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30일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마태 13,47-53)
복음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7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48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49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51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5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53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보시기에 흐뭇하고 대견스러운 우리!>
제자들 가운데 어부들이 있어 그런지 예수님께서 종종 물고기와 관련된 비유 말씀을 건네십니다. 말씀을 선포하실 때, 어떻게 하면 좀 더 실감나게, 좀 더 쉽고 이해가 잘 가게 말씀하실까, 고민하신 예수님의 노력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를 배경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기잡이 비유는 훨씬 현실감 있게 와 닿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체적이고 또 명료해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알아듣기 쉬웠습니다.
오늘 비유 말씀을 천천히 묵상하면서 낚시 갔을 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전문 낚시꾼들은 낚시를 갈 때는 우선 ‘대상어’를 선택하고, 거기에 맞는 채비를 준비합니다. 낚싯대며 미끼며 물때며 노리는 고기를 잡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춥니다.
낚시꾼들이 주로 노리는 고기는 민물 같으면 붕어이죠. 또 루어낚시로는 베스입니다. 바다로 나가면 대상어는 돔이나 농어, 광어나 우럭입니다. 그리고 다들 노리는 것이 잔챙이가 아니라 팔뚝만한 월척입니다.
운이 좋아 큰 녀석들이 올라오면 그렇게 기분이 좋습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습니다. 콧노래가 끊이지 않습니다. 환한 얼굴로 잡은 묵직한 고기를 어망에 넣어둡니다.
저도 언젠가 먼 바다 낚싯배들 탔을 때, 동출했던 주변 사람들까지 환호성을 올릴 정도의 대어를 낚은 적이 있습니다. 끌어올리기까지 5분 정도 걸리더군요. 조심스럽게 끌어올리는 동안 툭툭 치고 나가는데, 혹시 바늘털이하며 도망갈까봐 긴장감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사투 끝에 끌어올린 친구의 길이가 거의 미터급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사진을 찍고, 동영상까지 찍었습니다. 폰 사진첩에 간직해두었다가, 기분이 울적해질 때면 수시로 꺼내 보며 기분을 전환합니다.
그러나 주로 올라오는 녀석들은 원하지도 않는 녀석들일 경우가 많습니다. 손가락 만한 복어 새끼며 미끼만 신나게 따먹는 놀래미 새끼들, 피라미 녀석들입니다.
그런 녀석들이 올라오면 낚시꾼들은 다들 재수 없어 합니다. 바늘에서 빼자마자 멀리 던져버립니다.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다신 올라오지 마라, 좀 더 커서 와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부들이 그물에 잡힌 고기들을 크기에 따라 이쪽저쪽으로 분류하는 것처럼 세상 종말에 우리도 그렇게 분류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낚싯대에 걸린 대어가 되어야겠습니다. 낚시 바늘에 걸려 올라온 우리를 보시고 하느님께서 흐뭇해하실 큰 물고기로 성장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며 반겨주실 큰 물고기로 산다는 것이 어떤 삶인지 묵상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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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늘나라가 그물인 이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늘 나라는 밭에 묻힌 보물이고 밀과 가라지와 같고 밀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넣는 것과 같고 겨자씨가 나무로 자라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하늘나라의 여러 비유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다른 비유 말씀들의 결론과 같은 것으로서 하늘나라가 ‘물고기를 잡는 그물’과 같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물고기를 그 종류별로 가려서 어떤 것들은 하늘나라로 어떤 것들은 지옥으로 던져버린다는 뜻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닙니다.
자세히 보면 하늘나라가 그물로 잡은 좋은 물고기들이 가는 종착지가 아니라 하늘나라를 ‘그물 자체’라고 말합니다.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의 하늘나라에는 좋은 물고기도, 나쁜 물고기도 들어와 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우리는 하늘나라에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이들은 밀과 가라지처럼 마지막 때에 쫓겨날 수는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악한 물고기까지 들어와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늘나라가 그물로 잡은 물고기가 마지막으로 가는 행선지가 아니라 그물 자체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스프링 벅’(Spring Bog)은 아프리카 남서부 지역에 서식하는 영양 가젤의 일종입니다. 아프리카의 건조한 초원에서 풀을 뜯으며 집단으로 생활하는 스프링 벅은 한 번에 3m이상 높이 뛸 수 있고 시속 88km까지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민첩한 그들이 집단으로 절벽에서 떨어져 죽거나 강물에 휩쓸려 죽는 경우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학자들이 연구해보니 그들의 지나친 욕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건조한 풀을 무리가 함께 뜯어먹다 보니 뒤처져 뜯어먹는 스프링 벅들은 이미 앞서간 스프링 벅들이 먹은 잔풀만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동할 때는 먼저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재빨리 달려야만 합니다. 만약 몇 마리가 뛰기 시작하면 뒤에 있는 것들은 이번엔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더 빨리 달립니다. 그러다 절벽이 나타나거나 강물이 나타나서 멈추려 해도 뒤에서 달려오는 것들 때문에 멈출 수가 없어 밀려버리는 것입니다.
