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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의 죽음
삿 8:29-35
29 요아스의 아들 여룹바알이 돌아가서 자기 집에 거주하였는데
30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 그의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 명이었고
31 세겜에 있는 그의 첩도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이름을 아비멜렉이라 하였더라
32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나이가 많아 죽으매 아비에셀 사람의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 요아스의 묘실에 장사되었더라
33 기드온이 이미 죽으매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서서 바알들을 따라가 음행하였으며 또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34 이스라엘 자손이 주위의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35 또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이 이스라엘에 베푼 모든 은혜를 따라 그의 집을 후대하지도 아니하였더라
삿 8:29-35 / 여룹바알이라고도 불리는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은 집으로 돌아가 거기서 살았다. 30) 기드온은 아내를 많이 둔 까닭에 슬하에 자식이 70명이나 되었다. 31) 세겜 성읍에도 그의 소실이 하나 살고 있었다. 그녀는 기드온에게 아들 하나 낳아 주고는 그 이름을 ㄱ) 아비멜렉이라고 지어 불렀다. (ㄱ. `내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뜻이다) 32) 기드온이 나이가 많아 세상을 뜨자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 요아스의 무덤에 장사되었다. 오브라는 아비에셀 씨족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있었다. 33) 기드온이 세상을 뜨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또다시 여호와께 등을 돌리고 바알들을 섬겼다. 또한 바알브릿이라는 세겜 신을 자기들의 신으로 섬기기도 하였다. 34)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삼지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원수들을 무찔러 주시고 자기들을 건져 주신 하나님 여호와를 저버렸다. 35) 또한 여룹바알이라고도 불리는 기드온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던 이스라엘을 위하여 목숨을 내걸고 싸웠는데도 불구하고 그 후손들을 잘 돌보지도 않았다.
기드온이 살아 있는 동안 이스라엘은 평온했습니다. 그리고 노년의 기드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 평안하게 여생을 보냈습니다.
기드온의 많은 아내와 자녀들(29-31) 기드온은 많은 아내를 통해 70명이나 되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는 그가 이스라엘 사회에서 큰 지위를 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드온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가 되지 않았고 왕의 지위에 있지도 않았지만, 그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겜에 있는 첩이 낳은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이라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이란 이름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라는 뜻입니다. 기드온을 왕이라고 말하는 이름은 아니겠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앙적으로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드온의 말년이 개인적으로는 평안을 누렸을지 모르지만, 신앙적으로는 또다시 어두운 늪으로 빠져가고 있었습니다. 앞선 신앙의 사람들은 살면서 쌓아온 신앙의 업적도 중요하지만, 다음 세대에 좋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신앙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이어져야만 합니다. 자녀들이 믿음의 삶을 살지 않게 된다면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의 죽음과 이스라엘의 타락(32-35) 기드온은 조상들의 묘실에 장사되었습니다. 나이가 많아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시 빠르게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알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난 삶은 또다시 이스라엘의 위기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사들이 재판관의 역할을 수행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은 그들이 전쟁에 나가는 군인의 역할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신앙적 통일성을 이끄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시 바알 신앙은 매우 뿌리 깊은 것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로 타락하게 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우상이 바로 바알입니다. 바알브릿은 언약의 바알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과 언약을 맺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상으로 상징되는 세상의 가치와 기준은 한순간도 우리의 곁에서 떠난 적이 없습니다. 아니 우리는 늘 그런 세상 속에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필요치 않은 순간은 없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집요하고 성실합니다. 그에 대해 우리의 신앙도 언제나 성실해야 하며 담대해야만 합니다.
