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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레스 비탈 전장에서 돌아오다가
삿 8:13-21
13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헤레스 비탈 전장에서 돌아오다가
14 숙곳 사람 중 한 소년을 잡아 그를 심문하매 그가 숙곳의 방백들과 장로들 칠십칠 명을 그에게 적어 준지라
15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너희가 전에 나를 희롱하여 이르기를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피곤한 사람들에게 떡을 주겠느냐 한 그 세바와 살문나를 보라 하고
16 그 성읍의 장로들을 붙잡아 들가시와 찔레로 숙곳 사람들을 징벌하고
17 브누엘 망대를 헐며 그 성읍 사람들을 죽이니라
18 이에 그가 세바와 살문나에게 말하되 너희가 다볼에서 죽인 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더냐 하니 대답하되 그들이 너와 같아서 하나 같이 왕자들의 모습과 같더라 하니라
19 그가 이르되 그들은 내 형제들이며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니라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만일 그들을 살렸더라면 나도 너희를 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20 그의 맏아들 여델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들을 죽이라 하였으나 그 소년이 그의 칼을 빼지 못하였으니 이는 아직 어려서 두려워함이었더라
21 세바와 살문나가 이르되 네가 일어나 우리를 치라 사람이 어떠하면 그의 힘도 그러하니라 하니 기드온이 일어나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그들의 낙타 목에 있던 초승달 장식들을 떼어서 가지니라
삿 8:13-21 / [기드온이 앙갚음하다]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침략군을 쳐부수고 헤레스 비탈을 넘어 돌아오다가 숙곳에 사는 젊은이 한 사람을 붙잡아 숙곳 두령과 장로들의 이름을 대라고 다그치자 그가 숙곳 두령과 장로 4명의 이름을 적어 주었다. 15) 기드온은 숙곳에 이르러 그 마을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전에 너희는 내게 `너희가 세바와 살문나라도 사로잡았단 말이냐? 그렇지도 못한 주제에 민병대가 모두 지쳐 있다고 해서 우리에게 밥좀 먹게 해달라고 하다니!' 하면서 우롱하였다. 자, 여기 보아라! 세바와 살문나를 우리가 사로잡지 않았느냐?' 16) 기드온은 그 마을 장로들을 체포한 다음 들가시와 찔레 나무를 베어다가 숙곳 사람들이 보고 있는 데서 그들을 찢어 버렸다. 17) 또 기드온은 브누엘로 가서 그곳 망대를 헐어 버리고 그 마을 사람들을 죽였다. 18) 그런 뒤에 기드온은 세바와 살문나에게 `너희가 다볼산에서 죽인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더냐?' 하고 물었다. 그들이 `예, 당신같이 생겼더군요. 왕자처럼 위풍이 당당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9) 그러자 기드온은 이렇게 소리쳤다. `그 사람들이 바로 내 형제들이다. 그런데 그들을 그렇게도 무참하게 죽이다니! 여호와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두고 내가 분명히 말한다만 너희가 내 형제들을 살해하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너희를 죽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20) 그러고는 맏아들 여델에게 `얘야, 어서 저놈들을 죽여라!'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소년은 칼집에서 칼을 빼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다. 나이가 너무 어린 까닭에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21) 그러자 세바와 살문나가 기드온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사나이답게 네가 어서 우리를 죽여라. 차라리 그게 더 떳떳하지 않느냐!' 기드온은 이 말을 듣고 일어나 세바와 살문나를 쳐죽이고 그들이 타고 다니던 낙타의 목에 장식으로 달아 놓은 반달 모양의 금장식을 떼어 가졌다.
기드온이 갈골에서 대승을 거두고 헤레스에서 돌아오는 길에 숙곳 사람들에 대해 이전의 비정함에 대해 책임을 물으려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원한이 아닌 이스라엘의 전쟁이 의로운 전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숙곳의 방백들과 장로들의 명단(13-17) 기드온의 전쟁은 하나님께서 억압받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명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실 수는 있지만 우상을 섬기는 이방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해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책임을 물으시고 심판하십니다. 숙곳의 방백들은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들을 돕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능욕했습니다.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는 세바와 살문나의 무리들과 비교하면 너무 적고 초라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이끄심과 도우심은 숫자의 많고 적음에 좌우되지 않으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시고 그들을 징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바와 살문나의 처형(18-21) 다볼 산에서 세바와 살문나에 의해서 살해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죽임을 당한 이들의 모습이 왕자들의 모습과 같았다는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유력한 인물들이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그들은 기드온의 형제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은 개인의 원한으로만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며 이 전쟁의 정당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어린 기드온의 맏아들 여델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세바와 살문나에게 아주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기드온에게 자신들을 죽이라고 소리칩니다. 삶이 옳지 못했다면 죽음도 인정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수치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기드온이 그들을 처형하고 초승달 장식들을 떼어냈습니다. 당시 미디안 지역의 우상인 달의 신을 상징하는 초승달 장식은 파괴되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의 상징을 전리품으로 삼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기드온에게도 초승달 장식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기드온도 초승달의 장식을 떼어서 가지고 말았습니다. 순종, 믿음의 용기에 이어서 절제의 미덕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적용 : 당신은 믿음의 승리를 얻기 위해 어떤 순종과 믿음의 용기, 그리고 절제를 실천하고 있습니까?
영화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에는 과감히 발을 내딛어 우리를 움켜쥐고 있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욕구를 생생히 표현한 장면이 나옵니다.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은 자신들이 받을 피해만을 걱정하고 생각하여 기드온의 요청을 외면합니다. 이러한 이기주의는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자신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을 믿기도, 때로는 하나님을 버리기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믿음과 신앙의 모습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삶의 가치를 두고 살아가시는 오늘을 만들어 가시기를 소망합니다.
< 설 교 >
기드온의 교만
삿 8:13-28 / 금빛돌
기드온은 처음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을 때 자신은 이스라엘 중에서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기드온은 보리떡과 같은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이 나는 작은 자라고 했을 때 큰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제 기드온은 큰 자인 것처럼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5절과 16절과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기드온은 자신을 희롱한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을 아주 잔인하게 죽입니다.
“15.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너희가 전에 나를 희롱하여 이르기를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피곤한 사람들에게 떡을 주겠느냐 한 그 세바와 살문나를 보라 하고
16. 그 성읍의 장로들을 붙잡아 들가시와 찔레로 숙곳 사람들을 징벌하고 17. 브누엘 망대를 헐며 그 성읍 사람들을 죽이니라”
그리고 18절에서 적장인 세바와 살문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8. ○이에 그가 세바와 살문나에게 말하되 너희가 다볼에서 죽인 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더냐 하니 대답하되 그들이 너와 같아서 하나 같이 왕자들의 모습과 같더라 하니라
여기서 너희가 다볼에서 죽인 자가 어떠하냐는 어디에 있느냐로 보아야합니다. 그런데 적장인 세바와 살문나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그들이 너와 같아 왕자들의 모습과 같더라고 합니다.
이 말은 기드온 당신은 마치 왕자의 모습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기드온에게 적장들이 아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드온은 그의 어린 아들 여델을 시켜서 적장들을 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너무 어려서 칼을 빼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적장들이 당신이 우리를 죽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기드온이 적장들을 죽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기드온이 적장을 죽이고, 그들의 낙타 목에 있던 초승달 장식들을 떼어서 가집니다. 이것은 월신을 숭배하는 이방민족의 부적이었습니다.
