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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모든 기독교인이 다시 한번 깊이 재고해보아야 할 책이 나왔는데, 그 주제가 다름 아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우리의 “구원”에 관한 것이다. 본서는 상당히 도발적인 책으로서, 흔히 교회에서 접하는 설교에만 의존적인 독자들에게는 큰 도전이 될 수 있다. 본서의 저자는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이신칭의 교리를 강조하면서 “예수만 믿으면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받는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올바로 전달해주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아울러 신약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복음의 메시지에 대한 지적 동의는 물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본서에서 복음의 실제적이고 온전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성경 본문에 근거한 철저한 주해를 통해, 그리고 일부 학자들과 저명한 교회 지도자들의 예상되는 반론에 대한 반박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저자는 무엇보다도 “믿음”이란 단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다시 재고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믿음”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단어 피스티스는 일반적으로 “믿음”으로 번역되지만, 믿음보다 더 풍부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충성이란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로마 황제에게 충성이 매우 중요했던 것만큼 이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도 마찬가지였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성도의 믿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을 강조했던 것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저자는 “복음이 말하는 충성”(Gospel Allegiance)이라는 원서의 제목처럼 복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반응은 “왕이신 예수께 대한 충성”이며, 성경적 믿음(피스티스)은 믿음을 통해 표현되면서도 외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표현해주는 “충성”이라는 용어로 가장 잘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그는 본서에서 신약성경에 나타난 충성을 요구하는 복음의 기본 요소를 열 가지로 요약한다. 저자의 논의는 신약 본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복음을 왕, 다윗의 메시아, 아브라함과의 약속(언약)이라는 측면에서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본서는 전반적으로 복음을 “새롭게 습득하는 것”과 복음의 내용을 언급하는 성경의 주요 본문을 재점검할 것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자신이 반박하고 있는 복음/구원에 대한 대표적인 본문으로 알려진 에베소서 2:8-10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특히 그는 구원이 단순히 개인에게만 전유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공동체적인 성격에 주목하며, 복음이 말하는 충성이 믿음과 행함의 문제에 대해 말하는 방식과 그와 관련하여 육체적인 행동의 역할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논의를 제공한다. 본서는 또한 신약학, 특히 바울 서신에 대한 최근 연구, 특히 은혜의 1세기 개념을 재정의한 존 바클레이의 최근 연구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이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줄 뿐 아니라 스콧 맥나이트와 N. T. 라이트의 성경적ㆍ신학적 접근 방식도 곁들여 소개한다.
저자는 이미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이라는 책을 통해 이 중요한 주제를 학문적으로 논증하여 학자들과 교회 목회자들에게 칭송을 받은 바 있는데, 이번에는 보다 폭넓은 독자층의 이해를 돕기 위해 독자 친화적인 용어와 일상적인 사례를 곁들이는 접근법을 통해 독자들에게 보다 더 친근하게 다가간다. 그는 책 뒷부분에서 독자들을 위해 각 장의 내용을 친절하게 요약하는 것은 물론, 개인적으로나 스터디그룹으로 모여 추가로 논의하거나 토론을 진행할 수 있는 가이드 질문도 제공해준다. 따라서 본서는 교회 안에 “믿는 교인들”은 넘쳐나지만 정작 “진정으로 충성된 성도들”이 턱없이 부족한 한국교회의 현실 속에서 성도들을 올바르게 목양하기를 원하는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기를 소망하는 일반 성도들에게도 복음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으로 응답하기를 원하는 열망을 그 마음속에 강하게 불어넣어 줄 것이다.
