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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안을 추격하였더라
삿 7:19-25
19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백 명이 이경 초에 진영 근처에 이른즉 바로 파수꾼들을 교대한 때라 그들이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
20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이르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
21 각기 제자리에 서서 그 진영을 에워싸매 그 온 진영의 군사들이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22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23 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온 므낫세에서부터 부름을 받고 미디안을 추격하였더라
24 기드온이 사자들을 보내서 에브라임 온 산지로 두루 다니게 하여 이르기를 내려와서 미디안을 치고 그들을 앞질러 벧 바라와 요단 강에 이르는 수로를 점령하라 하매 이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다 모여 벧 바라와 요단 강에 이르는 수로를 점령하고
25 또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오렙은 오렙 바위에서 죽이고 스엡은 스엡 포도주 틀에서 죽이고 미디안을 추격하였고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요단 강 건너편에서 기드온에게 가져왔더라
삿 7:19-25 / 기드온은 한밤중에 자기에게 딸린 민병대 100명을 거느리고 미디안군 진지 가까이로 다가갔다. 미디안군이 막 보초를 교대하는 시간이었다. 기드온 부대는 나팔을 불고 손에 들고 있던 항아리를 깨뜨렸다. 20) 기드온 부대가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 나머지 두 부대도 나팔을 불고 손에 들고 있던 항아리를 모두 깨뜨렸다. 곧 왼손에는 횃불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나팔을 불며 `여호와를 위하여, 기드온을 위하여, 자, 싸우러 나가자' 하고 외쳤다. 21-22) 이스라엘 민병대는 각자 자기에게 맡겨진 위치에 서서 적군의 진지 외곽을 에워쌌다. 이스라엘 민병대 300명은 일제히 나팔을 불었다. 그때 여호와께서 미디안 연합군 진영에 있던 군인들을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저희끼리 서로 칼로 찌르기도 하고 또 아우성 치며 도망 가기도 하였다. 결국 미디안 연합군은 스레라 쪽으로 도주해서 벧싯다에 이르고 답밧 쪽으로 도주해서 아벨므홀라와 시냇가에 이르렀다. 23) [미디안군을 쫓는 에브라임] 납달리 지파와 아셀 지파와 므낫세 지파에서 불려 나온 이스라엘 민병대가 미디안 연합군을 뒤쫓았다. 24) 기드온이 에브라임 산악지역으로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소식을 전하였다. `에브라임 사람들이여, 어서 내려와서 도망치는 미디안 연합군들을 앞질러 그들의 퇴각로를 차단하시오. 벧바라에 이르기까지 요단강 나루터를 모두 막으시오' 이 말을 들은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모두 나와서 벧바라에 이르기까지 요단 개울을 지켰다. 25) 그들은 그렇게 지키고 있다가 미디안군의 두 장군인 ㄱ) 오렙과 ㄴ) 스엡을 사로잡아 오렙은 오렙이라고 부르는 바위에서 죽이고, 스엡은 스엡이라고 부르는 포도주틀에서 죽였다. 그런 뒤에도 에브라임 사람들은 계속 미디안군을 추격하였다. 이들은 미디안 두 장군의 머리를 잘라서 요단 개울 다른 편에 있던 기드온에게 가져갔다. (ㄱ. `까마귀'라는 뜻이다. ㄴ. `이리'라는 뜻이다.)
기드온의 기습 작전에 말려든 미디안 연합국은 혼비백산입니다. 급기야 서로를 죽이고 도망갑니다. 기드온은 에브라임 지파에 지원요청을 하고 지원요청을 받은 에브라임 지파는 미디안 연합국의 퇴로를 차단하고 잔당을 처단합니다.
기드온의 기습과 미디안의 도주(19-22) 기드온은 용이 주도했습니다. 이경 즉 22시에서 새벽 2시 사이인 가장 피곤할 때에 또한 교대로 인해 전열이 흐트러진 때를 이용합니다. 기드온의 군대는 준비한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는 용병술을 펼칩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라고 외칩니다. 미디안 군대는 전열이 흐트러졌습니다. 또한 잠을 자던 미디안 병사들은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하기 시작합니다(21). 그리고 300명이 모두 나팔을 불어대니 소음과 혼란에 그들은 피아 구분을 전혀 하지 못하고 서로를 찌르며 도망하기 시작합니다. 기드온과 이스라엘 용사들은 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지시대로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깬 것 밖에 없습니다.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무혈입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32,000명도 적다고 두려워했는데, 하나님은 300명이면 충분하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
이스라엘의 추격과 에브라임 지파의 지원(23-25) 우리 생각에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지구 끝까지 쫓아가기 원하시는 듯합니다. ‘그렇게까지 미디안 군사들을 처단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악에 대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봅니다(살전 5:22). 그 악을 떨쳐버리기 힘들다면, 기드온이 에브라임 지파에게 지원을 요청했듯이, 우리도 사람과 기관과 전문가의 지원을 받고, 심리적, 정신적, 영적 지원을 받아 우리의 악의 본진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은 미디안을 처단하십니다. 이러한 성스런 전쟁인 헬렘 전쟁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죄와 악에 대해 가져야하는 태도입니다.
