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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강희제(姜熙齊, 1654년~1722년)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
강희 50년인 1711년,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이 실시되었다. '정세'라는 것은 사람의 머릿수만큼 걷는 것. 결국 사람이 늘어나면 세금도 더 걷어 들이게 되는데, 바로 이 해인 강희 50년의 인구를 조사한 다음 정세를 영원히 동결시켜 버렸다. 말 그대로 국가 전체적으로 거둬들이는 정세가 더 이상 안 늘어났다. 이는 엄청난 의미가 있는데, 이때부터 인구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으로, 강희 연간의 중국 사람들이 한꺼번에 아이를 많이 낳아서가 아니라 호구 수에 따른 세제 부담으로 호적 체계에서 벗어나 있던 농민이 그만큼 많았다가 그러한 부담이 사라지면서 이 체제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를 많이 낳아도 이젠 뭐 부담도 없고…
이 정책으로 전국의 정세 수취량은 고정되었으나 정세를 징수당하는 농민들이 도망하는 일이 발생하여 정세 수취량은 다시 줄기 시작하였다. 강희제는 이러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 지세 1냥 당 약간의 정세를 부과하는 식의 탄정입묘(攤丁入畝) 방법을 고안하였고 이로 인해 정세가 지세로 합쳐지게 되었다.
이는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데, 조세의 일원화를 통해 징세 체계가 단순해졌고, 인구 증가에 따라 1인당 조세 부담 액수가 상대적으로 감면됐기 때문이었다.
하도 큰 일이기에 우선 광동성에서 먼저 시험을 해보았고 결과가 괜찮자 사천, 절강, 하남 성에서 시행해서 효과를 보았다. 이리하여 지정은제(地丁銀制)가 이렇게 시행되었다. 이 지정은제가 시행되기까지 엄청난 논란이 있었으나 옹정제 때 결국 시작되었고, 이를 반대하는 세력에선 저항이 극심했다. 그 뒷이야기는 옹정제 문서에서 확인하자.
강희제는 전쟁이 일어나도 세수입을 늘리지 않았으며 팔기군의 둔전지로 쓰던 권지(圈地)를 소작농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기까지 하였다. 이는 강희제의 검소함과 유럽과의 무역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인데, 그 덕에 재정 상황이 상당히 풍족해졌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가뭄이 든 지역의 세금 면제는 당연하고 산불로 인해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집값을 지원해주기도 했다고. 심지어는 강희 51년에는 가뭄이나 홍수 등으로 인한 큰 피해가 없어 여지껏 세금 꼬박꼬박 낸 나머지 지역들의 그 해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이러한 정책들 때문에 명나라 말기 1억 명 이하까지 떨어졌던 인구는 강희제가 세상을 떠날 당시 1억 5천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또한 강희 7년에 1,500만 냥이었던 은자는 강희 50년 경에는 5천만 냥이 넘는 양까지 증가했는데, 유럽과의 무역을 통해 은의 블랙홀이 된 것과 강희제 치하 청나라 조정의 정책적 성공이 시너지를 일으킨 결과였다.
2.7.4. 문화 사업
만주족이지만 유교, 그리고 성리학에 매우 박식하고 심취했던 강희제는 스스로도 유학자였고, 경연과 조회에서 유학자들과 키배를 떠서 발라버리기도 했다. 더욱이 치세 당초부터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존중하여 그 저술을 출판하고 이에 의해 군신 간의 도덕을 강조했다. 또 고급 문관 시험에 해당되는 과거를 정기적으로 거행하여 지식인의 희망에 부합하려고 했다. 세종대왕처럼 책벌레이기도 해서 아픈 와중에도 책을 보는 것을 놓지 않았으며, 글씨도 제법 잘 써 소림사의 현판을 친히 쓰기도 했다. 또 1679년 특별 시험을 행하여 50명의 재야 인재를 고관에 임용했다. 그중 40%는 상공업의 진보와 함께 고도로 문화가 발달한 강소성, 절강성 출신 문인이 차지했다.
수많은 문화 사업에 손을 댄 강희제는 중국에 존재하던 유사 이래 모든 도서를 모아다가 영구 보존판으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전조(前朝)의 역사인 '명사(明史)', 광대한 규모의 백과사전인 '도서집성(圖書集成)' 등 편찬을 위하여 특별 관청을 설치하고 광범위한 학자에게 직책을 주었다. 또 예수회 선교사들의 지식을 받아들여 중국 최초의 위도를 사용한 지도인 황여전람도를 만들었다.
이 중에 백미는 단연 《강희자전(康熙字典)》. 이것을 완성시키기 위해 수십 명의 학자들과 대신들이 수년 동안 노가다를 뛰며 만든 대작이다. 강희자전의 지은이는 장옥서(張玉書), 진정경 등 30명으로, 모두 42권이고, 글자 수가 47,000자 남짓 된다. 글자 배열 순서는 먼저 나와 있던 자휘(字彙), 정자통(正字通)이 부수가 몇 획이냐에 따라 배열한 것을 그대로 따랐지만, '강희자전 순서'라는 말이 쓰이고 있듯이 뒷날의 부수별 한자 사전의 본보기가 되었다. 이는 근대 이전 최대 규모의 자전이었으며 현대 중국어에도 큰 영향을 미친 사업이었다.
