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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는 당시 국적은 신라였으나 백제유민(전남 완도)출신으로 일찌기 당나라로 가서 무령군이 되어 성공한 후 신라 흥덕왕으로부터 해양무역대사직을 임명받고 고향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산동지역의 백제유민세력을 중심으로 국제해양무역인으로 크게 성공한 인물이다.
고려청자 기술은 백제담로지역이였던 월주 도자기 기술을 장보고가 수용한 것으로 전남 강진에서 대량으로 생산하여 재수출하였다.
영원한 세계인, 장보고/ 윤재운
‘해양 상업 제국의 무역왕(The Trade Prince of the Maritime Commercial Empire)’은 주일 대사를 지낸 바 있는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에드윈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 교수가 장보고(張保皐, ?∼846)를 평가한 말이다. 그 밖에도 우리나라에서 장보고의 업적에 관해 최초로 연구 논문을 쓴 김상기는 장보고야말로 우리나라 역사상 바다를 다스리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원리를 몸소 실천한 ‘해상 왕국의 건설자’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평가를 받는 장보고는 중국·우리나라·일본의 바다를 신라인의 일터로 가꾸고, 나아가 중국 산둥 반도 일대와 한반도 남부 지방을 마치 오늘날의 자치 지역처럼 독자적으로 다스렸다. 장보고의 해양 활동은 이순신보다 700여 년을 앞섰다. 지금으로 보면 최초로 동양 세계의 해상권을 지배한 막강한 해군력을 과시하였고, 최근 세계적으로 눈부시게 뻗어 나가는 우리나라의 해운 산업과 국제 무역의 선구(先驅)였던 것이다.
장보고와 신라인의 활약상은 우리나라 기록은 물론 중국과 일본 사서에도 남아 있다. 중국 측 기록으로는 『신당서』 권220 「동이전」 신라조에 관련 기사가 실려 있는데, 이는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이 지은 『번천문집(樊川文集)』 권6의 ‘장보고정년전(張保皐鄭年傳)’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일본 측 기록으로는 중국에 가서 장보고와 중국 내 신라인의 도움을 받아 불교 수업을 마치고 9년 만에 귀국한 승려 엔닌(圓仁)의 기행문인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와 일본 정사인 『일본후기』, 『속일본기』, 『속일본후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우리나라 기록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비교적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는데, 상당 부분 이 앞서 언급한 중국의 기록을 다시 인용한 것이다.
(사신이) 논하여 가로되 두목이 말하기를, 천보 연간(天寶年間)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 안사순(安思順)이 안녹산의 사촌인 까닭에 사사(賜死)하고 조서를 내려 곽분양(郭汾陽)을 대신하게 하였다. 열흘 후에는 다시 이임회(李臨淮)에게 조서를 내려 절(節)을 가지고 삭방의 병력을 반으로 나누어 동으로는 조(趙)나라, 위(魏)나라 지방에 나아가게 하였다. 안사순 때에는 곽분양과 이임회가 모두 아문 도장(牙門都將)으로 있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용납하지 못하여 소반을 함께하여 음식을 먹더라도 항상 서로 흘겨보면서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곽분양이 안사순을 대신하게 되자 이임회가 도망하려고 하다가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 이임회에게 조명(詔命)하여 분양의 절반 병력을 나누어 동쪽으로 나가 토벌하게 하였다.
이임회가 들어가 청하기를, “내 죽음은 달게 받겠으나 처자식만은 살려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곽분양이 내려가 손을 잡고 당상(堂上)으로 올라가 마주 앉아 말하기를, “이제 국가가 어지럽고 왕이 파천(播遷)하였는데, 공이 아니면 동쪽을 정벌할 수 없소. 어찌 사사로운 감정을 생각할 시기입니까?”라고 하였다. 작별하게 되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 충성과 의리로서 권면(勸勉)하였으니 큰 도둑을 평정한 것은 사실 두 사람의 힘이었다.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을 알고 일을 맡길 만한 재능임을 안 후에야 마음으로 의심하지 않고 군사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평생에 분함과 원한을 쌓아 왔으니 그 마음을 알기 어렵고, 분함과 원한을 가지면 반드시 단점을 보는 것이니 그 재능을 알기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장보고정년전>
두목의 문집인 『번천문집』에 실려 있는 ‘장보고정년전’이다. 중국과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장보고 관련 기록은 상당 부분이 여기서 인용한 것이다.
