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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
삿 9:1-6
1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의 어머니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그의 외조부의 집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이르되
2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3 그의 어머니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이르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
4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
5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6 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
삿 9:1-6 / [왕위를 꿈꾸는 아비멜렉] 여룹바알이라고도 불리는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하루는 세겜으로 가서 자기 외삼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2) `어르신들, 세겜 사람들에게 여룹바알의 아들 70명이 세겜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과 한 사람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낫겠느냐고 물어 봐주십시오. 그리고 내가 그들의 피붙이라는 사실도 분명하게 밝혀 주십시오.' 3) 아비멜렉의 외삼촌들은 그를 대신하여 온 세겜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였다. 그러자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이 자기들의 피붙이라는 말을 듣고는 그에게 마음이 쏠려 그를 따르기로 하였다. 4) 세겜 사람들은 바알브릿 신전에 보관되어 있는 보화 중에서 은 70개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바쳤다. 아비멜렉은 그 은으로 할 일 없이 싸돌아 다니는 건달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였다. 5) 아비멜렉은 이들을 이끌고 자기 아버지 집안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오브라로 가서 여룹바알이라고도 불리는 아버지 기드온의 아들 70명을 한 바위 위에다 놓고 모두 쳐죽였다. 이 70명은 모두 자기 형제들이었는데도 그렇게 살해한 것이다. 다만 기드온의 막내 아들인 요담만이 몸을 숨겼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6) 세겜 사람들과 밀로 사람들은 모두 세겜 부근에 있는 석상 곁의 상수리나무 아래에 모여 아비멜렉을 왕으로 받들었다.
본 장은 기드온의 첩의 아들인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되려고 세겜의 외조부의 집안 사람들을 충동하여 왕이 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1-3) 아비멜렉은 세겜에 있는 기드온의 첩의 아들입니다(8:31). 세겜은 일찍이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던 장소였고(창 12:6-7), 야곱이 땅을 사서 제단을 쌓은 곳이며(창 33:18-20), 요셉의 매장지였습니다(수 24:32). 아비멜렉은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하여 외가 친척들에게 자기를 선전해달라고 합니다. 세겜의 사람들에서 사람들로 번역된 단어가 바알의 복수형 베알림입니다. 이는 세겜 사람들은 바알 숭배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자신을 기드온의 아들이라 하지 않고 여룹바알의 아들이라 하여 바알 숭배자인 세겜 사람들에게 기드온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를 일으키도록 유도합니다. 또한 70명의 형제들이 다 왕좌를 노리는 것처럼 사실을 왜곡하였습니다. 또 하나는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며 혈연과 지역감정에 하소연하며 세겜 사람들을 충동질했습니다. 이로서 세겜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었습니다.
자기 형제를 죽이고 아비멜렉이 왕이 됨(4-6) 바알브릿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의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 신과 언약을 맺은 곳입니다(8:33). 아비멜렉은 세겜인으로부터 바알브릿 신전의 은 70개를 지원받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그래서 절제하지 못하는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매수하여 오브라에 있는 한 바위 위에서 자기 형제 70명을 죽였습니다. 그 가운데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숨어서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세겜과 밀로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왕으로 삼았습니다. 기둥은 세워진 것이란 뜻으로 기념비나 기념물을 뜻합니다. 아브라함, 야곱, 여호수아가 기둥을 남기며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언약이었습니다. 아비멜렉에서 멜렉이란 왕을 뜻합니다. 아비멜렉은 스스로 왕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지 않겠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욕심이 생기면 죄를 짓게 되고 그 죄가 다스려지지 않고 자라나면 죽음을 불러옵니다(약 1:15).
적용: 스스로 높아지기를 원하는 욕망은 거짓된 정보와 과장된 말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선동되어 함께 하나님을 거역하며 무고한 사람들의 피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거짓에 선동되어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이웃을 고통에 빠뜨리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용서받는 것은 꿀보다 더 달콤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달콤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용서하는 것이다.”(찰스 스펄전) ‘용서’의 헬라어 원어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놓아주다’라는 뜻입니다. 용서는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그 잘못에 대한 의무에서 놓아주는 우리의 선택입니다.(토니 에번스 박사)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처럼 영혼을 옥죄는 감정이 또 있을까요? 누군가가 당신이나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홀대했을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는 나를 모욕했지만, 나는 그리스도를 닮고 싶습니다. ‘...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셨던 그 분을 닮고 싶습니다.”
< 설 교 >
맷돌에 맞아 죽은 남자
삿 9장 1~15절 / 조상호목사
지나간 역사를 살펴보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며 세상을 어지럽힌 무서운 독재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몇 사람을 꼽아본다면 먼저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활동하던 로마의 네로황제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네로는 잔인하고 포악한 성격 때문에, 의붓 동생과 어머니, 그리고 자기 부인까지 차례로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64년에는 로마시내에서 일어난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전가시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대학살을 감행했습니다. 또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인종 중, 열등인종은 아무리 교육을 하고 환경을 개선해 주어도 열악한 특성이 바꾸어지지 않으므로 멸종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600백만 이상의 유대인들을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죽은 이디 아민 전(前) 우간다 대통령도 있습니다. 그는 지난 1971년에서 1979년까지 아프리카의 우간다에서 30만∼50만 명을 무참하게 죽인 아프리카 최악의 독재자로 악명이 높은 사람입니다. 또한 1979년에 대통령에 오른 후, 살육과 폭정을 일삼고, 테러 단체나 폭력 조직에 협력하고 생화학 무기를 개발하는 등 세계 평화를 위협하며, 과거 화려했던 바벨론 제국의 부활을 꿈꾸었다가 실패한 후세인 전(前) 이라크 대통령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들 외에도 소련의 스탈린, 북한의 김일성, 필리핀의 마르코스, 중국의 모택동, 등 수많은 독재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독재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권력을 잡기 위해, 또한 잡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무참하게 학살하고 죄 없는 고귀한 생명들을 처참하게 짓밟은 비극을 일으켰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비참하게 인생을 마쳤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사기 9장을 보아도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꼭 독재자들의 일대기를 그린 이야기 혹은, 현대 정치의 어두운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입니다. 8장 30절과 31절에 의하면 기드온은 많은 부인에게서 70명이나 되는 아들을 두게 되었는데, 아비멜렉은 세겜 출신의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버지 기드온이 죽자, 야심을 품고 어머니의 고향인 세겜 땅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친척들인 외가 식구들에게 말합니다.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 어미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외조부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가로되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인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의 골육지친임을 생각하라.”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아비멜렉은 혈연관계를 강조한 것입니다.
혈연관계 강조
2절을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기드온의 다른 70명의 아들들이 세겜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내가 이 세겜을 다스리는 것이 옳으냐’ 그는 친척들에게 묻고 나서 한 마디 덧붙입니다. “또 나는 너희의 골육지친임을 생각하라.” 이 말은 피를 나눈 친척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집안사람이니 이번 선거에 자기 좀 밀어 달라. 어차피 누가 당선 되나 마찬가지인데, 다른 70명을 밀지 말고, 이왕이면 집안사람인 내가 당선되면 좋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먼저 혈연관계를 이용하여 권력을 잡으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그리고 종국에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친척들을 충동질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친척들은 그의 말에 넘어갔습니다. 친척들은 알지도 못하는 다른 70명보다, 이왕이면 집안사람인 아비멜렉을 밀어주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세겜 지방에 살고 있는 다른 가문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아비멜렉 지지운동을 벌였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그 어미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온 세겜 사람들의 귀에 고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말하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 이러한 행동을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지역감정 조장이라고 말합니다.
