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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사람들의 반응
삿 8:1-12
1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
2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3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하니라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니라
4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자 삼백 명이 요단 강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며
5 그가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는 백성이 피곤하니 청하건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 나는 미디안의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의 뒤를 추격하고 있노라 하니
6 숙곳의 방백들이 이르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하는지라
7 기드온이 이르되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넘겨 주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 하고
8 거기서 브누엘로 올라가서 그들에게도 그같이 구한즉 브누엘 사람들의 대답도 숙곳 사람들의 대답과 같은지라
9 기드온이 또 브누엘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에 이 망대를 헐리라 하니라
10 이 때에 세바와 살문나가 갈골에 있는데 동방 사람의 모든 군대 중에 칼 든 자 십이만 명이 죽었고 그 남은 만 오천 명 가량은 그들을 따라와서 거기에 있더라
11 적군이 안심하고 있는 중에 기드온이 노바와 욕브하 동쪽 장막에 거주하는 자의 길로 올라가서 그 적진을 치니
12 세바와 살문나가 도망하는지라 기드온이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그 온 진영을 격파하니라
삿 8:1-12 / 그때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그대가 미디안과 싸우러 나갈 때 우리 지파 사람들은 부르지도 않다니 어찌 그럴 수 있소?' 우리를 그렇게 우습게 여길 수 있단 말이오?'하고 항의를 하자 2) 기드온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들이 거둔 승리가 어찌 우리가 거둔 것에 비교될 수 있겠소? 당신들은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더 달지 않느냐'라는 격언도 들어 보지 못하였소? 3) 우리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 지파인 당신들의 손에 미디안군의 장군 오렙과 스엡을 넘겨 주셨소. 그러니 우리가 지금까지 한 일이 어떻게 당신들이 한 일에 비교될 수 있겠소?' 기드온이 이렇게 대답을 하자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화를 누그러뜨렸다. 4) [기드온이 미디안군을 섬멸하다] 기드온은 300명 민병대를 이끌고 요단강을 건넜다. 그들은 쉬지 않고 미디안군을 쫓아가느라 무척 지쳐 있었지만 별다른 불평없이 기드온을 따랐다. 5) 그들이 숙곳에 이르자 기드온은 그곳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청하였다. `우리 민병대가 먹을 만한 것 좀 주시오. 모두가 무척 굶주려 있소. 우리는 지금 미디안 사람들의 왕인 세바와 살문나를 뒤쫓는 길이오.' 6) 그러자 숙곳 두령이 말을 되받았다. `우리가 무슨 까닭으로 그대들에게 먹을 것을 준단 말이오? 당신들이 미디안 왕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기라도 하였단 말이오?' 7) 그러자 기드온이 말하였다. `좋소. 여호와께서 미디안 왕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넘겨 주셔서 그들을 사로잡는 날, 내가 돌아와 들가시와 찔레로 당신들의 살을 찢어 놓겠소' 8) 그러고는 기드온은 민병대를 이끌고 브누엘로 올라갔다. 거기서 브누엘 사람들에게 먹을 만한 것을 달라고 하자 그들 역시 숙곳 사람들과 똑같이 대꾸하였다. 9) 그래서 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승리하고 돌아올 때 너희들이 세워 놓은 저 망대를 반드시 허물어뜨리겠다.' 10) 이즈음에 세바와 살문나는 그 부대를 이끌고 갈골에 진을 치고 있었다. 동쪽에서 올라왔던 이 침략자들은 12만 명의 전사자를 내고 겨우 1만 5천 명쯤 되는 군인들만이 살아남아 그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11) 이 침략자들이 겨우 안도의 한숨을 돌리고 있는 사이에 기드온은 민병대를 이끌고 노바와 욕브하 동쪽으로 나 있는 사막 외각길을 따라 올라가 그들에게 들이닥쳤다. 12) 이렇게 기드온 민병대가 급습을 하자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는 정신 없이 도망을 쳤다. 기드온은 도망치는 세바와 살문나를 뒤쫓아가서 사로잡고 그들을 따르던 침략군들을 모두 쳐죽였다.
미디안 사람들로부터 억압받고 있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기드온이지만 승리와 주변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지혜롭고 침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1-3) 에브라임 지파는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보다 불평이 많고 까다로운 지파였습니다. 다른 사사와의 다툼이나 이후 여로보암을 통해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증거입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에브라임 사람들은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거나 전리품을 얻지 못할 것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에게 항의하며 불만을 쏟아내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분별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내부의 결속을 잃지 않기 위해 에브라임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분명히 기드온과 그 가문이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작은 성과라도 함께 했던 에브라임의 전공을 높이 사고 자신은 겸손하게 낮추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진정한 지도자의 덕목이며 지혜입니다.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4-9)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는 격전으로 인해 많이 지쳐있었습니다. 긴장된 전투의 연속과 여러 지파의 결속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을 감당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갓 지파 성읍에 속한 숙곳의 사람들은 기드온과 용사들을 도와주기는커녕 호의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각 지파가 가나안을 완전히 정복하지도 못하고 지파 간의 결속 또한 굳건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사사 시대 위기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그네에게라도 먹을 것과 쉴 곳을 내어주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는데 정작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는 그들의 외면과 홀대에 화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다(10-12) 기드온은 끝까지 적들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집중력을 잃지 않고 기습하여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았으며 그 온 진영을 격파했습니다. 많은 군사가 전쟁의 승리를 담보하지 않습니다. 이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며 자신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할 때 앞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문제의 상황은 오히려 더 높은 성장을 이루는 발판이 되고 승리의 주역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드온과 함께한 300명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니며 충만한 수인 것입니다.
적용 :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과 주께 약속한 일을 위해 당신은 어떻게 충성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흔히 진리를 발견하면 보답을 받으리라 기대합니다. 애쓴 만큼 돈을 벌고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고, 희생과 친절을 베푼 만큼 인정과 사랑을 받으리라고, 정직한 만큼 정당성을 인정받으리라고 남몰래 기대합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아 인기와 권력, 명예를 얻고 싶은 세상적 욕망이 우리의 내면을 가득 채울 때도 있습니다. 이는 명백히 드러내야 할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가리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곧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높여 주실 줄 믿습니다.
< 설 교 >
피곤하나 따르는 자
삿 8장 4~9절 / 손상률목사
기드온은 불과 삼백 명의 소수 부대를 가지고 메뚜기떼 같은 중다한 미디안 대군을 무찌른 용사입니다.
기드온의 군대가 항아리를 깨뜨리고 나팔소리와 함께 횃불을 치켜들었을 때 미디안 진영은 삽시간에 혼란에 빠지면서 동무끼리 칼로 치며 자멸해 버렸습니다(삿 7:22). 기드온은 에브라임 사람을 동원하여 패주하는 적장 오렙과 스웹을 잡아죽이게 하고 그 여세를 몰아 자신은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하였습니다. 이때 기드온을 따르는 삼백 명의 군사들은 매우 지쳐 있었습니다.
본문 말씀 4절에 “기드온과 그 좇은 자 삼백 명이 요단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따르며”라고 하였습니다.
지휘관인 기드온은 처음부터 자기와 더불어 목숨을 건 전투에 참여했던 그 삼백 명이 지쳐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불가피한 행보를 재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드온은 지금 미디안의 왕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하면서 힘겹게 따라오는 자기의 부하들을 생각하여 숙곳 사람들에게 “나의 종자가 피곤하여 하니 청컨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고 부탁하였습니다(5절).
옛날이나 오늘이나 말없이 주님의 사역에 충성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게 되어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피곤할지라도 주 예수께 받은 사명 때문에 십자가의 그 길을 끝까지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Ⅰ.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목적을 수행하여야 하지만 선뜻 그 일에 자원하고 나서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처음 기드온과 함께 미디안 전투에 동참하려고 했던 사람은 상당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쟁에 끝까지 참여한 사람은 삼백 명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말보다 행동이어야 하고 거기 따르는 결과가 있어야 됩니다(고전 4:20).
(1) 목적 의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민수기 11:4에 보면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라고 하였습니다. 모세와 함께 출애굽한 무리들 중에 가나안에 대한 목적이나 기대가 없이 덩달아 따라 나온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애굽으로 되돌아가자고 하며 백성들을 선동하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목적의식이 없으면서도 섞여 있는 무리들은 주님과 함께 하는 십자가의 길에 동지가 되지 못합니다.
(2) 희생하기를 겁내는 비겁한 자들입니다.
처음 미디안 전쟁에 참여키로 한 의용군의 수가 삼만이 넘었습니다. 그 중에 절대다수가 전쟁도 치르기 전에 두려움이 앞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목적에는 동조하고 따라 나섰지만 자기를 희생하여야 하는 일에는 용기가 없었던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마 16:24). 교회 안에는 천당을 노래하면서 십자가와 고난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Ⅱ. 다른 목적을 가지고 따르는 자가 있습니다.
전쟁에 있어서 가장 위험을 가져오게 하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좋은 뜻으로 동참하는 것 같으나 결정적인 때에 아군의 진영을 교란시키거나 무너뜨리려는 세력입니다. 예수님의 천국비유 가운데 좋은 씨를 뿌려 놓은 밭에다 가라지를 덧뿌리고 가는 자들입니다(마 13:25).
(1) 상황을 엿보는 기회주의자입니다.
사사기 7:22-23에 보면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므낫세에서부터 모여서 미디안 사람을 쫓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기드온과 삼백 명이 밤을 새워 적군과 싸우던 현장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디안 진영이 무너지고 겨우 목숨만 남아서 도망가는 패잔병의 뒤를 쫓아 마침내 저희가 전쟁을 끝낸 것처럼 생색을 내었습니다. 어느 때나 명분보다 실리를 챙기려하고 희생보다 영광을 차지하려는 기회주의자가 있습니다. 목숨을 건 전투에는 외면하고 있다가 승전하는 막차에 올라타고 전리품을 가져가려는 사람들입니다.
