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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의 막내아들 요담
삿 9:7-21
7 사람들이 요담에게 그 일을 알리매 요담이 그리심 산 꼭대기로 가서 서서 그의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세겜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의 말을 들으시리라
8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자신들 위에 왕으로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9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10 나무들이 또 무화과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11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12 나무들이 또 포도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13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14 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15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16 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이것이 여룹바알과 그의 집을 선대함이냐 이것이 그의 손이 행한 대로 그에게 보답함이냐
17 우리 아버지가 전에 죽음을 무릅쓰고 너희를 위하여 싸워 미디안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냈거늘
18 너희가 오늘 일어나 우리 아버지의 집을 쳐서 그의 아들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이고 그의 여종의 아들 아비멜렉이 너희 형제가 된다고 그를 세워 세겜 사람들 위에 왕으로 삼았도다
19 만일 너희가 오늘 여룹바알과 그의 집을 대접한 것이 진실하고 의로운 일이면 너희가 아비멜렉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것이요 아비멜렉도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려니와
20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에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 하고
21 요담이 그의 형제 아비멜렉 앞에서 도망하여 피해서 브엘로 가서 거기에 거주하니라
삿 9:7-21 / [요담의 왕권 비판] 몸을 숨겼던 요담은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다는 말을 듣고는 그리심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이렇게 외쳐 댔다 `세겜 사람들아, 이내 말 좀 들어 보시오. 내 말에 귀기울여야 하나님도 당신들의 말을 들으실 게 아니겠소? 8) 하루는 나무들이 몰려와서 자기들을 다스릴 왕을 하나 뽑자고 올리브나무에게 몰려가 이렇게 말하였소. `여보시오.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시오' 9) `거, 무슨 소리요, 내가 왕이 되다니! 내가 내는 기름이 어찌나 신들을 기쁘게 해주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요? 또 사람들은 어떻구. 이 올리브기름을 발라야 품위가 있어 보이지 않겠소? 그런 소리 마시오. 다른 나무들을 못살게 마구 짓밟는 짓을 하다니! 내가 할 일은 이렇게 좋은 기름을 열심히 만들어 내는 일뿐이오' 10) 나무들은 무화과나무에게 몰려가 똑같이 말을 건넸소. `제발 부탁이오.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시오.' 11) `나 원 참 살다보니 별소리 다 듣는구려. 이렇게 맛있는 무화과를 내지 않고 내 할 일이 또 무엇이겠소? 이렇듯 달콤한 무화과를 그만내라니! 말이나 되는 소리요? 다른 나무들을 못살게 마구 짓밟는 짓을 하다니! 생각조차하기 싫소' 12) 나무들은 포도나무에게 몰려가 똑같은 말을 하였소. `좀 우리를 생각해 주시구려. 우리를 다스릴 왕이 되어 주시오' 13) `아이구, 큰일날 소리를 다 하는구려. 내 어찌 이 달콤한 포도주를 그만내겠소! 내가 내는 이 술을 마시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흥겨워하는지 아시겠소. 또 신들은 어떻구요. 다른 나무들을 못살게 마구 짓밟는 짓을 하다니! 내 그 말은 안들은 것으로 하겠소' 14) 이번에는 나무들이 가시나무에게 몰려갔소. 그에게도 똑같은 말을 해보았다오. `여보시오, 한번 생각해 주오. 우리를 다스릴 왕이 되어 보는게 어떻겠소?' 15) `그게 무슨 말이오. 정말 자네들이 나를 왕으로 섬길 셈이오? 그 말이 진심이거든 모두 나에게 몰려와 내 그늘 아래 몸을 숨겨 보시오. 내 말을 거슬렀다가는 이 가시덤불에서 불을 뿜어 내어 레바논의 아름답다는 송백까지도 태워 없애 버리겠소' 16) 이것들 보시오 그대들이 이제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일이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시오? 그것이 그렇게도 옳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소? 그러고도 여룹바알과 그 집안 사람들에게 잘해 준다고 말할 수 있소. 한 나라의 영웅에게, 그리고 그 집안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하는 법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17) 우리 아버지 기드온은 그대들을 구해내려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가 싸워 미디안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내었소. 18) 그런데도 그대들은 우리 아버지 집안에 등을 돌리고 일어나 한 바위 위에서 우리 형제 70명을 한꺼번에 쳐죽였소. 그러고는 그대들이 우리 아버지의 소실이 낳은 자식 아비멜렉을 세겜의 왕으로 떠받들었소. 단지 그가 세겜 사람들의 피붙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말이오. 19) 이제 그대들이 아버지 여룹바알과 그 집안에 한 짓이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올바른 일이라고 우겨댄다면 아비멜렉하고 잘들 해보시오. 아비멜렉도 그대들 때문에 꽤나 기뻐 날뛸 것이오. 20) 하나 내가 분명히 말해 두지만 아비멜렉이 불을 뿜어내어 세겜 사람들과 밀로 사람들을 집어삼킬 것이오. 또한 세겜 사람들과 밀로 사람들도 불을 뿜어 내어 아비멜렉을 집어삼킬 것이 분명하오' 21) 요담은 말을 마치고 자기 형제인 아비멜렉이 두려워 브엘로 도망쳐 거기서 살았다.
본문은 아비멜렉에게서 살아남은 기드온의 막내 아들 요담이 그리심 산에서 세겜 사람들을 우화로 책망하며 반드시 멸망하리라는 예언의 내용입니다.
세겜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7-15) 그리심 산은 축복의 산입니다. 그 곳에서 요담은 세겜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나무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말합니다. 나무들이 감람나무에게, 무화과나무에게, 포도나무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각기 나무들은 왕의 자리를 탐내지 않고, 주어진 자리에서 자기의 역할과 사명을 감당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왕의 자리를 거절했습니다. 이는 기드온과 그의 70인의 아들들이 왕위에 대하여 취한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감람나무처럼 좋은 기름도 생산하지 못하고, 무화과나무나 포도나무처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가치도 없으며 오히려 가시로 고통만 주는 나무입니다. 이런 자기에게 왕이 될 것을 청하니 나무들의 요청을 반갑게 받아들입니다. 아비멜렉이 왕으로서 아무 자격이나 요건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부당한 방법으로 왕이 된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한 인간은 가시나무 같은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세겜 사람들에 대한 심판 예언(16-21) 이스라엘 백성이 기드온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요구했을 때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8:22, 23). 그럼에도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은 것은, 왕이 된 아비멜렉이나 세겜 사람들 모두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도 진실되거나 의로운 행동이 될 수 없다고 요담은 지적합니다. 요담이 아비멜렉을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닌 여종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아비멜렉이 진정한 상속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겜 사람들은 기드온이 7년 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힌 미디안과 그 연합군들을 격멸하고 백성들을 구원한 은혜를 악행으로 갚은 것입니다. 요담은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은 세겜 족속들의 행위는 가시에는 그늘이 없고 가까이 가면 갈수록 가시에 찔림을 당하듯 아비멜렉의 억압과 학대로 서로 배반과 복수를 거듭하며 파멸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요담의 이러한 예언은 3년 후 그대로 성취됩니다(22). 은혜와 진리가 풍성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김이 복입니다.
적용: 지금 당신이 있는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입니까? 하나님과 사람 앞에 받은 은혜를 헤아려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로버트 에먼스 박사는 감사를 표현함으로써 실제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고 에너지를 증가시키며, 건강을 회복시킨다고 말했습니다. 존 헨리 박사가 ‘감사는 최고의 항암제요, 해독제이자, 방부제이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감사의 긍정적인 효과는 무궁무진합니다. 탈무드 격언은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가장 강한 사람은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며,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항상 감사하는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감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발견해야 합니다. 감사는 전기와 같은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감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생산되고 방출되며 사용되어야 합니다.
< 설 교 >
나무들의 비유를 생각해야 합니다.
삿 9장 7~21절 / 박용래 목사
▶ 본문의 이야기는 사사 시대를 배경으로 나타난 풍자적 비유가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입니다.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낸 기드온이란 사사에게 백성들은 찾아가서 당신과 당신의 자손들이 우리의 왕이 되어 다스려 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 (삿 8:22)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그런데 기드온의 대답은 참으로 놀라운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 (삿 8:23)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왕을 하지 못해 애쓰는 사람들이 많은데, 온 백성들이 우리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간청하는데도 기드온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디안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는 고백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하나님이 나라를 다스리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을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이런 지도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 그런데 문제는 이런 지도자 기드온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서자 가운데 아비멜렉이라는 못된 사람이 나타나서 기드온의 자손들을 무려 70명이나 죽이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자기가 친히 집권하여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불행하고 어두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 그런데 기드온의 자손들이 아비멜렉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그때에 유일하게 한 명의 생존자 요담이 있었습니다. 요담은 그릇된 방법으로 왕이 된 아비멜렉과, 그 모든 추종세력들에게, 그들의 잘못됨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한 우화적 이야기로 교훈을 남기고자 오늘 성경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요담의 우화적 이야기는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나무들이 모였습니다." 나무들은 그들 가운데서 왕을 뽑기로 작정했습니다.
► 그래서 나무들은 먼저 감람나무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감람나무여 당신이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시오" 감람나무가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나는 기름을 생산하는 역할을 하는 나무입니다.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왕의 일이 적합하지 않습니다.] 왕이 될 것을 거절했습니다.
► 나무들은 이번에는 무화과나무를 찾아갔습니다.
"무화과나무여, 당신이 우리들의 왕이 되어 주시오" 무화과나무가 대답을 합니다.
[나는 단것을 생산하고 아름다운 실과를 맺는 일을 하는데 내가 이 중요한 일을 제처 놓고 어찌 왕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왕이 되어달라는 간청을 거절했습니다.
► 나무들은 이번에는 포도나무를 찾아갔습니다.
"당신이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시오" 포도나무가 즉시로 대답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술을 만들어 내는데 내가 이 일을 버리고 어찌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을 하겠습니까?]
►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무들은 이번에는 가시나무를 찾아갑니다.
가시나무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니까 가시나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 내 그늘 아래 피하라, 그리고 이제부터 내 지배를 받으라. 만일 내 지배를 거절하면 불이 나에게서 나와서 모든 나무들을 다 사르게 될 것이라. 이제 부터 나의 모든 명령에 복종하라] 이래서 가시나무가 왕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상징 / 여기에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이 세 나무는 똑같은 철학과 똑같은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가시나무가 있었습니다.