지역감정 조장
아비멜렉의 친척들이 ‘이왕이면 다른 지역출신보다도 우리 지역 출신인 아베멜렉을 밀어주자’라고 지지운동을 벌이자,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은 우리 형제다”라고 적극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비멜렉의 인물됨이나 과거의 정치 경력이나 자기들을 이끌고 갈 비전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단지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한 가지 이유로 ‘그는 우리의 형제다’라고 외치며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들이 외친 이 말을 과거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말 아닙니까? 우리가 두고 온 조국에서 선거철만 되면 일부 몰지각한 정치인들이 지역감정을 조장하며 외치던 말이 아닙니까? 경상도지역에서는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고, 또 전라도지역에서는 “우리가 남이 아니랑께.”를 외치고, 충청도지역에서는 “우리가 핫바진가봬!”를 외치던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같은 지역출신이라는 단순한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의 인물됨과 비전과 포부는 살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무더기로 지지해주던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동향(同鄕)출신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정치자금까지 대주던 한국의 정치판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금권과 폭력정치
세겜 사람들은 동향 출신이라는 한 가지 이유로 아비멜렉을 지지하고 그에게 정치자금까지 대줍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바알브릿 묘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유를 사서 자기를 좇게 하고” 세겜 사람들은 동향출신인 아비멜렉에게 정치자금을 대주었습니다. 물론 그 정치자금이 아비멜렉의 요청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에게 정치자금을 대주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그 정치자금이 떳떳한 돈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정치 자금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들이 땀 흘려 번 돈을 주어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다시 말하면 바알 우상에 바쳤던 헌금 중 은 70개를 다시 꺼내어 정치자금으로 주었습니다. 검은 돈을 받은 아비멜렉은 그 돈으로 조직 폭력배들을 매수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사를 일으켰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오브라에 있는 그 아비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인을 한 반석 위에서 죽였으되 오직 여룹바알의 말째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아비멜렉은 돈으로 깡패들을 동원하여 한 자리에서 아무 죄도 없는 자기의 형제들을, 그것도 무려 70이나 되는 자신의 형제를 무참하게 학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좌에 올랐습니다.
그러니까 아비멜렉은 아버지 기드온이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8:23), 그 아버지의 말씀을 어긴 것입니다. 그는 왕으로 추대된 것이 아니라, 혈연관계를 앞세워, 친척들의 도움을 받고, 지역감정을 부추기어 세겜 사람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고, 조폭들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살인을 저질러 스스로 왕이 된 것입니다. 한편 70명의 형제들이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을 때, 그 중 한 사람 요담은 다행히 숨어 있다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아비멜렉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문을 듣고 그리심 산 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이 산의 맞은편에는 에발 산이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두 산이 만나는 계곡은 일종의 원형극장처럼 되어 있어서, 마이크 없이도 산위에서 소리를 치면 산 아래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요담은 그 그리심 산 꼭대기에 서서 세겜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네 나무 이야기>입니다. 네 나무 이야기는 비유설교라고도 할 수 있는데,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네 나무 이야기
어느 날 숲 속의 나무들이 감람나무를 찾아가서 “우리를 다스려 주십시오.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감람나무는 자신의 기름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을 영화롭게 해야 하므로, 이 직분을 놔두고 나무들의 왕 노릇 할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무화과나무를 찾아가서 왕이 될 것을 요청하지만, 무화과나무 역시 “나의 단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버리고 내가 나무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되지 않겠다.”고 하며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이번에는 포도나무에게 가서 요청을 하지만, 역시 포도나무도 “포도주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하는 내가 이 일을 버리고 나무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되지 않겠다.”고 역시 거절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가시나무에게 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런데 가시나무는 감람나무나, 무화과나무나, 포도나무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15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여기 “내 그늘에 와서 피하라”는 말은 ‘나의 지배를 받으라.’, ‘내가 너희들을 다스리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가시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자기가 왕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시나무가 누구를 상징하는 줄 아십니까? 바로 아비멜렉이라는 못된 녀석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네 나무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가시나무는 부당한 방법으로 왕이 되었던 아비멜렉에 대한 비유였습니다. 혈연을 앞세워 주위 여론을 조성하고, 지역감정을 조장하여 정치자금을 모으고, 검은 돈으로 조폭들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의 수많은 형제들을 죽인 후 왕위에 오른 아비멜렉을 비유적으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가시나무 왕 아비멜렉은 자신의 정적들을 다 죽이고 왕위에 오르면서 잠시 성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결코 길지 않았습니다.
가시나무왕의 최후
26절을 보면 가알이라는 새로운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세겜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28절을 보겠습니다. “에벳의 아들 가알이 가로되 아비멜렉은 누구며 세겜은 누구기에 우리가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그가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니냐 그 장관은 스불이 아니냐 차라리 세겜의 아비 하몰의 후손을 섬길 것이라. 우리가 어찌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어디에서 들었던 말 아닙니까? 가알은 전에 아비멜렉이 했던 것과 똑같은 말로 세겜 사람들을 충동질 하고 있습니다. ‘본래 세겜은 하몰의 땅이었기 때문에 세겜 사람들은 하몰의 후손을 섬겨야 하는데, 왜 이스라엘 출신인 아비멜렉을 섬기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그동안 아비멜렉을 추종했던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고 이번에는 가알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아비멜렉의 부하 스불은 자기 상관인 아비멜렉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가시나무 왕 아비멜렉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세겜 성을 공략하여 가알을 죽이고 거기에 있는 세겜 성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세겜 성을 헐고 소금을 뿌렸습니다. 소금을 뿌렸다는 것은 영원히 황폐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가시나무 왕 아비멜렉은 이것으로 멈추지 아니하고 망대로 올라간 세겜 사람들을 불로 태워 죽였는데, 그 수가 무려 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는 데베스라는 곳에 가서 진을 치고 그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망대의 문에 가까이 나아가서 망대를 불사르려 하다가 비참하게 죽습니다. 53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한 여인이 맷돌 윗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던져 그 두골을 깨뜨리니” 망대에 위에 있던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그의 두 개 골이 깨어져 버렸습니다. 아비멜렉의 죽음은 아버지를 배반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자기의 머리털이 상수리나무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다가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의 창에 찔려 죽임을 당한 압살롬의 죽음과, 헤벨의 아내 야엘이 내리친 말뚝에 죽은 시스라의 죽음과 더불어 비참한 죽음에 속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가 죽어가면서 보여준 마지막 행동입니다. 54절을 보겠습니다. “아비멜렉이 자기의 병기 잡은 소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그가 여인에게 죽었다 할까 하노라. 소년이 찌르매 그가 곧 죽은지라.” 이것은 웃지 못할 장면입니다. 가시나무 왕 아비멜렉은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죽는 것이 창피하여 두개골이 깨어져 죽어가면서도, 자기 옆에 있던 부하에게 칼로 찔러 죽여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여자가 던진 맷돌에 맞아 죽었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후세에 남길까봐 두려워 한 것입니다. 가시나무 왕 아비멜렉은 이렇게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사사기 9장은 이와 같이 가시나무 왕 아비멜렉의 비극적인 종말을 기록하며 끝내고 있지만,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자기의 자리를 지키라
첫째로 자기의 자리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요담이 비유로 들은 네 가지 나무 중 감람나무를 보십시오. 감람나무는 기름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름으로 어둠을 환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사람들의 입을 즐겁게 해줄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포도열매를 맺고 그것으로 포도주를 만들어 사람들의 기분을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나무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나무들입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다릅니다. 가시나무는 건물을 짓는 건축 자재로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벽난로에 집어넣어 집안을 따뜻하게 하는 화목(火木)으로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굳이 가시나무에게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남을 찌르는 일입니다. 찔러서 피 흘리게 하는 일을 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숲 속의 모든 나무들을 다스리겠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왕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가시나무는 자기의 분수를 몰라도 한참 모르고 있습니다. 바로 아비멜렉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이 될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왕위에 오를만한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데타를 일으켜서 대권을 잡았습니다만, 결국은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은 과욕을 부리지 않고 자기 분수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탁월했던 지휘자 가운데 한 사람인 레오나르드 번스타인에게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가장 다루기 어려운 파트나, 악기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는 대뜸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제2바이올린입니다. 왜냐하면 제2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들은 제1바이올린과 같은 열정으로 연주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저는 오케스트라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과거에 들은 바에 따르면, 우리가 오케스트라를 볼 때, 왼쪽 첫 부분에 제 1바이올린, 그 다음에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 베이스, 등 작은 악기부터 큰 악기 순으로 앉습니다. 그리고 현악기 뒤에는 관악기가 앉습니다. 그런데 청중이 보는 방향에서 제일 왼쪽에 있는 제1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을 악장이라고 부릅니다. 악장은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가장 잘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연주를 잘하는 순서에 따라서 앉습니다. 그 다음에 제2바이올린이 앉는데, 이 자리가 언뜻 보아서는 매우 애매한 자리입니다. 제1바이올린이 멜로디를 주도하는데 반해, 제2바이올린은 제1바이올린을 받쳐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제2바이올린을 다루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멜로디를 주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제2바이올린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케스트라가 구성될 수 없고 결국에는 화음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멋있고 웅장한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제1바이올린만큼 중요한 것이 제2바이올린입니다. 소프라노가 멜로디를 주도합니다. 그렇다고 합창에서 소프라노만 중요하고 알토는 중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소프라노 못지않게 알토도 중요합니다. 알토가 받쳐주지 않으면 아름다운 화음의 음악을 들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가정의 가장은 가장으로서, 가정주부는 가정주부로서의 역할이 있습니다. 학생은 학생으로서의 역할이 있습니다. 직장인은 직장인으로서, 집사는 집사로서, 목사는 목사로서의 독특한 역할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이 자신의 가정은 돌보지 않은 채 허구헛날 카지노나 출입하며 있는 돈 없는 돈 날리고 다니고, 가정주부가 가정은 돌보지 않은 채, 춤바람이 나서 밤마다 나돌아 다닌다면 그 가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정 파탄이 나지 않겠습니까? 학생이 공부는 하지 않고 당구장만 출입하고 밤새도록 인터넷에 빠져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학생의 인생 뻔한 것 아닙니까? 목사가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도 연구하지 않고, 목회는 하지 않고 놀러만 다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한 목사를 삯꾼 목사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지금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리를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있는 자리가 별로 빛이 나지 않아도, 내가 맡은 일이 탐탐치 않게 보여도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 가장 좋은 때에 여러분들을 더 귀한 자리로 이끌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2) 분명한 원칙을 세우라
본문은 둘째로 분명한 원칙을 지키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혈연과 지역감정과 검은 돈을 이용한 그의 계략 때문인 것이 사실이지만, 세겜 사람들의 협조도 일조했습니다. 만약 백성들이 협조를 하지 않았다면 그의 거사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비멜렉의 잘못도 문제지만, 백성들의 잘못도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같은 세겜 출신이라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아비멜렉을 지지 했습니다. 더구나 돈으로 조폭들을 매수하여 7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때려죽인 사람을 왕으로 떠받든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백성들에게는 정의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없었습니다. 자기들을 다스릴 지도자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없었습니다. 세겜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의 여론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습니다.
