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의 개요>>
밀가루·메밀가루·감자녹말 등을 반죽하여 얇게 밀어서 가늘게 썰든지 국수틀에서 가늘게 빼낸 것을 삶아 국물에 말거나 비벼 먹는 음식의 총칭.
내용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관련 표제어
· 감자국수
· 한국요리
*******************
면(麵)이라고도 한다. 국수는 제조나 조리가 비교적 간단하기 때문에 빵보다도 역사가 깊어, BC 6000∼BC 5000년경에 이미 아시아 지방에서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아주 오래 전부터 국수를 만들어 먹었으나, 밀의 생산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상용음식이 되지는 못하였다. 메밀국수나 밀국수는 생일·혼례 등 경사스러운 날의 특별 음식이 되었는데, 이것은 국수의 길게 이어진 모양과 관련하여 생일에는 수명이 길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혼례에는 결연(結緣)이 길기를 원하는 뜻으로 쓰였다.
재료에 따라 밀가루로 만든 밀국수·소면(素麵)·마카로니, 메밀가루로 만든 메밀국수, 감자의 녹말로 만든 당면 등이 있고, 반죽하여 뽑아낸 면을 수분이 14∼15% 정도가 되게 건조시킨 건면(乾麵), 반죽한 것을 끈 모양으로 만들어 가열한 생면(生麵), 생면을 삶은 다음 기름에 튀기거나, 그대로 뜨거운 바람으로 건조시켜 녹말을 알파화(α化)한 석면 등이 있다. 만드는 방법도 여러 가지인데, 칼국수와 같이 얇게 민 반죽을 칼로 가늘게 자른 것, 소면이나 중국면같이 반죽을 잡아당겨 가늘게 뽑은 것, 마카로니와 같이 강한 압력으로 뽑아낸 것 등이 있다.
한국의 전통적인 면요리에는 온면(국수장국)·냉면·비빔국수·칼국수·콩국수 등이 있다. 궁중에서는 백면(白麵:메밀국수)을 가장 상(上)으로 쳤다고 하며, 국물은 꿩고기를 삶은 육수를 썼다고 한다. 여름에는 동치미국과 양지머리 육수를 섞어 식혀서 만든 냉면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민간에서는 냉면 대신 흰 콩과 흰 깨를 갈아서 만든 콩냉국에 밀국수를 말아서 먹기도 하였다.
서울 지방에서는 혼례·빈례(賓禮)용으로는 메밀가루와 녹두녹말을 섞어서 반죽하여 국수틀에 가늘게 뽑아서 만든 국수를 썼다. 녹말국수는 고운 밀가루와 녹두녹말가루를 섞어 만든 국수로, 국수반죽을 할 때 먼저 밀가루 풀을 쑨 다음 녹말가루를 섞어 반죽하여 더울 때 국수로 뽑는다. 밀국수는 밀가루 반죽을 가늘게 뽑아 말린 것으로 필요할 때 삶아서 요리하는 것이고, 칼국수는 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어 가늘게 썰어서 만드는데, 햇밀을 걷어들이는 유두절(流頭節)을 전후하여 먹는 시절음식(時節飮食:절식)의 하나로, 닭고기 국물에 애호박을 채 썰어 넣고 끓인 칼국수는 여름철에 입맛을 돋구어주는 요리이다.
더운 국수장국의 장국으로는 양지머리를 곤 국물이나, 쇠고기를 잘게 썰어 양념하여 끓인 맑은 장국을 쓰고, 밀국수를 삶아 냉수에 담가 식힌 다음 건져서 물기를 빼고 대접에 담아 뜨거운 장국을 붓고 알지단·쇠고기와 버섯볶음 등 고명(웃기)을 얹고 후춧가루를 뿌린다. 냉면은 닭국물·양지머리국물 등을 차게 식히고 메밀국수를 마는데, 양지머리편육·알지단 등을 고명으로 얹는다. 냉면은 찬 음식이지만 원래는 겨울철의 절식이었으며, 특히 육수에 동치미국물을 섞어 만든 겨울철 별미식이었다.
그 밖에 수질이 좋은 산촌에서는 잔치에 모인 손님에게 약수를 떠다가 간장으로만 간을 하여 국수를 말아서 대접하였는데, 시원하고 담백한 맛이 육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고 한다. 봄철에는 녹말가루를 물에 풀어 익혀서 양푼에 넣어 종이처럼 얇게 굳힌 다음, 가늘게 썰어 오미자즙에 타서 먹는 창면 또는 화면(花麵)이 있었고, 여름에는 참깨를 볶아 갈아서 그 국물에 국수를 말아먹는 '토장녹두화나'라는 것도 있었다.
