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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乾隆帝, 1711년~1799년)
청나라(淸)의 제6대 황제. 옹정제의 4남으로 할아버지 강희제, 아버지 옹정제의 뒤를 이어 흔히 강건성세로 알려진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황제이며 그의 치세 동안 청나라의 경제, 군사, 문화는 절정을 맞이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잦은 대외원정과 니오후루 허션으로 대표되는 황족과 관료들의 부패로 백성의 삶은 피폐해져갔으며 문화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청나라 정부에 비판적인 서적을 폐기해버리는 등 문화에 대한 탄압도 빈번히 일어나면서 결과적으로 청나라 멸망의 씨를 뿌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현대 학계의 평가 역시 명군인지, 암군인지, 폭군인지로 갈리지만, 대체로 선대에는 못 미친다는 의견이 대세이며, 여러 모로 전한의 무제나 명나라의 영락제, 프랑스의 루이 14세, 인도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와 비슷한 평가를 받는다.
청 황제들 중 유일하게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황제이기도 하다. 물론 퇴위 이후에도 3년간 상황으로 지내며 사실상의 황제로 군림했으며 89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청나라의 6대 황제. 선대 황제인 옹정제의 아들로, 1711년에 태어났다.
1735년 옹정제가 57세로 붕어하자 25세로 제위를 이었으며, 60년이나 재위하며 중국 역사상 강희제 다음으로 오랫동안 재위하였으며, 이 시기에 청제국의 국력은 사상 최강, 국토 역시 사상 최대에 달하였다.
건륭제는 청 역사상 유일하게 스스로 퇴위한 황제이다. 이는 건륭제가 존경하는 조부인 강희제의 61년 치세라는 대기록을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으로, 1795년 재위 60년만에 퇴위하여 상황(上皇)이 되었다. 이에 따라 가경제가 다음 황제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건륭제는 퇴위 후에도 권력을 아들한테 주지않았고 말이 상황이었지 실제로는 황제나 다름없어 사실상의 실세로 군림하였다. 가경제가 부패로 악명높은 건륭제의 총신 니오후루 허션을 건륭제가 죽은 뒤에야 처벌한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건륭제는 퇴위 4년 만인 1799년에 89세로 붕어하였다. 일부 중국 학자들은 건륭제가 정치 실권을 쥐었음을 들어 현직 황제로서의 60년에 상황으로서의 4년을 더해 64년으로서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권력을 쥔 황제로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3. 황제가 되기 전
건륭제가 태어난 해는 강희제의 치세가 50년에 다다랐을 때였다. 건륭제는 (미래에 옹정제가 되는) 윤진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건륭제의 어머니 희귀비 니오후루씨(熹貴妃 鈕祜祿氏)는 만주인이지만 정실 황후가 아닌 후궁이었다. 건륭제는 황자들의 교육 기관인 상서방(上書房)에서 공부를 했지만, 당시 강희제의 아들들은 20명이 훌쩍 넘었고 손자들까지 따지면 100명에 육박했다. 당연히 강희제가 얼굴조차 기억 못 하는 자손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건륭제는 금방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보였다. 문재가 탁월했고 사서삼경에 통달했으며 사냥에서도 용감하게 곰과 싸워 곰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보고 강희제는 건륭제를 칭찬하며 관심을 기울였고, 늙은 몸이었지만 손자에게 직접 학문과 무예를 가르쳐주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강희제의 마음에 가장 드는 것은 건륭제가 부모님인 옹정제와 적모(嫡母)인 효경헌황후, 친어머니 효성헌황후에게 꼬박꼬박 예를 다하며 문안을 올리는 것이었다. 유교 가르침에 감화되고 가족간의 정을 소중하게 여긴 강희제에게는 대단히 좋게 보일 수밖에 없는 광경.
이렇게 수많은 손자들 중에서도 건륭제를 유독 아꼈던 강희제는 죽기 직전, 황위를 물려준 옹정제에게 건륭제를 후임으로 삼으라고 명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건륭제 역시 자신에게 후계자의 가능성을 열어 준 사람은 강희제였기에 일평생 동안 강희제를 대단히 존경했다. 강희제의 초상화를 보면서 자신을 다잡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재위 60년에 상황으로 물러난 이유도 강희제의 재위 기간보다 더 오래 통치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에 따라 이후 아버지 옹정제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건륭제는 차기 황제 1순위가 되어 후계자는 이미 정해졌다는 소리가 공공연히 떠돌 정도였다. 옹정제의 아들은 총 10명이었지만 그들 중에 생존한 아들은 고작 4명으로, 장성한 아들은 셋째 홍시, 넷째 홍력, 다섯째 홍주 셋 뿐이였고 나머지 한 명은 옹정제의 재위 중 태어난 젖먹이였던 10황자 홍염 뿐이였다. 또한 다른 황자들의 생모는 한인 출신이었지만 홍력만이 유일하게 만주족 생모 소생의 황자였다.
실제로 건륭제는 아버지 옹정제의 가벼운 일을 도우며 정치에 관여했다. 강희제 때의 황태자 사건과 만주족의 전통 등의 요인으로 청나라는 다른 왕조들과 달리 차기 황제를 미리 정하지 않았지만 당시 3황자 경패륵 홍시는 패륵에 불과했는데 넷째 홍력만 혼자 군왕도 뛰어넘어 보친왕에 책봉되는 등, 거의 대놓고 옹정제가 홍력을 황태자이자 후계자로 대우하였고 신하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이렇듯 홍력의 위치가 공고해 보이자 3황자 홍시는 판세를 바꿔보려고도 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옹정제의 눈 밖에 나는 결과밖에 되질 못했다. 결국엔 셋째 형 홍시는 사사당하고 황실 선원보에서 제명된다. 다섯째 홍주는 일찍부터 정치와 멀리하고 형에게 고개를 숙였기 때문에 건륭제 즉위 후에도 상당히 예우받았다. 옹정제는 워커 홀릭이었던 터라 재위 10년차에 건강이 악화되어 앓아눕게되자 홍력은 실질적으로 황태자나 다름없는 감국(監國)에 임명되며 사실상 옹정제의 업무를 상당 부분 떠맡았다. 3년 후 옹정제가 붕어하자 후계자는 당연하게도 홍력의 차지가 되었다. 그렇게 건륭제는 25세의 나이로 청나라의 황제에 즉위한다.
건륭제는 황제가 된 후 그가 존경하는 할아버지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건륭제는 여러 차례의 원정을 벌였는데 대부분은 강희제처럼 최고 지휘관으로 활약하기보다는 전쟁은 장군들에게 맡겨놓고 자신은 독려를 하는 편이었다. 이때 건륭제의 부대는 팔기군 대신 만주족과 한족이 합쳐진 군대였는데, 준가르 정벌군 총사령관이었던 보르지기트 반디(Borjigit Bandi, 博爾濟吉特 班第), 준가르 및 동투르키스탄 정벌에서 활약한 우야 자오후이(Uya Jaohui, 烏雅 兆惠), 아구이(Agui, 阿桂), 건륭제의 처남인 푸차 푸헝(Fuca Fuheng, 富察 傅恒), 그의 아들인 푸차 푸캉간(Fuca Fukanggan, 富察 福康安) 등이 활약하였다.