이 점이 장보고가 곽분양의 어짊과 같은 것이다. 정년이 장보고에게 갈 때 말하기를, “저는 귀하고 나는 천하니 내 자신을 낮추면 전의 분함과 원함을 가지고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장보고가 과연 죽이지 않았으니 이것은 사람의 일반적인 정이다. 그리고 이임회가 곽분양에게 죽음을 청한 것도 역시 사람의 일반적인 정이었다. 또 장보고가 정년에게 맡긴 것은 그 일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며, 정년이 또한 배고프고 추위에 떨고 있는 중에 있었으므로 감동되기 쉬운 일이었다.
곽분양과 이임회가 평생을 대립하였지만 이임회에 대한 생명은 천자(天子)에서 나왔으니 장보고에게 견주어 본다면 곽분양이 우월한 듯하다. 이것은 곧 성현(聖賢)이 성패를 나누는 기틀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인의(仁義)의 마음이 잡정(雜情)과 함께 심어져 있어 잡정이 이기면 인의가 멸하 고 인의가 이기면 잡정이 사라지는 것이다. 저 두 사람은 인의의 마음이 이미 승(勝)하였고, 여기에 다시 밝은 견해를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세간에서는 주공(周公)이 유자(孺子)를 옹립(擁立)하는 데는 소공(召公)도 의심하였다.
주공의 성(聖)과 소공의 현(賢)으로서 젊어서 문왕(文王)을 섬기고 늙어서 무왕(武王)을 도와 능히 천하를 평정하였지만 주공의 마음을 소공도 알지 못하였다. 진실로 인의의 마음이 있다고 하여도 명견(明見)이 없다면 소공도 그러한데 하물며 그만도 못한 사람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국어(國語)』에 이르기를 “나라에 한 사람이 있으면 그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무릇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망할 때를 당하여 어진 사람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로 능히 (어진 사람을) 쓴다면 한 사람으로도 족한 것이다. 송기(宋祁)가 말하기를, “아마 원망과 해독으로 서로 끼치지 않고 나라의 우환을 생각한 것은 진(晉)나라에는 기해(祁奚)가 있고, 당나라에는 곽분양과 장보고가 있었다. 누가 동이(東夷)에 인물이 없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앞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사료는 두목이 지은 『번천문집』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장보고와 정년의 관계를 중국 안사(安史)의 난 때 활약한 곽분양과 이임회의 관계에 비유하였다. 아울러 세 번째 사료는 『삼국사기』 ‘장보고 열전’ 중의 논찬(論贊)에 관한 부분이다. 논찬은 행적에 이어 붙이는 논평으로, 입전(立傳)한 인물의 행적을 모두 소개한 뒤에 편찬자가 주관적으로 인물의 행적을 평하고 시비(是非)를 가리고 판단하고 생각하는 점을 기술하고, 거기에 일정한 교훈과 권계(勸戒)까지 담아내었던 부분이다. 세 번째 사료에서는 장보고의 인물 됨을 중국의 대표적인 성현 가운데 한 명인 주공, 소공과 비교하면서 상대적으로 더 뛰어난 인물임을 강조하였다.
장보고를 부르는 이름은 네 가지이다. 우리나라 기록에는 활보, 즉 궁복(弓福), 궁파(弓巴), 장보고(張保皐)로 되어 있으며, 중국 기록에는 장보고 (張保皐), 일본 기록에는 장보고(張寶高)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시 신라 관습상 평민은 성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장보고가 중국에 있을 때 궁복의 ‘궁(弓)’ 자와 비슷한 ‘장(張)’을 성으로 가지게 된 것이다. 보고라는 이름은 ‘복’의 음을 그대로 따라 지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당시 일본 측 기록에 장보고(張寶高)라고 적고 있는 것은 무역을 통해 큰 이윤을 얻었기 때문에 그렇게 적은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로 따지면 재벌 정도의 의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장도>
청해진의 본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완도군 장도(將島)의 전경이다. 장보고가 귀국하여 청해진을 설치한 동기는 신라 사람을 잡아다가 파는 중국인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서였다.