6월의 세시풍속
유두
어 원 유두란 말은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뜻으로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이란 말의 약어 이다. 일부 지방에서는 이를 '물맞이'라고도 한다.
유두의 어원에 대해서 정확히 밝혀낼 수는 없다. 하지만 유두를 신라 때의 이두식 표기로 보고, 이를 오늘날 유두의 다른 이름으로 쓰이는 '물맞이'와 관련시켜 해석하면 그 어원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즉 유두를 달리 소두(梳頭), 수두(水頭)라는 한자말로도 표기한다. 그런데 수 두는 곧 '물마리[마리는 머리의 옛말]'이니 그 본뜻은 물말이 곧 '물맞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에 도 신라의 고지(故地)인 경상도 지방에서는 유두를 물맞이라고 하는데, 이로 보아 유두는 신라 때 형성된 '물맞이'의 풍속이 한자로 기록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말이라 할 수 있다.
유 래 유두의 풍속이 언제부터 유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문헌상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이 미 유두 풍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13세기 고려 희종(熙宗) 때의 학자인 김극기(金克己)의 《김거사집(金居士集)》에 의하면, "동도(東都:경주)의 풍속에 6월 15일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 리를 감아 액(厄)을 떨어버리고 술 마시고 놀면서 유두잔치를 한다."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유두 에 대한 기록은《중경지(中京志)》권2 풍속조에도 보이며,《고려사(高麗史)》권20 명종(明宗) 15년 조에는 "6월 병인(丙寅)에 시어사(侍御史) 두 사람이 환관 최동수와 더불어 광진사(廣眞寺)에 모 여 유두음(流頭飮)을 마련하였는데, 나라 풍속은 이 달 15일에 동류수(東流水)에서 머리를 감아 불상(不祥)을 없애며, 이 회음(會飮)을 유두연(流頭飮)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경주 풍속에 6월 보름에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불길한 것을 씻어 버린다. 그리고 액막이로 모여서 술을 마시는데, 이를 유두연 (流頭宴)이라 한다.
조선의 풍속도 신라 이래의 옛풍속으로 말미암아 유두를 속절로 삼게 되었 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문헌의 기록들을 통하여 유두는 최소한 신라시대부터, 또는 그 훨씬 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우리의 풍속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최남선의《조선상식(朝鮮常識)》풍속 편에는 여인들의 물맞이 장소로, 서울에서는 정릉 계곡, 광주에서는 무등산의 물통폭포, 제주도에서는 한라산의 성판봉(城坂峰)폭포 등을 적합한 곳 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 이승만의《풍류세시기(風流歲時記)》에는 정릉계곡 외에도 송림(松林)과 물이 좋은 악박골과 사직단이 있는 황학터(黃鶴亭:활터) 근방과 낙산 밑 등이 서울의 물맞이 장 소로 좋은 곳이라고 하였다.
풍 속 유두날의 가장 대표적인 풍속으로는 유두천신(流頭薦新)을 들 수 있다. 유두 무렵에는 새로운 과일이 나기 시작하는 때인데, 유두천신이란 이날 아침 각 가정에서 유두면·상화병·연병·수단 ·건단, 그리고 피·조·벼·콩 등 여러 가지 곡식을 참외나 오이, 수박 등과 함께 사당[家廟]에 올리고 고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이때 사당에 올리는 벼·콩·조 등을 유두벼·유두콩·유두 조라고 한다. 또한 농촌에서는 밀가루로 떡을 만들고 참외나 기다란 생선 등으로 음식을 장만하여 논의 물꼬 와 밭 가운데에 차려놓고 농신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낸다. 그 다음에는 자기 소유의 논 ·밭 하나하나마다에 음식물을 묻음으로써 제를 마치게 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6월 월내조(月內條)에는 피·기장·벼를 종묘에 천신한다고 하였으 며,《예기(禮記)》월령(月令)에는 중하(仲夏)의 달에 농촌에서 기장을 진상하면 천자가 맛을 보고 먼저 종묘에 올리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유두는 조상신이나 농신만을 위한 날은 아니었다. 이 날 유두천신을 마친 후 일가 친지들이 맑 은 시내나 산간 폭포에 가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은 후, 가지고 간 햇과일과 여러 가지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보낸다. 이것을 유두잔치라고 하는데, 이렇게 하면 여름철의 질병과 더위를 물리치 는 액막이의 기능이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또 문사(文士)들은 술과 고기, 음식을 장만하여 녹음 이 짙은 계곡이나 정자에 가서 시가를 읊으며 하루를 즐기기도 하였다.