오래전 일이지만, 97년도 12월의 대통령 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했던 이회창씨의 인기는 대통령 선거 수개월 전까지만 해도 하늘을 찌를듯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 분이 대통령에 당선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나라당으로 엄청나게 많은 정치자금이 몰렸습니다. 그 분 스스로 대통령이 된 것처럼 생각을 하고 대통령처럼 행동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대통령선거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의 아들의 병역문제 때문에 대통령 선거에 떨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감사원장 시절과 국무총리 시절에 보여준 ‘원칙주의자’라는 고유의 장점을 잃어버렸습니다. 대권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누구와도 손을 잡겠다는 구세대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인 것이 그의 인기가 폭락한 또 다른 이유였습니다. 그 동안 ‘법대로’를 외치면서 하늘을 찌를 듯 했던 그분의 인기가, 표 좀 얻겠다고 전직 대통령 사면론을 들고 나오면서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하다가, 급기야는 아들의 병역문제 때문에 결정타를 맞은 것입니다.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원칙의 중요성입니다. 환경과 상황에 이끌리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고 굳건하게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겜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원칙이 없었습니다. 그저 같은 고향출신이라는 아비멜렉의 말에 현혹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원칙이 있습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 원칙이 있습니까? 세상은 흔들리고 사람은 변하여도 전혀 요동하지 않는 원칙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저에게는 목숨 걸고 붙잡을 원칙이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이 있습니다. 말씀의 원칙입니다. 여러분들도 말씀의 원칙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원칙을 고수하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진리의 말씀인 이 성경을 삶에서 가장 우선적인 원칙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을 기억하라
본문은 세째로 마지막을 기억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잔인한 방법을 동원하여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대권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22절을 보겠습니다.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삼 년에” 다시 말하면 그가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기간은 고작 3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왕에 오른 지 3년 만에 그는 왕위에서 내려왔을 뿐 아니라,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23절과 24절은 그의 죽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신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이는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인에게 행한 포학한 일을 갚되 그 형제를 죽여 피 흘린 죄를 아비멜렉과 아비멜렉의 손을 도와서 그 형제를 죽이게 한 세겜 사람에게로 돌아가게 하심이라.” 누가 아비멜렉을 망하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이 형제들에게 행한 죄 값을 물으시고, 그가 형제들을 죽일 때 보았던 피 값을 그에게로 다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또 본문 마지막 56절과 57절을 보겠습니다. “아비멜렉이 그 형제 칠십 인을 죽여 자기 아비에게 행한 악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 가시나무 왕 아비멜렉의 비참한 죽음은 무고한 70명을 악한 방법으로 죽인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에게는 두 가지 큰 속성이 있습니다. 꼭 동전 양면과 같이, 한 면에는 ‘사랑’이 있고, 다른 한 면에는 ‘공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의로운 자에게는 의로움으로 상을 주시지만, 불의한 자에게는 불의함으로 심판하십니다.
찰스 베어드라는 유명한 기독교 역사학자에게 하루는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박사님, 박사님은 평생토록 역사를 연구해 오지 않으셨습니까? 박사님께서 평생 역사를 연구하시면서 깨달은 것을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그러자 찰스 베어드 박사는 네 가지를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어떤 나라나 사람들을 멸한 때를 보면, 반드시 그 사람이나 나라가 교만했을 때였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만에 빠질 때 망하더라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아주 천천히 돌아간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50년, 100년, 200년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심판했는가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계획과 의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가면 의는 의로, 불의는 불의로,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역사의 면면을 보면 하나님의 등불이 완전히 꺼진 경우는 없다고 합니다. 항상 남겨 둔 자가 있고, 그루터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갈지 모르지만, 마지막에는 반드시 선과 악으로 구분되어집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 반드시 계산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계산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죽어서 이 땅을 떠나고 나서도 계산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지막에는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두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방법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며 살았던 아비멜렉과 같은 삶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에는 분명히 우리의 삶을 결산할 때가 있음을 기억하고 주님을 믿는 성도답게 자리를 지키고, 말씀의 원칙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삿 9장 1~21절 / 채규현목사
오늘 사사기 9장의 말씀은 사사기 전체의 가장 핵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사사기 전체에서 이야기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한 비유-요담의 비유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9장을 1절에서 6절까지, 그리고 7절에서 21절까지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1절부터 6절까지 보면 아비멜렉이 나옵니다. 기드온의 아들로서, 70명이나 되는 자식들이 있지만 그 중에 세겜에 있는 첩의 자식으로 아비멜렉이 있습니다.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은 창세기에서 보면 그 이방 족속, 가나안 족속의 왕의 타이틀이 아비멜렉이었습니다. 마치 애굽에 바로가 있고, 옛날 로마 제국에 시저가 있듯이 가나안 땅의 왕의 이름이 아비멜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름을 왜 자기 아들에게 붙여주었는지 정말 모를 일입니다. 어쩌면 그 세겜 사람들이 이방신을 섬기면서 그 가나안의 풍속대로 따라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기드온이 겉으로는 왕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속에서는 왕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이 드디어 자식에게 가서는 자기가 왕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크게 일기 시작합니다. 기드온은 별 것 아닌 것처럼 금에봇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음란히 섬기더니, 마침내 이방신을 섬기는 길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사들이 나타나서는 이스라엘 밖의 외부의 적들에 대해 싸웠는데 이 아비멜렉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끼리 서로 동족상잔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기드온은 어느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불신앙적인 요소들이 아들에게 가서는 완전히 드러나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 삶에서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 어떤 나라들보다도 비율이 높을 정도로 크리스챤들이 많이 있는데, 왜 수없이 많은 서구의 크리스챤 국가들에서 점점 믿는 백성들의 수가 줄어들까요? 