2.7.5.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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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과 천문을 보고 있는 강희제
골수 성리학자 강희제는 가톨릭의 교리를 배우지도, 배우려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종교를 탄압하지도 않았는데 가톨릭 포교를 허락하고 가톨릭 교회에 대한 조정의 박해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명나라 때 처음 중국에 온 마테오 리치는 용어 문제 관련해서는 적당히 넘어갔고, 공자를 공경하고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문제에 대해서는 종교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 민속으로 규정해 중국 가톨릭 신자는 이런 의식을 집전하거나 참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예수회의 활동은 다른 가톨릭 수도회들의 시기를 받아 고발당했고, 당시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이를 우상 숭배로 여기는 회칙을 발표하였다. 또한 추기경이였던 샤를토마 마야르 드 투르농(Charles-Thomas Maillard de Tournon, 1668년 12월 21일∼1710년 6월 10일)이라는 인물을 특사로 파견하여 "교황청의 관행에 정통하며 교황에게 신임 받는 인물을 대표로 삼아 중국 내의 수도자들을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톨릭 신자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지만, 강희제는 이것을 불쾌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비록 중국에 온 선교사 집단이 모두 다른 나라 사람이지만 모두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 나는 네가 말하는 교왕에게 신임받는 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대청제국에서는 적임자를 고르는 데 그런 차별을 두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내가 앉아있는 용상과 가까이 있고, 어떤 자는 중간에 있고, 어떤 자는 아주 멀리 떨어져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충성심이 있으며 만일 충성심이 없다면 내가 어떤 일을 맡기겠는가? 그대들 중에 누가 감히 교왕을 속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스도교에서는 거짓말하는 자는 하느님을 노엽게 한다면서 거짓말을 금하고 있지 않은가?"
쉽게 얘기하자면 “어차피 똑같이 천주 믿는 사람들끼리 누구는 신임하고 누구는 신임 못하고가 어디 있냐. 누구는 교왕이 신임하니까 믿어도 되고 누구는 교왕이 신임 안 하니까 믿으면 안 되는 게 어디 있냐? 교왕이 신임 안 하면 그 사람은 천주 믿는 사람 아니냐? 그러면 지금까지 신임하지도 않는 사람(예수회)을 우리한테 보내서 천주 믿으라고 전교한 거냐? 니들 지금 우리 무시하냐?”고 교황을 비난한 거다.
그리하여 전례에 관해 마테오 리치의 입장에 찬동하지 않는 선교사들을 추방시켰다. 그리고 결국 옹정제 때가 되면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 자체를 전부 막아버리고 추방해버리게 된다.
3. 사생활
3.1. 서양 문물 애호
강희제는 대단한 호기심의 소유자였다. 사물들이 무엇으로 만들어지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즐겨 탐독하고, 천문학, 지도 제작, 광학, 의학, 대수학 등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또한 그는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예수회 선교사들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로부터 다양한 공학적, 의학적, 예술적, 천문학적인 이해를 구했다. 예수회 선교사 페르비스트로부터는 기하학을 배웠으며, 프랑스 출신의 제르비용과 조아킴 부베, 포르투갈 출신의 페레이라 등에게서는 수학을 배웠다.
특히 예수회 선교사인 부베는 강희 21년 중국에 들어와 근 30여년이나 강희제에게 의학, 화학, 물리학의 상식과 라틴어 고전을 가르쳤다.
당시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들은 모두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수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강희제는 그들로부터 서양의 역사와 유클리드 기하학 등을 배우게 된다.
수학을 공부하면서 계산기도 이용했는데, 프랑스의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이 처음 발명했던 바로 그 초창기형 계산기를 썼었다.
벨기에인 예수회 선교사인 앙투안느에게 고차방정식의 답을 구하는 비부호화된 대수법인 '차근법'을 배우기도 했고 심지어 신하들 앞에서 수학 문제를 풀고, 풀이 과정을 설명해주면서 즐기기도 하였다. 거기다 즐겨 하던 취미가 술 먹고 잔치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을 불러서 수학 문제 풀면서 정답이 맞으면 좋아하는 것이었다.
또 강희제는 서양 의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몽골 원정 중에 말라리아에 걸려 목숨이 오락가락 하다가 간신히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살아났던 적이 있는데, 이 일로 인해 서양 의학에 대한 책도 좀 뒤적거려보고 양약을 자신에게 써보기도 하면서 규칙적인 생활을 했고, 반면에 도사들이 찾아와 "불로장생...", "이거 드시면 신선..." 같은 말을 하면 화를 내면서 쫒아내었다고 한다. 이러한 미신을 배격하는 태도는 그가 죽기 전에 남긴 고별상유를 보면 더욱 잘 드러나는 편이다.
짐이 태어났을 때 결코 신령스럽거나 기이한 징조들이 보이지 않았다.
또 자라날 때도 신기한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8살에 제위에 오른 후 지금까지 57년 동안 역사책에 실려 있는 상서로운 별, 상서로운 구름, 기린과 봉황, 지초가 나타나는 경사라든가 궁궐 앞에 불타는 진주와 옥이 나타나거나 천서가 하늘의 뜻을 나타내려고 떨어지는 것 따위의 하늘에서 내려준다는 상서로운 조짐은 사람들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모두 헛된 말일 뿐이다. 짐은 감히 그렇게까지 (잘 다스렸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다만 하루하루의 일상을 진실된 마음을 갖고 실제에 도움이 되도록 다스렸을 뿐이다.