신7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승리한 후에 “신7:25. 너는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네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올무에 걸릴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 26.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것과 같이 진멸 당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멀리하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이방신의 부적을 가집니다. 결국 이것이 이스라엘의 올무가 됩니다.
더 나아가서 22절에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는지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왜 왕을 세우지 아니하시고 사사를 세우십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 한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사람들은 기드온이 우리를 구원했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는 왕이 되어 달라고 합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이제 당신이 우리의 왕이 되고, 그 왕권을 당신의 아들과 손자에게 세습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에 기드온은 23절에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기드온의 행동이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탈취한 귀고리를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에봇을 만들라고 합니다. 그래서 27에 보면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고 합니다.
원래 에봇은 대제사장이 입는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만든 옷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이 에봇을 입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이 에봇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사람들이 가지고 온 금으로 이 에봇을 만들라고 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드온 자신이 마치 대제사장과 같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중간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한 기드온의 이 에봇을 통해서 하나님의뜻을 묻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결국 이 에봇이 기드온의 집에는 올무가 되고, 이스라엘에는 우상이 되어 이스라엘로 영적으로 음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기도온의 모습을 보면 요즘 언론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한 대형교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우상은 대형교회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영원히 가난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무언가 가졌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영원히 가난한 자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작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큰 자가 되게 해주셔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 결코 우리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난했을 때 보다는 부자가 되었을 때 영적으로 더 낮아져야합니다.
우리가 실패했을 때보다 성공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 더 겸손해야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주지 못할 때보다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줄 때 우리는 더 조심해야 합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잘못된 역사를 계속해서 되풀이 됩니다.
오늘도 조금 성공했다고 자만하거나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늘 가난한 자로 영적으로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승리가 낳은 패배
삿 8:10-21 / 그영광교회 강사명 목사
우리는 지난시간 교회의 영적 전쟁을 방해하는 2가지 요소에 대해 앞선 본문을 통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교만한 마음, 그리고 자기 생존과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염려하는 열등한 마음입니다.
에브라임 지파가 전자의 마음을, 숙곳과 브니엘 사람들이 후자의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겉으로 볼때에 이 두가지 마음은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교만함과 열등감, 그러나 한 마음의 두가지 측면일 뿐입니다.
교만함이든 열등감이든 사람이 근원적으로 자기 자신과 능력에 기반하여 갖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자신의 현실에 전혀 계산되지 않는, 중심이 되지 않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잘하고 뭔가를 하게 되면 교만하게 되고 내가 어렵고 힘들 때에 열등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드러난 교만함은 하나님이 이미 시작하셨고 승리하게 하신 배경 속에서 자신들이 하는 것인데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교만함을 드러내고 자기 영광을 취하려고 하는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숙곳, 브니엘 사람들도 미디안 군대를 여전히 강력한 현실의 전부로 바라보고 있기에 두려워하는 그 마음 때문에 기드온과 삼백 용사에게 식량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도 그들이 하나님이 행하고 계신 현실을 염두에 두지 않고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은 열등감을 치료하기 위해 스스로를 높이라고, 교만함을 치료하기 위해 겸손해 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열등감에 있는 사람은 쉽게 교만해지고, 교만한 사람은 쉽게 열등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마음에 대한 해결책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왕으로 계신 것 밖에는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하늘의 신령한 복, 하늘의 영광을 주셨는지,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영원토록 안전하게 해주셨는지에 대해 깨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깨어있는 교회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 전쟁에 참여하여 참된 승리를 얻고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배경 속에서 기드온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기드온은 에브라임이나 숙곳과 브누엘 사람보다 하나님에 대해 보다 선명하게 경험하고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의 인생 가운데 나타내 주셨고, 그분 앞에 두려움을 표출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친절하게도 은혜로 확증하는 표증도 여러번 보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마주하는 기드온은 하나님을 잊고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있는 일이고 언제나 있어왔고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한번 우리의 죄성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상기하게 되고, 얼마나 이 죄성을 경계해야 하는지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기드온이 안타깝게도 승리한 후에 실패를 하게 되는 부분에서 사실 승리 때문에 실패하게 됩니다. 결정적인 큰 승리를 맞이하고 난 이후에 그것 때문에 기드온이 실패하게 됩니다.
사사기 8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기드온 자신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서원이나 다짐을 보일 때 그 이름을 이용하고만 있지, 하나님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드온이 세가지 측면에서 하나님과 멀어졌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1. 기드온이 큰 승리 이후에 하나님을 전혀 찾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 모든 상황을 판단하고 자기의 힘과 지혜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반대를 직면했을 때에도 기드온은 에브라임 지파를 나름 높여주고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우했습니다.
이런 기드온의 행동을 보면 기드온이 에브라임을 외교적으로 대한 것은 진정한 화평보다는 그들과 대립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떄문임을 볼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가 큰 지파이고 자신은 므낫세 지파 중 약한 일족이었기에 대립할 수 없었기에 약한 방식을 취하였습니다. 또 숙곳과 브누엘에게는 자신을 돕지 않는 사람들에게 악하게 행합니다.
기드온이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앞서서는 하나님께 확인하였으나 모든 상황에서 자기 나름의 판단과 방식대로 직면한 문제를 해결합니다.
이러한 상태가 그가 승리했지만 결국 실패한 자리에 있게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더불어 기드온은 하나님의 큰 은혜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거만하고 잔인한 태도로 자기 백성들, 자기 이스라엘 민족을 대합니다.
기드온이 자신과 부하들을 위하여 먹을 것을 달라고 한 것은 합당했지만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이 거절의 반응을 보인 것도 나름 합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두 마을은 가장 동쪽에 위치하여 국경과 마주하고 있어 미디안과의 위험에 처할 수 있었습니다. 기드온은 이에 대해 분노해서 보복하겠다고 행동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기드온을 찾아와 주셨습니까? 어떻게 그의 연약함과 두려움과 표징을 구하는 부분에 대해 인내하며 설득하고 세워주는 그 일을 하셨습니까? 모든 하나님의 인내와 은혜를 기드온이 까맣게 잊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사자 앞에서 하나님께 건방진 태도를 보였는데도 하나님은 그에 대해 참으시고 인내하시며 그를 설득하고 세워주습니다.
하나님의 그 큰 은혜와 인내를 잊고 반응하고 있습니다.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의 모습은 바로 자신의 과거의 모습이었습니다. 불신과 의심과 두려움 속에서 표징을 구하는 것이 자신도 그러했습니다.
기드온은 자신이 모독당했다는 사실에 집착하면서 복수하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승리가 기드온을 망가뜨렸습니다.
또 기드온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왜곡시켜 버렸습니다. (삿6:14) 하나님께서 자기 동족을 치라고 말씀하신 내용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미디안 손에서 구원하라, 그것을 위해 내가 너를 보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숙곳과 브누엘이 잘못을 범했다 하더라도 하나님 명령을 순종해야 하는 자기 명령을 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목적은 그들을 온전히 세우는 것임에도 기드온은 7절에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넘겨주신 후에 그들을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브누엘에 대해서는 더 강력하게 망대를 헐어버리겠다고 말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에는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담겨 있음에도 기드온은 자신의 사적인 목적과 뜻을 이루는 것으로 변질시킵니다.