건륭제는 옹정제 때 탄압받은 숙부들을 사면하였는데, 종친들이 정치에 끼어드는 것만은 막았다.
그 다음에는 보갑제(保甲制)와 이갑제(里甲制)라는 제도를 뜯어 고쳤다. 보갑제는 100 가구를 모아서 갑(甲), 그리고 그 10개의 갑을 모아 보(保)로 나누어 같은 공동체에서 사는 사람끼리 서로 질서와 치안의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였고, 이갑제는 보와 갑에서 세금을 인구에 따라 모아서 재정을 충당하는 제도였다.
본래 북송의 왕안석이 신법으로 쓰려다가 수포로 돌아간 이후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이후 강희제가 부분적으로 시행하다가 옹정제 때에 들면서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보·갑의 장들은 자신이 맡은 구역의 백성들의 호적을 조사하고 그 기록을 관아에 바쳤고 수상한 촌민들을 감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방 관리들이 인구와 세수를 일부러 줄여서 보고하고 뒤로는 세금을 무겁게 매겨 막대한 사익을 취하자, 1740년(건륭 5년), 건륭제는 정확한 인구 조사를 위해 각지의 보·갑장에게 가구당 세는 사람의 수를 군역을 지는 장정이 아닌, 집안의 여자들까지 모두 다 계산하였는데 계산한 백성들의 수는 나이, 성별과 이름을 패에다 적어 각자의 집 문 앞에 걸어놓고 매년 인구 조사를 하여 북경의 군기처와 호부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건륭제는 청나라의 총 인구 수를 보다 정확히 알게 되었고 지방 관리들이 인구와 세수를 일부러 줄여서 보고하여 사익을 취하려 한 경우를 차단하여 또한 이를 방치하거나 세금을 빼돌린 총독이나 순무에게도 중징계를 내려 특히 이 중 그 행태가 심한 자는 참수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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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의 남순
강희제처럼 건륭제도 남순을 자주했다. 이때 건륭제가 한번 움직이면 기본으로 황제를 보좌하는 황자와 공주, 대신, 환관, 시녀, 요리사, 호위병 등 3,000여 명이 움직였다. 남순을 할때 건륭제는 유명한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풍류를 즐기는것을 좋아했다. 특히 시와 그림을 좋아하며 관심이 많았기에 이때 유명한 시인과 화가들도 초청해서 같이 식사하고 차를 마시면서 시와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강희제는 남순은 자주 했어도 예산을 철저하게 짜서 백성들의 부담은 없었는데, 건륭제는 그런 것 없이 그냥 신나게 놀고 없으면 다시 돈을 여기저기서 마련해서 계속 움직이는 식이라 백성들의 부담이 극심했다고 한다. 때문에 보다 못한 신하들이 남순을 자제하라고 간언했고 이 간언에 화가 난 건륭제가 신하들한테 화를 내는 등 남순을 하는 일로 갈등했다.
그러고 훗날 사서 등을 편찬할 때 자신의 남순을 강희제의 남순, 사냥 원정과 비교하며 정당화하는 한편 부정적인 의견은 없애는 엄청난 정치 공작을 펼쳤는데, 이걸 보면 자신도 이 행위가 정상적이거나 당연한 합리적인 활동이 아니라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부정적인 결과들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4.2. 십전 무공
건륭제는 60년의 치세 동안 총 10회의 원정을 수행했다 하여 자신의 별호를 십전노인(十全老人)으로 자칭하였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사실 몇 개의 원정은 하나의 원정을 10이라는 숫자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쪼갠 것에 가깝다. 이 10회의 원정은 위구르나 진촨(金川) 유역처럼 현재의 중국 영토인 곳으로 감행한 것도 있으며, 베트남이나 미얀마처럼 외국에 감행한 것도 있었다. 어쨌든 총 10회의 원정으로 건륭제는 원나라 다음으로 중국 사상 최대의 판도를 이룩하였으며, 그 영토는 현재의 캐나다보다 큰 약 1,300만㎢에 달한다. 이 시기 청나라의 판도 하에 있던 인구는 무려 3억을 넘었다.
이 당시 건륭제의 최대 업적은 바로 준가르의 복속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강희제, 옹정제 때부터 이어져 온 청나라 최대의 위협 세력인 준가르를 굴복시키는 데 성공함과 동시에 청나라의 국경을 신장 일대까지 넓혔고, 또한 이후 대금천과 소금천을 완전히 굴복시키는데 성공하고 네팔을 정벌하여 티베트 서부 국경을 안정시킴으로써 청나라와 그 뒤를 잇는 현대 중국의 서부 국경을 확정한 것은 건륭제의 온전한 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만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하였다. 이 신강의 면적은 한반도의 10배 가까이 되며, 만주와 맞먹는다. 현재 중국 영토의 1/6을 늘려놨다. 하지만 이 지역은 후에 이슬람교도의 난이 벌어지기도 하며, 100년 후에는 야쿱 벡이라는 중앙 아시아의 모험가가 침입해서 난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19세기 안 그래도 흔들리는 청나라의 혼란을 더 증폭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건륭제의 정복 전쟁이 반드시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었는데, 남쪽의 버마와 베트남(여왕조) 정벌에 있어서는 막대한 물자와 인력을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형과 전염병 등의 문제로 인하여 완혜에게 패하고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형식적인 복속을 얻어내는 데 그쳤다. 게다가 이러한 정복 전쟁을 위해 건륭제는 막대한 군비를 소모하여 이는 청나라의 국가 재정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4.3.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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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태상황제인 건륭제
건륭제의 치세 후기에 총신 니오후루 허션이 막대한 축재를 감행하였고 이를 건륭제가 눈감아 주어 순식간에 청나라의 관료 사회는 부패하게 되었다. 허션이 해먹은 게 당시 청나라 20년치 예산에 맞먹는다고. 심지어 건륭제 본인도 말년에 생일 선물로 금불상 3만 개를 받는 등 재산을 모으는 데 골몰했다.
관료들의 부정부패는 곧바로 민생에 나쁜 영향을 주어서 건륭제가 퇴위한 이듬해인 1796년에는 한족 백련교도의 난이 발생하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쇠퇴의 조짐은 보다 일찍부터 있었는데, 이미 1774년 백련교도 왕륜(王倫)이 난을 일으키다 진압된 바가 있고, 1786년에도 대만의 임상문(林爽文)이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건륭제 말년의 문제들은 가경제와 도광제 대에 고스란히 짐이 된다.
건륭제는 태상황으로 퇴위하고도 권력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고 국정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지 않고 정무를 처리하고 조정에 자주 참석했다. 그러나 말년에 가면 건륭제의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기 시작했고 피접을 여러번이나 갔음에도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1799년 2월 7일에 건륭제는 자금성의 양심전에서 세상을 떠난다. 사후 그의 장례를 아들 가경제가 국상으로 성대하게 치루며 시신을 청동릉에 매장했다.
