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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이(61세)쯤 되면 어느 정도는 척 보면 감이 옵니다. "대통령이 지금 무슨 짓을 한 것이여?" 부터 낯선 곳의 분위기 감지, 싸움 판의 승패, 사고 칠 인물의 관상 등등 한이 대통령 '직무 정지' 입장을 발표 한 후에 코드 원을 만나러 갔는데 대통령 실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채 계엄 선포 4일 째를 맞고 있습니다. 피를 말리는 캄캄이를 어찌 해석해야 할까요? 한강 작가가 노벨상 수상 이후 인터뷰를 거부 하고 있었는데 이번 시상식(12.10) 때 무슨 말을 할까요? 123비상계엄에 대한 언급을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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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궁금합니다. 오늘(12.7.pm7시) '탄핵'과 '대통령 지키기'에 대한 힘겨루기는 누가 이길까요? 국힘에서 이탈표가 나올까요? 필자는 60평생 악의 결탁-동병상련-의기투합을 지켜보았는데 세상에 공짜도 없고 쉬운 것도 없습디다. 만약 가결이 된다면 조국은 대혼란에 휘말릴 수밖에 없을 것이니 현명한 선택을 하시라. "심각한 오판(baly misjudged) 이며 매우 문제가 있고(deeply problematic), 위법적(illegitmate)이다." 워딩이 자존심 상하고 기분 엿 같지만 커트 미 국방 부장관의 발언에 동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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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필자는 탄핵 정국은 실정법이냐 자연법이냐의 문제라고 봅니다. 칸트의 도덕 법칙도 되새겨 보고 예수, 붓다의 가르침도 한 번 살펴들 보시라. 123vs 1212에 이어 123 vs 518의 차이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7080세대에게 데모는 상아탑의 특권입니다. 안치환이 부르는 '솔아 솔아 푸르는 솔아'양희은의 '아침이슬'그리고 '오월가'가 정겨우면 좌빨인가요? "금남로에 꽃잎처럼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린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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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곡이 우리나라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78년 6월인데요 Michel Polnareff의 원곡을 박 인희 씨가 편집해서 음반을 냈는데 그 때는 그다지 주목을 못 받았고 5.18 이 발생한 후로 어느 무명의 편곡 자에 의해 다시 가사가 붙여지면서 5월의 노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필자는 가끔씩 역사의 한 간에 서 있는 나에 대한 인식을 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희비가 엇갈리면서 떠오르는 두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2002'월드컵 4강의 감격이고 다른 하나는 80년 5.18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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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딩 때 시작된 5.18의 질긴 끄나풀이 84년 수방사 헌병대 근무로 이어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만 제가 5공 시절 全 통 경호경비를 나갔었고 장세동 씨 전역식까지 참석 했다는 것 아닙니까? 한번은 고참병과 함께 밀 걸래로 아스팔트 연병장에 있는 물기를 닦은 적이 있는데 그날 全 통이 방문한 날 입니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방공 방첩 포스터와 조기 청소 때 '새벽종이 울렸네.'를 불러댔던 386세대이면서도 어느 정도는 좌경용공적인 색깔이 내 몸 구석진 곳에 피해의식으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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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을 다룬 영화는 '택시 운전사'-'화려한 휴가'이고 12.12사태는 '서울의 봄' 과 '남산의 부장들'입니다.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 주던 그 소녀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그 소녀가 보고 싶을까 비에 젖은 풀잎처럼 단발머리 곱게 빗은 그 소녀 반짝이던 눈망울이 내 마음에 되살아나네. 내 마음 외로워 질 때면 그날을 생각하고 그날이 그리워질 때면 꿈길을 헤매는데 음~ 못 잊을 그리움 남기고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미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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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로에서 택시 운전사 송강호가 부르기도 전에 벌써 제가 따라 부르고 있더라고요. ‘단발머리‘는 용필이 형 제1집에 수록된 곡인데 고1이었던 저는 노트에 가사를 적어 다닐 만큼 환장을 했습니다. 음악에 젬병인 제가 가성으로 따라 부를라치면 오만상을 써야 하는 것이 이 노래의 키포인트입니다. LP 판으로 나온 1집은 이런 곡들이 수록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창밖의 여자/돌아와요 부산항에/잊혀 진 사랑/돌아오지 않는 강/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단발머리 /한 오백 년/대전 블루스/ 너무 짧아요./슬픈 미소/ 너와 나 (군가)/ 그때는 무조건 건전 가요(군가) 한 곡은 삽입해야 했으니 교련 복 입고 군사훈련 받는 것은 불만 이랄 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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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택시 옷 입혀놓고 송 강호처럼 어울리는 기사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시라. 