집까지 어두운 밤거리를 터벅터벅 걸어갔다.
딱 한번 만이라도, 가장 높은 고도에서 인생 '최후의 점프'를 해보고 싶다는 차해병의 말을 곱씹으며 걸었다.
마음이 저릿하게 아렸다.
헐크 같았고, 차돌 같았던 친구가 '풍'을 맞았다.
반듯하게 걷지도, 명확하게 발음을 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의 아픔과 병마에 반비례하여 애틋하고 갈급한 그의 소망은 더욱 순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바로 그 대목이 나의 심장과 폐부를 깊숙하게 찌르고 있었다.
그를 생각하며 터벅터벅 걷는데 나도 모르게 삐질삐질 눈물이 흘렀다.
"아아, 씨바...안타깝고 애통한 운명이여. 차해병. 힘내라. 사랑한다. 우리가 언제 떠날 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우리답게 살다가 우리답게 죽자"
그가 건강이 호전되어 광대하고 푸른 창공에서, 한 마리의 독수리 같이 마지막 '스카이 다이빙'을 멋드러지게 펼쳤으면 좋겠다.
나의 기도제목이 하나 더 늘었다.
지구 한 바퀴가 4만 킬로인데, 내년에 김해병이 1만5천 킬로 대장정을 혼자서 시작하기로 했다.
그는 지난 숱한 세월 동안 매 10년마다 자신만의 엄청난 프로젝트를 혼자서 완수했던 것처럼 내년에도 굳세게 그러나 조용하고 묵묵하게 극한의 도전을 반드시 완수해 낼 것이다.
스무살 때부터 그랬던 친구다.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내 가슴이 뛴다.
환갑이 지난 나이에, 김해병의 가슴 뜨거운 도전과 그만의 옹골진 스토리텔링은 내년에 이 게시판에 다시 게재할 날이 있을 것이다.
"둘 다 환절기에 건강 주의하시길.....사랑한다. 동기야"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