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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패권을 무너뜨리게 될 사회주의 의료체계
쿠바의 인구 1,000명당 의사수는 8.2명으로 세계 최고!
무상으로 의과대학을 다닐수 있는 쿠바에서 나라의 훌륭한 인재로 자라는 대학생들이 보건의료당국에 적극 협조하여 쿠바의 인구1,130만명을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진행해 전체의 77%(880만명)완료했고, 계속해서 집집마다 일일이 방문하여 코로나 환자를 찾아내고 있군요.
현재, 쿠바는 확진자가 36명, 사망자는 0명(4월 5일 15시 현재).
쿠바는 이번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이탈리아 59명, 스페인100여명 그리고, 남미의 가난한 나라 5개국에 의료진을 파견함으로써 예방의학 중심의 사회주의 의료체계를 세계만방에 알리고, 소위 선진국이라 자랑질해대던 미제국주의 깡패들의 패권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고 있는게 아닌지....
쿠바의 인터페론 백신이 코로나19의 확산을 막는 데 잠재적인 '특효약'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군요.
한편, 이란은 "흉부를 찍은 CT 사진에 AI 알고리즘을 적용해 코로나19에 감염됐는지를 97% 정확도로 판정할 수 있다"라며 "양성 판정에 걸리는 시간은 2분 정도로 빠르다"라고 발표했는데....
이란 "CT 사진으로 2분만에 코로나19 감염 판정기술 개발"
강훈상 입력 2020.04.05. 20:58 https://news.v.daum.net/v/20200405205801320
이거이 세계3대 공과대학으로 선정된 김책공대에서 수학한 이란 연구진이라는 말도 있군요!
참고로 조선은....
인구 1,000명당 의사수는 3.3명(2003년 기준) http://www.bos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83655
뉴시스
쿠바 의대생 2만8000명, 코로나19 집집마다 방문조사
수도 아바나에서 "숨은 환자 찾아내기"
보건부 "이미 전국 880만명 조사 마쳐"
등록 2020-04-03 08:40:02
[아바나=AP/뉴시스]지난달 31일(현지시간)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예방을 위해 마스크를 쓴 한 여성이 거리 벽화 앞을 지나고 있다. 쿠바 정부는 집 밖에서는 누구라도 마스크를 착용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2020.04.01.
[서울=뉴시스] 차미례 기자 = 쿠바의 의대생들이 혹시 발견되지 않고 집에 숨어있을지 모르는 코로나19 환자를 찾아내서 지역사회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방문조사의 자원봉사에 나서고 있다고 호세 앙헬 포르탈 보건부 장관이 2일 (현지시간) 발표했다.
약 2만8000명의 의대생들은 수도 아바나를 비롯한 전국의 집집을 방문해서 조사를 하고 있다. 하지만 마스크를 착용해서 감염을 방지하고, 혹시 환자가 있을 경우 바이러스 전달자가 되지 않기 위해 집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신화통신이 현지 언론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의대생인 카티아 아길론(21) 은 아바나 시내의 베다도 지역에서 방문 조사를 하고 있다. 이 지역의 주민 아나 이리스 코네사는 "이 방법은 효과적일 거다. 어떤 사람들은 몸이 아파도 아예 병원이나 의사에게 가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친구들과 함께 정부의 보건복지 공무원과 지역 방문조사를 하던 아길론은 기자들에게 "이번 작업은 일반의가 되려는 나의 목표에도 큰 도움이 된다. 이미 장래의 내 환자가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을 미리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어린 의대생들의 자원봉사에 지역 보건 당국과 주민들도 따뜻하게 맞아 주면서 코로나19 확산 방지에 대한 노력에 찬사를 보냈다.
베다도 의대 교육병원의 아오롤리스 오타노 원장은 "지금은 코로나19 감염 초기의 환자들과 모든 호흡기 질환 환자를 찾아 내는 것이 이 병의 확산방지에 기본이 되는 첫 걸음"이라고 말했다.