<전남 완도 장도-청해진 발굴 광경>
장보고의 고향은 현재의 전라남도 완도로 추정된다. 섬사람이다 보니 수영을 매우 잘하였고, 소년 시절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다. 의리와 정의감이 깊고 도량이 한없이 넓어 국내외에서 존경하며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와 일생 동안 국내외에서 동고동락(同苦同樂)하였던 고향 친구 정년은 더욱 무술이 뛰어났고 50리를 잠수하여도 숨이 차지 않았다고 할 만큼 재주가 비상하였다. 장보고는 정년과 함께 소년 시절 당나라로 건너가 지금의 장쑤 성(江蘇省) 쉬저우(徐州)의 군관 벼슬인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이 되었다.
장보고는 828년(흥덕왕 3) 이전의 어느 시기에 당나라에서 귀국하였다. 그가 귀국한 동기로는 우선 노예 무역을 들 수 있다. 그는 무령군에 복무하던 시절 동포들이 중국 해적선에 강제로 끌려와 도처에서 매매되는 현장을 목격하고 의분을 느꼈다고 한다.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한 동기도 신라 근해에 출몰하여 신라인을 약매(掠賣)하는 중국인 노예 무역선을 소탕하는 데 있었다.
당시 당나라 조정이 거듭 금령을 내렸지만 노예 무역은 성행하였다. 이른바 ‘신라노(新羅奴)’는 중국 연안 지대 곳곳에서 매매되었다. 신라에서는 이 문제를 중요하게 여겼던 당나라에 단속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당나라 조정은 816년에 신라인을 노예로 하는 행위에 대하여 금령을 내린 바 있지만, 노비 매매는 근절되지 않았다.
한편 해적은 중국인이 주축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한반도 서남해 연안 지대나 도서 지방에 기반을 둔 해상 세력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9세기 초 신라에서는 만성적인 식량 기근으로 중국에 가서 살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이주 희망자를 수송하던 변경의 군소 해상 세력 가운데에는 이들을 중국에서 노비로 매매하는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821년(헌덕왕 13) 봄에 기근이 발생하자 백성 가운데에는 자손(子孫)을 팔아 자활(自活)한 자들이 있었다. 이들을 사서 중국 상인에게 노예로 팔아넘긴 중개 무역상도 있었을 것이다. 장보고의 귀국 동기에는 군소 해상 세력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는 한편, 재당(在唐) 신라인 사회와 유기적인 연계를 꾀함으로써 신라·당나라·일본 세 나라 사이의 무역을 장악해 보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동기 이외에 당시 번진(藩鎭)의 사정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즉, 이사도(李師道, ?∼819) 등 조정에 반항적인 번진 군벌을 토멸(討滅)한 뒤 당나라는 821년부터 번진 병사의 수효를 점차적으로 삭감하는 정책을 계속 추진하였다. 군사 삭감 정책은 과중한 재정 부담으로 시달리고 있던 강회 방면(江淮方面)의 진(鎭)에서 적극 실시하였다. 따라서 다른 강회의 번진과 마찬가지로 장보고가 속해 있던 무령군도 감군 정책(減軍政策)이 실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장보고가 군을 떠나게 된 동기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828년(흥덕왕 3) 4월에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흥덕왕을 알현하고 사졸(士卒) 1만 명으로 완도에 설진(設鎭)하였다고 한다. 장보고의 공식 관직명은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인데, 신라의 관직 명칭에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골품 제도나 관등 제도의 규정에 구애받지 않는 일종의 예외적인 관직으로, 어쩌면 중앙 조정의 행정적 통제 대상에서 벗어난 특수 자격으로 장보고 개인이 사용하였을 것이다. 또한 조정에서도 이를 묵인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장보고는 당나라에 있을 때 절도사를 가리키는 별칭으로 흔히 사용하던 대사라는 명칭에 유념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엔닌>
장보고와 같은 시대를 산 승려로, 일본 천태종의 3대 좌주이다. 838년부터 9년 반 동안 당나라에서의 구법 활동을 저술한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장보고를 비롯한 신라인과 적산 법화원 관련 기록이 많다.