적용 : 기도와 예배에 성실하며 늘 말씀을 묵상하며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구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영혼의 갈구다. 자신의 약함을 매일 인정하는 것, 그러므로 기도할 때는 마음 없는 말보다 말 없는 마음이 더 좋다.-간디. 이스라엘 백성들은 40여년의 평화로운 시절동안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며 신앙을 성숙시키지 못하고, 영적으로 게을러져가면서 악순환을 반복했습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늘 영적으로 깨어 있어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갈수 있도록 날마다 경건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 설 교 >
마지막 몰입에 실패한 지도자
삿 8:29-35 / 행복한 목사
[본문 분석]
6) 기드온에 의한 구원(6:33-8:28)
바) 마지막 남은 싸움(8:4-28)
b. 미디안의 두 왕을 처형함(8:18-21)
c. 기드온이 왕 되기를 거절함(22-23)
d. 기드온의 마지막 실수(24-28)
d-1. 전리품으로 에봇을 만듦(24-27)
d-2. 40년 동안 안식을 회복함(28)
7) 기드온의 임종(8:29-35)
가) 구원 이후의 기드온의 통치(29-32)
나) 기드온의 죽음 이후의 백성들의 모습(33-35)
[본문 강해]
가) 구원 이후의 기드온의 통치(29-32)
삿 8:29(같이 읽기) “요아스의 아들 여룹바알이 돌아가서 자기 집에 거주하였는데”
기드온은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이용해서 멋진 궁전에서 살지도 않았고, 권력을 잡은 것도 아니었고, 단지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 평민의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은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도 않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오직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릴 것이라.”는 약속을 지킨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과연 그가 약속한 대로 그는 왕에 대한 미련을 과감하게 던지고 살았을까요? 그런데 30절부터 시작되는 말씀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가 많은 아내가 있었다는 점과 세겜의 첩에서 난 아들의 이름에서 그는 왕처럼 살았다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삿 8:30(같이 읽기) “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 그의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 명이었고”
그에게 아내가 많았다는 것은 그가 왕의 자리는 거절했을지라도, 실제로는 왕과 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당시 왕들 외에는 아내를 많이 두고, 자식들을 많이 낳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고대 우가릿 문서에 보면 가나안 땅의 신 엘과 아세라 사이에 태어난 자식의 숫자가 정확히 70명이었습니다. 기드온의 자식이 70명이었다는 말은 그가 거의 신의 자리에까지 올라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31절에 심지어 그는 첩까지 두었습니다. 당시 세겜 사람들은 가나안 족속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세겜에 첩이 있었다는 것도 그가 정력적인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율법을 어기고 이방인과 사생활을 즐겼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삿 8:31(같이 읽기) “세겜에 있는 그의 첩도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이름을 아비멜렉이라 하였더라”
이게 복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요담을 제외한 기드온의 아들 70명을 몰살시킨 아비멜렉의 출생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미리 기록한 것입니다. 아비멜렉이라는 말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라는 뜻입니다. 아비멜렉의 아버지가 왕이라는 뜻이니 누가 왕이라는 말입니까? 기드온 자신이 왕이라는 뜻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장례절차까지도 왕족의 예를 따랐습니다.
삿 8:32(같이 읽기)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나이가 많아 죽으매 아비에셀 사람의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 요아스의 묘실에 장사되었더라”
그의 아비 요아스의 묘실에 장사되었다는 이 표현도 사실 왕족들이 장사되었을 때 쓰던 표현입니다. 열왕기나 역대기 성경을 보시면 “누구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아비 다윗 성에 장사되고”라는 식으로 기록합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사사도 이런 식으로 기록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왕 대접을 받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드온은 공적인 발표와 사적인 삶이 달랐던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자기가 왕이 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사적인 삶에서는 자기가 왕인 것처럼 행세를 했다는 점입니다. 이걸 백성들이 몰랐을까요? 백성들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걸 어디에서 알 수 있습니까? 35절에 백성들은 기드온의 집안을 후대치도 않았을 뿐 아니라, 70명이나 되는 기드온의 자식들이 한 사람에 의해 몰살을 당했는데도 기드온의 집안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모든 백성들이 존경하며 따랐던 지도자 기드온이 이제는 아무도 존경하지 않고, 아무도 따르고 싶지 않은 지도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지금까지 수많은 대통령들이 엄청난 공약을 내세우고 선거에 당선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 그 공약대로 약속을 지킨 대통령이 몇 명이나 있었습니까? 국회의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죽하면 이런 농담이 나왔겠습니까? 한 농부가 길을 가다 어떤 국회의원이 교통사고가 나서 개울에 처박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국회의원이 농부를 보고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농부는 그냥 지나가 버렸고 나중에 그 국회의원은 죽고 말았습니다. 경찰 조사에서 경찰이 질문하기를 왜 그때 살려달라고 했을 때 구해주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이 농부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니 도대체 그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국회의원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시대적인 풍자가 담긴 유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믿을 수 없고, 국회의원을 믿을 수 없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공식적인 발표와 사적인 삶이 다르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도 세상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과 우리의 삶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를 향해 예수는 사랑하지만 너희들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과 삶이 일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증인의 삶을 보여주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 기드온의 죽음 이후의 백성들의 모습(33-35)