그것은 바로 부모의 믿음이 건강하지 못하고 자녀들에게까지 가지 않는 데에 그 큰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들은 신앙교육을 받았는데 자녀들에게는 신앙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부모들이 신앙 교육을 받은 뒤에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때에 그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제대로 살지 않고 자기 뜻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될 때에 그 자녀들은 그 길로 가지 않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서구의 교회들이 점점 피폐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는 다시 한번 눈길을 돌려서 봐야겠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위기라고 하는 것이, 전도의 문이 막혔다 하는 것이 위기가 아닙니다. 더 큰 위기는 자녀들을 성경적으로 교육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위기입니다. 사회적으로 대학 입시라는 그 거대한 우상의 관문이 있으면서 그것 때문에 수없이 많은 크리스챤의 자녀들조차도 세상적인 삶을 살도록 내몰림을 당하고 있는데, 그 내몰고 있는 주체가 바로 부모들입니다. 일주일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자녀들을 교육하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그 전에는 그래도 가정 안에서 살았잖아요? 지금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학교와 학원에 보냅니다. 자녀를 볼 시간이 없는데 어떻게 신앙 교육을 합니까? 요즘엔 다 그래야만 한다구요? 그런다고 해서 옛날보다 실력이 훨씬 좋아진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왜 삶의 패턴만이 그렇게 바뀌었냐는 말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시스템이나 이런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어떤 시스템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 사회에서 25%를 넘게 차지하는 크리스챤 부모들이 각성하고 크리스챤의 방법대로만 한다면, 교회도 살고 나라도 살고 나라의 교육 시스템도 함께 살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크리스챤의 부모들이 크리스챤 부모 됨을 이미 포기했을 때 그 다음 나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미 포기하고 있어요. 크리스챤적 방법으로 교육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중고등부 되면 점점 수가 없어져요. 얼마 전에 전국적으로 큰 교회 목사님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분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지금 중고등부가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중등부, 고등부 학생들이 주일날 학원이 열리면 학원으로 간다는 거예요. 교회에서 봉사하는 법을 그때 배워야 하는데 고등학교만 가면 벌써부터 믿는 부모들이, 중직자 부모들이 와서 은근히 압력을 넣는 거예요. 자기 자녀는 임원에 뽑히지 않게 해 달라고요. 그런데 여러분, 한번 보십시오. 우리 교회의 현재 리더로 있는 사람들이 중고등부 때 뭐 했겠습니까? 다 리더들이었습니다. 그 분들이 중고등부 때 리더를 해서 대학도 떨어지고 못 살아서 우리 교회의 리더가 됩니까? 부모들이 정말 크리스챤의 방법으로 자녀들을 가르치지 않을 때 이러한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부모들이 정말 크리스챤의 방법으로 생활하지 않을 때, 자녀들이 그것을 배우고 부모의 삶에서는 암암리에 나타나던 죄악적 생활들이 자녀에게 가며는 드러나게 열매를 맺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날에 자기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어느 누구보다도 자녀들을 끔찍하게 생각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자녀들이 여덟, 아홉 될 때에는 어쩔 수없이 방목을 해야 합니다. 하나, 둘 되니까 끔찍이 여기고 완전히 손 안에 넣고 다 커서도 애기인줄 알고 그러고 있어요. 그 결과, 그 자녀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러한 잘못된 병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넷은 낳아야 합니다. 너무 손 안에서 내 뜻대로만 키우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 뜻대로 키우려고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뜻대로 정말 제대로 키우려면,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정말 누리게 하고 싶으시면 여러분이 먼저 크리스챤의 방법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은 여러분의 뒤꼭지를 보고 배운단 말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방식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은밀하게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지만, 그것을 본 자녀들은 대낮에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행할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을 축복하기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십시오.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께 무릎 꿇는 법을 배우십시오.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 뜻과 다르더라도 순종하겠다고 각오하고 그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 믿음을 가지고 가려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 자칫 잘못하면 여러분의 자녀가 아비멜렉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아비멜렉이라고 이름을 붙여 놓으니까 벌써 자기 마음에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마음속에서 큰 거예요. 기드온이 죽고 나서 드디어 왕이 되기 위해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합니다. 자기 외가인 세겜 사람들에게 가서 “우리가 골육 친척이 아니냐?”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서 군자금으로 은 70개를 받습니다. 아마 자기 형제가 70명이니까 한 명에 은 1개씩 값을 쳐서 암살자를 사려고 했든지 그러려고 했던 것 같아요. 하여튼 은 70개를 받아서 그걸로 비류들(깡패들)을 사서 자기 형제들을 죽입니다. 70명을 한 반석위에서 다 죽였다고 했어요. 그런데 한 반석 위해서 다 죽였다고 하는 것이 아마도 이방신에게 자기 형제들을 제물로 바친 것 같습니다. 그렇게 했는데 마침 제일 막내 요담은 빠져서 도망갔어요. 그 하나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은 왕이 됩니다. 기드온이 이런 일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자기는 얼마나 편안하게 살았겠어요? 아내도 많죠, 자식들도 70명이나 되죠, “야, 우리 집이 앞으로 번성하겠다.”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한 대도 못가서 두 명 살아남는데 한명은 살인자요 한명은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기구한 운명까지 가게 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세대에 “야, 많은 것을 누렸다.” 이것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오래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심어주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것,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진정한 축복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열심히 여러분의 자녀들을 가르쳐서 무슨 좋은 대학 가면 부모 품을 떠나게 되고 결국 부모와 같이 살게 되지도 못해요. 나중에 또 유학까지 가게 되면 사실은 영영 헤어지게 됩니다. 그걸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자식 좋으라고요? 뭐가 진짜 행복입니까? 제가 미국에 있다 15년 만에 돌아와서 보니까 가정 가정마다 변화가 참 많아요. 어려서 조그맣던 사촌동생들이 이미 결혼해서 애 안고 있는 걸 보니까 정말 변화가 많더라구요. 그런데 가정마다 보니까 오히려 공부 잘 했던 집안은 대개는 부모와 떨어져 살아요. 그런데 좀 모자라다 싶던 자녀들은 부모 곁에서 참 효도 잘하고 오순도순 재미있게 잘 살더라고요. 뭐가 진짜 행복인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자식을 키우는 것이 제일 잘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금 기준으로 이것이 최선이라고 믿는 것이 시간이 지나서 보면 아닐 가능성도 대단히 많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 최선인지 아닌지 모르니까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자식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고, 나는 열심히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더라는 겁니다. 어쩌면 지금 당장에는 우리 집 자녀가 다른 집 자녀들보다 더 늦게 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마지막 종착역은 모르는 겁니다. 축구경기 보셨잖아요? 게임은 끝나 봐야 알아요. 우리의 자녀들도 마지막 그 인생이 끝나는 때에 비로소 잘잘못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두고 산다면, 왜 우리 자녀들에게 천국 소망이 아니고 당장 눈앞의 이것이 내 인생의 전부라는 것만 가르치냐는 말입니다. 정말 그 면에서 하나님의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뜻이 뭔지 생각해 봅시다. 정말 여러분의 자녀들을 사랑할 때에 먼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무릎을 꿇으십시다.