여담으로 건륭제는 89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이는 중국 역대 황제들 중에서 가장 장수한 축에 속한다. 역대 중국의 황제들은 혹독한 업무로 인한 과로나 스트레스 혹은 궁중 생활에서 비롯된 비만과 질병 등의 문제 때문에 의외로 수명이 길지 못해서 40~50세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에 반해 건륭제는 하루에 식사를 두 끼만 먹었으며 콩과 나물류 등의 채식과 생선을 위주로 한 소박한 음식과 제비집 요리를 즐기는 등, 극히 절제된 식습관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이 장수의 한 비결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식욕 대신 금(金)욕을 택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일중독자였던 조부와 아버지에 비하여서 여유를 가지고 놀았던 것도 장수의 비결이지 않을까 한다. 왜냐면 조부와 아버지, 특히 아버지 옹정제의 행적은 그야말로 과로사하기 딱 좋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옹정제는 과로사했다. 특히 명나라 주원장이 만든 권력 제도에서 황제의 일은 사실 제대로 한다면 쉴 시간이 없어야 정상이다.
시를 굉장히 좋아했고, 평생 동안 4만 자가 넘는 시를 썼다고 한다. 남아있는 시가 아주 많지는 않지만 하도 많이 쓰다보니 책 몇권을 채울 정도로 남아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시는 문학성의 측면으로 봤을때 그닥 좋은 평가는 못 받는다고... 오죽하면 조조의 시는 몇십 편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하나하나가 오늘날까지 입에 오르내리는 명문인데, 건륭제의 시는 많이 남아 있지만 그저 도서관 구석에나 꽂혀있을 뿐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 안습 아무튼 정말 좋아한 것은 맞아서 대신들에게도 이런 시를 선물로 줄 정도였으며, 평소에도 유명한 시인을 초청하기를 좋아했다.
만주족의 입장에서 보자면 만주족의 한화(漢化)를 걱정한 황제이기도 하다. 강희제 이후, 궁궐 내에도 중국어가 스며들게 되자 건륭제는 이 때문에 만주 귀족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였다. 그래서 어느 날 건륭제는 너무 많은 중국어가 만주어 상주문에 스며들었다고 불평한 후, 대학사 나친을 우두머리로 새로운 만주어 단어를 만들 테스크 포스팀을 구성했다. 이들의 활약 덕택에 중국어에서 파생된 단어들이 만주어에서 대거 사라졌는데, 대신 1,700개가 넘는 새로운 만주어 단어가 생겼다고 한다.
한편, 건륭제는 막대한 문화 사업을 단행하여, 중국은 물론 그때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백과사전 사업을 완수하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사고전서". 이 사업의 동기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는데, 그중 청나라가 진행한 '문자의 옥(文字之獄)'의 일환으로써, 전국의 책을 검열하여 백과사전에 등재하면서 청에 비판적인 서적을 삭제하고 수정하며 폐기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도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건륭제 본인은 성리학에 매우 깊이 빠져든 인물이었고, 그래서 신하들한테 충성을 강조하면서 과거 명나라의 신하였다가 청나라한테 항복했던 전겸익(錢謙益)을 가리켜 "글재주는 있었지만 지조가 없었으니 입에 담을 가치조차 없다. 그가 쓴 책은 모조리 불태워야 한다."라고 혹평하면서 이신전(貳臣傳)이라는 문헌을 만들어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에 항복했던 신하들을 비난하였다.
4.5. 다른 나라들과의 외교
건륭제의 재위기는 당시 조선의 영조(재위 1724~1776년)와 정조(재위 1776~1800년)의 시기와 거의 일치하며 청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라서 그런지 청을 배경으로 한 중국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한다.
참고로 같은 시기 일본 에도 막부(1603년∼1867년 / 1868년)의 쇼군은 8대 요시무네(吉宗, 재임 1716년∼1745년), 9대 이에시게(家重, 재임 1745년 - 1760년), 10대 이에하루(家治, 재임 1760년 - 1786년), 11대 이에나리(家齊, 재임 1786년 - 1837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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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 말년인 1793년, 영국의 대사 조지 매카트니(George Macartney)가 정식으로 교역을 하자고 청한 일이 있었다. 이때 청나라 신료들은 매카트니에게 청나라식 삼배 구고두예를 갖출 것을 요구했으나 매카트니는 거부했는데 동양권의 조공 문화에 익숙치 않은 서양인에게 행하라고 했으니 온전히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던 것. 건륭제의 뒤편에 영국 왕 조지 3세의 초상화를 걸어놓는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했으나, 결국 매카트니는 한쪽 무릎만 꿇었다고 한다. 이 경우 매카트니가 마냥 고집을 부렸다고 보기만도 어려운게, 서양에서는 이런 방식이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것이기도 하고, 조공국의 방문으로 여긴 건륭제와 대등한 관계의 접촉으로 여긴 영국의 입장 차이가 근본적인 원인이었기 때문에 양보하기 어려운 순서이기도 했다. 여하튼 건륭제가 관대하게 매카트니의 주장을 받아줘서 매카트니가 한쪽 무릎만 꿇는 것으로 예를 표할 수 있었다. 다만 다른 기록으론 건륭제의 단호한 요구대로 결국 절을 하고 말았다는 기록도 있다.
하여튼 이때 매카트니는 건륭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각종 모직물과 기기묘묘한 완구 및 마차, 열기구와 지도 따위를 가져왔는데 하필이면 마차의 마부가 황제 바로 앞에 앉게 되는 식으로 설계가 된 바람에 찍히고 말았다.
"地大物博: 지대물박."
조잡한 장난감을 가져와서 별 짓을 다 하는구나. 우리 청나라는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걸 다 가지고 있다.
라는 식으로 대답하며 사절단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또한 매카트니는 당시 청의 공행 무역을 폐지하고 자유 무역, 교역량 증대, 대사관 설치, 대사의 상주를 허용, 덤으로 일부 영토를 할양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엄밀하게는 매카트니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조지 3세의 친서에 들어있던 내용으로 작은 섬을 할양해서 영국인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건륭제는 기분 나빠하며 "청나라는 모든 것이 다 있는 천자의 나라다. 너희 오랑캐들이 우리 청나라에서 나는 차, 비단, 도자기 수입도 감사하지 못할 망정 뭐가 어째? 안돼." 라는 식으로 대답하며 거부했다. 게다가 자유 무역은 그렇다 쳐도 영토 할양은 중화식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거기에 타협을 했다곤 해도 예법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서 건륭제가 불쾌감을 느꼈을테니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던 셈.
매카트니와 영국 사절단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고 건륭제가 강제귀국을 명령해서 하는 수 없이 영국으로 돌아간다.
또한 건륭제는 영국 국왕인 조지 3세에게 자신의 친서를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구 반대편까지 미치는 나의 은덕에 감사함을 느끼고 예의를 갖추어라.
그러나, 사실 이미 청의 기술적 수준은 영국 등 서양에 꽤나 많이 뒤쳐지고 있던 상태였다. 일례로, 당시 메카트니와 영국 사절단이 성냥으로 불붙여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성냥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청의 관리들이 놀라서 '오랑캐가 요술을 부리고 있다'라고 할 정도였다. 결국 반세기쯤 뒤에 아편전쟁이 발발했고, 한낱 서양 오랑캐라고 무시했지만 사실은 당시 세계를 주름잡고 있었던 대영제국에게 그야말로 개박살이 나게 된다.
건륭제의 치세는 동아시아가 서구에 패배했다는 것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아편전쟁 직전의 시대이기 때문에 건륭제 시대에 근대화를 시작했다면 이후 시대에서 국력의 차이를 무마할 수 있었을지, 아니면 이미 100여 년 전을 전후하여 유럽에서 일어난 과학혁명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했는지에 대한 논의가 있기도 하다.