대부분의 사사들은 그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사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시대는 예외였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기드온의 이야기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의 이야기는 다음 이야기의 예고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본문은 기드온의 실수가 어떻게 그의 집안과 이스라엘에게 올무가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세 가지로 보여줍니다. 첫째는 33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로 돌아가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았습니다. 둘째는 34절에 자기들을 구원하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셋째는 35절에 민족의 지도자 기드온의 은혜도 잊어버리고 그 집안을 후대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삿 8:33(같이 읽기) “기드온이 이미 죽으매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서서 바알들을 따라가 음행하였으며 또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께로 돌이켜 바알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기드온이 이미 죽으매”로 번역했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기드온이 죽자마자 곧 바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원문은 기드온의 죽음과 동시에 백성들의 타락이 즉각적으로 진행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알브릿이라는 말은 사사기에만 나오는 말인데 “언약의 바알”이라는 뜻입니다. 언약의 바알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변 가나안 사람들과 언약을 맺은 관계에 돌입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단지 바알을 숭배하고 섬긴 정도가 아니라, 바알을 섬기기로 언약을 맺은 바알의 언약백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여호와의 언약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바알과 언약을 맺은 바알의 언약백성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들과 참된 언약을 맺으시고 자기 백성을 삼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저버리고 바알로 돌아가 바알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삿 8:34(같이 읽기) “이스라엘 자손이 주위의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두 번째 단계는 은혜를 베푸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할 수 없는 백성이 된 것입니다. “기억하지 아니하며”라는 표현의 히브리어 원문은 강하고 절대적인 부정을 나타내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에게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이전에 분명히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도 잊어버리고 강하게 부인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그런 적이 없고,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고등학생 때 교회 다니는 친구 따라 교회수련회 왔다가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대학교에 기서도 대학생선교회 CCC에 가입해서 열심히 성경공부도 하고, 수련회도 참여하고, 기도회와 경건회, 모임을 통해 많은 은혜를 경험했던 자매였습니다.
그런데 신천지에 빠지게 되니까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강하게 부인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무리 설득을 하고 권면을 해도 전혀 받아들이지를 않았습니다. 이전에 경험한 은혜에 대해 말하면, 그건 자기최면이었을 뿐이지 정말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부정합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속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속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살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강하게 부인할 뿐 아니라, 심지어 강하게 대적하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삿 8:35(같이 읽기) “또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이 이스라엘에 베푼 모든 은혜를 따라 그의 집을 후대하지도 아니하였더라”
세 번째 나타나는 현상은 은혜를 베푼 사람을 잊어버린 점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기드온이 어떤 기드온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룹바알이라는 이름은 기드온이 바알의 산당을 부수고 얻은 이름입니다. 이 이름으로 그는 미디안 13만 5천 군대를 쳐부수고 승리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 이름을 잊어버렸을 뿐 아니라, 그의 후손들이 받아야 될 마땅한 대우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 말씀정리
기드온은 사사로 부름 받아 위대한 구원을 이룬 자였지만, 사사로서 가장 중요한 일만 빼고 다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언약갱신입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을 완성한 후에 백성들로 하여금 “오직 여호와만을 섬길 것”을 맹세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의 사역 중에 그 어느 곳에도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신 목적은 단지 미디안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어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라가 부강하고 안전하게 되는 것에만 전념한 세속적인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이룬 후에 그 승리를 발판으로 위대한 신앙개혁 운동을 일으켰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아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하도록 그들을 영적으로 이끌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지만 기드온은 이스라엘에 영적 부흥을 가져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린 미련한 지도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죽을 때까지 왕처럼 행세하고, 왕의 대접을 받으며 소위 복되고 형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가 죽은 후에 그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게 되었고, 아비멜렉이라는 자격 없는 지도자가 왕이 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가정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70명의 아들 중 69명이 첩에게 난 자식의 손에 죽고, 첩에게 난 그 자식은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죽고, 겨우 살아난 요담이라는 인물은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라도 축복을 못 받고, 가정도 축복을 못 받게 만든 미련한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처럼 미련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그 목적에 온전히 몰입하지 못할 때 우리는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쓰임 받는 복된 인생이 되도록 주어진 사명에 온전히 몰입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하나님의 목적에 온전히 집중하여, 성공적으로 주신 사명을 이루어, 나라도 축복을 받고 가정도 축복을 받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죄와 악의 뿌리