3.2. 클래식 음악 애호가
마테오 리치가 만력제 시대에 클라비코드를 선물한 이래 클래식 음악이 중국에 소개되고 있었지만 그것에 가장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였던 사람이 바로 강희제이다.
서양 음악을 배우기 위해 스승을 여럿 두었으며, 직접 작곡도 하였다. 벨기에 출신의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 신부는 청나라의 천문기관인 흠천감에서 천문을 연구하면서, 동시에 강희제에게 음악도 가르쳤다. 페르비스트 신부가 강희제에게 포르투갈 출신으로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토머스 페라이라 신부가 음악의 천재라며 음악 선생으로 추천하였다. 강희제를 알현한 페라이라 신부는 하프시코드와 작은 오르간을 강희제에게 선물하고, 중국 음악을 서양식으로 편곡하여 들려줘 강희제를 놀라게 하였다.
1708년 페라이라 신부가 세상을 떠난 이후 3년간 음악 교사가 없었다가, 로마 교황이 이탈리아 출신의 테오도리코 페드리니를 음악 교사로 추천하여 강희제의 세번째 음악 선생이 되었다. 테오도리코 페드리니는 강희제의 신임을 얻었기 때문에, 그를 시기했던 대신들에 의해 모함을 받아 강희제가 노년일때 억울하게 투옥되었다가 옹정제가 즉위한 이후 누명을 벗고 석방되었다. 이후 페드리니는 옹정제의 음악 교사로도 일하였다.
국가원수 치고 음악을 직접 작곡한 사람이 적다는 것을 고려하면 강희제의 서양 음악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었던 것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 비슷한 예시가 있다면 프리드리히 대왕.
3.3. 자식 교육
강희제/가족관계
중국의 황제들 중에서도 가장 자식 교육에 신경을 많이 쓴 황제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자식들 교육 관련으로 항상 한 말이 있다.
"적잖은 귀족 집안의 자식들이 과도하게 귀염만 받고 자라기 때문에 커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나 제멋대로 구는 망나니가 된다. 게다가 그런 자들은 능력도 없으면서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줄로 착각한다. 그렇게 키우는 것은 곧 자손을 망치는 일이다. 그러니 집안의 어른인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자손이 어렸을 때부터 반드시 엄하게 훈육해야 한다."
옹정제는 나중에 강희제의 이런 말들을 모아 「성조인황제정훈격언(聖祖仁皇帝庭訓格言)」을 내기도 하는데 내용은 강희제에 대한 칭찬 및 찬양 + 강희제의 격언들이다.
성조인황제정훈격언 번역문
상서방(上書房)은 이런 황자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는데, 이곳에선 만주어, 몽골어, 한어 등 3가지의 언어를 배우게 했고 역사책과 여러 경사들을 배우게 함과 동시에 말 타기, 활쏘기, 심지어 수영까지 가르쳤다.
강희제는 이곳에 내각 대학사와 한림원 출신의 최고의 학자들을 직접 선발하여 투입했는데 명재상 장정옥의 아들인 대학사 장영, 이학(理學)의 대가 웅사이, 예부상서 탕빈, 만주어 학자 서원몽 등 다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강희제 시절의 선교사 부베는 황자들의 교육을 이렇게 묘사했다.
'황자들의 교육은 한림원에서 가장 학식이 넒은 사람들이 맡았는데, 그들은 모두 청년 시절부터 궁정에서 특별히 양성된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황자들의 모든 활동과 학습을 친히 관리하고 점검했다. 그는 황자들이 쓴 글을 직접 읽고 평가했을 뿐 아니라, 얼굴을 맞대고 공부한 내용을 구술하게 했다.
황제는 특히 황자들의 도덕성 함양과 신체 단련을 중시했다. 그래서 황자들이 철이 들 무렵부터 말 타기와 활쏘기, 각종 무기를 다루는 법을 익히게 하여 그런 기예들을 오락 겸 취미로 삼게 했다.
그는 황자들이 너무 귀하게만 자라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고생을 해 봄으로써 강해지고, 검소한 생활 습관을 들이기를 바랐다. 앞서 말한 것들은 제르비용 신부가 6년 전 황제를 수행하여 달단산에 여행을 다녀온 후 전해준 이야기다.
군왕은 처음에는 맏아들과 셋째, 넷째 황자만을 자신의 곁에 두었다. 그러나 사냥을 갈 때면, 그 밖의 황자 4명도 동행하게 했는데, 어린 황자는 9살이었다. 사냥을 하는 1달 동안 어린 황자들은 황제와 함께 하루 종일 말 위에서 바람과 따가운 햇볕을 견뎌야 했다. 어깨에 화살통을 메고, 손에는 활과 쇠뇌를 들고 사냥하는 황자들은 민첩하고 용감했다. 그들 가운데 사냥을 못해 빈손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처음 사냥을 나온 가장 어린 황자도 작은 화살로 사슴 2마리를 잡았다.
황자들은 모두 한어와 만주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어렵고 복잡한 한자도 단기간에 익혀나갔다. 그 즈음 막내 황자도 이미 사서 중 3권을 떼고 마지막 권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그들이 조금이라도 나쁜 영향을 받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는 황자들이 유럽인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엄숙한 분위기에서 자라게 만들었다.
황자들 주위의 신하들은 그 어느 누구도 (황자들의) 아주 작은 실수조차 감춰 줄 수 없었다. 그들이 만약 그렇게 한다면 끔찍한 처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황자들이 이렇게 배운 좋은 머리와 자질로 싸움질만 했다는 것.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항목을 참고하자.