한편, 조선과 다른 쪽으로 연관이 있기도 한데,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조선에서 청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런데 이때 조선 사신단에 끼어간 인물이 바로 박지원. 즉, 열하일기가 바로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저서였던 것이다.
첫 번째 황후인 효현순황후 푸차씨(孝賢純皇后 富察氏)는 상당한 미인이었으며 건륭제도 그녀를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효현순황후는 성정이 어질고 소박했으며 태후에게도 효성스러웠고 남편을 지극히 사랑했다. 한번은 건륭제가 크게 앓은 적이 있는데 쾌유한 뒤에도 어의는 "반드시 100일은 푹 쉬어야만 원기를 완전히 회복할 수 있습니다."라고 당부했다. 황후는 매일 밤 건륭제의 침실 밖에 거주하면서 정성을 다해 100일 동안 시중을 든 뒤에야 비로소 합방했다.
하지만 효현순황후는 건륭 13년에 지방 순행 중 더저우 (德州)에서 죽었는데 그녀가 죽은 이후 그 지역에는 건륭제는 일생동안 단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건륭제의 개혁 성향이 이즈음부터 크게 꺾이고 본인은 천자 놀음에 더 신경 쓰면서 제국은 슬슬 쇠퇴 일로를 걷게 된다.
그런데 건륭제는 이 황후의 남동생인 푸차 푸헝(富察 傅恒)의 부인과 불륜 관계에 있었다고 하는 야사가 있다.
계황후 호이파나라씨(繼皇后 輝発羅拉氏)
1718년 출생∼1766년 사망
황12자 다라패륵 영기(永璂) 1752년~1777년
황5녀 1753년~1753년
황13자 영경(永璟) 1755년~1757년
첫 번째 황후인 효현순황후 푸차씨(孝賢純皇后 富察氏)는 상당한 미인이었으며 건륭제도 그녀를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효현순황후는 성정이 어질고 소박했으며 태후에게도 효성스러웠고 남편을 지극히 사랑했다. 한번은 건륭제가 크게 앓은 적이 있는데 쾌유한 뒤에도 어의는 "반드시 100일은 푹 쉬어야만 원기를 완전히 회복할 수 있습니다."라고 당부했다. 황후는 매일 밤 건륭제의 침실 밖에 거주하면서 정성을 다해 100일 동안 시중을 든 뒤에야 비로소 합방했다.
하지만 효현순황후는 건륭 13년에 지방 순행 중 더저우 (德州)에서 죽었는데 그녀가 죽은 이후 그 지역에는 건륭제는 일생동안 단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건륭제의 개혁 성향이 이즈음부터 크게 꺾이고 본인은 천자 놀음에 더 신경 쓰면서 제국은 슬슬 쇠퇴 일로를 걷게 된다.
그런데 건륭제는 이 황후의 남동생인 푸차 푸헝(富察 傅恒)의 부인과 불륜 관계에 있었다고 하는 야사가 있다.
건륭제가 보친왕이던 시절 왕부에 측복진(첩)으로 들어왔다. 건륭제 즉위 후 ‘우아할 한’의 봉호를 받고 한비(嫻妃)에 봉해졌으며, 후에 귀비(嫻貴妃)로 올랐다. 첫 황후의 죽음 이후 황귀비(嫻皇貴妃)에 봉해져 황후 대리로 육궁을 통솔했다.
황후가 된 호이파나라씨는 일가가 만군 팔기 상삼기인 정황기로 승격되었으며, 건륭 사이에서 아이를 연이어 셋이나 낳으며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건륭 30년 남순 중 미스터리하게 북경으로 돌려 보내지고, 총애를 잃은 채 냉대를 받다가 죽게 된다. 심지어는 죽고 난 후의 장례 절차마저도 황귀비의 예에 따라 치르도록 건륭제가 명령하였으며, 건륭제는 슬퍼하지도 않았고 그녀의 친자인 황12자만을 보내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그녀가 갑작스럽게 총애를 잃은 이유는 아직도 미궁에 빠져있으며, 여러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뒤끝이 장난아니던 건륭제는 계황후가 그려진 초상화를 모두 태우거나 얼굴을 고쳐 그렸으며, 계황후에 대한 처사가 부당하다는 대신들 역시 파면되거나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유일하게 장성한 황12자 영기 역시 죽고 나서야 동생 가경제에 의해 패륵으로 추존되었다고 한다.
건륭제가 보친왕이던 시절 왕부에 측복진(첩)으로 들어왔다. 건륭제 즉위 후 ‘우아할 한’의 봉호를 받고 한비(嫻妃)에 봉해졌으며, 후에 귀비(嫻貴妃)로 올랐다. 첫 황후의 죽음 이후 황귀비(嫻皇貴妃)에 봉해져 황후 대리로 육궁을 통솔했다.
황후가 된 호이파나라씨는 일가가 만군 팔기 상삼기인 정황기로 승격되었으며, 건륭 사이에서 아이를 연이어 셋이나 낳으며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건륭 30년 남순 중 미스터리하게 북경으로 돌려 보내지고, 총애를 잃은 채 냉대를 받다가 죽게 된다. 심지어는 죽고 난 후의 장례 절차마저도 황귀비의 예에 따라 치르도록 건륭제가 명령하였으며, 건륭제는 슬퍼하지도 않았고 그녀의 친자인 황12자만을 보내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그녀가 갑작스럽게 총애를 잃은 이유는 아직도 미궁에 빠져있으며, 여러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뒤끝이 장난아니던 건륭제는 계황후가 그려진 초상화를 모두 태우거나 얼굴을 고쳐 그렸으며, 계황후에 대한 처사가 부당하다는 대신들 역시 파면되거나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유일하게 장성한 황12자 영기 역시 죽고 나서야 동생 가경제에 의해 패륵으로 추존되었다고 한다.
한족 출신인 영의황귀비(令懿皇貴妃) 위씨를 총애하였다. 청나라는 기인 중에서 후궁을 뽑고 상삼기 포의 중에서 궁녀를 뽑는데 위씨는 정황기 포의 출신이라 처음에는 궁녀였을 것으로 본다. 건륭의 눈에 띄어 건륭 10년 귀인으로 봉해졌다. 같은 해 ‘하여금 영(令)’의 봉호를 받고 영빈으로 오르고 4년 뒤에 다시 영비로 오르는 역대급 초고속 승진을 했다. 황7녀, 황14자를 낳은 후 건륭 24년에 귀비에 봉해졌다. 계황후가 유폐된 후 황귀비(令皇貴妃)로 승격되어 육궁을 다스렸다. 황후가 될 수 없었던 한족으로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다.
총애가 얼마나 대단했냐면 황7녀 고륜화정공주를 출산한 이후 계속 임신 - 출산 - 산후조리를 반복하며 거의 연년생으로 아이를 출산해 역대 청나라 후비를 통틀어 제일 아이가 많다. 건륭 치세 후반기에 낳은 아이들은 거의 효의순황후 사이에서 본 자식들이다. 이렇듯 임신과 출산만 반복했으니 몸이 멀쩡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49세라는 나이로 건륭제보다 먼저 사망한다. 그녀의 아들인 황15자 영염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가경제가 된다. 그녀는 사후 남편인 건륭제가 직접 효의순황후(孝儀純皇后)로 추증해주었으며, 성씨에 ~가(佳)가 붙여져 일가가 만주족 팔기에 편입된다.