제가 찬찬히 보니까 택시 차종이 1300CC 브리샤 입니다. 포니에 밀려 1981년도에 단종 되긴 했지만 이래 뵈도 개인택시입니다. 지금이야 택시가 3D 직종이라 찬밥 신세지만 당시에는 개인택시 하나 있으면 중산층 이상이었습니다. 송강호가 그러는데 영화에 나온 브리사 내부가 좀 좁아서 유턴이 상당히 힘들었지만 생각보다 잘 나갔다고 합디다. 그래서 탈수록 정감이 생기더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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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일본에서 사 왔는데 아마도 꽤 비싸게 주고 사 왔을 것입니다. 내 생각엔 한 8,000만 원 정도 주지 않았을까요? 뭣 땜에 혼자 사는지 몰라도 만 섭(송 강호)은 11살짜리 딸내미랑 셋방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고단한 운전을 마무리하고 들어온 아빠가 잠자는 딸내미를 들여다보았는데 이마에 상처가 있지 뭡니까? “어떤 놈이 우리 공주님을 이렇게 만들어놨어. 내 이노무 새끼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 속 깊은 딸내미 는 아빠가 그럴 줄 알고 자는 척 했을 것입니다. 예주야, 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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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살짜리가 아빠 밥 챙겨놓고 자는데 저는 벌써 울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군함도가 개봉 일주일 새 500만쯤 보았나 본데 영화 시작하고 10분 지나자 마자 ‘택시운전사‘가 무조건 ’군함 도‘를 넘어서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제가 군함 도를 포스 팅을 했습니다만 군함 도는 블록버스터이지 시나리오, 감동, 메시지, 어느 것 하나 ‘택시운전사’의 섬세함과 자연스러움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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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지섭, 송 중기, 이 정현, 그리고 황 정민을 다 합해도 송강호의 존재감을 못 따라 간다고 생각하는데 동의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송 강호 이놈, 완전 괴물입니다. 형사 면 형사(살인의 추억), 깡패 면 깡패(우아한 세계), 변호사, 택시 운전사까지 건들건들 대충대충 하는 것 같은데 송강호가 하면 왠지 진짜 같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을 담은 영화 ‘변호인’ 이후 박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올랐을 때 인터뷰를 했는데 그는 되레 그로 인해 “자기검열할지도 모르는 자기 자신을 자기검열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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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놈이 인터뷰도 멋지게 했습니다. “인간적인 것은 자기가 열심히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보통 사람들의 건강한 정신에서 나오지요. 무엇보다 외면할 수 없는 마음의 빚이 있었다면서 왜곡된 언론 보도와 통제로 인해 모두가 눈과 귀를 막았던 시대에, 세상을 바꾸고 사회를 눈뜨게 한 건 어떤 정치가가 아니라, 이름 모를 평범한 시민들의 희생”이었다고 했다지요. 택시는 영업용이 많을까요? 개인택시가 더 많을까요? 개인택시가 더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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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집에 셋방 사는 송강호가 영업용 하는 친구 회사에 왜 놀러 왔는지 아는 사람은 알 것입니다. 10만 원을 좀 빌려달라네요. 주인 집 월세를 갚기 위해 주인인 친구한테 돈을 빌리려는 친구를 누가 미워할 수 있습니까? 저는 절대로 못 미워합니다. 그래서 광주 왕복 10만 원짜리 예약을 가로채도록 친구랑 벌써 모의했고 송 강호는 독일 기자 놈 피터(토마스 크레치만)를 태우고 가고 있습니다. “나이스 미추”, 콩글리시까지 어쩜 그렇게 자연스럽고 능청맞은지 절로 감탄사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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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운전사’는 장 감독이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 페터(1937~2016)의 회고를 기반으로 영화를 만들었답니다. 힌츠페터가 1980년 5월 민주화항쟁이 한참이던 광주로 가 군부정권이 자행한 참상을 전 세계에 보도했습니다. 그때 서울에서 광주로, 다시 서울로 그와 목숨 걸고 동행한 택시운전사가 있었는데 김 사복(진짜 송 강호)이란 인물입니다. 그렇게 수소문을 했어도 김 사복이란 인물은 영영 찾지 못한 걸 보면 어쩌면 가명이었거나 죽었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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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가 그 김 사복이란 인물을 대신해서 내 눈에 비친 5.18을 각색해 보려고요. 물론 텍스트를 최대한 살려서 말입니다. "왜 쏘았지(총) 왜 찔렀지(칼)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 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있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 1980. 