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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한국 근대불교의 중흥조이시고, 민족 독립운동가이신 용성조사님의 열반 84주기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4시 45분에 정토사회문화회관 3층 설법전에서 서울 공동체 대중과 예불을 함께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예불을 마친 후 서울 공동체 대중들이 부탄 답사를 마치고 귀국한 스님에게 삼배로 인사를 했습니다.
스님은 부탄을 답사하고 온 결과를 간단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부탄 답사를 잘 다녀왔습니다. 비행깃값이 비싸서 같이 갔던 실무자들은 부탄에 남고, 저 혼자만 한국에 잠시 왔습니다. 실무자 여섯 명이 부탄에 남아서 주민들의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해 샘플을 만드는 일을 지금 하는 중이고요. 개발 방식은 한 곳에서 종합 개발을 할 것인지, 여러 군데에 분산해서 개발할 것인지 논의를 많이 했는데, 부탄 정부에서는 분산해서 개발하자고 최종 제안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동네는 식수 문제를 해결하고, 저 동네는 주거 환경 개선을 하고, 이런 식으로 10개 마을 정도를 분산해서 시범 사업을 해볼 계획입니다.
여러분들도 다들 바쁘죠? 원래는 식목일 행사를 공동체 전체가 함께하려고 했는데, 저 혼자 내려가서 거사님들 몇 명과 함께 나무를 심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잘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새벽 5시 10분에 서울에서 출발해 장수 죽림정사로 향했습니다.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가운데 산 너머로 해가 떴습니다.
휴게소에 내려 국수 한 그릇을 먹고 다시 가던 길을 갔습니다. 차로 세 시간을 달려 8시 10분에 죽림정사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물빛 공원으로 가서 6월 13일에 열리는 국민대법회를 어떻게 진행할지 장소 답사를 했습니다. 만 명이 참석할 예정이기 때문에 만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곳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의자를 최대한 비좁게 배치해도 5천 개밖에 배치하지 못합니다.”
“언덕에 돗자리를 깔고 앉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멀리 앉은 사람은 무대가 안 보일 수가 있는데, 무대는 각자 핸드폰으로 생중계를 통해 보면 되니까 소리만 잘 들리면 될 것 같아요.”
물빛 공원에는 나뭇가지마다 벚꽃과 목련이 송이송이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답사를 마치고 용성조사 열반 84주기 기념식을 시작하기에 앞서 역대 전등 조사들을 기리는 다례재에 참석했습니다.
다례재를 마치고 참석한 내빈들과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장수군 군수, 군의회 의장, 군의원과 도의원, 도 보훈지청장, 교육청장, 노인회 회장, 면장 등 많은 분이 자리했습니다.
인사를 나눈 후 스님은 다가오는 6월 13일에 죽림정사에서 열리는 국민대법회에 만 명의 시민들이 참여하니 관계 기관에서 여러모로 협조를 해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각 기관에서는 원활한 행사 진행을 위해서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 여러가지 의견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시간이 다 되어 행사가 열리는 교육관으로 이동했습니다.
내빈들이 모두 자리하고 10시 정각에 본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 한 후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해 묵념을 하고, 용성조사님의 행장을 낭독하고, 기념 영상을 함께 보았습니다.
참석한 내외빈 소개가 있고 난 뒤 대중이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하자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이자 죽림정사 주지인 스님이 기념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오늘은 열반일이기 때문에 조사님의 열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중심으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오늘은 용성조사님이 열반하신 지 84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날은 조사님을 추모하는 날이기도 하고 열반을 기념하기도 하는 날입니다. 용성조사님께서는 1864년 당시 행정구역인 남원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은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입니다. 조사님이 태어나신 1860년대 초는 대기근으로 많은 사람이 굶주리고 병들어 죽었습니다. 백성들은 고초를 견디지 못하고 관아를 습격하는 등 삼 도에서 민중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조사님은 장수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꿈꾸게 된 배경
용성조사님은 어릴 때 서당에 다니다가 꿈에서 부처님을 보고 남원 교령산성 용천사를 찾아갔습니다. 당시 조실이셨던 혜월화상이 계시는 덕밀암으로 가서 혜월화상을 직접 뵙고 그분의 지도를 받아 출가한 후 수도하여 위대한 스승이 되셨습니다. 용성조사님을 위대한 수행자이자 민족 지도자로 이끈 혜월화상은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선생의 절친한 친구였어요. 나중에 최제우 선생을 숨겨준 죄목으로 혜월화상은 승적이 박탈되고 절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가택연금과 같은 처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인연 덕분에 1919년 3.1 운동 때 천도교 교주 손병희 선생과 용성조사님은 스승의 인연을 따라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의기투합할 수 있었습니다.