적용: 당신을 자주 넘어지게 하는 악의 모양은 무엇인가요? 오늘도 넘어지기로 작정한 당신의 어둔 그림자는 무엇인가요?
누구나 전환점에 직면합니다. 내면의 흐름에 저항하는 것이 미지의 세계를 향해 도약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도약할 때가 언제인지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익숙한 것들을 고집스럽게 붙잡고 스스로를 좌절시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영적인 전쟁에 있어서 '적당히', '이만하면 되겠지'는 없습니다. 일말의 여지를 남겨주게 된다면 대적들은 다시 당신의 영혼에 틈타 공격할 것입니다. 당신의 영혼은 연약하여서 타협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오늘의 삶 가운데 어떠한 죄악과도 타협하지 않는 거룩하고 정결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 설 교 >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삿 7:19~8:9 / 서명성목사
호사다마는 좋은 일에 탈이 많다는 뜻입니다. 좋은 일에 방해가 많이 따른다든지 좋은 일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많은 풍파를 겪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을 하는데 주도권 다툼을 할 수 있습니다. 소외된 사람들이 불만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건축을 하거나 특별한 행사를 추진하는 과정에도 어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니 기드온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미디안 연합군과 싸우는 데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큰 승리를 거둡니다. 그렇다면 그 승리를 인해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 분야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기드온은 권력을 사유화합니다. 그 과정에서 지파 간의 갈등이 드러납니다. 우리도 날마다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 전쟁을 치르면서 힘들어 하십니까?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습니까? 지속적인 승리를 거두려면 어떤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까? 본문에 언급된 전쟁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의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기드온의 전쟁입니다. 여호와의 전쟁은 여호와를 위한 전쟁이고 여호와를 높이는 전쟁입니다. 기드온의 전쟁은 기드온을 위한 전쟁이고 기드온에게 주목하게 하는 전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두 전쟁의 성격을 살펴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이 어떻게 영적 전쟁에 임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여호와의 전쟁(7:19-23)
기드온이 믿음과 신뢰를 갖고 여호와께 의존해 미디안 연합군을 치기까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기드온이 자발적으로 나서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니 그 전쟁은 여리고 성의 무너짐(수 6:20)처럼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납니다. 꿈과 해몽을 듣고 용기를 얻은 기드온과 그와 함께한 100명이 미디안 진영 근처에 이르렀을 때는 이경 초로 파수꾼을 교대할 때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밤은 4시간씩 세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이경’은 두 번째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이경 초’는 대략 10시경이 됩니다. 파수꾼을 교대할 때가 보통 경계가 제일 허술합니다. 기드온이 계획적으로 이 시점을 선택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마침 그때에 미디안 진영 근처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자 미디안 진영을 둘러싼 세 부대 모두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외칩니다. 이 외침에서 ‘의’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전치사는 ‘~을 위한’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 전치사의 이중적인 의미는 이 전쟁의 목적을 오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외치면서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외치게 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 전쟁은 하나님을 위한 전쟁에서 기드온을 위한 전쟁으로 변질되어 갑니다. 삼백 명이 할 일은 각기 제자리에 서서 그 진영을 에워싸고 시청각 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뜨려 감추었던 횃불을 흔들고, 일제히 함성을 질러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갑자기 울려 퍼진 나팔소리와 항아리 깨지는 소리에 300명의 외침이 더해지자 당황한 미디안 군사들이 일제히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칩니다. 세 동사가 당시 상황을 잘 보여 줍니다. ‘뛰다’는 특정한 목표 지점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을, ‘부르짖다’는 겁에 질려 아무렇게나 소리를 질러대는 것을 묘사합니다. ‘도망치다’는 안전한 곳을 찾아 허겁지겁 달아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한마디로 미디안 진영은 극심한 혼란에 빠집니다. 잠시 후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친구끼리’라는 표현은 ‘서로’라는 의미의 숙어입니다. 한 밤중에 갑자기 일어난 일이니 미디안 군대가 혼란에 빠질 수는 있지만 어떻게 동료끼리 서로 칼로 칠 수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여호와가 주도하시는 전쟁입니다. 메뚜기와 같이 많던 미디안 군사들 중에 살아남은 일부가 스레라의 벧 싯다와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까지 도망을 칩니다. 그 지역은 이스르엘 평지와 요단 강 사이의 지역으로 보입니다.