이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노나무는 누구를 상징하고 있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기드온과 그의 아들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부정한 방법으로 형제들을 살인하고 역사를 어둠 속에 몰아넣고 있었던 아비멜렉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이 세 나무와 가시나무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분명 가시나무와 같은 사람이 교회에서나 국가의 통치자가 되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온 나라의 불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참된 지도자가 될 수 있나를 배울 수 있다
1) 가시나무는 목적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가시나무는 하나님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상징입니다. 하나님 두려워할 줄 아는 양심이 없는 사람은 삶의 분명한 목적도 없이 자신만을 살아가려는 탐욕의 노예로 살기 쉬운 것입니다.
여기 좋은 나무들은 삶의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감람나무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할 때에 감람나무는 어떻게 대답합니까?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 일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감람나무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포도나무의 대답도 나는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다른 나무들 위에서 요동하겠습니까? 나는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세 종류의 나무의 삶에서 드러난 기드온의 인생관! 그것은 마땅히 하나님 중심적이고 이웃 중심적인 삶을 추구했던 겸손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그러나 가시나무로 대표되고 있는 아비멜렉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 세 나무의 중심은 하나님이 중심이고 이웃이 중심입니다. 그러한 삶의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하나님도 없고 이웃도 없는 오직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인생관을 가진 사람은 무신론의 인생관을 가진 사람과 삶의 목적이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목적이 분명하지만, 神이 없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살고 자기 이름을 위해서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인생의 사는 목적이 분명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무신론자에게는 사는 목적이 분명하지 아니합니다.
► 가시나무는 무엇을 위해서 살며, 무엇 때문에 산다고 하는 목적이 분명치 않았습니다.
목적 없이 살아가는 허무한 인생이 곧 가시나무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이웃도, 타인도, 민족도, 국가도 없습니다. 오르지 자기만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기 쉬운 것입니다.
◧ 오늘 본문 성경 말씀에서 가시나무의 대답을 들어 보시겠습니다.
(삿 9:15)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 향 목을 사를 것이니라. 여기에서 "자기"가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 그늘에, 이제부터 내 지배를 받으며, 내 명령을 받으며, 나를 높이며,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으리라 합니다.
이 사람의 인생관은 철저하게 자기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대통령 선거를 몆 일 앞두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어떤 지도자가 필요합니까? 성서를 통하여 참된 지도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 잘난 것을 강조하고 남의 허물이나 들추어 공격하지만 국민을 어떻게 섬기겠다고 하는 철학이나 정책이 없는 사람은 참된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자신의 부족함을 여러분이 도와 달라고 말하는 겸손한 사람, 그리고 하나님 중심, 이웃 중심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한 헌신과 봉사할 사명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목적이 분명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습니다.
▶ 성경에 주님께서 무엇이 가장 커다란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음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언제나 삶의 우선순위가 하나님이고 그리고 이웃이며 마지막에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시나무와 같은 인간은 이 순서를 뒤집고 말았습니다. 나를 먼저 생각하고 혹시 시간이 있으면 이웃을 생각하려합니다. 그리고 내 모든 것을 다 하다가 늙어서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하나님을 의지할까 하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뒷자리로 밀려납니다.
►이 세상의 타락한 인간의 문법은 언제나 일인칭이 나입니다. 그리고 이인칭이 당신입니다 맨 나중에 삼인칭이 하나님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문법은 하나님을 삼인칭 맨 나중으로 밀려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 성경적인 문법은 이 순서를 바꾸어야 합니다. 일인칭이 누구이어야 합니까? 우리의 일인칭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인칭은 사랑하는 이웃들입니다. 그리고 삼인칭이 우리 자신이어야 합니다. 가시나무와 같은 아비멜렉은 하나님도 이웃도 없었습니다. 오르지 자기 자신만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왕이 되려는 목적도 없었습니다. 분명히 가시나무와 같은 사람은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목적이 분명한 사람을 잘 선택해야합니다.
2), 가시나무는 사명을 잃어 버렸습니다.
좋은 나무는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자신도 알지 못했고 사명도 없이 살아가는 자였습니다. 나무들의 대답들을 들어 보면 그들이 사명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 감람나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할일은 기름을 내 놓는 일입니다 이 기름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 무화가 나무는 "나는 단것과 아름다운 실과를 맺어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할일입니다
► 포도나무는 "나는 새 술을 만들어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사명을 깨달았고 알았습니다. 자기를 알았습니다. 내 본분을 압니다. 다시 말하면 주제 파악을 하고 살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는 목적이 분명한 사람들입니다.
► 그러나 가시나무는 왕이 되어 달라고 하니까 즉시로 자기가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가시로 찌르고 불로 사르겠다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도무지 주제 파악이 안 되는 사람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 목적도 사명도 없는 탐욕의 사람 아비멜렉같은 사람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내가서야 할 자리. 앉아야 할 자리. 누워야 할 자리를 얼마나 잘 알고 그렇게 하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 보아야합니다.
교회에서도 이제 년 말이 다가오고 새해가 돌아오면 새로운 제직으로 임명을 받게 됩니다. 제직으로서 해야 할 의무는 전혀 감당치 않는 사람이 직분을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은 가시나무 인생입니다. 주어진 직분은 감당치 아니하고 가시나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직분은 자랑하지만 아무런 사명감도 없고 사명도 감당치 못하는 가시나무 인생으로 살아간다면 부끄러움과 책망뿐인 것입니다.
◐ 한국의 부모들이 자녀를 교육할 때 "너 이다음에 커서 뭐가 될래?" 라는 질문을 많이 그리고 자주 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어린이들이 가진 꿈처럼 큰 꿈을 가진 어린이들은 이 세상에는 없을 것입니다. 제가 자랄 때만 해도 아이들의 대부분은 이런 질문을 받을 때 적어도 대통령이 아니면 장군이 되겠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교육이 가져온 비극을 오늘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다 대통령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면 누가 신하 노릇을 하겠습니까?
집의 한 모퉁이를 쓸고 있는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나라의 한 모퉁이, 보이지 않고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자기의 일을 감당하며 그 일을 통해서 자기의 사명과 본분을 다하는 이 조용한 다수는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를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야할 사명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서야할 분명한 자리를 알고 계십니까? 내가서야 할 자리를 망각하고 서지 말아야 할 자리에 서기 시작 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 암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본문을 통해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갈 때 삶의 가치가 있고 기쁨이 있고 행복한 삶이 있는 것입니다. 사명자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신앙생활도 사명자로 살아갈 때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사명감을 잃어버리면 맛을 잃은 소금처럼 아무런 쓸모없이 인생을 낭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명자로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 처음에는 160여명이 덤벼들었습니다. 모두가 대통령감은 자기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이제 정식 후보로 등록된 사람이 12명입니다. 우리는 12명중에 한명을 뽑아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 이웃중심 먼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투철한 사명이 있는 사람 일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이 갗 추어진 참된 지도자가 선임되도록 우리는 기도하며 투표해야합니다
3) 가시나무는 군림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좋은 세 나무와 가시나무의 또 하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 이 세 나무는 모두 다 섬김의 삶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섬기는 데서 보람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섬기는 데서 가치를 발견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은사를 알았고 그들의 사명을 알았습니다. 감람나무의 사명은 기름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단 것과 아름다운 실과를 맺어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물해야합니다. 포도나무는 새 술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포도나무의 사명이며 포도나무의 은사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 나무의 특질은 다 섬김에 있습니다. 그들은 섬기는 데서 보람과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 그러나 가시나무가 한 말을 들어 보십시오. 가시나무가 제일 먼저 한 소리가 무엇입니까? "내 그늘 아래 와서 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다 와서 자기 앞에 무릎을 꿇 라는 이야기입니다. 백성을 섬기는 자가 아니라 백성들 위에서 군림하고 착취하는 지배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가시나무와 같은 지배욕, 권력욕, 명예욕이 나라를 어두움과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 가장 불행한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경제개발에 탁월한 지도력을 가졌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3선 개헌만 하지 아니하고 유신 헌법만 만들지 아니했다면 세계역사에도 탁월한 지도자로 이름이 기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아니면 안 된다는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마지막에 백성들을 억압하고 군림하면서라도 정권욕을 채우고자 하는 데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명예를 얻는 것, 권력을 얻는 것, 그것이 가장 훌륭한 삶이라고 강조해 왔습니다.
남을 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라 삶의 보람은 남을 섬기는 데에 있는 거야" 라고 가르쳐 오지를 못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성공하기 위해서 친구애도 가족애도 헌신짝처럼 버리고 자기 혼자서만 성공하고 잘되면 된다고 동분서주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의 비극은 명예를 얻는 것, 권력을 얻어 지배하는 것을 출세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것,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성공하는 것 출세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도록 가르치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 결과 가시나무에 찔려서 신음 소리가 온통 나라 구석구석에서 들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가시나무는 섬김의 삶이 아니라 군림하고자 하는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나라를 부패하게 만들었고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 예수님의 삶의 가치는 얼마나 다릅니까? 높아지려는 사람마다 낮아지고, 섬기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커다란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져야 우리나라는 행복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가시나무를 선택한 나무와 가시나무의 최후
▶가시나무를 선택한 나무들과 또한 가시나무의 최후는 어떤 것인가를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삿 9:53) 한 여인이 맷돌 윗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던져 그 두골을 깨뜨리니 가시나무와 같은 아비멜렉의 최후는 불행하고도 비극으로 끝을 맺고 말았습니다.
▶ 또한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고 가시나무를 선택한 나무들의 세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가시나무에서 불이 나와서 레바논의 그 아름다운 백향목 나무를 다 불태워버린 것처럼 이 잘못된 선택으로 아비멜렉 한 사람의 왕 때문에 이스라엘 세겜성 전체가 다 고통을 당하고 전쟁에서 죽어가게 되는 엄청난 고통과 불행을 겪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한번 뽑아놓으면 그 책임은 우리에게로 다 백성들에게 돌아옵니다. 잘못된 지도자를 선택하면 5년 동안 꼼짝없이 모든 국민들이 그 어려움을 다 겪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무들이 왕을 잘못 선택했습니다. 그 지도자를 한번 잘못 선택하면 그 지도를 선택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습니다.
