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 사랑해라는 말이 살아야 해라는 말처럼 절박하게 들렸다. 플레이리스트에 흐르는 애절한 사랑노래가 왜 이렇게 절규하는 목소리 같은지 사랑해, 로 시작해 사랑했어로 끝나는 이어지지 못한 누군가의 슬픈 마음과 같은 노래 살아야 해, 살아야 했어로 한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01 / 건조한 탓에 왼손 네번째 손가락 두 번째 마디만 트고 갈라졌어. 매일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꾹꾹 눌러 감아도 소용이 없어. 자주 쓰는 손가락이어서 접혀지고 군데군데 닿다 보면 튼살이 쩍쩍 갈라지고 따끔하니 아파오거든. 그런데 이 손가락에 상처가 쉬이 낫지않고
어떤 날은 숨을 죽인 채로 주변의 여린 살을 깨물며 단단하게 자리 잡아가는 게 좀 신기했어. 때론 굳은살을 엄지손가락으로 매만지며 평온함을 찾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어.
장신구를 하지않은 왼손에 남들처럼 으레 정해진대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다면 심플한 반지 하나쯤은 끼워져 있을 텐데. 정해진 길을 가지 않은 손가락의 고된 여정의 흔적 같기도 하고, 외부의 접촉을 꺼리는 주인닮은 성정이 네 번째 손가락에 고스란히 담긴 건가 싶어서 유달리 애착이 가고 있어.
[이 손가락은 유독 예민해 취급에 주의하세요]
경고문구가 마디에 쓰여진 것 같다고 느껴.
사랑을 대차게 거절하는 내 마음이 투영된 작은 투쟁을 보는 것 같아. 이 과정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거란걸 잘 알아. 언젠가는 이 특별한 손가락이 특별해지지않고 상처가 나음으로서
내게 조금 더 넉넉한 마음과 포용심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지. 단정할 수는 없어. 다만 나는 나았다가 깊어졌다가 다시 나아가는 순환을 반복하는 굳은살이 지금으로선 애착이 가고 사랑스러울 뿐이야. 나에게 애정의 대상이 되는 손가락이 얼마나 되겠어. 지금의 과정에 집중하고 사랑할 따름.
02 / 당신의 눈동자에 내가 담기는 순간이 좋아요. 그 시야에서 내 모습이 사라지면 허공에 발을 딛는 것처럼 아득해져요. 다정한 눈빛으로 내게 시선을 맞춰주세요. 흘러가는 숨소리도 마음을 두드리는 음악같아요. 하지만 가사에 사랑이라는 말은 절대로 나오지 않을 거예요. 사랑이라 정의내리기엔 당신을 향한 이 마음이 그리 명료하지 않은걸요. 오래도록 정의내릴 수 없는 내 마음을 들여다봐주세요. 마음이 당신을 부르는 소리에 마음을 열어두시면 좋겠어요.
03 / 발이 미끄러져 주저앉을 뻔한 길을 다시 걸어가면 그 기억으로 발이 잠시 묶인다. 나아가기 요원해질 때, 그 길을 가야만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한다. 망설임은 잠시고 나아감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정하고 따뜻한 응원을 건네주어야만 한다. 걸음이 잠시 느린 것에 대해 후회하고 날카로운 말로 멈추게 해선 안된다.
04 / 침대에 반듯이 누워 있으면 커튼을 치지 않은 창문 너머의 빛이 천장에 어룽거린다. 원래는 커텐을 쳤지만 언제부턴가 커튼 치는 것을 삼가게 되었다. 춥다거나 몸이 상한다거나 그런 것이 우선이 되지 않는다. 너머의 따뜻하고 시린 빛이나 크고작은 소음들을 마주하면서 저며 드는 외로움에 익숙해지도록 나를 버려둔다. 작년의 사건은 아직도 내게 커다란 충격이 되어서 겨울은 극복해야할 무게를 가진 계절이 되었다. 누워있으면 나는 혼자인 기분을 느끼지만 정작 온전히 혼자였던 적은 없었다. 싸구려 벽지에 부서진 별처럼 반짝이는 빛이 시야에서 산란한다. 별을 가장하지만 그건 별일 수 없다. 그게 꼭 나 같다.
05 / '파치귤'이라는 단어를 만났다. 귤인데 파치귤이란건 뭐지? 생소한 단어를 마주하면 못 넘기는 성향이라 캡처해두고 검색해보았다. 상품 가치가 없는 껍질이 벗겨지고 흠이 있는 모양새를 가진 귤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명란젓의 껍질이 벗겨져 내용물이 터진것도 명란젓 파치라고 일컫는 것임을 알았다. 파치라는 단어는 생소할 뿐만 아니라 어원이 특이했다. 깨지다의 한자 '파'와 어떤 대상을 일컫는 한글 '치'를 합친 단어라니. 단어의 탄생조차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특수성을 가진 의미와 일치했다. 나는 받침이 없는 이 특수한 단어를 오래오래 곱씹어보았다.그리고 나답게 의미를 덧붙여갔다.
누군가에겐 가치가 없는 모나고 상처투성이인 파치들. 빛나고 성공한 이들의 화려함 뒤에서 상처를 숨기지 않으며 당당하게 자신만의 반짝임을 찾아가고 있을 거라고. 나도 그런 파치들 중 하나의 파치일거고.서로의 상처를 마주하며 자신만의 유일한 가치를 증명할 거라고. 온전하지 않으면 뭐 어때.돌아보면 온전한 것들은 얼마 없고 저마다 크고 작은 상처들을 가지고 살아가는걸. 상처를 부끄럽다고 감추지 않고 자신답게 빛나는 방법을 모색하면 그만인걸. 우린 모두 그런 가치를 가진 파치들인걸.
첫댓글 마지막 글 너무 좋다 위로되는것같아....자꾸 곱씹게되네 고마워 여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