(2) 자기의 이름을 내려는 공명주의 자입니다.
미디안의 방백들을 죽인 에브라임 사람들입니다. 사사기 7:24이하에 보면 기드온은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사자를 보냈습니다. 기드온이 그의 부하들을 데리고 미디안의 두목 오렙과 스엡을 쫓아가고 있었으나, 자기의 군사들이 너무나 지쳐 있었기 때문에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그들이 도망가는 요단 나루를 차단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의 말대로 길목을 지키고 있던 에브라임 사람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의 목을 치고는 자기들의 이름을 들어내며 힘을 과시하였습니다. 기드온과 그의 군사들은 죽을 고생을 다하고도 모든 영광을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말았습니다.
(3) 기분이 거슬리면 시비를 거는 자들입니다.
기드온의 분부대로 요단강 나루를 지키던 에브라임 사람들은 손쉽게 적장 오렙과 스엡을 죽이고 명성을 떨치게 되자 이제는 기드온을 향해 시비를 걸었습니다. 사사기 8:1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찜이뇨 하고 크게 다투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전쟁에 위험이 따르고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없을 때 뒤로 빠져 있다가 다 이겨놓은 전투에 참여하고 명성을 얻은 다음 엉뚱하게 시비를 걸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붙이셨으니 나의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삿 8:2-3)고 하며 겸손하게 그들의 자존심을 높여 주었습니다. 따지고 시비를 가리자면 할 말이 많았겠지만 그냥 못 이겨 주면서 그들을 달랬습니다. 그야말로 지고도 이기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Ⅲ. 피곤하나 따르는 자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기드온과 함께 했던 삼백 명 용사들입니다. 그들은 목표가 분명한 사람들로서 기드온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피곤하고 지쳐있어도 끝까지 자기들의 소임에 충성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1) 피곤하게 만든 상황
성경은 인간을 매우 연약한 존재로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질그릇이라 했고(고후 4:7), 야고보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로 표현했으며(약 4:14), 구약의 이사야는 코에 호흡이 그치면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사 2:22). 따라서 사람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곤을 느끼게 되고 지쳐서 쓰러지는 무력한 존재인 것입니다. 기드온과 그의 군대를 피곤하게 만든 것은 몇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① 수적인 열세 때문입니다.
미디안 군대는 메뚜기 떼처럼 중다하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았습니다(삿 7:12). 거기 비하면 기드온의 군대는 월등하게 적은 수였는데 그나마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가 버리고 겨우 삼백 명의 소수만 남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 나라의 일에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매우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멸망으로 가는 길에는 찾는 사람이 많으나 생명으로 가는 길은 좁고 협착하여 가는 사람이 적다고 하였습니다(마 7:13-14).
② 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의 무리들이 나팔 소리와 함께 항아리를 깨뜨리고 횃불을 높이 들었을 때 미디안 군대가 다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패주 하는 오렙과 스엡을 추격하며 잡아야 되었고, 그 뒤에는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까지 완전히 섬멸하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도 일조일석에 끝나지 않습니다. 산 넘어 산이라는 말과 같이 끝없는 전투를 계속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하였습니다(빌 3:12).
③ 주위 사람들의 비웃음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 5절에 “그가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종자가 피곤하여 하니 청컨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 나는 미디안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따르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숙곳 방백들은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어찌 네 손에 있관대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하고 조롱하였습니다(6절). 숙곳 사람에게 면박을 당한 기드온이 브누엘 사람들에게도 같은 부탁을 하였는데 그들에게서도 보기 좋게 거절당했습니다. 기드온도 사람인데 그의 자존심이나 개성대로라면 당장 그들과 맞붙어 싸우든지 결판을 내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2) 그래도 끝까지 따랐습니다.
저희 지휘관인 기드온이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이어서 숙곳 사람과 브누엘 사람들에게서 거듭 수모를 당하는 광경을 보고도 그 삼백 명 용사들은 끝까지 그를 따랐습니다.
① 하나님의 부르신 소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드온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름에 응하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비록 그들의 이름은 드러나지 않으나 기드온과 함께 거룩하신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끝까지 참고 따랐던 그들은 오래도록 기드온과 함께 무용담의 주역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2:32).
② 자기가 수행해야 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다가도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하거나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봉착하게 되면 그냥 포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 받은 사명의 확신이 없으면 돌아서고 맙니다. 바울은 오랫동안 옥고를 치르는 중에 그와 함께 길을 가던 동지들이 하나 둘씩 그의 곁을 떠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디모데후서 4:10-11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행 20:24).
③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피곤하나 따르는 자들에게 승리의 영광이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받으며 싸늘한 눈초리를 의식하면서도 끝까지 따를 수 있었던 것은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뜨리고 횃불을 치켜들면서 적진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체험하였습니다. 저들은 피곤하고 지쳐 있으면서도 대장 되는 기드온의 지시대로 끝까지 적장을 추격했고 마침내 세바와 살문나의 목을 잘랐습니다. 그토록 오만했던 숙곳 사람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 증거를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승리입니다. 어느 때나 그리스도인의 가는 길에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피곤하게 하는 요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의 척도를 가지고 보는 사람에게는 이 길이 너무나 확신이 있고 소망에 넘치는 승리의 길이요 축복의 길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승리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성령께서 함께 계시며 새 힘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사 40:29-31).
끝이 좋으면 다 좋다?
삿 8장 4~12절 / 조상호목사
2008년도 북경 올림픽 남자양궁 개인 결승전은 대한민국의 에이스 박경모 선수와 우크라이나의 루반 선수의 대결로 치러졌습니다. 루반 선수는 세계랭킹 5위에 올라있는데다 최근 상승세를 타고 있었기에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였지만, 한국의 박경모 선수는 침착하게 시작을 잘했습니다. 실수를 하지 않고 10점에 적중시키면서 2점차로 계속해서 앞서 나갔습니다. 3엔드를 마친 결과는 86-85, 사상 최초의 남자양궁 개인전 금메달 획득도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박경모 선수의 11번째 화살이 8점을 기록하며 9점을 맞춘 루반 선수에게 동점을 허용하자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단 한 번의 기회를 반드시 살려야 한다는 중압감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렇게 맞이한 마지막 화살에서 루반 선수가 10점에 적중시킨 것에 부담을 느낀 박경모 선수는 9점을 맞추는 바람에 결국 112-113, 단 한 점 차로 극적인 역전패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의 박경모 선수는 줄곧 1등을 달리다가 끝마무리를 잘하지 못해 눈앞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놓친 것입니다.
이처럼 운동경기에서 끝마무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아무리 시작을 잘해도 마무리를 못하면 패배할 수 있습니다. 옛날이야기 <토끼와 거북이>에 보면 토끼는 계속해서 앞서 갔지만, 중간에 잠을 자는 바람에 마지막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둑은 끝내기를 잘해야 한다.” 처음부터 바둑돌을 잘 두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끝내기를 잘하는 일입니다. 끝마무리를 잘하지 못하면 아무리 큰 대마라 할지라도 죽을 수 있습니다. 끝내기 잘하는 사람을 고수하고 부릅니다. 끝내기를 잘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초석을 잘 놓았다 할지라도 하수에 불과합니다. 하수는 계속 잘하다가 끝마무리를 못해서 대마를 잃고 땅을 치며 억울해 합니다. 다 이겨 놓은 바둑이라 할지라도 끝내기에서 잠깐 실수를 해서 한번 바둑알을 잘못 놓으면 다 이긴 바둑을 지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마무리는 더 중요합니다. 주위에 보면 ‘용두사미(龍頭蛇尾)‘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자성어의 문자적인 뜻은 용의 머리에 뱀의 꼬리라는 의미이지만, 이 말의 속뜻은 아주 거창하게 시작을 하였다가 아주 초라하게 끝을 맺거나 제대로 결말을 맺지 못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시작은 잘 했지만 끝마무리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용두사미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마무리를 잘못한 사람