포르탈 보건부 장관도 "의대생들이 이 번일에 큰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임하고 있다"고 말하고 환자 추적 팀들이 이미 전국에 걸쳐서 약 880만명의 주민들과 면담조사를 마쳤다고 밝혔다.
◎공감언론 뉴시스 cmr@newsis.com
https://newsis.com/view/?id=NISX20200403_0000981221&cID=10101&pID=10100#
가난한 나라 쿠바의 힘
김은정 승인 2020.04.02 20:21
코로나 19의 여파가 거세다. 국가에 따라서는 확산세가 정점을 맞아 곧 감소추세를 맞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지만 연일 오르내리는 확산 추이를 보면 어느 것도 아직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유럽 에 이어 미국도 심각한 국면을 맞고 있고, 그동안 비교적 안전한 듯 보였던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아프리카의 국가들까지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는 때. 서로가 서로에게 감염 통로가 되는 길을 막기 위해 입국 금지 국가를 늘려야할 차단의 시대를 맞았지만 그래서 더 확실해지는 것이 있다. 물리적으로는 차단하되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에게 힘이 되는 국가적 연대가 더욱 절실해졌다는 것이다.
지난달, 코로나 19로 위기에 처해있는 이탈리아를 지원하기 위해 쿠바 의료진이 파견됐다는 소식에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만 달러에도 훨씬 못 미치는 가난한 나라 쿠바가 3만 5천 달러에 이르는 세계 24위 부자국가 이탈리아 지원에 나섰다는 것은 확실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쿠바의 의료체계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도 그때문이었다.
1950년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첨예한 대립 구도에서 사회주의를 택한 쿠바는 전 국민에게 보편적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의료체계를 갖추는데 온 힘을 쏟았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사회주의 체제 붕괴로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안게 되었을 때에도 ‘평등’과 ‘보편 의료‘의 철학과 원칙을 끝까지 고수했던 쿠바는 덕분에 선진국들이 이루지 못한 의료 성과와 함께 보편적 의료시스템을 정착시키는데 성공했다.
국민들의 모든 의료행위가 무료인 쿠바는 세계 최초로 소아마비 바이러스를 근절시켰으며 에이즈 백신 개발에도 가장 앞서 있다. 자신들보다 더 가난한 국가에 안과 의사를 보내 수십만 명이 무료 의료지원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등 국제사회의 인도적 지원 활동도 돋보인다. 2010년 아이티에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도, 2014년 에볼라 바이러스가 아프리카를 강타했을 때도 가장 먼저 의사를 파견한 나라도 쿠바였다.
쿠바의 활약상에 영국을 비롯한 수많은 국가들이 감사의 뜻을 보내고 세계 언론들은 ‘진정한 국제 연대를 보여 준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미국 국무부의 공식 트위터에 쿠바의 의료진 파견을 ‘돈벌이 수단’이라고 비판하는 글이 올라왔다. 트윗은 의료지원의 손을 내민 나라들을 향해 ‘합의내용을 면밀히 살펴 (쿠바정부의)노동착취를 끝내야 한다’고 부르대기까지 한다. 연대의 가치를 훼손하는 미국의 저열함을 마주하니 가난한 나라 쿠바의 힘이 더 빛나 보인다. /김은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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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jjan.kr/news/articleView.html?idxno=2080284
[문은주의 지구본色] 쿠바, 코로나19 치료제 희망 틔울까
문은주 기자입력 : 2020-04-04 00:05
<부분 발취>
쿠바 보건의료 부문은 고도로 발전해왔다. 피델 카스트로가 이끈 쿠바혁명 내내 가장 우선순위에 있었던 덕이다. 1959년 쿠바혁명을 기점으로 쿠바 정부는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더 많은 의사를 확보할 수 있는 보편적 무상 의료 시스템을 개발해왔다. 쿠바 외무부는 최근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보건의료는 쿠바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우리는 모든 인류가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옹호한다"고 전했다. 의료에 대한 쿠바의 자부심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가운데 더 높아지는 모양새다.
