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부탄에서 일주일 동안의 답사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방송·영화·연극·예술인들의 모임인 '길벗'에서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
스님은 어제 부탄 파로 공항을 출발하여 방콕 공항을 경유한 후 새벽 1시 45분에 인천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오전 9시 20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입국 수속을 밟고 나서 곧바로 서울 정토회관으로 향했습니다. 11시 40분에 정토회관에 도착하여 점심식사를 한 후 오후에는 실내에서 업무를 보았습니다.
해가 저물고 길벗 초청 강연을 하기 위해 오후 6시에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방송, 영화, 연극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스님의 강연을 듣기 위해 속속 도착했습니다.
2층 카페에서 일찍 도착한 배우, 작가, PD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차담을 했습니다. TV와 영화에서 보았던 분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배우 천우희 씨와 조인성 씨가 먼저 스님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 출연한 배우 이상희, 박지연 님은 얼마 전에 행복학교를 수강하고 많은 것을 배웠다며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출연한 다운증후군 배우 정은혜 씨는 직접 손으로 그린 스님의 캐리커처를 선물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강연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배우들과 함께 지하 대강당으로 이동했습니다.
400명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저녁 7시에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길벗 대표인 노희경 작가님이 무대에 올라 왜 이런 자리를 마련했는지 소개했습니다.
“길벗이 법륜스님 초청 강연을 진행한 지 20년이 됐습니다. 이 기간 동안 거의 매년 두 번씩, 총 40회 가까이 강연회를 열었습니다. 처음에는 여의도에서 50명의 인원이 모였습니다. 오늘은 400명이 이 자리에 계십니다.
강연 주제는 ‘우리들을 행복하게 하는 몇 가지 질문’입니다. 그만큼 불행하거나 살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겠죠. 방금 많은 분들과 인사를 나누며 요즘 경기가 나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특히 문화 예술 업계의 큰 불황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몇몇은 일이 많지만, 대다수는 일거리가 없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도 20년 전에 '일이 안 풀리고 인기가 떨어지고 있는데도 행복한 길이 있나요?' 이런 질문을 스님에게 했었습니다. 가끔은 가능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이 생기기도 하지만, 못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점점 깨닫습니다. 못하기 때문에 더 경청하는 자세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도 무거운 짐을 가지고 오셨다면 마음을 열고 스님의 이야기를 경청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대신 질문해 주는 사람들에게 의지해서 자신만의 해답을 얻고 가시길 바랍니다.”
곧이어 스님을 소개하는 영상을 함께 본 후 박수갈채를 받으며 스님이 무대에 올라왔습니다. 스님은 지난 일주일 동안 부탄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지난 일주일 동안 부탄에 있다가 오늘 낮에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부탄이라는 나라를 들어보셨나요? 부탄은 히말라야 남쪽 산기슭에 위치한 작은 나라로 면적은 남한의 약 38% 정도이며, 인구는 100만 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전체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발 2,000미터 가까이에서 생활합니다.
부탄의 서부 지역은 공항이 있고 관광 개발이 많이 되어 시설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지만, 중부와 동부 지역은 매우 외진 곳입니다. 한국에서 부탄까지 가려면 태국의 방콕을 거쳐 방글라데시의 다카나 인도의 캘커타를 거쳐야 합니다. 가는 데만 하루가 소요됩니다. 도착 후 중부에 있는 마을까지는 차로 15시간이 걸립니다. 새벽에 출발하면 밤늦게 도착하거나 중간에 하루를 자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틀 전에 낮 12시에 부탄 중부 지역에서 출발했는데 오늘 11시 40분에 도착했습니다. 48시간이 걸렸습니다.
부탄에서 만들고자 하는 새로운 모델
제가 부탄에 간 이유는 기후 위기 시대에 대안이 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개발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는 부탄 주민들의 열악한 삶을 개선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집을 지어주고, 기존의 집은 연기가 방 안에 가득 차지 않도록 내부를 수리하고, 농수로를 설치하고, 생산 시설을 보완하고, 학교와 병원 시설을 개선하는 일을 합니다. 한국에서는 즉문즉설을 통해 국민 행복도를 높이고 있는 것처럼, 부탄에서는 생활 개선을 통해 주민들의 행복도를 높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지난 일주일 동안의 부탄 답사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보았습니다. 방송·영화·연극·예술계에서 일하는 참석자들은 오지에서 활동하는 스님의 모습에 흠뻑 몰입했습니다.