명령한 것의 결과물 뿐만 아니라 그 동기조차도 변질시킵니다. (삿8:18-19) 기드온이 삼백 용사를 데리고 아주 힘들고 지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디안을 추격한 근본적인 이유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완전히 해방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인 복수를 위한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미디안 왕들이 이전에 기드온의 형제들을 죽인 죽음 때문에 복수심으로 행한 것입니다.
“너희들이 가족을 살렸더라면 나도 너희를 살렸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적군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기드온은 맏아들에게 죽이도록 시킵니다. 어린 아이에게 죽임을 당하게 하고, 맏아들에게 영광을 얻게 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기드온이 어떻게 무엇이 기드온을 이렇게 변질시켰습니까? 무엇이 기드온으로 하여금 존경과 욕망에 대한 욕구에 목마르도록 만들었습니까? 자신이 받아 마땅한 것을 받지 못하자 폭력적이고 분노를 만들어 내는 자가 된 것입니까?
안타깝게도 큰 전쟁의 승리가 원인이 되었습니다. 타작마당의 포도주 틀에서 두려워하며 곡식을 타작하던 기드온이 큰 전쟁에서 승리하고 영광을 경험하면서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모습에 크게 분노하는 극단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삼백용사와의 전쟁의 그 승리가 기드온에게 최악의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기드온은 성공에 중독되고 성공에 의존적인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나, 신앙생활에 있어서나 성공, 승리, 잘되는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 그 성공과 승리가 어쩌면 우리에게 아주 치명적인 위협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을 봐야 합니다.
성공이나 승리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망각하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악된 마음은 내가 나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기를 아주 강렬하게 원합니다.
난 나의 힘으로 날 구원할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다고 믿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악된 마음이 심지어 하나님이 다 이루어주신 승리와 성공조차도 잘못된 믿음을 굳히는 데 오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나의 힘으로 승리했고 이 성공을 획득했고 이 성공과 승리에 대한 칭찬과 영광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성경의 역사 내내, 교회의 역사 내내 있어 왔습니다.
여리고성을 이스라엘 백성이 무너뜨리고 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다음에 그것보다 훨씬 작은 아이성을 칠 때에 자기 힘 믿고 우리가 한번 해보겠다 하여 완전히 패배하지 않습니까?
다윗도 대부분의 적들을 다 정복하고 암몬 하나 남겨두었는데, 전쟁으로 안 나가고 왕궁에 쉬고 있다가 밧세바를 범하는 죄악에 빠집니다.
신약의 고린도교회도 다른 어떤 교회보다 여러 좋은 선생들의 가르침을 받을 특별한 기회를 많이 얻었던 교회입니다. 베드로도, 아볼로도, 사울도 나오는 그 복된 기회를 서로 분파를 나누어 나뉘어집니다. 자기를 내세우고 상대를 깎아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도 하나님께서 주신 복과 승리를 가지고도 그렇게 행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더불어 이 고린도교회는 다른 교회들보다 성령의 은사가 활발했습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교회는 이 은사를 가지고 내가 이 교회에서 더 필요한 존재이고 중요한 역할은 하는 것으로 자기를 드러내고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일이 교회 역사 가운데 계속 있어온 것입니다.
더 많이 가졌고 소유하고 누리고 승리하고 성공이라고 할 요건들을 가지고도 우리는 그럴 수 있습니다.
중세교회가 어떻게 타락했습니까? 막강한 권세를 가진 중세교회가 가장 크게 교회 스스로를 망가뜨렸습니다. 세상에도 엄청나게 해를 가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습니다.
우리가 승리하고 성공하고 잘되고 잘하고 있을 때에, 영적으로 나름 뭔가를 성취하고 이뤘을 때에 더 크게 실패할 수 있음을 알고 경계해야 합니다. 성경과 교회의 역사를 통해 교훈을 삼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우리 교회가 영적 전쟁을 싸워야 된다는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부분을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참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분투가 오늘 교회에 필요한데, 그것을 추구하며 갖는 좋은 경험들이 경계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치명적으로 해를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참된 교회를 추구하고자 하는 중심, 마음을 갖고 나아가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귀한데 우리가 이러한 방향성을 추구하면서 올바르게 나아가다 보면 반드시 교회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현실을 갖게 됩니다.
교만한 마음이 성도들 안에 부풀어 오르게 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공동체가 차가워지는 일이 있게 됩니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만 쉽게 다른 교회를 무시하고 정죄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떤 영적인 씨름, 내가 잘 안되는 부분에 대해서 할 수 있게 되고 극복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승리를, 성공을 경험하게 된다면 사람은 그 다음부터 하나님을 더 의지하기보다는 내가 승리한 경험을 의지하고 자랑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려고 하는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승리했기 떄문에 쉽게 괜찮다고 안일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승리가 패배시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말씀을 통해 어떤 변화를 얻고 긍정적인 유익이 있었는지로 끝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결과가 더 하나님을 의존하게 하는지? 그 승리와 성공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만들고 있는지? 그 승리와 성공으로 받은 은혜가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나아가게 하는지?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승리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기드온처럼 하나님의 말씀에서 더 멀어지고 순종하는 데서 더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승리는 완전히 패배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 공동체, 개별 신자가 가장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것은 내가 어떤 삶에서 어려움을 겪고 힘든 일을 겪고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상황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성공하고 잘되고 승리할 때, 그때가 더 위험할 때입니다.
교회가 안정되고 규모가 커지면 교회 공동체에 속한 자들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힘들고 어렵고 애써야 할 때에는 더 순수하게 몸부림치면서 애쓰는데, 그렇지 않으면 초심이 사라집니다. 순전하고 온전하게 했기 때문이라는 훈장을 자기에게 달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분을 정말 경각심을 갖고 잘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성공으로 말미암는 실패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앞서 말한 부분을 경계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공했을 때, 승리를 맛보았을 때, 내가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되었을 때에도 죄가 역사한다는 것을 알고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죄와 결부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갈취하는 것으로 삼습니다.
이것을 경계하기 위해서 내가 그렇게 될 때 나타나는 증상이 무엇인지를 아셔야 합니다. 기드온이 보여준 것인데, 내가 신앙생활을 잘 하고, 하는 일보다 잘되고 연예도 공부도 다 뭔가 잘되다 보면 여러분 마음 깊은 곳에서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라는 마음이 올라옵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대단하다~”라는 말에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마음은 다르게 반응합니다.
더불어 어떤 한 분야에 성공한 사람이 주로 이런 모습을 보이는데 한 분야에 자기가 성공하면 나는 이제 모든 분야를 다 안다는 식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의사보다 목사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지식과 경험, 통찰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됩니다. 자기의 직감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증상은 태도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거만함과 잔인함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오늘 본문에서 보여준 것입니다.