3.4. 천고일제의 말년
엄청난 업적을 이룩한 강희제의 말년은 행복하지만은 못했다. 오랜 통치로 황제의 건강은 매우 나빠졌고 황태자의 비행과 황자들의 암투는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강희제는 아들 35명과 딸 20명을 두었는데, 이 중 허서리 소닌의 손녀인 효성인황후 허서리씨(孝誠仁皇后 赫舍里氏) 소생의 유일한 적자이자 차남 윤잉을 황태자로 정하고 매우 총애했다. 유일한 적자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극진했는지 강희제는 황태자에게 수많은 봉읍을 하사하며 동궁인 육경궁(毓慶宮)을 지은 뒤 그곳에 거주하게 했고, 황제의 상징인 황포를 입는 것을 허락했으며, 그 외에도 여러가지 차별적인 특전을 주고 다른 황자들보다 더 수준 높은 교육을 받게 하였다. 다른 황자들은 다른 궁에서 유모 등에게 맡겨 키웠지만 황태자만은 곁에 두고 직접 길렀다.
게다가 다른 황자들이 황태자의 자리를 위협할까봐 다른 황자들에게 큰 작위도 주지 않았고, 그들을 왕으로 봉하는 것도 꺼렸다. 그러나 20대까지는 황제를 잘 따르고 열심히 일하던 황태자는 30대를 넘어서면서 직무에 태만해지기 시작했고 주색잡기에 빠지기 시작했다. 강희제는 속으로는 황태자를 아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매우 냉정하게 대했는데, 이런 태도는 언제나 빡빡한 주입식 교육을 받으며 형제들의 암투 속에서 살아야 했던 황태자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준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형제들의 암투가 매우 극심했는데, 황자들은 개국 공신 허서리 소닌의 아들인 허서리 송고투(赫舍里 索額圖)와 황태자 인청(윤잉)가 속한 황태자당(皇太子黨)을 포함해서 서자이지만 맏아들인 황장자 인티(윤제)와 그의 외삼촌인 나라 밍주가 속한 황장자당(皇長子黨), 4황자 인전(윤진)을 필두로 한 황사자당(皇四子黨), 겉으로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로 행세하며 많은 이들의 인망을 얻었으나 실제로는 간교하고 이간질에 뛰어나서 황자들 간의 분란을 부추긴 8황자 인스(윤사)가 속한 황팔자당(皇八子黨)등으로 나뉘어 황제의 자리를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강희제는 유교에 심취했기 때문에 당연히 유일한 적자 윤잉을 차기 황태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만주족에게는 적장자 같은 건 상관없이 가장 능력 있는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잇는 게 전통이었다. 아직 강희제 대에는 이런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었고, 따라서 다른 황자들은 적자만 편애한 강희제의 태도에 매우 반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황태자는 강희제의 후궁을 건드리는 등 몇 차례의 소동을 일으키다가, 끝내는 반역을 일으키려다가 폐위되고 서인으로 강등된 후 함안궁의 냉궁에 유폐되어 죽을 때까지 감금당했다.
강희제는 첫 황태자를 폐위시키고 황태자를 두지 않고 있다가 죽기 직전에야 황4자 인전을 차기 황제로 지명했다. 이 황4자가 바로 옹정제다. 죽기 직전에야 차기 황제를 지명한 이유는 또다시 새 황태자의 주변에 간신과 파벌이 형성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청조 특유의 후계 제도인 태자밀건(太子密建)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태자밀건 제도는 황태자를 미리 정해놓지 않기에 모든 황자들로 하여금 행실을 조심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당시 정황상 강희제의 이러한 후계 지명은 큰 정치적 혼란을 불러왔다.
강희제의 붕어 이후 황8자 윤상, 황9자 윤당, 황10자 윤아 등은 자신들과 대립했던 옹정제의 숙청을 두려워해서 그가 황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다. 또한 이들은 강희제가 十四(십사), 즉 14번째 아들 윤정을 후계자로 지목했는데 十(십)자가 第(제)자로 고쳐졌다고(혹은 십자가 지워졌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각색한 것이 바로 강희제 독살설 및 전위 조서 위조설이다. 후일 四(사)자가 제대로 적힌 강희제의 전위 조서가 발견된데다 十(십)자를 第(제)자로 고치는 건 당시의 문장구조에는 맞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사실상 조서 위조설은 근거가 희박한 주장이였는데도 이 떡밥은 강희제의 전위 조서가 공개되기 전까지 오랜 세월 큰 지지를 받았다. 이는 황14자 윤정이 티베트 원정 등에서 공을 세웠고 실제로도 강희제의 신임을 받았기 때문. 하지만 옹정제 역시 그만큼 강희제의 신뢰를 받고 있었고 실질적으로 강희제의 곁에 가장 오랫동안 가까이 있었던 황자였던 점을 감안하면, 강희제의 독살설과 조서 위조설은 옹정제의 즉위를 반대하는 황자들이 꾸며낸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당연히 허무맹랑한 조서 위조설을 주장한 강희제의 황8자 윤상, 황9자 윤당, 황10자 윤아, 황16자 윤정은 옹정제 즉위 이후 일제히 숙청당했다.