기드온의 전쟁(7:23-8:9)
- 요단 서부 지파들의 추격(7:23-29)
다른 사사들의 경우에는 여호와의 전쟁에서 이기면 이야기가 끝납니다. 그러나 기드온의 경우에는 아직도 할 이야기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 그동안 사용된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 것은 ‘여호와의 전쟁’이 또 다른 전쟁으로 이어짐을 암시합니다. 7:23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온 므낫세에서부터 부름을 받고 미디안을 추격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표현은 7:8에서 돌려보낸 ‘이스라엘 사람’과 동일한 단어로서 하나님께서 전쟁에 참여시키지 않은 자들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납달리, 아셀, 므낫세’는 기드온이 더 많은 군대를 모집하기 위해 불렀던 지파들이었습니다(6:35). 게다가 24절을 보면 “기드온이 사자들을 보내서 에브라임 온 산지로 두루 다니게 하여 이르기를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사자를 보내어’라는 표현도 앞장에서 많은 군대를 모집하는 문맥에서 사용된 것입니다(6:35). 이런 언급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것을 했다는 것을 뜻하며 하나님의 전쟁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기드온은 에브라임 지파에 사자를 보내 후퇴하는 미디안보다 앞서 요단강의 수로를 점령하게 합니다. ‘수로’는 나루터를 말합니다. 에브라임은 요단 나루를 잘 지켰을 뿐 아니라 미디안의 방백도 잡아 죽였습니다. 오렙(까마귀라는 의미)은 ‘오렙 바위’에서 스엡(늑대라는 의미)은 ‘스엡 포도주틀’에서, 즉 그들의 이름이 붙여진 곳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마도 그 이름들은 이들을 죽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중에 붙인 이름일 것입니다. 스엡이 죽은 곳이 포도주 틀이었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포도주 틀의 기능은 포도주를 만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처음 나타났을 때 그는 포도주 틀에서 밀을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포도주 틀은 미디안 때문에 어려웠던 이스라엘의 상황을 다시금 상기시킵니다. 포도주 틀은 상황이 역전되었음을 극적으로 보여 주는 장소가 됩니다.
- 에브라임과의 갈등(8:1-3)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은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 안에 심각한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열두 지파가 하나 되지 못한 것입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특징 중 하나는 항상 리더의 역할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나안 정복 전쟁을 주도한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 에브라임은 가나안의 중앙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이방 민족과 직접 국경과 맞대고 있지 않다 보니 주위의 이방 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덜 위협을 받았습니다. 또한 사사 시대의 중요한 성소가 있던 벧엘과 실로가 모두 에브라임 접경 지역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을 시기한 배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기드온과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다툼의 이슈는 ‘누가 전쟁의 승리에 더 많은 영예를 차지하느냐’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자신들이 전쟁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나타냅니다. 이 전쟁은 ‘여호와의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누구의 전쟁인가’로 주도권 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황은 기드온이 이미 ‘여호와께서 의도하신 전쟁’을 떠나 ‘자신을 위한 전쟁’으로 방향을 잘못 잡아가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기드온은 분노한 에브라임 지파를 향해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8:2-3)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노를 풀어줍니다. ‘하나님이 너희 손에 붙였다’라고 한 것은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춘 발언이라기보다 아직 힘이 부족한 기드온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발언으로 표현으로 봐야 합니다. 나중에 그가 요단 동편 지파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요단 동편 지파들의 거부(8:4-9)
미디안을 추격하는 300명의 용사들은 상당히 지쳐 있습니다. 여호와께 의존했을 때는 300명의 군사로 메뚜기 떼 같은 미디안 군대와 싸워도 지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간 기드온을 의존했을 때는 미디안의 두 왕을 쫓는 데도 피곤합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을 계속 추격하는 것은 과도한 군사 행동입니다. 이미 미디안과의 전쟁은 승리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미디안을 끝까지 추격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전쟁이 아닌 기드온 자신의 싸움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8:18-19를 보면 기드온은 여호와의 이름을 언급하며 자신의 복수를 정당화합니다. “너희가 만일 그들을 살렸더라면 나도 너희를 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기드온은 개인적 보복을 위해 미디안의 왕들을 추격하고 있습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기드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거나 감사를 표하지 않습니다.
