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짐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개막한 지 겨우 한 달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논하기엔 너무 이른 감이 있는 얘기라는 것은 알지만, 역사상 두 번째의 ‘굴욕적인 기록’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스멀스멀 밀려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무슨 기록이길래 이처럼 출발부터 호들갑을 떠냐고 하겠지만,‘그럴 수도 있지!’하고 넘기기엔 이해가 쉽지 않은 모양새를 가진 기록 하나가 또 한번 우리 곁으로 다가설 채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굳이 제목을 단다면 ‘천당에서 지옥으로’쯤이 적당하지 않을까? 내용상 타율 부진 정도가 아니라 이건 완전 타율 몰락이다. 그 주인공은 다름아닌 지난해 수위타자 박용택이다.
4월 25일 현재 박용택의 타율은 1할6푼7리(66타수 11안타)로 규정타석을 넘긴 58명의 타자들 가운데 가장 낮은 타율을 기록하고 있다. 일명 ‘멘도사 라인’에 떡 하니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타격왕을 차지했던 지난해 박용택의 타율(.372)이 역대 4위에 해당될 만큼의 고 타율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어색하기 이를 데가 없는 초반 성적표다.
물론 아직 타수가 많지 않은 까닭에 박용택이 제 페이스를 찾기만 한다면 빠른 타율 복구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사람의 일은 모르는 법이다.
2000년 현대의 박종호는 3할4푼(441타수 150안타)의 타율로 수위타자에 올랐다. 하지만 이듬해(2001년) 박종호는 2할4푼1리(456타수 110안타)의 형편없는 타율로 규정타석을 넘긴 47명의 타자들 중에서 가장 낮은 타율을 기록한 바 있다. ‘타격왕’에서 ‘멘도사 라인’으로의 급격한 신분하락이 이루어진 것이다.
‘멘도사 라인(Mendoza Line)’은 규정타석(경기수 x 3.1로 계산된 타수)을 넘긴 타자들 중, 수위타자와는 반대로 가장 밑바닥에 자리한 선수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밖에도 타율 2할 부근에 몰려있는 저 타율 타자들을 한데 아울러 가리키는 의미로도 통용되고 있긴 하지만, 의미의 정확성이야 어떻든 ‘Line’이라는 용어상 전자 쪽이 더 어울리는 해석으로 여겨진다.
‘멘도사’는 사람의 이름으로 1974년~1982년 사이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마리오 멘도사’라는 내야수(유격수)에서 유래된 말로, 이 선수가 현역에서 뛰는 동안 2할 턱걸이 타율(통산타율 .215)로 늘 타율 리스트의 가장 아래 쪽에 자리한 것을 빗대 비유적으로 생겨난 야구용어이다.
이 멘도사 라인에 자리하는 선수들은 대체로 공격력은 뛰어나지 않지만 수비에서 공헌도가 월등한 각 팀의 주전 내야수들이 주류를 이루는 것이 일반적이다. 국내의 역대 멘도사 라인 형성 이력을 살펴봐도 그렇다.
프로 원년(1982)의 멘도사 라인은 당시 OB 베어스의 유격수이던 유지훤(.252)의 차지였다. 유지훤은 1985년에도 2할9리의 타율로 또 한번 멘도사 라인을 지켜내는 수완(?)을 발휘한다.
유지훤 외에도 2번이나 멘도사 라인 타이틀을 따낸(?) 선수들이 또 있다. KIA의 2루수 김종국은 1996년(해태, .215)과 2005년(.235)에, 삼성 유격수 박진만은 현대 소속이던 1997년(.185)과 2002년(.219)에 그리고 포수 박경완은 1995년(쌍방울, .227)과 1999년(현대, .221)에 각각 멘도사 라인 자리에 거듭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약과. 무려 3번이나 멘도사 라인 자리를 지켜낸 독보적인 선수가 있다. 지난해 한화에서 은퇴한 김민재(유격수)다. 김민재는 2003년(SK, .211)을 시작으로 2006년(한화, .211)과 2008년(한화, .241)을 더해 모두 3차례나 멘도사 라인을 지켜낸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쯤 되면 국내에서는 멘도사 라인이 아니라 ‘김민재 라인’으로 불러도 가히 좋을 듯 싶다.
한편 유격수 못지 않게 자주 이름이 올라간 포지션은 2루수다. 이미 예를 든 김종국과 박종호 외에도 1987년 김성갑(빙그레, .230), 1988년 정구선(롯데, .221), 1998년 이종렬(LG, .215), 1994년의 염경엽(태평양, .212) 등이 모두 2루수 출신들이었다.
포수로는 박경완 외에 1983년의 김진우(삼미, .253)와 2009년의 김상훈(KIA, .230)이 눈에 들어온다.
2루수나 유격수에 비해 비교적 공격력이 강한 포지션으로 알고 있는 3루수 출신으로는 1990년 한영준(롯데, .227), 2000년 퀸란(현대, .236), 2007년 김상현(LG, .235) 등이 있었다.
타격 능력이 약하면 주전으로 살아남기 힘든 외야수가 멘도사 라인 자리를 유지한 적도 있었을까? 찾아보니 있었다. 1992년 OB 베어스의 우익수로 뛰었던 강영수(.217)가 유일한 외야수 출신 멘도사 라인이다.
만일 박용택이 올 시즌 멘도사 라인에 걸린다면 외야수로는 18년 만이 된다. 그것도 전년도 타격왕으로서. 2007년의 깜짝 타격왕 이현곤도 다음해인 2008년 2할5푼7리의 곤두박질 친 타율로 타격랭킹 34위까지 추락한 전례가 있긴 하나 멘도사 라인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한편 박용택의 낮은 타율에 눈이 가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역대 최저 타율과의 거리다. 규정타석을 채운 상태에서 역대 가장 낮은 타율을 기록한 선수는 1986년 롯데의 유격수 권두조(.162)이다. 박용택의 지금 타율(.167)과는 불과 5리 차의 지근거리(至近距離)다.
수비의 핵이 아닌 일반 외야수로서의 박용택이 현 상태의 타율을 위로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1군 엔트리에 계속 남기가 어렵다고 볼 때, 2001년 박종호가 기록한 천상에서 땅바닥으로의 ‘뒤집기 타율’이 재현되는 일과 권두조의 1986년 기록적인 멘도사 라인 타율이 어느 쪽이든 깨어지기가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아 보이지만, 박용택의 현 부진 수위가 어느 선에 와 있는 지를 단적으로 대변해주고 있는 대목이라는 점에서 당분간 눈길이 끌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첫댓글 아무렴 저렇게까지야 떨어질라고... 저주를 퍼부으시나...
이제부터 정신차리고 올라갈거니깐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