혜현황귀비 고기야씨(慧賢皇貴妃 高佳氏)
1711년 출생∼1745년 사망
고빈의 딸로 일찍이 보친왕부의 격격으로 들어와 건륭제의 사랑을 받았다. 건륭제는 즉위하면서 고씨를 첩의 작위 중 제일 높은 등급인 귀비(貴妃)로 봉했고 그의 가족들도 만주족으로 편입되어 만주 팔기의 일원이 되었다. 이는 고씨가 측복진으로 수년간이나 건륭제와 함께했다는 명분 외에도, 한비보다 승진이 빠른것으로 보아 꽤 아꼈다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따로 봉호를 주지는 않았는데, 이는 만주족이던 황후 푸차씨와 격차를 늘리고, 역시 만주족이지만 지위는 고씨보다 낮던 한비(嫻妃) 호이포나라씨와는 격차를 줄이려는 의도였다. 고씨는 명문가의 숙녀로 오랜 시간 건륭제를 성심성의껏 모셨지만, 몸이 약해 34세의 젊은 나이로 병을 얻어 일찍 사망했다. 건륭제는 그가 죽기 직전에 황귀비로 특진시켜 주었다. 몸이 약해 일찍 죽었기에 자식은 없다. 고귀비 사후 권세를 누리던 고씨 일가는 몰락했다. 건륭의 부황인 옹정제의 총비였던 연황귀비(돈숙황귀비 연씨)와 매우 흡사한 인생을 살았다. 사후 집안이 몰락했다는 것도 비슷하다.
순혜황귀비 소씨(純惠皇貴妃 蘇氏)
1713년 출생∼1760년 사망
황3자 순군왕 영장(永璋) 1735년~1760년
황6자 화석질장친왕 영용(永瑢) 1743년~1790년
황4녀 화석화가공주 1745년~1767년
보친왕부의 격격으로 들어와 즉위 후 도탑고 순수하다는 뜻의 순(純)의 봉호를 받고 순빈(純嬪)에 책봉되었다. 한족 출신에 한미하기 그지없는 집안이었으나 건륭제가 사랑한 사람 중 하나였다. 건륭제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고, 귀비(純貴妃)까지 올라갔다. 병을 얻어 죽기 직전 건륭제가 직접 황귀비로 특진시켰다.
숙가황귀비 긴기야씨(淑嘉皇貴妃 金佳氏)
1711년 출생∼1755년 사망
황4자 화석이단친왕 영성(永珹) 1739년~1777년
황8자 화석의신친왕 영선(永璇) 1746년~1832년
황9자 영유(永瑜) 1748년~1749년
황11자 화석성철친왕 영성(永瑆) 1752년~1823년
숙가황귀비의 조상은 조선인 출신으로 정묘호란 당시 청에 잡혀간 김신다리 형제로 숙가황귀비 김씨는 이 사람의 후손이다. 신다리 형제는 병자호란 당시 통역 일을 하며 청나라에 공을 세워 정황기의 포의 니루 중 하나인 ‘고려니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숙가황귀비의 증조할머니는 순치제의 유모였고, 그들의 후손들은 정1품, 정2품 관원을 배출했다. 특히 조선 혈통이다보니 조선 사신들과 로비를 주고받아 조선왕조실록에서 김상명, 김간 등의 이름이 심심찮게 언급되기도 한다. 숙가황귀비는 보친왕부의 격격으로 들어와 즉위 후 귀인(貴人) 작위를 받았으며, 후에 아름답다는 뜻을 가진 가(嘉)의 봉호를 받고 가귀인(嘉貴人)의 작위를 받았다. 빈(嘉嬪), 비(嘉妃)를 거쳐서 귀비(嘉貴妃)까지 올라갔다. 매우 아름다워 건륭제가 사랑한 이 중 하나였고 황태후와의 관계도 좋았다. 건륭제와의 사이에서 아들만 4명을 줄줄이 낳으며 자식복도 많았고, 대부분 장성해 황족 최고 작위인 친왕(親王)을 부여받았으며 그 중 황11자 영성은 건륭제의 후계자 후보에도 들었으나 영성이 무예를 싫어해서 동생인 황15자 영염이 후계자가 된다. 가귀비는 죽은 후 곧바로 숭경황태후에 의해 황귀비로 추증되었다. 건륭제는 숙가황귀비를 비롯한 김씨 일가를 모두 정황기 만주 기분 니루로 편입시켜 신분을 높여 주었고, 훗날 가경제가 만주 성씨인 '~가(佳)'가 붙은 긴기야씨(金佳氏)로 사성하며 긴기야씨로 기록되었다.
유귀비 커리예트씨(愉貴妃 珂里葉特氏)
1714년 출생∼1792년
건륭제의 보기 드문 몽골 출신 후궁.
황5자 화석영순친왕 영기(永琪) 1741년~1766년
커리예트 씨가 낳은 영기는 매우 총명하고 출중했으나 장수한 자기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다. 황제의 딸에 나왔던 오왕자 영기가 바로 이 사람이다. 거란, 여진, 만주어 연구로 명성이 높은 언어학자 아이신기오로 울히춘 부녀가 영기의 후손이다.
완귀비 진씨(婉貴妃 陳氏)
1716년 출생∼1807년 사망
건륭제가 보친왕이던 시절부터 격격으로 들어왔다. 보친왕부 시절부터 건륭제와 함께한 후비들 가운데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건륭제가 죽은 후까지 살아 태비가 된 인물. 다만 총애는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빈(嬪), 비(妃)로 올라갈 때도 굉장히 느리게 올라갔다. 십몇 년에 한 번씩 가끔 생각날 때마다 올려준 수준. 효의황후 워이기야씨나 용비 화탁씨는 아이도 안 낳고 한방에 비까지 올라가고 일찍 죽은 걸 보면 가늘고 길게 산 것이 뭔지 알 수 있다. 후임 가경제는 그가 건륭제의 잠저 시절부터 함께한 모비(母妃)임을 존중해 귀비(貴妃)로 존숭했다. 그래서 죽었을 때 작위는 완귀태비(婉貴太妃).
용비 호자씨(容妃 和卓氏), 일명 향비
1734년 출생∼1788년 사망
이야기에 따르면 건륭제가 위구르의 소화곽탁집점을 쳐 그 전리품으로 데려온 여성이고, 소화곽탁집점의 딸 혹은 첩이었다고 한다. 출생이 출생인지라 많은 전설이 내려오는 여성이다. 외모는 아주 아름다웠고 암내페로몬 내음이 강하게 났기 때문에 건륭제는 그녀를 아주 깊게 사랑했다고 한다. 건륭제는 출신과 문화가 달랐던 용비 화탁씨를 위해 자금성 밖 북경 황성 중난하이에 보월루를 지어 궁에서도 이슬람식 생활을 영유할 수 있도록 특별히 보장해주고 보월루에 갈 때마다 그녀와 강제로 사랑을 나누었다고 한다(...) 또한 용비에게 회족 요리사를 붙여주었으며 보월루에서 매일 내려다 볼 수 있는 거리에 회족거리를 조성해 그녀가 고향의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도록 해주었다. 건륭제는 위구르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의사소통은 문제 없이 이뤄졌다고 한다.