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시나무와 같은 별로 쓸모없는 직분 자가 세워져서 목적도 사명도 섬김도 없이 권리 주장만 하고 자기주장만 하면 교회는 혼란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직분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직분에 충성스럽게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도 우리는 어떤 바람이나 지방색이나 혈연에 좌우되지 말고 정말 가시나무와 같은 지도자가 아니라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와 같은 좋은 지도자를 선출하여 앞으로 5년 동안 나라의 번영이 있고 국민들에게는 행복한 삶이되기를 축원합니다.
■교훈
성경에서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와 같은 삶을 철저하게 실천하신 분이 한분 계십니다. 하나님 중심이요, 이웃 중심의 삶을 철저하게 추구했던 그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아버지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아버지 앞에 영광을 돌리셨고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의 몸과 같이 실천하셨습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하나님 중심과, 이웃 중심의 삶의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철저하게 섬김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처럼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만민을 위해 당신을 희생시키고 헌신하셔서 인류역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셨던 것처럼 훌륭한 민족의 지도자가 선출되는 이번 대통령 선거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이 좋은 나무처럼 삶의 분명한 목적과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김으로 칭찬받고 상급 받는 믿음의 충성스러운 청지기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시나무와 같은 이웃을 불행하게 만들고 교회를 불행하게 만들고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어 가는 어리석고 부끄러운 청지기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깨여 기도하며 사명감당하는 주님의 충성스러운 청지기들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가시나무의 교훈이 오늘아침 저와 여러분과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교훈이 되어 금번 뽑는 대통령 선거에서 가시나무와 같은 지도자가 아니라 감람나무와 포도나무와 무화과와 같은 좋은 지도자를 선택하여 세움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고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이루어 갈 수 있는 기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왕이 되는 것보다 귀한 것
삿 9장 7~15절 / 양인국목사(서신교회)
1. 세상에 존재하는 지위들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은 왕이다. 그래서 지위를 탐하는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왕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기드온의 아들들도 서로 왕이 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하나인 아비멜렉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왕이 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을 지지해 주는 사람들을 모아 세력화한 후 자신의 경쟁자들인 형제 70명 모두를 한곳에서 죽였다. 물론 그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왕이 되었지만, 왕이 된 후 한순간도 행복을 누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왕이 되려는 또 다른 경쟁자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또 다시 경쟁자들과 싸워야 했고 이로 인하여 자신의 소중한 삶을 싸움으로 낭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그는 이 싸움에서 패하여 죽임을 당함으로 삶을 마쳤다. 만일 그가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삶을 어떠했을까? 이 물음에 대하여 생각해 볼 때 대답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그는 더 오래 살았을 것이고 왕이 되었을 때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비멜렉의 삶을 통하여 세상에는 왕이 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하여 왕이 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듣고자 하다.
2. 8-13절 말씀이다.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자신들 위에 왕으로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나무들이 또 무화과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나무들이 또 포도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이 말씀에서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그리고 포도나무는 왕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왕이 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그토록 바라고 있는 기회를 버렸다. 그러면 이 나무들이 가지고 있던 왕이 되는 것보다 귀한 것란 어떤 것일까? 감람나무에게는 기름이었고, 무화과나무에게는 열매였고, 포도나무에게는 포도주였다.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나무들이 왕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거절 할 때 사용한 말에서 “내(my)”라는 말이다. 이 말은 자신의 존재 목적을 말하기 위하여 사용한 말이다. 즉 감람나무는 기름을 내기 위해 존재하고,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내기 위하여 존재하고 포도나무는 포도주를 만들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의미다.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기름을 내지 못하고 오직 감람나무만 기름을 낼 수 있고, 포도나무와 감람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열지 못하고 오직 무화과나무만 열매를 낼 수 있고,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가 포도주를 내지 못하고 오직 포도나무만 포도주를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나무들은 “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고자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세상에 보내실 때 그들 각자에게 서로 다른 삶의 목적으로 부여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각 사람이 세상에 살아야 할 이유이고 각 사람이 자신을 가치 있는 삶으로 세울 수 있는 자신만 가지고 있는 일이다. 우리는 이것을 부르심이라고 말한다. 실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셨고, 모세를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됨으로부터 구출해 내기 위한 지도자로 부르셨다. 그리고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이사야는 선지자로 부르셨고,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로,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셨다. 그들 각자에게 부르신 바로 그 부르심이 기름을 내는 일이고 열매를 내는 일이고 또한 포도주를 내는 일로서 나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다. 여기 부르심은 일반적으로 각 사람에게 천부적인 재능이나 또는 특별한 은사로 나타난다. 즉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로서 그 일을 할수록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일이 부르심이고 자신의 일이며 또한 왕이 되는 일보다 귀한 것이다. 이처럼 각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행할 때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이 되고 세상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보다 더 아름다운 곳으로 변화된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할 수 있는 일들 가운데 이와 같은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있겠는가? 그래서 이와 같은 일을 왕이 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14, 15절의 말씀이다. “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나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나무에게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그들이 거절했기 때문에 가시나무에게 찾아가서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요청에 대하여 가시나무가 모든 나무에게 한 말이 본문의 말씀이다.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가시나무는 감람나무나, 무화과 그리고 포도나무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가시나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일뿐이다. 그래서 가시나무는 자신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는 나무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가시나무는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는 나무들에게 자신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보장할 것을 요청했고 그 권력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죽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말했다. 여기 중요한 교훈이 있다. 자신의 본분이 무엇인지 아는 자들은 본분에 따라 사는 것을 왕이 되는 것보다 귀하게 생각하지만, 본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권력을 탐하여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권력에 탐한 아비멜렉은 자신이추구하고 있는 권력에 예속되었고 그의 말에 현혹되어 그를 왕으로 세운 세겜사람들은 아비멜렉에게 예속됨으로 자유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골육상쟁을 통해 왕이 된 아비멜렉이 행한 일을 통하여 그리고 아비멜렉을 지지하여 악한 일에 참여한 세겜 사람들의 결말을 통하여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아비멜렉이 왕이 되고자 할 때부터 왕이 된 후에 한 모든 일은 사람을 죽이는 일뿐이었다. 언급한 것처럼 그는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모아 세력화하였고 그들의 도움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였다. 여기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이란 돈을 받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탐욕에 사로 잡힌 사람들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아비멜렉은 그들을 고용하여 자신의 형제 70명을 한곳에서 죽이는 끔찍한 일을 했다.
권력을 획득하기 위하여 형제 칠십 명의 목숨을 희생시킬만한 가치가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도망간 요담이 형제들을 죽인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에 대한 비난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아비멜렉은 가시나무처럼 권력에 대한 탐욕만 있을뿐, 자신의 부르심도 모르는 무지한 자였다. 어느 시대나 이런 자들이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런 자들은 자신도 복된 삶을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복된 삶을 살지 못하게 한다. 아비멜렉은 형제들을 살해한 후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었지만 삼 년 만에 반란(叛亂)에 직면하였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이 말씀은 아베멜렉에 대한 반란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된 아비멜렉과 불의 한 아비멜렉을 도와 불의를 행한 세겜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세겜 사람들로 하여금 아비멜렉을 반역하도록 하셨다. 즉 하나님은 악인을 악인의 손으로 징계하심으로 그들 서로가 서로를 망하게 하도록 하셨다. 이 일의 결말은 다음과 같다. 즉 아비멜렉은 자신을 배반한 세겜을 정복하고 그 성의 사람들을 죽인 후, 다른 성읍 데베스를 점령할 때 한 여인이 망대 위에서 던진 맷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 이처럼 아비멜렉이 왕이 되어 한 일은 사람들을 죽인 일밖에 없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을 통하여 우리에게 왕이 되려는 탐욕에 이끌려 살 때 어떤 결과를 맞게 되는지 말씀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변함없이 왕이 되려고 한다. 이것이야 말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우리가 이런 현상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부르심과 그 가치를 알지 못하는 무지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왕이 되는 것보다 귀한 것 즉 자신의 부르심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살 수 있도록 필요한 능력도 주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 가운데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부르심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말해 준다. 만일 우리가 이처럼 부르심이라고 믿고 하는 일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자신에게는 기쁨이 되며 이웃들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일이라면 그리고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가졌던 확신이 변함없다면 이것이야말로 부르심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부르심에 따라 사는 것은 왕이 되는 것보다 귀한 것이다. 왜냐하면 언급한 것처럼 우리가 부르심에 따라 살 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 수 있고 이웃과 더불어 살 수 있고 또한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살 수 있기 때문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탐욕에 이끌려 살지 않게 해 주시고 오직 부르심에 따라 살게 해 주옵소서. 아멘!
권력의 욕망
한태완목사 / 삿 9:7-16
다윗 왕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엄청난 고난을 겪습니다.(삼하15:1-18)
북한에서는 권력투쟁으로 인해 죽은 자가 허다합니다.(권력의 신격화)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면 좋은 일이 많다는 것을 본능처럼 알고 있습니다.(지배의 욕구) 그래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언어를 습득하면서부터 그것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권력의 최정상에 오르지는 못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질주하며 어느 만큼은 그것을 얻습니다. 그런데 권력은 그 속성상 ‘폭력’을 필연적으로 내재하고 있습니다. 통치자들은 사회 대다수의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권력이 얼마나 자애로운지 또는 효용성이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태조 이성계의 드라마를 이루고 있는 구성도 ‘권력’입니다. 그걸 보면서 이 시대의 정치도 과거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인식하게 되고요. 그런데 정몽주처럼 권력에 동의하지 않을 때가 있죠. 그러면 권력은 가차 없이 그에게 폭행을 가합니다. 그렇다고 권력의 폭력적인 속성이 권력에 저항하는 이에게만 대항을 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권력은 항상 폭력의 대상을 찾아 배고픈 하이에나 같은 것입니다.