◆역사 깊은 의료 외교...코로나19 치료제 개발 앞당길까
쿠바는 혁명이 한창이던 1959년 이미 의료 단체를 구성했다. 쿠바 의료 국제주의(Cuban medical internationalism)가 그 주인공이다. 쿠바 의료진을 해외, 특히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에 파견하고 현지 의대생과 환자를 초빙하는 것이 골자다. '의료 외교'의 시초인 셈이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의료 위기를 겪고 있는 전 세계에 의료진을 파견해 왔다. 아이티에서 콜레라가, 서아프리카에서 에볼라가 유행할 때도 쿠바 의사들이 활약했다. 현재 세계 59개국에 쿠바 의료 전문가 2만9000여 명이 포진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정신은 반 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코로나19 피해가 커지자 지난달 21일(현지시간) 의료진 52명을 이탈리아로 파견했다. 빈민국 중 하나인 쿠바가 선진국인 이탈리아에 도움의 손길을 내민 셈이다. 이탈리아 외에도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벨리즈, 자메이카 등 주변국에도 의료진을 보냈다. 다른 나라의 관심을 받는 건 의료진뿐만 아니다.
뉴스위크는 최근 보도를 통해 대표적인 쿠바산 약품인 '인터페론 알파-2B 재조합체(IFNrec)'를 소개했다. 인터페론은 세포에서 생성되고 방출되는 '신호' 단백질로, 감염에 반응하면서 주변 세포의 항바이러스 효과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쿠바는 앞서 지난 1976년 전역에 번진 수막염 유행으로 홍역을 치렀다. 1981년에는 풍토병인 뎅기열이 골칫거리로 부상했다. 쿠바 과학자들은 약과 백신을 개발하고 예방 위주의 의료 시스템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선진 인터페론 백신이 탄생했다.
미국 진보 매거진 카운터펀치에 실린 최근 기고문에 따르면 뎅기열 확산이 잦아들자 인터페론 백신은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인간유두종바이러스, B형 간염, C형 간염 등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도 사용됐다. 인터페론 자체가 세포 내 바이러스 증식을 방해하기 때문에 다른 유형의 암종 치료에 활용되기도 했다. 쿠바 생명 공학 전문가인 루이스 에레라 마르티네스는 "환자의 병세가 악화될 수 있는 단계에서 (인터페론이) 추가적인 악화와 합병증을 예방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백신이 코로나19의 확산을 막는 데 잠재적인 '특효약'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영국 글라스고 대학의 남미 전문가이자 '우리는 쿠바다!(We Are Cuba!)'의 저자인 헬렌 야페(Helen Yaffe) 교수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최소 15개국이 쿠바 측에 이 약물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코로나 치료제로 승인되지는 않았지만 유사한 바이러스에 대해 효과적인 것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쿠바 의료는 돈벌이 수단"...뒷짐 진 미국에 쓴소리도
현재 코로나19에는 마땅한 치료제가 없다. 한국을 비롯해 여러 국가가 약 개발에 나섰지만 아직 걸음마 단계다. 인터페론 개발 경험을 바탕으로 바이오테크 산업의 발전을 촉진했던 쿠바가 주목 받는 이유다. 실제로 중국 국가위생건강위원회는 IFNrec를 포함한 30종의 약물을 코로나19 치료제로 선정했다. WHO도 새로운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인터페론 베타와 다른 세 가지 약물을 연구할 예정이다. 걸림돌은 미국이다. 바이러스와 기타 질병 퇴치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가 잇따라 나오는데도 미국의 금수조치로 인해 전 세계 유통이 어려운 탓이다.