7:15에서 기드온은 자신의 약점을 알았고 승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진다는 것을 깨닫고 그분을 예배했습니다. 그러나 8장에서 기드온은 승리후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죄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 자체를 경계하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있게 된 복된 결과를 통하여 나의 삶과 현실을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약 1:9-10) 낮은 형제, 비참한 형편에 있는 자, 영적 전쟁에서 실패한 사람은 자기의 높음을 생각해야 됩니다. 자기의 높음을 자랑해야 합니다. 어떻게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자기가 높아질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그에게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있게 된 영광스러운 지위, 하늘의 영광스러운 기업을 받게 된 운명, 그리스도 안에서 있게 된 높음을 기억하고 자랑하는 자로 서라는 것입니다.
부한 자, 남 부러울 것 없느 형편을 가진 자, 성공하고 승리했고 복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분께서 자신의 십자가, 자기의 모든 삶을 부활로 이루신 모든 영광스러운 그것과 자기가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현실을 비교해 본다면 자신과 자신의 모든 행위는 다 미천한 것 뿐입니다.
이게 복음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있게된 것을 근거로 해서 나와 나의 현실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와 우리가 행한 일이 전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고 오직 그리스도 그분과 그분께서 행한 일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이 복음을 나에게 날마다 선언해서 절망에서 자신을 건져내고 교만에서 구원해내야 합니다. 우리는 성공할 때일수록 이 복음을 더 많이 자신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복음의 중심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 승리를 경험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 전쟁의 주도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에 의하여 시작된 것이고, 그분에 의하여 계속되고, 그분의 도우심을 받아 우리가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도우심을 통해 우리가 가는 것입니다. 그분이 머리로서 하는 모든 일에 비하여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이 영적전쟁에 참여해야 됩니다.
진정한 참된 승리는 내가 영적 전쟁에 승리하느냐가 아니라 모든 형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느냐가 참된 승리의 비결이고 우리의 승리가 결국 실패로 변질되지 않는 가장 결정적인 비결입니다.
(히12:1-2)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자기주장의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삿 8: 1-21 / 조용호목사
1.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던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300명의 군사와 항아리, 햇불, 나팔만으로 미디안의 135,000명 대군을 물리친다.
1) 하나님은 지극히 약한 자들을 뽑아 승리하게 하심으로 스스로 자랑하지 못하게 했다.
2) 미디안 군대가 도망하자 300명 외에 납달리, 아셀, 므낫세 온 지파의 사람들이 미디안을 추격한다. 기드온은 에브라임 산지에도 사자를 보내 그들로 하여금 전쟁에 참여케 한다.
3) 미디안의 두 적장, 오렙과 스엡은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죽임당하고 그들의 목은 기드온에게 바쳐진다(7:24-25).
2. 기드온은 당연히 미디안 군대를 진멸하기 위하여 다른 지파들의 지원을 요청했을 것이다.
1)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도록 300명의 군사만 남겨둔 이유를 기드온은 망각한다.
2) 추격하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미디안의 잔당들을 이기고 장수들을 죽임으로 스스로를 자랑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3. 기드온의 요청으로 토벌작전에 참여하여 미디안의 두 장수를 죽인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가장 자기를 주장하며, 자신들이 행한 일들을 자랑하고자 하였다.
1) 에브라임 지파는 사사시대 당시 가장 강력한 지파였으며 2장수를 죽이는 전공도 있었다.
2) 이렇게 토벌작전에 전공을 거두고도 기드온에게 가장 큰 공로를 놓쳤다며 시기한 에브라임은 미디안 대군을 이긴 기드온과 크게 다투었다.
삿 8:1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
8:2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8:3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하니라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니라
4. 에브라임 지파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교만, 자기를 주장하는 자만에 빠졌다.
1) 자신들이 가장 강한 지파로서 가장 좋은 전공을 쌓고자 한 것이다.
2) 그런데 실상은 미디안 사람들이 7년 동안 학대하는 동안 쥐죽은 듯이 미디안에게 억눌려서 싸우지도 못하고 지내왔었다.
3) 그런데 하나님이 기드온을 사사로 세운 것을 시기하여 사사 기드온과 다툰다.
- 이는 하나님과 다투는 것과 같다.
-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평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불평하였다고 하셨다.
5. 에브라임의 불평에 대하여 기드온은 에브라임 지파의 전공을 더 높여줌으로 그들의 불평을 가라앉힌다(2절).
1) 기드온보다 에브라임이 전쟁에서 더 큰 일을 행하였다고 하자 에브라임 사람들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2) 에브라임은 자신이 행한 일을 인정해주고 높여줘야지만 화가 풀리는 교만한 자들이다.
3) 에브라임 지파는 입다가 사사가 되었을 때에도 이번처럼 자신을 주장하였다.
- 그런 에브라임 지파를 입다가 책망하자,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키고 만다.
4) 힘이 있다고, 선을 행하였다고 자기를 자랑하는 자는 공동체의 가장 큰 적이다.
- 자기주장의지는 선을 행한 후에 본인은 사망에 이르고, 남들을 상하게 하며 공동체를 깨뜨린다.
6. 에브라임 지파를 누그러뜨린 기드온과 300용사는 지치고 굶주린 상태에서 미디안의 군사들을 추격하여 요단강을 건넜다(4절).
1) 그들이 요단강을 건넌 직후 숙곳에 이르러 그곳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구한다(5절).
- 자신들이 미디안의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하고 있으니 군사들에게 떡을 달라고 한 것이다.
2) 그러나 숙곳의 지도자들은 떡 주기를 거부하고 기드온이 아직 세바와 살문나를 잡지 못하였다고 조롱하였다(6절).
7. 이에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잡도록 하실 것인데, 그들을 사로잡은 후 숙곳 사람들을 가시와 찔레로 응징하겠다고 말한다(7절).
1) 기드온과 300용사들은 숙곳에서 3.2km 아래에 위치한 브누엘에 도착한다.
- 브누엘은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환도뼈가 부러진 곳이다(창 32:24).
2) 기드온은 브누엘 사람들에게도 떡을 구했으나 숙곳에서와 같이 거절당한다(8절).
- 기드온은 승리하고 돌아올 때 브누엘의 망대를 무너뜨리겠다고 말한다(9절).
8.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요단 동편에 있는 숙곳 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은 요단서편과 달리 미디안에게 직접적인 고통을 당하지 않았다.
1) 겨우 300명에 불과한 기드온을 도왔다가 미디안에게 보복당할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2) 그래서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하는 대신,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하는 기드온과 300용사를 조롱하고 무시하였다.
3) 드보라가 여호와의 전쟁을 수행할 때에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아니한 백성들에게 저주가 선포되었다. 기드온을 돕지 아니한 백성들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돕지 아니함으로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
9. 하나님의 부르심에 참여하지 아니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저주하실 것이다.
1) 그런데, 자기주장의지가 발동한 기드온은 본인이 직접 돕지 않는 동족들에게 보복을 하겠다고 맹세를 한다.
2) 자기를 주장하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에브라임 지파에게는 양보했던 기드온이지만 자신을 조롱하고 약한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에게는 보복을 다짐한다.
10. 에브라임 지파에 이어서 사사인 기드온마저도 자기주장의지가 발동되어 보복을 다짐한다.
1) 기드온과 300용사는 피곤하고 배고픈 상태에서 추격을 하고 있었다.
- 피곤하고 지칠 때 자기를 주장하는 교만과 짜증과 분노가 더 잘 발동한다.
2) 에브라임 지파의 주장에 한 번 양보한 기드온은 내가 언제까지 이런 푸대접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분노했을 것이다.