드디어 이제 아비멜렉이 자기 고향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왕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게 최초의 왕은 사울이 아니고 사실은 아비멜렉입니다. 그런데 그가 왕이 되고 난 다음에 그 왕을 세우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도망갔던 말째 아들 요담의 입을 빌어서 요담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게 7절부터 21절까지의 내용입니다. 7절부터 봅시다. “혹이 요담에게 그 일을 고하매 요담이 그리심산 꼭대기로 가서…” 사실 그리스심산이면 세겜에서 바로 가까운 산이잖아요? 눈 아래에 있는 세겜을 보고 그리심산 꼭대기에서 소리를 칩니다. 이 그리심산이라는 말이 축복의 산이라는 뜻인데 축복의 산에서 요담이 하는 말은 그리 축복된 말이 아니에요. 산꼭대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그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그러한 모양새입니다. 그렇게 전해서 나무의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자, 나무들이 나무의 왕을 세우려고 합니다. 왕을 세우려고 감람나무에게 가서 이야기했더니 “내게서 나는 기름을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유익하게 하는데 왜 내가 나무 위에서 요동하리요.” 합니다. 무화과 나무에게 갔더니 “내가 열매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유익하게 하는데 왜 내가 나무 위에서 요동하리요.” 포도나무에게 갔더니 “내게 나는 포도와 또 거기서 나는 포도주로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데, 그게 내 삶의 목적인데 뭐 하러 다른 나무들 위에 가서 요동하리요.” 마지막에 가시나무에게 가서 왕이 되라고 했더니 가시나무가 이야기합니다. “다 누구든지 내 밑에 오라. 내 밑에 오지 않으면 불사르리라.” 그런데 가시나무에게 다른 나무들이 가까이 가면 갈수록 어떻습니까? 가시가 있어서 아프고 가시나무라 잎이 없어서 그 밑에 가서 쉴 수도 없어요. 햇볕을 피할 수도 없고 괴로움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그 이야기입니다. 지금 사사기의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가시나무를 왕으로 세운다는 말입니다. 그 일차적인 가시나무가 아비멜렉이예요. 그리고 그것뿐만이 아니고 이것이 예언적 비유에요. 사사기의 제일 큰 주제 중의 하나가 뭐냐면 “너희가 하나님을 진정 너희의 왕으로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그 질문이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과 함께 이 말씀을 볼 때에도 여러분이 항상 여러분의 마음에 그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내 삶 속에 하나님이 진짜 왕이신가? 내 모든 삶 속에 하나님이 정말 왕이신가?” 바로 이 요담의 비유 내용이 그 이후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계속 읽어보면 바로 이 나무의 비유, 특히 이 가시나무의 비유가 그대로 적용이 돼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으로 세우려고 하는 것은 전부 인간적인 왕이에요.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왕입니다. 그런 왕들이 세워졌을 때 오히려 고통과 고난과 어려움밖에는 그들에게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는 어떻습니까? 당장 여기서 아비멜렉이 왕이 되는 과정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비멜렉이 왕이 되는 과정의 제일 처음에 어떤 일이 나오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세워서 은혜를 베푼 기드온과 그 가족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과 하나님이 세우셔서 내게 은혜를 베풀게 하신 그 사람을 잊어버리는 것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리더도 마찬가지이고 여러분에게 복음을 증거한 전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은혜를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면 여러분에게 도움을 준 그 사람들을, 물론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주셨지만 바로 그 사람들에 대한 은혜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끊임없이 고마움을 느끼고 고마움을 표현할 때 여러분의 마음에 그 처음의 마음, 고마웠던 마음, 하나님께 가까이 갔던 그 초심이 여러분에게 더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크리스챤들은 누구보다도 은혜를 받은 그 사람들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것이 내 모든 은혜의 뿌리들입니다. 이것은 개인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고 기관도 마찬가지에요. 사실 한국 교회가 서게 된 게 뭡니까? 많은 서구의 선교사들이 그들의 목숨도 버리고 그들의 모든 인생길도 바꿔가면서 100년 전에 척박한 땅에 와서 복음을 증거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있지 않습니까? 그걸 잊으면 안 됩니다. 그 선교사들의 노고, 그 선교사들의 수고와 헌신, 그리고 그 때 한국 교회를 위해서 헌신했던 서구 교회들의 헌신, 잊으면 안 됩니다. 광주에서도 양림동 근처 전체가 사실은 선교사들이 구입해 준 땅들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도 그러한 그 모든 복음의 성지가 바로 양림동 근처에 있습니다.그 선교사들의 헌신을 잊지 않는 행동들이 뭘까요? 우리도 빚진 자로서 그 빚을 갚아야 합니다. 열심히 우리도 우리에게 와서 복음을 증거한 그 선교사들을 잊지 않고, 우리도 선교사로 가고, 선교사를 보내고, 우리도 같이 거기에 헌신하고, 금전적으로, 기도로, 내 몸으로, 노력으로, 100년 전 우리나라와 같았던 나라들, 민족들에게 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더욱 더 그러한 면에 힘쓸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교회가 세워진 것도, 광주 시내에 먼저 세워졌던 교회들이 세웠잖아요. 그러면 그 은혜도 또한 잊지 말아야 됩니다. 그 하나님의 흐름 속에서 우리도 해야 될 일은 우리도 그와 같이 교회를 세우는 일들을 해야 합니다. 처음에 우리 교회가 세워질 때에도 그 먼저의 교회에서 성도들도 떼고 교역자도 파송하고 그렇게 해서 교회를 세우는 것 아닙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그런 일들이 거듭거듭 있어야 합니다. 은혜를 잊지 않는 행동들이 계속해서 나와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즘에 개척하기가 점점 더 힘들다고 해요. 전에는 소명을 받은, 사명에 투철한 목사님이나 전도사님 한 분이 하나님께 응답을 받고 어디로 가서 사모님과 둘이서 지하든지 어디든지 개척을 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그래서 부흥하고 그랬습니다. 오늘날에는 점점 그게 힘들어집니다. 우선 일차적인 문제가 전세금이 없어요. 옛날에는 그렇게 비싸지 않았습니다. 지금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무슨 돈으로 전세를 얻어서 교회를 세웁니까? 거기서부터 걸림돌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들도 많아지니까 개척교회 갈 일이 없습니다. 점점 개척교회가 제대로 세워질 가능성이 확률적으로 희박해집니다. 아무리 능력 있는 교역자들이 가더라도 그 교회가 제대로 세워지기는 엄청나게 힘들단 말입니다. 요즘에는 성도들이 약아서 교회에 찾아가서 사모님 한 분만 있으면 얼른 나와요. 몇 명만 있으면 부담되니까 안 가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게 바로 저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또 큰 교회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들을 세워나가는 것이 우리 교회를 세웠던 그 분들의 정신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어찌하든지 우리도 교회를 세우는 일에 매진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에 교회 개척팀이 생겨야 하고 최소한 2년 동안은 함께 교역자와 모든 부서를 맡아 줘야 합니다. 처음에 제가 개척교회 하는데, 절대로 교회는 혼자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제가 앞에서 설교하고, 제 아내는 반주하고, 앞에 서너명 앉아 있는데 주일학교는 누가 해요? 혼자 할 수 없는 게 교회입니다. 그래서 아예 교회 개척팀이 있어서 그것을 다 맡아주고 해 주는 사람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가 세워지기 쉬어져요. 그러면 한 2년 정도 있어서 어느 정도 교회가 세워져서 ‘아, 이 교회에서 내가 계속해서 봉사해야겠다.’ 이런 은혜가 그 심령에 있으면 거기 눌러 앉고, ‘여기서의 일차적으로 하는 하나님의 일이 끝났다.’ 하면 본교회로 다시 돌아와요. 그리고 또 다른 데에 개척팀으로 나가는 거예요. 저는 이런 개척팀들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100년 전에는 한 도시에 교회가 하나만 있으니까 한나절 걸어와서 예배드리고 또 한나절 가기 때문에 예배드리고 모이는 것이 힘들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그쪽 동네, 동네마다 교회를 세우는 일을 처음에 했어요. 우리도 그 일을 하자 이겁니다. 우리도 원래 그렇게 해서 세워진 교회니까 그 은혜를 잊지 말고 해 봅시다. 우리에게 할 일이 많이 있어요. 교회 와서 ‘나를 잘 돌봐주나, 안 봐주나….’ 그러다가 심방도 안 온다 싶으면 시험 들고 말하고 왕왕거리지 말고, 어떻게 하면 이런 봉사할 곳이 있는가 생각해서 함께 열심히 같이 한번 봉사해 봅시다. 일을 할 때 시험들 일도 없고 말할 일도 없고 어떻게 하면 이 곳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까 그걸 가지고 한마음이 되어서 일할 수 있습니다. 인생길 가면서 세상 고민만 머릿속에 들고 가는 사람을 일찍 늙어요. 세상 고민이 머릿속에 있으면 그 속에 천국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고민을 한번 해 보십시오. 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고민을 하게 하고 싶어요. 그럼 여러분이 일을 하려고 노력해 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일자리는 얼마든지 드릴 테니까요. 머릿속에 하나님의 고민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 천국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세상 고민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또 우리 교회 안에서, 여러분이 있는 자리에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누구를 통해서 왔던가를 깨닫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여러분이 할 일도 저절로 생깁니다.