https://www.ajunews.com/view/20200403092217326
관타나메라에 스며 있는 '쿠바의 눈물'
[곰PD의 전쟁과 노래] 호세 마르티와 관타나메라
14.07.20 16:12l최종 업데이트 14.07.22 14:16l 김도균(capa1954)
GUANTANAMERA (letra e vídeo) com JULIO IGLESIAS, vídeo MOACIR SILVEIRA (황토강 삽입)
Moacir Silveira 게시일: 2012. 11. 25.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라메라(과히라의 관타나모 아가씨)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라메라
나는 진실한 사람
야자수 무성한 고장 출신
죽기 전에 이 가슴에 맺힌 시를 노래하리라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라메라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라메라
내 시는 화창한 초록색
내 시는 불타는 선홍색
내 시는 상처 입은 사슴
산 속 보금자리를 찾는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이 한 몸 바치리라
골짜기에서 흐르는 시냇물이
나는 바다보다 더 좋아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라메라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라메라
우리의 아리랑만큼이나 쿠바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노래, 바로 관타나메라입니다. '관타나모의 농사꾼 아가씨'란 뜻을 담고 있는 이 곡은 쿠바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호세 마르티(1853.1.28 ~ 1895.5.19)가 지은 시 구절을 노래말로 삼은 곡입니다.
시인이자 사상가, 혁명가였던 호세 마르티는 우리의 김구 선생이나 윤동주 시인에 비견될만한 인물입니다. 쿠바의 관문 아바나 국제공항의 이름에서, 또 1페소짜리 지폐 앞면에서 우리는 마르티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데요, 사실 쿠바 곳곳의 광장이나 학교, 거리 이름에서 마르티란 이름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죠.
스페인군에 입대한 학생 비난한 편지로 17살 때 투옥
▲ 호세 마르티 쿠바의 혁명가이자 작가로 이름을 날린 호세 마르티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열정을 자신의 글과 삶을 통해 실천했습니다. ⓒ cubanet.org
툭 튀어나온 역삼각형 대머리에 카이저 수염을 기른 그의 모습에선 강인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듯합니다. 1853년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말단 경찰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7명의 누이들 틈에서 만성적인 가난에 시달리고 보수적인 아버지와 갈등을 겪으며 성장했습니다.
당시 스페인의 식민 통치를 받던 쿠바의 현실은 마르티로 하여금 자연스레 조국의 운명에 눈을 뜨게 했습니다. 마르티는 이미 16살 때 쿠바 독립을 고취하는 <자유 조국>과 같은 시들을 발표했습니다.
17살이 되던 해 스페인군에 입대한 학생을 비난한 편지가 공개되면서 마르티는 6년형을 받고 수감됩니다. 출옥한 후에는 유럽과 미국을 떠돌며 기자로, 혁명가로, 또 문필가로 활동하게 되죠.
문학 재능이 뛰어났던 마르티는 1882년 시집 <이스마엘리요>를 펴내고 1891년에는 <소박한 노래>를 출판했는데요, 관타나메라의 노랫말은 시집 <소박한 노래>에 수록되어 있던 시 세 편에서 한 구절씩 따온 것입니다.
마르티의 작품들은 스페인의 폭압 아래 잠들어 있던 쿠바인의 민족혼과 공동체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백인, 혼혈인, 흑인, 19세기말 유입된 중국인을 막론하고 인종과 계층을 초월해 새로운 쿠바 건설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마르티의 이러한 호소는 쿠바뿐 아니라 비슷한 역사를 지닌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지지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바람에 흩날려 끝없이 방황하는 나뭇잎이 아니라 밝고 따뜻한 햇볕과 촉촉한 빗방울과 부드러운 바람의 혜택을 누리는 튼튼한 나무줄기에 뿌리 내린 꽃송이여야 한다. 그러나 이런 나무 혼자가 아니라 빽빽이 숲을 이뤄야만 힘센 거인을 이겨낼 수 있다." (호세 마르티 <우리 아메리카> 중)
마르티는 <우리 아메리카>란 수필에서 역사적, 혈연적, 문화적 공통점을 지닌 라틴아메리카가 단결해야만 앵글로색슨 아메리카의 야심을 저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우려한 앵글로색슨 아메리카의 위협은 미국이 북미 전역을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지배하고 개발할 신의 명령을 받았다는 이른바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으로 이미 구체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40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던 쿠바에 대한 스페인의 식민 지배부터 끝장내야 했죠. 1892년 마르티는 뉴욕에서 쿠바혁명당을 결성하고 대표로 선출되었습니다. 1894년 쿠바혁명당은 마르티의 지도 아래 스페인군을 몰아 낼 무장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해 12월 쿠바 독립군과 각종 무기를 실은 배 3척이 플로리다를 떠나 쿠바로 향할 예정이었지만, 미국의 방해로 배 2척이 플로리다에 발이 묶이는 바람에 마르티의 계획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1895년 1월 29일 쿠바 국내의 독립 세력들은 마르티의 군사원조 없이 독립전쟁의 깃발을 올리게 됩니다. 1868년 시작해 10년 동안 이어졌던 제1차 독립전쟁에 이은 제2차 독립전쟁이었죠. 2월 24일 쿠바 동부 바이레와 주변지역에서 무장봉기가 발생하자, 불과 일주일 만에 쿠바인 2500명이 독립군대에 합류했습니다.