기드온은 지친 병사들을 위해 가까운 곳에 있는 숙곳 사람들에게 식량을 요청하면서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하는 중이라고 설명합니다. “나를 따르는 백성이 피곤하니 청하건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8:5) 백성에게 기드온의 존재를 각인시켰던 군호와 더불어 기드온이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해 죽이는 이야기는 기드온의 변화를 보여 줍니다. 먼저 기드온이 3백 명의 군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변했습니다. 7:2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너와 함께 하는 백성(개역개정에서는 ‘너를 따르는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을 추리는 중에도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을 기드온과 함께 가는 자들이라 하십니다(7:4). 이 표현은 8:4에서 사사기 저자가 사용한 ‘그와 함께 한 자’와 비슷합니다. 이런 표현들에는 기드온과 3백 명 군사들 사이의 위계질서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숙곳 사람들과 말할 때 그와 함께하던 3백 명을 ‘나를 따르는 백성’이라 칭합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내 발에 있는 백성’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3백 명을 자기와 함께 있는 사람들, 동역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의 발에 있는 부하들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숙곳의 방백들은 기드온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숙곳은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돌아오다가 형 에서와 만나 화해한 후 정착한 장소로서(창 33:17), 장소 자체가 이스라엘이 한 조상으로부터 나온 동족임을 보여줍니다. 숙곳의 방백들이 기드온의 협조 요청을 거절한 것은 자기들이 기드온을 도왔다는 이유로 후일에 혹시라도 미디안의 두 왕에게 보복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기드온이 말합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넘겨 주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기드온이 숙곳에서 브누엘로 이동합니다. 브누엘은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씨름하다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은 곳으로(창 32:30), 숙곳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한 조상의 후손임을 드러내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하지만 브누엘 사람들도 도움 요청에 숙곳 사람들과 같은 반응을 보이자 기드온은 복수를 다짐합니다. 승리 후 돌아오는 길에 브누엘의 망대를 헐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에브라임 지파처럼 강자에게는 저자세로 대하면서,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과 같이 상대적 약자에게는 무례하게 행동합니다. 기드온이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화를 낸 것은 자신이 이룬 업적에 대해 인정받기를 기대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임을 기드온이 잊고 있습니다.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이 기드온이 미디안을 이길 것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을 때 기드온은 그들에게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이길 수 있다’고 말해주었어야 합니다.
* 하나님을 위한 전쟁에 참여하는 우리의 자세
-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참 믿음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높임 받으시기를 기뻐하는 믿음입니다. 기드온은 전쟁에 임하면서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외치도록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전쟁은 기드온을 높이는 전쟁으로 퇴색되고 맙니다. 에브라임,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도 300명이 미디안 군대를 격파할 수 있었던 비결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대신 싸우신 그 전투를 그들은 보지도, 알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영광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교만과 무지의 결과는 멸망입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의 주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기신 싸움에 동참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를 거두심으로 성도가 그 승리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과 담대하게 싸워 이겨야 합니다.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담대한 믿음과 영적 무기로 무장해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해야 합니다(엡 6:17-18).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기드온 같은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약한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는 겸손히 하나님을 잘 따르고 섬기다가, 일이 계속 잘 풀리면 하나님을 잊고 목에 힘을 줍니다. 하나님이 일관되게 당신의 자녀를 사랑으로 인도하시듯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일관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처음 사랑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동기와 과정이 중요합니다
참믿음은 동기와 과정을 중요시합니다. 전쟁의 승패를 주님이 쥐고 계시며, 어떤 강력한 세력이 공격해 올지라도 주님의 뜻이면 넉넉히 이기게 하심을 믿습니다. 기드온의 전략은 결과 면에서 보면 큰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300명으로 싸우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기에 참믿음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외치면서 자기의 이름을 외치게 함으로 은연중에 자기가 큰 역할을 한 것 같은 인상을 심었습니다. 처음에는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욕심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신앙은 참믿음을 위협합니다. 결과에 속으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 덕분이라고 고백한 뒤에 자신이 기여한 작은 부분을 덧붙일 때, 그 전체 고백이 퇴색됩니다. 그 덧붙인 말이 실제로 하고 싶었던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스스로 취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장 수고하고 헌신한 후에도 자신은 무익한 종이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 하나됨을 추구해야 합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 자신들이 모든 것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자신들 없이 전쟁을 시작한 것에 분노했습니다. 기드온에게 전쟁에서 승리한 영광이 돌아가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단 서편 북쪽 지파들이 자신들을 압제하는 미디안을 제거하기 위해 기드온의 부름에 기꺼이 응답한 것과 대조적으로 요단 동쪽 지파들은 기드온의 군사 행동에 협조하기는커녕 냉소적으로 응답했습니다. 이렇게 혈통이나 지역의 차이로 인한 갈등이나 차별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죄인들은 이기심과 두려움, 차별로 인해 늘 분열하고 다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 안에서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이 복음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엡 4:1-6). 신앙공동체 안에도 가끔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구성원들이 있습니다. 교만하여 하나님의 뜻과 공동체보다 자신만을 내세우려고 합니다. 성도는 이런 자들을 경계하고 겸손함으로 사역을 감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성도와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나가면서