아무튼 강희제의 치세 말년은 이런저런 문제가 이어져 강희제는 퇴직하는 대신에게 "신하는 사직하고 물러날 수도 있지만 천자인 짐은 그럴 수도 없다."며 한탄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말년의 강희제에게 그래도 힘이 된 사람이 바로 훗날 건륭제가 되는 손자 훙리. 아들들의 막장짓에 진저리가 난 강희제에게 똑소리 나고 용감하며 귀여운 훙리는 좋은 손자였다. 그리하여 강희제는 어린 손자와 같이 다니며 먹을 것을 주고 직접 가르치기도 했는데, 옹정제가 후계자가 된 것은 훙리의 공이 크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건륭제 본인도 이 때의 기억이 굉장히 인상 깊은지 평생 강희제를 좋아하고 강희제의 초상화를 항상 집무실에 걸어두고 다닐 정도로 존경하면서 지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짐은 감히 조부이자 성군인 성조황제보다 오래 재위할 수 없다"는 논리로 자신의 재위기간이 강희제의 재위기간인 61년을 넘기기 1년 전에 아들 가경제에게 양위했을 정도였다.
3.5. 기타 이야깃거리
강희제의 통치기(1661년∼1722년)는 한국사의 현종(顯宗, 1659년∼1674년), 숙종(肅宗, 1674년∼1720년), 경종(景宗, 1720년∼1724년)의 치세와 일치한다. 조선에서 왕 3명이 재위할 동안 청나라는 단 1명이 훨씬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흠좀무한 성과를 내었다.성군 강희제 관련 포스트
강희제의 측근인 조아킴 부베는 그의 외모를 키가 조금 크며 약간 살이 찐 얼굴에 마마자국이 있고 이마가 넒고 코와 눈이 작다고 묘사했다. 성격은 매우 부드럽고 정중했다고 한다.
식생활로는 폭식을 하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음식을 적당히 먹고 주로 신선한 채소 위주의 음식을 많이 먹었다. 다만 그렇다고 고기를 먹지 않은 것은 아니라서 틈틈히 닭고기와 양고기를 먹기도 했다. 특히 짠 음식과 젓갈을 최대한 먹지 않고 음식을 싱겁게 먹었으며 야식은 절대 먹지 않았다. 술과 담배는 일절 하지도 않았다. 식사 후에는 소화를 시키려고 후원을 산책하거나 서양에서 들여온 물건들을 관람하고 독서를 하는 취미생활도 가졌다.
4. 비판
하지만 강희제가 단점이 전혀 없는 완벽한 인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후계자 문제. 결론적으로 따지자면 후계자가 명군인 옹정제가 되었으니 잘 된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년에 강희제는 후계자를 끝까지 명확히 하지 않았고 죽기 직전의 유언에서야 제4황자를 후계로 삼는다는 유지를 내렸다. 물론 이는 황태자 윤잉의 주변에 몰려든 간신들과 그로 인한 윤잉의 비행, 그리고 파벌의 형성을 경계한 것이지만, 이로 인해 황자들의 다툼은 심해졌다는 점만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황태자 윤잉이 처음부터 어긋난 것은 아니다. 강희제가 장자를 황태자로 삼는다는 만주족에게 익숙하지 않은 규칙을 밀어붙인 순간부터 윤잉에겐 고난이 시작된 것이고, 윤잉을 아끼기는 했지만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윤잉한테 고난도의 업무를 시키던 강희제의 태도는 황태자에게 막대한 부담이 되어 흑화의 원인을 가져왔다. 그렇게 자식 교육에 신경을 썼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수신(修身),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성공하였으나 제가(齊家)는 실패한 셈.
그러나 이를 강희제의 실책이라고 평가한다면 견강부회이며 논리 부정합이다. 권좌를 둘러 싼 후계 투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편적 현상이었지 그것이 강희제의 자식들 경우에 유별난 것이 결코 아니고 강희제가 장자 상속제를 채택하지 않았던 유목민족들의 역사를 보면 발흥기 이후 하나같이 권력투쟁으로 자중지란에 빠져 국가 자체가 멸망하고 만 것이 보통이었다. 오죽하면 오스만 제국은 술탄이 등극하면 형제 살해를 관례화했을 정도였나.
문자의 옥 문제도 있다. 이민족으로 중국을 통치한 만주족은 사상적인 면에서 많은 통제를 해야 했기에 자주 문자의 옥이라는 필화 사건을 일으켜 많은 책을 검열하고 분서시켰는데, 덕분에 많은 한족 학자들이 죽어야만 했다. 단, 문자의 옥은 강희제 때가 가장 심한 것이 아니라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 때 절정으로 치달았다. 가경제 때부터 줄어들었고. 정작 강희제 본인은 한족 지식인들을 포섭하려 굉장히 노력한 편이다. 그리고 강희제 시절 문자의 옥은 건륭제 시절만큼 말도 안되는 것도 아닌 탄압할 이유가 충분해서다. 그도 그럴게 걸린 이들이 반체제적 성격을 많이 띄고 있었다.
강희제 말년 황자들 간의 다툼은 당파의 형성, 관리들의 부정부패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어 비단 정치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혼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후대인 옹정제 대에 큰 짐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희제 말년의 문제들이 후세에 크게 부각되지 않은 이유는 그의 전중기 치세에서 다져진 내실과 다음 대 황제인 옹정제의 뛰어난 정치력 때문. 옹정제는 치세 초기부터 매우 불안한 상태에서 보위를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형제들과 보위에 오르는데 도움을 준 공신들을 숙청하여 빠르게 정국을 안정시켰으며, 거의 일 중독 수준의 정무 처리로 강희제 대부터 이어온 부정부패를 해결해나간다.