성경에 보면 용머리처럼 멋지게 시작은 했지만 뱀 꼬리처럼 시시하게 인생을 끝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삼손이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삼손은 출생부터 특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아이를 출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마노아의 아내에게 아이를 임신하게 해주겠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삿 13:4~5) 삼손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이었습니다. 나실인이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릴 때부터 나실인으로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커서는 블레셋과의 싸움과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사로서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하지만 블레셋 여인 들릴라의 꾀임에 빠져 자기 힘의 비밀을 알려주는 바람에 머리를 깎이고 블레셋에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눈이 뽑힌 채 쇠사슬에 매여 맷돌을 돌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다곤 신전에서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처음에는 그럴 듯 했지만, 마지막에는 용두사미와 같은 인생을 살다가 사라졌습니다. 유다의 열 번째 왕인 웃시야도 용머리처럼 멋지게 시작은 했지만 뱀 꼬리처럼 시시하게 인생을 끝내버린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역대하 26장 4절과 5절을 보면, “웃시야가 그 부친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야훼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저가 야훼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16세에 왕위에 오른 후 왕으로선 보기 드문 산뜻한 출발을 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고 항상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를 형통케 해주셨습니다. 웃시야는 계속해서 가축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을 정비하고, 군대를 정비하고 최신식 무기로 무장하게 하고, 농업 기반을 조성하여 나라를 경제적으로 부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명성이 애굽에까지 전해질 정도로 그는 탁월한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교만하여져 제사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전에 들어가 분향하려다가 하나님의 노여움을 받아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왕의 처소가 아닌 별궁에 거하며 아들 요담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쓸쓸하게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신조차 선조들이 묻힌 무덤에 묻히지 못하고 다른 곳에 묻혀야 했습니다. 웃시야 역시 시작은 잘했지만, 끝마무리를 잘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도 시작은 잘했지만, 끝마무리를 못한 사람입니다. 그는 아름답고 준수하고 거기에 겸손함까지 겸비했고, 하나님을 경외하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위에 오른 후 달라졌습니다. 그는 야훼 하나님만을 따르며 백성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왕으로서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습니다. 제사장이 아니면서 교만하게도 번제를 드렸습니다. 또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얻은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치 없고 하찮은 것들은 진멸하되 값지고 좋은 것들은 빼돌리는 불순종의 죄를 범했습니다. 결국 그로 인해 그의 말년은 처참했습니다.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사울과 그 세 아들과 병기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삼상 31:4~6). 사울의 인생은 자살로 끝났습니다. 이처럼 삼손이나 웃시야 왕이나 사울 왕은 멋지게 시작은 했지만 시시하게 인생을 끝내버린 용두사미식의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마무리를 잘한 사람
이와 반대로 성경에 보면 끝까지 마무리를 잘한 사람들도 많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기드온이 그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기드온에게는 흠도 많고 단점도 많고 겁도 많았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 Sign을 요구할 만큼 믿음도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미디안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끝까지 마무리를 잘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그는 300명의 용사를 이끌고 가서 135,000명이나 되는 미디안 연합군들이 진을 치고 있는 진영을 에워 쌓습니다. 그리고 한밤중 파수꾼들이 교대하는 시간을 이용하여 일시에 나팔을 불며, 횃불을 숨겨둔 항아리를 부수어 불을 밝히고, “야훼와 기드온의 칼이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미디안 연합군들은 당황하여 자기들끼리 서로 칼을 휘두르다가 수많은 병사들이 죽었습니다. 그 때 얼마나 죽었는지 아십니까? 10절에서 “이 때에 세바와 살문나가 갈골에 있는데 동방 사람의 모든 군대 중에 칼 든 자 십이만 명이 죽었고, 그 남은 만 오천 명 가량은 그들을 따라와서 거기에 있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무려 12만 명이나 죽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겨우 300명의 용사를 이끌고 가서 135,000명이나 되는 미디안 연합군을 무찔렀는데, 이것은 세계 전쟁사에 유례가 드문 엄청난 일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우리는 기드온이 미디안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잘 압니다만, 그 다음에 그가 어떻게 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300명으로 135,000명을 이기고 승리를 거둔 기드온이 그 다음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그가 어떻게 전쟁을 마무리했는지 아십니까? 저는 오늘 이 시간 기드온이 마무리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135,000명의 미디안 연합군 중 12만 명은 죽고 살아남은 15,000명은 패잔병이 되어 삼십육계 출행랑을 쳤습니다. 그들은 이스르엘 평야에서 패배한 후 그들의 고향인 요단 동쪽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요단 동편으로 가기 위해서 배를 타야하기 때문에 반드시 요단강 나루턱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드온은 즉시 가까운 지역에 살고 있는 에브라임 지파에 사신을 보내어 도망치는 미디안 군대보다 앞서서 요단 나루턱을 장악하고 도망을 치는 패잔병들을 격파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의 요청대로 요단 나루턱을 장악하였고, 미디안 연합군의 두 장군 오렙과 스엡을 체포한 후 바위와 포도주 틀에서 각각 죽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무리가 완전히 된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사람들이 연합한 연합군의 두 왕인 세바와 살문나가 붙잡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왕과 그들을 따르는 패잔병을 처치하지 않고는 전쟁이 끝났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나아갔지만, 예상치 않은 장애물들을 만났습니다. 만약 이 장애물들을 극복하지 않으면 전쟁은 ‘용두사미(龍頭蛇尾)‘ 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연합군들이 전열을 다시 정비해서 반격해올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기드온은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끝까지 마무리를 잘해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기드온이 만난 장애물은 세 가지입니다.
1) 비 난
기드온이 만난 첫 번째 장애물은 비난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미디안 연합군의 주력 부대를 물리치고 패잔병 추적에 나선 기드온과 300명 용사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난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 여기에 나오는 ‘에브라임 지파’는 이스라엘 12지파 중 가장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여호수아 당시 므낫세 지파와 더불어 자기들이 기업으로 분배받은 땅이 다른 지파에 비해 좁다고 불평했던 적이 있습니다. 또한 사사기 12장에 보면 사사 입다에게도 기드온에게 했던 것과 같은 말을 하면서 불만을 토로할 만큼 불평을 잘 하는 투덜이 지파입니다. 그들은 기드온에게 자기 지파를 빼놓고 미디안 연합군과의 전쟁을 시작했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비단 에브라임 지파 뿐 아니라, 므낫세와 아셀과 스블론과 납달리 지파를 제외한 많은 지파들이 미디안 연합군과의 전쟁에 빠졌습니다(삿 6:35).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파들은 잠잠히 있는데, 에브라임 지파는 전체 지파 중에서 자기들이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기드온과 300용사의 가는 길을 가로 막으며 불평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도 1절 하반절을 보면, 아주 ‘크게’ 불평을 하며 비난을 한 것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에게 ‘그 동안 135,000이나 되는 대군으로 무찌르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 수고 많이 했다’ 등의 말로 위로하고 격려하기는커녕 불평하고 비난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은 그들과 다투거나 잘잘못을 가리기 위해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가 한 일과 너희 지파들이 미디안 연합군의 두 장군 오렙과 스엡을 잡아 죽인 일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느냐’라고 칭찬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화가 풀렸습니다.
2) 무관심
기드온이 만난 두 번째 장애물은 무관심입니다. 당시 상황은 300용사들이 밤새도록 전쟁을 치르고 또한 도망을 치는 미디안의 패잔병들을 쫓다보니 다들 허기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300용사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기 위해 숙곳 사람들에게 “나를 따르는 백성이 피곤하니 청하건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 나는 미디안의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의 뒤를 추격하고 있노라.”고 말했습니다(5절). 여기 기드온이 떡을 부탁한 숙곳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들은 이방 사람들이 아닙니다. 기드온과 같은 민족인 갓지파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최선을 다해 떡과 물을 제공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상과 다르게 반응했습니다. 다같이 6절을 보겠습니다. “숙곳의 방백들이 이르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하는지라.” 그들은 기드온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자기들을 대신하여 전쟁을 치르며 고난을 받고 있는 형제들이기 때문에 부족하더라도 나름대로 성의를 표시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러나 숙곳 사람들은 외면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숙곳에서 약 9Km 떨어진 브누엘로 가서 또 떡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브누엘에도 숙곳과 마찬가지로 갓지파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는 적들의 보복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불평하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무관심한 사람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불평을 했지만, 숙곳과 브누엘에 살고 있는 갓지파 사람들은 아예 무관심했습니다.