유두 무렵이면 농가에서는 모내기를 끝내고 김매기를 할 때이다. 아울러 가을보리를 비롯한 팥 ·콩·조 등을 파종하며, 또 오이·호박·감자·참외·수박 등 여름 작물을 수확하기도 한다. 그 래서 비교적 한가한 시기인 이 무렵에 유두라는 속절을 두어 조상과 농신에 대한 감사와 풍년의 기원을 행하고자 한 것이 바로 유두의 풍습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농사일로 바빴던 고단한 일상 에서 벗어나 모처럼의 여유를 가짐으로써, 닥쳐 올 본격적인 더위를 이겨내고자 한 지혜의 결과 이기도 하였다.
음 식 이 날의 음식으로는 유두면, 건단, 수단, 상화병(霜花餠) 등이 있다. 특히 유두면을 먹으면 장수 하고 더위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여 누구나 먹는다.*밀가루로 만드는 유두면*은 참밀의 누룩으로 만들 경우 유두국(流頭 )이라고도 하는데, 구슬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오색으로 물들인 후 세 개 씩 포개어 색실에 꿰어 차거나 문에 매달면 재앙을 막는다고 하였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 원래 국수는 긴 까닭에 장수를 뜻해서 경사가 있을 때에는 잔치 음식으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오색 칠을 하는 것과 삼매(三枚)는 숫자가 기수(奇數)인 양수(陽數)라는 것과, 그것이 모두 축귀에 효과 가 있는 숫자이며 대문 위에 걸어 두는 것도 잡귀가 드나드는 장소를 골라 벽사( 邪)를 목적으 로 한 것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유두면을 몸에 차거나 문설주에 걸어서 잡귀를 막는 풍속이 기록되어 있다. 수단과 건단은 쌀가루로 쪄서 길게 빚으며, 가늘게 썰어 구슬같이 만들어 꿀물에 담그고 얼음 물을 넣어서 먹는 것은 수단이고 얼음물에 넣지 않고 먹는 것이 건단이다. 상화병은 밀가루에 물 을 붓고 반죽하여 콩가루와 깨를 섞어서 꿀물에 버무려 쪄서 먹는다.
《경도잡지(京都雜誌)》6월 15일조에는 "분단(粉團)을 만들어 꿀물에 넣어 먹는데 이를 수단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유두조에는 "멥쌀가루를 쪄서 긴 다리같이 만들어 둥근 떡을 만들고 잘게 썰어 구슬같이 만든다. 그것을 꿀물에 넣고 얼음에 채워서 먹으며, 제사에도 쓰는데 이것을 수단이라고 한다. 또 건단이라고 하는 것도 있는데, 그것은 물에 넣지 않은 것으로 곧 찬 음식의 종류이다. 혹 찹쌀가루로 만들기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풍 속 칠석날의 가장 대표적인 풍속으로는 여자들이 길쌈을 더 잘할 수 있도록 직녀성에게 비는 것이 다. 이 날 새벽에 부녀자들은 참외, 오이 등의 초과류(草菓類)를 상위에 놓고 절을 하며 여공(女 功:길쌈질)이 늘기를 빈다. 잠시 후에 상을 보아 음식상 위에 거미줄이 쳐져 있으면 하늘에 있는 선녀가 소원을 들어주었으므로 여공(女功)이 늘 것이라고 기뻐한다. 혹은 처녀들은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은 다음, 그 위에 고운 재를 평평하게 담은 쟁반을 올려놓고 바느질 재주가 있게 해 달라고 비는데, 다음날 재 위에 무엇이 지나간 흔적이 있으면 영험이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풍속은 직녀를 하늘에서 바느질을 관장하는 신격으로 여기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원래는 칠석날 밤에 궁중이나 민가의 부녀자들이 바느질감과 과일을 마당에 차려 놓고 바느 질 솜씨가 있게 해 달라고 널리 행하던 중국 한대(漢代)의 걸교(乞巧)의 풍속을 따른 것이다. 이 풍속은 당대(唐代)에 와서 주변 민족들에 전파되었는데, 우리 나라의 칠석 풍속은 중국의 그것과 는 사뭇 다르다.
이 날 각 가정에서는 밀전병과 햇과일을 차려놓고, 부인들은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가 족의 수명장수와 집안의 평안을 기원하기도 한다. 또 이북지방에서는 이 날 크게 고사를 지내거 나 밭에 나가 풍작을 기원하는 밭제[田祭]를 지내기도 한다. 중부지방에서는 '칠석맞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단골무당에게 자녀의 무사 성장의 기원을 부탁하는 것이다.
무당은 물동이를 타고 기원의 상징인 명다리를 내어 바람에 불리고, 다시금 무사 성장의 기원을 한다. 한편 7월이면 무더위가 한풀 꺾이는 시기이다. 농가에서는 김매기를 다 매고 나면 추수때까지 는 다소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래서 장마를 겪은 후이기도 한 이때, 농가에서는 여름 장 마철 동안 눅눅했던 옷과 책을 내어 말리는 풍습이 있다.