돈비 왕씨(惇妃 汪氏)
1746년 출생∼1806년 사망
황10녀 고륜화효공주 1775년~1823년
65세 때 돈비 왕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늦둥이 딸을 특별히 총애했다고 한다. 자연히 어미였던 왕씨도 총애를 많이 받았다. 화효 공주는 건륭제의 외모며 성격, 재능을 유난히 닮아 여러 면에서 출중했던지라 음? 건륭제는 그녀를 보며 '네가 아들이었다면 너를 태자로 삼았을 텐데...' 라고 생각하곤 했다고. 딸을 각별히 사랑한 건륭제는 그녀가 후궁 소생의 공주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고륜 공주로 봉해주었으며, 미행이나 사냥에도 그녀를 동반하여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또 본인이 각별히 총애했던 권신이자 상상을 초월하는 거부(巨富)였던 허션의 장남 니오후루 펑션인더(ᠨᡳᠣᡥᡠᡵᡠ ᡶᡝᠨᡤᡧᡝᠨᠶᡝᠨᡩᡝ, Niohuru Fengšeninde, 紐祜祿 豊紳殷德, 뉴호록 풍신은덕)와 일찍이 정혼시켰고, 1789년 11월 17일에 결혼시켰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이 남았는데, 그녀의 혼인 당시 융숭한 총애와 사치스러운 혼수는 저번 공주의 혼사에 비해 10배나 되었고, 공주의 집으로 실어 보내는 물건들은 대충 어림잡아 봐도 수백만 금이 넘었으며, 그녀가 시가로 가던 날에는 수천 수백 명에 달하는 고관들이 참석하여 작별을 고하는 절을 했다고 한다.
건륭제의 치세는 할아버지 강희제, 아버지 옹정제와 함께 강건성세라고 불리며 청나라 최대 전성기로 여겨졌고, 음습한 느낌에 내치에 주력한 아버지 옹정제의 치세와 달리 건륭제는 정복 전쟁이라는 화려한 군공도 세웠기에 오랜 시간 고평가를 받았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학자들에겐 건륭제 치세가 '기아의 성세', '속빈 강정'이라는 평가 또한 받고 있다. 대충 요약하면, 옹정제 때까지 쌓아놓은 국부가 이후 건륭제의 무리한 원정으로 인한 군사력과 재정 소모, 관료 사회의 부정부패와 축재 진행 등으로 건륭제 말기엔 이미 청나라 쇠퇴의 전주곡을 울렸다는 것이 요지. 즉, 속으로 곪아가고 있음은 모른 채 겉으로의 화려함이 과시되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여담으로 말년의 '암군' 건륭제는 신하들과 상인, 거부들로부터 금전을 끌어모으는 데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전체적인 치세를 보면, 어린 시절부터 존경하고 선망하던 황제이자 할아버지였던 강희제를 본받기 위해 부단해 애썼으나, 생각만큼 잘 되진 않았다. 이런 점은 아버지 카를 5세를 질투에 가까울 정도로 존경하여 따르려고 했던 펠리페 2세와 비슷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특히 두명 모두 제국의 전성기를 이어받아 나라를 운영했으나, 무리한 원정 등을 이유로 국가 몰락의 씨앗을 남겨버린 점도 같다.
옹정제 시절부터 강력하게 추진된 황무지 개간 사업에서 아버지와 달리 자신에게 올라오는 보고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해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었다는 말도 있다. 실례로 옹정제는 초기 개간의 성과가 좋자 크게 기뻐했으나, 계속되는 보고에 '이렇게 빨리 개간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의심해 실상을 자세하게 조사했고 그에 따라 엄청난 토지가 서류에만 등록된 개간지임을 밝혀냈다. 이는 관료들이 황무지를 개간지로 등록해 더 많은 세금을 뜯어내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 관료들은 격분한 옹정제에게 갈렸다. 허나 건륭제는 '나만 한 군주가 어디 있어'라며 자뻑에 빠져 살았다.
게다가 할아버지를 본떠 다섯 차례에 걸친 강남 유람을 단행해 그 지역 백성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었는데, 강희제는 국비로 예산을 철저하게 편성하고 그나마도 아껴 사용해 돈을 남겨왔고, 옹정제는 국비 부담을 우려해 아예 유람을 떠나지 않던 것을 생각하면 건륭제는 위 둘과 너무나도 대비되는 모습을 보였다. 운하와 양쯔 강 주변의 백성들에게 유람 비용을 징수하여 주변 지역에서는 거듭되는 세금 징수를 피해 타 지역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인구의 씨가 마를 지경으로 황폐해졌으며, 말년에는 황금 불상을 모으는 취미를 들여 백성들의 삶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들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차려놓은 밥상을 자신의 손으로 차 버린 셈.
또한 서양에서 중국에 대한 평가가 하락하던 것도 건륭제 시기였다. 건륭제의 할아버지였던 강희제는 가톨릭 군주가 아니라는 점만 빼곤 최고의 군주라는 극찬과 함께 엄청난 학구열과 뛰어난 군공과 정치력을 선보여 서양 선교사들을 감격시켰고, 그 영향으로 서양에서 중국학이 널리 유행하게 한 최고의 명군이었다. 건륭제의 아버지였던 옹정제는 가톨릭을 탄압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능력은 있는 군주라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여기에는 가톨릭을 안 믿는데도 윤리 의식이 뛰어난 동방의 대국이 있다더라는 신기함도 한몫 했다. 즉, 가톨릭 따위 없어도 대국이 될 수 있다는 표본으로 동방의 대국인 청나라를 높게 평가한 것이다. 이 때문에 가톨릭에서는 가톨릭의 교리와 유교를 엮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따라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 프랑스의 루이 14세 같은 절대 왕권으로 유명한 왕들조차 중국 문화 애호가임을 자처하며 자신들을 중국 황제로, 주변 귀족들을 중국 문관에 비유하는 등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고평가가 이루어진 시기가 강희 - 옹정 연간의 청나라였다. 이때의 중국 문화 애호를 가리켜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고 부른다.
허나 건륭제 시기부터 청나라의 힘이 예전만큼이 아니라는 평가가 꾸준히 이어지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매카트니의 중국 방문으로 그 이후 중국에 대한 평가는 그저 그런 제국으로 내려앉았으며, 서양에서 일었던 중국에 대한 찬양과 중국 문화에 대한 동경이나 애호도 침체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서양 선교사들이나 유럽 인문학자들의 평가가 강희 - 옹정 시대엔 가톨릭을 믿지 않거나 탄압했지만 뛰어난 무공, 검소함, 국가 체제 정비 등을 이유로 로마 제국 오현제인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등과 비견되는 명군이라는 찬양일색에서 건륭 시대엔 당시 유럽에서 과시욕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막장으로 통하던 루이 14세로 절하된 점이야말로 가장 적나라한 평가가 아닐까 싶을 정도.