여호사밧 왕 때에도 하나님은 주변 모든 나라들에게 두려움을 주셔서 여호사밧과 싸우지 못하게 하심으로 유다는 싸우지도 않고 이기게 하셨습니다(대하 17:10-11). 그 전쟁의 주체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전리품을 거두기만 하면 됐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차려놓으신 밥상에 숟가락을 얻은 것뿐입니다. 미디안 연합군과의 전쟁도 하나님의 전쟁이기에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전쟁이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기드온은 삼백 명을 자기 부하 정도로 여겼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지파 간의 갈등이 나타났습니다. 에브라임은 기드온과 심히 다투었습니다.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은 기드온의 도움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싸움을 수행하면서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결과만 보고 만족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위한 방식으로 했는지 자신의 동기와 과정을 점검해야 합니다. 공동체 간의 하나됨을 계속해서 추구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언제나 힘을 주시고 역경에서 우리를 언제나 건지십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훗날 주님 앞에 신실한 주님의 백성으로 서서 칭찬과 존귀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만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삿 7:15-25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기드온과 300용사가 미디안 연합군을 공격하여 격파하는 장면입니다.
이 전쟁에서 그들은 칼과 창이 아니라 나팔과 횃불과 항아리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성도의 승리는 자신의 인간적인 힘과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도우심에 달려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1. 먼저, 17절에 기드온은 300용사에게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에 기드온의 300용사들은 기드온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135,000명에 이르는 미디안 대군을 물리치는 놀라운 전과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탄과의 영적인 전쟁을 치루고 있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300용사가 그들의 대장인 기드온의 명령에 절대 순종한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의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대로 행할 때에만 우리의 대적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탄의 모든 미혹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할 때에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사탄을 멸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요일 3:10), 또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에도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고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사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사망의 권세를 완전히 깨뜨리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가르쳤습니다(고전 11:1).
예수님을 본 받는 것만이 승리의 비결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알기에 더욱 힘쓰되 예수께서 행하신 삶을 본받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모든 것을 사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요 13:34-35).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수고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위해 수고하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내어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살 때에만 대적 사탄의 모든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음을 꼭 기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본문에는 기드온과 300용사의 활약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 밤중에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와 항아리 안에 횃불을 감추고 미디안 진영을 급습했습니다. 그리고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깨뜨리고 횃불을 들고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하고 외쳤습니다.
이에 미디안 병사들은 큰 대군이 급습한지 알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며 같은 편끼리 서로 칼로 죽였습니다.
기드온이 이끄는 병사들은 날렵할 뿐만 아니라 300명이라는 아주 적은 인원이었기 때문에 미디안 병사들이 그들이 잠입한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고, 그런 와중에 갑자기 항아리가 깨어지는 큰 소리와 함성과 수많은 횃불이 눈앞에 보이니 당황해서 차마 저항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살아남기에만 급급하여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두르며 도망한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300용사에게는 어떠한 공격무기도 들려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기드온과 300용사는 단지 양손에 횃불과 나팔만을 들고 그것으로 135,000명에 이르는 미디안 연합군을 물리치겠다고 미디안 연합군의 진영에 쳐들어 간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이 얼마나 어리석고도 무모한 행동입니까?
만일, 미디안 연합군이 항아리 깨지는 소리나 함성 소리, 그리고 횃불에 놀라지 않았다면, 그래서 두려움에 빠지지 않고 차분하게 주위를 살펴서 대응했다면 기드온과 그의 군사들은 그 밤에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두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기드온이 이처럼 무모한 작전을 감행했던 이유는 이 전쟁이 처음부터 자신들의 칼이나 창으로 싸워 이길 전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지금 자신이 치르고 있는 이 전쟁은 오직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만 이길 수 있는 전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손에 칼과 창을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기드온이 자신의 모든 지혜와 힘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싸웠을 때, 그는 단 300명의 군사만으로도 135,000명에 이르는 미디안 연합군을 완전히 섬멸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군사 된 자들은 자신의 칼과 창으로 싸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는 결코 적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군사 된 자들, 곧 우리 성도들이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대로 싸워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만 완전한 승리를 보장받게 됩니다.