마르티 사후 독립전쟁 격화....물러난 스페인 자리에 들어선 미국
▲ 침몰한 메인호 1898년 2월 15일 아바나 항에 정박 중이던 메인호가 원인모를 폭발로 침몰해 승조원 260여 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은 미국이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하는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 faqs.org
이후 독립군은 쿠바 중남부를 기점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가게 되는데요, 마르티가 조국 쿠바에 돌아온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습니다. 4월 11일, 마르티는 10여 명의 동지들과 바하마 군도의 이과나 섬을 출발해 관타나모 부근의 마리시 곶에 상륙했습니다. 하지만 5월 19일 도스 리오스 전투에서 그는 스페인군과의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생전 자신의 시에서 노래했듯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죠.
마르티가 죽은 후에도 쿠바 독립의 불꽃은 활활 타올랐습니다. 스페인군의 새 사령관으로 임명된 발레리아노 웨일레르는 독립군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농민들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한편, 1896년 10월 21일 농촌과 교외지역의 모든 주민들은 일주일 안에 스페인군에 입대해야한다는 징집령을 발표했습니다. 이 명령을 어기는 사람은 모두 반역자로 간주해 처벌하겠다는 무지막지한 내용이었죠.
하지만 웨일레르의 징집령 선포 이후에도 독립운동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고, 스페인군은 점점 더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마침내 1898년 2월 스페인 여왕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쿠바가 자치정권을 수립하는데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스페인이 쿠바 자치정권을 허용하기 직전인 1898년 1월 24일 윌리엄 매킨리 미국 대통령은 해군 순양함 'USS 메인'을 쿠바의 수도 아바나로 전격 파견했습니다. 쿠바 거주 미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목이었죠. 그리고 그해 2월 15일 아바나 항에 정박 중이던 메인호가 원인모를 폭발로 침몰해 승조원 260여 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폭발 이틀 뒤 미국 일간지 <뉴욕저널>은 메인호의 폭발사고에 "스페인의 배신과 적의에 대한 의심할 수 없는 증거"가 나왔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신문이 보도한 증거 따윈 어디에도 없었지만, 연일 미국 언론은 메인호의 침몰이 스페인의 소행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퍼날랐습니다(지난 1974년 메인호 침몰 원인에 대해 재조사를 실시했던 미 해군은 "외부에 설치된 기뢰가 아닌, 내부 폭발에 따른 침몰이라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한 달간 진행된 미국의 자체 진상조사 결과 군함 외부의 기뢰 폭발로 인한 침몰이라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그해 4월 미 의회가 스페인에 대한 선전포고를 결의한데 이어, 6월 10일에는 미 해병대가 관타나모에 상륙했습니다. 전쟁에 지친 노쇠한 제국 스페인은 젊은 미국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개전 석 달만에 스페인은 두 손을 들어야 했죠.