일본의 구법승(求法僧) 엔닌은 838년 7월부터 847년 초겨울까지 9년 반 동안 당나라의 동해안 일대와 광대한 제국의 내륙 등지를 여행하면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의 『입당구법순례행기』는 저자가 일본 승려임에도 전권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절반 이상을 신라인이 차지하고 있다.
장보고 무역 선단의 기반이었던 세력은 크게 세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하나는 중국 산둥 반도와 징항(京杭) 대운하 일대에 일찍부터 진출해 있던 고구려와 백제 유망민, 신라인이며, 다른 하나는 한반도 서남 지역의 완도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주민,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백제 유이민과 자연재해 때문에 이주한 신라인이 형성한 재일 신라인 사회이다.
신라인 취락(聚落)은 산둥 반도 남안 일대에서 하이저우(海州)와 대운하 주변을 따라 집중되어 있었다. 이 연안에 산재하던 촌락을 연결해 보면 신라와 당나라의 중심부를 이어 주는 자연의 수로가 형성된다. 그리고 운하의 심장부가 추저우(楚州)였음을 알 수 있다. 추저우 신라인 지역은 신라방(新羅坊)이라 하여 구당신라소(勾當新羅所)가 설치되어 행정을 관장하고 그 장을 총관(總官)이라 하였다.
추저우에서 3㎞ 떨어진 롄수이 항(漣水港)은 옛 화이수이 강 하류의 베이안(北安)에 위치한 내륙 수운의 중심지였다. 이곳에도 신라인 집단 거주지인 신라방이 있었다. 엔닌에 따르면 이곳에 총관과 ‘전지관(專知官)’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추저우 신라방의 크기와 비슷하였으리라 생각된다.12) 그리고 운하 연변(沿邊)에 거주하던 다른 신라인처럼 대부분은 운수업, 무역, 조선업, 상업 등에 종사하였다.
다음으로 산둥 연해안 지역을 살펴보자. 엔닌 일행은 하이저우 둥하이 현(東海縣) 숙성촌(宿城村) 연안에서 하선하였다. 이곳에서 엔닌 일행은 미저우(密州)에서 추저우로 목탄을 수송해 가던 우호적인 신라 상인을 만나 인근 신라인 마을인 숙성촌으로 안내되었다.13) 숙성촌은 바다에 면한 마을로 이곳 신라인은 주로 소금 생산에 종사하였다. 엔닌도 마을 주변에 ‘취염처(取鹽處)’가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14) 그리고 일부 목탄 생산에 관계하는 자도 있었다. 이것은 촌락 주변이 산림 지대였고 주민들이 목탄업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15)
신라인 촌락은 산둥 반도 남쪽 연안 일대에 가장 많이 형성되어 있었다. 모핑 현(牟平縣) 소촌포(邵村浦)와 도촌(陶村), 하이양 현(海陽縣) 동북의 유산포(乳山浦) 등이 대표적이다. 이곳 유산포 주변은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 신라인은 해운업, 상업보다 농업에 종사한 듯하다. 839년(신무왕 1) 4월 26일에 일본 조공선이 정박하였을 때 30여 명의 신라인이 말과 노새를 타고 선박을 조사할 신라인 압아(押衙) 장영(張詠)을 마중하여 왔던 사실과, 일본 조공 사신이 필요로 하였던 식량을 구매할 수 있었던 사실이16)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원덩 현(文登縣) 칭닝 향(淸寧鄕) 적산촌(赤山村)은 산둥 반도 일대 신라인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당나라 내륙, 연해안 교통과 신라·당나라·일본을 잇는 무역 중심지였다. 이곳에는 장보고가 건립한 적산 법화원(赤山法華院)이 있어 신라인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였다. 적산 법화원은 연간 500섬의 곡식을 수확하는 장전(莊田)을 소유하고 장보고 휘하의 장영 등 세 명이 경영하였다. 839년 11월 16일에 시작하여 이듬해 1월 15일에 끝난 강회에는 매일 40명 안팎의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이 강연의 마지막 이틀 동안은 260명과 200명이 각각 참여하였다.17) 이 밖에도 적산 법화원은 고국에서 온 여행자나 무역 관계 종사자를 위한 숙박소로도 제공되었던 듯하다.