오늘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반대의 길로 가지 않습니까? 기드온을 잊어버려요. 은혜를 준 대상을 잊어버립니다. 잊으니까 갈등이 생기고 문제가 생깁니다. 드디어 기드온의 자식 70명을 죽이는 일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하게 된 마음의 발단이 뭡니까? 세겜 사람들이 그렇게 같이 아비멜렉의 일에 동조하게 된 이유가 뭡니까? “우리 형제라.” 1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오늘날 일어나서 우리 아버지의 집을 쳐서 그 아들 칠십인을 한 반석 위에서 죽이고 그 여종의 아들 아비멜렉이 너희 형제가 된다고 그를 세워 세겜 사람의 왕을 삼았도다.” 리더를 세우고 왕을 세우는 데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고 인간의 기준, 내 기준으로 세운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에요. 일반적인 우리 사회의 선거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적 기준은 뭡니까?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세상적 기준은 그렇습니다. “우리 동네 사람인가 아닌가?” 계속 고향을 가지고 가르는 것을 보면 무서워요. 꼭 가를 때, 먼저 남북으로 갈라요. 남북으로 가르고 나면 동서로 갈라요. 한번 동서로 가르고 나면 남북으로 또 갈라요. 남북으로 가르고 나면 또 동서로 갈라요. 그리고 마직막에는 자기 집에서 형제끼리도 갈라지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리더를 뽑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간적인 방법으로 나와 관계가 있냐 없냐 그것만 가지고 뽑게 될 때 진정 하나님이 세우시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지도자가 세워지겠냐는 말입니다. 저는 그게 참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온 사회의 리더들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현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하고, 앞으로 대통령이 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어느 교회에서는 끊임없이 현 대통령과 앞으로 대통령이 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대요. “하나님, 정말 대통령의 자질에 맞는 사람을 뽑게 하옵소서. 우리 지역의 시장도 마찬가지고, 국회의원도 마찬가지고, 가장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가장 도움이 되는 그런 사람들을 뽑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합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그렇게 해서 우리가 우리의 소중한 한 표를 던져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 리더가 될 때에 우리 삶도 평안해집니다. 그것은 일반 사회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리더를 세울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우자는 말입니다. 요즘에 많은 큰 교회들이 담임 목사님이 은퇴하고 새로운 목사님으로 채워지는데, 재미있는 현상들이 많습니다. 그 새로운 목사님의 조건에 보면, 물론 오래 해야 하니까 나이제한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게 “박사” 일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 같은 경우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면 오히려 교회에서 안 뽑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가르치려고 배웠기 때문에 목회와는 서로 안 맞지 않습니까?” 하면서 안 뽑아요. 그런데 우리는 이 타이틀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에서는 정말 좋은 목회자를 발견했는데 박사 학위가 없다고 그 분을 청빙 안 했어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어느 교회는 청빙조건에 “목사님, 사모님 양쪽의 친가 외가까지도 다 믿을 것” 목회하는 것하고 외갓집이 예수님 믿는 것하고 무슨 관계입니까. 그리고 영어를 어떻게 해야 하고, 외국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고, 학위가 어떻고 해서 진짜 거기에 딱 맞는 목사님 한 분을 모셔다 놨는데 그 분이 지금 목회를 잘 못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이것이 실제로 목회자로서의 자질을 이야기한 기준이 아니라 세상적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자질을 잘 봐야 할 것 아닙니까? 우리 교회에서 장로님 뽑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권사님, 안수 집사님, 모든 중직자들을 뽑는 것에서도 인간적 기준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 무슨 인기투표 하듯이 해 가지고, 계를 최소한 10개는 들어야 뭐가 된다는 말도 있고…. 매일 계만 다니는데 언제 교회 일을 하고 언제 무슨 일을 합니까? 그리고 계 할 때 보면 가서 무슨 얘기 하겠어요? “우리 교회 잘 돼야지.” 그 얘기 합니까? 말하기 좋은 헛소문, 입소문들만 그냥 증폭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만약 인기투표 식으로 누가 중직자가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교회의 중직자들을 뽑을 때 봐야 할 기준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자리에 대한 야망이 있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여기 지금 비유에 나오는 감람나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는 전부 어떤 사람입니까? ‘어찌하든지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 생활을 할 것인가? 어찌하든지 내가 우리 성도들에게 유익한 삶을 살 것인가?’ 이것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리가 있건 없건 관계없이 그 분들은 열심히 일을 잘 할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뽑혀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하시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궁극적인 질문이 “너희 가운데 하나님이 왕이시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교회의 왕은 하나님이시냐?” 바로 그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왕으로 모셔진 교회라면 우리가 함께 교회의 지도자를 뽑을 때 기도하며 누가 가장 합당한 사람인가 기도하며 뜻을 모으고 세워야죠. 그렇게 되면 정말 섬기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고, 섬기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일을 맡게 될 때 모든 성도들이 거기서 복을 받습니다. 내 손으로 뽑지만 그게 결국 심는 대로 거둡니다. 자기에게 돌아옵니다. 지금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뽑았잖아요? 결국 그 아비멜렉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인간적으로 할 때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면을 우리가 잘 생각해 봅시다. 정말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 많은 성도들이 있지만 그 교회가 가는 방향과 비전을 정하는 것은 리더들이 정합니다. 이 리더들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서 엄청나게 그 교회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우리 교회도 이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훈련 받아야 되고, 또 훈련 받으면서 그 안에서 가장 그 자질에서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사람들이 리더가 될 수 있는 시스템도 갖고, 그런 사람들을 뽑으려는 그러한 은혜로운 마음들이 온 성도들에게 있을 때 우리 교회는 앞으로 10년, 20년, 100년이 탄탄합니다. 우리가 든든한 교회로 세워갈 수 있습니다. 사실 지금부터 20년, 30년 전에 한국 교회에서 뿌린 씨앗을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뿌리는 것이 우리의 자녀들, 우리의 말년, 이 때에 우리가 또한 그 열매를 거둡니다. 마음을 다해서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하면서 그 안에서 우리 교회에 세워진 리더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우리 교회에 세워질 직분자들, 중직자들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우리 한국 교회에 세워질 리더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합시다. 그러면 우리 전체 한국 사회가 은혜롭게 변할 것이고 우리가 믿음 생활 하는데 부족함 없이 평안하게 변할 것이고, 또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교회, 수많은 사역자들이 우리 교회에서 나와서 앞으로 한 교회를 짊어질 수 있는 목회자들도 많이 나오고 사모들도 많이 나오고, 또 교회 안에서 일을 하는 아주 대표적인 가장 존경받는 장로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이 나올 수 있는 그러한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둡니다
삿 9:1-6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반역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드온의 서자 가운데 하나인 아비멜렉이 기드온이 죽자 세겜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삼은 후, 기드온의 아들 70명을 죽이고 세겜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이러한 일이 발생하게 된 원인인데, 가장 기본적인 원인은 가정교육의 부재에 있었습니다.
기드온은 70명이나 되는 자녀를 둔 탓에 자녀들에 대한 올바른 가정교육과 신앙교육을 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서자였던 아비멜렉은 다른 형제에 비해 더욱 기드온의 사랑을 적게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비멜렉은 태생적인 열등감에 가정에서의 교육의 부재까지 겹쳐서 인격적으로 결함을 지닐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권력 쟁취를 위해 형제들을 살해하는 극악무도한 범죄까지 자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정에서의 신앙교육 부재로 인해 그 가정이 파탄을 맞이한 것은 기드온의 가정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사무엘상에 등장하는 엘리 대제사장의 가정 또한 가정에서의 신앙교육 부재로 파탄에 이른 대표적인 실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는 당대의 대제사장이면서도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를 신앙으로 바르게 교육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악한 자들로 성장하였고, 심지어 이들은 성전의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는 범죄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전쟁 중에 죽고 엘리도 의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맙니다(삼상 2:12-4:18).
여러분, 이처럼 가정에서의 신앙교육 부재는 가정을 파탄으로 이끌어 가는 가장 큰 원인이 됩니다.
가정교육이 잘못된다면 자녀들이 인격적인 결함을 갖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은 학교보다 더 중요한 교육기관이고, 부모는 교사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미치는 가장 가까운 교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부모들은 가정교육에 소홀합니다.