그 외에도, 현대 중국에서 강경한 민족(원래 그렇지 않았지만, 강제로 만주족으로 병합된 몽골인, 청나라로 이주한 조선인(조선인의 경우 유목민족이 아닌 농경민족이다.)들과 청 왕조 만주족이 학살하던 티베트, 위구르, 한족)주의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강희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청나라의 통치를 식민지 시절이라 생각하고, 좋은 청나라 황제는 죽은 청나라 황제라고 생각할 만큼 청나라와 만주족을 매우 싫어하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경우, 강희제가 훌륭한 황제인 건 맞지만 한편으로는 시대가 좋았기 때문에 강희제의 치세가 융성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중국의 경제가 활발한 시대이니 청조의 딸리는 군사적 능력을 물량으로 보충할 수 있고, 세수가 넘치니 수탈을 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강희제가 시대를 잘 타고났다"는 주장은 미야자키 본인이 세상을 떠난지 오래인 21세기에야 현대 지구과학 연구를 통해 다각도로 조명받고 있는 17세기 지구 기후변화를 평생에 걸쳐 온몸으로 뚫고나가며 대제국을 경영해야 했던 강희제의 불리한 여건에 대해 깊이 판단하지 못한채 내린 평가라는 점에서 2020년대에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점이 있다.
또한 강희제는 청나라의 화기 개발을 억제하였다. 특히 1696년에 강희제는 청나라의 화기의 연구와 개발을 금지시키고 이전에 만들어진 병기에 대한 서적들도 열람을 제한하였다. 왜냐면 강희제는 청나라의 군사가 승승장구한 이유는 오로지 창과 궁시에 달려 있다고 할 정도로 냉병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또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세력들이 들고 일어날 것을 염려했다는 견해도 일부 있다. 당연히 이 정책은 청나라의 화포와 총기 기술이 쇠퇴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뒤를 이은 황제들도 강희제의 정책을 본받음으로써 결국 청나라의 군사력과 기술력을 약화시키는 실책을 저지르면서 강희제 사후 한세기 반 뒤 큰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청나라의 화기를 기존의 홍이포에서 신식 화기로 바꾸어 발전시킨 인물도 강희제라는 것인데, 이는 강희제가 화기의 중요성 자체를 망각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냉병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박하게 대한 편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5. 기타 등등
5.1. 동시대의 조선 정세를 평하다
강희제의 통치기(1661년∼1722년)는 한국의 현종(1659년∼1674년), 숙종(1674년∼1720년), 경종(1720년∼1724년)의 치세와 일치한다. 조선에서 왕 3명이 재위할 동안 청나라는 단 1명이 훨씬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성과를 내었다. 당연히 조선의 사신들을 만난 적도 있고, 그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데 그 상황은 다음과 같다.
현종실록 19권, 12년 2월 20일 2번째 기사
강희제는 성황사에 새해 인사를 드리고 온 뒤, 조선의 사신들을 자금성 건청궁으로 따로 불러들였다. 먼저 사신들을 가까이 앉게 한 뒤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국왕과 몇 촌인지, 언제 길을 떠날 것인지, 글을 읽었는지, 그리고 부사 정익(鄭榏)의 이름자를 물어본 다음에 말했다.
너희 나라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어서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것을 신하가 강한 소치라 한다. 돌아가서 이 말을 국왕에게 전하라.
이에 복선군 이남이 대답하였다.
어찌 신하가 강하여 이렇게 백성이 굶주리게 되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근년 이래로 저희 나라에 홍수와 가뭄이 잇달아 일어나서 연이어 흉년을 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국가의 재정이 바닥나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므로 임금과 신하가 밤낮으로 황급해하고 심지어는 대내에 진공하는 물건까지도 모두 줄여가면서 죽어가는 백성을 구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사대(事大)의 예를 폐기하지 않고 이번 진헌(進獻)에 힘을 다해 장만하여 겨우 거르는 것을 면하였는데, 어찌 신하가 강하여 백성의 빈궁을 가져오는 일이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강희제는 빙그레 웃고는 시랑 중 한 사람에게
저 사람이 국왕의 가까운 친척이므로 저리 말한 것이다.
라 말하고 사신들을 물러가게 했는데, 그 시랑도 함께 나오면서 역관 이일선(李一善)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갔다. 그리고 사신들은 나중에 이일선으로부터
시랑이 말하길, 사신이 황제의 물음에 대답한 말이 매우 좋았다고 하더이다. 또 가로되, 오늘 사신을 대하면서 우리나라 백성의 일까지 염려하셨고 또 돌아가 국왕에게 고하라고 명하신 것은 다 국왕을 친근히 여기고 사신을 우대하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사신도 이것이 특별한 은총인 줄 아느냐고 하더이다.
라는 말을 듣고 강희제가 좋은 뜻으로 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안심했다.
