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露日戰爭)과 파국(破局)의 대한제국
< 아관파천> 후 <러시아>는 <만주>와 <조선>에 막강한 세력을 끊임없이
넓혀오는 반면 , <일본>은 <조선>에 전전긍긍 " 하며 계속적인 <자본>투자를
해왔지만 , <만주>를 석권한 <러시아> 의 벽에 부딪혀 " < 러시아 > 의 위협까지
느끼게 됐는데 , <러시아>는 <만주>에서 동청철도 (東淸鐵道: 하얼빈 철도의 옛이름 )
를 건설하였으며 < 조선>에서도 <마산포>를 조차 (組借)하려 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노골적 으로 세력을 확장 시키고 있었다 .
이때 <일본>은 < 조선> 점령을 시작으로 북진(北進)을 꾀하여 <만주>에 까지 진출
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 별수없이 < 일본>은 러시아 와 의결을 제시 하였다 .
<일본>은 " <만주>는 <러시아>가 차지하고 " <조선>은 <일본>이 점령 한다는
기본 입장을 표명 했는데 , 서양 열강들은 < 러시아>가 <만주>와 <중국>에 진출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 그것은 그들의 <중국>진출이 차질을 빚을수 있기 때문이 었다 .
1902 년 1월 30일 , <일본>은 <영국 런던>에서 < 주영일본공사> 하야시( 林董) 와
<영국외무대신 : 랜스다운) 과 영일동맹(英日同盟) 을 체결 했다 . 이어
1902년 3월엔 <러시아><프랑스> 공동선언 이
발표 됐으나 별 실효는 없었다 .
1903 년 7월 23일 ,
<일본>은 <청국>의 <기회균등> 과 <일본.> 의 < 기득권>을
인정하라고 요구 했으나 <러시아>는 이를 거절한다 . 이어
1904년 2월 6일 < 최후통첩>을 발송 , 10일에
<선전포고>에 앞서 8일에 <일본해군> 은
< 인천>에서 <러시아 군함>을 격파 하고 ,
<중국 여순항>의 <러시아 기지>를 기습 , 공격했다 .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은 서울로 진주하여 <조선>내
<군략요지>의 수용을 인정하는 < 한 일> 의정서 조인을 강요했다 .
(1894 년 < 조선군> 의 모습 , 일부 군사는 신식복장 과 약간의
소총을 소지 했었으나 위협적 이지 못했다)
< 1904 년 10월 12일 > 에는 < 일본육군대장 하세가와 ( 長谷川好道 )> 가
<조선주차 > 일군사령관 으로 <서울>에 상주 하게 되었다 .
한편 러일전쟁( 露日戰爭 )은 <만주>에서 <일본> 의
상승기세에 전의를 상실한 <러시아군>은 봉천 회전
(奉天 會戰 : 1905 년 3월 10일 )의 패배와 <발틱함대>의 전멸 ,
( 5월 7일 ) 로 끝내 9월 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 을
맺게 되었다 . 그러나 이 <조약>의
배경엔 미국이 있었다 .
<일본>은 세계의 예상을 뒤엎고 <육전 과 해전> 모두 승리함 으로 < 러시아>는
충격과 <반정부 시위>까지 일어나 전쟁을 끝까지 수행할 수 없는 상태였다 .
이러한 정황을 알아채린 <미국대통령 > 데어도오 루즈벨트 가 조정에
나섰다 . 그러나 그는 상당히 <친일적>이었고 <전제정치>의
<러시아>완 거리가 있었다 . 그는 먼저 <미 - 일>
<가쓰라 - 태프트 밀약 ( The Katsura- Taft Agreement) 을 체결하여
(1905 년 7월 ) 양국에 이익 보호에 협조 를 공고히 했다 . 그 내용은 " 미국의
<필리핀> 점령을 인정 하고 " , 일본의 <조선> 점령을 인정 한다는
" 자기들 끼리의 <밀약> 이 었다 . 이렇듯 <조선>은 <일본>과
<열강> 들의 전시용 먹거리 에 불과 했다 .
500 년 당쟁 의 당연한 결과다 .
<미국>은 < 러시아 와 일본 >의 전권대사를 < 미국>의 <포츠머스 : Porsmouth > 로
불러 약 1개월간 협상 끝에 < 일본 의 전권외상 고무라 주타로 ( 小村壽太郞) > 와
<러시아> 의 전권 재무장관 <비테> 와 전문 15개 <조> 의 강화조약이
체결 됐는데 , 이조약이 < 포츠머스 > 조약 이다 .
