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씨된 자로서...
남양홍씨의 중시조 태사공님... 이후 중시조 할아버님들을 고려의 매국노란 무참한 용어로 표현함을 일단 송구하게 생각하며...
그래도 진실은 진실로서 객관적으로 밝혀져야 하고...
조상의 과오가 있다면 냉정히 지적하고 반성하고...사과할 건 해야 하는게 진정한 후손으로서의 임무라 생각되어...
무거운 맘으로 손꾸락질을 합니다.
남양홍문의 중시조 태사공(은열공???)의 후손 홍대순 할아버님(이후 존칭생략)은...
분명 왕건의 당고려에겐 치명타를 입힌 후손들이임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진실같습니다.
역사에 왜 집중논거가 않 되는 진 몰라도...
홍복원은 대대로 세습받은 인주도령시절 원나라에 항복 고려침공의 앞잡이가 되었고...
그의 아들 홍다구(홍차구?)는...아예 몽골인으로 고려 공략과 왜(일본?)공략에 심혈을 기울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픈 얘긴...제 조상 욕보단 이겁니다.
그 홍씨 일가들의 행적과 주거지역입니다.
""고려 평안도 "인주"라 했습니다.
인주는 의주 근방이란 말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 일가는...대대로 인주지역의 "인주도령"직을 역임했었답니다.
마치 이성계 집안이 동북면 수장직을 대대로 역임하듯이여...
고려 명종때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왕이 팔관회를 베풀며...인주등 북계의 변방 도령(都令=그 지역 지방관들의 호칭)들을 초대했답니다.
그런데 이 서북계 신하(?)들이 명종에게 읍(인사만 꾸뻑)만 하고 절을 하지 않아...백관들 중 여럿이 죄를 묻자 고했으나...
명종이 완곡히 만류했답니다.
좀 이상하질 않습니까...?
대륙의 황제가 고려황젠데...몽골황제 앞에서 하는 식으로 절을 아홉번 까지 하진 않더라도...대충 한 번은 해 줄 만도 한데...?
자신들에 득이될게 전혀 없는 짓들을 ...아니, 대역죄로 삼대가 멸족당할 짓들을 저지르고도 살아 남았단 겁니다...?
홍씨 일가등의 서북계 도령들은...고려(당고려)왕들을 자신의 국왕으로 생각질 않았단 반증입니다.
단지 고려가 그들에게 작위를 내려 회유(또는 위무)하려 한 정황이라 하겠습니다.
말이 길어지니...먼저 홍씨 일가의 고려(당고려)에 대한 3대째 매국행위를 먼저 참고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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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앞잡이' 홍대순·홍복원·홍다구
''배가 난파하려 하면 쥐들이 먼저 알고 도망친다고 했던가? 나라가 망할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조선의 매국노' 이완용이 조선의 멸망을 재촉했다면 고려가 몽골에 망할 때는 홍대순(洪大純) 홍복원(洪福源) 홍다구(洪茶丘) 3대(代)의 매국노가 있었다.
홍대순은 평안도 의주 근처 군사요충지인 인주(麟州)의 지역사령관격인 도령(都令)으로 있으면서 1218년(고려 고종 5년) 몽골이 거란을 압박할 때 자발적으로 몽골에 투항하였고 1231년(고종 18년) 몽골이 장수 살례탑을 보내 고려를 침공할 때는 자발적으로 향도(嚮導)가 되어 몽골의 진격을 앞에서 이끌었다.
※ 홍대순(洪大純)생몰년 미상. 고려의 역신. 본관은 남양(南陽). 일명 대선(大宣). 선조는 평안북도 인주(麟州:의주 남쪽)에 오래 살았으며, 역신 홍복원(洪福源)의 아버지이다.
1218년(고종 5) 원나라에서 합진찰랄(哈眞札剌)을 보내어 강동성(江東城)에서 거란을 공격할 때 인주도령(麟州都領)으로서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항복하였다.