첨언하자면 이 시기 조선에는 조선 역사상 최악의 재앙인 경신대기근이 휩쓸고 있었다. 여기서 조선 사신에게 강희제가 "너희 나라 백성들이 다 굶어 죽어가고 있다더구나? 그게 다 군약신강의 나라라서 그런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당시 강희제가 조선의 정국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조선에 닥친 천재지변은 어찌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 군약신강이라 굶어죽은 것은 절대 아니고, 태종이 가뭄을 핑계로 처남들의 처형을 미루는 척하자 신하들이 역심을 품은 자가 있어 전지조화가 깨진 탓이라 하기도 했고, 이변이 일어나면 임금의 덕이 부족한 탓이니 수신에 힘쓸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같은 시기 청나라도 조선과 같은 재난을 겪고 있었다. 원나라 말부터 줄곧 하락세를 보이던 중국의 연 평균 기온은 딱 강희제 치세에 최저점을 찍고 청나라 말이 되어서야 영상으로 회복되는데, 그에 비해서 청은 상대적으로 기근의 영향이 적었다. 이는 강희제가 엄청나게 잘나서가 아니라 은의 유입이 많아지고 전란으로 인구가 줄은 덕분에 청의 경제가 기근의 영향을 받아낼 수 있었다고 보는 평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미야자키 이치사다.
조선을 군약신강의 나라라고 비웃는 듯한 평을 내린것과는 별개로 을병대기근 때는 조선이 도움을 요청하자 쌀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조선이 기근으로 고생하자 쌀을 보내줬다는 점에서 만력제와 비슷하지만 차이점이라면 명나라 최악의 암군이라는 평가를 받는 만력제는 임진왜란 당시 원군과 곡식을 보내준 탓에 조선에서만은 오랫동안 제사를 지내줬는데 비해 강희제는 중국사에서도 손꼽히는 명군일 뿐만 아니라 대기근 당시 고통받던 조선에게 쌀을 보내줬음에도 조선은 전혀 고마워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강희제의 할아버지인 숭덕제가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굴복시키고 더 나아가 엄청나게 수탈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그러한 악연이 손자 대에까지 영향을 미친 듯하다.
그래도 할아버지나 아버지에 비하면 강희제의 조선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굉장히 유화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할아버지 시절의 조선 침공은 통역관들의 오역 때문(...)이었다는 뇌피셜까지 읊어댔을 정도로. 또한 대만 정벌 시기 정씨 정권에서 상국으로 받들 것이니 독자적인 통치를 인정해 달라고 청해왔는데, 대신인 나라 밍주가 제후국인 조선의 예를 들어 찬성하자 그와의 대화에서 조선은 언어와 풍속이 달라 중화와 융화될 수 없어 그대로 놔뒀지만 대만은 우리와 풍속이 같으니 그럴 수 없다는 말을 한다.
5.2. 동시대 각국의 군주들
강희제 치세 중 유명한 타국 군주는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재위 1643년∼1715년)와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재위 1682년∼1725년)가 있다. 동시기 청나라에 이어 2위 인구대국인 무굴 제국(1526년∼1858년)의 황제는 무굴 제국 전성기의 마지막 시기의 군주이자 동시에 무굴 제국 몰락의 시작을 열어버린(...) 아우랑제브(재위 1658년∼1707년)다. 일본의 경우에는 에도 막부(1603년∼1868년 / 265년)의 쇼군은 4대 도쿠가와 이에츠나(家綱, 재임 1651년∼1680년), 5대 도쿠가와 츠나요시(綱吉, 재임 1680년∼1709년), 6대 도쿠가와 이에노부(家宣, 재임 1709년∼1712년), 7대 도쿠가와 이에츠구(家繼, 재임 1712년∼1716년), 8대 도쿠가와 요시무네(吉宗, 재임 1716년∼1745년) 등 모두 5명이 있었다. 조선의 경우 역대 조선 국왕들 중 가장 강한 권력을 향유한 왕으로 유명한 숙종의 재위기간(1674년~1720년)이었다. 묘하게도 강희제 치세 기간은 동서양에서 특히 왕권이 강한 군주들의 재위 기간과 많이 겹친다. 이들의 재위기간도 대부분 길다.
당시 청에 머물던 선교사들에 의해 강희제의 통치는 유럽까지 알려졌고, 나폴리 동부 대학에는 '중국 학회'까지 세워진다. 유럽의 학자들은 '철인 군주'를 꿈꾸던 플라톤의 이상을 기독교도 안 믿는 중국에서 실현했다면서 유교와 기독교와 연결점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의외로 대표적인 인물이 고트프리트 폰 라이프니츠(Gottfried von Leibniz)... 물론 그 환상은 열강이 청에 직접 발을 내딛으면서 무참히 깨지고 말지만.
참고로 강희제 본인은 서양 열강의 침입을 예언하기도 했다. 선박들이 해외로 팔려가고 목재는 외국으로 밀반출 되고, 네덜란드인들이 남해에서 버티는 모습을 보고 연해 지방의 총독들을 만난 자리에서 "미래에는 서양의 여러 나라들 때문에 중국이 곤경에 처할까 염려된다. 그것이 걱정이다." "이것이 짐의 예측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제갈량의 출사표 중 후출사표 중에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 즉 몸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죽기까지 힘쓴다는 말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어떤 신하가 본래 제갈량의 이 말이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자세를 가리키며 임금이 가질 자세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자, 강희제는 조용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짐은 하늘을 섬기는 신하이다."
5.3. 당시 사람들의 평가
……중국의 황제는, 혹자는 그가 무궁한 재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혹자는 그의 강토가 광활하고 부유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가장 세력이 강한 군주라고 말해도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록 그렇지만, 그는 진정 자신의 몸에 모두 사치와는 거리가 먼 것을 사용했다. 그 개인과 관련된 부분에서 보면, 그의 말은 소박하고 담백함이 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이에 따라 공봉(供奉)되는 물품을 제외하고, 그는 조금도 사치스러움을 구하지 않았고 매우 일반적인 음식에 만족했으며, 조금도 정도를 지나친 적이 없다. 그의 담백함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정도를 훨씬 넘어선다.