이를 쇄서폭의( 書曝衣)라 하는데, 이 날은 집집마다 내어 말리는 옷과 책으로 마당이 그득하다.《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7월 7일조에 도 인가에서는 옷을 햇볕에 말린다 하여 이는 옛날 풍속이라 하였는데, 이 날에 내어 말리는 옷 과 책의 수량에 따라 잘살고 못사는 것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최남선의《조선상식(朝鮮常識)》에는 칠석은 원래 중국의 속절(俗節)로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공 민왕(恭愍王)은 몽고 왕후와 더불어 내정에서 견우·직녀성에 제사하였고, 또 이날 백관들에게 녹 을 주었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고 성균관 유생들에게 절일제(節日製)의 과거 를 실시하였다고 하였다. 다양한 생활주기와 가치관의 변화 속에서 오늘날 칠석의 풍속은 다만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동 심의 세계에 꿈을 부풀리는 기능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음 식 칠석의 절식으로는 ***밀국수와 밀전병***이 있다. 이 날이 지나고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밀가루 음식은 철 지난 것으로서 밀냄새가 난다고 하여 꺼린다. 그래서 밀국수와 밀전병은 반드시 상에 오르며, 마지막 밀음식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곧 칠석인 것이다
^^ 한바다1님 안녕하세요? 한바다1님의 글을 잘보았습니다. 한바다1님!
상기 내용과 같이 면이나 국수는 같은 말 입니다...
즉 밀면이나 밀국수나 같은 말 입니다. 그것을 전혀 다른 음식으로 구분 한다면 우리나라 국어사전이나 백과 사전을 무색하게 하는 것이며 올바른 언어 이해에 역행하는 것이므로 말을 하거나 특히 자기 자신의 글을 다른 많은 사람이 볼수 있는 인터넷상에 계제 할때는 자기가 알고 있는 사항이 확실 하더라도 제삼 조심스러운 표현과 절대 확신은 충분한 조사후에 하는 것이 바람직 하겠지요.
한바다1님의 말씀과 같이 이북지방에서 내려온 분들이 유래라고 하신것 처럼 한국전쟁 당시 부산이 유래는 아니란 말이 되지요... 유래는 내려온분들 께서 그이전에 이전 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유래,, 라고 표현 하 신 것은 앞뒤가 .... 그래서 제가 ``밀면의 유래,,가 아니라 ``밀면집의 유래,,라고 지적 한 것 입니다.또한 냉면의 원류는 이북이 틀림 없다고 생각하나 ``냉면이란 말(용어)의 사용이 한국전쟁부터,,라 함은 잘못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도 즐겨 드셨다는 상기 문헌 의 내용이 그것을 뒷받침 하기 때문입니다.고려시대 이전은 기록이 많지 않아서 단언 할 수는 없으나 중부권(수도권)에서는 일찍 전파된 냉면을 우리 조상들은 즐겼으리라...다만 그조리법은 지역의 특성에 따라 변형 내지는 변천 되었으리라 유추하여 생각 할 수 있겠지요!....
그럼 한바다1님 좋은 저녁 되시고 좋은 재미 있는 글 믾이 올려 주셔요... 유재혁
--------------------- [원본 메세지] ---------------------
님께서 말씀하신 '문헌'은 어떤 문헌인지요?
반박하기위해서가 아니고 잘봇된 상식을 바로잡으려는 글이오니 오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밀면의 유래는 분명 6.25 동란시절. 이북 피난민들에의해
부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밀면은 평양식 처럼 뜨겁게 먹는 온면이 없는
원래부터 냉면의 대용품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님께서는 밀국수와 같은것으로 생각하시나 봅니다.
원래 평안도에서는 냉면이란 말이 없다가 한국전쟁후
남쪽의 국수와 구별하기위해 차가운 국수라는 뜻으로
'냉면'이라 부른것이랍니다.
남쪽의 국수는 차가운것이 없읍니다.
유일한 찬국수가 콩국수인데 그것도 원류는 이북입니다.
북쪽은 남쪽에비해 산지가많아 쌀농사가 적고
척박한토지에서 경작이 가능한 메밀과 호밀을 이용한
국수가 발달할수밖에 없었읍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즐기는 열무냉면도 냉면의
변형이지만 격식을 못갖춘 탓으로 그냥 냉면이라 부르지 못합니다.
단순히 차다고 다 냉면이 아니란 뜻입니다~~~
밀면도 원래의 주재료인 메밀이 섞이지 않아서 '밀냉면'이라
안부르고 그냥 밀면이라 하는것입니다'
냉면을 사랑하는 이들은 이처럼 명칭까지도
아끼고 존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