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아시다시피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국민당은 일본에맞서 대일항전을 펼쳤지요.
물론 마오의 팔로군도 일조했습니다만 솔직히 무능하고 안일했지만 대일항전의 주체는 "국부군" 이었죠.
1940년도의 백단대전이나 기타 게릴라전의 승리를 근거로 팔로군이 대일항전의 전부인것처럼
말들하지만 어찌됐던 "멧집좋게"일본군의 강펀치를 맞아가며 버팅긴주체는 장제스의 국민당과 국민당군입니다.
1937년 7월7일 노구교사건으로부터 28일북평점령,8월13일상해공격 9월항주만상륙 ~11월까지의 상해,남경공방전
시기에 장제스는 휘하의 총통직속정예부대의 60프로에 달하는 사단들을 잃게됩니다.
당시 국민당은 중국통일이라는 대의를 위해 결합된 정당이라기보다 군벌연합체에 가까웠고
권력의 중앙집중과 중앙집권을 통해 중국통일을 꿈꾸던 장제스는 자신만의 직속정예부대를
증편해나가며 "군벌연합체"구성부대중 가장 강력하고 잘정돈된 부대를 확보하고 있었고
이를통해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져나가고 있던차에..
이부대들이 개전초창기 4개월만에 60프로가 녹아내렸으니 장제스는 "곤란한상황"에 빠지죠.
더군다나 병력이야 충원하면 된다쳐도 잘교육된 초급장교들의 손실은 정말이지 막대한 것이었습니다.
횡포군관학교의 2년이상정규과정을 제대로 이수하고 사상적으로도 장제스의 친위대이자 혈기왕성하고
유능한 소위~중위급의 분대단위전투에서 가장중요한 초급장교들이 개전4개월에 다죽어나가고
이손실은 전후..국공내전때까지도 복구하지못하게 되죠..(이게 국공내전패배의 원인중 하나로 꼽힙니다)
참고로 장제스직속사단들(대표적으로 74사단.199사단,200사단,207사단,신일군(新一軍),국공내전의 요요상부대(미식기계화사단))
에는 최우선적으로최신장비와(30년대에는 독일제장비들(kar98,MP-18,마우저권총(712타입)와 독일식군복,철모,군모,개인장구류)과)
독일군사고문들(팔켄하우젠이 대표적이죠..후에 난징의 참상을 전하는 글을쓰게되는..)이 배치되어 비교적 높은급료와
대우를받으며 집중훈련 배치되었지요.(미국의 참전후에는 미제장비들이 대거 지급되죠).
군벌들의 사병부대들에 우위를 점해야 중앙집권체제가 가능했던 정치적상황을 이해한다면 충분히 수긍이 가는 대목입니다.
아무튼 그나마 중국전토에서 제일 전도유망한 부대들이 4개월만에 거의 다녹아내리고
결론은?..당연히 아시는바대로 "공간전"시간전"으로 전환됩니다. (좋게말해서..)
"중국은 땅이 넓으니 100만의 일본군을 풀어도 논두렁에 가재몆마리 들어온 격이다"라며
넓은공간을내어주고 시간을 기다리면 분명 반격의 기회가온다며 장제스는 남경에서
화남지방을 거쳐 옛적 유비횽아가 촉나라세웠던 서촉땅으로 들어갑니다.
물론 그 와중에 태아장전투나 한구전투 서주전투,무한삼진의 대전투의 승리를 통해
일본군에 막대한출혈을 강요하였으며 부인송미령의 세련된 외교행보덕에 미국의 군수물자및
차관지원,원조를 받아 병력을 증강시켜나갑니다.(문제는 직속사단재건최우선 이었다는거죠..)
그동안 마오의 팔로군도 40년의 백단대전(백개연대가 화북지역의 일본군 점령하의 발전소,탄광,주요보급품집적소,유류시설등을
위주로 공격하여 대성과를 올린 전투)과 진찰기군구의 전투등을 통해 후방에서 제대로 일본군을 교란합니다.
더욱이나 1941년 태평양전쟁개전부터는 미국이 플라잉타이거즈라는..비록 용병전투비행집단이지만 장제스정부의
중심인 중경과 그위주지역제공권을 방어해주기시작했고 42년부터는 미14공군이 전담하면서 제공권의 우세확보와
레도공로로부터 쏟아지는 5억불상당의 미제최신장비들이 장제스의 직속사단들을 무장시킵니다.
(국민당군부대는 부대별로 장비편제차가 심하여 총통직속사단소속 모 분대는 미제철모에 장구류에 M-1카빈이나 개런드
톰슨,BAR로 무장하고 윌리스지프에 사단전차대대에 셔먼이 있는데 장제스관심밖의 부대의 경우 88식한양소총이나
잘해야 Kar-98그리고 공용화기는 맥심M-1917수냉식기관총 혹은 가끔채코제ZB26에 가끔96식이나 92식 일본군
노획품도 있고 지프대신 말이나 마차를 타고 전차는 전무하죠.-- 복장은 너덜너덜 기워입은 누더기군복에 각반에
짚신..(역시 군대가면 줄 잘서야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우수한 미제장비로 도배한 부대들은 사천성깊숙히 틀어박혀 낮잠이나 자며 팬더먹이나 주고있었고
각반에 짚신에 등에는 청룡도 매고 88년식한양소총(독일의 GEW-88을 카피한총.7.98미리.5발장탄.1차대전독일사용)
이나들고 부패장교들이 급식비를 다 착복해먹어서 늘 배고픈 말라깽이 징집병들이 최일선에서 일본군과
대일항전을 전개했다는데 있습니다.
