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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명례리(明禮里)
밀양에서 제일 넓은 평야 중에 하나인 하남평야(下南平野)의 동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동으로는 상남면 외산리, 서로는 백산리, 북으로는 상남면 인산리와 각각 인접해 있다. 남으로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김해시와 시계(市界)를 이룬다. 경지정리가 되기 전에는 밭은 많고 논이 없어서 주곡(主穀)은 산두, 밀, 보리 등을 심었고, 특히 삼(마 麻) 농사가 유명하여 명례삼 하면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았다
지금은 하남평야 전체가 수리 안전들로 경지정리가 되어, 이웃하는 하남의 들과 합쳐서 영남지역에서 가장 넓은 평야 중의 하나가 되었다. 광활한 하남평야인 백산리와 명례리, 양동리, 파서리, 수산리 등에는 벼농사를 끝낸 후에 이른 봄에 “하우스 감자 집단 재배지” 로서 전국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며, 그 명성이 전국에서 으뜸이다.
봄에 하남평야 중앙에 있는 백산(栢山 = 獨山) 정상에 올라서 보면, 하남평야 전체가 감자 재배 하우스 및 일반 작물의 하우스 시설로 인하여, 하얀 비닐하우스가 바다와 같이 광활하게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백산리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옛날에는 낙동강 가의 언덕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마을 앞으로 하남제방이 축조되면서 제방을 떠라 길게 동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하남제방 너머에는 낙동강이 서에서 동으로 삼랑진읍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전형적인 강변 마을이다
옛 이름은 멱례(覓禮), 미례(彌禮) 등으로 불렀다. 일설에는 신라의 법흥왕이 이 마을 사람들이 예의(禮義)가 밝음에 탄복하여 명례(明禮)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하며 (주)레나 : 신라가 가야제국을 무력으로 합병한 후, 이 곳으로 유행(遊行)하면서 백성(주민들)을 만나니, 백성들이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었기에 이런 지명이 생겼다고 보아 진다 또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이 마을 사람들의 예의가 발금에 탄복하여 명례(明禮)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이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밀주지에는 많은 사람들이 강가의 평지에 촌민(村民) 수 백호가 집결해서 사지(四旨), 감물지(甘勿池) 등의 촌(村)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세종 때 밀양부사로 온 이백상(李伯常 : 陽城人)이 낙동강의 수환(水患)을 염려하여 모두 현재의 명례(明禮)로 옮겨 살도록 하였다. 얼마 안되어 옛 터는 모두 무너져서 모래밭이 되었다고 한다. 그후에 이일(李溢)이 이 마을에 입촌(入村)하여 복거(卜居)했다고 한다
옛부터 이곳은 나루터로 이용해서 밀양에서 김해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하였고, 낙동강의 조운(漕運)이 번성할 때는 수상 교통의 중심 역할도 하였다. 그래서 강 가에 해양원(海陽院)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강 가의 언덕을 중심으로 상촌동(上村洞)이 있고, 그 아래쪽 평지(平地)에는 평지동(平地洞)이 있다. 그 서쪽 (언덕)에는 도암동(道岩洞)이, 그 동쪽에는 해동(海東)과 예동(禮洞), 그리고 그 북쪽 하남평야 중앙에는 대성동(大成洞)이 각각 위치하고 있다
(주)도재국 상촌, 도암, 평지 3개의 마을은 거의 붙어 있어 사진을 찍을 때 일부러 마을 안에 들어가서 경계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그 경계를 구분하기가 어렵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해양(海陽)과 동암(東岩)을 합쳐 명례리(明禮里) 라는 법정리를 이루었다. 지금은 상촌(上村), 평지(平地), 도암(道岩), 해동(海東), 예동(禮東), 대성동(大成洞) 등 6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1) 상촌동(上村洞) 명례리의 본동이다. 낙동강 가의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이 마을은 광해군(光海君) 때 전주(全州) 이씨(李氏) 낙주재(洛州齋) 이번(李번:氵+方+番)이 서궁(西宮)의 변(變)에 항절(抗節)하고, 남하(南下)하여 이거(移居)한 후, 지금까지 전주(全州) 이씨(李氏) 일파가 세거해 오고 있다.
