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희(64)는 조영남(66)이 충청도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서울로 올라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부터 만나게 된 사이. 조영남 인생에서 가장 오랜 기간 만나온 친구다. 이장희는 삼촌의 친구였던 조영남이 자기 집에 놀러와 툇마루에서 기타를 튕기며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노래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잠깐의 인연을 맺었던 두 사람은 조영남이 대학 시절 무교동 쎄시봉에서 활동하고 있을 무렵 다시 만났다. 당시 무교동 '연다방'이나 '샤모니 빵집'을 근거지로 삼아 배회하고 있던 이장희는 가장 늦게 쎄시봉 모임에 합류하며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와 함께 어울렸다.
"이장희의 노래는 우리 모두를 웃게 만들었어. 왜냐하면 지금이나 그때나 장희는 무척 심각하게 노래를 부르거든. '서니(Sunny)' 같은 팝송을 부를 때는 거의 변비를 앓는 표정으로 노래를 불렀을 뿐만 아니라 걔가 내뿜는 노랫소리의 강약이 너무도 비정상적으로 커졌다 작아졌다 해서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었지."
조영남은 이장희가 정식으로 가수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음정이나 박자, 노래 분위기가 묘하게 서툴러 보이는 듯하기도 하고 한편 너무도 심각하고 비장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장희는 '그건 너'로 가요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곧이어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잔의 추억' 등이 줄줄이 히트를 쳤다.
그러나 가수가 된 것도 잠시, 이장희는 어느 날 갑자기 노래를 그만두고 연예계를 떠났다. 그 사이 이장희는 이화여대 출신의 재벌가 딸과 결혼을 했고, 쎄시봉 멤버들과 놀고 지냈던 무교동 한복판에 '반도패션'이라는 번쩍번쩍한 의류 상점도 차렸다. 그는 모든 면에서 기타를 튕기며 노래할 때와 달라져 있었다.
이어서 이장희는 레코드 음반 제작자가 되어 조동진, 사랑과 평화, 김현식, 김정호 등 수많은 가수를 데뷔시켰다. 하지만 이후 이장희는 의류사업을 비롯해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떠나 로스앤젤레스에 '로즈가든'이라는 영국식 레스토랑을 차렸다. 코리아타운이 완전히 형성되기 전이었는데 분위기가 좋아 손님이 들끓었다. 할리우드 스타들도 꽤 찾아왔다. 조영남은 친구들을 데리고 그를 보러 수시로 미국을 방문했다.
1989년에는 라디오 방송국 '라디오코리아'를 개국했다. 이전의 교민 방송은 미리 신청을 해야만 들을 수 있었는데 이장희는 직접 스튜디오를 빌리고 AM 주파수를 사서 교민들이 어디서나 방송을 들을 수 있게 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교민 사회의 대소사, 온갖 민원과 문의, 토론과 오락이 여기로 모였다. LA 폭동이 일어났을 때 라디오코리아가 상황실, 대피소, 자위대 본부 역할을 하고 부시 전 대통령과 교민 대표 간의 협상 장소로까지 쓰였던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그의 개인적 삶까지 모두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이장희는 아내와 이혼하는 아픔을 겪었다. 과거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난 결혼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다. 하고 싶은 대로 사니까. 아내로서는 그런 가장을 견디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2003년 이장희는 라디오 방송국을 매각하고 미국에서의 20년 이민생활을 접었다. 그리고는 울릉도에 새 터를 잡았다. 여행광인 그는 사업으로 한창 바빴던 시절에도 1년 중 두세 달은 여행지에서 보냈다. 미국 전역은 물론 아마존 정글, 유럽, 아시아 곳곳까지 섭렵했다. 특히 섬을 사랑했다. 하와이는 50번쯤 다녀왔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울릉도는 참으로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요즘도 이장희는 끊임없이 어딘가로 떠난다. 울릉도와 서울 압구정동 아파트, 미국 로스앤젤레스 자택을 오가고 사이사이 캠핑카와 크루즈, 기차, 비행기로 새 세상을 보러 간다. 종종 아들과 딸, 쎄시봉 멤버들도 동행한다.
"이장희는 우리들 남자 세계에서 단연 보스야. 장희가 한 번 뜨면 흩어졌던 친구 놈들이 우르르 모이거든. 사람을 끄는 무시무시한 흡인력이 있어. 타고난 모험가이자 탐험가이기도 하지. 어디로 튈지 가늠할 수 없는 무모함까지 갖고 살아가는 멋진 남자야."