삿 8:29-35 / 김광석목사
오늘 본문 29절에 보면 이제 기드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 말은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에게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30절에 보면 “30. 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 그의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 명이었고”라고 말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일부일처에 대한 특별한 계명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내를 너무 많이 둔다는 것은 결국 그 당시의 세상의 풍습을 따른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아들들이 칠십명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피비린내 나는 형제의 난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31절에 보면 “세겜에 있는 그의 첩도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이름을 아비멜렉이라 하였더라”고 합니다. 셰겜은 에브라임 지파가 속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세겜은 가나안 우상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속한 므낫세 지파는 오브랏이라는 곳이었는데, 그가 에브라임지파에 속한 우상숭배의 중심지인 세겜에도 첩을 두었다는 것은 그가 육신의 정욕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겜에 있는 첩을 통해서 낳은 아이의 이름을 아비멜렉이라고 지었습니다. 아비멜렉이란 나의 아버지는 왕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름을 지을 때 반드시 의미를 가지고 지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기드온이 세겜의 첩을 통해서 낳은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이라고 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나의 아버지는 왕이라는 뜻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내가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너는 왕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면서 금으로 대제사장의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나중에 우상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왕 되기를 거부하고 평범하게 자기 집에 거주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많은 아내와 자녀를 두었고, 첩을 통해서 난 자녀의 이름을 아브멜렉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드온의 이중성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면으로는 자신은 절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또 한 면으로는 은연중에 자신이 왕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곧 이어질 사사기의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3. ○기드온이 이미 죽으매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서서 바알들을 따라가 음행하였으며 또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죽으매 란 말은 “죽자 곧” 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이스라엘백성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스라엘의 문제는 기드온의 온전치 못한 문제와도 조금은 연관이 되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모든 죄와 악의 뿌리는 인간이 스스로 왕이 되고 주인 되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도 결국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 이 세상과 인생의 주인 노릇하려는데 있습니다.
나라간의 분쟁이 생기는 것도 결국 서로 주인노릇하고 왕 노릇하려고하기 때문입니다.
가정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서로 주인 노릇하려고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문제가 생기는 것도 결국 인간이 교회의 주인노릇하려고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회의 세습도 결국 큰 교회를 이룬 목사님들이 대를 이어가면 주인노릇하려고 생긴 문제입니다.
그래서 결국 죄와 악의 뿌리는 인간이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사사기에서 특별한 왕을 세우지 아니하십니까? 또 사사를 세우시되 왜 하나같이 변변치 않는 사람들을 사사로 세우십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만의 우리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진짜 온 인류와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진짜 왕이신 예수님은 절대 우리의 왕 노릇을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도리어 끝까지 종처럼 낮아지시고, 또 섬기셨습니다. 그랬을 때 성부하나님께서는 한 없이 높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왕이 아니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왕인 것처럼 하였던 기드온의 잘못은 결국 이 이스라엘에 엄청난 저주와 재앙을 가져왔습니다.
오늘도 내 속에 내가 이곳의 왕이다 내가 이곳의 주인이라고 하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없는지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왕이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스스로 왕 된 자리에서 내려와서 더 낮아지고 섬기는 자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스스로 주인이라고 높이지 말고, 내가 낮아질 때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그런 삶을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드온이 죽으매
삿 8:29-35
인간의 삶은 사건과 사건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건 없는 삶이란 없으며 삶 역시 사건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에서의 사건이라는 것은 우리가 의도한다고 해서 그대로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의도하지 않는 방향과 방법으로 언제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발생할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사건이며 삶인 것입니다.