“제가 부탄에 터를 잡아 놓으면 여러분도 봉사하러 많이 오시면 좋겠습니다. '지속 가능한 개발'의 목표는 열악한 삶은 개선하고, 적게 소비하며 살아가는 행복한 삶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실패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실패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실패하더라도 주민들의 생활은 개선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과 같은 기후 위기 시대에는 실패하든 성공하든 시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후 변화가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될 미래를 대비해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공한다 해도 그것은 우리가 잘해서 성공하는 것이 아닐 겁니다. 우리의 노력보다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마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따른 성공이 될 겁니다. 만약 아침에 자고 일어났더니 호흡기 질환으로 만 명이 죽거나, 엄청나게 덥거나 춥거나 해서 사람들의 생존이 어려워지면 새로운 대안을 찾을 겁니다. 저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100년 뒤를 내다보고 대안이 될 수 있는 모델을 개발하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죽고 난 뒤의 얘기니까 관심 없죠?” (웃음)
다음은 참석자들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섯 명이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독립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인데 창의성을 갖는 것과 무아를 가르치는 불교가 어떤 연관이 있을 수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창의성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는 독립영화 연출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예술인들이 그렇듯 예술인들에게는 공통적인 고민이 창의성의 문제입니다. 예술인들에게 창작은 숙명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매번 새로운 작품을 할 때마다 새로운 것을 꺼내야 하는데, 새로운 것을 꺼내는 제일 확실한 방법이 나를 찾는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합니다. 불가에서는 무아론을 기점으로 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독특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절대적인 자아가 없다는 말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는지, 그렇다면 예술 작업 자체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결혼하셨어요?”
“네.”
“그럼 아내가 질문자를 부를 때 뭐라고 불러요?”
“남편이라고 부릅니다.”
“그럼 아이는 질문자를 부를 때 뭐라고 불러요?”
“아빠라고 부릅니다.”
“질문자가 직장에 가면 직장에서 역할에 따라 감독이면 감독이라고 불리겠죠. 가게에 가면 손님이라고 불리죠. 만약에 교회나 절에 가면 신자라고 불리겠죠. 아이가 학교에 다니는데 질문자가 학교에 가면 학부형이라고 불리겠죠. 그렇다면 자기라는 존재는 무엇일까요? 질문자는 아빠입니까, 남편입니까, 손님입니까, 학부형입니까?
그럴 때 질문자는 그 무엇도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 무엇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 무엇이든 될 수가 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라고 표현합니다. 불수자성(不守自性)은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즉 ‘이것이다’ 하고 정해진 것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수연성(隨緣成)은 다만 인연을 따라 이루어질 뿐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인연 맺으면 아빠, 이렇게 인연 맺으면 남편, 이렇게 인연 맺으면 학부형, 이렇게 인연 맺으면 손님이 될 뿐입니다. 여기 가면 감독, 저기 가면 신자, 이렇게 인연을 따라 이루어집니다. 내가 청소를 하면 청소부, 농사를 지으면 농사꾼, 감독을 하면 감독, 배우를 하면 배우가 되는 거예요. 나는 본래부터 배우가 아니에요. 이런 인연에서 배우라고 불리는 거죠. 나는 학부형이라고 정해진 것이 아니라 아이가 학교에 다니면 내가 학교에 갔을 때만 학부형이라고 불리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나는 배우다’ 하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생각이에요. 그 역할을 할 때에만 배우입니다. ‘스님이 농사를 짓는다’ 이 말도 정확하게는 맞지가 않습니다. 스님이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습니다. 주로 스님이라는 역할을 많이 하면 ‘저 사람은 스님이다’ 하고 마치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본인도 ‘내가 스님이다’ 하고 생각하게 되고요.
그런데 제가 아버지를 만나면 아버지한테는 제가 아들입니까, 스님입니까? 아들입니다. 이것을 헷갈려하면 충돌이 일어나는 거예요. 내가 스님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는 아버지라 하더라도 신자니까 누가 누구한테 절을 해야 돼요? 신자가 스님에게 절을 해야 합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신자가 스님한테 절을 하잖아요. 그런데 내가 아들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는 누가 누구한테 절을 해야 돼요? 내가 아버지한테 절을 해야 합니다. 제가 집에 가면 그 환경에서 아들 역할을 해야지 스님 역할을 하면 안 돼요. 아버지가 절에 오면 신자 역할을 해야지 아버지 역할을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것처럼 아무리 질문자가 감독이라 하더라도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갔을 때는 그냥 학부형입니다. 거기서 감독 역할을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이것을 분간하지 못해서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그 무엇도 아닙니다. 즉 ‘무아’입니다. 그 무엇도 아니기에 인연을 따라서 무엇이든지 될 수가 있습니다. 이 도리를 알면 여러분들은 명배우가 될 수 있어요. 명배우가 되려면 ‘나’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나는 그 무엇도 아니기 때문에 깡패 역할을 맡으면 그냥 깡패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창녀 역할을 맡았다면 그냥 창녀가 되는 거예요. 농부 역할을 맡았다면 그냥 농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농부 역할을 시키면 어색해합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에요. ‘나’를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인연을 따라 몸을 못 나투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많은 경험을 할수록 훌륭한 연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연기자가 되려면 무아의 상태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어진 대로 그 역할을 다 해낼 수가 있는 거예요. 물은 모양이 없지만 병에 넣으면 병 모양, 컵에 넣으면 컵 모양, 이렇게 유연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내부에 뭔가를 ‘이것이다’ 하고 움켜쥐고 있습니다. ‘나는 스님이다!’ 하면서 농사를 짓고, ‘나는 스님이다!’ 하면서 청소를 하기 때문에 농사를 짓든 청소를 하든 뭔가 어색한 거예요. 청소를 할 때는 그냥 청소부가 되고, 농사를 지을 때는 그냥 농사꾼이 되면 하나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나는 무엇이다’ 하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우리는 그 무엇도 아닙니다.