3) 피곤함
기드온이 만난 세 번째 장애물은 피곤함입니다. 기드온의 300용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철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밤새도록 격전을 치르는 바람에 그들은 매우 피곤한 상태였습니다. 다같이 4절을 보겠습니다.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자 삼백 명이 요단 강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며” 여기 ‘비록 피곤하나’에서 ‘피곤‘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가’인데, 이 말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매우 지쳐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밤이 새도록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부수고, 횃불을 들고 야훼의 이름과 기드온의 이름을 부르며 함성을 질러댔습니다. 거기다가 도망치는 15,000명의 적들을 진멸하기 위하여 추격하는 중입니다. 전쟁터였던 이스르엘 평지에서 요단까지 왔고, 또 강을 건너 숙곳까지 진군하였으니 그 거리가 대략 100km나 되었습니다. 그들은 말할 수 없이 피곤한 상태입니다. 목이 마르고 배도 고팠습니다. 기드온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숙곳 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자기 병사를 위해 마실 것과 먹을 것을 달라고 부탁했다가 수모를 겪은 것입니다. 보통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더 이상 패잔병들을 추격하지 않습니다. 괜히 추격하였다가 오히려 반격을 당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달랐습니다.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기드온과 300용사들은 말할 수 없이 피곤한 상태였지만, 미디안 사람들을 그들의 손에 붙여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끝까지 추격하였습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세바와 살문나가 도망하는지라. 기드온이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그 온 진영을 격파하니라.” 기드온은 300용사를 데리고 끝까지 추격하여 미디안 연합군의 세바와 살문나 두 왕을 체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세바와 살문나 왕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남은 패잔병들도 완전히 격파시켜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기드온은 협조는커녕 비난을 일삼는 사람들과 무관심한 사람들 속에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피곤한 상태에서도 끝까지 마무리를 잘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은 아닙니까? 혹시 협조는커녕 오히려 비난하고 불평하는 사람들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추는 사람은 아닙니까? 혹시 피곤하다고 용두사미식의 인생을 살았던 삼손이나 웃시야 왕이나 사울 왕처럼, 마무리에 실패하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저는 어제 메시지를 준비하다가 본문 4절 하반절의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여’라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다가 매우 귀한 교훈을 발견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 각자에게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학생이라고 한다면 ‘비록 피곤하나 포기하지 않고 공부하여’, 직장인이라고 한다면 ‘비록 직장 일이 피곤하나 포기하지 않고 일을 하여’, 사업가라고 한다면 ‘비록 사업에 어려움이 있어 피곤하나 포기하지 않고 사업하여’ 라고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신앙생활에 적용한다면, ‘비록 피곤하나 포기하지 않고 봉사하여’, ‘비록 피곤하나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여’, ‘비록 피곤하나 포기하지 않고 순종하여’라고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피곤하다고 가던 길을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까? 멈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드온처럼 끝까지 인내함으로 마무리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아직까지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믿음으로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기드온처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는 사람이 승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어느새 12월이 되었습니다. 12월을 맞이하면 우리는 더 많이 긴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끝내기를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끝마무리입니다. 1월을 잘시작했다 할지라도, 11개월 동안 힘차게 달려왔다 할지라도 마지막 마무리에 실패하면 2011년은 실패한 것입니다. 독일 속담에 “엔데 굿, 알레스 굿(Ende gut, alles gut)”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끝만 좋으면 뭘 하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좋아야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이 속담의 의미는 끝마무리가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아무리 잘 시작했다 할지라도 마무리가 좋지 못하면 모든 것이 헛수고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은 잘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마무리가 좋으면 나름대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미국의 39대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는 재임 당시 우유부단한 정책과 국내 경제정책의 파탄 등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보통 한 번 당선이 되면 대부분 재선이 되는데, 공화당의 레이건 후보에게 패배해서 재선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퇴임 후 ‘카터 센터’를 설립하여 지구상에서 야기되는 중대사건에 분쟁해결사로서의 조정역할을 하고 있으며, 세계 평화와 인권을 위해 크게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그의 공로가 인정되어 2002년에는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습니다. 또한 국제 헤비타트에서 펼치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끝이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많은 출판사에서 앞 다투어 그에 관련된 저서를 내고 있는데, 대부분의 책들이 ‘아름다운 노년’, ‘퇴임 후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지미 카터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유종지미(有終之美)’, 끝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은 잘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마무리가 좋으면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미 카터처럼 시작은 시시하게 했어도 마무리를 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011년도 마무리를 잘 하여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제가 자주 이야기한 적이 있는 옛날 이야기 하나 다시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옛날에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짚신 장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똑같은 짚신을 만들어 팠는데, 아버지가 만든 짚신은 금방 다 팔려도 아들이 만든 짚신은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아무리 아버지에게 물어봐도 아버지는 그 비법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어, 막 돌아가시려는 아버지의 사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이 막무가내로 물었습니다. “아버지, 이제 돌아가실 거니까 비법 좀 가르쳐주세요.” 그러나 아버지는 곧장 대답을 않고 오래 시간을 끌다가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딱 세 마디를 대답했다고 합니다. “털 털 털” 처음 아버지가 남긴 그 말을 들었을 때, 아들은 무슨 의미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와 아들이 만든 짚신은 똑같은 재질의 똑같은 짚신이었지만, 마지막으로 털을 어떻게 처리했느냐가 달랐습니다. 아들은 짚신을 만든 후 그냥 시장에 가서 팔았지만, 아버지는 짚신을 시장에 내놓기 전에 마지막으로 삐쳐 나온 털을 가위로 예쁘게 잘랐답니다. 짚신 털이 나와 있으면 신는 데야 불편이 없지만,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똑같은 짚신이지만, 털을 잘라낸 짚신을 사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보이지만, 마지막으로 짚신 털을 예쁘게 자른 것이 잘 파는 비법이었던 것입니다. 짝뚱과 명품의 차이가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배놓을 수 없는 차이는 끝마무리 작업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명품은 마무리 작업이 완벽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명품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끝마무리를 잘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이곳 크라이스트처치에 지난 11개월 동안 일도 많고 탈도 많았습니다. 2월23일 대지진이 발생한 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잊고 싶은 일도 많고,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 일들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이제 얼마있지 않으면 2011년도 끝나기 때문에 남은 기간을 잘 마무리 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드온처럼 끝까지 마무리를 잘하시기 바랍니다. 지미 카터처럼 끝이 아름다운 인생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2011년 남은 한 달을 잘 마무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희망찬 새해를 멋지게 시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리석은 숙곳 사람들
삿 8장 4~12절 / 엄기호목사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기드온은 우리가 매우 잘 아는 사사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으며, 은혜의 징표를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가진 자였습니다. 또한 전쟁의 승패가 사람의 숫자나 무기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300명의 용사와 함께 미디안 연합군을 섬멸한 용맹스런 사사였습니다.
본문에는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칼을 든 자 12만 명을 섬멸한 뒤, 그 중 두 왕 세바와 살문나가 1만 5천 명의 군사를 데리고 이미 요단강을 건너 자기 나라로 도망간 사실을 알고서는 그들을 추격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한 번의 격전으로 인해 기드온도, 300명의 용사도 모두 지쳐있는 상태였습니다.
이에 기드온은 자신과 병사들을 위해 체면 불구하고 숙곳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숙곳 사람들은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가 세바와 살문나의 1만 5천 명을 이겨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그들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은‘혹시라도 나중에 미디안 왕 세바와 살문나로부터 보복을 받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후환을 두려워한 나머지 구제를 거절한 것입니다.
이에 숙곳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숙곳 사람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기적이고 기회적인 생각으로 현실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밖에 모릅니다.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고 자기중심으로만 살기 때문에 이웃과 협력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기회를 봐서 자기에게 유익과 영광이 돌아올 때만 협력합니다.
숙곳 사람들은 갓지파의 후손들입니다. “갓”이라는 뜻은 “군대”라는 뜻으로 12지파 중 가장 큰 군대처럼 왕성한 지파입니다. 갓지파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볼 때 많은 전투를 치렀으며 그때마다 승자로 등장합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전쟁 전문가들입니다. 이에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그들이 판단할 때, 300명이 1천 5백 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리석어서 기드온의 전쟁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성전(Holy War)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위해 예비하신 축복도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으며, 귀에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숙곳 사람들처럼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숙곳 사람들처럼 인간의 눈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이 바라보는 눈은 절대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인본주의는 매우 실리적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어느 순간에 그 헛됨이 드러나게 되고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본주의는 그 안에 감춰진 무한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한편 사사기 8장에는 기드온의 지혜와 분별력 있는 행동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에브라임 사람들이 불평을 토로했습니다. 왜 자기 지파를 전쟁 처음부터 기용하지 않고 맨 나중에 기용했냐는 것입니다. 사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을 비난하고 불평을 한 것은 전체 지파 중에서 자신들이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지도자로서 이 상황을 지혜롭게 대처해 넘어갔습니다.
기드온은 겸손한 사람이요 지혜가 탁월한 사람입니다. 그는 변론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평하는 자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허한 자세를 보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드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드온을 왕으로 추대하려 할 때에도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왕 되심을 강조하면서 거절했습니다(삿 8:22,23).
오늘날 교회에서도 늘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주도권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만 인정받으려 하기 때문에 시기하고 질투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는 기드온처럼 분별력을 가질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순간순간 직면하는 현실에서 분별을 잘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는 것입니다. 분별은 곧 지혜로운 안목입니다. 어떤 것이 사실이고 거짓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요즘과 같은 때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받아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습니다.
구제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숙곳 사람들은 이기적이었기 때문에 배고픈 이웃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되 구제를 통해 복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신 15:10 ; 잠 11:24, 25).
구제는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마땅한 의무요, 축복의 통로입니다.
교회도 구제를 많이 하는 교회가 부흥하며,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이에 우리는 어려운 가운데 구제하고, 선교하며, 제단을 위해 심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예비하신 축복받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 38절에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숙곳 사람들처럼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는 성도가 되어야합니다.