사건이라고 해서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특이한 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삶은 사건과 사건이 아닌 것으로 구분되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라면, 그리고 삶의 모두라는 것이 숨쉬고 밥먹고 걸어다니는 우리가 일상생활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이 포함된 것이라면 삶의 모두가 곧 하나님이 일으키신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이 우리들의 의도대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숨쉬고 밥먹는 것 하나에까지 하나님이 개입하신 결과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특이한 사건에서만 하나님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면 자연히 하나님에 대한 기억도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난 특이한 사건에서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역시 사건이 기억에서 희미해지면 또 다시 하나님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져 버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삶을 하나님이 일으키신 사건으로 본다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내 주위에 일어난 사소한 일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연결이 끊어지지 않음으로서 항상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가지는 삶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등장하는 사건들과 계시가 완성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사건들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성경에서의 사건은 하나님을 계시하는 수단으로서 하나님이 일으키신 것들이고, 오늘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제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로서의 삶에 충실하고 있는지를 묻고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일으키신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등장하는 사건과 같은 맥락의 사건을 요구하거나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심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제대로 이해하는 신자는 비록 특이하고 희한한 사건을 체험한다고 해도 그 사건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셔서 험난한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견딜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은 하나님 나름대로 목적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과연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존재인가를 계시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의도대로 인간은 광야에서 실패하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신자는 내가 바로 이스라엘과 같은 존재임을 현재 자신에게 발생하는 사건들을 통해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사건이 없을 때는 스스로의 믿음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졌지만 어려운 사건이 발생함으로서 결국 자신의 삶에 주어진 환경을 스스로 이길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민수기 21장에 보면 이러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불뱀으로 징계를 합니다. 불뱀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을 때 이스라엘은 무엇을 위해서 부르짖습니까? 7절에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 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라는 말씀을 보면 불뱀으로 인해서 이들의 관심은 먹을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에 있게 됩니다. 더 큰 고통이 주어질 때 상대적으로 적은 고통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게 되는 인간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심정은 불뱀의 고통에서만 해방된다면 좋겠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못 먹어도 괜찮고, 못살아도 괜찮다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대해서 놋뱀을 장대에 달고 바라보는 자는 살리라는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불뱀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인간이 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다만 높이 달린 놋뱀을 바라보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구원은 위에 계신 분으로 인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계시를 제대로 이해한 자는 위에 계신 분을 바라보는 것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불뱀의 고통에서 벗어나서 몸이 편해졌을 때 다시금 죄를 행하게 됩니다. 모압의 여인들과 음행을 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성경의 한 부분에서 나타난 사건일 뿐입니다. 사실 성경 전체가 이러한 구도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사건을 일으키시고 뭔가를 계시하시고 보여주시지만, 정작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은 눈에 본 것이 있을 때만 잠시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뿐 보이는 것이 사라지면 다시 자기들 좋을 대로 행하게 악함이 끊이지 않고 나옵니다.
이러한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우리 역시 그들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수준이 곧 우리의 수준임을 마음속 깊이 자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속 사건을 일으키심으로서 우리가 과연 무엇을 의지하고 믿고 살아가는지를 확인하십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눈에 보이는 사건에 붙들려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약함만 보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에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사건들로 인해서 우리에게 어떤 열매가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지난 시간에 잠깐 언급한대로 기드온이 미디안에게서 탈취한 귀고리 등 금을 모아서 에봇을 만들었는데, 이스라엘이 그 에봇을 음란하게 섬긴 것과 기드온이 나이가 많이 들어서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이켜 바알들을 음란하게 위하고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기드온이 이스라엘에게 베푼 은혜를 따라 그의 집을 후대치도 안했더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에봇을 만든 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린 대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보지 않는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에봇을 만들어 둠으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에봇을 볼 때마다 상기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 나올 때 입는 옷이고, 그 옷을 미디안에게서 탈취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에봇을 볼 때마다 그 에봇이 무엇으로 만든 것인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미디안의 탈취물로 만든 에봇을 볼 때마다 미디안을 이긴 것은 자기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여주신 결과임을 잊지 말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에봇에는 기드온의 선한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아는 사람입니다. 미디안의 승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결과임을 마음 깊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기드온이었기에 에봇을 만들어 이스라엘 앞에 둠으로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잊지 않도록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수준은 보이는 것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에봇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보이는 에봇을 하나님 대신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에봇을 음란하게 섬긴 것입니다. 즉 에봇을 앞에 두고 소원을 빈다든지 에봇을 소중히 여김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여겨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눈에 보인 것이 이스라엘의 믿음을 도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올무로 남게 됩니다. 