제가 어제 부탄을 나오면서 부탄 정부 관계자에게 ‘스님이라고 해서 특별한 대우를 하지 말아 달라’ 하고 요청을 했습니다. 외국에서 손님이 왔다고 하면 공항에서 빨리 통과를 시켜주는 경우가 많잖아요. 물론 제가 일행이 많아서 여럿이 갈 때는 제 역할이 스님이고 또 부탄 정부 입장에서는 손님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때는 통과할 때 도움을 주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이번에 부탄을 나올 때는 제가 혼자서 나왔습니다. 혼자 다니는데 대우를 받을 필요가 하나도 없잖아요. 그냥 줄을 서야 하면 줄을 서면 되니까요. 일찍 통과시켜 주어서 탑승구 앞에 앉아 있으나, 줄을 서서 통과한 다음 탑승구 앞에 가나 결과는 똑같지 않나요? (웃음)
여러분들도 지방에 촬영하는 일이 있어서 방송국 차를 타고 빨리 이동하는 건 괜찮은데, 놀러 가면서 방송국 차를 타고 빨리 이동할 필요는 없잖아요. 놀러 갈 때는 기차를 타고 천천히 가면서 놀면 되잖아요. 어떻게 생각해요?
‘나는 무엇이다’ 하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대개 한번 유명해지고 나면 인생이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내가 어떤 드라마에 출연해서 유명해진 것은 어제의 일입니다. 오늘의 일이 아니에요. 어제는 학교에 갔으니까 학부형이었지만, 오늘은 가게에 갔으니까 학부형이 아니고 손님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학부형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이런 어리석음을 반복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힘든 겁니다.
젊을 때 너무 일찍 유명해지거나 성공하면 인생이 불행해지는 이유가 늘 과거의 기억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에요. 어릴 때 상처를 입은 사람이 그 상처를 잊지 못하고 늘 과거 속에 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젊을 때 일찍 유명해진 사람이 죽을 때까지 유명세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늘 과거를 그리워하며 살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과거를 그리워하며 사는 사람이 술 먹으면 하는 말이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입니다. 우리는 현재에 살지 못하고 과거에 살 때가 많습니다. 권위주의적인 행동도 다 꿈속에 살기 때문에 나오는 겁니다.
과거의 꿈속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바로 붓다가 말한 ‘무아’입니다. 고정된 실체는 없어요. 약이라는 실체도 없고, 독이라는 실체도 없습니다. 먹고 나으면 약이라고 하고, 먹고 죽으면 독이라고 하는 겁니다. 본래부터 이것은 약이고, 이것은 독이라고 고정된 실체는 없는데, 우리는 이것은 약이라고 하고, 이것은 독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독이라는 것도 조금만 먹으면 약이 되는 경우가 있고, 약이라는 것도 많이 먹으면 독이 되는 경우가 있는 거예요.
선악도 마찬가지입니다. 길 가는 사람을 때리면 폭행이 되지만,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하는 사람이 일본 사람을 때리면 독립운동이 되는 겁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것도 한국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독립운동이지만, 일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자기 나라의 국무총리를 죽인 테러 행위입니다. 이렇게 정해진 게 없다는 무아의 본질을 꿰뚫어 알 때 우리는 훨씬 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창의적이라는 것도 결과주의적인 관점입니다. 창의적이라고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창의적인 것도 결국 모방을 바탕으로 해서 나옵니다. 그림을 그리거나 집을 지을 때 남의 것을 똑같이 모방을 하면 전통을 지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모방을 하다가 실수를 해서 조금 다르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당대에는 틀린 것이 됩니다. 하지만 천년쯤 지나면 창의적인 작품이 됩니다. 똑같은 작품도 기준을 전통에 두고 모방을 하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틀린 것이 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창의적인 것이 되는 거예요.