주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숙곳 사람들은 인간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기드온과 함께 300명의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정병들, 피곤하지만 열심을 다하는 사람을 통해 1만 5천 명의 미디안 잔당들, 곧 할 수 없다고 피신해 있는 사람들을 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숙곳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인간의 뜻과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사 기드온은 우리 인간이 보기에 매우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삿 6:1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볼 때 약하다고 하는 자를 통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어리석은 자를 택하여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기드온은 전쟁에 나갈 때 무기를 들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항아리, 횃불, 나팔을 들고 나갔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인간의 생각이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따라 순종함으로써 전쟁터에 나가 승리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항아리를 깨뜨리는 것과 같은 완전한 헌신으로, 횃불과 같은 진리의 빛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복음의 나팔을 들고 세상에서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최근 뉴스를 들을 때마다 어떤 것이 진실이고 어떤 것이 거짓인지, 누가 거짓을 행하고 누가 진실을 행하는지 분별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 세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일을 잘 한다고 해도 주인의 뜻을 모르고 일 한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 금식을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해도, 그 모든 것들이 주인의 뜻과 반대 되는 것이라면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제해야 합니다. 매 순간 기뻐하고 온전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축복해 주시고 모든 것을 풍성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말 잘하면 됩니다
삿 8장 1~3절 / 조상호목사
1.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 2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3 나는 너희가 도와 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 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니라 4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으며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5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보다 앞서 요단 강 나루턱을 장악하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하건대 나를 건너가게 하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6 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제2차 세계대전 중, 두 명의 유명한 정치가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연설을 잘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정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독일의 히틀러였습니다. 그가 연설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열광을 했습니다. 그는 게르만 민족에게 적개심과 분노를 일으키게 해서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터에서 죽게 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연설가이기는 했지만, 중오심을 불러일으킨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었습니다. 그는 영국이 독일의 공격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연설을 통해 영국 국민들에게 소망과 용기를 심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바칠 것은 오직 꿈과 눈물과 피밖에 없다는 처칠 수상의 연설을 들은 영국 국민들은 절망과 좌절에서 소망과 용기를 가지고 다시 일어나서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처럼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말의 영향력은 대답합니다. 야고보서 3장 4절과 5절에서,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혀의 영향력, 말의 영향력은 매우 큽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의 감정을 천당으로 옮겨놓기도 하고, 지옥으로 옮겨놓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적개심과 분노를 일으키게 하고, 소망과 용기를 심어 주기도 합니다. 말 한 마디가 전쟁을 일으키게 만들기도 하고, 전쟁을 그치게도 만듭니다. 때때로 말 한 마디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바로 그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등장하기 전, 정치, 군사, 종교, 법률 등을 관장하는 사사로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인물입니다. 성경에 보면, 기드온의 몇 가지 특징이 나와 있는데, 그 중에 한 가지는 기드온은 말 잘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말 잘한다’는 것과 ‘말 많이 한다’는 것을 같은 의미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을 보고, ‘야, 저 친구. 말 잘하는데. 어쩌면 저렇게 말을 잘하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말 많이 하는 것과 말 잘 하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말을 많이 하는데도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힘들게 한다면, 그 사람은 말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은 많이 하지 않지만, 한 두 마디의 말로도 상처 받은 사람을 위로하고, 실망한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열 받은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게 만든다면, 그 사람은 말 잘하는 사람입니다. 사사 기드온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한밤중에 300 용사를 이끌고 가서 메뚜기 떼처럼 포진한 미디안 연합군과 싸워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한밤중에 기습공격을 받고 패배한 미디안 연합군은 혼비백산하여 에브라임 산지로 도망을 쳤습니다. 기드온은 그들을 진멸시키기 위하여 에브라임 산지까지 추격합니다. 이때 그곳에 살고 있던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미디안의 두 지도자 오렙과 스엡을 잡아 죽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머리를 베어 기드온 앞에 와서 말합니다. 다같이 1절을 보겠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 여기 ‘크게 다투었다’는 말은 원어로 ‘리브’인데, ‘불평하다, 책망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쉽게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 족속도 전쟁에 동참할 수 있었는데, 기드온 당신은 왜 우리 족속을 왕따 시킨 채 미디안 연합군과 전쟁을 했습니까?’라고 불평하며 기드온에게 따졌다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의 말을 언뜻 들으면 기드온이 그들을 왕따 시킨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처음 기드온이 미디안 연합군과 전쟁을 시작할 때, 에브라임 사람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구경만 하고 있었을 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을 위해 한 명이라도 아쉬울 때, 그들은 전쟁에 승산이 없음을 알고 뒷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미디안 연합군이 기드온의 300명의 소수정예 병력에게 패하여 자기들이 사는 산지로 도망쳐 오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전쟁에 동참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전체 지파 중에서 자신들이 주도권(hegemony)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섭섭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행동한 것은 교묘하게 감춘 채 오히려 기드온이 자기들을 왕따 시켰다고 불평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한자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도둑이 도리어 몽둥이를 든다는 의미로서, 잘못한 사람이 오히려 잘 한 사람을 나무란다는 말입니다.
어느 날 우체국에서 편지 정리를 하던 한 직원이 이상한 주소가 쓰여진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주소가 ‘하늘나라, 하나님이 계신 곳‘ 이었습니다. 한 우체국 직원은 호기심에 그 편지를 뜯어 내용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갑자기 돈 10만이 필요합니다. 급히 쓸데가 있는데, 돈은 구할 수 없고... 정말 어떻게 도무지 할 수가 없습니다. 제발 10만원 좀 아래의 주소로 보내 주세요.“ 그 직원은 어이가 없었지만, 불쌍한 마음이 들어 다른 직원들과 논의한 끝에 5만원을 편지에 적혀있는 주소로 보내주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우체국 직원은 ‘하늘나라,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는 주소가 적힌 편지를 또 다시 보았습니다. 그래서 열어보았더니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하나님, 보내주신 돈을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10만원의 절반인 5만원 밖에 없더라고요. 그래도 잘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 추신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아무튼 나머지 돈은 우체국 놈들이 뜯어 먹었나 봅니다. 세상 말세입니다.“
이런 사람을 적반하장 격으로 행동한다고 말합니다. 주위에 보면 자신이 잘못을 해놓고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소리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 적반하장격이라고 말하는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에브라임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방귀 뀐 놈이 화를 낸다’고, 그들은 미디안 연합군과 전쟁을 시작할 때는 구경만 하고 있다가, 전쟁이 끝나자 오히려 기드온에게 자기들을 왕따 시켰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통사람 같으면 화를 내며 에브라임 사람들과 심한 언쟁을 했을 것입니다. “아니, 당신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당신들이 그러한 말을 할 자격이 있소? 처음 전쟁을 시작할 때는 미디안 연합군이 무서워서 코빼기도 내밀지 않다가, 이제 와서 우리 족속도 전쟁에 동참할 수 있었는데 왕따를 시켰다고? 양심이 있으면 똑바로 말하시오. 다른 족속들이 다 알고 있소.” 그러나 기드온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겸손하게 마음을 달래주는 사람
그는 겸손하게 에브라임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었습니다. 다같이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붙이셨으니 나의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하니라.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니라.” 여기 ‘끝물 포도’와 ‘맏물 포도’라는 말은 포도 농사를 지을 때 쓰는 말입니다. ‘끝물 포도’는 포도 열매를 거의 다 수확한 후 마지막 끝 무렵에 거두는 포도를 의미하는데, 이 ‘끝물 포도’는 처음에 거두는 ‘맏물 포도’보다 맛이 시고 질도 훨씬 떨어집니다. 그래서 상품 가치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에브라임 산지의 ‘끝물 포도’가 자기 고향에서 생산되는 아비에셀의 ‘만물 포도’보다 훨씬 좋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미디안 연합군과의 전쟁에 처음부터 참가한 자기 집안사람들이 세운 공로보다, 전쟁에 뒤늦게 참여한 에브라임 사람들이 세운 공로가 훨씬 크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에브라임 사람들은 미디안의 두 지도자 오렙과 스엡을 잡아 죽였고, 도망을 치는 미디안 군인들의 퇴로를 차단하는 등, 나름대로 큰 역할을 하였음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전쟁의 전 과정을 주도했던 기드온과 그가 속한 가문의 업적은 에브라임 지파의 업적에 비해 뛰어났으면 났지,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에게 영웅 대접은커녕 오히려 비난을 하는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조차 그들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마음을 달래주는 말을 했습니다. 기드온은 자기 집안이 이룬 것보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이룬 것이 훨씬 많다고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여주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에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기드온과 같이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여주는 사람을 좋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옛날 친구인 두 사람이 고기를 사려고 푸줏간으로 들어갔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은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여봐라, 고기 한 근만 다오.” 그러자 푸줏간 주인은 “예, 그러지요.”라고 말하며 고기 한 근을 잘라주었습니다. 함께 온 다른 사람도 말했습니다. “여보게, 나도 고기 한 근만 주게나.”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보다 고기를 더 넉넉하게 잘라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먼저 고기를 받은 사람이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놈아, 똑같이 한 근을 달라고 했는데, 어째서 내 것보다 더 크게 자르는 것이냐?” 그러자 푸줏간 주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예, 별것 아닙니다. 손님 고기는 ’여봐라‘가 잘랐고, 이분 고기는 ’여보게‘가 잘랐을 뿐입니다.”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말 한 마디로 사람의 마음을 열 받게 할 수도 있고, 반대로 말 한 마디로 사람의 마음을 달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의 겸손한 말로 상대방의 화를 누그러뜨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8장 3절 하반절을 보면,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기드온은 한 마디의 말로 에브라임 사람들의 노여움을 가라 앉혔습니다. 그는 ‘끝물 포도’와 ‘맏물 포도’ 이야기로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화를 누그러뜨렸습니다. 한 마디의 겸손한 말로 에브라임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준 것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기드온처럼 말 잘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드온처럼 말은 많이 하지 않아도, 한 두 마디의 말로도 상처 받은 사람을 위로하고, 실망한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열 받은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게 만드는 말 잘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하나 되게 하는 사람
또한 그는 더불어 하나 되게 하였습니다. 그는 한 마디의 말로 에브라임 사람들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놓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좀 못된 근성이 있었습니다. 사사기 11장에 보면,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사사 기드온은 이미 죽고, 입다라는 사사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입다는 생명 걸고 나가 싸워서 암몬 족속을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이때에도 에브라임 사람들은 전쟁에 동참하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다가, 입다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자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불로 너와 네 집을 사르리라.”(삿 12:1)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개 버릇 남 못 준다’는 말처럼, 에브라임 사람들은 옛날 버릇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무슨 버릇입니까? 투덜거리는 버릇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피해의식이 지나쳐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입다에게 자기들을 왕따 시켰다고 불평을 한 것입니다.
주위에 보면, 피해의식이 지나쳐 피해망상에 빠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젊었을 때 힘들게 시집살이를 하다가 피해의식을 가지게 된 사람의 마음이 치유되지 않고 심해지면, 나중에는 시어머니가 자기를 죽이려고 밥에 독약을 탔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이 젊었을 때 외도를 해서 심각한 피해의식을 가지게 된 사람의 마음이 치유가 되지 않으면, 남편이 조금만 늦게 와도 '오늘 어떤 여자 만났어?'라고 물어보고, 자기 생일에 꽃을 사와도 ’왜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하는 거지?‘라고 남편이 자신의 외도를 덮기 위해서 꽃을 사왔다고 생각합니다. 피해의식이 지나친 사람은 목사가 돈 많은 성도와 눈만 마주쳐도, ‘글쎄 말이야. 목사가 돈 많은 성도만 좋아해. 내가 봤어’라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피해의식이 지나친 사람은 한쪽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만 해도, ‘저 사람들이 내 얘기 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여 두 사람에게 슬그머니 찾아갑니다. 피해의식이 심한 사람들은 매사에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있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퍼뜨리고, 매사에 신경을 곤두 세우고, 매사에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피해의식이 심한 사람은 하루빨리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물론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어렵게 만듭니다.