재사(齋舍)로는 낙주재(洛州齋) 이번(李번) (주)레나 : 번은 “삼수변 氵” 우측에 “모방변 方”, 또 그 우측에 “갈마들 番”으로 “큰 물결 번 = 氵+方+番” 을 추모(追慕)하기 위하여 낙주재(洛州齋)를 보존하고 있다. 원래 이 집은 "이번"이 광해군 때 서궁(西宮)의 변(變)으로 명례(明禮)에 남하하여 은퇴하였던 곳이다
구 후에 퇴락하였는데 그 후손들이 1830년에 그 유지(遺地)에 공(公)의 별묘(別廟)와 함께 중건하였고, 근래에 후손들이 대규모로 중건하여 낙동강 가의 아름다운 재사(齋舍)로 명성을 높이고 있다
(주) 레나 : 낙주재(洛州齋)는 최근에 대규모로 중건(重建)을 하여 그 위용(威容)을 낙동강(洛東江)에 물결에 은은하게 비추고 있다. 낙주재에 서면 낙동강의 푸른 물결과 사시사철 강변(江邊)의 풍광(風光)이 너무나 아름답다. 특히 이른 봄에는 남녘의 봄바람을 타고 초록(草綠) 물결 강변과 낙동강의 은빛 물결이 너무나 아름답다. 낙주재의 낙동강변은 밀양에서 봄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해주는 곳이다. 낙주재(洛州齋)의 봄 풍광(春光)은 “다음 카페 > 밀양광장 > 누정(樓亭)편 게시판”에 있다
(주)레나 : 추록(追錄) ⇒ 김절부유인제주고씨지려(金節婦孺人濟州高氏之閭) 김절부유인제주고씨지려(金節婦孺人濟州高氏之閭) 명례리 상촌 마을 낙동강변에 쓸쓸하게 서 있다. 비석(碑石)이 퇴락(頹落)하여 곧 쓰러질 것 같다. 고씨(高氏) 절부(節婦)가 병든 남편을 위한 애절한 사연이 비문(碑文)에 기록되어 있다. 후손(後孫)들이 이 마을을 다 떠났는지는 모르겠으나, 본인(레나)이 몇 년 전에 낙동강변과 명례리, 낙주재 등을 답사(踏査)하면서 본 비석이다. 제주고씨절부비(濟州高氏節婦碑)의 사진은 “다음 카페 > 밀양광장 > 밀양의 마을 게시판 > 하남읍 명례리 상촌마을편 게시판에 있다
꼬사리굼팅이(절터) 상촌동의 서남쪽 낙주재 옆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의 지세가 푹 꺼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이곳에는 옛 절터가 있었다고 한다. 또 6층 석탑이 있었는데 그 유물(遺物)은 일제 때 일본인이 도굴해 갔다고 한다. 그 후에 석탑(石塔)은 명례초등학교로 옮겼다 하나, 현재는 그 소재지를 알 수가 없다
진등(진등보리밭들) 명례리의 앞들인 한들과 대성동 사이에 있는 들이다. 옛날에는 밭이 많이 있었는데 특히 특히 밭고랑이 길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진등보리밭들이라고 한 것은 이곳의 토질(土質)이 좋아서 보리가 잘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생긴 지명이다
한들 상촌동과 진등 사이에 있는 들이다. 이곳의 지세가 높고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명례나루(명례진 明禮津) 명례리에서 김해시 술미와 진영으로 건너가는 나루터이다. 옛날에는 이 나루가 낙동강의 조운(漕運)이 번성할 때는 수상교통(水上交通)의 중심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하며, 수산나루 다음으로 번화한 곳이라고 한다. 밀주지에는 용진(龍津)이 멱례촌(覓禮村) 앞에 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용진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없어졌다
용진(龍津) 명례리에 있었던 나루터이다. 김해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했으며, 고대(古代)부터 낙동강 수운(水運)의 요충지 였다. 현재는 그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다. 밀주지에 나오는 기록으로 보아 명례나루가 용진(龍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집 상촌동 언덕 위에 있다. 이 당집에 얽힌 설화는 다음과 같다. 옛날 을축년 대홍수 (주) 레나 : 을축년 대홍수 을축년 대홍수는 1925년에 발생한 4차례의 홍수를 말한다. 이 홍수로 특히 한강과 낙동강 유역의 피해가 심했다. 1925년은 을축년이었기 때문에 을축년 대홍수라고 부른다. 1번째 홍수
복구를 위해 조선총독부는 군대까지 동원하였고, 한강 본류와 안양천, 중랑천, 청계천 등의 지류에 대대적인 제방 공사를 벌였다. 한강 유역의 대부분을 물로 덮어버린 이 홍수로 송파동 일대가 침수되면서 풍납토성과 암사동 선사주거지가 발견되었다. 한편으로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던 가지야마는 이 홍수를 계기로, 경험적으로 얻은 단순 홍수량 공식인 가지야마 공식을 만들어냈다. 출처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441574#1.EB.B2.88.EC.A7.B8_.ED.99.8D.EC.88.98
가 나서 온 천지가 물바다로 변했다. 그 때 이 마을의 풍헌이 어느날 밤에 꿈을 꾸니 한 처녀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이 번 홍수에 목숨을 잃었는데, 둑 밑에 있는 저의 시체를 거두어 주시면 은혜를 갚겠다고 하고 사라졌다.