5.17일 오후에 양각 산에서 멱을 감고 친구들과 객사리 쯤 왔는데 송강호가 독일 인을 태우고 만났던 그 트럭이 담양 경찰서를 습격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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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그 풍경이었는데 블랙 앤 화이트 문양의 체크 바지를 입은 형들이 세 명쯤 있었고, 각목을 든 선배 형 이름이 아마도 용선 형이었을 것 입니다. 유준열의 촌스러운 바지가 배꼽 바지에 12인치 일자 통바지이어야 맞습니다. 신발은 흰 고무신이나 스파이크 운동화입니다. 내 친구는 하복 밑단에 제일합섬 면50%폴리에스텔50%을 로고로 드러나게 해서 입었을 것입니다. 전남 대 80학번의 시위를 돌파구로 해서 시작된 광주시민의 시위는 다음 날인 19일, 2만여 명 이상의 가두시위로 발전하였고 그 당시의 주요 요구사항은 `계엄령 해제, 전 두환 퇴진, 김 대 중 석방`등이었던 걸로 기억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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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른 들이 왜 시위대에게 박수를 치고 먹을 것을 주는 지 이유를 몰랐지만 박수를 쳐주어야 할 것 같아서 그냥 박수를 쳤습니다. 이렇게 타오르기 시작한 시민들의 평화적인 시위에 난데없이 공수부대가 투입되었는데 하필 13공수가 우리 동네에 있는 부대입니다. 무차별로 주검이 되어 나가는 부모 형제를 빤히 보고서 혈기가 없는 사람이라도 눈이 뒤집어 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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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십자 병원에 태극기 덮인 관들에 대하여, 도청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더미에 대하여 친구들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들었습니다. 제가 5월 19일경 하복을 찾아 가지고 오다가 시민 군이 탄 대형버스(아세아 자동차)와 만났을 때, 시민 군들은 많은 희생이 있었음에도 광주 시민들의 열 열한 지지를 받으며 전남 일대(나주, 장성, 담양 등)를 제압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무기한 휴업에 철없이 기뻐하기도 했지만 광주에서 통학하는 친구들의 생생한 진술은 지금도 내가 이따금씩 미친놈처럼 5월 가를 부르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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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가 딸기 철이었는데 광주로 출하하지 못 한 극상품 딸기를 한 상자에 1,500원에 거저먹었고 광주에서는 배추 한 포기에 3,000원에 거래가 된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문 닫힌 거리는 정말 폭격 맞은 거리 마냥 휑했고 영화 속 35년 된 5.18 사진들이 몇 장 보였는데 이번에 새로 찍은 영상들은 포토샵을 아주 잘했더라고요. 꼭 그때 그 영상처럼 말입니다. 1980년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고 월요일 휴교령으로 철없이 좋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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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밤 학생회 간부들은 대부분 체포됐고, 남은 사람은 잠수를 탔습니다. 서울에서는 간헐적인 시위가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러나 잠시뿐 스크럼을 짜기도 전에 흩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총칼로 무장한 군인들은 전경들과 달랐습니다. 누가 퍼뜨렸는지 모르는 북한군 개입설이나 학생 깡패 설은 송강호가 식당에서 있을 때 보여준 모습 그대로 당시에도 떠돌았던 소문입니다. 서울에선 대학생들의 저항이 거의 사라졌고 계엄군에 검열당한 신문은 녹슨 바리캉으로 깎은 머리같이 군데군데 허연 자국을 남긴 채 배포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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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로에서 충장로(도청)까지는 약 2km 정도가 되는 거리로 주말이면 벌써 차 없는 거리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명동거리 같은 곳입니다. '충장'이 김덕령 장군의 휘호라는 것을 도올 강의를 통해 알았습니다. 나는 종종 교복 대신 사복을 하고 나가서 삼양 백화점 앞 우체국 까지 순찰을 했고 그 무렵의 겨울엔 어머니 삯바느질 감을 Delivery하느라고 곧 잘 다녔던 곳입니다. 5.20일까지 어머니께서 광주에 갇혀 못 오셨는데 나중에 승호 장 근처에 계시던 어머니께서 헬리콥터에서 총을 쏘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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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댁이 밥하러 나가다 총 맞아 죽은 것은 어머니가 직접 보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 말이 인공 때보다 더 무서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나라냐? “ “도대체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고, 어떻게 살 것인가?” ‘택시운전사’에 흐르는 화두도 광주의 비극은 누군가 바로 그 도리를 저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지요. 