6070 '엄친아', 원조 하이틴 스타 윤형주
윤형주(64)는 조영남이 고등학생 시절 습관처럼 드나들던 동대문의 한 교회에서 처음 만났는데 귀족 같은 용모의 첫인상이 단연 눈에 띄었다고 한다. 윤형주의 아버지 윤형춘 박사는 일찍이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하며 5개 국어를 구사했고, 한국에서 경희대학교 초급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민족시인 윤동주 아버지의 사촌 형이기도 하다. 윤동주 시인이 옥사했을 때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유골을 들고 온 사람이 바로 윤 박사다. 그만큼 윤형주는 일찍이 '엄친아'였다.
윤형주는 성악을 전공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다. 중학생이 되고서는 팝송에 심취해 AFKN을 끼고 살았다. 어린 시절 그는 매우 소심한 소년이었다. 오락시간에 이름이 불릴까봐 소풍 가기를 싫어하던 그의 성격이 바뀐 건 고교 시절 어머니의 권유로 교회 성가대 활동을 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배인 조영남을 만났다.
"어느 날 형주가 내게 심각한 표정으로 '형만큼 기타를 잘 치려면 얼마나 쳐야 되는 거유?'라고 물었어. 나는 괜히 심술이 났었는지 아니면 형주에게는 음악적인 재능이 별로 없다고 여겼는지 그냥 '너 같은 질문을 하는 녀석치고 진짜로 기타를 배워 잘 치는 녀석을 나는 한 놈도 본 적이 없다'라고 퉁명스레 대답했어.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형주는 나의 이 무자비한 대답에 충격을 받고 그 즉시 기타를 배우고 그런 연유로 가수까지 되었다고 하더라고."
출중한 배경에 머리까지 똑똑했던 윤형주는 연세대학교 의대에 합격했고 어머니로부터 기타를 선물받았다. 그리고 조영남을 따라 쎄시봉을 들락거리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송창식과 '트윈 폴리오'라는 듀엣 팀을 결성해 본격적으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트윈 폴리오'는 우리 가요사 최초의 하이틴 스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10대 소녀 팬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으며 포크송 대중화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나와 함께 다년간 교회 합창대에서 갈고닦은 화음 넣는 기술을 양껏 발휘하면서 송창식과 완벽한 2중창을 만들어내더라고. 한국의 사이먼 & 가펑클로 인정받았지. 대단했어."
학업과 연예계 사이에서 고민하던 윤형주는 가수로서 그토록 대단한 인기를 누렸음에도 의사의 꿈을 위해 '트윈 폴리오' 해체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후 연세대학교에서 경희대학교 의대 본과로 학교를 옮긴 그는 그곳에서 경희대 후배 김세환을 만나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다시 불태우게 됐다. 결국 연세대와 경희대를 합쳐 의대를 9년이나 다녔지만 본과 3학년에 중퇴하고 말았다.
은퇴 선언을 번복한 윤형주는 다시 가요계에 재등장하며 놀라운 생명력을 입증했고, MBC '한밤의 데이트', KBS '윤형주의 음악앨범', 교통방송 '밤과 음악 사이' 등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잇달아 진행하며 음악 전문 DJ로 입지를 다졌다.
1985년에는 광고기획사 겸 이벤트 회사인 '한빛기획'을 설립해 사업가로도 변신했다. 사실 그는 1970년대부터 CM송 가수 겸 작곡가로 유명했다. '멕시코 치클처럼 부드럽게 말해요~'라는 롯데껌 광고, '오오오오 오란C'로 끝나는 음료 광고, '손이 가요 손이 가~' 하는 새우깡 광고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2000년에는 벤처업계에도 발을 들였다.
2003년에는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가족 콘서트를 열며 또 한 번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큰딸은 미국 버클리 음대에서 작곡을 공부했고, 의사인 맏사위도 아마추어 작곡가다. 둘째 딸과 사위는 이탈리아에서 성악가로 활동 중이고, 막내 아들도 클라리넷과 키보드 연주 솜씨가 수준급이라고 한다.
"윤형주는 기획력과 조직력이 탁월해. 쎄시봉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고. 우리는 윤형주만 옆에 있으면 만사가 든든했어. 그의 팔다리 근육은 차범근을 방불케 하고 검은 털까지 숭숭 섞여 있어서 겉보기와는 딴판이야. 깡패 한두 명쯤은 한 방에 날리는 주먹질과 발길질의 소유자지. 그래서 윤형주는 우리의 영원한 소대장이야."