1898년 12월 체결된 강화조약에 따라 스페인은 필리핀과 괌, 푸에르토리코, 쿠바를 미국에 넘겨줘야 했습니다. 미국은 이 강화조약에 쿠바 대표단을 참석시키지 않았습니다. "쿠바는 아직 해방되지도 독립되지도 않았다"는 쿠바독립군 총사령관 고메스의 절규도 아랑곳없이 1899년 1월 1일자로 스페인은 쿠바에 대한 모든 권리를 미국에 양도했습니다.
3년간 미군정 통치...독립 후에도 미국이 재정·외교 감독
▲ 쿠바 관타나모 만은 쿠바의 동남쪽 끝에 톱니 자국처럼 육지쪽으로 움푹 들어간 만입니다. ⓒ 위키피디아
쿠바를 점령한 미국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마르티가 만든 쿠바혁명당을 해체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3년간의 미 군정(軍政) 통치가 이어졌습니다. 1902년 5월 20일 쿠바는 형식상으로 독립할 수 있었지만, 미국은 여전히 쿠바의 재정·외교 문제를 감독할 권리를 보유했습니다. 쿠바 헌법에 반영된 이른바 '플랫 수정안'이 그 근거가 됐습니다.
플랫 수정안에 따르면 쿠바 정부는 '쿠바의 독립을 보존하고 개인의 생명과 재산, 자유를 보호하기에 적합한 정부를 유지하고자…(중략) 미국이 개입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데 동의'(제 3조)해야했던 것이죠. 이와 함께 이 수정안은 미 해군기지를 설치하기 위해 쿠바 정부가 영토를 할양하도록 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관타나모였습니다.
"쿠바 정부는 미국에 급탄 및 해군기지 설치 목적으로 (관타나모만의) 영토와 영해를 할양해준다"고 명시한 플랫 수정안 제 1조에 따라 관타나모만에는 미 해군기지가 설치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속협정문에 따라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의 임대료는 연 2000달러로 정해졌죠.
1934년 두 나라는 임대료를 한 해 4085달러로 인상하는 데 합의했지만 전체 면적이120㎢로 서울시 전체 면적(605.2 km²)의 1/6이 넘는 방대한 지역을 사용하는 대가치곤 터무니 없는 돈입니다. 그나마 혁명으로 친미정권이 축출된 1959년 이래로 쿠바 정부는 매년 미국 정부가 보내오는 임대료의 수령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쿠바와 미국, 두 나라가 모두 동의해야만 협정을 파기할 수 있도록 하는 독소 조항이 삽입돼 미군이 영구 주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점입니다.
'인권 사각지대' 관타나모 수용소...오바마, 폐지 약속 안 지켜
▲ 관타나모 수용소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안에 설치된 불법 수감시설 캠프 엑스레이는 세계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 미 해군
이 관타나모 해군기지는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벌인 이래 다시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죠. 이른바 '적 전투원'을 가둬놓은 수용소 때문이었습니다. '캠프 엑스레이(Camp-X)'로 알려진 이 구금시설에는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사로잡은 탈레반과 알카에다 포로들이 수용되었다고 알려졌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이들이 전쟁 포로가 아니기 때문에 미국은 국제법의 테두리 밖에서 이들을 처리하겠다는 선언까지 했습니다.
미국은 이들이 모두 고도의 훈련을 받은 위험한 테러리스트들이라고 선전했지만 실상은 달랐습니다. 물론 일부 테러리스트들도 포함돼 있었겠지만 치매를 앓는 70대 노인, 이웃과 사소한 다툼을 벌였던 목동, 심지어는 테러리스트들이 차는 시계로 알려진 카시오 시계를 차고 있다고 붙잡힌 과학 교사까지 이곳에 끌려와 있었던 겁니다. 수용소 안에서 갖가지 고문과 인권침해가 빈번히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도 폭로됐습니다.