모든 교육을 학교와 학원에 위탁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하니 ‘집은 밥 먹고 잠자는 곳’으로 전락하고 자녀와 부모와의 대화는 중학교에만 들어가도 끊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부정적인 결과들이 온통 매스컴을 뒤덮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말을 거역하고, 부모를 때리고, 심지어 부모를 살해하기까지 합니다.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것은 다반사입니다.
그런데 이런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 중에는 사회 저명인사도 있고 심지어 교사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결과들은 교육기관의 교육이 자녀의 바른 인성과 신앙을 키워 주지 못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바르게 성장하기를 바라신다면 오늘부터 가정을 제1의 교육의 장소로 삼고 여러분이 먼저 본을 보이는 교사가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처음에는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잘 되다가 빗나가는 일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으로 교육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면 반드시 여러분의 자녀들이 하나님 안에서 아름답고 바르게 성장할 것입니다.
2.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서 아비멜렉을 따라 죄악된 길에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혈연을 내세워 도움을 청한 말은 세겜 사람들이 미혹당하기에 충분했고, 비록 서자이기는 하지만 기드온의 아들이었으므로 지도자로서의 역량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겜 사람들이 따랐던 아비멜렉은 70명의 형제를 죽인 악한 자였습니다.
그 어떤 변명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악한 자였습니다.
그는 결코 바른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세겜 사람들은 그를 지도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악을 행하다 파멸을 맞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거짓 선지자와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이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며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마 24:23-28).
예수님의 말씀대로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그리스도들이 나타나 여러 가지 기적과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또 그들에게는 아비멜렉 처럼 나름대로의 지도력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추종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유혹에 넘어간 사람은 결국 가정이 파탄에 이르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서 폐인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영혼까지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 비참함에 이르게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혼란과 거짓이 난무하는 이 마지막 때에 누구를 우리의 지도자로 삼아야 할까요?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언의 말씀과 언약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우리의 지도자로 삼는다면 예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복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나는 과연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 스스로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3. 이어지는 5-6절은 아비델렉이 자기 형제 70명을 죽이고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왕이 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아비멜렉의 천륜을 거스른 엄청난 악행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악행을 저지른 그는 심판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왕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살다보면 가끔 이와 같이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취합니다.
또,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뇌물을 주고 인맥을 동원하며 어떠한 악한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출세 길이 빨리 열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정도를 가는 사람들은 때로 낙심하며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악의 승리는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것은 지극히 짧은 순간의 승리에 불과합니다.
이런 악의 승리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앞에 둔 일시적인 승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기쁨의 결실을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기억하며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인내하며 사랑의 씨앗과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해 주실 줄 저는 확신합니다.
오늘, 이를 위해 더욱 깊이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비멜렉의 판에서 우리의 판이 보인다
삿 9:1-6 / 더온누리교회
기드온이 많은 아들들을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났다.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세겜 첩(필레게쉬_두 번째 아내라는 의미이지만 정식 아내이다)의 아들이다. 그는 세겜으로 와서 왕이 될 계획을 세우고 주민들의 지지와 후원을 받는다. 그리고 그 후원으로 형제들을 모조리 몰살하고 세겜의 왕이 된다. 이런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게 된다.
*비극의 서막
기드온은 왕은 아니었다. 하지만 왕과 같은 영향력을 끼쳤다. 그렇기에 모세의 당부를 잊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이 말씀을 외면하여 뿌린 불순종의 씨앗이 비극의 열매로 다가왔다. “17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18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20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신 17:17-19상) “
*아… 밤에라도 순종했고, 순종하려고 증거를 구하며, 여호와의 영으로 덧입었던 그 기드온은 어디로 갔을까? 승전을 확정한 순간 하나님께 경배 하지 않고 겉으로만 평화를 구가하며 자기 이름만을 남긴 것이 40년 만에 “또” 우상숭배의 열매를 낳았다.
9장을 시작하면서 사사기 저자는 기드온이라는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다. “여룹바알”, “바알이 싸우려는 자”라는 의미의 이름만 계속 사용한다. 왜 그랬을까? 세겜 사람들은 이미 바알브릿을 충실하게 섬기고 있었다. “바알브릿”의 의미는 “언약의 주, 언약의 신”으로 “엘 브릿”으로도 불리우는 가나안 우상이었다. 세겜 사람들은 이미 언약의 하나님을 떠나 언약의 바알을 충실하게 따르는 다른 민족이 되어 버렸다. 추측컨데 세겜은 기드온이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바알브릿 신전이 있었을 것이다. 세겜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기드온을 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세겜은 에브라임 지파에 속했다. 스스로 가장 강한 지파라고 여기는 그들에게 기드온의 40년 동안의 영향력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호의적일 수 없었다.
*또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아버지는 왕이시다”이다. 여룹바알(바알이 싸우려는 자)를 아버지로 둔 그는 첩의 아들이었지만, 어머니의 고향 세겜을 기반으로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망을 가지고 찾아 오면서 이 서사는 시작된다. 9장에서 기드온의 이름은 “여룹바알(바알이 싸우려는 자, 바알과 싸우는 자)로만 사용되었다. 그리고 세겜 사람들은 무려 15회나 사용된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아비멜렉이 아버지의 이름을 기드온으로 부르지 않고 여룹바알로 사용하여 바알을 “바알브릿”으로까지 숭배하는 세겜 사람들의 마음에 “분노”를 집어 넣어 자기 세력화 하려는 것을 꼬집는다. 그는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왕이 되고자 했다.
1. 혈연에 호소했다(1-3절).
먼저 “어머니의 친척들과 그들의 외조부의 온 가족”을 찾아가서 말했다. “세겜 성읍의 모든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 주십시오. 여룹바알의 아들 일흔 명이 모두 다스리는 것 하고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 하고 어느 것이 더 좋은지 물어 보아 주십시오. 그리고 내가 여러분들과 한 혈육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십시오(새번역_2절).” 이 말을 들은 세겜 사람들의 마음이 기울어져”아비멜렉이 우리 형제(우리의 혈육)임을 선언”한다(3절). 아비멜렉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없으니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자신의 외가 친척들을 의지하여 세겜 사람들의 권력욕에 불을 지핀다. 지리적으로도 오브라에 있는 기드온의 70명 아들들보다 아비멜렉이 더 가까웠기 때문에 그의 말에 현혹 되고 말았다.
*혈연, 지연, 학연은 객관적인 시각을 왜곡 시킨다. 한쪽으로 치우치고 반드시 분별력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즉,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의 권력욕을 자극하여 자신의 권력욕을 채운다.
*욕망이 이렇게 무섭다. 객관적으로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위한 선택보다 자신의 성향을 따라 독불장군 식으로 행동하게 한다. *왕이 되려는 욕망에 눈이 멀어 왕의 성읍이 되려는 욕망에 따른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세겜 사람들의 욕망을 건드린다.
2. 우상의 돈으로 리더십을 사다(4, 6절)
아비멜렉의 편이 되기로 한 세겜 백성들은 ‘바알브릿’의 신전에서 비자금 은 70개를 꺼내 기드온에게 건넨다. 흘려 보낼 수 있지만, 바알브릿의 신전에서 은 70개’를 내어 준 것은 우상에게 드려진 불의한 돈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된다.
불의한 바알의 돈으로 아비멜렉은 방탕하며 살았다. 바알의 원대로 산 것이다. 불의한 물질은 사람을 방탕하게 만든다. 그 방탕이 하나님으로 부터 더욱 멀어지게 한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할 이들을 돈으로 사되 “폭력배”들을 산다.
* 바알에게 바쳐진 불의한 물질을 가지고 폭력배들(비류들)을 사서 폭력으로 자신의 형제들을 없앴다.
* 또, 상수리나무 기둥 앞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우상을 숭배하는 장소에서, 우상 앞에서 왕이 된 것이다. 철저하게 우상에 기대어 산 왕이었다.
3. 형제들을 몰살하다(5-6절)
아비멜렉은 목력배들을 이끌고 오브라로 향한다. 그리고 70명의 이복형제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을 묶어 한 바위 위에 꿇어 앉히고서는 자신이 돈을 주고 산 비류들의 손에 죽임 당하게 한다.