여러분, 기드온의 300용사의 승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군사로 부르심을 받아 사탄과의 영적 전쟁을 치르는 중에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매우 중요한 교훈의 말씀입니다.
우리들 역시 우리의 인간적인 힘과 능력으로 사탄과 싸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40일간을 주리신 후 사탄의 도전을 받았을 때, 사탄을 물리치시기 위하여 그 어떤 인간적인 힘도 능력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유일한 무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했을 때 사탄은 완전히 패하여 물러갈 수밖에 없었습니다(마 4:1-11).
그래서 성경 에베소서는 사탄과의 영적 전쟁을 치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권고하면서 특별히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엡 6:17).
여러분,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칼’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성령의 검’이 있습니다.
기드온이 ‘여호와의 칼’로 싸울 때 300명의 용사로 135,000명의 미디안 연합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싸울 때 사탄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완전한 승리를 쟁취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부딪쳐 오는 사탄의 유혹과 도전을 내 힘과 능력, 의지력이 아니라 오직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하고, 그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만 행동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극복하고 항상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이를 위해 기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기드온과 300용사의 모습을 보면서 저희들의 삶을 돌아봅니다. 기드온과 300용사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했던 것처럼 저희들도 순종의 삶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성도로서 우리가 사는 모든 삶은 우리 개인의 삶이 아니라 사탄과의 영적인 전쟁이며, 또한 이러한 영적인 전쟁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만 승리할 수 있음을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에게 주어진 모든 삶의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지혜로 승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비천한 자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사사기 7장 19절~25절 / 산호석목사
1. 기드온과 군사들이 미디안 진영을 공격한 방법은 무엇인가요?(19~20절) 그러자 미디안 진영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21~22절)
기드온과 300명 군사는 파수꾼들이 교대할 때를 기다렸다가 기습 공격을 감행합니다. 먼저 기드온과 100명의 군사가 나팔을 불며 손에 들고 있던 항아리를 부수었습니다. 이제 300명 군사들이 적진을 에워싸고 왼손에는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는 나팔을 들고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라고 외치자 온 적군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들끼리 서로 칼로 쳐 죽이고 도망쳤습니다.
미디안 군대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 수가 메뚜기처럼 많고 낙타는 해변의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조차 없었습니다. 기드온을 중심으로 모여든 이스라엘 32,000명도 미디안 군대에 비하면 많은 수가 아니었지만 하나님은 그중에서도 300명만 선별하시고 기습 공격을 하게 하셨습니다. 밤 10~11시는 미디안의 파수꾼들이 교대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기드온은 적들이 깊은 잠에 빠져들고 보초들조차 경계의 끈을 놓고 있던 때를 이용했습니다. 기드온은 군대를 세 대로 나누고 각각 항아리 안에 횃불을 감추고 나팔을 들고 적진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군사들은 항아리를 부수고 횃불을 치켜들고 나팔을 불었습니다. 적들은 나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나 횃불이 진영을 가득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보자 너무 놀라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지 못하고 칼을 빼들어 서로 싸우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겨우 목숨을 건진 자들은 스레라의 벧 싯다와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까지 도망쳤습니다.
*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무엇일지 나누어 보세요.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를 선발한 뒤에도 여전히 미디안을 공격하는 일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미디안 진영으로 잠입해서 보초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엿듣게 하심으로 이 싸움이 하나님의 전쟁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미디안 보초들은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그들의 장막을 무너뜨리는 꿈을 꾸고 이것을 기드온의 칼이라고 해몽합니다. 보리떡 한 덩어리가 어떻게 거대한 미디안 군대를 무찌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기드온과 군사들은 적들이 잠들어 있는 시간에 항아리와 나팔과 횃불을 활용해 기습 공격을 감행합니다. 미디안 군대는 잠결에 항아리 깨지는 소리와 밝은 횃불, 천지를 울리는 나팔 소리에 혼비백산하여 분별력을 잃고 칼을 뽑아 서로 치고 죽이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내가 지금 무엇을 갖고 있는가’에 민감합니다. 정작 ‘내가 지금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에는 무관심합니다. 미디안 군대처럼 엄청난 세력으로 우리를 두렵게 하는 마귀의 공격에 대항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온전히 순종할 때 주님은 우리의 칼이 되셔서 적들을 궤멸하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주십니다.
