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가 여전히 시선을 사람들이 모여 앉은 원탁에 고정시킨 채 중얼거렸다. 상현은 긴장되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누굴 더 불렀다는 걸까?
「내가 생각하기엔 그 사람이 가장 큰 단서를 가지고 있을 것 같아」
「‥설마, 너-」
「저기 오는군」
작은 꼬마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오는 여자를 보고 상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상현의 부인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보라색 치마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고, 더워서 그런지 치마와 같은 색의 자켓은 벗어서 팔뚝에 걸쳐놓고 있었으며 머리는 마치 한 장의 종이처럼 검고 단정하게 빗어넘겼다. 그녀가 손을 잡고 있는 아이는 다섯살난 상현의 아들 재욱이었다. 상현은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부인과 아들에게 달려가 뭐라뭐라 말했다. 그다지 예쁜 편은 아니었지만 대체적으로 호리호리한 몸매를 지닌 상욱의 부인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상현은 마치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백호와 자신의 부인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물어보았다. 자신의 가족이 범행을 저질렀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더욱 경악할만한 일은 그 후에 일어났다.
-상현의 어머니마저 불려 온 것이다.
상현은 자신의 가족을 상대로 조사해야 한다는 생각에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듯 했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중에, 백호는 이때처럼 상현의 얼굴이 새햐얗게 보였던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미 자신감을 잃었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돌아다니다가 결국엔 백호에게 잠시만 누워있겠다고 말했다.
상현이 문을 닫고 사라지자 백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증언을 들어볼까요, 먼저 상현이의 어머니이신 김현아씨?」
우아한 노년 부인의 깊게 패인 주름이 더욱 굵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김현아가 아니라 피영현입니다.」
「아뇨, 당신은 김현아입니다.」
「백호우씨, 당신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말을 하다가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백호우? 호우? 맞다! 그 이름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이름이다- 바로 자신의 아들 상현의 초등학교와 중학교적 단짝친구 호우가 아니던가? 자신의 옛 이름을 알만도 하다.
그쯤이면 알만도 하다고 생각하고 말을 이으려는데 백호가 또다시 장난을 쳤다.
「아주머닌 이제서야 저를 알아보시는 군요. 이거 섭섭합니다. 엘리사 김 아주머니.」
「아니, 넌 지금 뭐하는거냐? 내 이름 가지고 장난치는 게 그렇게도 좋으냐? 난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 '엘리사 김'만큼 똑똑하지가 못하단다. 그녀의 책은 재미있게 보고 있다만.」
호우가 아들의 어릴 적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편히 말을 놓으면서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하는 표정으로, 반은 농담으로, 나머지 반은 꾸중섞인 진담으로 말했다.
「아주머니, 기억 못하시는 군요. 아주머니 댁은 천주교였고, 그렇다면 세례명이 있었겠지요. 아주머니는 제가 어렸을 적에 상현이와 저에게 '엘리사 김'이라는 한국계 미국인 탐정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게다가 지금 아주머니의 가방에는 '엘리사 김 추리 시리즈'의 초고가 비죽이 나와있군요. 대중들에게는 얼굴없는 위대한 추리소설작가 엘리사 김이자, 가족들에게는 김현아이자, 낯선 이들에게는 피영현이었지요.」
약간 자글자글한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백호의 추리가 맞았다. 그녀는 작은 키 때문에 백호를 안을 수가 없자 그것을 그만두고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선 귀에 대고 어머니처럼 속삭였다.
「그래, 백호야. 나도 니가 날 부를 줄 알았다. 우리 한번 잘해보자꾸나.」
호호호- 하는 간드러진 웃음소리와 함께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백호는 그 손을 잡았다. 머지않아서 이 두명의 기묘한 추리가들의 공연이 펼쳐질 것이다.
첫댓글 흥미진진! 인기폭발! 주저하지 말고 계속 써주십쇼! 홧팅!
우와아아[데굴데굴] 점점 더 재미있어지는군요, 앞으로도 건필하시길-
대..대단해요...언제쯤 저는 이런 소설을 쓸까요?
^^ 글솜씨들이 다들 좋으시네요...퇴방분들은..(전 꿈도 안 꾸는..ㅋㅋ사실 꿈은 조금 꾼다는..ㅎㅎ)
; 감사합니다^-^; 더 노력할께요♡ [탕] 이번 소설은 어떤 고난과 역경이 있어도 완결내고 말테니까‥! [<-연재소설 쓰기에 3번 실패한 녀석] 음-_-; 제가 추리소설을 좋아하기도 해서; 다들 좋아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네요;;
현아라... 현암군의 동생이 성씨를 바꿨[그만] 정말 잘쓰십니다!! 재미있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