저자 소개
매튜 W. 베이츠 Matthew W. Bates
미국 노터데임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Ph.D.)를 받았고, 퀸시 대학교에서 신학 부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노던 신학교에서 신약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The Birth of the Trinity (Oxford), The Hermeneutics of the Apostolic Proclamation (Baylor), 『오직 충성으로 받는 구원』(새물결플러스 역간) 등이 있다. 매우 인기 있는 성경과 신학 팟캐스트인 “온스크립트”(OnScript)의 공동창시자이자 공동진행자이기도 한 그는 등산과 야구를 좋아하며 슬하에 7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목차
감사의 말
서론
1부: 복음이 말하는 충성 발견하기
1장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기
2장 믿음이 아니라 충성
3장 온전한 왕의 복음
가교: 분명해진 복음, 활성화된 복음
2부: 복음이 말하는 충성 전개하기
4장 여섯 가지 차원의 은혜
5장 믿음은 몸으로 구현된다
6장 행위는 어떻게 구원하는가?
7장 충성의 도전 받아들이기
부록 1: 복음이 말하는 충성 요약
부록 2: 추가 대화를 위한 가이드
성경 및 고대 문헌 색인
책 속으로
우리의 이신칭의가 복음 혹은 복음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성경에 정통한 목회자와 학자들이 범하는 가장 일반적인 오류다. 로마서의 길 접근법처럼 이 견해도 바울 서신을 활용한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구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은유를 사용하는데, 그것이 바로 법정이다. 우리는 특히 바울이 “의”와 “칭의”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데서 이것을 발견한다. 이 단어들은 법적으로 정당하거나 무죄한 상태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재판관이시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즉 우리의 지위가 유죄에서 무죄로 바뀐다.
종교개혁 시대의 많은 논쟁은 이러한 지위의 변화가 정확히 어떻게 일어나는지와 관련된 것이었다. 마르틴 루터는 이러한 무죄 선언은 오직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가톨릭교회는 보속(penance)과 면죄(absolution)도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대응했다. 가톨릭교회는 심각한 죄는 세례 때 얻은 은혜를 잃게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세례를 받은 후에 심각한 죄를 짓는다면 그는 화해의 성례를 통해 은혜의 상태로 회복되어야 한다. 우리는 6장에서 이 논쟁의 상세한 의미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현재로서는 루터가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확신이 확고했기 때문에 종종 그것을 “복음”이라고 부르거나 복음의 일부에 포함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_1장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기
신약 시대를 다룬 가장 권위 있는 사전에서 피스티스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우리는 다소 흥미로운 점을 발견한다. 첫 번째 정의에 대한 용어 해설은 무언가에 대한 믿음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이나 신뢰를 불러일으키는 어떤 사람의 자질, 즉 신실함(faithfulness),신뢰성(reliability), 충성/신실함(fidelity), 헌신(commitment)을 나타낸다.
번역가들과 학자들은 오래전부터 피스티스를 신실함으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피스티스가 구원에도 적합한 용어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바울은 노예들은 도둑질을 해서는 안 되며, 주인에게 “모든 참된 피스티스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한다(딛 2:10, 저자의 번역).바울은 노예들이 주인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온전한 신실함 또는 충성심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십일조에 관해 언급하면서 율법의 더 중요한 문제들, 즉 “정의와 긍휼과 피스티스”를 경시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한다(23:23, 저자의 번역).
_2장 믿음이 아니라 충성
파이퍼의 분석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우리가 1장에서 본 바와 같이 성경은 절대로 우리의 이신칭의가 복음의 일부라고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복음 자체는 예수의 의로움(부활과 즉위를 통한 정당성을 인정받음)에 관한 것이고,피스티스는 복음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둘째, 위의 인용문과 관련하여 왕의 복음에 대항하여 이신칭의를 변호하려는 파이퍼는 “내가 사면(amnesty)이라는 말을 듣기 전에는 좋은 소식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주의적 구원 신학의 체계화가 1세기 단어의 의미보다 우선하도록 허용했다. 유앙겔리온(euangelion, 복음)이라는 단어는 신약 시대에 황제가 통치를 잘 할지 말지에 대한 실제적인 관심 없이 제국의 통치와 관련된 기쁜 소식을 알리는 데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바울의 동시대 사람인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즉위 소식을 언급하는 데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_3장 온전한 왕의 복음
은혜의 마지막 측면인 답례의 선물은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신학자들이 구원을 체계화하는 데 있어 가장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가장 큰 왜곡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요컨대 선물을 받은 사람은 그 선물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답례의 선물을 해야 한다.