3.1 운동은 대외적으로 기독교, 불교, 천도교가 함께 참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가 3.1 운동을 주도한 것처럼 언급하지만 실제로는 천도교가 주도했어요. 당시 천도교는 교인이 200만 명이 넘었고, 기독교는 20만 명 정도였습니다. 천도교에서는 3.1 운동에 교단이 직접 참여하여 모든 재정을 부담했습니다. 그 결과 3.1 운동이 끝난 후 천도교는 막대한 타격을 입고 교세가 약화되었습니다. 개신교와 불교는 교단이 아닌 개인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3.1 운동 후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불교는 조선왕조 500년간 숭유억불 정책으로 탄압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불교는 오히려 옹호받았어요. 그러다 보니 당시 불교계와 승려들은 대부분 조선 총독부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각 사찰에 주지를 임명하는 권한도 조선 총독부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용성조사님은 많은 제자를 두셨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제자만이 조사님을 따랐어요. 나머지는 조선 총독부의 정책에 협조했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해인사, 범어사 같은 큰 절의 주지를 맡은 분들도 많았지만, 조사님께서 돌아가실 때 방 하나조차 내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용성조사님은 본인이 민가를 사들여서 설립한 대각사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가슴 아프지만, 용성스님의 열반은 당시 우리 백성이 겪었던 고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용성조사님은 혜월화상의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불교계에서만 뛰어났을 뿐 아니라 새로운 세상, 즉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꿀 수도 있었습니다. 이 점이 일반 승려와 달랐어요. 나라를 되찾는 독립운동인 동시에 되찾은 나라가 다시 임금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대한제국 부흥 운동’이 아닌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 수립 운동’을 했습니다. 이에 따라 국호도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으로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조선왕조 또는 대한제국이 공식적으로 망한 것은 강제 합병이 된 1910년이지만, 실제로는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사님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했다고 보고, 1907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울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당시 조사님이 중국의 여러 사찰을 순례한 것도 사실은 주된 목표가 상해에 임시정부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919년 3월에 3.1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바로 그다음 달인 4월에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출범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름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했습니다.
용성조사님의 유업을 계승해 나가는 길
용성조사님의 열반 일을 맞아 조사님께서 돌아가실 때의 시대 정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앞으로 그분의 유업을 어떻게 계승할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일본 제국주의는 1910년에 조선을 강제로 병합했습니다.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만주로 건너가 저항하며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의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1931년, 일본 제국주의는 만주까지 점령하고 거기에 위성국인 만주국을 설립했어요. 이후 동북아에서 굳건한 터전을 마련하고 1937년 노구교(盧溝橋) 사건을 계기로 중국 침략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 두 정부가 내전 중이었습니다. 일본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두 세력은 내부 정치적 다툼을 잠시 미루고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국공합작을 펼쳤습니다.
이때 국민당 국부군(國府軍)은 북경 이남 지역에서 강세를 보였고, 공산군은 만주 등 북쪽 지역에서 우세했습니다. 동북항일연군은 만주를 중심으로 한 동북 지역의 각 민족인 한족, 만주족, 몽골족, 조선족이 연합해 일본에 맞서기 위해 공산군이 조직한 군대입니다. 이 연합군에 많은 조선인이 참여하면서,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공산당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에서 일국 일당주의를 내세우며 중국에서 활동하려면 중국 공산당에, 소비에트에서 활동하려면 소비에트 공산당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나라 밖에서 독립군의 이름으로 싸우던 수많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결국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기가 활동하는 나라의 공산당에 참여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좌우 이념 대립이 깊어져 독립운동사에서 공산당 경력이 있는 이들을 제외했습니다. 어떤 이념을 가지든, 어디에 소속되어 있든, 나라를 잃었을 때 독립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모두 독립운동가로 공적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출신을 문제 삼아 배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후에 북한 정부에 참여하거나 친일 행위를 한 사실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의 독립운동 공적을 무효로 할 수는 없습니다. ‘젊은 시절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나 나중에 친일 행위를 했다.’, 반대로 ‘젊은 시절 친일을 했지만, 나중에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등 역사를 있는 그대로 평가해야 합니다. 친일 경력이 있다고 항일 경력을 부정하고, 공산주의 경력이 있다고 독립운동 경력을 모두 부정하니까 역사 논쟁이 생기는 거예요. 당시 한반도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의 독립이었지, 그 일을 한 사람이 어떤 사상을 갖고 있었는지는 부차적이었습니다. 국민당 국부군과 협력할 수 있으면 협력하고, 중국 공산당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받고, 필요하다면 소비에트 공산당과 힘을 합쳐야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주로 장개석 정부와 협력하여 독립운동을 벌였고,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모택동 군대와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해서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또 일부는 러시아 소비에트에 참여해서 독립운동을 했어요. 일본이나 미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독자적으로 활동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 독립운동사 전체를 보면, 우리 민족은 어느 민족보다도 열정적으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독립운동 과정에서 참여 방식을 가지고 배제해 버리니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살펴보면 독립운동을 한 게 별로 없어 보여요. 공산당이나 친일 행적을 배제함으로써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스스로 왜소하게 만든 부분이 있습니다.