비록 황제가 거주하는 방이라 하더라도, 몇 폭의 서화와 몇 점의 금을 입힌 장식물 및 일부 소박한 주단(紬緞)이 있을 뿐이다. 주단은 중국에서 매우 보편적인 물품으로, 사치품에 속하지 않는다. 간단하고 소박함이 이 방의 거의 모든 장식물에 보인다. 강희제는 북경 근처 3리 떨어진 곳에, 그가 매우 좋아하는 원유(장춘원长春园)를 조성하고, 매년 이 안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다. 이 안에는 그가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개축한 2곳의 대수지(大水池)와 몇 곳의 하도(河道) 말고는, 부유하고 또한 강성한 군주가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호화스러운 기백에 어울리는 물품은 거의 볼 수 없다.
그의 의복은 궁정 안에서 매번 볼 수 있는 겨울을 나는 검은담비 및 은서피(銀鼠皮) 옷을 제외하고, 일부는 중국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항상 볼 수 있지만 일반 백성은 입기 어려운 사주(絲綢) 복장이다. 비가 오는 날에 사람들은 그가 털로 짠 모직물로 만든 외투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중국에서 흔한 거친 의복이다. 여름에 우리는 그가 보통의 마포단괘(麻布段掛)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도 역시 일반가정에서 항상 입는 의복이다. 경축일 대전을 거행하는 날을 제외하고 우리가 그의 몸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물품은 큰 구슬이다. 이 구슬은 여름에 만주족의 풍습에 따라 그의 모자에 다는 것이다. 그는 황성 안팎에서 말을 타지 않을 때에는 가마를 이용한다. 이 가마는 담가(擔架)와 비슷한 물품이다. 나무 재질은 일반적인 것이고 옻칠을 했으며, 몇 군데 동편이나 도금으로 장식한 목조이다.
총괄하자면, 그의 주변에 모든 것에 대해 사람들은 다른 아시아 군주처럼 사치가 극에 달하는 규모를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는 개인을 위해 낭비하지 않고, 현명하게 절약함으로써 금전을 제국의 진정한 수요에 사용한다.
군주의 위신과 진정한 위대함은 겉으로 드러나는 호화스러움은 적은 부분이고, 그외 훨씬 많은 부분은 도덕의 찬란함에서 비롯됨을 강희 황제는 깊이 믿고 있다.
조아킴 부베. 강희제전(康熙帝傳), 루이 14세에게 올린 보고문 中
"그라말디는 군주가 가진 놀랄 만한 지식욕은 거의 신앙에 가까울 정도라는 점을 강조했다. 제후들과 제국의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 멀리서는 흠모해 마지않고, 가까이서 대할 때는 존경을 금치 못하는 그 군주가 페르비스트와 함께 (궁전의) 내실에서 마치 선생을 모신 (온순한) 학생처럼 날마다 서너 시간씩 수학 도구와 책을 통해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클리드의 정리를 터득하고 삼각 함수를 이해했으며, 산술로 천체의 현상을 증명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발전했다. 최근에 그곳에서 돌아온 르 콩트 신부가 출간한 중국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그 군주는 자신의 자식들이 과학의 근본 원리와 여러 진리에 대한 지식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게끔 수학에 관한 책을 친히 집필하고자 했다고 한다. 또한 그 군주는 자신의 나라를 밝혀 줄 수 있는 이 지혜가 집안 대대로 전해질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최신 중국 소식> 中
“강희(康煕)는 그 자체로 성군이니, 이적(夷狄)과 똑같이 일률화할 수는 없다.”
정조
실학자 홍대용은 정조의 세손 시절, 경연관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연행 경험에 대해 묻는 세손에게 "강희제는 실로 영걸한 황제였다."고 극찬했다. 김종수, 홍국영, 정민시 등 꼬장꼬장한 노론계 인물들 앞에서도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할 정도였으니, 홍대용이 강희제에 대해 엄청 감동을 받긴 했나 보다. 그런데 홍대용은 원명원이 사치스러웠던 점을 들어 건륭제는 깠다. 건륭제 때부터 청나라가 속에서 곪기 시작한 것을 생각해 보면, 홍대용의 통찰이 실로 시의적절하다고 할 수 있겠다. 종합하면 당대에도 모범적이고 귀감이 되는 군주로서 평가받았고 현대에도 한족우월주의에 인기가 조금 시든 감이 있지만 높이 평가 받고 있는 군주이다.
6. 미디어믹스
중국의 작가 얼웨허(二月河, 이월하)는 제왕 삼부곡이라는 시리즈 소설을 썼는데, 그 중 첫 작품인 '강희대제'는 중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후속작들인 '옹정 황제', '건륭 황제'도 큰 인기를 끌었다.
2001년에는 중국 중앙방송에서 '강희대제'를 원작으로 한 '강희왕조'(康熙王朝)라는 드라마가 방송되어 동시간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천다오밍이 열연한 강희제는 반드시 봐 두자. 한레이(韩磊)가 부른 이 드라마의 타이틀곡인 向天再借五百年 역시 중국에서 매우 유명한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