모든 창의성은 틀린 데서 나옵니다. 실패했을 때 창의성이 나옵니다. 그러니 틀리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실패를 해야 창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요즘 창조적인 사람들을 보면 약간 특이한 기질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모자라는 행동을 하지는 마세요. (웃음)
우등생은 모방의 가치에서 나온 겁니다. 창조적 관점에서는 어떤 것도 우열을 정할 수가 없어요. 오늘날 한국의 학교 교육은 모방 교육입니다. 오늘날 세계인들이 좋아하는 K팝이라고 하는 것도 서양의 클래식 음악을 기준으로 하면 저급한 음악입니다. 한국의 전통 음악을 기준으로 봐도 잘못된 음악입니다. 그러나 서양의 클래식 음악과 한국의 전통 음악이 믹스가 된 것이 많은 대중들의 호응을 받으니까 창조적이 된 겁니다.
창조적이 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자기가 좋은 대로 하면 돼요. 자기가 좋은 대로 했는데 대중이 호응을 하면 창조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창조적인 것을 만들어도 대중이 호응하지 않으면 창조적이라고 인정받지 못하는 거예요.
지금 평가가 좋은 것도 천년이 지나면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결국 여러분이 추구하는 것은 돈벌이가 되느냐 아닙니까. 돈벌이가 되면 창조적인 것이 되는 것이고, 돈벌이가 안 되면 실패가 되는 거잖아요.
지금 제가 부탄에서 하는 사업은 지금을 기준으로 하면 아무도 호응을 안 하니까 실패로 평가가 되겠죠. 그러나 100년 후에 기후 위기 시대가 와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게 되면 ‘스님은 100년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이렇게 재평가가 될 겁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조금 더 미래를 내다보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요즘 사람들이 내 작품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00년 정도 지나야 사람들이 내 작품을 이해할 것이다.’
이렇게 자신감을 갖고 살면 안 됩니까? 고흐의 그림도 100년이 지나서 사람들이 이해를 했잖아요.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미술가들도 당시에는 밥조차 제대로 못 먹었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너무 욕심이 많아요. 작품을 만들어서 지금 당장 유명해지고 싶어 해요. 그러려면 모방을 해야 합니다. 창조적이 되려면 10년이든 20년이든 대중의 인기에 연연하지 말아야 해요. 대중이 호응을 해서 갑자기 유명해졌다 하더라도 ‘이건 우연이다’, ‘대중이 뭘 몰랐나 보다’, ‘재수가 좋았나 보다’ 이렇게 받아들여야 마음이 들뜨지 않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삶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 대중의 반응에 놀아나는 꼭두각시가 됩니다. 반응이 나쁘면 괴로워서 술 마시고, 반응이 좋으면 신이 나서 술 마시고, 이렇게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런 삶이 노예의 삶이지 어떻게 주인의 삶입니까. 저는 즉문즉설을 내 마음대로 하잖아요. 주위의 평가에 별로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인생을 조금 길게 보고 자신감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특히 예술을 하는 사람이 너무 당대에 평가를 받으려고 하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려면 의사가 되거나 변호사가 되거나 사업가가 되어야죠. 예술을 하면서 자꾸 당대의 평가를 받겠다고 하는 것은 조금 안 맞지 않을까요? 그리고 대중이 원하는 것들이 워낙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평가를 받아봐야 그날뿐이고 자고 일어나면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런 평가는 일회성이지 진지하게 예술을 생각해서 나온 평가는 아니거든요.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 환경에서 자라서 불교에 대해 잘 모릅니다. 하지만 스님 말씀 중에 나라는 것이 없어야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내용이 정말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연결해서 ‘그럼 내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
“나라고 하는 게 본래 없으니까 사람의 아들인 예수가 신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나라고 하는 게 본래 있다면 예수는 목수의 아들밖에 안 되는데 어떻게 신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나라고 하는 게 없기 때문에 고타마 싯다르타도 부처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들은 ‘한 끼 굶고 부처가 될래? 그냥 오늘 실컷 먹을래?’ 하고 물었을 때 대부분 실컷 먹고 자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는 겁니다. 그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살라고 정해진 것은 없어요. 순간순간 본인이 선택한 결과로 지금의 모습이 된 겁니다.
화가 벌컥 날 때 ‘지금 화를 안 내면 부처가 될 수 있다’ 하고 알려줘도 화내는 걸 멈출 수 있을까요? 대부분이 ‘에이, 부처도 싫다. 그냥 성질대로 하겠다’ 이렇게 선택한 것이 쌓여서 이 자리에 온 겁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순간순간 더 낫다고 판단해서 선택한 결과가 지금의 모습입니다.”
이 외에도 방송, 영화, 연극을 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질문들이 계속 이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