사회가 이렇게 권력을 지향하고 있으면 폭력은 일상이 됩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온갖 폭력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권력지향적인 사회라는 방증입니다. 어떤 경우 폭력은 상냥한 얼굴로 포장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른바 달콤한 폭력입니다. 아마 교회에도 ‘은폐된 폭력’이거나 ‘달콤한 폭력’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달콤한 폭력이나 쓴 폭력이나’를 막론하고 폭력을 당하는 사람은 그게 차곡차곡 쌓이게 됩니다. 그렇게 폭력이 쌓이다가 발산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희생양’입니다. 달콤한 권력의 하수인인 동시에 자기도 권력의 주체가 되고 싶어 하기 때문에 호시탐탐 ‘내 권력을 받아 줄 만만한 존재’를 늘 물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만만한 대상이 포착되면 감춰뒀던, 그동안 당하고만 살던 자신의 폭력성을 끄집어내서 야수처럼 돌변하여 다른 대상을 공격해댑니다. 교회에서도 갈등이 발생하면 얌전하게 기도만 하던 사람들이 쌍권총을 찬 황야의 무법자가 되는 걸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희생양의 대상이 반응하면 더욱 크게 눈을 부릅뜨고 공격을 합니다. 이렇게 온갖 층층의 권력이 가지고 있는 폭력의 내재성을 모두 다 받아 줘야 하는 사람들이 사회 안에 존재합니다. 폭력성의 노리갯감 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대체적으로 극심하게 가난하거나, 신체적인 장애를 갖고 있는 정상적이지 않는 분들이 그런 계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세상에서 ‘배제된 사람들’입니다. 세상 밖으로 쫓겨난 이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인 폭력은 누구도 눈치 채기 어렵습니다. 또 때로는 그걸 눈치 챈다고 해도 은밀하게 폭력을 당하는 그 사람의 아픔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세월호 참사에서 희생당한 학생들을 두고 어느 권력을 가진 목사가 말했다는 겁니다.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를 가지 배를 타고 가니 그런 일이 생기는 거 아니냐.” 이런 게 폭력입니다. 돈 조금 덜 가진 사람을 깔아뭉개고 멸시하는 감정과 언어의 폭력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천연덕스럽게 지껄입니다. 그걸 듣고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릅니다. 폭력이라고 느끼지 않는 것도 일종에 무의식의 동조입니다. 간접적인 폭력인 것입니다.
이렇게 권력-희생양-폭력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권력 메커니즘에 관한 일들은 초대교회 시대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이러한 권력의 폭력 상황에 대해서 예수님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반응했으며, 우리에게 어떻게 반응 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 헌정사(憲政史) 70년에 11명의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이 중 9명이 비운(悲運)의 대통령이었고 2명만이 온전했지만 이들 역시 평탄치 않은 말년을 보냈습니다. 초대 이승만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4·19혁명에 밀려 하야하고 망명지에서 별세했습니다. 윤보선은 내각제의 대통령으로 5·16 쿠데타로 물러났고, 최규하는 말 그대로 '임시 대통령'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장기 집권 끝에 부하에게 총 맞아 사망했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퇴임 후 감옥살이를 했으며 노무현은 퇴임 후 자살했습니다. 그리고 박근혜는 임기 중 탄핵으로 파면되었고, 이명박도 옥중에 수감되었습니다.
이런 역사를 단순히 비운으로만 치부할 수 없습니다. 지극히 비정상이며 보기에 따라서는 우리 정치제도에 질병적 요인이 있는 것 아닌가 여겨집니다.
본문은 사사 시대의 위대한 영웅 기드온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벌어진 사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의 삼백 용사 이야기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이야기와 더불어 교회학교 어린이들에게 아주 사랑받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겨우 삼백 명의 용사들을 이끌고 적진에 접근한 기드온의 용기는 장엄한 느낌을 자아내기까지 합니다. 그의 부하들은 한손엔 항아리에 숨긴 횃불을 들고 다른 손에는 나팔을 든 채 적진에 은밀하게 접근하여 일시에 항아리를 깨뜨리고 나팔을 붊으로써 적들을 교란시켰습니다. 자중지란에 빠진 적들은 서로를 죽였고 기드온의 용사들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기드온은 이후에도 미디안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했고 백성들은 그를 열광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자기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언지하에 그 청을 뿌리칩니다.
"나는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아들도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여러분을 다스리실 것입니다."(삿8:23)
'오직 주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이 고백이 이스라엘의 청년기라 할 수 있는 사사시대의 에토스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나자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가나안의 토착신인 바알을 섬기기 시작했고, 야훼 하나님은 잊혀졌습니다. 위기가 해소되자 슬그머니 다산과 풍요의 신에게로 돌아섰던 것입니다. 그들은 타자들을 진심으로 환대하며 살라는 야훼 하나님의 요구보다는 자기들의 욕망의 부름에 충실했습니다. 환대란 무엇입니까? 다른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자기의 안일한 평안이 방해받는 것을 허용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말하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변덕스럽습니다. 서경과 중용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의 마음은 늘 위태롭고, 참을 지키려는 마음은 희미하니,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하나로 모아, 오로지 그 중정을 꼭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게 마련이고, 그 순간 영혼의 전락이 시작됩니다.
그 총명하고 신심깊던 기드온도 어느 순간 자기 성공에 도취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왕이 되어달라는 청은 단호히 뿌리쳤지만 거의 왕적 존재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아내가 많아 친아들이 일흔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아비멜렉은 권력욕의 화신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형제들로부터 상당히 따돌림을 당하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그는 세겜에 터잡고 살던 외가에 가서 자기 꿈을 실현할 지지기반이 되어 달라고 부탁한 후, 그곳에서 얻어낸 돈으로 건달과 불량배를 고용하여 자기를 따르게 합니다. 아버지의 본가가 있는 오브라에 가서 그는 자기의 배다른 형제들을 한 바위 위에서 다 도륙했습니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이들은 이처럼 잔혹합니다. 살아남은 것은 막내아들인 요담뿐이었습니다.
세겜 사람들은 세겜에 있는 돌기둥 곁의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이는 아비멜렉을 왕으로 옹립한 이들이 세겜 성읍의 모든 사람들과 밀로의 온 집안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진실의 절반만 반영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세겜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아비멜렉을 왕으로 추대한 이들은 그 성읍의 유력자들이었습니다. '밀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뭘 말하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고대 그리스 도시의 아크로폴리스와 비슷한 것으로, 도시 안에 돋우어 올린 지면 위에 건축한 성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이들은 세겜에서 내로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친족이기 때문에 그를 지지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아 그를 지지한 것입니다. 벌거벗은 이익만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득권자들의 탐욕과 한 야심가의 정치적 야망이 결합되어 그러한 참극이 빚어진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왕이 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요담은 그리심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세겜 사람들을 향해 외칩니다. 그게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리심 산은 요단강 서쪽에 있는 산이지만, 그 지리적 위치보다는 상징적 의미가 더 큰 산입니다. 그리심 산은 에발 산과 더불어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말씀이 선포되었던 곳입니다. 요담은 상징성이 큰 그곳에서 세겜 성읍 사람들, 곧 아비멜렉을 왕으로 옹립했던 유력자들을 향해 우화 하나를 들려줍니다. 우화는 나무들이 자기들의 왕을 세우려고 길을 나섰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나무들은 먼저 올리브 나무에게 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청합니다. 하지만 올리브 나무는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나무들은 무화과나무에게 가서 부탁하지만 거절당하고, 포도나무에게도 부탁하지만 역시 거절당합니다. 기름을 내고, 달고 맛있는 과일을 맺고, 포도주를 내는 등 각자에게 맡겨진 아름다운 일을 포기한 채 다른 나무들 위에서 거들먹거릴 수 없다는 것이 이 세 나무의 공통된 대답이었습니다. "내가 어찌……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 그 나무들은 자기들에게 품부된 역할을 벗어날 생각이 없습니다.
뜻을 이루지 못한 나무들이 가시나무에게 가서 "네가 와서 우리의 왕이 되어라"라고 제안합니다. 가시나무는 망설임없이 그 청을 받아들이겠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와서 나의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가시덤불에서 불이 뿜어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살라 버릴 것이다"(15). 이 대목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이들이 폭력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권력에의 의지는 사람들을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유혹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기의 의지를 누군가에게 강제할 수 있다는 자리에 선다는 것은 매우 달콤한 유혹임이 분명합니다. 가시나무는 다른 나무들에게 자기 그늘 아래로 피하라고 말합니다. 가시나무 그늘 아래 머무는 자는 날카로운 가시에 찔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비멜렉은 높은 권좌에 오르기 위해 자기 형제들을 도륙했습니다. 부도덕하고 반인륜적입니다. 그러나 세겜의 지도자들은 그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의로운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자기들의 특권을 잘 지켜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바랄 뿐만 아니라 그런 세상을 열기 위해 땀 흘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생명이 자기 몫의 생명을 온전히 누리는 것이고, 모든 피조물들이 조화 속에서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정치의 본질도 그러합니다. 정치인들은 대개 특정한 계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권자들의 분별력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불의한 이해관계에 따라 결합한 권력은 언제나 파국을 맞게 마련입니다. 아비멜렉에게 제일 먼저 등을 돌린 이들은 그를 왕으로 세웠던 세겜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내전 끝에 아비멜렉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망대 위에 있던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절명 상태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나무들 위에 거들먹거리던 가시나무가 피할 수 없었던 운명입니다.
1762년 5월 13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영조가 조선을 통치하고 있었을 때,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팔일 만에 굶어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도세자의 부친이었던 영조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아들을 살해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당시 정치적인 큰 세력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던 노론의 압력을 받은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명을 내려 자결토록 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영조는 그를 뒤주에 감금하고 그 안에서 굶어 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열 한 살이었던 정조가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지만, 영조는 사도세자를 끝내 뒤주 안에서 꺼내주지 않았다. 뒤주를 자물쇠로 잠그고 못질을 하여 아무도 열 수 없도록 했고, 먹을 물과 음식을 완전히 차단하여, 사도세자가 갑갑한 뒤주 안에서 굶어죽도록 방치했던 것입니다.