- 주님이 나타나지 않은 양보와 섬김은 결국 우리의 자기주장의지가 되어 더욱 분노한다.
11.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미디안에게서 구원을 받지만 이스라엘은 총체적으로 교만하다.
1) 사사 기드온도 피곤과 에브라임의 교만과 숙곳의 조롱에 화를 내고 보복을 다짐한다.
- 그리고 미디안 왕을 잡은 기드온은 결국 숙곳 사람들을 징벌하고 브누엘 사람들을 죽인다. 기드온이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전적으로 주님이 하셨음을 마음에 두었다면 동족을 죽이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2) 기드온에게 보복을 당해 죽는 숙곳과 브누엘은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기드온과 용사들을 돕기는커녕, 음식도 주지 않고 무시하고 조롱하였다.
3) 에브라임 지파는 기드온과 다투면서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고 화를 내었다.
12. 외적으로는 미디안으로부터 온전한 승리를 거둔다.
1) 미디안 군대, 미디안의 2장수, 미디안 왕인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완전히 승리한다.
2) 그러나 300명의 용사로 미디안 대군을 무찌른 하나님의 전쟁, 하나님의 승리로 시작된 전쟁은 점차 이스라엘의 자기주장의지로 사망이 흘러들어오게 된다.
- 기드온, 에브라임지파, 숙곳과 브누엘은 각각 교만하였다.
3) 결국 서로 다투고, 동족을 죽이는 비참함으로 스스로 달려간다.
4)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300명만 남긴 하나님의 뜻과는 점점 멀어진다.
- 기드온을 비롯하여 누구도 자랑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 그런데, 각자가 자기를 주장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함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는 구원을 받고도 하나됨이 깨어진다.
13. 자기주장의지가 발동된 기드온은 하나님의 전쟁에서 개인의 감정 해소에도 나선다.
1) 미디안의 왕인 세바와 살문나를 하나님의 명령이나,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처단하지 않고 그들이 내 형제들을 죽였다는 이유로 세바와 살문나를 죽인다.
2) 미디안 왕이 다볼에서 기드온의 형제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그들을 살려주었을 텐데, 자신의 형제를 죽였으므로 미디안 왕을 죽인다고 하면서 죽인다.
3) 하나님은 개인의 보복을 위해 기드온을 부르신 것이 아니다.
4)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보복을 대신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하신 것이다.
14. 기드온이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과 헌신하여 승리하는 감격과 교만으로 변질되는 과정은 신앙인이 변질되는 전형적인 과정이다.
1) 미디안이 두려워 떨던 연약한 자, 스스로 작은 자라고 여기던 자가 부름을 받는다.
2)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주시는 표징으로 점점 믿음이 자라고 헌신하게 된다.
3) 급기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300명으로 135,000명의 대군을 이기는 승리를 경험하게 된다.
4) 하나님의 승리에 감격한 기드온은, 하나님께 가장 영광을 돌리는 그 순간, 사람들의 도움을 요청한다. 나쁜 의도가 없지만 이 때부터 점점 사람냄새가 풍기기 시작한다.
5) 에브라임 지파가 기드온에게 대들면서 크게 다투는 것까지는 잘 넘겼지만 기드온도 점점 지치고 또 부당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화가 난다.
6) 자신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지칠 때까지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는데 그런 자신들을 조롱하는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가 일어나서 보복을 다짐한다.
-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하라는 것도 아니고, 최소한의 도움조차 거절한 동족을 용납하지 못한 것이다. 나의 의가 있는 자에게 불충한 자는 분노의 대상이 된다.
15. 마침내 완전한 승리를 거둔 기드온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보다는 숙곳과 브누엘, 그리고 미디안 왕에게 보복하는 일에 더 관심을 두게 된다.
1) 그리하여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찬송과 공적을 돌려야 할 그 시간에 보복을 감행하여 자신의 감정의 후련함을 느낀다.
2) 안타까운 것은 이미 죄의 세력이 기드온을 속여 기드온을 사망으로 이끌고 있는데도 기드온은 전쟁의 승리와 지침, 보복의 감정에 휩싸여서 죄의 세력에 속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3)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보호하여 주셔서 기드온처럼 교만과 변질에서 지켜주시기를...
- 기드온처럼 변질되어온 우리의 영혼을 말씀으로 비추심을 받고 회개하기를 원한다.
4) 기드온과 300용사가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할 때, 지친 동료들을 돕기는커녕, 조롱함으로 심판을 받는 어리석음을 회개하기를 원한다.
실패보다 위험한 성공
삿 8:1-35 / 이병권
사람은 누구나 성공을 원합니다. 더 많이 성공하기 위해서 그리고 더 조금 실패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런데 누구나 성공을 바라고 성공을 위해 살아가지만 성공을 이룬 다음에 오는 위험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고난을 견디는 사람은 많지만, 풍요를 견디는 사람은 적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패를 딛고 성공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성공을 딛고 성숙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실패를 통해 겸손을 배우기는 쉽지만, 성공을 통해 겸손을 배우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실패보다 더 무서운 것은 성공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큰 승리를 거둔 기드온을 살펴보았습니다. 기드온과 함께 한 사람은 불과 300명이었지만, 기드온은 그 300명으로 13만 5천명과 싸워서 이기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기드온이 승리한 다음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지금 기드온은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공이라는 위험한 선물을 받은 기드온, 그는 과연 어떤 자세로 성공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성공을 대처할까요? 오늘 본문에 기록된 세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공이라는 선물을 받았을 때, 뭔가 잘 되고 있을 때, 풍요로운 환경, 특별한 문제가 없는 상태에 있을 때, 삶의 크고 작은 성공들을 경험할 때, 우리가 어떻게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과 겸손함을 이어갈 수 있을지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사건입니다.
승리한 기드온에게 에브라임 사람들이 찾아와 말합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1)
힘 있는 지파 중에 하나였던 에브라임 지파가 뒤늦게 전쟁에 참여했는데 그에 대해서 불평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공로가 기드온에게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상황이라면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겠습니까? 기드온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하니라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니라“(2-3)
기드온은 예의 바르고 지혜롭게 대응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입니다. 겸손하게 대합니다. 상대의 무례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싸우지 않고 평화를 추구합니다.
에브라임은 도망가는 미디안의 두 장군, 오렙과 스엡을 잡았는데 기드온은 에브라임이 한 그 일을 치켜세워주며 자신이 한 일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이라고 높여줍니다. 기드온의 이러한 겸손은 에브라임의 분노를 풀리게 했습니다. 자칫 이스라엘끼리 싸우고 갈라지는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는데 그런 위험을 기드온이 평화적으로 잘 막은 것입니다.
12장에 가면 에브라임이 뒷북치며 불평하는 태도가 한 번 더 나옵니다. 기드온에게 했던 것처럼 입다에게도 불평하는데 입다는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 결과 에브라임의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와 비교하면 지금 기드온은 확실히 성숙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사건입니다.