송강호가 택시운전사로서 돈을 받고 정당하게 서울로 데리고 돌아와야 했을 손님(독일 기자)을 사지(광주)에 두고 나만 살겠다고 빠져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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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 만 섭은 빠듯하게 먹고 사느라 약간 밉상이었는데 아내 먼저 보내고 혼자 어린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솔직히 동질감이 더 많았습니다. 월세 벌려고 왔다가 택시 수리비까지 혹을 붙여서 간 찌 지리 택시운전사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답니까? 딸내미의 안전을 확인하자마자 곧장 죽음의 현장을 향해 유턴을 하고 돌아간 택시 기사 송 강호는 비로소 광주에서 비극을 정면으로 목도하게 됩니다. 광주에 간 만 섭이 붉은 불빛 속에 사복 경찰에게 쫓기던 밤 장면은 흡사 공포영화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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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섭이 도망가다가 고개를 돌리는데, 자기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처참하게 붙잡혀 있는 트럭이 보였고 카메라가 약간 깜빡깜빡합니다. 이게 만 섭의 시선인 거죠. ‘내 눈에 보이는 게 지금 현실인가? 꿈인가?’ 이런 몽환적인 느낌을 줍니다. 만 섭은 그날 어마어마하게 혼란스럽고, 죽을 뻔도 하죠. 그런 공포는 난생 처음이었을 겁니다. 시위대가 군부독재의 총격에 죽어가는 금남로 장면이 유난히 고돼 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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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로에 꽃잎처럼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려나간 어여쁜 너의 젖가슴“ MBC 불타던 날 내 친구는 그날 죽었습니다. 책상 앞에 놓인 꽃을 보고서 나중에 알았습니다. 광주 외곽 근무를 31사단에서 섰는데 그 길이 망월동 묘지 뒤쪽 교도소로 빠지는 것 같기도 했는데 잘은 모르겠습니다. 근무자들이 병장은 22살, 중사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이십 대 후반인데 연병, 무조건 반말에 욕설입니다. 광주를 탈출하는 와중에 박 중사(엄 태구)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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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크가 열리고 초팔일 행사 물건 밑에 감춰놓은 서울 넘버가 보일 때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필자는 헌병 근무를 서봐서 검문검색 신이 더 긴장 되더라고요. 아마도 장 감독이 피의자 말고 아군 중에 군인도 있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지프와 택시의 추격전은 할리우드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었고 유해진의 백 드라이빙을 절정으로 탈출에 성공할 때의 임팩트는 군함도의 엑-소-더-스 보다 훨씬 컸습니다. 베스트 드라이버 송 강호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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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색 보리가 익어가는 따가운 봄날 이었제. 그날은 갑자기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했었제. 공부하기 싫어 기분이 좋았제. 갑자기 어디서 왔을까? 얼룩무늬 군복의 군인 아저씨들이 따가운 봄날 햇살 도로에 나타 났었제. 그 아저씨들은 전쟁도 아닌디 총에 칼을 꽂고 한 손엔 곤봉을 들고 있었제. 젊은 사람이 지나가면 이유 없이 잡아 곤봉으로 내리 쳤제. 그 젊은이는 머리에서 피가 났제. 그걸 본 노인이 때린 군인 아저씨에게 너무한다고 했제. 그러자 그 아저씨 그 노인을 때려 또 머리에 피나게 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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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병원 응급실에서 어느 여고생은 죽고 피난 사람들을 부지런히 옮기고 있었제. 그러다가 잠시 나갔다가 오겠다는 그 여고생은 조금 지난 후에 시신이 되어 그 병원에 들어 왔제. 빛고을 광주 어느 외곽 저수지에서 멱 감은 어린이들은 좋아라 했었제. 그 어린 것들을 향해 물오리 사냥을 하듯 총질을 해서 어린 것들은 죽었제. 만삭의 여인이 남편을 마중 나갔다가 누가 쏘았을까 그 여인은 싸늘한 시체가 되었제. 관이 동이 났고 관에 덮을 태극기도 없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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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때렸을까?
왜 찔렸을까?
왜 죽였을까? 누가 그렇게 해라고 시켰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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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직도 시켰다고 한 사람은 없제. 그래서 진정한 화해도 없고 끝나지 않은 슬픈 우리들의 현대사여 우리들의 자화상이여, 아직도 전남 도청에서 총소리가 들려오면 어느 소설가는 작은 쪽방에서 붉은 캐시밀론 담요를 뒤집어쓰고 죽어간 동료들에게 말하제. 미안하다.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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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정치적인 요인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다." (한강, 소년이 온다)
I'm thinking of trying to memorize 10 words a day with only 10 sentences for a year.
2024.12.7.sat.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