1970년대를 재패한 순수 음악인 송창식
학창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이장희, 윤형주와 달리 송창식(64)을 쎄시봉에서 처음 만났다고 조영남은 전한다. 남루하기 짝이 없는 옷차림에 시골 약장수가 치던 것보다 더 낡아 보이는 기타를 들고 무대로 올라갈 때만 해도 조영남은 그의 진가를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기타의 선율과 함께 울려 퍼지는 청아한 그의 음성을 들으며 넋을 잃었다.
"쎄시봉 식구들은 눈물에 젖어 창식이의 노래를 들었어. 노래가 끝나면 천둥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지. 그렇게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됐어. 단지 그는 우리 보통 사람의 입맛에 맞을 만큼의 모션이나 말재주가 별로 없었지."
송창식은 서울예고 성악과를 중퇴했다. 레슨비를 못 내 2학년 때 낙제했기 때문이다. 경찰이던 아버지는 한국전쟁 중 전사했고, 행상으로 자식들을 먹여 살리던 어머니도 그가 아홉 살 때 집을 나갔다. 그래서 친척집을 전전하며 성장했다. 하지만 일찍부터 음악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에 스스로 노래와 악보의 관계를 파악했고, 중학생 때부터 작곡을 했다고 한다.
그는 천재의 끼를 지닌 기인 같은 사람이었다. 조영남을 비롯한 쎄시봉 친구들은 송창식의 엉뚱한 매력에 놀라기 일쑤였다. 조영남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불교 신자라는 이유로 자신을 데리러 온 친구들을 되돌려 보냈고, 방송국 PD가 출연 섭외를 하면 친구와 선약이 있다거나 잠을 자야 한다고 당당히 거절했다.
"어떤 때 보면 창식이는 딴 세상을 사는 사람처럼 보여. 사실 그건 완벽한 아티스트의 전형적인 자세이기도 하지. 자기가 전공하는 분야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니까. 명예를 좇고 돈을 좇고 때때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는 사람은 진정한 아웃사이더가 못 되는데 그런 점에서 송창식은 진짜 아웃사이더였어."
윤형주와 듀엣으로 활동하던 송창식은 작사, 작곡 실력을 발휘해 솔로의 길을 걸으며 국민 가수가 됐다. 그리고 그 사이 독신주의를 청산하고 서울예고 동창생과 결혼을 했다. 그의 처형 소니아는 1990년 당시 LA 지역에서 활약하던 유명한 한국계 행위미술가로, 조영남은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그녀와 친한 친구로 지내기도 했다.
결혼 후 송창식은 부인이 골동품 비즈니스로 크게 성공하면서 커다란 이층 단독주택에 각종 악기를 쌓아두고, 개인적으로 고용한 그룹사운드 악사들까지 거느릴 정도로 여유 있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부인이 1년 만에 부도로 1억5천만원의 빚을 지며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상황에서도 느긋했다. '벌어서 천천히 갚으면 되지'라는 식이었다. 조영남의 눈에 그런 송창식의 모습은 산속에서 금방 내려온 수도사 같았다고 한다.
조영남이 기억하는 송창식의 일화는 굉장히 많다. 방송국 PD가 섭외하러 갔을 때 방에서 밤새 재봉틀을 돌렸다는 이야기, 전화 안 달고 사는 이야기, 절대로 아파트 1층에는 안 산다는 이야기, 이문세가 신곡을 얻으러 갔을 때 마루에서 마냥 기다리게 해놓고 몇 시간씩이나 밖을 내다보지도 않아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나 싶어 문틈으로 방 안을 들여다봤더니 부인과 가구 배치하느라 수군덕거리고 있었다는 이야기 등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살아 있는 동화이고, 무협지 소설이며, 한 편의 홍콩 코미디 영화라고 한다.
"난 평생 송창식이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없어. 아무리 황당한 소리를 해도 귀엽게 보이는 이유는 그가 남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야. 우리 쎄시봉 친구들은 그런 송창식을 좋아해. 모두 창식이 편이야. 어느 누구도 송창식을 모르는 체할 수 없어. 창식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노래를 무척 잘 부르고 기타도 굉장히 잘 치거든. 환갑을 넘긴 형주와 세환이는 몇 개월씩 창식이 스튜디오를 정기적으로 찾아가 기타의 기본법부터 새롭게 배웠는데 그 자체가 벌써 감동이지. 그런 결과가 쎄시봉 대박을 불러온 것일 테니까."