정조가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고 왕이 되었을 때, 신하들 앞에서 한 말은 너무도 유명합니다. 그것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피 맺힌 한 문장의 말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노론파 신하들이 불안과 공포로 몸을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조가 친 아들 사도세자를 죽였지만, 영조가 죽은 후에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던 정조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불안한 마음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언제 어떤 일로 또 다시 피바람이 불어와 자신들이 정치적인 희생물로 사라지게 될 건지 알 수가 없었던 탓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친아들을 죽이기까지 온갖 욕망으로 불타오르게 하는 것이 권력입니다. 조선의 역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권력을 얻기 위하여, 피를 흘리고 죽거나 혹은 반정을 일으켜 권력을 잡기도 했었다. 하지만 모든 인간들은 한 줌 흙먼지로 돌아가고야 맙니다. 왕도 장군도 위대한 학자나 천재적인 예술가와 종교지도자도 때가 되면 숨을 거두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면, 권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저 자다가 깬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일장춘몽(一場春夢)과 같은 것이 물질이고, 명예이며, 권력이자 인간사의 희로애락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적인 욕망이나 감정에 치우친 삶이 아니라, 언제나 예수님과 동행하는 순수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신앙적인 삶의 답입니다.
19세기 미국의 신학자 클라크(James Clarke)는 정치인을 정치가(statesman)와 정치꾼으로 불려지는 정략가(politician)로 나누었습니다. 정략가는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권력 중독증에 걸린 사람들은 오로지 다음 선거를 생각합니다. 말로는 벤담(Jeremy Bentham)이 말하는 국민의 복리증진, 이른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자신과 다른 집단이 권력을 잡고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것을 시기하고 방해합니다. 정권을 잡기 위한 갖가지 이슈를 만들어 '밀어내기(push)'와 '끌어당기기 (pull)'를 통해 편을 가르고 차기 선거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 불리기에 몰입합니다.
술 중독에 걸리면 음주가 생활을 위한 활동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어 버리듯 권력 중독에 걸리면 모든 것을 권력 회득에 초점을 맞춥니다. 패거리나 시정잡배들처럼 옳고 그름은 적이냐 동지냐에 따라 결정되고 사고는 흑백 논리의 감옥에 갇혀 버리게 됩니다. 순수를 잃어버리고 늘 저의가 무엇인지 추측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여 자기 합리화를 꾀합니다. 권력 중독증에 걸린 사회에 사는 정치 소비자들은 늘 정치 중독자들을 욕하면서도 정치 게임을 즐기며 자신도 모르게 정치 논리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신앙인은 권력 중독으로 신앙의 양심을 마비시켜서는 안됩니다. 권력은 지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섬김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라고 말씀했습니다.
권세욕은 교만이나 자부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권세욕은 질투와 마찬가지로 가장 나쁜 죄악입니다. 권세욕은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죄악 속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엄한 심판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권세욕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에 반기를 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듯이 우리도 권세욕으로 인해 예수님께 자리를 비어드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지도하는 책임을 맡았을 경우, 그것이 자식에 대한 부모들의 책임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런 죄악에 빠질 위험이 큽니다. 우리가 이런 지배욕에서 벗어나려면 첫째 성령께서 당신이 모르고 있는 지배적인 성향을 드러내 주시도록 간구하십시오. 둘째, 당신이 지은 나쁜 죄를 뉘우치고 담대하십시오. 셋째, 가시관을 쓰신 겸손하신 주님께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나는 당신 곁에 머물며 이제부터는 당신의 그 겸손하고 온유한 자리를 택하겠습니다. 나는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그밖의 어디서나 다른 사람에게 나의 지위와 권리를 나누어주겠습니다."
이렇게 할 때 당신은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에서 언젠가는 완전히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아담 자손으로서 우리 모두가 권세욕의 죄를 지어야만 하듯이 이제부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겸손한 성향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또한 우리는 겸손으로부터 얼마나 찬란한 권세가 나타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잠언의 내용을 보면 권력욕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모든 조항에 다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만한 눈, 거짓된 혀, 무죄한 자 의 피를 흘리는 손,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 하나님은 인간이 권력을 사용하는 것을 막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권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권력은 잠깐 대여받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공의롭게 사용하면 축복을 받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주인이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만일 직장에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하고 싶은 유혹이 찾아오면, 하나님이 그렇게 얻어지는 권력을 축복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우리가 고상하고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 방법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면 하나님은 외면하십니다. 반대로 매일의 삶에서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공정하고 정직하게, 인내로써 화목을 이루어가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능력은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인생 말년에 카프리 섬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공포 정치를 하다가, 주후 37년 그 섬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파면당한 뒤, 로마로 돌아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기록합니다.
헤롯 안티파스와 헤롯 필립은 모두 백성의 저주 속에서 살다가 그들의 자식 대에서 헤롯 왕조가 소멸되는 비극적 최후를 맞았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는 [예수전]을 쓴 르낭의 지적처럼 '온 인류로부터 저주받은 가장 비참한 인간'으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들은 살아 있을 때 모두 일인자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듯이 보였고,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에서 지니고 누렸던 것 중 그 어느 것도 비참한 최후로부터 그들을 구원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없는 사람들의 공통된 최후입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죽음이 덮쳤을 때, 죄 문제의 해결 없이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세상 권력이나 부귀영화가 결코 우리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모두 인간의 욕망과 쾌락을 잠시 채워 주는 수단은 될 수 있을지언정, 우리 코끝에서 호흡이 멎은 이후를 결코 책임져 주지 않습니다. 자신에게는 믿을 구석이 전혀 없기에 예수님만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 최후에 웃습니다.
이렇게 살면 불행합니다
삿 9:7-15 / 안양준목사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 여호수아가 죽고 사울이 왕이 되기 전까지의 350년 기간을 사사시대라고 합니다. 이 사사 시대에 기드온이라고 하는 사사가 있는데 기드온의 활약상은 우리가 잘 아는 바지만 그 말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시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기드온은 말년에 여러 아내를 두었는데 그래서 낳은 자식이 무려 70명이나 있었습니다. 그 중에 세겜에 기드온의 첩의 아들 아비멜렉이 있었는데 기드온이 죽자 이 아비멜렉이 자기가 왕이 되려고 형제들을 유인하여 모조리 죽여 버렸습니다. 다행히 기드온의 막내아들 요담만 숨어 도망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왕이 된 아비멜렉은 자신의 뜻이 모두 이루어지는 줄 알았는 데 자기를 왕으로 세워 주었던 세겜 족속이 자신을 배반합니다. 그래서 세겜 사람을 모두 죽여 버렸는데 괜히 데베스라고 하는 곳까지 가서 한 여인이 망대 위에서 내려 던지는 맷돌 윗짝에 머리를 맞고 죽어 버렸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비멜렉같이 살면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삶이 어땠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1. 아비멜렉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무리한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무리하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무리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자기보다 자격이 많은 본 부인의 아들들인 형들이 수두룩했습니다. 그런데 형제들을 다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월에 가면 단종릉이 있는데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의 5번째 왕 문종이 죽자 그 아들 단종이 12살에 왕이 되었는데, 단종이 왕이 된지 3년만에 삼촌인 수양 대군이 단종을 몰아내어 강원도 영월로 귀향을 보내고 무리하게 자기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세조라고 칭하고 단종을 따르던 많은 충신들을 죽였습니다. 바른 말을 하던 충신 성삼문, 박팽년, 이개 같은 사람들을 무참하게 죽였는데 이들을 사육신이라고 역사의 충신으로 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조는 단종이 장성하면 자기에게 복수할지 모른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결국 단종에게 사약을 내려 죽여 버렸습니다.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그 욕망을 지키기 위해 자꾸만 무리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수양대군이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서 단종의 어머니가 나타나서 침을 뱉는 것이 아닙니까? 수양대군은 놀라서 그 침을 피한다고 피했는데 그만 침이 등에 떨어졌습니다. 깜짝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부터 꿈에 침이 떨어진 등어리에 종기가 나서 쑤시고 아프기 시작하더니 백약이 무효하고 결국은 그 종기가 온몸에 퍼져 수양대군은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욕망을 위해 무리하면 아비멜렉과 같이 비참한 결과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누구라고 할 수 없겠지만 현대인들은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2. 아비멜렉은 부정한 재물을 소유하였습니다.
아비멜렉은 자기가 왕이 되기 위하여 이방신인 바알브릿 무덤에서 은 70개를 가져다가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선전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결국 이 부정한 재물이 아비멜렉을 불행하게 하는 촉진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역사는 부정한 재물을 취한 사람치고 흥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부정한 재물로 잘 살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부정한 재물을 소유한 사람은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인생이 불행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어떤 빌딩의 청소부가 청소를 하다가 거액이 기록된 수표 한 장을 주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불의한 마음이 들어서 몰래 집으로 가지고 가서 한달 동안 쓰지도 못하고 가지고 있는데 몸무게가 5kg이나 줄었답니다. 결국 그 수표를 주인 찾아 전해 달라는 편지와 함께 신문사로 보냈답니다.
아비멜렉은 부정한 재물로 친했던 사람들에게 배반을 당해 결국은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3. 아비멜렉은 남을 괴롭히고 아프게 하는 가시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타인의 불행을 자기 행복으로 삼고 남을 괴롭히는 가시와 같은 사람의 종말은 반드시 불행해진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비멜렉이 70명의 형제들을 죽일 때 막내 요담이라는 사람이 간신히 피하여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 요담이 그리심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멋도 모르고 아비멜렉에게 협조하는 세겜 사람들을 향하여 비유를 들어 외쳤는데 이 시간에 읽어드린 이 비유는 구약 성경 중에 있는 비유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비유 중에 하나입니다.
이 비유는 이런 내용입니다. 기드온이 용맹을 떨치며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자녀들이 대를 이어 이스라엘을 다스려 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않고 하나님이 친히 다스려 주기를 바라며 이런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또 기드온의 아들들도 모두 아버지 같이 왕이 되기를 거절했습니다. 그저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 타인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자기가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자청하여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되었는데 요담은 아비멜렉을 가시나무로 비유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담은 세겜 사람들에게 가시나무가 바로 아비멜렉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가시는 남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남을 찌르는 것이 가시입니다. 남을 괴롭히는 가시와 같은 사람의 종말은 불행합니다.
가시나무 같았던 아비멜렉의 최후가 어땠습니까? 여인이 던진 맷돌 짝에 맞아 머리가 박살이 나고 쉽게 숨이 끊어지지 않자 칼을 든 소년에게 자기를 찔러 주기를 애원하여 칼에 찔려 숨을 거두었습니다.