특히 매카트니는 "중국 제국은 늙고 미친 일급 군함인데, 유능하고 추호도 방심하지 않는 관리들이 과거 150년 동안 이 배(중국)을 용케 물에 떠 있게 하고 그 외관상의 덩치만으로 이웃들을 위압해왔지만,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갑판에 올라 명령권을 갖기만 하면 배의 규율이나 안전과는 고별이다. 그 배는 아마도 철저히 파괴되어 가라앉지는 않고, 난파선으로 한참 떠돌다 산산조각 나서 해안으로 밀려들 것이다. 그러나 그 배는 이전의 기반 위에서 절대 다시 건설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는데, 즉 강희제 시절만 해도 젊고, 정력적이고, 무력적이고, 학술적이며, 윤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전문적인 관리들이 존재하는 이상적인 국가의 이미지였던 청나라는 건륭제 시절부터 침몰하는 배와 병자의 이미지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 매카트니가 사적으로 건륭제에게 감정이 안 좋은 점을 고려해도 신랄한 평가가 아닐 수 없다.
당장 건륭제 때 파견된 조선 사신들이 남긴 기록만 봐도 당시 "황제에 대한 비방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다.", "예전보다 백성들의 삶이 힘들어진 것 같다."고 평한 걸로 봐서는 인심도 그다지 얻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연행사로 다녀왔던 실학자 홍대용은 강희제는 실로 영걸한 황제라면서 정조와 노론들 앞에서 칭송할 정도였지만, 원명원이 사치스러웠던 점을 들어 건륭제는 깠다.
사실 건륭제의 치세가 매우 중요한 시기였던 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당시 청나라의 국력이 가장 왕성하긴 했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인구 폭발이 그것이다. 실제로 강희 - 옹정 시대에 청나라의 치세가 안정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중국의 인구는 이 시기 이전까지는 주기적으로 증감을 되풀이 하면서 1억 5,000만명 정도에서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 100년 남짓한 시기에 세 배로 늘어난다. 이 때문에 이전 왕조에선 인구가 줄어들었거나 사람이 거주하지 않던 곳에까지도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당연히 인구가 증가하면 식량 수요가 증가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이 때문에 옹정제 때부터 이미 황무지 개간 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런 폭발적인 인구 증가라는 추세에도 청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은 바로 은의 유입이었다. 건륭제 초기에 잠시 은의 유입량이 주춤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후 다시 회복세를 드러냈다. 즉 건륭제 시기는 세계의 은 대부분이 청으로 몰려들었을 정도로 청의 입장에선 엄청난 호황기였다. 이 때문에 인구 증가에도 불구하고 청의 경제가 버티고 국가 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건륭제가 이런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면 저런 사치를 부렸어야 했던 건지는 의문이다. 은이 쏟아져 들어오니 무슨 상관이랴 싶었겠지만. 결국 식량 생산량의 증가는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청에게 고도로 유리한 무역 체제로 인한 대호황에 안주하다가 건륭제 이후로 청이 막장 테크를 타게 된 걸 보면 건륭제가 적어도 할아버지 강희제나 아버지 옹정제 수준의 전망만 있었어도 이 중대한 시기를 그냥 넘기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건륭제 입장에서도 할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게, 옹정제 시기에 혹사당한 신하들의 피로는 상당한 수준이었다는걸 감안 해야 한다. 즉, 건륭제가 재위 초창기에 아무 생각 없이 신하들을 방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옹정제가 태묘에 같이 가자며 신임했던 장정옥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관료집단의 이러한 누적된 피로는 건륭제 시기의 전망을 제대로 못보게 된 원인이 된다. 게다가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전망"을 본다는 것도 퇴위나 사망당시의 "나이"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치세 말년의 강희제는 69세이고 옹정제는 58세에 불과한데 비해 건륭제는 85세이다. 게다가 강희제의 사망 당시 나이와 건륭제가 본격적으로 흑화될 때의 나이는 거의 비슷하다.
이렇듯 건륭제의 치세를 살펴보면 대외적으로는 가장 크고 화려한 시기였으나, 속으로는 곪고 곪아가는 시대였다. 물론 위와 같은 정확한 분석은 중국의 실정을 잘 알고 있던 일부만이 가능했으며, 중국의 쇠퇴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던 시기는 엄밀히는 도광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탓에 중국은 가경제까지만 하더라도 겉으로는 강국이었고, 이 때문에 역사가 진순신은 그의 저서에서 이 시대를 '가장 행복했던 세대'라고 기술하였다.
한편, 건륭제는 강희제 때부터 청제국의 골치를 썩이던 준가르에 대한 최종 해결책으로 멸족을 결정한 학살자이기도 하다. 준가르의 멸족으로 신장은 위구르 땅이 되는데 근세 이전의 역사 시대 일로 단순히 치부하기엔 지금으로부터 그다지 오래된 일도 아니란 점에서 서글픈 일. 물론 그 준가르도 위구르족 등 피지배민족들을 잔혹하게 수탈하고 더 나아가 학살하기까지 했음을 감안하면 자업자득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만약 준가르가 옛 몽골 제국처럼 위구르족을 우대하거나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청나라처럼 위구르족에게 사람 취급 정도는 하는 나라였다면 역사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여튼 결론적으로는 청장년기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키워준 대업을 기반으로 화려하게 꽃피웠으나 말년에 자신의 허영과 나태로 인해 후손들의 몰락을 초래한 군주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6.1. 문자의 옥 관련
문자의 옥도 비판받을 요소인데 강희제나 옹정제 때도 있기는 했지만 사사정 사건 당시 옹정제가 사사정이 시경에서 인용한 維民所止(유민소지) 문구를 유와 지가 자기 연호인 옹정(雍正)에서 위에 있는 변을 뗀 것이니 자기를 참수할 뜻이 있다는 억지를 써서 죽인 거 외엔 명백히 반청사상에 의거된 사건들이라 이해할만 했지만 문제는 건륭제 시기다.
건륭제 시기에는 문자의 옥이 활발히 일어나서 청나라 기간에 벌어진 문자의 옥 전체 사건의 80%가 건륭제 시기에 일어났다. 하지만 이미 명나라가 망한지 1세기나 지난 시점에서 갑자기 반청운동이 일어났을 리는 없을 텐데 그럼 왜 일어났냐면 사소한 걸로 건륭제가 침소붕대했기 때문이다. 사사정 사건이 더 합리적으로 보일 정도로 별의 별 이유로 문자옥이 마구 벌어졌고 오죽하면 이 시기에 이르자 청나라 학자들은 고서만 죽어라 파고드는 학문인 고증학이 유행했으며 단순한 서신을 주고받는 일조차 꺼렸는데 서신을 주고받으면 문서가 남게 되고 어느 순간에 그 문서들에 적힌 글자 어디가 트집잡혀 죽을지도 모르니 서신을 주고받는 일을 꺼렸고 그나마 조선 사신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는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 대화가 끝난 뒤에는 주고받은 서신을 불태워버리는게 국룰이던 시대였다. 여기에 건륭제 자신도 문자옥을 남발하기를 꺼리지 않아 심지어는 자기를 불쾌하게 만든 사람을 문자옥에 얽어넣어 보복했을 정도다,
문제는 워낙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람들을 때려잡다 보니 사람들의 불만도 올라가고 문자옥 앞에선 한족과 만주족이 평등했기에 한족도 때려잡았지만 만주족도 때려잡았다. 거기다 아부하려는 사람들조차 문자옥에 걸려 죽기도 했으니 건륭제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어떠했을지...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저렇게 서슬퍼런 문자옥이 수십년간 이어지다 보니 그 시간동안 도저히 정상적인 학문 연구나 문학 활동이 이뤄지지 못했다. 가딱하면 죽는 상황에서 어느 누가 학문을 연구하고 문학 활동을 하겠는가? 즉 문자옥으로 인해 건륭제 자신이야 목표인 황권 강화를 이루었을지는 몰라도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반대파는 물론 자기에게 아부하는 사람들, 동족인 만주족들까지 때려잡은 병크에 중국의 학문과 문학의 발전까지 가로막은 어리석은 행위였다.