눈에 보인 것을 의지하고 섬기는 모습은 또 있습니다. 28절에 보면 "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 기드온의 사는 날 동안 사십 년에 그 땅이 태평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기드온이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미디안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태평한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의 힘이 아니라 기드온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이 사실을 제대로 알았다면 기드온에 의한 다스림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고 산 것으로 인한 문제는 기드온이 죽음으로서 나타나게 됩니다. 32절에 보면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나이 많아 죽으매 아비에셀 사람의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비 요아스의 묘실에 장사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눈에 보이는 사람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것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생명이 영원하다면 믿을만한 사람의 다스림을 받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죽어야 할 존재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감으로 인한 문제는 그 사람이 죽었을 때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기드온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에게서 나타난 문제는 무엇입니까? 33-35절에 그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기드온이 이미 죽으매 이스라엘 자손이 돌이켜 바알들을 음란하게 위하고 또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사면 모든 대적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지 아니하며 또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의 이스라엘에게 베푼 모든 은혜를 따라서 그의 집을 후대치도 아니하였더라"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이 행한 것은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사면 모든 대적의 손에서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치 않습니다. 또 기드온의 집을 후대치도 않습니다.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동안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산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인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고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았고 기드온을 보고 살았기 때문에 기드온이 살아있을 때는 기드온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은 흉내라도 낼 수 있었겠지만 기드온이 죽고 사라지자 자신을 다스리는 존재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그나마 그들을 통제했던 힘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곧 삿 17:6절의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씀이나 삿 21:25절의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씀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왕이 없다는 것은 국가의 제도적인 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나를 다스리는 분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나를 다스리는 분이 없기 때문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진리가 되고 하나님의 뜻이 되버렸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은 눈에 보인 것을 의지하고 섬겼기 때문입니다.
에봇을 음란하게 섬긴 것이나 기드온이 살아있을 때는 우상을 섬기지 않다가 기드온이 죽고 사라지자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기억하지도 않고 기드온의 집을 후대하지도 않은 모든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산 것이 아니라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았다는 증거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린 분명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삽니다. 보이는 것은 사람입니다. 또는 신비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사람이나 사건의 다스림을 받게 되는 경우가 참으로 많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보이는 것이 우리들의 올무가 되버리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들 하나하나는 성경에서 계시하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확인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일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건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개입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죄악을 범한 것까지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생각은 우리의 허물에 대한 책임을 피해가려는 의도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불신앙으로 갈 때 하나님의 개입은 그냥 두고 보시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냥 두고 보셨다가 성령을 통해서 그 죄를 책망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앞에 있는 사건들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기억하고 마음에 두기 위한 도구이며 수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은 우리들 곁에 사건과 사건이 이어지게 하심으로서 끝없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음을 상기시킴으로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일으키신 수많은 사건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그 중에 단 하나의 사건만으로도 얼마든지 평생토록 하나님만 기억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는 신비한 것도 있습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이나, 요단강 물이 마른 것, 여호수아가 전쟁을 할 때 해와 달이 멈춘 것 등등 수많은 사건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만큼 신비스러운 이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놀라운 사건들도 이스라엘의 마음을 하나님에게 붙들어 놓지를 못했습니다. 이적이 있는 잠시동안 하나님을 기억했을 때 그 사건이 사라지고 다시 현실이 그들의 눈에 보일 때 이스라엘은 여지없이 현실을 따라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실제로 홍해 사건을 체험했다고 합시다. 그것 하나만이 아니라 여러분이 기도해서 해와 달리 멈추는 사건까지 체험했다고 합시다. 과연 여러분은 그 사건들을 보면서 사건에 매이지 않고 그 사건을 일으키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사건은 하나님을 계시해주는 도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놀라운 사건을 보면서 사건 자체는 걸러내 버리고 순수하게 하나님만 여러분의 마음에 남게 하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러한 수준이 아닙니다. 보이는 사건 자체에 매료되어서 보이지 않는 분은 순식간에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놀라운 사건을 체험했으면서도 뒤에 괴로운 일이 발생하면 앞에 있었던 놀라운 사건을 잊어버리고 괴로움에 빠져서 원망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앞에 기드온을 세우신 것은 기드온을 믿거나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아라는 것이 아니라 기드온을 다스리고 있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의도였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에게 먼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했다는 것을 가르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순종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의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벗어난 채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기드온의 죽음은 이스라엘이 눈치보는 대상이 사라진 것이고 자기들을 다스리는 존재가 사라진 것이기 때문에 그때부터 왕이 없는 상태가 되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은 안되기 때문에, 인간의 수준이나 능력으로는 보이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안되기 때문에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인간의 수준이기에 성령을 보내셔서 보이지 않으신 분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자는 어떤 사건이 있다고 해도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어떤 위대한 인간이 있다고 해도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되지 결코 인간을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교인이 목사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간증이라는 것을 하면서 자기가 체험한 사건을 증거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건을 증거 하거나 인간을 다스리는 자로 세우시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기에 보이는 것을 세우셔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뿐입니다.