2. 이스라엘에게 전세가 유리해지자 전투에 참여한 지파는 어디인가요?(23~24절) 특히 에브라임 지파는 어떤 공을 세웠나요?(24~25절)
납달리와 아셀과 므낫세 지파가 패주하는 미디안 군대의 뒤를 쫓았습니다. 기드온은 요단 강 근처에 위치한 에브라임 지파에 사자를 보내 적의 퇴로를 차단할 지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미디안을 치고 그들을 앞질러 벧 바라와 요단에 이르러 수로를 점령하고 강을 건너려는 적을 공격합니다. 그곳에서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은 뒤 각각 오렙 바위와 포도주 틀에서 죽입니다.
납달리와 아셀과 므낫세 지파는 기드온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일어났을 때 그를 좇았던 군사들 중 일부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미디안 군대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돌아갔던 사람들과 300명 선발 과정에서 장막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적들이 패주하는 모습을 보자 그들은 이 전쟁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과 전리품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적들을 뒤쫓기 시작했습니다. 기드온은 요단 계곡을 건너 퇴각하려는 미디안을 궤멸하기 위해서 요단 근처에 있는 에브라임 지파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처음에 기드온이 군대를 일으켰을 때는 에브라임 지파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기드온은 이스라엘 전체를 아우르는 리더십을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적들을 궤멸할 수 있는 상황에서 에브라임의 도움이 절실했습니다. 이에 요청을 받은 에브라임 지파의 군대가 벧 바라에서 요단까지 적을 쫓아 수로를 점령했습니다. 그곳에 매복하고 있다가 적의 장수 오렙과 스엡을 생포해 각각 바위와 포도주 틀에서 죽입니다. 오렙은 갈까마귀라는 뜻이고 스엡은 늑대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그 이름처럼 약소민족을 괴롭히고 재산을 늑탈하는 삶을 살다가 이렇게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 기드온이 숨던 포도주 틀을 어떻게 사용하나요?(25절; 6:11 참조) 하나님이 약한 나를 강하게 하신 경험을 나누어 보세요.
미디안 군대의 장수 스엡을 쳐서 죽인 포도주 틀은 과거 기드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장소입니다. 당시 기드온은 거기서 미디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밀 타작을 하는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큰 용사로 세워 주시고 믿음을 주셔서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미디안을 대항할 군사를 일으키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미디안 군대를 궤멸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원수를 잡아 포도주 틀에서 죽이고 완전한 승리를 거뒀습니다. 우리는 기드온처럼 나약하고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원망을 안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내 인생의 포도주 틀에서 나약한 모습으로 믿음 없이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나를 부르시고 나를 통해 새 일을 행하기 원하십니다. 지금 원수가 아무리 거대해 보인다 해도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고 우리에게 상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은 가장 비참하고 비굴한 장소였던 포도주 틀을 승리와 영광의 장소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본문 이해를 위한 도우미]
므낫세 지파는 가나안에서 땅을 분배받을 때 두 군데를 받았습니다. 므낫세 반 지파는 르우벤, 갓과 더불어 요단 강 동편의 땅을 분배받았고, 나머지 반 지파는 요단 강 서편의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동쪽에 있는 므낫세 지파는 특히 마길 족속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길르앗 북부 지역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므낫세 지파는 다른 지파들이 요단 강 서편을 정복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나머지 반 지파는 요단 강에서 서쪽으로 지중해까지 이르는 지역, 곧 에브라임 지파의 북쪽이며, 아셀과 스블론과 잇사갈 지파의 남쪽에 있던 광활한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므낫세 지파는 잇사갈 지파와 아셀 지파의 영토 안에 있던 일부 성들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이곳에 사는 가나안 원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후에 가나안 원주민들을 정복해서 종으로 삼았습니다.
인생은 퍼즐 맞추기와 같습니다. 한 조각 퍼즐과 같은 삶의 순간순간이 전체 그림 안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지금 당장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매 순간 섬세하게 인도하셔서 우리 삶의 퍼즐을 완성하시고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기드온처럼 나약하고 소심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신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여호와의 깃발 아래 머물러야 합니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상황도 하나님의 구속사에는 꼭 필요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고 하나님께 하루하루를 맡긴다면, 하나님의 때에 아름답게 완성된 삶의 그림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기
-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대한 의구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제 삶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보게 하소서.
-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지만, 슬픔이 변해 기쁨이 되게 하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실 주님을 바라보며 견디게 하소서.