한편 8세기 중엽을 고비로 신라와 일본 간의 국교는 사실상 단절되었다. 따라서 공무역의 통로가 막히자 양국 간에는 사무역에 대한 욕구가 증대하였다. 당시 일본 측은 중국 물품에 대한 욕구가 매우 컸는데 신라 상인의 중개 무역으로 충족하였다. 신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볼 때 나·당·일 삼국 간의 무역에 유리하였을 뿐 아니라 특히 조선술과 항해술은 당시 일본을 능가하였다.
<법화원>
장보고가 중국 덩저우(登州)의 신라인 거주지 적산촌(赤山村)에 세운 절이다. 적산원(赤山院)이라고도 한다. 사진은 최근에 중국 산둥 성 롱청 시(榮成市)에 복원한 모습으로 법화원의 전경이다.
<복원된 법화원의 정문>
일본에서도 중국에서처럼 신라인 사회를 주목하였다. 신라인은 7세기 이전부터 일본에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신라인이 끊임없이 일본의 각 지역, 즉 하모야국(下毛野國), 무장국(武藏國), 미농국(美濃國), 근강국(近江國), 준하국(駿河國) 등에 이주하여 신라인 사회를 형성하고 신라인의 성(姓)으로 생활하였다. 이러한 신라인 사회의 명칭은 신라군(新羅郡) 또는 도전군(度田郡) 등으로 불렸다.일본의 신라인 사회를 형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은 신라의 승려나 관리 등이었다.
휴대품을 운반하여 제2선에 싣고 나가미네(永峰) 판관과 함께 같은 배를 탔다. 그 아홉 척의 배에 관인을 나누어 태우고 각각 선장으로서 통솔하게 하였다. 본국의 선원 이외에 외국 선원들까지도 통솔하게 하였다. 다시 바닷길을 잘 아는 신라인 60여 명을 고용하여 각 배마다 일곱 명 혹은 다섯 명을 배치하였다. 또한 신라 통역관 김정남으로 하여금 내(엔닌)가 머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게 하였으나 아직 가능성 여부를 결정짓지 못하였다.
최 압아(崔押衙)에게 보내기 위하여 편지 한 통을 남겨 놓고 적산 법화원의 사람에게 전달을 부탁하였다. 아울러 편지 한 통을 써서 같이 장 대사(장보고)에게 보냈다.……
재일 신라인 사회와 신라 본국은 서로 빈번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앞의 인용문에서 견당 일본 사절사선(遣唐日本使節使船)에 동승한 신라 역어(譯語, 신라인 출신 통역관)와 재당 신라인이 긴밀히 협조하여 중국과 외교 절충을 하거나 일본 사절이 귀국하기 위하여 추저우에서 배 아홉 척과 선원 60명을 마련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아울러 지쿠젠 태수(筑前太守)가 엔닌을 보호해 달라고 장보고에게 편지를 쓰고, 그 편지를 중국으로 가는 엔닌이 지참하였다. 그뿐 아니라 엔닌 자신이 장보고와 그의 부하에게 애원하는 편지를 쓴 것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재일 신라인도 재당 신라인처럼 주로 무역 관련 일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재일 신라인은 일본 조정이 필요로 하는 각종 고급 인력을 제공해 주었다. 엔닌의 일기에 나타난 역자, 선원, 승려, 노를 젓는 사람 등은 재일 신라인이었다. 그 밖에도 귀국할 일본 조공사선(日本朝貢使船)의 준비, 항해 지휘, 재일 신라인 사회 주위에 있는 일본인에 대한 기술 지도 등을 수행하였다.
청해진을 설치한 후 장보고는 대일 무역 활동을 본격화하였다. 당시 그가 일본에 보낸 무역 사절단을 회역사(廻易使)라 하였는데, 이들의 무역 활동은 다자이후뿐 아니라 일본 조정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다.