보이는 것은 우리에게 올무가 될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우리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게 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사람의 다스림을 받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만약 사람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간다면 필연코 그 사람으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어떤 경우에서도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은혜를 마음에 담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사건도 인간도 여러분의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고 하나님만 담아두십시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놀라운 기적으로 인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들의 삶에 끊임없이 사건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는지 확인하라고, 과연 주님의 은혜로 사는지 확인하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심을 잊지 말라고 쉬지 않고 일하시고 계십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시고 그 하나님을 마음에 두도록 하십시오. 이 일에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그 어떤 것이 여러분을 유혹한다고 해도 보이는 것에 매이지 않고 보이는 사람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믿음만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은근히 왕노릇하는 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삿 8: 22-35 / 조용호목사
1. 사사기에서 진정한 ‘사사’(히, 쇼페트)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다(11:27).
1) 인간 사사들은 모두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을 대행하여 다스리는 이들이다(히, 솨파트 - 다스린다).
2) 하나님은 특출한 지도자들이 아니며 대부분 낮고 천하고 열등한 자들을 사사로 세우셨다.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하나님이 왕이심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 옷니엘은 차자의 아들이며, 에훗은 왼손잡이이고, 드보라는 여자이고, 기드온은 열등한 지파(므낫세)에 속하고, 입다는 기생의 아들이며, 삼손은 땅을 한 평도 정복하지 못한 단지파에 속한다.
2.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악을 행하자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동맹군을 들어 징계하셨다.
1) 이스라엘이 고통 중에 부르짖자 하나님은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던 소심한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셔서 300명의 군사로 135,000명의 미디안 군대를 물리치게 하셨다.
2) 그러나 이 전쟁의 승리로 인하여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며, 전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안에 거하는 대신에 이스라엘은 자기를 주장하며 교만하였다.
3) 에브라임 지파는 기드온에게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다고 크게 다투다가, 기드온이 에브라임의 공적을 크게 높여주자 화를 풀었다.
-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은 떡을 요구한 기드온의 요청을 거절하고 그의 군대를 조롱하였다.
- 기드온은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분노하여 보복을 다짐하였고, 실제로 그들을 죽였다.
4) 하나님의 구원이 베풀어진 곳에 사람냄새 즉 교만, 분노, 조롱의 냄새가 풍겨났다.
3. 개선장군이 된 기드온은 온 이스라엘의 추앙을 받게 된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을 향해 대대로 우리를 다스려달라고 요청한다(22절).
삿 8:22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는지라
2) 하나님이 왕이신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드온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한다.
-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대신에 눈에 보이는 인간 사사를 의지하고, 인간사사가 우리를 다스리면 평안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3) 하나님이 인간 사사를 세우신 목적, 하나님이 단 300명으로 미디안 군대를 격파한 목적을 이스라엘은 잊어버린다. 하나님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이렇게 구원하셨다.
4. 왕이 되어 달라는 이스라엘의 요청에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릴 것이라”고 말한다(23절).
1) 그러나 자기주장의지로 인하여 죄의 세력에 속고 있는 기드온은 입술로는 하나님만이 왕이라고 하지만 은근히 자신이 왕노릇하게 된다.
2) 하나님이 구원하셨으니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기라고 하면서 끝냈다면 좋았을 것이다.
- 그러나 은근히 자기를 주장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마음이 기드온에게 있었다.
5. 기드온은 자기를 왕으로 추대하려던 백성들에게 그들이 미디안 사람들로부터 탈취한 금귀고리를 구한다(24절).
1) 이스라엘 백성들이 탈취한 금귀고리를 기드온에게 바쳤다(25절).
- 금귀고리의 무게는 무려 1700세겔이다(20kg, 5,300돈, 약 1조원).
- 바친 물건 중에는 초승달 장식들과 패물들과 낙타 목에 둘렸던 사슬도 있었다.
2)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다.
- 기드온은 1조원이나 되는 금을 사유화했으며, 제사장이 입는 에봇을 만들어 자신이 소유함으로 자신과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과시하였다.
3)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기드온이 만든 금 에봇을 음란하게 위하였다.