지난 2006년 마이클 원터바텀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관타나모 가는 길'에는 중동출신의 영국 대학생 3명이 친구 결혼식 참석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다가 테러범으로 몰려 관타나모로 끌려간 어처구니없는 실화를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짐승처럼 좁은 우리에 감금돼 수시로 폭행과 고문을 당하면서 운동도, 독서도, 대화도 금지된 채 끔찍한 세월을 보내야했던 이들 불운한 청년들의 이야기는 세계인들에 적잖은 충격을 줬습니다.
결국 거센 비판 여론 속에 미국은 캠프 엑스레이를 폐쇄하고 관타나모 기지 내 '캠프 델타(Camp-D)'로 수감자들을 옮겼지만, 역시 초법적인 인권침해라는 지적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지난 2008년 대통령에 당선된 버락 오바마는 관타나모 기지 내 수용시설이 미국의 위상을 손상한다며 이를 폐지할 것을 공약했지만, 지금까지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3월 기준 관타나모에 수용된 테러 용의자는 모두 154명으로 대부분 예멘 출신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들의 처리문제는 여전히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평화롭고 낙천적인 노래 뒤에 쿠바 민중의 눈물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호세 마르티와 관타나모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관타나메라의 가사는 마르티의 시에서 따온 것이 맞지만,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라는 후렴구는 마르티의 시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후렴구는 1940년대 쿠바의 유명한 유행어였습니다. 당시 유명가수 호세이토 페르난데스는 아바나 CMQ 방송에서 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는데요, 이 프로그램에는 여러 가수들이 출연해서 그날그날 일어난 사건·사고를 노래로 전달하고, 한 꼭지가 끝날 때마다 출연자들이 합창으로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라고 외쳤습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사람들은 관타나메라의 작곡자가 호세이토 페르난데스라고 알고 있지만, 정작 호세 마르티의 시에 곡을 붙였던 사람은 페르난데스가 아니라 1940년에서 1963년까지 쿠바에서 살다가 미국으로 건너간 작곡가 훌리안 오르본이었습니다.
자신의 전 생애를 쿠바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마르티의 시에 관타나모가 더해진 것은 쿠바 역사 속에서 이 곳이 지닌 의미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1494년 4월 30일 콜럼버스가 처음 이 곳에 발을 디딘 이래 관타나모는 쿠바를 점령한 스페인 침략자의 상륙지로, 또 열강들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의 주요 무대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쿠바 사람들은 독립의 상징인 마르티와 함께 아직도 식민지 상태로 머물러 있는 관타나모를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노래가 쿠바를 넘어 세계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를 제공한 것은 바로 미국 가수 덕분이었습니다. 전 세계가 핵전쟁의 공포를 절감했던 쿠바 미사일 위기 직후인 1963년, 포크 운동의 기수였던 피트 시거가 평화를 염원하며 이 노래를 미국인들에게 소개했던 것이죠. 피트 시거는 컬럼비아 레코드를 통해 이 노래를 취입했지만 아쉽게도 크게 히트를 하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1966년 10월 남성 3인조 보컬 '샌드 파이퍼스(The Sandpipers)'가 이 노래를 다시 불러 앨범차트 9위에 올려놓음으로써 비로소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던 것이죠.
아름답고 고운 화음과 서정적인 분위기를 듬뿍 담고 있는 관타나메라는 오늘날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명곡 중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화롭고 낙천적인 이 노래 뒤에는 불평등 조약으로 자국 영토를 빼앗긴 쿠바 민중들의 눈물이 배여 있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13261
Hasta siempre Commandante(사령관이여 영원하라)-카를로스 푸에블라[체 게바라 추모,가사 한글자막]
석숭 게시일: 2017.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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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본주의 나라들에 많은 의사들은 돈이 되는 성형외과, 피부과, 치과 등에 몰려 있어서
사실, 코로나 같은 질병에 대처할 수 있는 가정의학, 내과의사들의 수는 훨씬 적을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자본주의나라 의학이나 의사들은 돈벌이에 집중되여
있고
사회주의나라에서는 돈벌이가 아닌
사람들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데 복무하지요
호세
쿠바인민들이 좋아하는 민족의 영웅이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