남을 괴롭히는 것을 낙으로 삼는 가시나무가 되선 안됩니다. 만약 남을 찔러 괴롭히고 아프게 하는 가시가 우리 안에 있다면 뽑아 내야 합니다. 잘라 버려야 합니다. 가시로 남을 찌르면 하나님이 그 악을 심판하시고 갚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삿 9:56 "아비멜렉이 그 형제 칠십 인을 죽여 자기 아비에게 행한 악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
우리의 삶이 언제나 감람나무 같이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고, 무화과 나무같이 유익을 주며, 포도나무 같이 기쁨을 주는 생활이 될 때 심은 대로 거두는 하나님의 법칙이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길 원합니다.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삿 9장 7~21절 / 손상률목사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많이 받으려고 애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 못지않게 받은 복을 보존하는 것과 그것을 후대에까지 계승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본문말씀에는 기드온의 아들중 하나인 요담의 설교내용이 있습니다.
기드온은 삼백명의 용사를 데리고 전쟁에 나가 미디안 대군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구하여 낸 훌륭한 사사이지만, 그의 가정 생활은 경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여인의 몸에서 자식을 두었는데 무려 아들이 칠십명이나 되었습니다.
기드온이 세상을 떠난 다음 그의 아들중 아비멜렉은 형제들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고, 여기서 빠져 나온 요담은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악행에 대해 설교하고 있습니다.
여기 "너희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고 하는 요담의 질문은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는 사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진리를 구하며 공의를 행하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찾고 계십니다(렘5:1).
Ⅰ. 정도(正道)를 이탈한 아비멜렉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추구하지(롬12:2) 못하고 판단이 잘못되어 행동이 궤도를 잃게 됩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상실된 마음의 표본이 됩니다.
(1) 욕심에 좌우된 사람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 제일주의로 진행되었습니다. 나라의 주권자를 세우거나(삼상16:1) 가정의 장자권을 계승할 때(창27:27-40, 49:1-27)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해 왔습니다. 이런 일은 개인의 임의대로 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멜렉은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감행했습니다.
(2) 인본주의적 발상을 하였습니다.
아비멜렉은 스스로 왕이 되려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겸손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 하지 않고, 세겜의 외삼촌을 찾아가 혈연, 지연, 재물 등을 의지해 모의를 하였습니다.
(3) 폭력으로 형제들을 죽였습니다.
아비멜렉은 폭력배들을 데리고 자기 형제 70명을 한 자리에서 죽이는 반인륜적인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해 어떤 만행이든지 저지르고야 말게 됩니다.
Ⅱ. 실리(實利)를 택한 세겜 사람들
아비멜렉의 외조부와 가족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아비멜렉의 만행에 동조하고 말았습니다.
(1) 악한 일을 방조하였습니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의 요청에 대해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지, 하나님의 방법인지를 따져보고 옳은 길을 권했어야 옳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단지 골육이라는 이유로 악한 일을 방조하고 말았습니다.
(2) 배은망덕하는 행위입니다.
요담은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따른 것은 기드온이 이스라엘에게 베푼 은혜에 대한 배반이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 이것이 여룹바알과 그 집을 선대함이냐 이것이 그 행한대로 그에게 보답함이냐 우리 아버지가 전에 죽음을 무릅쓰고 너희를 위하여 싸워 미디안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 내었거늘 ..."
(3)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졌습니다.
인간이 악한 궤교를 저지를 때 하나님께서 일시동안 침묵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도 결국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행하여집니다.
아비멜렉과 세겜의 동맹은 결국 깨어져 서로 원수가 되고, 아비멜렉은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윗짝에 맞아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아비멜렉이 그 형제 칠십인을 죽여 자기 아비에게 행한 악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고 하였습니다(삿 9:56-57)
Ⅲ. 진실과 의의 표본
요담의 설교에는 인간이 타락하고 그 본연의 위치에서 탈선하게 되면 인간보다 못한 동물이나 식물에게서 교훈을 받아야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를 비유로 진실과 의로움의 표본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1) 자기의 분수를 아는 것입니다.
감람, 무화과, 포도나무는 왕이 되기를 사양했지만 가시나무는 당장 왕이 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제게서 불이 나와 모든 나무를 살라 버릴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분수를 알고 겸손하며 양보하는 자세를 가져야 됩니다.
(2) 맡은 본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와 포도나무는 제각기 하나님께 받은 본분이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감람나무는 그 열매로 기름을 짜서 불을 밝히는 일을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자기에게서 맺혀지는 과실이 많은 사람에게 영양을 공급해주는 것으로 본분을 삼았습니다. 그리고 포도나무는 왕이 되어달라는 나무들의 요청을 받고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라고 하며 그들의 제의를 거절하였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왕이 되는 것을 좋아하며 명예와 권세를 탐하게 되지만 성도는 먼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여야 됩니다.
(3) 최상의 행복이 무엇인가를 일러줍니다.
이 나무들은 사실상 최상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하는 일이 세상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보람을 안겨다 준다는 긍지 높은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요(막10:45)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위치를 지키며 받은 축복에 감사하면서 자기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복을 보존하는 사람이며 오래도록 계승하고 발전케 하는 사람입니다.
참된 지도자
삿 9장 7~21절 / 김진호목사
지금 우리 나라는 세계 월드컵 축구잔치가 일본과 함께 열리고 있습니다. 온 나라 온 세계가 축구로 인해 희비가 엇갈리는 흥분과 응원으로 그 열기가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6월 13일에 지방의회의원과 지방단체장을 뽑는 선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금년은 6월엔 지방단체장 선거가 있고 12월엔 이 나라 대통령을 선거하는 일도 있습니다. 선거에 나선 후보들은 누가 뽑히느냐에 관심을 두고 있지만 국민들은 어떤 인물을 뽑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어느 곳이나 지도자나 책임자가 중요합니다. 가정도 그 가정의 가장이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가족들이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 지방이나 그 기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도 어떤 지도자를 뽑아 세우느냐에 따라서 나라가 부강할 수도 있고 못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먼 곳 볼 것 없이 북한을 보세요. 김일성이나 김정일 같은 잘못된 사상을 가진 지도자 때문에 나라가 멍들고 백성들이 배고파 못살겠으니깐 이제는 목숨을 걸고 탈북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이번에 북한에 다녀올 계기가 생겨서 이번 주간에 다녀 오려고 준비중에 있습니다. 교회도 지도자에 따라 부흥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어느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는 10년전 5-600명 모이는 교회로 부흥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부흥시키신 목사님이 떠나시고 다른 목사님을 모셨는데 10년동안 교회가 자주 시험이 듭니다. 목사와 장로간에 갈등이 생기고 어려움이 오니깐 10년 사이에 교인이 150명 정도 남게 되었답니다. 그러더니 이번에 좋은 목사님을 모시고 이제 10년만에 다시 교회가 부흥하게 되었다고 그 교회 장로님을 만났더니 퍽 기뻐하시더라구요. 교회도 목사님을 잘 만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한국 축구가 놀랍게 발전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축구가 아시아에서 그런대로 잘하지만 세계무대에 나가선 형편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사히 세계 강팀인 잉글랜드나 프랑스나 엊그제에 폴란드하고 할 때 어떻게 한국선수들이 이렇게 잘 할 수 있는가 우리 모두 놀랍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했습니다. 세계도 한국 축구의 변화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대로 잘하면 16강에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과 폴란드와의 시합에서 우리가 너무나 실력차이로 이기니깐 온 나라가 기뻐했습니다. 그날 텔레비전에 비친 김대중대통령도 아주 오랜만에 한국의 승리를 보면서 웃는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동안 김대중대통령 얼굴이 웃음이 없었습니다. 옆에 있던 폴란드 대통령 얼굴은 우거지상을 했더라구요. 그런데 김대통령이 같이 손을 드니깐 억지로 손을 들더라구요. 그런데 이렇게 한국선수가 달라진 것은 히딩크라는 감독 한 사람 때문에 이렇게 실격이 달라진 것입니다. 참으로 지도자의 역량이 이렇게 놀라운 차이를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지도자들을 국민들이 잘 뽑아야 됩니다. 민주주의는 백성들에게 자유도 있지만 책임도 있습니다. 우리 손으로 구의원을 뽑고 시의원을 뽑고 구청장를 뽑고 시장과 도지사를 뽑는 책임은 유권자인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바른 판단을 해서 바른 지도자를 뽑아야 우리 동네가 발전하고 우리 사회가 바로 되고 잘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유권자들이 잘못 뽑아놓고 누구를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사사시대에 기드온의 아들 요담이란 사람이 당시에 사회를 빗대어 하나의 우화로 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의 우화가 참으로 중요한 교훈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여러 나무들의 세계에서 제일 중요한 지도자를 택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들이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세 나무들이 있는데 그 나무가 감람나무요, 포도나무요, 무화과나무입니다. 이 나무들은 모두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귀한 나무들입니다. 그래서 이 나무들 보고 이 나무 세계에서 임금이 되어달라고 하니깐 세 나무들은 한결같이 사양하는 것입니다. 감람나무는 나는 감람유를 만들어 내는 일로 만족하니 임금을 할 수 없다고, 포도나무는 나도 포도주를 만들어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일로 만족하니 사양하겠다고 합니다. 무화과나무도 나는 무화과열매를 배고픈 사람들에게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일로 족하니 임금을 할 수 없다고 사양합니다. 그런데 이때 가시나무가 스스로 나서서 내가 나무 세계에서 임금이 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평소에 가시나무는 가시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찌르기만 잘한 나무인데 누구도 하라고 하지 않는데도 가시나무 자신이 나타나서 왕이 되겠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만일 가시나무가 임금되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고 상처를 줄 것이니 어찌하면 되겠느냐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도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많은데 정말 감람나무나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처럼 나라와 백성에게 유익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검증된 지도자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죄송하지만 이들중엔 자격 미달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제는 투표권이 있는 우리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바르게 뽑아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 뽑으면 후회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큰 손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지도자를 뽑아야 되겠습니까? 본문 말씀을 통해 세 가지로 참된 지도자를 분별해서 바른 지도자를 뽑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첫째로 겸손한 사람이 참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감람나무나 포도나무나 무화과 나무보세요. 이들 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이 좋아하는 나무입니다. 이들 나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익을 주고 도움이 되는 나무입니다. 감람나무에서는 올리브 기름이 나와 음식에 쓰고 치료제로 쓰입니다. 포도나무는 포도주를 만들어 가정마다 기쁨과 행복을 주는 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는 꽃은 없으나 열매가 있어서 시장할 때 사람들이 양식으로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무들은 자기 책임에 몰두한 나머지 왕이 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될 수도 없고 되서는 안되는 가시나무는 모든 나무들을 무시하고 자기가 스스로 임금이 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감람나무나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는 겸손한 나무입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양보의 미덕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시나무는 겸손은커녕 교만합니다. 자기를 자랑합니다. 자기가 우두머리를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인격중에 최고의 덕목이 겸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겸손한자를 귀히 여기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반대로 교만은 인격을 해치는 큰 장애입니다. 성서에 보면 실수한 자는 다시 용서해서 하나님이 들어 쓰시고 축복하셨지만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절대로 쓰시지 않고 받은 축복도 거두어 가십니다. 벧전 5:5-6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겸손함은 우리 주님의 모습이요 교만은 마귀의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축구감독인 히딩크를 대단히 영웅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딩크식 리더십이 있으면 기업도 나라도 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딩크를 영원한 감독으로 두자고 하거나 한국 민족으로 귀화시키자고 하기도 하고 농담이지만 대통령도 시켜 보자고 합니다. 어느 기자가 히딩크에게 당신이 지금 우리 나라에 영웅 취급받는 다고 하니깐 히딩크의 대답이 "나는 평범한 시민입니다. 그저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히딩크가 축구감독도 잘 하지만 그의 인격도 참 본받을 만한 것을 발견케 된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교만한 정치가들이나 교만한 지식인이나 교만한 부자들이 나중엔 모두 하나님의 심판과 국민의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자기 분수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자기 위치를 바로 알고 서야합니다.