순수한 선물은 선물을 받는 조건이나 보답의 기대 또는 의무가 전혀 없이 자유롭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순수한 선물이 최고의 선물이라고 이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한 여성이 남자친구가 간절히 바라던 운동화를 선물했다고 가정해보자. 만약 그녀가 남자친구에게 보답을 조건으로 선물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썩 좋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즉 “그는 내가 원하는 테니스 라켓을 사주는 것으로 보답할 경우에만 그 신발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 생각을 표현한다면 말이다. 만약 우리가 선물을 주고 답례로 선물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현대인으로서 그 선물하는 행위를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대 세계에서 선물이 순수해야 한다거나 답례를 염두에 두지 않고 공짜로 거저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성경 저자를 포함하여 아무도 없었다. 현대의 가치관으로는 이상적인 선물이 비순환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고대의 가치관과 일치하지 않는다. 고대인들은 그와 정반대로 생각했다! 은혜나 선물은 답례 선물로 반드시 보답해야 하는 것이었다.만약 보답하지 않으면 그 선물을 받는 사람은 그것을 거부한 것이다.
4장 여섯 가지 차원의 은혜
복음-충성 모델은 행위가 믿음(피스티스)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해 약간 다른 결론을 제시한다. 교회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믿음에 대한 이해는 변화했다. 믿음의 개념은 외적, 육체적, 능동적인 것으로 시작해서 내적, 감정적, 수동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모두 이러한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변화는 사람들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중에 교회는 믿음과 행위 사이의 올바른 성경적 관계를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우리가 이러한 변화와 왕에 대한 복음의 초점을 점점 인식함에 따라 복음-충성 틀 안에서 새로운 종합이 가능해진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개신교의 주장은 옳다. 그러나 전통적 개신교의 입장은 더욱 정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구원을 가져다주는 선한 행위는 단순히 예수에 대한 피스티스를 따라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구원을 가져다주는 선한 행위는 왕이신 예수께 대한 충성을 구현한 피스티스의 일부다. 이것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믿음이 주로 내적 확신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이다. 또한 지적 동의가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육신의 행위가 따른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피스티스는 처음부터 육신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선한 행위는 왕이신 예수께 대한 피스티스와 독립적으로는 결코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하며, 오직 그 선한 행위가 예수께 대한 피스티스로 구현될 경우에만 구원을 가져다준다.
_5장 믿음은 몸으로 구현된다
충성은 예수의 속죄에 대한 내적 신뢰를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목적을 재설정한다. 충성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하는 믿음(피스티스)이 외부지향적이며, 행위를 수반하고, 관계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왕을 지향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선한 행위는 단순히 내적인 믿음의 결과가 아니다. 피스티스는 사고를 먼저 하고 그다음에 몸이 따라오는 것도 아니다. 피스티스는 몸으로 구현하는 것과 절대 다른 것일 수 없다. 선한 행위는 단순히 칭의나 그 열매의 결과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피스티스 안에서 그 근거의 일부를 형성한다.
그러나 복음이 말하는 충성은 가톨릭의 성례주의를 거부한다. 가톨릭의 성례주의는 선한 행위를 믿음 안에서 칭의의 근거의 일부로 올바르게 허용하지만, 칭의가 유지되고 완성되려면 일련의 행위를 수행하고(행위의의) 규범을 어겨서는 안 된다(율법주의)는 잘못된 요구를 한다. 성경에 따르면 구원을 가져다주는 행위는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왕께 대한 충성을 구현하는 행위에만 해당하며, 규범의 이행을 요구하는 체계 안에 속한 경우는 해당하지 않는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구원하는 믿음은 구원을 베푸시는 왕께 대한 충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
_6장 행위는 어떻게 구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