에브라임과의 문제를 현명하게 처리한 기드온은 전쟁에서 패하고 도망간 미디안 사람들을 쫓아갑니다. 적들을 따라가 공격하고 달아나는 적들을 또다시 좇아갑니다. 이정도로 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기드온은 미디안의 두 왕을 잡기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두 왕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세바와 살문나가 도망하는지라 기드온이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그 온 진영을 격파하니라“(12)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기드온은 포기하지 않고 미디안의 왕을 잡기까지, 적을 완전히 소탕하기까지 멈추지 않았습니다. 힘들지만, 피곤하지만, 배가 고프지만, 많은 수고가 따르지만, 그 어려움들을 다 극복하고 적의 왕들을 사로잡습니다.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충성스러운 기드온을 성공이 주는 위험에서 승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세 번째 사건입니다.
미디안의 두 왕까지 무찌른 기드온은 전쟁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말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는지라“(22)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드온이 미디안의 손에서 자신들을 구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기드온에게 요청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이게 무슨 말일까요? 단순히 당신이 우리를 다스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기드온을 비롯한 기드온의 자손까지 우리를 다스려 달라고 합니다. 이 말은 비록 ‘왕’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백성들은 기드온에게 이방나라들처럼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 요청에 대해서 기드온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23) 정말 멋진 말입니다. ‘내가 아니라 우리의 왕으로 계신 하나님이 너희를 다스릴 것이다.’ 기드온이 큰 승리를 거두고 성공을 경험하고 있을 때, 충분히 유혹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백성들에게 했던 말입니다. 기드온은 정말 중요하고 백성들이 꼭 들어야 하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본문의 세 사건을 간단하게 살펴봤습니다.
기드온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겸손하고 충성스러우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성숙한 사람입니다. 이 정도면 성공에 대해서 훌륭하게 대처했고 성공이 주는 위험을 극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가 이것만 보고 말한다면 그렇게 평가할 수 있겠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세 사건과 함께 봐야 하는 것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 전부를 함께 봐야지 기드온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혹시, 여기까지만 말씀을 들으면 오늘 말씀을 완전히 오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기드온에게는 반전의 모습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반전을 매력이라고 말하는데 기드온의 반전은 매력이 아니라 충격입니다. 우리에게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럼 기드온의 진짜 모습을 보기 위해 세 사건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첫 번째 사건입니다.
첫 번째 사건에서 봤던 기드온의 모습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첫 번째 사건만으로는 알기 어려웠던 기드온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겸손한 태도를 보이며 같은 이스라엘 민족과 싸우지 않았던 기드온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에는 너무도 다른 기드온을 발견합니다. 기드온이 300명과 함께 도망가는 적을 쫓고 있을 때 숙곳이라는 곳에 이릅니다. 기드온과 함께한 사람들이 배고픈 상태로 지쳐있었기 때문에 기드온은 숙곳의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청합니다. 그 요청에 대해서 숙곳의 지도자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숙곳의 방백들이 이르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하는지라”(6)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그동안 미디안에게 압제 받았던 숙곳 사람들은 미디안의 눈치를 봅니다. 기드온을 도와줬을 때 받을 수 있는 미디안의 보복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미디안의 왕들을 이미 사로잡은 것이 아니라면 미디안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도와줄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기드온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에브라임에게 했던 것처럼 겸손하고 지혜로운 방법으로 설득하는 모습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기드온의 행동은 완전히 다릅니다. “기드온이 이르되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넘겨 주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 하고“(7)
기드온이 한 말은 굉장히 강하고 잔인한 말입니다. 특별히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에게 쌓인 게 많아서 이러는 걸까요? 아닙니다. 기드온은 브누엘로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도 같은 요청을 합니다. 그리고 같은 대답을 듣습니다. 그러자 기드온이 말합니다. “기드온이 또 브누엘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에 이 망대를 헐리라 하니라”(9) 자신을 홀대한 것에 대해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엄포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은 이방사람들이 아닙니다.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반응이 이러합니다. 물론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의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위험이 있더라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기드온에게 고마워하며,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기드온이 보여주는 태도는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것입니다. 만약 기드온이 에브라임에게 했던 것처럼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고 한다면 이렇게 말해야 했을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며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으니 미디안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설득하는 과정이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말한 그대로 그들에게 행합니다. “그 성읍의 장로들을 붙잡아 들가시와 찔레로 숙곳 사람들을 징벌하고 브누엘 망대를 헐며 그 성읍 사람들을 죽이니라“(16-17)
기드온은 동족을 죽이는 사사가 되었습니다. 이방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오히려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대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사건을 다시 생각하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기드온은 같은 편끼리 싸우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를 수 없는 상대와 싸우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기드온이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싸우지 않은 것입니다. 기드온이 평화를 위해서 혹은 동족을 위하는 마음으로 했던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은 기드온이 상대할 수 있는 약한 위치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나를 무시해? 그래 내 힘을 보여주마!’악으로 갚아준 것입니다.
다음으로 다시 두 번째 사건입니다.
기드온은 포기하지 않고 미디안의 두 왕을 잡기 위해 수고했습니다. 그럼 이렇게 끈질기게 추격하며 미디안의 왕들을 잡았던 이유가 뭘까요? 맡겨진 일에 대한 충성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그가 세바와 살문나에게 말하되 너희가 다볼에서 죽인 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더냐 하니 대답하되 그들이 너와 같아서 하나 같이 왕자들의 모습과 같더라 하니라“(18)
기드온이 사로잡은 미디안의 왕들에게 다볼에서 죽인 자들을 묻습니다. 두 왕은 자신이 죽인 자가 기드온과 같은 왕자들의 모습이었다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이 전쟁이 있기 전에 미디안 왕이 다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였는데 그들이 죽인 사람이 기드온의 형제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말합니다. “그가 이르되 그들은 내 형제들이며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니라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만일 그들을 살렸더라면 나도 너희를 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19) 지금 기드온은 그들에게 복수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희에게 갚아주겠다고 하는 겁니다.
기드온은 복수의 의미를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자기 집안의 명예 회복시키고 미디안 왕들에게 수치를 더하기 위해서 맏아들에게 왕들을 죽이라고 명합니다. “그의 맏아들 여델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들을 죽이라 하였으나 그 소년이 그의 칼을 빼지 못하였으니 이는 아직 어려서 두려워함이었더라“(20) 기드온의 아들은 아직 어렸기에 두려워서 왕들을 죽이지는 못합니다. 결국 기드온이 직접 두 왕을 죽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드온이 두 왕을 절실히 쫓았던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끝까지 두 왕을 쫓았던 것은 복수를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목적이 자신에게 있었고 개인적인 욕망에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세 번째 사건입니다.
기드온이 백성들에게 정말 멋진 말을 했습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을 거절하며 분명하게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릴 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잘 살펴봐야 하는 것은 이 말을 믿을 수 있나 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말이 진심이라면 당연히 행동으로 증명될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기드온이 하는 행동들은 그가 했던 말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왕이 되는 것을 말로는 거절했지만, 실제로는 왕이 되어 있습니다.
기드온이 어떤 일을 했을까요?
첫째, 기드온은 전리품을 자신이 취합니다.
“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요청할 일이 있으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지니라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마엘 사람들이므로 금 귀고리가 있었음이라“(24) 여기서 갑자기 이스마엘 사람이라고 언급되는데 미디안 사람과 같은 말로 볼 수 있습니다. 미디안 족속은 이스마엘의 후손인데, 그들이 금귀고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들을 죽이고 금귀고리를 탈취했던 것입니다.
