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857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 서울·경기도 조선의 도읍이 정해지다
역사 속에서 부침이 심했던 서울이 한 나라의 수도로 거듭난 것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후였다. 이성계가 1392년 조선의 태조로 즉위한 뒤 민심을 새롭게 하기 위해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계룡산 아래로 수도를 옮기게 하였다. 당시 천도의 이유를 역사학자 한우근은 다음과 같이 갈파하였다.
이성계가 즉위 직후에 천도의 뜻을 선포했던 것은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이미 지덕이 쇠한 망국 구거인 개경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고려 세족의 전통 기반을 떠나서 자신만의 세력 기반을 새로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강변북로 © 유철상서울의 교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어진 강변북로와 올림픽대교. 한강 주변으로 아파트와 수많은 빌딩이 들어서 있다.
그리하여 1393년 3월부터 12월까지 계룡산 아래에 새 도읍지 공사를 진행하던 중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으며 풍수지리에 능한 하륜이 계룡산의 위치가 너무 남쪽에 치우쳐 있으며 풍수지리로 볼 때 불길한 곳이라 하여 공사가 중지되었다. 그 뒤 태조 3년인 1394년 8월에 태조가 여러 신하들을 데리고 한양에 와서 옛 남경 궁터를 보고, 지사(地師) 윤신달(尹莘達)에게 그 의견을 물었다. 그때 윤신달이 “우리나라에서는 개성(開城)을 상지(上地)로 하고 이곳을 그다음으로 치지만, 다만 건방(乾方)이 낮고 물이 말랐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태조가 왕사인 무학에게 묻자 무학이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이곳은 사방이 높이 뛰어나고 중앙이 평탄하여 도읍을 삼기에 알맞다고 생각하지만, 여러 의논을 들어서 결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1394년 10월에 태조 이성계가 정도전에게 한양 천도를 명하였다. 정도전은 한양을 건설하면서 북악산 아래에 경복궁을 정남으로 향하게 지었고, 그 앞에 남쪽으로 큰 도로를 내어 길 양쪽에는 의정부, 육조 등 주요 중앙관청을 세웠다. 그리고 산줄기를 따라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잇는 도성을 쌓고 도성의 출입을 위하여 큰 문 네 개와 작은 문 네 개를 동서남북에 냈다. 아래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성곽’조에 실린 글이다.
정남(正南)은 숭례(崇禮)요, 정북(正北)은 숙청(肅淸)이요, 정동(正東)은 흥인(興仁)이요, 정서(正西)는 돈의(敦義)이며, 동북은 혜화(惠化, 처음에는 홍화라고 하였음)요, 서북은 창의(彰義)이며, 동남은 광희(光熙)요, 서남은 소덕(昭德)이다.
국립민속박물관 © 유철상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한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1867년에 중건되었다. 조선 왕조 제일의 법궁이며 수도 서울의 중심이기도 하다. 경복궁 옆에는 1945년 개관한 국립민속박물관이 있다.
태조 4년인 1395년 6월 6일에 한양부를 한성부(漢城府)라 고치고, 그해 9월에 경복궁과 대묘가 완성되었다. 태조 5년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9월에 완성하고 관할구역을 정하였다. 성 밖 십 리(城底十里)로 동쪽은 양주, 송계원(松溪院)과 대현(大峴), 서쪽은 양화도와 고양의 덕수원(德水院), 남쪽은 한강과 노도(露渡)까지를 경계로 정하였다.
왕자의 난으로 제2대 정종 때 개경으로 환도하였으나 태종 때 다시 한양으로 천도를 단행하여 조선 오백 년간의 도읍이 되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서울에 도읍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조선이 왕조를 물려받은 뒤 태조 이성계는 승려 무학을 시켜 도읍 터를 정하게 하였다. 무학이 백운대에서 산맥을 따라 만경대에 이르고, 다시 서남쪽으로 비봉에 갔다가 한 개의 비석을 보니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라는 여섯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무학이 맥을 잘못 찾아서 여기로 온다’는 뜻이며, 곧 도선이 세운 것이었다. 무학은 길을 바꿔 만경대에서 정남향의 줄기를 따라 바로 백악산 밑에 도착하였다. 세 곳의 맥이 합쳐져서 하나의 들에 모이게 된 것을 보고 드디어 궁성 터로 정하였는데, 바로 그곳이 고려 때 오얏나무를 심었던 곳이다.
궁성 터를 정한 뒤 외성(外城)을 쌓으려고 하였으나 성의 원근 경계를 결정지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큰 눈이 내렸다. 그런데 바깥쪽은 눈이 쌓이는데 안쪽은 곧 눈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었다. 태조가 이상하게 여겨서 눈을 따라 성터를 정하도록 명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성 모양이다. 비록 산세를 따라서 성을 쌓은 것이나, 정동방과 서남쪽이 낮고 허약하다. 성 위에 치성을 만들지도 않았고 호도 파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임진년과 병자년의 두 난리 때 모두 도성을 지켜내지 못하였다.
숙종이 재임하던 을유년에 조정에서 도성을 고쳐 쌓기로 의논이 있었으나 “동쪽이 너무 낮은데 만약에 강을 막아서 그 물을 성에다 댄다면 성안 사람은 모두 물고기 신세가 될 것이다”라는 말이 있어 의논은 중지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곳은 3백 년 동안이나 명성과 문화의 중심 지역이 되어 유풍(儒風)을 크게 떨치고 학자가 무리 지어 나왔으니 엄연한 하나의 작은 중화(中華)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