포크계의 영원한 꽃미남 김세환
김세환(63)은 쎄시봉의 막내다. 대학교 1학년 시절 경희대학교 선배였던 윤형주와 금세 친해졌고 그의 소개로 쎄시봉 친구들을 만나 가수로까지 데뷔하게 됐다. 그는 우리나라 연극·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배우 김동원의 세 아들 중 막내다.
한국의 로렌스 올리비에로 불린 멋진 아버지 밑에서 김세환은 행복한 성장기를 보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승마 강습을 배웠고, 집에 드나들던 큰형의 친구인 정성조 전 KBS교향악단장에게서 악기 다루는 법을 배웠다. 피아니스트인 어머니는 아들에게 기꺼이 기타를 사줬고 아버지는 집에서 댄스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다. 대학교 2학년이던 1968년부터는 스키를 타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스키복도, 슬로프도 없던 그 시절에 말이다. 그 정도로 그는 일상 자체가 화보인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조영남은 대학생 시절 기타를 치면서 연극단이나 뮤지컬 단체를 찾아가 배우들에게 노래를 코치해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김세환의 아버지를 처음 만났고 그 인연으로 김세환을 알게 됐다.
"쎄시봉 멤버들끼리 있을 때 가장 많은 분량으로 웃기는 친구가 바로 김세환이야. 노래 실력보다 웃기는 실력이 더 크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같이 있으면 시종 웃기지. 탄탄한 모창과 흉내 내기를 기본으로 펼치는 즉흥 코미디가 대단해."
물론 음악적 실력도 출중하다. 김세환의 달콤한 미성은 여고생, 여대생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1970년대 초반은 그렇게 김세환의 시대였다. 쎄시봉 멤버들이 김세환을 위해 만들어준 곡들은 줄줄이 빅 히트를 쳤다. 송창식은 '사랑하는 마음', 윤형주는 '길가에 앉아서', 이장희는 '비'와 '좋은 걸 어떡해'를 선사했다. 덕분에 김세환은 신인상에 이어 2년 연속 가요대상 가수왕 자리에 올랐다. 그는 밝고 건전하고 싱그러운 젊음, 구김살 없는 아름다운 청춘의 상징이기도 했다. 조영남은 그런 김세환의 구김살 없고 순수한 매력을 높이 평가한다.
"김세환에게는 뭔가를 물으면 안 돼. 한번은 이사를 할까 싶어서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전화를 했는데 대뜸 '형! 내가 거기로 갈게'라며 전화를 끊고는 쏜살같이 우리 집으로 와서는 세계의 집값 추세부터 최근 대한민국 부동산과 아파트, 빌라 현황까지 줄줄이 설명하는 거야. 그렇게 몇 십 분이 지나고 '알았다. 충분한 것 같다'고 하며 일어서는 나를 잡아 앉히더니 '아니야. 이건 더 들어둬야 해'라며 다시 몇 십 분가량 설명하더라고. 내가 약속이 있어서 나가야 한다고 했더니 돈 몇 천만원이 왔다 갔다 하는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냐고 난리를 쳤었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전거를 마련하기 위해 무심코 김세환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득달같이 달려온 그로부터 자전거가 왜 좋은지, 두발자전거와 세발자전거로 시작해서 자전거의 종류까지 한참 동안 자전거에 관한 설명을 들어야 했던 적도 있었다.
"세환이는 막내 역할을 충실히 해. 이따금씩 우리 사이에 오해가 얽히거나 무슨 문제가 불거지면 중간에서 해결하는 역할을 세환이가 맡아 해내곤 하거든."
김세환은 요즘도 종종 윤형주, 송창식과 '포크 빅 스리'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선다. 음색도 생각도 생활 패턴도 저마다 다르지만 45년 긴 세월 동안 형제 같은 우정을 나눠왔다. 그는 다른 쎄시봉 멤버들처럼 "가수라서 행복하다. 덕분에 평생 즐거웠다. 다시 태어나도 가수를 하고 싶다"라고 한다. 그런 쎄시봉을 바라보는 팬들도 같은 마음이면 좋겠다.
첫댓글 즐거운 마음으로
주~욱~읽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