기드온은 백성들에게 탈취한 금귀고리를 요구합니다. 이렇게 해서 기드온이 받은 금의 무게가 천칠백 세겔입니다. 대략 19킬로가 되는 무게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드온은 미디안 왕이 입었던 자색 의복과 장식들을 가집니다. 왕을 상징하는 의복과 그 장식을 스스로 취한 것은 의미가 있는 행동입니다.
둘째, 기드온은 금으로 에봇을 만듭니다.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27) 에봇은 대제사장이 입는 옷입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입어야 했고 또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서 자기 성읍에 둡니다. 기드온이 한 이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일을 생각나게 합니다. 결국 기드온은 자신이 있는 곳을 특별한 곳으로 만들고, 백성들이 자신을 주목하게 만듭니다. 또 하나의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셋째, 기드온은 많은 아내를 둡니다.
“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 그의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 명이었고”(30) 기드온은 왕이 하는 것처럼 많은 아내를 둡니다. 기드온이 그 아내들을 통해 낳은 아들만 칠십 명이 되는데, 아내뿐만 아니라 첩을 통해 아들을 낳았습니다. 특별히 첩을 통해 낳은 아들의 이름이 “아비멜렉”입니다. 그 이름의 뜻이 ‘내 아버지는 왕이다’입니다. 누가 왕이라는 말입니까? 기드온이 왕이라는 말입니다.
기드온이 왜 이런 일들을 했을까요? 삶의 중심이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기준도, 삶의 목적도, 삶의 이유와 동기도 모두 나 자신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냐? 옳지 않은 일이냐?’ 이것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중심이니까 행동의 기준도, 선택의 기준도 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내 입맛대로 행하며 사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영광을 위한 목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삽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위해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바뀝니다. 어느새 내가 목적이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삶의 목적이 바뀌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나의 욕망을 숨기고 겉으로는 그럴 듯하게 포장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그 목적을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래도 정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정답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왕이시라고, 하나님이 다스리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행동은 다릅니다. 삶을 움직이는 동기가 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알고 있는 답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내가 말한 답으로 살지는 않습니다. 내 삶의 중심이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기드온의 삶이 그러합니다.
성공은 우리를 이런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에 차이를 만들고 점점 더 그 차이를 크게 하는 겁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고 말하면서 다른 것으로 만족을 구합니다. 주님이 나의 목자라고 말하면서 다른 것을 의지합니다. 주님이라고 말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왕이라고 말하면서 교묘하게 내가 왕이 될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가 에봇을 만들어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기드온을 보십시오. 기드온이 자신의 약함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함으로 승리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하지만 성공한 후에는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에봇을 만들고 자신이 왕이 되어 버렸습니다.
비록 그 땅이 평온했지만 그 평온은 온전한 평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 빠진 평온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사라진 평온입니다. 이러한 평온에 빠져 만족하고 있다면 그런 평온은, 그런 성공은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낫습니다.
우리는 성공을 통해 너무도 쉽게 잊어버립니다. 나를 부르시고, 나를 붙드시고, 나에게 확신을 주시고, 나에게 승리를 주신 분을, 나에게 성공을 허락하신 분을 잊어버립니다. 나에게 공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삶의 주인이 내가 되어서 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셨고, 함께하고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성공이 위험한 것은 그 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내가 이루어낸 성과라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과 성공이 가져오는 만족과 부와 명예, 안락함과 자기 자랑은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앉게 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니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실패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공했다면 우리는 더 많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은 세상의 성공보다 세상의 부와 명예보다 하나님 뜻에 따라 사는 것을 최우선 순위에 두셨습니다. 순종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두셨고, 말씀하신 그대로 사셨습니다. 사탄이 보여주는 천하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거절하셨습니다. 왕이신 분께서 왕의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셨습니다. 자기 생명을 내어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은 성공에 대한 우리의 욕심과 성공이 주는 위험에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 주님을 바라보며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믿음의 길을 걸어가라
삿 8:4-35 / 비전의 사람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니라”(삿 8:27).
우리는 믿음으로 잘 시작하였다가 좋지 않게 마치는 사람들을 보게 되곤 합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만일 그러한 사람들이 리더의 위치에 있다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곤 합니다.
구약에서도 시작은 좋았지만 좋지 않게 마무리한 경우를 보여주곤 합니다. 그들은 사울왕이었고 솔로몬왕이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자신이 하나님께 분향을 한 것은 선을 넘는 행위였습니다. (삼상 13:8015; 15:17-26). 솔로몬도 이방 나라와 결혼을 하여 나라의 평안과 번영을 추구하려고 한 것도 선을 넘는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 나라를 의지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켜야 했습니다. (열상 11:1-5).
기드온도 시작은 좋았지만 마무리가 좋지 않게 마친 인물이었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으로부터 피하여 포도즙틀에 밀을 타작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면서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이 세우시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정상에서 미디안 군대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에 큰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전당에 기드온의 이름이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교만이 찾아오면서 잘못된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편에 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드온과 그 좇은 자 삼백명이 요단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따르며”(삿 8:4).
기드온은 요단을 건너 미디안의 두 왕을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미디안의 두 왕인 세바와 살문나가 만오천명의 군사와 도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드온은 삼백명의 용사와 함께 십이만 명을 물리쳤습니다. 하나님이 승리를 주셨기에 기드온이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기드온은 삼백명으로 만 오천명의 군사와 미다안의 두 왕을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기드온과 함게 했던 자들은 처음부터 전쟁에 참여했던 삼백명 뿐 이었습니다. “이 때에 세바와 살문나가 갈골에 있는데 동방 사람의 모든 군대 중에 칼 든 자 십 이만명이 죽었고 그 남은 일만 오천명 가량은 그들을 좇아 거기 있더라.”(삿 8:10). 만일 두 왕이 무사히 도망한다면, 미디안 군대와 동맹군들이 다시 군사를 규합하여 미래에 이스라엘을 공격할 수 있는 빌미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드온은 그들을 잡는 것은 전쟁을 끝내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기드온이 요단강을 건널 때에는 전쟁의 초기와 달라진 부분이 있었습니다. 기드온은 요단강을 건너기 전과 같은 군사들이 없었습니다. 전쟁 초기에 함께 했던 납달리와 아셀, 그리고 에브라임 지파들은 더 이상 기드온을 지지하여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기드온과 함께 했던 군사들은 처음부터 함께 했던 삼백용사 뿐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은 피곤했지만 기드온을 따랐습니다. “기드온과 그 좇은 자 삼백명이 요단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따르며”(삿 8:4). 요단을 건넌 후에 기드온은 숙곡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군사를 위하여 식량을 요청했습니다. “그가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종자가 피곤하여 하니 청컨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 나는 미디안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따르노라.”(삿 8:5). 기드온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은 그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이 거절한 이유는 기드온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드온이 삼백명의 군사로 만오천명이나 되는 미디안 사람들을 물리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벗어나 이방 민족의 땅에 거하고 있었기에 민족적인 정체성이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백성이 미디안과 전쟁한다면 기꺼이 나와서 도와주고 마음으로 함께 해야 했지만 그들은 냉담했을 뿐 아니라 모질게 기드온의 군대를 적대시 했습니다. “숙곳 방백들이 가로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어찌 네 손에 있관대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삿 8:6). 그들은 기드온을 신뢰하지 않고, 도리어 미디안의 편에 선 것이었습니다. 