잠을 깬 풍헌은 그 꿈이 이상하여 둑 밑에 가 보니 과연 홍수에 목숨을 잃은 처녀의 시체가 있었다. 다음날 마을 사람들과 의논하여 시신을 거두어 주기로 하고 장례 준비를 하였다. 그날 밤에도 또 꿈에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나의 고향은 합천 모처인데 오빠가 오빠만 구출해 가고 나를 돌보지 않고 가버렸습니다. 한많은 시체이오니 어느 산봉우리든지 만리풍(萬里風)이 스쳐가는 곳에 묻어 달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그래서 풍헌은 처녀의 요구대로 이 마을에서 마주 보이는 상남면 어은동 뒷산 산봉우리에 자리잡아 묻어주었다. 그 후부터 이 마을에는 아이들의 천연두나 모든 질병이 없어지고 온 마을이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 이 처녀의 무덤에 벌초를 하면 운(運)이 좋아진다고 해서 서로 다투어 벌초를 했다고 한다. 그 후 마을에서는 처녀의 원혼을 달래주는 당집을 세우고 매년 정월 보름날이면 지금도 고사를 지내고 있다
(2) 평지동(平地洞) 상촌동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지세가 평평한 평야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선조(宣祖) 연간에 통정공(通政公) 김원(金源)이 청도군 내동(內洞) (주)레나 : 청도군 매전면 내리 에서 이곳으로 이거한 후 김해(金海) 김씨(金氏) 일파가 지금까지 세거해 오고 있다. 지금은 여러 성씨가 들어와 함께 살고 있다. 재사(齋舍)로는 낙애(洛涯) 김원(金源)의 도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완산재(玩山齋)가 보존되고 있다
참깨돌캉 평지동 마을 앞 둑 너머 강가에 있는 밭 가운데 있었던 도랑이다. 옛날에는 도랑이 있었는데 지금은 밭으로 이용하고 있다
(3) 도암동(道岩洞, 頭岩洞, 東岩洞, 東庵洞) 상촌동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도암(道岩)이라고 한 것은 마을의 언덕에 큰 바위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옛 이름도 동암(東岩)이다. 두암동(頭岩洞)이라 한 것은 수산에서 명례리로 가는 들머리 부분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암동(東庵洞)이라 한 것은 옛날에 이곳에 동암(東庵)이라는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찍이 낙주재(洛州齋) 이번이 서궁(西宮)의 변(變)으로 명례로 남하하여 이 암자에 의탁하여 낙동강에 낚시로 소일하였다고 전한다
말무덤 도암과대성동, 백산리리의 중간 지점에 있는 들이다. 이곳은 지세가 높았으며, 말무덤이 잇엇다고 한다. 그래서 붙인 지명이다. 지금은 경지정리가 되어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고 다 들이 되었다
(4) 대성동(대성동, 신기동) 상촌동의 동북쪽 하남평야의 중간에 있는 마을이다이 마을은 하남제방이 축조되고 수리조합이 건립된 후에 새로 생겼다고 하여 신기동(新基洞)이라 하다가 대성동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민벌 대성동과 상남면 어은동 사이에 있는 들이다. 옛날에는 황무지였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지금은 경지정리가 되었다
새밭들 대성동과 민벌 사이에 잇는 들이다. 엣날에는 새밭이 무성했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지금은 경지정리가 다 되었다
새밭길 새밭들에 있는 밭이다. 지금은 경지정리가 다 되어 들판이 되었다
셋지메 대성동 동쪽에 있는 들이다. 이곳에는 일제 때 방앗간이 있었고, 또 집이 세 채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은 경지정리가 되어 들판이 되었다
(5) 해동동(海東洞, 海陽) 상촌동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 이름은 해양(海陽)이다. 옛날에는 해양원(海陽院)이 있었다고 한다. 제1공화국 때 해양(海陽)이 해동(海東)과 예동(禮東)으로 분동되었다고 한다. 해동이라고 한 것은 해양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상남면 외산리 오산 마을 쪽에 있다
(6) 예동동(禮東洞) 해동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 이름은 해양(海陽)이다. 제1공화국 때 해양이 해동과 예동으로 분동되었다고 한다. 예동이라 한 것은 명례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생긴 지명이다
해양원(海陽院) 명례리 해양강(海陽江) (주)레나 : 지금의 밀양강을 말함 나루가에 잇었다고 한다. 양동역(良洞驛)과 낙동강 건너 김해시 금곡역(金谷驛)의 중간에 있던 원(院)이었다. 이 원(院)은 고려 시대부터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 없어졌다
해양강(海陽江) 명례리 용진의 하류에 있는 강을 말한다. 김해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주)레나 : 해양강은 지금의 밀양강을 말함
중사도(中沙島) 명례리 해동 아래에 있는 섬이다. 둘레가 10여 리가 된다. 옛날부터 밀양, 김해의 경계 지점인 강중(江中)에 있어서 두 고을 사이에 분쟁이 많았다. 1577년 창원부사(昌原府使) 신지제(申之悌)가 추관(推官)으로서 심사하여 밀양에 소속시켰다고 한다. 해마다 강물이 불어 섬이 파괴되기도 하고, 물에 잠기는 수도 많았다. 지금은 섬이 없어지고, 들?이 되었다
해양나루(海陽津) 해양에서 김해서 상동면 술미로 건너가는 나루터이다. 지금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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