물론 장제스직속사단들도 돌아가며 전투에 참가하긴 했지만 "주로"대일항전은 "짚신병사들"의 몫이었죠.
일례로 1944년 일본군의 중국전선 최후대공세인대륙타통작전(1호작전)때 설악장군의 제10군은 형양에서
3개월간 길고 뚜렷한 방어전을 펼칩니다.6만이상의 정예일본사단들에맞서 미14공군의 지원을 받는다고는해도
국민당의 "몇안되는 명장중하나"답게 전선통제해가며 멋드러지게 방어해보지만...
결국 30만의 국민당군병력이 6만의 일본군에 궤멸당하고 각지의 미공군비행장과 무기탄약식량집적소를
일본군에 탈취당합니다.미 14공군 B-29의 만주와 일본본토폭격을 저지하고 미군의 물자노획및 파괴와
경한철도를 완전히 개통하여 이병헌이 드라마"올인"에서 칩을 두손으로 들이밀며 "올인"하듯 시도했던 일본군의 막판공세가
예상보다 싱겁게 먹혀들어가는 순간이었죠.
당시 탕은백휘하의 부대패잔병5만명은 주민들로부터 공격받아 생매장당하고 죽었다고하니..
국민당에대한 중국대중의 민심이 어느정도였는지도 잘알수있습니다.
게다가 일부 공병부대는 대형미제물자저장소를 폭파하기는커녕 도화선만 연결해두고는 "그냥 도망갔다네요".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아무튼 질서문란하며 비참한 패퇴를 형양에서 제10군이 하고있을무렵..장제스는 충칭의 총통관저에서 쓴웃음을
짓고있었죠.
(ㅎㅎ..설악의 충성도가 의심되었는데 이기회에 자멸하다니..좋아~~아주좋아~~(전두환톤으로))
책상위에는 설악장군이 보낸 수십통의 구원전보가 읽지도 않고 내팽개쳐져 있었겠죠..
이런경우를 자주체험한 스틸웰중장은 일기에 이렇게 쓰곤했습니다.
"땅콩(장제스를 비하한 스틸웰이 만든 별명)녀석을 날려버리기전엔 중국의 승리는 기대하기 어렵다".
뭐 버마전선에서는스틸웰이 부대이동을 위해 운남운수총국장 유비웅(장제스의 친척)장군에게 트럭좀발려달라 했더니
휘하소유700대트럭중에 22대빌려주더랍니다. 업무바쁘다고,,(그 업무는 알고보니 암시장에 밀거래하러가는 거라는..--)
지원군으로 출동한 제5군 야포는 어디갔냐하니 두율명 군단장왈-"제5군의 포병은 중국최고포병이죠"
그러므로 야포는 잘 숨겨두었습니다. ~스틸웰장군-왜??두율명-야포는 매우중요한 무기라 아껴야해요~!!.....
이런상황..장제스의 정치적야심과 권력기반확보를 위해 직속정예사단들에게만 미제최신장비가 지급되고
그들은 사천성에서 죽순이나 캐다가 팬더횽아들 먹이나 주며 놀고있고 궁핍한 일선국민당군 짚신부대들만
죽어라 싸우다 도망가다 하는시점에 장제스의 친인척들로 구성된 고위층들은 무기팔아먹고 마약팔아서
돈만탐하고 ..
허나 중요한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일항전의 주체는 국민당군이었다는 겁니다.
물론 미공군의 전투지원과 미국의 군수지원과 팔로군의 후방교란전도 중요했지만..
일대일로 정면으로 일본군에 맞선것은 국민당군..그들중에도 보급상황열악한 부대들이었다는 겁니다.
장제스의 시각에서 충성도가 의심되는 지휘관이 지휘하던부대들..출신은 군벌의 사병들이지만
물론그래서 군기도 대개는 더럽게 빠져서 양민들 못살게굴고 도망이나 다니는 부대들이지만..
그래도 이들이 "몸빵"역할을 해주는덕에 "공간전"이 힘을얻고 시간을 벌어주고 종국에는 승리의 시점으로 인도하죠.
너무 대일항전이 중국공산당위주로만 기술되고 국민당의 역할은 축소되는것이 올바른게 절대아니라는것을 알아주시길 바라면서..
많은지적과 관심있는분들의 협조리플 부탁드립니다 *^^*
p.s- 장제스와 국민당군이 소련군의 대독투쟁의지를 반만닮았어도..하는 아쉬움이 늘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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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국공내전의 한계에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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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19
06.07.20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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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네이버 밀리터리군사부기카페레 제가 올린글인데 올려보았습니다^^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정보였습니다
중국군도 무기가 가지각색인데, 일단 중국, 운남지구에서는 Kar-98b 카피인 민국23식 소총이나 88식 한양소총이고, 버마에의 신편 6군은 미국 장비에 1차대전 쓰던 m1917소총을 줬다더군요. 44년말쯤 되면 M1이 돌기 시작한답니다.
그래도 장개석 아저씨가 몇가지 의욕적으로 작전을 벌인 경우도 많지요. 일단 상해도 그랬고, 남령전투에서는 의욕적으로 공세를 벌였는데. 남령전투에서 최정예 30개 사단과 소련제 전차로 무장한 200전차사단을 투입했는데, 이 전투에서 괴멸하고 다시는 재편성을 못했다니. 오죽하면 장개석 아저씨가 일본군 FM을 들고 "좀 보고 배워라."라고 일갈했다고 합니다. 41년 북중국 공세도 그렇고요. 45년쯤 되면 이젠 일본군 공세를 당해낼 만 합니다. 전력차가 1:10에서 1:3까지 줄어들었다고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