이번에 월드컵에서 프랑스 팀이 계속 지고 있는 것은 그 팀이 세계 1위라는 생각이 교만함과 자만으로 지금 어려운 지경에까지 온 것이라고 세계 언론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왕 후보로 나왔어도 항상 자신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한 자세로 임하는 지도자를 우리들이 바로 분별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사명감과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 참된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세 나무들은 자기들의 책임과 사명 때문에 왕을 할 수 없다고 사양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름을 생산하고 포도주를 만들고 열매를 맺는 일이 내게 주어진 일이니깐 임금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하는 일에 책임감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시나무는 자기 사명이나 자기 책임은 생각지 않고 임금이란 높은 지위나 권력을 지닌 임금이 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자기 사명도 제대로 감당 못하면서 어떻게 왕이 되며 전체 나라를 책임질 수가 있습니까? 먼저는 자기 사명과 자기 책임을 귀한 줄 알고 그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더 큰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 충성한 두 종에게 주인이 와서 뭐라고 칭찬하고 보상했습니까?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큰 일도 맡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나라 정치사를 보면 대통령 안할 분들이 대통령하거나 할려고 하다가 도리어 자신도 국민들에게도 큰 실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군인은 군인으로써의 사명이 있는데 그것을 져버리고 대통령 한 분들 모두가 불행한 대통령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과 세계적인 부자요 기업가인 어떤 분은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가 망신당하고 말지 않았습니까?
존경받던 대학교수가 대학교수로 충성하면 좋을 것을 정치판에 들어갔다가 망신당한 분들도 있습니다. 유명배우가 배우 노릇 팽개치고 정치판에 들어가서 결국 빛을 못보고 말았습니다. 먼저 자신의 책임을 바로 알고 그 책임을 바로 질 수 있는 지도자가 더 큰 책임도 잘 감당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후보 한 분을 잘 살펴서 그 사람이 입후보자가 되기전 가정생활이나 직장에서 자기 직업에 얼마나 충실한 사명자로 책임감 있게 살아왔는지도 바르게 분별하셔서 그를 지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명감 없이 부귀나 명예나 권력 때문에 정치판에 뛰어드는 사람은 참으로 경계해야 합니다.
부족한 저도 감리교단에 감독으로 나선 것도 늘 이런 기도를 합니다. 감독을 명예로 하려고 하지 말고 사명감으로 하게 해 달라고 오늘 새벽에도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셋째로 이웃을 위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 참된 지도자입니다.
세나무들은 자기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기쁨을 주고 더 나아가서는 자기들을 심어서 자라게 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왕위를 사양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시나무 보세요. 평소에도 가시가 있어서 사람들이 싫어했는데 그가 왕이 되면 많은 사람들에게 찌르고 상처를 줄 것이 뻔한 것입니다. 가시나무가 왕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고 불행해지고 말 것입니다. 참된 지도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백성들을 정말 사랑하는 지도자가 바른 지도자입니다. 그 동안 하나님을 믿는다는 대통령도 나왔고 장관도 나왔고 국회의원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신앙이 바르지 않고 신앙을 하나의 자신의 선거도구로 이용한 지도자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럼으로 진짜 믿음 좋은 지도자를 분별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지도자를 분별해서 뽑아야 됩니다.
지도자에 따라서 그 기관이나 그 지역이나 그 나라가 큰 영향을 받습니다. 좋은 지도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지도자요, 바른 양심을 가지고 사명감으로 일하려는 지도자를 바로 세워서 우리 동네가 달라지고 우리 구와 우리 시가 달라지는 역사가 이번 6.13선거를 통해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무 이야기
사사기 9:8-9, 요삼 1:9-12, 마가복음 8:22-26 / 인명진목사
2001년 1월에 시골 문경의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개통하기 전이었으니까 돌고 돌아서 가는 길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산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야 말할 수 있는데 솔직히 산 속으로 귀양살이 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보다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마음이 먼저 들었습니다. 이를 물고 사명 감당하는 것은 그리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마음이 평안하지도 않습니다. 사는 것이 즐거워야 목회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행복한 마음에서 성도들을 축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 농촌이라는 환경, 폐광촌이라는 환경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습니다. 목사이기 이전에 이 지역에 주민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그래서 식물도감, 나무도감, 곤충도감, 농사꾼이야기, 광부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읽고 또한 농촌의 일상을 자세하게 들여다보았습니다.
이때 읽은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라는 책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 책은 나무 의사라는 별명을 가진 아주 평범한 사람이 쓴 글입니다. 저자인 우종영씨는 고등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한 사람인데 나무와 함께 살면서 나무에게서 배운 인생의 소금 같은 지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느 글쟁이들이 쓴 글과 전혀 다른 느낌, 땀 냄새가 물씬 풍기는 책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겨울이 되면 가진 걸 다 버리고 앙상한 알몸으로 견디는 그 초연함에서, 아무리 힘이 들어도 매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그 한결같음에서, 평생 같은 자리에서 살아야 하는 애꿎은 숙명을 받아들이는 그 의연함에서,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가려는 그 마음 씀씀이에서 나는 내가 정말 알아야 할 삶의 가치들을 배운 것이다.”
이뿐 아닙니다. 나무 하나 하나를 보면서 나무가 주는 메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소나무-고개 숙인 아버지에게 바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식들에게 힘들다고 말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아버지의 마음을 닮은 나무.
이팝나무-그때 그 시절을 아시나요? 지난 가을 추수한 곡식은 다 떨어지고 아직 보리 추수할 날은 많이 남아 있는데 하얗게 핀 이팝나무는 쌀 생각나 눈물짓게 했습니다. 보리 고개 전에 피어 쌀 생각나게 만들었던 눈물의 나무 이팝나무.
아까시나무-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조국의 헐벗은 산 온 몸으로 지키며 자신의 몸 베임을 당하면서 고난의 세월 보냈는데, 더군다나 달콤한 꿀까지 내어주는데, 나무 대접 받지 못하고 비난 받는 아까시나무. 비난이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어도 여전히 자신의 몸 내어주는 아까시나무.
밤나무-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그대. 자신의 품 안에는 어떤 나무도 자라지 못하고 온 몸을 다 펼쳐 혼자만 하늘을 독차지하고 다른 생물들에게 햇빛 구멍 하나 허락하지 않고, 거기다 열매에 가시까지 있어 가까이 하면 손해보고 찔리는 나무 하지만 알토란같은 밤알을 내놓은 밤나무. 열매 때문에 미워할 수 없는 밤나무.
느티나무-어머니 품이 그립습니다. 지나가는 길손도 쉬어가라고 자신의 온 몸 펼쳐 그늘을 만들어주고, 나중에는 마음을 비우고 몸을 비우고 겨우살이에게까지 품을 허락하는 넉넉한 어머니를 닮은 느티나무. 그래서 사람은 나무를 통해 나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게 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가르쳐 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 서두에 장황하게 나무예찬을 늘어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이 나무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말씀은 말하는 나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복음서의 말씀은 걸어 다니는 나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말하는 나무”에 관한 이야기는 저 유명한 “요담의 우화”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이솝 생각이 먼저 나곤합니다. 짐승이나 나무를 통해 깨우치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화의 원조는 이솝이 아니라 성서입니다. 성서의 세계는 다양한 소재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때로는 이야기로, 때로는 교훈으로, 때로는 민담으로, 때로는 우화로 전달합니다. 그러나 요담의 나무 이야기는 이솝 우화와는 달리는 이 이야기를 전하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요담의 우화는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사시대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시절입니다. 사사시대를 대표하는 말씀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각기 자기 소견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일종의 무정부 상태입니다. 무정부 상태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힘이 법을 대신합니다. 기준이 없고 자기가 기준이 됩니다. 힘이 절대 권력으로 추앙받게 됩니다. 힘 있는 사람이 권력을 쥐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덕이 있는 사람이나 인격적인 사람이 빛을 발하기가 힘든 현실입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드보라, 기드온, 입다, 삼손 등 대부분의 사사는 전쟁 영웅입니다. 그만큼 힘이 자신을 지키는 최고의 길이라고 생각하던 시대였습니다.
오늘 구약의 이야기는 이런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힘이 절대 권력으로 추앙받고 있던 시절 기드온이 미디안의 침공을 물리치고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당대에는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수를 다하고 죽었을 때, 남겨놓은 아들들은 무려 70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70명의 아들들이 권력투쟁을 벌이면서 이스라엘을 핏빛으로 물들입니다.