에브라임지파 사람들은 스스로 심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기 지파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사 입다에게 “암몬 자손과 싸우러 갈 때 왜 우리를 왕따 시켰느냐, 우리가 너를 더 이상 사사가 되지 못하도록 너와 네 집을 반드시 불 태워버릴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에브라임 사람들은 참으로 열 받게 만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40년이 훨씬 지났지만, 여전히 그들의 투덜거리는 습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불평과 협박을 들은 입다가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다같이 사사기 12장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나는 너희가 도와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야훼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니라.” 입다는 단단히 화가 났습니다. 물론 입다의 말은 절대로 틀리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그의 말은 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입다의 이 말이 에브라임 사람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입다가 속한 길르앗 사람들과 에브라임 사람들이 서로 갈등하다가 마침내 전쟁까지 하게 됩니다. 입다는 억지를 부리는 에브라임 사람들이 요단강 나루터로 도망하는 것을 보고, 그곳에 군사를 보내어 에브라임 사람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12장 6절에 보면, 입다가 에브라임 사람들을 죽일 때 재미있는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여기 ’쉽볼레’라는 말은 ‘시냇물’을 의미하는데, 입다는 이 발음을 하게 해서 에브라임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분했습니다. 경상도 사람들이 ‘쌀’이라는 말을 잘 하지 못하고 ‘살’이라고 발음하는 것처럼, 에브라임 사람들은 ‘쉽볼레’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십볼레’라고 발음을 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입다는 요단강 나루터에서 ‘쉽볼레’라는 발음을 하지 못하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잡아 죽였는데 그 수가 무려 42,000명이나 되었습니다.
기드온과 입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두 사람은 비슷한 상황 속에서 거의 똑같은 말을 들었지만,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심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왕따를 당했다고 억지를 부렸을 때, 입다는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그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에브라임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말로 힘들게 하며 억지를 부렸을 때, 그들과 화목하고 이스라엘 공동체를 더불어 하나 되게 했습니다. 1990년 1월과 2월 두 달 동안, 미국은 ‘사막의 폭풍(Dessert's Storm)’이라는 이름으로 이라크와의 전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강제로 점령하자,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결국 2개월 만에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은 이라크에 비해 소수의 군인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죽임을 당한 다국적군들을 조사해봤더니 이라크와의 전투에서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소수이고, 대부분 다국적군 내의 포대원들이 실수로 탄약과 포를 부주의하게 다루다가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즉 적군이 아닌 아군에 의해서 사상자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우리주변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여러분, 믿음이 약한 성도들이 세상의 극심한 핍박 때문에 상처를 받는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요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예수 믿는다고 핍박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핍박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라, 교회안의 다른 성도들 때문에 상처를 받습니다. 험담과 수군거림과 다른 사람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자기위주의 판단과 말들 때문에 교회와 신앙생활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교회를 떠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적은 교회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이간질시키는 악한 마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비록 다윗은 나이가 어렸지만,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그에게 망신을 주며 책망하는 형 엘리압과 맞붙어 싸울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형이 적이 아니라 골리앗이 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편끼리 싸우다가 적군인 블레셋만 이롭게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다윗처럼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적은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어둠의 세상을 주관하는 악한 영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물론 주위에 보면 에브라임 사람들처럼 억지를 부리며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에 입다처럼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따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감정이 상하고 서로 비난을 하다가 나중에는 원수가 되고 맙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기드온처럼 여유를 가지고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대해 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 5:9). 그러므로 입다처럼 정죄하는 사람이 아닌, 기드온처럼 더불어 하나 되게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간에 갈등케 하는 사람이 아니라, 화평케 하는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전라남도 함평군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전라남도 함평에서는 매년 4월이 되면 ‘함평 나비축제’가 열립니다. 이 행사는 대한민국의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거행하는 지역행사 중 가장 큰 행사로서,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나비축제 기간 동안 50만 명 이상이 다녀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평소에 KTX가 함평역에서는 정차하지 않는데, 나비 축제 기간 중에는 예외적으로 함평역에 하루에 세 번이나 정차한다고 합니다. 또 관광객을 유치하여 농.특산물을 판매함으로 지역 경제기반도 다지고, 관광홍보를 통해 함평군을 전국에 널리 알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함평 나비축제’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행사가 된 배후에는 이석형 전 함평군수가 있습니다. 이석형이라는 젊은 군수가 함평에 부임했을 때, 함평군은 모든 면에서 꼴찌였습니다. 재정자립도가 10%에 지나지 않았고, 천연, 관광, 산업자원도 없었으며, IMF 때라 상황은 더욱 나빴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낙후된 주민의식이었습니다. 특히 공무원들이 자주 쓰던 말이 있었는데 ‘어차피’와 ‘차라리’라는 말이었습니다. 공무원들은 ‘어차피 안 될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가만히 있자' 는 말을 공공연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바꾼 것이 '어차피' 와 '차라리' 라는 말 대신, ’도리어‘와 ’오히려‘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 도리어 잘 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함평군을 살릴 방법을 생각하다가 함평천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과거 함평천은 비가 오면 범람하여 골칫거리였던 하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석형 군수는 비만 오면 범람하는 하천에 공사를 한 후 그곳에 유채꽃을 심어 유채꽃밭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유채꽃밭을 거닐다가 문득 주위를 날아다니는 나비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나비 축제를 구상하게 되었고, 각고의 노력 끝에 대규모 나비공원을 조성하여 그 유명한 함평나비축제를 열게 된 것입니다. 현재 함평을 나비 하나로 세계적인 축제의 명소로 만든 이석형 전 함평군수는 나비축제를 개최하게 된 배경과 과정, 이에 따른 지역경제 파급효과, 등 지방자치단체의 창조경영사례를 소개하는 강사가 되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아카데미 강좌를 개최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이석형이라는 한 사람 때문에 전체 함평군이 바뀌었습니다. 이석형이라는 말 잘하는 한 사람 때문에 함평군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벤치마킹 대상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말 잘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사사 기드온처럼 상처 받은 사람을 위로하는 사람, 실망한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 열 받은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게 만드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기드온처럼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입다처럼 관계를 깨뜨리는 사람이 아닌, 기드온처럼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입다처럼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아닌, 기드온처럼 주위 사람들을 화목케 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받고, 칭찬받는 복된 인생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무리를 잘하는 믿음의 고수
삿 8장 1~2절 / 조상호목사
지난 주 여러분들이 기도해 주셔서 뉴질랜드 하나님의 총회에 잘 다녀왔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지난 금요일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번 총회를 다녀오면서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크라이스처치에서 총회 장소인 Tauranga로 직접 가는 비행기가 없었기 때문에 Wellington에서 다시 갈아타야 했습니다. 그래서 Tauranga로 가면서 두 번, 총회를 마치고 Tauranga에서 크라이스트처치로 돌아올 때는 오클랜드에서 다시 한번 갈아탔기 때문에 역시 두 번 등, 총 4번의 비행기를 타고 총회를 다녀오면서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깨달음을 주시려고 그랬는지, 4번의 비행기를 탈 때마다 날개 부근의 창가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상항을 자세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비행기는 이륙할 때 모든 엔진을 돌려 엄청난 힘으로 앞으로 질주하여 이륙을 합니다. 그리고 비행을 한 후, 목표한 공항에 이르면 비행기 기장은 속도를 줄이면서 날개 끝을 가능한 한 넓게 편 다음, 그 날개를 앞으로 구부려서 앞에서 불어오는 맞바람을 이용하여 멈추는데 도움이 되게 합니다. Tauranga에서 오클랜드로 올 때는 18명이 탄 소형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소형 비행기여서 그런지 스튜어디스도 없고 기장과 부기장 두 명만 있었습니다. 또 조종실과 승객들 사시에 깐막이를 해놓지 않아서 조종실의 모습을 환히 볼 수 있었습니다. 소형 비행기가 비바람에 얼마나 요동을 치는지, 꼭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마지막 오클랜드공항 활주로에 비행기가 착륙을 할 때 기장의 얼굴을 얼핏 보니까, 그 동안 쓰고 있던 까만 선그라스를 벗은 채, 부기장과 나누던 이야기도 멈추고 입을 굳게 다물고 조종간을 붙잡고 있는 비장한 기장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무리 훌륭하게 이륙을 하여 원하는 지점까지 날아왔다 할지라도, 마지막 착륙이 잘못되면 그 동안의 모든 노력은 헛수고가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에 기장은 긴장한 것입니다. 성공적인 착륙이 되어야만 비로소 비행에 성공한 것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까지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한 사람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출발이 훌륭하고, 과정이 탁월했다 할지라도 마지막 결론이 잘못되어지면 그 사람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시작도 중요하고 과정도 중요하지만, 마지막 결론은 더 중요합니다. 1990년대 중반, 미국의 기독교계 뿐 아니라 사회 전반을 뒤흔들었던 엄청난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섹스 스캔들 사건입니다. 그것도 일반 사람이 일으킨 섹스 스캔들이 아니라, 기독교 단체 중 가장 큰 네트워크(Network)를 갖고 있는 방송국의 “The Lord”라는 TV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짐 베이커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여비서와 스캔들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미국에서 기독교가 수많은 멸시를 받았습니다. 우선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여러 가지 모금이 반 이하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전도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가정을 방문하여 전도를 다녀도 기독교 문화를 기반으로 세워진 미국이기 때문에 전도하는 사람을 반갑게 맞아주었는데, 그 섹스 스캔들이 터지고 나서는 전도자를 문밖에서 문전 박대하고 복음에 대해 반감을 갖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많아졌다고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주위를 보면 짐 베이커목사처럼, 훌륭하게 일을 시작했던 분이 나중에 잘못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사사 기드온이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사사로서 훌륭하게 출발했지만, 나중에 마무리가 잘 못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기드온의 두 가지 모습을 통해 <마무리의 중요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훌륭하게 출발한 영웅
우리가 지난주에 이미 살펴본 것처럼 기드온 단 300명의 소수의 병사를 거느리고 무려 135,000명이나 되는 엄청난 미디안 연합군을 박살내었습니다. 엄청난 대승을 거둔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에브라임 사람들이 찾아와서 불평하며 시비를 겁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찜이뇨 하고 크게 다투는지라.”(8:1) 7장 24절 이하를 보면 에브라임 지파는 미디안과의 전쟁 끝 무렵에 기드온으로부터 전쟁 참여 요청을 받고 그 요청에 따라 늦게 전쟁에 참여하여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섭섭이’가 들어갔는지, 그들은‘왜 우리 지파를 처음부터 부르지 않았느냐’고 기드온에게 따지며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스스로 가나안 정복의 영웅인 여호수아를 배출한 뼈대가 있는 지파인데, 므낫세 지파 출신, 그것도 지극히 작은 집안 출신(6:15)인 기드온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처음 발발했을 때는 기드온에게 협조도 하지 않고 남몰라하며 조용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어 승리를 눈앞에 두었을 때, 슬쩍 참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불평 불만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드온에게 전쟁에 늦게 참여한 것을 사과해야 하는데, 그들은 ‘왜 우리를 이같이 대접하느냐’, ‘왜 우리 지파를 처음부터 부르지 않고 늦게 불렀느냐’고 투덜거립니다. 그때 기드온이 어떠한 모습을 보여줍니까?