용성조사님께서는 독립운동가들의 이념과 관계없이 모두를 지원했습니다. 김구 선생과 관계가 돈독했기 때문에 주로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는 한편,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벌이던 독립운동가들의 가족도 돌보았습니다. 용정(龍井)에는 땅을 사들여 대각교당(大覺敎堂)과 선농당을 세웠습니다. 농사와 수행을 한다는 구실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그곳에 살던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을 돌보는 데 사용했어요. 이는 백두산 산록 아래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 용성조사님이 운영하던 봉녕촌과 명월촌의 농장 입구에는 간도특설대가 들어섰습니다. 간도특설대란 일제가 조선인을 내세워 독립운동가를 색출하고 체포하기 위해 설립한 조직이었습니다.
절망의 시기에 미래의 희망을 제시한 분
1937년에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용성조사님은 조선과 중국이 힘을 합쳐 일본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며 조·중 연합군을 제안했습니다. 일제의 힘이 뻗어나가서 중국까지 직접 침략을 받게 되었으니 중국도 일본에 저항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잖아요. 지금까지 우리 힘만으로 일본과 싸워왔는데 이제 조선과 중국이 힘을 모아야 할 때라고 보신 거예요. 하지만 1939년, 용성조사님의 국내외 조직이 일제의 첩보망에 걸려 결국 일망타진당했습니다. 이에 용성조사님은 낙심했지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실패했지만, 60년 후에는 대한민국이 다시 일어설 것이다.’
이렇게 1939년으로부터 60년 후인 1999년을 전망하시면서 대한민국의 부흥을 대비해 많은 복을 지으라고 유훈 10사목을 남겼습니다.
도문 큰스님께서는 용성조사님의 유업을 이어받아 그 유훈을 실현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오셨습니다. 용성조사님의 말씀대로 1999년, 경주 고위산 천룡사에서는 국가를 위한 대규모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25년 후에는 이곳 장수 죽림정사에서 용성조사 탄생 160주년을 맞아 국운 융창을 위한 기도를 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올해 용성조사 탄생 160주년을 맞아 이곳 장수 죽림정사에서는 1만 명이 모여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국민 화합, 국가 발전을 위한 대법회를 개최하려고 합니다. 이 기운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이 지속적으로 발전해서 세계에 큰 공헌을 하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60년 전이나 100년 전에 오늘의 대한민국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뤄냈습니다. 현재 남북한의 갈등과 국론의 분열이 심각한데 무슨 국운이 융창하겠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20년, 30년, 50년이 지나 돌아보면 오늘의 혼란이 결코 내리막길로 향한 혼란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위대한 대한민국, 나아가 평화롭고 통일된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습니다.
