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
방금 동네 수퍼에 가서 북어포와 포도주를 사왔다. 북어포를 달라니까, 수퍼 주인이, 산에 가려고하냐면서 술은 어떤 것으로 하겠냐고 묻는다. “혹시 옛날 포도주 -- 빨간 색깔이 나고 아주 달달한 그 포도주가 요즘도 나오나요?” “그럼요. 진로에서 나와요. 2000원이예요.” 우리 할머니는 생전에 그 포도주를 좋아하셔서 우리는 할머니 산소에 갈 때면 그것을 준비하곤 한다. 묘지는 남양주시 내곡리에 있다. 벌초해 주는 사람과 시간 약속도 해 놓았다. 내일 낮 2시다. 나는 지금 안양집에 있다.
할아버지 산소는 춘양(경북 봉화군)에 있는데, 거기에서는 벌초해 주는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 우리 산소를 돌봐주던 분이 있었는데 재작년에 그만 돌아가셨다. 새 사람을 구하기 위해 수소문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추석 전에 사람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예전처럼 내 손으로 하면 될 것 아닌가? 사실, 벌초해 주는 사람을 산 것은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 전에는 아버지가 기차 타고 내려가 하룻 밤을 주무신 후 낫으로 손수 벌초를 하셨다. 가끔씩은 나도 아버지를 따라가 일을 도와드리곤 했다. 그 때 쓰던 낫이 세 자루나 남아 있다. 톱도 있고 야전삽도 있다. 올 해는 추석이 일러 야외에서 일 하려면 햇볕이 몹시 따가울텐데...... 그러나 모자를 쓰면 되지 않을까? 아버지가 안 계시니 나 혼자 해야 할텐데...... 그러나 이제 나도 내 책임으로 그런 일을 할 나이가 되지 않았나? 게다가 지근 거리에 나를 도와줄 친구가 있지 않나? 나는 천식군에게 전화를 하였다. 원박사가 재직하는 대학교는 삼례에서 30분 거리에 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지난 주 수요일 아침 일찍 삼례를 출발하였고 점심 때 쯤 춘양에 도착해 식사를 한 후 산소에 올라가 작업을 하였다.
세상이 나에게 해 준 것이 뭐가 있는가? --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기분이 안 좋아진다. 우울해지고 억울해지기까지 한다. 그러니 그런 생각이 들어보았자 나만 손해다. 나만 손해라는 것이 분명하지만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도 있는가? ‘방법’이라고 말하기는 뭣 하지만, 일종의 방법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어떤 사람은 그런 생각, 그런 기분이 들 때면 시장에 가보라고 권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방법은 아닐 것이다.
춘양 공동묘지는 입구를 찾기 힘들 정도로 풀이 무성하였다. 아직 한 여름인 것이다. 게다가 벌초를 끝낸 묘지들은 극소수요 대부분의 묘지들은 벌초 전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핑계가 되겠는가? 나는 참람하게도 단번에 우리 묘소를 찾아내지는 못하였다. 작년 한 해를 건너뛰어서 그러하겠지만, 봉분과 둔덕 등 주변은 잡풀로 뒤덮여있었다. 잡풀을 뚫고 자그마한 비석이 솟아 있었다. 가난한 아버지가 당신의 아버지를 위하여 당신의 경제적 수준에서는 최선을 다해 마련한 산소와 비석이다. 원박사 말마따나 낫이 아주 잘 들었다. 톱도 아주 잘 들어, 주변의 아카시아 나무를 잘라내는 일도 수월하게 마칠 수 있었다. 낫이니 톱이니, 아버지는 당신이 사용하시던 도구를 깔끔하게 손질하여 놓고 가셨다. 어느 해인가, 벌초를 마치고 산소를 내려올 때 아버지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봐라, 아주 깨끗하게 됐지? 땀이 나고 힘이 들지만 일 끝내고 나면 아주 뿌듯해지지 않니?” 아버지는 기분이 많이 좋으셨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땀흘려 노동하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벌초는 설사 그것이 노동이라고 해도 댓가가 없는 노동이요, 그 이외의 여러 면에서 특별한 노동이지 않은가?