스프링 벅의 이야기와 ‘그물’로 비유되는 하늘나라의 비유를 비교해 봅시다. 만약 스프링 벅을 그물로 잡을 수 있다면 그것들이 잃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더 먹기 위해 달리고 싶은 욕구를 잃습니다. 여기저기로 가고 싶은 방향에 대한 선택의 자유를 잃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더는 펼칠 수 없게 됩니다. 하늘나라를 ‘그물’로 비유하신 이유는 하늘나라가 바로 힘이나 속력이 아닌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무엇이 방향이냐면 ‘욕구’가 방향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선택한 욕구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그물에 잡힌 물고기들은 더는 자신이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갈 수 없게 됩니다. 그래도 끊임없이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하면 하느님은 그런 물고기는 놓아주십니다. 그 좋은 예가 ‘가리옷 유다’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물고기, 나쁜 물고기 가리지 않고 당신 안에 모으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돈과 명예를 좋아하는 욕구를 버리지 못하면 예수님은 놓아버리십니다. 사람이 두 방향으로 동시에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방향에 우리 몸을 맡기는 것. 이것이 하늘나라입니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고 그 방향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속-육신-마귀의 이전 욕구를 끊어야 합니다.
두 상반된 욕구를 동시에 따를 수는 없습니다. 내 이전 욕구를 버리고 하느님 욕구를 따름으로써 내가 변화하게 됩니다.
한 중학교에서 도덕 선생님이 사춘기가 된 아이들에게 부모님을 30일 동안 칭찬하고 일기를 써 오라고 숙제를 냈습니다. 처음엔 아이들도 쑥스럽고 부모도 쑥스러워했습니다. 30일 동안의 부모를 칭찬하기 위해 아이들은 비로소 부모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한 달 동안의 감사를 위한 노력이 끝나고 아이들은 “그냥 밥만 먹고 잠만 자는 곳이었는데, 요즘 집이 좋아요.”, “칭찬을 마친 내가 참 대견스러워요. 나도 참 괜찮은 사람 같아요.”, “부모님을 칭찬하면서 나도 조금씩 변하는 것 같아요.” 와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참조: ‘엄마가 울었다’, 지식채널 e, 유튜브]
나의 변화는 하느님 뜻인 그분의 방향성에 나를 맡김으로써 가능합니다. 이전에 내가 추구하던 삶의 방향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를 돌려세워야 합니다. 이 욕구의 변화가 곧 방향의 변화이고, 그 방향의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 하늘나라에 머무는 길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이분법적 이야기를 하면 극단적 이원론자라고 비판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느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신데, 그 자비하심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사이비처럼 신자들에게 두려움을 조장한다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옥만이 아니라 불과 사람을 파먹는 벌레, 심지어 불소금에 절여진다고까지 하십니다. 이원론이 아니라면 우리 종교는 그저 마음의 평화를 주기 위한 상담이나 심리학을 말하는 집단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그물’로 표현하신 이유는 내가 튀어 나가려는 이전의 방향성을 제한하고 당신의 방향성에 우리를 묶어두기 위함입니다. 바다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지옥에서 끝날 것인가, 아니면 그 자유로움을 주님께 봉헌하여 하늘나라에서 끝날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교회는 내가 추구하는 방향에 대한 위로를 받기 위해 나오는 곳이 아니라 그 방향성을 꺾고 주님의 방향에 나를 맡길 힘을 얻으러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욕구도 좋고, 저 욕구도 좋다는 식의 흐리멍덩한 가르침에 주의해야 합니다. 하늘나라가 ‘그물’이기에 우리는 오직 주님의 뜻이라는 한 방향에 나를 맡길 수 있는 사람만 머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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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백재욱 스테파노 신부님]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마태 13,5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치 수업을 마친 스승이 학생에게 하듯이 당신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비유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였는지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그물을 던져 사람을 낚는 어부인 동시에 하늘 나라의 신비를 가르치는 새로운 ‘율법 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스승에게 배운 가르침을 바탕으로 구약 성경의 말씀을 연구하고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자신들이 먼저 그 진리를 깊이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기(루카 6,39 참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늘 나라의 신비는 구약의 밭에 이미 숨겨져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그 땅을 밟고 서 있었지만 그 안에 숨겨진 보물은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소중한 신앙의 유산을 발견하고 새롭고 참된 의미를 밝혀내는 사명을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이 받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마태 13,52)처럼 전통 안에서 복음의 참뜻을 길어 올려야 합니다.
이 사명은 오늘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평생 그분의 제자로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며, 복음을 시대의 정신에 맞게 풀이하고 적용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배우지 않으면 식별할 수 없고, 식별하지 않으면 방향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셨던 그 물음을 우리에게도 하십니다. 우리 또한 이 물음에 “예.”라고 기쁘게 응답할 수 있도록 오늘도 그분의 발치에서 배우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출처: 복음말씀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