6월 13일에 국민대법회를 하는 이유
우리는 이러한 희망을 품고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6월 13일 용성조사 탄생일에 국민대법회를 엽니다. 죽림정사가 좁아서 바로 앞에 있는 물빛 공원에서 행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모든 정토행자들은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그날 미리 다 휴가를 내고 오세요. 일부 사람들은 ‘평일이라 직장을 빠지기 어렵다’, ‘주말로 날짜를 바꾸면 안 되나요?’ 하는 제안을 했습니다. 장소가 좁아서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분들도 있는데, 직장을 하루 안 나가는 게 뭐가 어렵다고 그것도 안 하려고 해요? (웃음)
이 법회에 단순히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광고를 내고, 길 가던 사람을 참여시키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용성조사 탄신 160주년 기념 국민대법회에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평화를 지켜내고, 통일의 희망을 잃지 않고, 통일 코리아를 꿈꾸는 의미 있는 사람 만 명이 모여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미리 일정표에 그날을 표시해두고, 직장에도 미리 휴가를 신청해서 참석해야 합니다. 또한, 정토회원이 아니더라도 이 목적에 공감하는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용성조사님이 평생 일구신 활동이나 3.1 운동이 겉보기에는 실패했다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100년 전 3.1 독립선언서를 다시 읽어보세요. 그 내용은 마치 100년이 지난 오늘날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적혀 있습니다. 당시에는 선언서가 너무 약하다며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선조들은 일제의 극심한 핍박 속에서도 ‘우리는 어떠한 원한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우리의 독립이 남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동양의 평화와 세계 평화를 위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내용은 나라를 잃었을 때는 꿈같은 소리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읽으면 딱 적절한 내용이에요.
이런 큰 뜻을 계승해 우리도 정파적, 이념적 차이를 넘어서 나라의 발전만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국민대법회에 참여해야 합니다. 용성조사님은 비록 어려운 삶을 사시고 열반에 드셨지만, 우리가 유업을 계승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든다면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용성조사님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행사는 외부 지원 없이, 정부의 도움 없이 개최됩니다. 대한민국은 우리의 나라이지, 정부 나라도 아니고 공무원 나라도 아니잖아요. 내가 사는 나라이고, 내 후손이 살아갈 나라입니다. 참가비용도 참가자 본인이 부담합니다. 내 발로, 내 돈을 들여서 주체적으로 참여해야 국가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어요.
대한민국은 이미 많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요즘 우려하는 것은 우리 국민들이 뭐든지 자꾸 정부에 해달라고 요구하고, 조그마한 불편도 스스로 해결하지 않는 현상입니다. 단기적으로는 이해가 관철되면 당장은 만족할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국민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내가 해결해야 해요. 물론 정부도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수행자는 자기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게 내 일이지 남의 일이 아니에요. 내 일을 한다는 관점을 분명히 잡고 동참해야 합니다.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는 것만이 꼭 기도가 아니에요. 간절한 마음이 바로 기도입니다. 예로부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원을 가지고 온 마음을 다해야 하늘이 돕습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도움받을 생각을 한다면 올바른 수행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6월 13일 용성조사님 탄생지에서 열리는 국민대법회는 그분의 마지막 유훈을 실현하는 자리입니다. 대한민국이 평화와 상생의 새로운 기운으로 다시 일어나기를 발원하는 국민대법회에 모두 한마음으로 동참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홍서원으로 기념식 생방송을 마친 후 법회에 참석한 대전충청 지부 회원들과 대웅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스님은 내빈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내빈들을 배웅한 후 정토회 사무처장님을 비롯하여 6.13 국민대법회 실무준비팀과 죽림정사 도량을 한 바퀴 둘러보며 행사 전에 도량을 어떻게 정비할지 의논했습니다.
오후 1시 30분부터는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 이사회를 했습니다.
작년 사업 결과와 결산, 올해 사업 계획과 예산을 함께 검토한 후 6월 13일에 열리는 국민대법회를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진행해 낼 수 있을지 다양한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준비한 안건에 대한 의결과 승인을 한 후 오후 3시에 이사회를 마쳤습니다.
곧바로 죽림정사를 출발하여 두북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이동하는 중에 차 안에서 스님은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 총회에 온라인으로 참석했습니다. 총회를 마치고 나서야 달리는 차 안에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고속도로 위를 2시간 30분을 달려 오후 5시 30분에 두북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교문 앞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습니다.
학교 운동장에도 곳곳에 진달래, 매화, 복사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봄소식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에는 인도 상카시아에서 근무하고 있는 활동가 두 분이 비자 갱신을 위해 한국에 잠시 왔다가 스님에게 인사를 하러 찾아왔습니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며 인도 상카시아에 담마 센터를 세우는 일에 대해 의논한 후 일과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수행법회 생방송을 한 후 오후에는 식목일을 앞두고 나무 심기 울력을 하고, 저녁에는 경주에서 신라문화원 개원 31주년 기념 초청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