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中國)’이라는 명칭은 2,500년 전에 주(周)나라 때 공자가 편찬한 <시경(詩經)>에 최초로 등장한다. 대아,민로편에 "혜차중국 이수사방(惠此中國, 以綏四方)"이라는 귀절에 나타나는데, ‘중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부터 혜택을 베풀고 편안함으로써(綏, 편안할 수) 사방(천하)을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때의 중국은 국명이라기보다는 ‘나라의 중앙’, 즉 서울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한나라 때에 <시경>을 연구한 모잠은 “중국은 서울이다(中國, 京師也)”라고 주석을 달아놓았다.경사(京師)는 제왕이 거주하는 도읍지로서 역대 중국사서에 자주 사용되는 표현인데 주로 장안(섬서성 서안)이나 낙양(하남성)을 이른다. 제왕이 다스림에 있어서 자신이 거주하는 서울(중국) 백성들부터 돌보고 점차 사방으로 확대해 나간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후한 말에 경학에 능통했던 유희(劉熹)의 설명처럼 제왕이 거주하는 곳을 ‘중(中)’이라고 불렀다.
한무제 유철이 동중서 등 춘추공양학파를 등용하여 유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나서부터는 소위 중화사상이 배태되어 중토를 제외한 나머지 동서남북은 모조리 오랑캐 딱지를 붙이고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고 비하했다.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만에는 벌레충(蟲), 북적에는 개견(犬)자가 들어가 있다. 서융은 방패와 창을 잘쓴다는 뜻이고 동이는 큰활(大弓)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2300년 전에 공자의 7대손이라고 하는 공빈(孔斌)이 쓴 <동이열전(東夷列傳)>이라는 책에 나타난다. 그는 BC 268년에 위(魏)나라의 재상으로 있으면서 동이를 흠모한 공자의 후손답게 동이에 관한 자료를 모아 간단한 기록을 남겼는데 순임금은 동이에서 태어나서 ‘중국으로 들어가(而入中國)’ 천자가 되어 다스렸다고 하였다. 이때의 중국은 중토(中土)의 나라를 의미한다. “동방에 오래된 나라가 있는데 동이(東夷)라 한다. 별의 방위로는 북방(箕尾星)이며 땅은 선백(鮮白)에 접했다. 신인 단군(檀君)이 계셨는데 구이(九夷)의 추대를 받아 요 임금 때에 나란히 임금이 되었다. 순임금은 동이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와서 천자에 올라 백왕의 우두머리가 되어 다스렸다.” (東方有古國 名曰東夷 星分箕尾 地接鮮白. 始有神人檀君 遂應九夷之推戴而爲君 與堯竝立. 虞舜 生於東夷 而入中國 爲天子至治 卓冠百王)
‘꽃다운 이름이 중국에 빛났다(英名洋溢乎中國)’ “유위자(有爲子)는 하늘이 내신 성인인데 꽃다운 이름은 중국에 빛났다. 이윤(伊尹)이 선생의 문하에서 배워 은나라 탕왕의 현명한 신하가 되었다. 그 나라(동이)는 비록 강대하지만 교만하지 않았고 병사는 강했지만 침략하지 않았다. 풍속이 순후하여 길을 서로 양보하고 음식을 나누며 남녀는 거처를 달리하여 동석하지 않았으니 가히 동방예의 군자국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有爲子 以天生聖人 英名洋溢乎中國 伊尹受業於門 而爲殷湯之賢相. 其國雖大 不自驕矜 其兵雖强 不侵人國 風俗淳厚 行者讓路 食者推飯 男女異處 而不同席 可謂東方禮儀之君子國也.) *동이족 스승 유위자에게 배운 이윤은 은나라 탕왕을 도와 하나라를 정벌했다.
중국역사를 돌이켜 보면 한족보다는 주변의 선비족, 몽골족, 거란족, 여진족, 만주족들이 지배한 역사가 더 장구하였다. 아쉽게도 중토에 들어간 자들은 모두 중화문명에 용해되어 한족화되었거나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였다. 오로지 배달 한민족만이 중화와 다른 역사, 문화, 언어, 관습을 지켜왔다.
최초의 중화는 배달민족
한족이 시초에 창달한 것으로 포장된 중화문명도 그 모태는 배달민족 가운데 새(鳥)를 토템으로 숭상하는 조이계(鳥夷係)가 남하하여 세운 은나라의 황하문명이 모태가 되었다. 은상(殷商)의 시조인 설(契)은 유융씨(有娀氏)의 딸이며, 제곡(帝嚳)의 둘째 비(妃)인 어미 간적(簡狄)이 자매들과 목욕을 하던중에 제비알을 받아먹고 낳았다고 하니 명백한 새족이다.
공자가 중화역사의 개창조로 추앙하는 요, 순임금도 화하족이 아니었다. 맹자의 지적처럼 요는 북적인(北狄人)이고 순은 동이인(東夷人)이었다. 요가 터전을 잡았던 산서성 임분시 도사 유적지는 원래 화하의 땅이 아니라 개(犬)를 불(火)에 구워먹기를 즐기는 오랑캐 북적인(北狄人, 북방 유목민)이 황하중류로 남하하는 길목에 위치했다. 동이와 북적을 남만, 북적과 더불어 오랑캐(四夷) 라고 멸시했는데 역설적으로 동이와 북적이 중화역사와 문명을 일으켰다고 자인한 셈이다. 중고이래 변방의 소중화국으로 살아온 배달 한민족이 21세기에 세계중심국이 되어 대중화(大中華)의 타이틀을 회복할 수 있는 날을 고대한다.
고려 중기 1145년(인종 23년에 편찬된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는 ‘위중국거여(爲中國巨蠡)’라는 놀랄만한 기록이 있다. 선생의 문집(文集)에 있는 당나라 태사시중에게 올리는 글인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의 내용을 인용했다.때는 진성여왕 7년(893년),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2년 직후이다.
“엎드려 듣건데, 동해밖에 세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이 마한 변한 진한입니다.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요, 진한은 신라이니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병 100만을 보유하고 남으로 오.월(吳.越)을 침략하고 북으로 유.연.제.노(幽.燕.齊.魯)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수나라(隋) 황제가 말고삐를 잃은 것은 요동(고구려)를 정벌했기 때문입니다....(이하생략)” (伏聞, 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蠡) <삼국사기(三國史記)>제46권 열전 최치원전(崔致遠傳) *蠡 좀먹을 려(여), 옴 라(나), 표주박 리(이) *馭 말 부릴 어
중국대륙을 침공한 고구려와 백제 ‘남으로 오.월(吳.越), 북으로 유.연.제.노(幽.燕.齊.魯)’는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등 중국의 동해안 전역을 포괄하는 옛 국명이다. 이 일대를 고구려와 백제가 침략하고 흔들어댔다는 이야기인데 ‘중국(中國)’이라고 총칭했다. https://www.dongpo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8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