1)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다
첫째로 기드온은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첫째로 기드온은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높여 고함을 치는데, 기드온은 어떻게 합니까? 그는 자존심을 내세워 에브라임자파에게 ‘너희들이 한 일이 뭐가 있다고 그래? 가만히 앉아 있다가 늦게 전쟁에 참여한 주제에 이제 와서 시비를 걸고 야단이야?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하는군. 나는 뭐 자존심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 줄 알아!’라고 말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동족끼리 치고받는 참극이 벌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무슨 말입니까? ‘당신들 에브라임 지파의 가장 나쁜 포도가 우리들의 가장 좋은 포도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고 당신들이 최고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드온은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의 문제 중에 많은 부분은 자존심 싸움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제삼자가 들어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서로 간에 자존심 때문에 서로 등을 돌리고 원수지간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자존심 싸움은 사단이 좋아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자존심을 내세우며 자존심 싸움을 하면 사단에게 넘어간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분명히 화평케 하려고 오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과 화평케 하라고 말씀하신 줄로 믿습니다.
2) 온유한 대화를 하였다
둘째로 기드온은 온유하게 대화를 했습니다. 그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가 길길이 날뛰며 야단법석을 부리는데도 온유한 말로 대화를 했습니다. 결국 그의 온유한 말은 에브라임 지파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게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터프한 사람이 아니라, 사실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승리합니다. 마태복음 5장 5절에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자가 그의 스승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찾아가서 “선생님. 제자들에게 남길 말씀이 없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스승은 “내 입을 보라”고 하면서 입을 벌리면서 자신의 입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내 이가 있느냐?” “하나도 없습니다.” “혀는 있느냐?” “혀는 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에게 가서 이것을 전하라.” 그리고 나서 죽었다고 합니다. 노자가 남긴 교훈은 부드러운 것만이 남고 결국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강한 것은 뽑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부드러운 마음으로 싸움을 걸어오는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오히려 유순한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큰 다툼으로 확대되지 않았습니다. 기드온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온유한 대화를 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3) 싸움의 대상을 바로 알았다
셋째로 기드온은 싸움의 대상을 바로 알았습니다. 에브라임 지파가 기드온에게 시비를 걸어왔을 즈음, 미디안의 세바와 살문나는 열심히 도망을 치고 있었습니다. 지금 기드온은 에브라임 지파와 싸움을 하게 된다면 도망치는 그들을 추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에브라임 지파의 시비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싸움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피해야 할 싸움은 피하고 싸워야 할 싸움을 택한 것입니다. 그는 싸움의 대상을 분명히 알았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잘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싸움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싸움의 대상이 알지 못하고 싸워서 설사 싸움에서 이겼다 할지라도 그 승리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기드온에게 다른 건 몰라도 지금 싸워야 할 대적이 누구인지, 미디안인지, 에브라임인지 정확히 알았습니다. 지금 누구와 싸워야 합니까? 에브라임이 아니라, 미디안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랑해야 할 사람끼리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힘을 합쳐도 이민생활하기가 쉽지 않은데, 아내와 남편이 서로 냉전 상태에 있지 않습니까? 혹시 서로 힘을 합쳐 동역을 해야 할 교회 안의 믿음의 식구들끼리 다투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싸워야 할 대상과 사랑해야 할 대상을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교회안의 성도가 아니라, 사단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다른 교회가 아니라, 마귀임을 기억하십시오. 사랑해야 할 사람과 싸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싸움의 대상인 악한 마귀를 대적하여 영적 싸움에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다
넷째로 기드온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기드온이 전쟁에서 승리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찾아와 이렇게 부탁을 합니다. 22절을 보겠습니다.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무슨 말입니까? 기드온에게 자신들의 왕이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손대대로 기드온의 후손들이 왕이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이제 미디안 전쟁의 영웅인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실세 중의 실세가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엄청난 권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23절입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미디안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렸습니다. 그리고 왕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하나님께서 너희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그의 이름을 낼 수 있고, 얼마든지 높은 자리에 앉아 큰소리치며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렸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으로도 은혜가 족하다고 여겼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도구가 된 것으로 만족하며 자신의 일에 충실하였던 사람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스스로 ‘나는 길 닦는 사역을 할뿐이다’, ‘나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일뿐이다’, ‘나는 광야애서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이다’, ‘나는 그의 신발 끈도 풀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고 고백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들러리의 기쁨을 알았기 때문에 세상의 인기와 환호성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고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어도 그는 여전히 ‘나는 신랑이 아니다. 그러나 신랑을 위해 서 있는 들러리이다, 나에게는 들러리의 기쁨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 보다 큰 이가 없도다.”라는 칭찬까지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모습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내가 들러리가 되는 한이 있어도 주님만이 드러나는 삶이 우리에게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나의 이름보다 하나님의 이름만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하나님의 이름보다도 자신의 이름이 더 드러나기를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의 헌신과 봉사를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실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과 기드온과 같이 하나님이 이름만을 드러내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삶을 사시시를 바랍니다.
(2) 마무리를 잘못한 영웅
그런데 기드온의 삶은 훌륭한 출발과 달리, 아쉬운 삶으로 끝났습니다. 이륙을 잘 한 비행기가 착륙을 잘못한 것처럼, 기드온은 시작은 잘했지만 마무리를 잘못하였습니다. 24절 이하를 보면 기드온이 이상한 일을 벌입니다. “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청구하노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지니라 하니 그 대적은 이스마엘 사람이므로 금귀고리가 있었음이라.” 자신은 왕이 되지 않겠다고 한 기드온은 백성들에게 미디안 사람들에게서 탈취한 금귀고리를 달라고 합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거두어들인 각종 패물을 가져다가 바쳤습니다. 기드온은 이것들을 가지고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에봇은 본래 제사장들의 의복으로서 앞으로는 가슴을, 뒤로는 등을 덮었던 조끼 모양의 옷입니다. 특별히 어떤 일을 결정할 때에 제사장은 이 에봇을 입고 그 안에 두 개의 돌, 즉 우림과 둠밈을 넣어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의미가 있는 에봇을 기드온이 만든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에봇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제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27절을 보겠습니다.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니라.” 기드온이 만들어놓은 에봇이, 백성들로 하여금 음란하게 하고 그들을 범죄하게 하는 올무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음란이란 영적인 의미의 음란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지 않고 에봇 앞에서 에봇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기드온은 인생의 마무리에 실패했습니다. 성공으로 시작한 인생을 실수로 끝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가 실수로 인생을 끝냈을까요?
1) 작은 문제에 실패했다
기드온은 135,000명의 미디안 대군과의 싸움에서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사소하고 작은’일에 실패를 했습니다. 왕이 되는 일에는 거절했으면서도 작은 기념품 하나 잘못 만들었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기드온이라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러나 성공과 실패는 큰 문제가 아닌, 이렇게 조그마한 문제로부터 달라집니다.
옛날에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짚신 장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똑같은 짚신을 만들어 팠는데, 아버지가 만든 짚신은 금방 다 팔려도 아들이 만든 짚신은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아버지에게 물어봐도 아버지가 그 비법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어, 막 돌아가시려는 아버지의 사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이 막무가내로 물었습니다. “아버지, 이제 돌아가실 거니까 비법 좀 가르쳐주세요.” 그러나 아버지는 곧장 대답을 않고 오래 시간을 끌다가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딱 세 마디를 대답했다고 합니다. “털 털 털”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와 아들이 만든 짚신은 똑같은 재질의 똑같은 짚신이었는데, 아버지는 짚신을 장사판에 내어놓을 때, 삐쳐 나온 털을 가위로 예쁘게 잘랐답니다. 짚신 털이 나와 있으면 신는 데야 불편이 없지만,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똑같은 짚신이지만, 털을 잘라낸 짚신을 사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보이지만, 작은 것에 승패가 갈린 것입니다.