만일 기드온이 패한다면 미디안의 왕이 자신들에게 복수할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기드온이 아니라 미디안의 왕인 세바와 살문나에게 더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그들과 타협하지 않고 단호하게 징계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는 심할 정도로 요단 동편의 사람들인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복수하기로 한 것입니다. “기드온이 가로되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붙이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 하고 ... 기드온이 또 브누엘 사람들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에 이 망대를 헐리라 하니라.”(삿 8:7,9).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드온은 세바와 살문나의 군대를 무리치고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돌아오는 길에 숙고 사람의 방백을 잡아다가 들가시와 찔레로 징벌하였고, 브누엘 사람들은 망대를 헐은 후에 그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숙곡 사람과 브누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를 대적하는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치루는 전쟁에서 기꺼이 참여하며 도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이스라엘 자손의 적들에게 마음을 주는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기드온으로부터 극심한 징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그들의 우상 숭배를 책망하며 선포합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출 32:26). 모세는 ‘누가 하나님의 편에 섰느냐’하는 것입니다. 이때 레위 자손이 모세에게 나아와 하나님의 편에 섰음을 증거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편에 서는 기회를 만나곤 합니다.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누구의 편이냐?” 너는 세상이나 사탄의 편에 서고자 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편에 서고자 하느냐?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강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편에 섰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복음 증거로 나타나게 되면, 교회에서는 영적인 리더와 마음을 함께 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예배에서는 한 마음으로 찬양하고 말씀에 아멘 하는 믿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가로되 그들은 내 형제, 내 어머님의 아들이니라 내가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너희가 만일 그들을 살렸더면 나도 너희를 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삿 8:19)
기드온은 처음에는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스라엘 내의 갈등을 봉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점점 자신의 교만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던 숙곡 사람의 방백들을 들가시와 찔레로 징벌하였고, 브누엘 사람들은 망대를 허물고 성읍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했습니다. 그는 점점 하나님 중심적인 떠나고 개인적인 감정대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요단강을 넘어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한 이유는 실은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바와 살문나가 기드온의 형제들을 다볼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죽였던 것입니다.
“이에 세바와 살문나에게 묻되 너희가 다볼에서 죽인 자들은 어떠한 자이더뇨 대답하되 그들이 너와 같아서 모두 왕자 같더라 가로되 그들은 내 형제, 내 어머니의 아들이니라 내가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너희가 만일 그들을 살렸더면 나도 너희를 죽이니 아니하였으리라 하고.”(삿 8:18-19).
세바와 살문나는 기드온의 형제들을 죽였기에 기드온은 끝까지 추적하여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만일 그들이 자신의 형제를 살려주었다면, 자신도 그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들인 여델에게 죽이라고 하지만, 그가 어려서 두려워하여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칼을 빼어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그의 약대 목에 꾸몄던 새 달 형상의 장식을 취하였습니다. 새 달 형상의 장식은 달신을 섬기던 미디안 사람들이 몸에 지니던 부적이었습니다.
기드온은 삼백명의 용사를 데리고 요단을 넘어 요단 동편의 땅인 이방인의 땅으로 갔습니다. 그가 세바와 살문나의 두 왕을 추격했던 이유는 자신의 형제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보다는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에 더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가 요단을 넘은 결과는 그의 삶을 나쁜 방향으로 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동족을 죽이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는 비록 힘이 있는 이스라엘의 사사로 군림하고 있다 할지라도 비협조적인 브누엘 사람들을 죽이지 말아야 했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과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미디안 사람들로부터 금과 패물을 취함으로 교만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신을 왕으로 세우는 것을 받지 않는 대신에 그들이 취한 금과 보석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청구하노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찌니라 하니 그 대적인 이스마엘 사람이므로 금 귀고리가 있었음이라 ... 기드온이 청한바 금 귀고리 중수가 금 일천 챌백 세겔이요 그 외에 또 새 달 형상의 장식과 패물과 미디안 왕들의 입었던 자색 의복과 그 약대 목에 둘렀던 사슬이 있었더라.”(삿 8:24, 26).
기드온은 그들이 가져온 금으로 큰 부를 얻게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삼백 용사가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은 그들이 취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취해야 할 금과 보석을 자신에게 가져오게 함으로 부를 취했던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과 전쟁에서 승리했던 드보라와 바락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너희 왕들아 들으라 방백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삿 5:3).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드온을 철저하게 자신이 중심이 되는 삶으로 변질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 중심이 되는 삶의 결과는 좋지 않게 마치는 것이 성경이 주는 교훈입니다.
3. 우리의 교만은 어리석은 행동으로 이끕니다.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니라”(삿 8:27).
기드온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보다도 기드온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삿 8:22). 기드온은 사람들이 자신을 높이자 자신은 그들을 다스리지 않고 하나님이 다스리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대신에 그들에게서 금과 패물을 요구하였고, 그는 이스라엘 가져온 금과 의복과 패물로 자신을 위하여 금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에봇은 대제사장의 의복으로서 제사장만이 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에봇을 만들때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율법의 규례대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교만하여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 오브라에 두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금 에봇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금 에봇은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었습니다.
기드온은 후에 많은 아내와 첩을 두어 칠십인의 아들과 첩이 나은 아비멜렉이라는 아들을 두었습니다. “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인이었고 세겜에 있는 첩도 아드을 낳았으므로 그 이름을 아비멜렉이라 하였더라.”(삿 8:31). 그는 나중에 솔로몬과 같이 쾌락적인 삶을 살았고 그의 자손들이 큰 고통을 겪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은 다시 바알 숭배의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기드온이 이미 죽으매 이스라엘 자손이 돌이켜 바알들을 음란하게 위하고 또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사면 모든 대적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지 아니하며 또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의 이스라엘에게 베푼 모든 은혜를 따라서 그의 집을 후대치도 아니하였더라”(삿 8:33-35).
기드온은 사사로서 부르심을 받은 후에 자신의 집에 있는 바알을 위한 단을 허물고 아세라 신상을 쪼개어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큰 자가 된 이후에는 자신을 높이며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 보다는 자신에게 집중하게 했고, 그 후에는 자신을 위하여 만든 금 에봇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우상 숭배로 이끄는 자가 되었습니다.
기드온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경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무리 탁월한 사람이라도 순간적인 실수로 잘못된 길로 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믿음의 사람들이 넘어지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 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의 목회자로 잘 섬기다가 넘어지기도 합니다. 미국의 빌 하이빌스 목사님도 한때는 미국의 가장 영향력있는 목회자로서 섬기다가 성적인 스캔들로 사임해야 했습니다. 호수의 힐송 교회도 목회자가 바뀌었는데, 그 이유가 컨퍼런스 기간에 목사님이 술에 취해서 여성의 방에 들어가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성도로서 또는 직분자로서 섬기다가 하나님 중심에서 자신 중심적인 사고를 하다가 넘어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0장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우리가 믿음으로 굳게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우리는 넘어질까 조심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우리는 영적인 생활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죄를 고백하며 목장 모임에서 서로를 세우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드온의 길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믿음의 주이시며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2).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과 끝이 항상 같으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을 넘지 않으시고 항상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