한편 장보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생긴 신라와 일본 간의 분쟁을 통해서도 대일 무역이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장보고가 죽음으로써 이제는 회역사에게서 수취해 오던 상품의 이익을 잃게 된 지쿠젠 지방 관헌이 회역사의 소지품을 모조리 몰수하여 손실에 충당하려 한 것이라든지, 장보고를 암살한 염장(閻長)의 부하 이소정(李少貞)이 일본에 와서 다자이후에 대하여 회역사 이충(李忠), 양원(楊圓) 등이 가져온 화물을 신라 쪽으로 되돌려 줄 것을 요청한 것23) 등은 당시 장보고 무역 선단의 무역품이 대량에다가 값비쌌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남 도 장도의 목책열> 청해진이 있던 장도에서 출토된 목책열(木柵列)이다. 목책은 말뚝 따위를 죽 잇따라 박아 울타리처럼 만든 방어 시설이다. 장보고는 동아시아 해상 교통의 요충지인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그는 중개 무역을 장악하여 막대한 부를 축척하고 해상 제국을 건설하였다.
결국 장보고는 재일 신라인 사회와 청해진 및 재당 신라인 사회를 연결하는 일련의 무역망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당시 동아시아 해상 교통의 요충지였던 완도에 거점을 마련하고, 항로를 장악하여 중개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해상 제국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장보고가 몰락한 직접적 원인은 중앙 정치로의 진출 야망, 특히 납비(納妃) 문제가 유산된 데 있었다. 그 밖에도 장보고에 대한 서남 해안 지방의 군소 해상 세력의 반발을 생각할 수 있다. 이들은 청해진의 설치로 말미암아 장보고의 통제 아래 들어감으로써 기존에 자신들이 누리던 해상 무역의 이익을 대부분 잃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노예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해 왔던 해상 세력가가 입은 타격은 매우 컸을 것이다. 이들은 그간 신라 조정에 대해서 노예 무역을 다시 허가해 줄 것과 청해진의 무역 독점 행위를 시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장보고의 사망 연대에 대해서는 국내 자료와 일본 측 자료 사이에 약간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846년 봄에 죽었다고 되어 있는 데 비해 일본 측 기록에는 841년 11월 중에 죽었다고 되어 있다. 한편 엔닌은 그의 일기에서 지난날 장보고의 대당 매물사(大唐賣物使)로서 중국에 가서 무역을 한 적이 있었던 청해진 병마사(兵馬使) 최훈 십이랑(崔暈十二郞)이 ‘국란(國亂)’을 당하여 845년 7월 현재 중국 롄수이(漣水)의 신라방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24) 이 ‘국란’이 바로 장보고 암살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일본 측 자료를 기준으로 보면 장보고의 암살 사건은 841년 11월 중의 일로 판단된다.
장보고가 암살당한 뒤 그의 부장(副長)이던 이창진(李昌珍) 등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염장이 진압하였다고 한다. 그 뒤 한동안 청해진은 염장이 통제하였다. 이에 장보고의 심복은 중국 혹은 일본으로 떠났다. 한편 장보고를 따르던 완도 주민은 염장의 압제(壓制)에 끈질기게 저항하다 탄압만 받았다. 결국 신라 조정은 851년(문성왕 13) 2월에 청해진을 폐쇄하고 그곳 백성들을 벽골군(碧骨郡, 전라북도 김제)으로 집단 이주시켜 청해진은 사실상 국제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청해진 폐쇄 이후 장보고에 의한 무역 통제력이 제거되자 각지에서 군소 해상 세력이 독자적으로 대중국 무역을 전개하였다. 강주(康州, 경상남도 진주)의 왕봉규(王逢規), 금주(金州, 경상남도 김해)의 이언모(李彦謨), 개성 지방의 왕건 집안, 나주의 오씨 집안, 울산의 박윤웅(朴允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의 활동은 후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의 벽란도(碧瀾渡) 활동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장보고만큼 세계적인 평가를 받은 인물은 거의 없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중국·일본 세 나라의 정사에 기록된 유일한 인물이다. 장보고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일본 천태종(天台宗)의 3대 좌주(座主) 엔닌은 장보고의 도움으로 당나라에서 무사히 구법(求法) 활동을 마칠 수 있었다는 것과 그에 따른 특별한 감사와 흠모의 정을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담고 있다. 나아가 그는 일본에 귀국한 뒤 제자들에게 “교토에 적산선원(赤山禪院)을 세우고 적산 대명신(赤山大明神)을 모시라.”고 유언하였는데, 부귀영화를 관장하는 재물의 신으로 알려진 이 신은 장보고일 것으로 짐작된다.