(1904 년 2월 8일 , < 인천 >에 상륙한 < 일본군 >
기고시 (木越 ) 여단의 시가 행진 .
( 중국 <여순항>을 수비하는 <러시아 해군 >
(르 프티 주르날 1904 년 3월 27일 프랑스)
( <조선> 평북 의주 부근에서 <압록강>을 도강하는 일본군 , )
(만주) 를 향해 평양부근을 행군 하는 < 일본군> 들 , 누구도
< 일본>의 승리를 점치지 못했다 .
( 전쟁만 나면 고생하는 <조선> 부역자 들 , <일본군>의 군수물자
운반에 강제 동원된 불쌍한 , < 하층민>들 .
<서울 >남산 아래서 같은일로 동원된 사람들 .
( 러시아군 진지를 공격하는 < 일본군> 이때 전쟁은 거의 인해전술 을 연상 시킨다 .)
( 여순항 을 사수하는 <러시아 장교 > 여순전투는 155일을 소요하면서 양쪽
수만명을 동원 , 치열한 접전을 벌렸다 .어느 포대진지 에서 부하를
모두 잃은 대위한명 이 목숨을 걸고 <고군분투>한다 .
장렬한 전사를 하였을 것이다 .) (르 프티 파리지앙 : 1904년 9월 25일 )
( 여순 , 대련 , 등 <요동반도> 를 해로(海路)로 공격하는 한편 ,
<조선의 한반도>를 통해 육로 로 공격하는 <일본군>
( 심양 전투 이후 퇴각하는 <러시아군> 완전 " 전의" 를 상실 한것 같다 .
<선전포고> 2일전, 기습공격에 치명타 를 입어 전세가 뒤집힌 것 같다 . )
( 르 프티 주르날 : 1905 년 3월 26일 )
( 잔인한 보복 , <러시아>와의 격전에서 승리한 < 일본군> 그러나 ,
<러시아>에 협력했던 <중국인>들을 눈도 가리지 않고 칼로 쳐 죽인다 .
이장면은 < 프랑스>기자의 눈에 충격으로 보였을 것이다 )
( 르 프티 주르날 : 1905년 4월 23일 )
( 일본의 신도 의식 (神道儀式) 러일전쟁 중 <일본해군>총사령관 토고 헤이하치로
(東鄕平八郞 1846- 1934) 가 없었다면 <일본>은 결코 승리할수 없었다 .
그는 <여순항>을 철저히 봉쇄하고 고립된 <여순>을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 의 발틱함대> 가 1905 년 5월 27일 <쓰시마해협>을
지날때 공격 , 35척중 33척을 격파 , 통쾌한 승리를 얻었다 .
그가 사용했던 전술은 <영국> 과 <프랑스>도 이용 ,
성공을 거뒀다 .유럽해군 은 일본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
< 승리 의 만찬식 >에서 < 토고>의 공적을 영국의 <넬슨>에 비교하자 ,
그는 겸손히 " < 조선 의 이순신 > 장군에 비교하면 우리는
< 하사관 >에 지나지 않는다 " 라고 말해 좌중을
당혹케 했다 , 명장은 명장을
알아 보는것 같다 .
(일본에서 <신도의식>을 통해 전쟁때 사망한 병사들을 기원하는 <토고장군>
초혼(超魂)이라고 쓴 막대앞에서 <조사>를 읽고 있다 . 아마도 <귀신>을
초대한다는 뜻인가 보다 . 하나님 은 왜 ?이들을 이토록 축복 하는지 ? )
( 르 프티 주르날 : 1905 년 11월 12일 )
( 밑에 사진 은 < 조선>에 파견된 < 통감 > " 이토 히로부미 " 다 .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로 원래의 <야심>을 성취하는 영광을 얻은 반면 ,
<조선>은 또다시 <외세>의 착취와 내정 간섭으로 파란만장 의 고난의
역사를 짊어 지게 됐다 . 위기를 기회로 삼을수 있는 <용단>과
<지혜>가 필요 했는데 , <일본>은 독자적 으로 <조선>에
침투할수 있는 <우선권>을 갖게 되었다 . < 일본>은 " 돌다리를
두둘기 듯 < 영국> 과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 1905 년 8월 12일 )
하므로써 < 조선>의 지배를 외교적 으로 보장 받았다 .
문제는 < 조선땅>에 " 이토 히로부미 ( 伊藤博文) 란 자의 출현이다 .
격동의 현대사 에 한 획을 긋는 우리민족의 <수난사>가
시작된 것이다 .
자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