일류는 작은 일에도 소홀히 여기는 법이 없습니다만, 이류는 큰일은 잘하면서 작은 일을 소홀히 합니다. 일류와 이류의 차이는 큰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조그마한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나는 앞으로 큰일에만 열심을 내겠습니다. 나는 앞으로 시시한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이류가 되겠다는 선언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내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마25:21)라고 하며, 작은 일에 충성한 자를 칭찬하셨습니다. 여러분!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큰 문제뿐 아니라, 사소한 문제도 소홀히 여기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커다란 산에 걸려서 넘어지지는 않지만,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평온할 때 실패했다
기드온은 전쟁에 소용돌이 속에서는 성공했습니다만, 전쟁을 마치고 평온할 때 실패했습니다. 힘들 때는 하나님만 의지했지만, 승리를 거두고 나서 평화가 찾아오자 마음이 해이해져 결국은 실수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제가 호주에서 7년 정도 살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호주 교포사회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때는 처음 이민생활을 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호주에 도착하면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슈퍼마켓 청소를 하고, 낮에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한국의 가정부들과 같은 홈크리닝을 하고, 또 저녁에는 사무실에 직원들이 퇴근한 후에 들어가서 청소를 합니다. 또 공사 현장을 다니며 타일붙이고, 페인트칠하고, 용접하며 힘든 여러 가지 노가다 일을 합니다. 또 새벽 7시부터 저녁 9시까지 데어리에서 가게를 보며 일을 합니다. 그렇게 일을 시작한 지 7~8년이 지나면 얼마만큼의 돈이 생깁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시기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이룬 뒤에, 그 동안 고생한 것을 보상받기 위해 밤낮으로 카지노를 출입하고, 술집이나 유흥가를 전전하고 다니다가, 결국은 가정에 불화가 생기고, 부부가 이혼을 하고, 뼈 빠지게 일한 재산을 다 날려 버리는 것을 저는 많이 목격했습니다.
가장 무서운 함정이 있다면 <자기만족>이라는 함정입니다. ‘이제 이만하면 됐지, 이제는 여유를 누려야지,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무서운 함정입니다. 여유가 생기면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교회를 보면 서리집사 때까지는 열심히 충성하다가 안수집사, 권사, 장로가 되면 더 이상 열심히 충성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어려울 때는 열심히 기도하고 엎드리다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성장이 되면 기도 시간이 줄어듭니다. 말씀을 준비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듭니다. 사실 이 때만큼 위기의 순간도 없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사울의 추적이 끝나고 왕위에 오른 후 평온이 찾아왔을 때, 그는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850명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나서 평안하게 되었을 때,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고난 가운데에서 뿐 아니라, 평온할 때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 주님을 의지할 뿐 아니라, 평탄한 시온의 대로가 뚫려 있을 때에도 주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고통의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을 때에 주님을 바라볼 뿐 아니라, 밝은 태양이 내려 쬐일 때에도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3) 사적인 일에 실패했다
기드온은 사사로서는 성공했지만, 가장으로서는 실패했습니다. 300명의 용사를 거느리고 대승을 거둔 장군이었지만, 후손들을 위한 가정교육에는 실패한 아버지였습니다. 기드온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에봇을 만들었지만, 그가 에봇을 만든 목적을 백성들에게 정확하게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결국 에봇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그 에봇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져버렸던 것입니다. 사사 기드온은 외부적인 일을 잘 처리했지만, 내부적인 일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 중에 김대중 전 대통령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대통령도 드뭅니다. 후에 역사가 정확한 평가를 내리겠지만, 현재까지 평가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외치는 훌륭했지만, 내치는 잘하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50년 가까이 아무도 추진하지 못하던 북한의 김정일과 남북정상 회담을 추진했고,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탁월한 식견과 훌륭한 판단력으로 다른 나라들과의 외교문제를 잘 해결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치였습니다. 야당과의 관계는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5년 내내 풀지 못했습니다. 또한 재임 기간 동안 노사문제, 국민연금문제, 의약분업문제, 등 내치를 잘못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밖에서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잘하고 있습니까? 사업장이나 직장이나 학교 등지에서 다른 사람에게 잘 하는 것 이상으로, 가정에서도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부모님에게 잘 하고 있습니까? 교회에서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는 만큼, 가정에서도 자녀들에게도 존경을 받고 있습니까? 이 문제는 제게도 기도 제목입니다. 혹시 목회자로서는 성공하면서도 가장으로서는 실패하고 있지 않은지 항상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를 보면 열심히 신앙생활하지 않는 장로나 권사나, 목사의 자녀들이 많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 가장 큰 이유는 부모로부터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교회에서의 모습과 가정에서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자녀들이 실망하고 교회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교회에서의 사역 뿐 아니라, 가정에서의 사역 또한 성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회에서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존경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기드온은 비행기가 훌륭하게 이륙했지만 제대로 착륙하지 못하고 곤두박질 친 것처럼, 훌륭하게 시작했지만 마무리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성공으로 시작했다가 실패로 인생을 마쳤습니다. 여러분! 바둑을 아십니까? 바둑에서 끝마무리를 잘하지 못하면 대마도 죽을 수 있습니다. 끝마무리 잘 하는 사람이 고수입니다. 끝마무리 잘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초석을 잘 놓았다 할지라도 하수에 불과합니다. 하수는 마무리를 잘 못하여 대마를 잃고 땅을 치며 억울해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성공했다고 계속적으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승리 뒤에는 실패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지금 출발을 멋있게 하셨습니까?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영적으로 멋지게 시작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할 때까지 마음을 놓지 않는 비행기 기장처럼, 마음을 놓지 말고 끝까지 주님 만나는 그날까지 전진하시기를 바랍니다. 마무리를 잘못하여 억울해 하지 말고 끝마무리를 잘하여 승리의 기쁨을 맛보는 믿음의 고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툼을 극복하는 길
삿 8장 1~3절 / 이한규목사
다툼을 극복하는 길
1. 반대에 속상해하지 말라
이스라엘이 기드온의 300 용사를 통해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대승하고 기뻐할 때 그런 기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생겼다.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찾아와서 시비를 건 것이다. 그들은 기드온에게 말했다(1절). “왜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 우리를 부르지 않았는가? 우리를 이처럼 대접하는가?”
시기심과 질투심으로 인해 다툼이 생기면 그것도 인간 사회에 있는 당연한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너무 충격받지 말고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 어디서나 반대자들은 있다. 광야 시절 출애굽을 이끈 영웅적인 리더 모세에게도 수시로 반대자들이 생겼다. 중요한 것은 그런 반대자들을 극복하고 위대한 일을 이뤄내는 것이다. 반대 때문에 충격 받아서 선한 일을 포기하지 말라.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누가 반대하든지 상관하지 말고 계속 하라.
2.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왜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승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는가? 요셉 후손인 자기들이 다른 지파 사람들보다 낫다는 우월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빠진 지파는 에브라임 지파 외에 다른 지파들도 여러 지파가 있었다. 오히려 에브라임 지파는 전쟁 말기에라도 참전 기회를 얻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지파들은 가만히 있는데 그들만 찾아와 불평한 것은 그들의 우월의식 때문이었다.
그 문제를 어떻게 기드온이 푸는가?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다고 하면서 에브라임 지파를 높여주었다(2절). 또한 미디안 군이 기드온 군대에게 쫓겨 도망갈 때 요단 나루터에서 길목을 지키던 에브라임 사람들이 미디안의 두 리더 오렙과 스엡을 죽인 공로를 칭송하면서 “너희가 큰일을 했고 내가 한 일은 하찮은 것이었다.”라고 했다. 그러자 비로소 에브라임 사람들의 분노가 풀렸다. 다툼이 생기면 영광과 권세의 자리에서 과감히 내려오고 상대를 높여줌으로 그 다툼을 극복하라.
3. 자존심보다 자부심을 키우라
에브라임 지파가 시비를 걸어온 것은 결국 자존심 문제가 컸다. 그처럼 사람들은 자존심상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러나 ‘자부심(自負心)’이 큰 것은 좋지만 ‘자존심(自尊心)’이 큰 것은 좋지 않다. 자존심만 크면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을 못 참고 판단력을 잃고 결국 망하는 길로 가게 된다. 반면에 자부심이 크면 어떤 어려움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강한 뚝심이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따뜻하고 부드럽다. 그런 자부심을 키우라.
옛날에 강기슭에 한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는 옆에 있는 갈대를 늘 비웃었다. “이 바보 갈대야. 너는 허깨비 바람 앞에서도 그렇게 굽실거리느냐? 나처럼 꼿꼿해 봐라.” 그러던 어느 날 큰 태풍이 불었다. 그때 그 교만한 나무는 뿌리째 뽑혔지만 갈대는 태풍 속에서 노래를 불렀다. 누가 강한 사람인가? 자부심을 가지고 온유와 겸손을 잃지 않는 사람이 진짜 강한 사람이다. 자존심만 강하면 결국 망한다.
4. 동지들과 더욱 함께 하라
살다보면 어떤 상황에서도 반대자가 있지만 그 상황에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도 있다. 중요한 것은 반대자가 아니라 동지들이다. 그런 동지들 때문에 힘을 얻고 비전도 이뤄진다. 그러므로 ‘자기 앞에 반대자’가 보일 때마다 ‘자기 옆의 동지들’을 보면서 그 상황을 극복해나가라.
필자가 이제까지 <월간새벽기도>를 계속 발행할 수 있었던 것은 <온라인새벽기도> 사역의 일부 회원들의 동역이 큰 힘이 되었다. 어떤 회원은 얼굴도 모르는데 후원의 손길을 보내주었다. 그처럼 자신이 바른 길로 가고 있다고 확신하면 반대자들만 생각하지 말고 숨은 동지들을 더 생각하라. 동지가 적은 것 같다면 이렇게 반성의 고백을 하라. “내가 누군가의 동지가 잘 되어주지 못했구나.” 그런 고백을 바탕으로 열심히 누군가의 동지가 되어주면 거꾸로 좋은 평생 동지를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