왕자들 중에서도 특히 세겜 출신의 “아비멜렉”이라는 아들의 정치적 야심은 비정하다 못해서 처참할 만큼 가혹한 형태를 띠었습니다. 마침내,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형제간의 혈연이나 윤리 같은 것은 깡그리 무시합니다. “세겜”의 패륜아 아비멜렉은 오직 왕이 되겠다는 일념에만 눈이 가려서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소위 말하는 “정치깡패”들을 돈으로 매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매수한 깡패들을 충동질하여 그는 그의 형제 왕자 70여 명을 모두 잡아 한 바위 위에 메어쳐 남김없이 죽여 버렸습니다. 그것도 그냥 죽인 것이 아니라 한 피 받은 형제를 바위에 떡을 치듯이 때려서 죽였습니다. 이 전대미문의 형제 살육행위가 사람이나 동물의 양심은 물론이고 나무들의 양심까지 충격을 주어서 나무들로 하여금 사람이 말해야 할 말을 대신하게 했다는 것이 성서의 증언입니다. 이 끔찍한 사실을 보고 나무들이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폭력의 공포에 눌려 말하지 못하고 쉬쉬 하자 나무가 입을 열어서 말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우리는 사람만 사람의 말을 듣는다고 생각하는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느 시인이 자신의 집 정원에 정성 들여 가꾸어 온 나무를 소개한 바가 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어느 날 무심코 그 나무 곁에 서서 혼잣말로 “이 나무를 뽑아서 딴 곳으로 옮겨 심어야겠다.”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나무가 그 소리를 듣고는 부르르 떨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 본문에 나오는 나무들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아비멜렉의 이 가공할만한 형제살육 행위를 보고 참다못한 나무들이 또한 분노에 떨면서 감히 앞을 다투어 입을 열고 말을 하기 시작했노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서에서 말하는 나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십시오. 나무들이 감람나무에게 찾아가서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감람나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본래 내 몸에서 감람유 기름을 내는 일을 천직으로 부여받았소.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데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 위에 우쭐 대리요?”
이번에는 나무들이 무화과나무를 찾아가서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무화과나무도 같은 말을 합니다. “나는 본래 내 몸의 열매로 더위에 지친 나그네에게 달콤한 요기가 되는 것이 천직이요. 그런데 어찌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버리고 나무들 위에 우쭐 대리요?”
이번에는 나무들이 포도나무에게 찾아가서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포도나무도 같은 말을 합니다. “나는 본래 내 몸에서 나는 포도열매로 포도주를 만드는 천직을 부여받았소. 이 포도주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고 있소. 그런데, 나 어찌 이 귀한 직분을 내어버리고 가서 다른 나무들 위에 왕으로 군림하여 우쭐 대리요?”
마지막으로 나무들이 가시나무에게 찾아가서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자기 분수를 모르는 가시나무는 앞의 세 나무와는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으려 한다면 내 그늘 아래에 피하라. 그렇지 않으면 불이 내 몸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까지 불살라 버릴 것이다.”
이 나무들의 이야기는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자기 형제 70명을 살육하고 힘을 가지려 하고 왕이 되려는 이야기를 우화로 폭로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다름 아닌 70명의 형제들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요담이 우화로 만들어 남의 말 하듯 하면서 폭력으로 힘을 가지려는 형을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담이 들려주는 나무 이야기는 “나무가 말을 한다.”는 쇼킹한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들 사이에 가려 있는 사람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무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무에 가려져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나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나무처럼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람을 목석 취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치 나무로 보인다고 해서 나무들 속에 가려져 있는 사람을 보지 못하는 것을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나무들 속에 가려져 있는 사람을 그냥 나무로만 취급하여, 도끼로 나무들을 모두 찍어 넘기는 아비멜렉의 폭력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힘의 논리가 법보다 우선시 되는 사회는 실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사람을 나무로만 보게 하는 사회였습니다. 권력이나 물질에 눈이 어두운 사람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사람을 나무처럼 경직된 하나의 소유물로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나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볼 수 있어야 그 사회가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 사후의 아비멜렉 시대의 사회는 실로 나무에 가려져 있는 사람의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는 희망 없는 사회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주전 472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는 세계 최고의 제국 페르시아와 전쟁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둡니다. 오리엔트와 유럽의 최초의 충돌이라 할 수 있는 전쟁이었습니다. 페르시아는 60만 대군을 육지에 포진시키고 바다에 3백 척이 넘는 함선까지 띠웠습니다. 이때 그리스는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도시국가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동원된 군사도 10만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이 전쟁에서 페르시아의 승리는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페르시아는 거의 전멸 당하다시피 했고, 이 일로 페르시아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전쟁에서 서양이 이긴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역사적인 지식입니다. 그 다음의 그리스 사람의 행보가 너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주전 472년 봄, 대제국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상상할 수 없는 승리를 거둔 아테네 시민들이 원형극장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아이스킬로스라는 사람이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다룬 “페르시아인”이라는 연극을 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관객들은 대부분 살라미스 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살라미스 전쟁에서 사용했던 투구를 쓰고 방패를 든 채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막이 오르기 전, 감동적인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전사자들의 유족들이 죽은 자의 투구와 방패를 들고 행진을 했습니다. 이들을 보는 아테네 시민들은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슬픔을 억제하고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원형극장은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있다는 감사와 죽은 자들을 위한 슬픔과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유족들은 관람석 맨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이쯤 되면 이 연극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짐작이 갑니다. 사실 이런 희생과 아픔이 있었지만 우리는 대제국 페르시아를 물리쳤다는 분위기 아니겠습니까? 관객들은 이 연극을 통해 아테네 시민의 위대함을 확인하고 승리를 만끽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또한 전제 군주의 힘 앞에 살아남은 민주주의 위대함도 노래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연극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연극의 제목 “페르시아인”처럼 이 연극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 사람이 한명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축제적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습니다. 이 연극에는 오직 페르시아 사람만 등장하고 왜 대제국 페르시아가 작은 도시 국가 아테네에게 패배했는지 그 이유만을 설명합니다.
이 연극 무대에는 세 사람만 등장합니다. 전쟁에서 패한 페르시아 제국의 크세르크세스 왕과 그의 어머니 아토사 그리고 유령으로 등장하는 그의 아버지 다리오 왕 뿐입니다. 아토사는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왕에게 페르시아의 멸망을 한 마디로 “자만심”이라고 말합니다. 힘이 있다고 힘없는 자를 나무토막처럼 여기고, 힘이면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만심이라야 말로 페르시아를 망하게 한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원형극장에서 “위대한 아테네 시민이여!,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고 싶었던 관객들은 숙연해졌습니다. 승리에 도취해 있어야 관객들은 페르시아 투구를 쓴 채 울부짖는 원수 크세르크세스와 함께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도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만심에 빠져 페르시아 왕처럼 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힘만 믿고 자만심에 빠진 페르시아 왕의 모습이 자신의 미래의 모습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지요. 그것도 전쟁의 승리를 자축하는 파티에서 말입니다.
아이스킬로스는 성숙한 시민의 길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자만심에 빠지면 언제든지 페르시아처럼 망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또한 힘이 있으면 마음이 변하게 되어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나무처럼 보인다는 것을 말입니다. 눈은 뜨고 있지만 소경입니다. 이때 맨 앞 줄에서 이 연극을 보고 있던 아테네 민주주의 창시자 페리클레스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속삭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다.”
그렇습니다. 그리스가 세계의 정신의 심장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힘에 도취되어 인간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항상 경계했고, 힘이 있으면 사람이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조심했습니다. 힘을 가지는 순간 그것은 항상 마음을 교만하게 만들고,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넘어짐의 앞잡이가 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에 등장하는 소경이 본 “걸어 다니는 나무” 이야기도 이러한 문맥 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벳새다의 한 소경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나무로 보는 사회 전체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마의 식민통치 지배 아래에서 힘이 제일이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종교인들은 율법의 허울을 쓰고 사람을 나무로만 보도록 강요했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기를 원하는 예수님께서는 소경 아닌 소경들로 가득 차 있는 경직된 사회 속에, 자신의 몸을 던지셨습니다. 또한 사람을 사람으로 보도록 영적인 눈을 뜨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예수님의 생각 속에는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안식일이라는 제도의 노예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아 생동하는 사람의 인격을 율법이니, 교조니, 관습이니, 도덕이니, 기업윤리니, 정치권력이니 하는 것으로 칭칭 묶어서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놓는 비인간화의 현실을 깨뜨려 보겠다고 나선 것이 또한 예수운동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나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운동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예수 정신입니다.
소경이 처음 눈을 떴을 때 사람이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였다는 것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는 인간 사회의 현실입니다. 소경과 문둥병자, 세리와 창기, 사회 밑바닥에 있는 이들은 사람은 사람이라도 사람 같지 않아서 일종 걸어 다니는 나무 취급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 걸어 다니는 나무들, 비인간화된 나무들이 사람으로 보여야 비로소 우리 사회에는 구원의 희망이 동터온다는 것이 예수의 기본정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것도 실제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그런 치유행위도 되겠지만 오히려 사람을 걸어 다니는 나무로만 보는 영적 어두움의 현실을 깨뜨려서 사람을 사람으로 보게 해주는 운동입니다. 이것이 비인간화 되어 가는 사회에 그리스도인들이 펼쳐나가야 할 예수 정신입니다.
말하는 나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우리도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만심에 빠져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는 자만심에 빠져 소경이 되고 만다는 것을 말합니다. 걸어 다니는 나무 이야기는 사람을 나무나 돈으로 권력으로 보는 소경을 눈을 뜨게 하셔서 사람을 사람으로 보게 하기 위하여 예수께서 오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사람을 나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예수 정신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가야 할 구원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가 나무들의 노래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할 때 나무들의 사랑 이야기도 듣게 될 것입니다. 걸어 다니는 나무들! 삶의 순간순간 마주치는 걸어 다니는 나무들이 모두 사람으로 보이게 되는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우리에게 열릴 것입니다. 사람을 나무가 아니라 사람으로 보기를 원하는 갈릴리 성도들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가득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