6.2. 일화
현대에 와서는 학자들에게 비판도 받고 있지만 그래도 강희-옹정 치세를 이어받은 건륭제때 청나라의 국력이 가장 왕성할 때이기도 했고, 풍류를 좋아하고 장난도 치는 친근한 이미지 때문인지 각종 매체에서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건륭제 당시부터 내려오는 민간 야사의 숫자도 엄청난 수준.
전해지는 일화들을 보면 확실히 성격이 재미있는 사람이긴 했다. 특히 밀복을 하고 사람들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을 즐겼는데, 이렇게 백성들 속에서 놀다가 느닷없이 신하들 집으로 찾아가서는 온 식구들이 넙죽 엎드리고 혼비백산하는 꼴을 보는 변태적인 취미가 있었다. 각종 혈기왕성한 젊은 명군으로서의 묘사에서도, 흥청망청 황제놀음에 취한 중년의 꼰대 내지 개그캐로서의 묘사에서도 꼭 빠지지 않는 필수요소가 바로 이 부잣집 나리 코스프레. 현상유지만 하는 데에도 황제를 갈아넣어야 할만큼 청 제국의 황제보단 풍류를 아는 유쾌한 부자로 살았으면 더 좋았을지도. 건륭제가 강희, 옹정 시절부터 권력다툼으로 형제, 삼촌들이 죽어나가고 아버지도 일하느라 건강을 심하게 해치는걸 보며 자란 인물임을 감안하면 이런 다채로운 면모는 온 힘들 다해 성현의 도를 추구하던 아버지에 비하면 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건륭제를 그 유명한 명나라의 F4에 비견하는 것은 '그래도 전성기의 군주였던' 건륭제가 들으면 시무룩하겠으나, 권모술수에도 수완이 있었고 군사에 관심을 기울이되 국고를 전쟁하느라 말아먹지는 않으며 놀더라도 숙제는 대강이라도 해놓고 노는 유쾌한 황제였던 명나라 정덕제가 요절하지 않고 너무 오래 살았다면 이런 황제로 기록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해볼 수 있으리라.
고서화 매니아이기도 해서 황제의 권력으로 저명한 고서화들을 많이 수집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자신은 고서화의 운치를 망쳐버린 인물로 악명이 자자하다. 오죽했으면 미국의 중국화 학자로 유명한 마이크 설리번이 탐욕스러운 미술 수집가이자 빈약하고 독단적인 감식안의 소유자라고 비꼬았을 정도. 왼쪽 작품은 건륭제가 망쳐놓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원대의 화가 방종희의 "고고정도(高高亭圖)"인데, 운치 있는 절벽을 그려놓은 작품에 눈에 확 띄는 최상단 중앙부에다가 떡하니 자기 인장을 찍어 놨다. 덕분에 고고정도를 감상하는 사람은 그림 자체보다 건륭제의 큼지막한 인장이 먼저 눈에 들어올 정도.
조맹부의 걸작인 위쪽의 "작화추색도(鵲華秋色圖)"에도 건륭제의 흔적이 많은데 여러 도장을 찍고 시를 적는 등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을 정도다.
심지어는 북송의 휘종이 직접 그린 "계산추색도"라는 걸작을 수집하고 나서, 상술한 "고고정도"에 찍힌 것과 동일한, 큼지막한 인장을 찍어놓고, 여러 자잘한 인감을 찍은 뒤, 좌측 상단부에 자신의 엉터리 시까지 적어놓았다.
한국 환빠 민족 사학계에서는 불쏘시개 '흠정만주원류고'를 쓴 황제라며 칭송하기도 한다. 국내에는 오랜 기간 소개되지 않다가, 어찌어찌 '만주원류고'라는 제목으로 완역되었다. 다만 지금은 절판 상태.
아내들과 딸들의 지위를 올려주는 것은 후한 편이지만 반대로 아들들의 지위를 올려주는 것에는 다소 매정한 편이다. 가장 총애하는 효의순황후의 가문을 2번이나 대기(抬旗)시켜줬고, 측실부인 소생의 공주들에게조차 화석공주가 아닌 고륜공주로 승격시키는 경우가 있었지만, 아들들 중에서 건륭제로부터 직접 친왕 작위를 받은 아들들은 몇 없다.
말년에 엄청나게 해먹은 권신 니오후루 허션이 사실은 건륭제의 동성 연인이라는 떡밥이 있다. 당장 본 문서가 '양성애자'라는 분류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 한편으로는 청나라 황실인 아이신기오로 씨족이 아님에도 버이서에 오르고 죽어서는 군왕작을 추증받을 정도로 허션 이상의 권세를 누렸으나, 건륭제가 퇴위하던 해에 요절한 부찰 복강안이 실제로는 건륭제의 혼외자라는 떡밥도 있다. 현대 매체에서 아주 빈번히 묘사되는건 아니지만 대중들과 문학가들에게는 흥미로운 떡밥으로 꼽힌다. 동성애야 딱히 검증할 방법이 없지만 다른 형제들처럼 복강안도 부마로 삼으라는 제안을 건륭제가 허허 웃어넘겼다는 일화라던가, 초상으로 남아있는 복강안의 외모가 아버지 부항이나 부찰 가의 다른 형제들보다는 옹정제나 건륭제와 비슷해보이는 등, 여러가지로 정황이 짙어서 떡밥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베이징시에 있는 궁주펀역 인근 공주묘가 건륭제의 수양딸이 묻힌 곳이라는 설이 있으나 현재도 입증되지 못하였다.
흥미롭게도 동시대에 재위한 군주들 중 바로 옆 나라인 조선의 정조와 비슷한 시기에 사망했는데 건륭제가 1799년 2월 7일(양력)에 먼저 사망한 후 1년 6개월 후인 1800년 8월 18일에 정조가 사망했다. 그런데 세상을 떠난 시기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서 본인 대가 나라의 전성기 혹은 중흥기였고 본인 사후 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고 그 발단이 본인에게 있다는 점이다. 다만 정조는 재위기간 내내 나라가 기울게 할만한 실책은 없었고 단지 김조순을 세자의 후견인으로 밀어준 것이지만 그 김조순도 마냥 권신 행세를 한건 아니다. 반면 건륭제는 자기 실책도 있어서 자기 재위기부터 쇠퇴의 징조가 나타났다. 심지어 아들인 가경제도 아버지 못지않게 문제가 많았다. 물론 정조도 순조가 영 못한 왕이라 자식복 좋은 건 아니었지만 순조는 그래도 조금 변명거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