아버지 산소에는 그 다음, 다음 날 다녀왔다. 새로운 도로가 뚫려서 삼례에서 임실 호국원까지 가는 데에는 50분밖에 안 걸린다. 이곳은 사시사철 관리가 되고 있으니 벌초 같은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얼마 전에 가져갔던 국화꽃이 한 여름 뙤약볕 밑에서 드라이 플라워처럼 말라 있었다. 나는 마른 꽃을 치우고 청주와 포로 제를 올렸다.
그러니까 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는 이렇게 따로 따로 계신다. 세 분은 각각 경북 봉화군, 경기도 남양주시, 전북 임실군에 계신 것이다. 요번에 살펴보니, 할아버지 묘소의 비석에는 “配 平澤 林氏”라고 명기되어 있지만 할머니를 합장한 것은 아니다. 아버지 생전 언젠가 합장이나 이장을 생각해 본 적이 없지 않다. 그러나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이장은 절대 안 된다고, 이장을 하면 반드시 동티가 난다고 노래처럼 말씀하시곤 하였다. 그 유언을 존중하여 아버지는 이장을 포기하셨다.
어쩌면 세 분은 지금 따로 따로 계신 것이 아니라 한 곳에 계실지도 모른다. 같이 살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50 여년 만에 일어난 일이다. 할아버지가 세상 떠나신 것은 지금으로부터 50 여년 전 (내가 네 살 때) 일이니까. 그리고 다시 그 전의 25년 동안(1930년 — 1955년)은 세 분이 같이 살았고, 세 분만이 같이 살았다. 아버지는 외아들이었으니까. 그렇게 조촐하게 25년이 지난 후 그 집에 어머니가 시집을 오고 또 내가 태어나 가족이 늘어났다. 지금 세 분이 계신 곳은 어디일까? 조만간 어머니가 그곳을 찾아가실테고, 또 그 뒤를 이어 내가 그곳을 찾아갈텐데...... 그런 곳이 있기는 있겠지?
첫댓글 나는 선산이 시골이라 미리 벌초가 된 상태에서 명절 때 절만하고 오는 처지..그래 근데 사람 죽으면 어디 가 있을까? 기불천 교인이 아니라 모르겠다만 뭐 죽으면 알겠지ㅋ 그나저나 원박사가 고생했네..음복이나 실컷하게하지 기껏 포에 포도주뿐만은 아니었겠지? 영태교수!ㅎㅎ
조교수님은 큰 일을 하셨습니다. 원박사님도 조부모님 산소를 벌초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따져보면 조상님들 가운데 동성동본이 있을테니 다 연결이 될테니까요. 조교수님 조모님의 본관이 우리 아내와 같은 평택임(림)씨이시니 그렇게 보면 집안이 됩니다. 나는 불효하게도 벌초를 못했답니다. 선산이 경북 상주로 멀지 않은데 지난 주일(일요일)에 벌초를 해서 가지 못했지요. 집안에서 꼭 주일에 다같이 모여 벌초를 하니 종손임에도 교회일로 참석을 못해 늘 미안함이 있지요. 여하간 조교수님과 원박사님은 큰 일을 하신 것입니다.
원박사 선산은 원주 쪽에 있고 이미 벌초를 끝낸 상태야. 원박사 형님 주관으로 말이야. 물론 음복 잘했지. 벌초 끝내고 냇가에 내려가서도 하고 삼례로 돌아와서도 2차로 또 벌초하고. 원박사 1년 사이에 술이 좀 늘었더라고. 원옥 목사님 부인이 양반가문 출신이구랴. ㅋㅋ
지난번 여수를 내려갈 땐 호남 고속도로를 탔지. 조교수의 학교를 바라보며 전화를 해 볼까 했으나... 아차! 조교수 손전화가 없다는 걸 깨달었지, 원박사가 근처에 같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만나 볼 수도 있었을텐데...
아, 그랬구나 나는 화수목(금)에 거기에 있고, 원박사는 화수.
무턱대고 갔다간 못 만나겠네..이제 알았으니 비상대기토록 ㅎㅎ
ok ㅍ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