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권철의 여민동락

여민동락(與民同樂) 퇴계(退溪) 이황이 벼슬을 사양(辭讓)하고 고향(故鄕)에 돌아와 제자(弟子) 들을 양성(養成)한다는 소식(消息)이 널리 퍼지자 일찌기 영의정(領議政)의 벼슬을 지낸 바 있는 쌍취헌 권철이 퇴계를 만나고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찾아 갔다. 권철은 그 자신이 영의정의 벼슬까지 지낸 사람인데다가 그는 후일(後日) 임진왜란(壬辰倭亂)때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적(倭敵ㅍ을 크게 격파(擊破)한 만고 권률장군(將軍)의 아버님이기도 하다. 권률장군은 선조 때의 명재상(名宰相)이었던 이항복의 장인(丈人) 이기도 했다. 서울서 예안까지는 5백50리의 머나먼 길이다. 영의정까지 지낸 사람이 머나먼 길에 일개 사숙(私塾)의 훈장(訓長)을 몸소 찾아 온다는 것은, 그 당시(當時)의 관습(慣習)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권철은 퇴계를 친(親)히 방문(訪問)하기로 했던것. 도산서당에 도착(到着) 하자 퇴계는 동구 밖까지 예의(禮儀)를 갖추어 영접(迎接)하였다. 그리하여 두 학자(學者)는 기쁜 마음으로 학문(學問)을 토론(討論)하였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식사(食事) 때가 큰 문제(問題)였다. 끼니때가 되자 저녁상이 나왔는데, 밥은 보리밥에 반찬은 콩나물국과 가지잎 무친것과 산채 뿐으로 고기 붙이라고는 북어 무친것 하나가 있을 뿐이 아닌가. 퇴계는 평소(平素)에도 제자들과 똑같이 초식(草食) 생활(生活)만 해 왔었는데 이 날은 귀한 손님이 오셨기 때문에 구하기 어려운 북어를 구해다가 무쳐 올렸던 것이다. 평소에 산해진미(山海珍味)만 먹어오던 권철 대감(大監)에게는 보리밥과 소찬이 입에 맞을리가 없었다. 그는 그 밥을 도저히 먹을수가 없어 몇 숟갈 뜨는 척 하다가 상을 물려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퇴계는 다음날 아침에도 그와 똑같은 음식(飮食)을 내놓았다. 권철대감은 이날 아침에도 그 밥을 먹어낼 수가 없어서 어제 저녁과 마찬가지로 몇 숟갈 떠먹고 나서 상을 물려버렸다. 주인(主人)이 퇴계가 아니라면 투정이라도 했겠지만, 상대(相對)가 워낙 스승처럼 존경(尊敬)해 오는 사람이고 보니 음식이 아무리 마땅치 않아도 감히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사태(事態)가 그렇게 되고 보니 권철대감은 도산서당에 며칠 더 묵어가고 싶어도 음식이 입에 맞지않아 더 묵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다음 날은 예정(豫定)을 앞당겨 부랴부랴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권철 대감은 작별(作別)에 앞서 퇴계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이렇게 만나고 떠나게 되니 매우 반갑소이다. 우리가 만났던 기념(記念)으로 좋은 말을 한 말씀만 남겨 주시지요" "촌부가 대감전에 무슨 여쭐 말씀이 있겠나이까, 그러나 대감께서 모처럼 말씀하시니 제가 대감에게서 느낀 점을 한 말씀만 여쭙겠습니다" 퇴계는 옷깃을 바로 잡은 뒤에 다시 이렇게 말했다. "대감께서 원로(元老)에 누지를 찾아 오셨는데 제가 융숭한 식사대접(食事待接)을 못해드려서 매우 송구(悚懼) 스럽습니다. 그러나 제가 대감께 올린 식사는 일반 백성(百姓) 들이 먹는 식사에 비기면 더 할 나위 없는 성찬(盛饌)이었습 니다. 백성들이 먹는 음식은 깡보리밥에 된장 하나가 고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대감께서는 그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제대로 잡수시지 못하는것을 보고 저는 이 나라의 장래(將來)가 은근히 걱정되옵니다. 무릇 정치(政治)의 요체(要諦)는 여민동락(與民同樂)에 있사온데 관(官)과 민(民)의 생활(生活)이 그처럼 동떨어져 있으면 어느 백성이 관의 정치를 믿고 따르겠습니까? 대감께서는 그 점에 각별(恪別)히 유의(留意)하시기 바랄 뿐이옵니다." 그 말은 폐부(肺腑)를 찌르는 듯한 충언(忠言)이었다. 퇴계가 아니고서는 영의정에게 감히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직간(直諫)이었다. 권철대감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수그렸다. "참으로 선생(先生)이 아니고는 누구에게 서도 들어볼 수 없는 충고(忠告)이십니다. 나는 이번 행차(行次)에서 깨달은 바가 많아 집에 돌아가거든 선생 말씀을 잊지않고 실천(實踐)하도록 노력(努力)하겠습니다." 능지성인(能知聖人)이라고나 할까. 권철 대감은 크게 깨달은 바 있어 퇴계의 충고(忠告)를 거듭 고마워하였다. 그리고 올라오자 가족(家族)들에게 퇴계의 말을 자상하게 전하는 동시에 그날부터 퇴계를 본받아 일상생활을 지극(至極)히 검소(儉素)하게 해 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의 정치권에는 퇴계 선생처럼 직언(直言)을 하는 분도, 권 정승처럼 직언을 받아들일 줄 아는 분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시정잡배(市井雜輩)들의 시궁창속 싸음으로만 보일 뿐이니. 나만 느끼는 불안(不安)함인가? 아니면 나라복(福)이 여기까지인 것인가? 이 아침 옛 선현(先賢)의 아름다운 행적(行蹟)이 더욱 그리운 것은 비단 푹푹 찌는 더위 때문만은 아닌 성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