역전의 용사로 세우시다
사사기 7 19-25 / 코너스톤장로교회
불과 300명의 군사로 13만이 넘는 적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주관하고 계심을 확신하고 300명의 군사와 함께 적진을 향해 돌격하게 됩니다. 한가지 독특한 점은 그와 300명의 군사들이 칼이나 창을 들고 간 것이 아니라, 나팔과 횃불이 감추어진 항아리를 들고 갔다는 점입니다. 기드온은 정면으로 이 싸움을 감당하지 않고, 적을 교란시키기 위한 작전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잠든 밤 큰 소리를 울려 적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군사들이 쳐들어 온 것으로 착각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9절 말씀을 보니 이경 초라고 되어 있습니다. 밤 10시에 11시 정도가 되었습니다. 기드온은 적군의 보초병들이 교대하는 시간, 몹시 피곤하여 쉬고 싶은 마음에 정신이 해이해지는 시간을 노렸습니다.
가장 먼저 기드온이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고 손에 횃불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병사들과 함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하고 외쳤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미디안 병사들은 기드온의 군대가 가진 ‘횃불’을 보았고, 나팔 소리와 함성 소리를 들었습니다. 싸움에 나갈 때는 칼과 무기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횃불을 드는 병사는 소수입니다. 따라서 적군은 이스라엘 병사들 100명이 횃불을 들고 있었으나, 그 이상의 큰 병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게다가 100명이 함께 나팔을 불었으니, 그 소리 역시 크고 우렁차게 들렸을 것입니다. 적군은 혼비백산하여 싸울 생각도 못하고 도망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300명의 병사들이 진 여려 편에서 이 일을 행했기에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어두임이 깊게 내려앉은 밤, 정신 없이 도망치려 한 적군은 결국 동맹군끼리 서로 칼을 겨누고 싸우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역사이고 섭리였습니다.
실제로 이 전투는 기드온이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 끝이 결판이 났습니다. 그와 300 용사는 제 자리에 서서 나팔을 불고, 횃불을 들고, 크게 함성을 질렀을 뿐입니다. 그러나 미디안 군인들의 마음은 두려움에 한 순간 무너져 버렸고, 그 결과 그들은 혼비 백산하여 서로 죽이기에 급급하였던 것입니다. 기드온과 300 용사들이 외친 함성의 표현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군대의 대표가 누구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칼이나 창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해 친히 싸우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승리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날 선 검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기드온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자, 주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미디안 족속이 패하여 도망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용기를 얻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전보다 더 많은 병력을 모였고, 계속해서 미디안 족속을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24절 말씀처럼 기드온이 사자들을 보내어 에브라임 온 산지에서 내려와서 미디안 사람을 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예 적군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요단강을 건너가는 나루터를 점령 하였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미디안 족속이 하룻밤 사이에 도망자 신세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과 300 용사를 통해 이처럼 놀라운 압승을 얻게 하셨습니다.
자, 이제 그 끝을 향해 달려가는 기드온의 이야기, 그런데 오늘 본문은 독특하게도 기드온이 죽인 적군 미디안의 두 지휘관 오렙과 스엡이 죽은 장소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25절 말씀을 한 번 보겠습니다. “(삿 7:25) 또 미디안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오렙은 오렙 바위에서 죽이고 스엡은 스엡 포도주 틀에서 죽이고…” 적장 오렙은 바위에서, 스엡은 포도주 틀에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사실 성경에서 적군을 죽이면 지명은 이야기해도 이렇게 구체적으로 적장이 죽은 장소를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사기에서 굳이 이처럼 적장을 죽인 두 장소를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드온의 이야기가 바로 이 두 장소 ‘포도주 틀’, ‘바위’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6장 1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까? “(삿 6: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기드온이 어디에 숨어 있었습니까? 포도주 틀입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신 장소가 바로 기드온이 숨어서 밀을 타작하던 포도주 틀입니다. 6장 2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삿 6:21)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이 바친 제물을 태운 곳이 바로 ‘바위’ 입니다.
자, 이처럼 포도주 틀에 숨어서 밀을 타작하던 기드온,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가 적군을 포도주 틀에서 죽이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제물을 바친 바위에서 그는 적장의 목을 베게 됩니다. 두려움의 상징이었던 포도주 틀은 이제 승리와 심판의 장소로 바뀌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이십니다. 우리의 두려움이 변하여 승리의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살아갈 때, 우리가 두려워하던 곳이 변하여 승리의 장소가 되고, 우리가 두려워하던 일이 변하여 우리의 기쁨과 영광의 간증이 됩니다. 불과 300명 밖에 되지 않는 군대였지만, 하나님이 개입 하시자 13만 명이 넘는 적군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역전의 명수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면 우리 삶 가운데 있는 두려움의 포도주 틀도 승리의 포도주 틀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하루,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할지라도, 기드온처럼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고난과 위기 앞에서도 당당하게 믿음의 전진을 이루어내 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