- 사실상 기드온을 왕처럼 여김으로 금 에봇은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었다(27절).
6. 기드온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동시에 자신을 주장하고,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권리를 차지하려는 우리들의 모습과 많이도 닮았다.
1) 주님 한분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주님도 얻고, 세상도 얻으려는 마음이다.
2)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지는 않지만 은근히 하나님 노릇을 한다.
3) 공식적인 결정은 성경적으로 하지만, 내적으로는 자신의 유익을 구한다.
- 그러나 공식적으로 비난받을 정도로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
4) 하나님이 구원하셨지만 나도 헌신했다는 자기주장의지가 있을 때 이런 반응이 나온다.
-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지만 나도 수고했으니 보답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7.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로 사용된 미디안은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1) 그리고 기드온이 사는 40년 동안 그 땅이 평온하였다(28절).
8. 자기주장의지가 있고, 은근히 하나님 노릇하려던 기드온은 많은 아내와 첩을 두었다(29-30절). 아내들에게서 낳은 아들이 70명이고 세겜에 있는 첩에게서 낳은 아들 아비멜렉이 있었다(31절).
1) 아비멜렉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뜻이다. 곧 기드온이 왕이라는 것이다.
2)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을 기드온이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기드온은 왕이다”라는 이름을 기드온이 사용하게 했다는 측면에서 기드온이 노년이 될수록 점점 더 왕노릇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9. 그래도 공식적으로는 “하나님이 왕이시라”고 한 기드온의 통치 40년 동안에는 이스라엘에 평안이 있었다.
1) 기드온이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한 공적도 분명히 있다.
2) 그래서 기드온이 사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공식적으로 우상을 섬기지는 아니하였다.
- 기드온은 왕노릇은 하였지만 가나안의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지 못하게 했다.
10.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알들을 따라가 음행하였다(32-33절).
1) 또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주위의 모든 원수들을 파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렸다(34절).
2) 바알브릿은 언약의 주라는 뜻으로 바알과 언약을 맺었다라는 뜻인 것 같다.
11.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물론 기드온이 이스라엘에게 베푼 은혜도 잊고 그의 집도 후대하지 않았다(35절).
1) 우상숭배는 하나님만을 대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도 깨뜨린다.
12. 하나님이 미디안의 손에서 300명의 군사로 승리하게 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뜻이었다.
1) 이번에도 언약관계를 맺으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이뤄지지 아니한다.
2) 이스라엘은 승리 자체에 도취되었지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찾지 아니한다.
- 그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하고, 하나님안에 거하려고하기 보다는 기드온을 왕으로 삼고자 하였고, 기드온이 만든 에봇을 음란하게 위하였다.
3) 미디안으로부터의 구원을 통하여 언약이 회복되지 못했다.
- 이스라엘 백성 각자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기드온의 죽음은 곧 우상숭배로 이어진다.
13. 기드온은 가나안의 우상은 섬기지 못하게 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백성이 되게 하기 보다는 사실상 왕노릇을 하면서 자식들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었다.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9:2).
1) 기드온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세습하여 준 것에 근거하여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2)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 부르심의 목적을 상실하였다.
- 비록 이스라엘에 평온을 가져왔으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지는 아니하였다.
3)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고, 언약의 하나님이 되지 못하였다.
- 그러기에 기드온이 죽자 바로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 앞에 또 악을 행한다.
14.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는 여전히 자기 인생을 살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
1) 기드온처럼 은근히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고, 은근히 왕노릇하려고 한다.
- 자신이 나서서 왕노릇을 하지 않더라도 남들이 높여주면 그것을 은근히 즐긴다.
2) 기드온을 통하여 구원하신 하나님을 주목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기보다는 기드온에게 주목하면서, 기드온의 그늘아래 있는 신자들도 많다.
15. 눈을 들어,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왕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되심을 실제적으로 믿고 고백해야 한다.
1) 주님의 교회를 섬기면서,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은근히 하나님 노릇하는 죄의 세력의 속임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2)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스스로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자랑하는 것이다.
- 또한 언약백성으로 하나님 아버지 품안에 거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도 기드온처럼 왕노릇하고, 백성들처럼 언약안에 돌아오지 않는 우리의 비참한 실존을 말씀의 거울 앞에서 보기를 원한다.
- 나도 용납할 수 없는 나를 용납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용납하며 주님께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