<『속일본후기』>
육국사(六國史)의 하나로, 닌묘(仁明) 천황 재위기의 역사를 869년에 편찬한 역사서이다. 이 책에는 일본 정부가 장보고 선단과 독자적인 무역 관계를 맺고 신라와 당나라의 선진 문화와 물품의 공급을 의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속일본후기』>
『속일본후기』에는 일본 조정이 장보고 선단과 독자적인 무역 관계를 맺고, 나당의 선진 문화와 물품의 공급을 장보고 선단에 의존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당나라의 문장가이자 시인인 두목의 『번천문집』과 중국 정사의 하나인 『신당서』, 제도와 문물사에 대한 책 『문헌통고(文獻通考)』 등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친 장보고와 청해진을 상세히 언급하면서 그의 위대함을 특별히 기록하였다.
장보고의 위상을 강조하는 경향은 우리나라 기록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비록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용이 있어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다면 기록이 없어져 그 위대함이 알려지지 않을 뻔하였다.”라고 하여 장보고를 고구려의 영웅 을지문덕과 견주어 언급하였다. 이렇듯 한·중·일 삼국의 역사서에 영웅으로 칭송받던 장보고는 세계화·국제화를 추구하고 있는 21세기 현재에서 볼 때 우리 역사상 최초의 세계인이었다.
[필자] 윤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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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記)』 권44, 열전(列傳)4, 장보고(張保皐), 정년(鄭年). |
『삼국사기』 권44, 열전4, 장보고, 정년. |
『삼국사기』 권44, 열전4, 장보고, 정년. |
엔닌(圓仁),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권2, 개성(開成) 4년 6월 28일 ; 5년 2월 15일 ; 5년 2월 17일조. |
엔닌, 『입당구법순례행기』 권1, 개성 4년 4월 5일조. |
엔닌, 『입당구법순례행기』 권1, 개성 4년 4월 7일조. |
엔닌, 『입당구법순례행기』 권1, 개성 4년 4월 6일조. |
엔닌, 『입당구법순례행기』 권2, 개성 4년 4월 26일조. |
엔닌, 『입당구법순례행기』 권2, 개성 5년 정월 15일조. |
『속일본기(續日本紀)』 권6, 레이키(靈龜) 원년 추 7월 병오 ; 『속일본기』 권11, 덴표(天平) 5년 6월 정유 ; 『일본후기(日本後紀)』 권24, 고닌(弘仁) 5년 8월 병인 ;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권18, 조간(貞觀) 12년 9월 갑자 ; 『일본삼대실록』 권17, 조간 20년 2월 임인. |
일본 조공사가 추저우에서 고용한 신라선 아홉 척 가운데 두 번째 배를 말한다. |
엔닌, 『입당구법순례행기』 권1, 개성 4년 3월 17일조. |
엔닌, 『입당구법순례행기』 권2, 개성 5년 2월 17일조. |
『속일본후기』 권9, 조와(承和) 7년 12월 27일조 ; 『속일본후기』 권10, 조와 8년 2월 27일조. |
『속일본후기』 권11, 조와 9년 정월 2일조. |
엔닌, 『입당구법순례행기』 권4, 회창(會昌) 5년 7월 9일조. 일찍이 청해진 병마사였던 최훈 십이랑을 만났다. 덩저우의 적산원에 머물러 있을 때 한 차례 서로 만났다. …… 그 사람이 다시 돌아가 신라에 이르렀을 때 국란을 만나 도망하여 롄수이(漣水)에 이르러 머물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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