이런 폭력과 살인으로 할아버지의 고향 오브라의 주민들이 겁에 질려 자신에게 복종하게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40년전 미디안이 사용했던 “진멸하고자” 한 폭력적 탄압과 다를 바 없다. 권력 욕심에 눈이 멀어 가족 공동체를 완전히 파괴 시켜 버린다. 마을 공동체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이토록 깊고 크다!
나는?
-아비멜렉은 정치적 야망을 위해 형제들을 몰살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감행하고서라도 그는 왕이 되고 싶었다. 그에게 가족과 하나님은 왕이 되려는 길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 나라, 백성”들 가운데 “분노”를 심었다는 점이다. 세겜 사람들이 이방인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어찌되었던 에브라임 지파에게 분배 된 땅이었고 그곳에는 가나안 정복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께서 언약식을 갱신하신 땅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분노와 적개심”을 불러 일으켜 개인적 야망의 근거지로 삼았다.
-이런 모든 행동들은 철저히 “하나님을 떠난” 것을 그대로 보여 준다.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와 땅에 인간 왕이 스스로 되겠다고 분노를 이용하고 혈연과 지연을 바탕 삼아 우상의 돈으로 세력을 사서 형제들을 몰살한 것이다. 그것도 “한 바위 위에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보란 듯이 악을 행하였다.
-철저하게 힘으로 밀어부쳐 공포로 몰아부쳐 무릎 꿇게 만든 것이다. 악이 득세하도록 하나님은 “자기 손견대로” 왕이 되고자하는 아비멜렉을 지켜 보셨다. 이제 곧 그에 대한 심판의 칼을 빼실 것이다. 지금 악을 행하는데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악행을 정당화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의 책임을 물으신다!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되고자 벌인 판에서 지금 우리의 판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우리도 여지없이 스스로 뭔가를 이루기 위해 관계의 분노를 이용하고, 혈연과 지연 찬스를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공정을 외치지만, 나에게 혈연과 지연이 없는 것에 한탄한다. 나의 분노에 동조해 주기 바라며 공동체는 안중에 없는 경우도 꽤 있다. 나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 공동체의 구조를 바꾸라고 쉽게 분노하고, 이 분노에 동조자들을 끌어 들인다… 아비멜렉과 다를 바 없다.
-결국 아비멜렉의 판의 중심에 왕이 되려는 자기 욕심의 우상이 자리 잡고 있듯, 나의 삶의 판에 하나님은 온 간데 없고 욕심만 덩그러니 자리잡고 있다면, 기회와 여건만 주어진다면 이 시대의 아비멜렉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그래서 아비멜렉의 모습에서 내가 투영 되는 것을 외면할 수 없다.
*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민족의 대선 과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들을 ‘분노’하게하여 자기 세력화 하는 지도자를 경계해야 한다. 혈연과 지연을 강조하며 세력화 하는 것도 분별할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우상에 기대어 세력화를 꾀하는 이도 경계해야 한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주변을 이용만 하는 지도자도 분별해야 한다.
*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역사가 확연히 변화 될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예측하는 시대, 공교롭게도 우리는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 코로나 이후의 시대를 열어갈 지도자는 적어도 국민들의 분노를 부추겨서 권력을 잡아서는 안 된다. 비전이나 철학이 아니라 혈연과 지연으로 세력화 하려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지난 세월 이 폐해를 여지껏 받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 우리의 정치 현실과 너무도 닮은 본문 말씀에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욱 기대하게 된다. 적어도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뜻을 분별하게 하셔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니, 이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을 신뢰한다.
* 아무쪼록 철학, 비전, 사명도 없이 “분노, 적개심, 지연, 혈연”에 기대어 지도자가 되려는 이가 국민의 심판을 준엄하게 받게 되는 대선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 나라의 정치판에 한숨이 나오지만,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욱 갈망하게 되는 아침이기에 소망을 가져 본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이시기에 소망을 포기하지 않으련다!
**주님, 대선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세워 지리라 기대합니다.
**주님,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비전, 철학, 사명이 있는 지도자를 세워 주십시오. 단지 “분노”에 자극 받아, 혈연과 지연이기에 무작정 선택하지 않기를 빕니다. 제게 지각을 주십시오!
불의한 세상 완전하신 하나님
삿 9:1-6 / 김광석목사
오늘 본문은 기드온이 죽고 그의 아들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기드온의 이름을 계속 여룹바알이라고 합니다. 여룹바알이란 바알과 더울어 싸우는 자란 뜻입니다. 기드온은 바알과 더불어 싸운 자였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4절에 보시면 바알의 신전에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습니다. 이것은 아비멜렉이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바알과 싸우는 자가 아니라 바알을 섬기는 자들과 가까이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비멜렉은 그의 아버지 기드온의 좋은 점을 본받지 않고, 나쁜 점은 더 부각시켰던 인물이었습니다.
1절에 보시면 외가인 세겜에 갑니다. 이것도 아주 정치적인 의도가 있습니다. 기드온은 그의 고향인 오브라에 에봇을 만들어서 그것을 섬기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드온이 죽고 난 후에 사람들의 관심은 당연히 오브라에 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세겜사람들은 이것에 대해서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보통 정치인들은 항상 소외감을 느끼는 지역에 가서 사람들을 선동하는데, 아비멜렉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겜은 원래 여호수아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언약을 맺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사람들은 이 세겜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언약을 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세겜은 그들의 언약과는 정반대로 바알우상을 섬기는 곳이 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은 그의 이름대로 자신이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서 세겜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라고 합니다.
기드온의 아들 칠십명이 너희를 다스리는 것이 나으냐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리는 것이 나의냐고 말한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칠십명이 너희를 다스려 혼란스럽게 살겠느냐 아니면 한 사람이 다스려 안정을 추구하겠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 명이 다스리는 것보다 자기 혼자서 다스리는 것이 낫다는 말을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와와 골육임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정치인들이 항상 자신과 같은 고향사람인 것을 강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골육이라는 말은 뼈 중의 뼈요 살줄의 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을 자기 편 만들기 위해서 아주 친밀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모두 자신이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3절을 보시면 “3. 그의 어머니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이르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합니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형제들이 세겜의 모든 사람에게 그는 우리 형제라고 합니다. 요즘식으로 하면 “우리가 남이가, 우리가 고향사람이 아니냐 그러니 그를 우리 왕으로 삼자”라고 합니다.
또 4절을 보시면 “4.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라고 합니다.
바알브릿이란 바알과 언약을 맺다라는 말로 바알과 같은 말입니다. 아비멜렉은 바알의 신전에서 은칠십개를 받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정치자금입니다. 또 바알의 신전에서 돈을 받는다는 말은 이제 바알과 싸우지 않고 바알을 인정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그를 따르게 합니다.
그리고 5절에 “5.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라고 합니다.
아비멜렉은 그의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서 자기 형제 70명을 한 바위에서 끔찍하게 죽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의 막내 아들 요담을 숨어서 살아남습니다.
결국 이 요담이 살아남아서 아비멜렉의 부당함을 나타내고, 아비멜렉을 저주하는데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유의해야할 이름이 요담이라는 이름입니다. 요담이란 뜻은 여호와는 완전하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건들을 통해서 과연 여호와 하나님은 완전하신 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집안에서 자신의 모든 형제들을 죽이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바알과 더불어 싸운 아버지 밑에서 바알과 친한 아들이 나올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이 왕이신 이스라엘에 인간이 스스로 왕이 될 수 있는가? 또 무엇보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세겜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한 언약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런 상황가운데 하나님은 과연 여전히 완전하신 가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완전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완전하신 하나님의 공의대로 아비멜렉은 스스로 머리가 되려고 하다가 한 여인의 멧돌에 머리가 깨어져 비참하게 죽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만을 보면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과연 하나님은 완전하신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완전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룹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순간적으로 마치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ㄴ니까? 내가 하나님께 기도했던 일들과는 정반대의 일이 순간적으로 일어날 때가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의 삶가운데서 도무지 이해할수 없는 일이 있습니까? 그럴 때 여러분 요담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분명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서 자기 마음대로 행할 때 하나님은 절대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십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이해를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의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이 모든 일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도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또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내 삶의 주인이자 왕으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 모든 삶을 완전하신 하나님만이 주관하시도록 기도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