1233년 아들 복원이 필현보(畢賢甫)와 함께 난을 일으켜 선유사(宣諭使)인 대장군 정의(鄭毅)·박녹전(朴祿全) 등을 죽이고 성을 빼앗아 반역하자, 최우(崔瑀)가 가병(家兵) 3,000명을 보내어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 민희(閔曦)와 함께 이들을 진압하니 복원은 몽고로 도망치고, 동생 백수(百壽)와 그 아들 딸들과 함께 사로잡혀 해도(海島)에 귀양가게 되었다.
그뒤 복원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동경총관(東京摠管)이 되어 고려군민을 다스리자 여기에 붙은 것이 40여 성이 되었다.
또한, 고려를 참소하여 군사를 따라 내왕하므로 최우가 이것을 근심하여 그를 달래기 위하여 대장군을 삼으니 참소가 적어졌다.
홍대순의 아들 홍복원(1206~1258년)도 아버지를 따라 무인(武人)의 길을 걸었다. 1232년 고려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하며 대몽(對蒙)항전에 들어가자 홍복원은 몽골군의 일원으로서 서북지방을 책임지는 낭장으로 있었다. 이듬해(1233년)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이가 병사들을 보내 서경(西京·평양) 탈환작전을 펼칠 때 홍복원은 대패하고서 겨우 목숨만 건진 채 원나라로 숨어들어갔다.
※ 홍복원(洪福源, 1206년 ~ 1258년)은 고려의 역신으로 본래 이름은 복량(福良),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도령(都領) 홍대순(洪大純)의 아들로서, 그 선조는 중국인으로 당나라 때 고려로 이주해 왔다.
1218년(고종 5) 고종 때 몽골이 강동성에 침입하였을 때 아버지 홍대순이 자진해 항복하여 적병을 불러들였다.
그도 또한 1231년(고종 18) 살리타이(한자: 撒禮塔)가 쳐들어오자 서경 낭장으로 있으면서 적에게 항복하였다. 몽골군이 돌아간 뒤 그는 반란을 일으켜 붙잡혔으나 몽골로 도망하여 동경 총관이 되었다.
그 후 몽골이 고려를 칠 때마다 그 앞잡이가 되어 들어오므로 ‘주인을 무는 개’라고 하였다. 후에 몽고에 볼모로 간 영녕공 준(永寧公綧)과 사이가 나빠지자 몽고 황족 출신인 영녕공 준의 부인이 황제에게 일러바침으로써 황제가 보낸 10여 명의 장사에게 맞아 죽었다.
''""이후 몽골은 다시 고려를 야금야금 침략하기 시작하는데 그 앞잡이가 홍복원이었다. '고려사'의 한 대목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원(元·몽골)의 군사가 매년 침입해 주와 군들을 함락했는데 이는 모두 홍복원이 인도한 것이다." 그 지역(北界·북계)현황을 홍복원이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에서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릴 것 같던 홍복원은 복병을 만나 비명횡사 하게 된다. 당시 인질(禿魯花·독로화)로 몽골에 끌려와 있던 왕족인 영녕군 왕준(王·1223~1283년)이 바로 복병이었다. 왕준은 고려 8대왕 현종의 8세손으로 명목상의 왕족에 불과했다.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한 승화후 왕온은 그의 친형이다.
그러나 고려가 고종 24년(1237년) 마침내 몽골에 항복하고 몽골이 고종의 친조(親朝·직접 황제를 찾아와 알현하는 것)를 요구하자 그 대안으로 이듬해(1238년) 왕준을 고종의 친자식이라고 속여 몽골에 보내게 된다. 요동지방으로 끌려간 왕준은 홍복원의 집에 머무르게 된다.
''""'고려사'는 "홍복원은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길어지니 사이가 나빠지고 왕준은 점차 불평을 품게 되었다." 그 사이에도 고려가 조공(朝貢)을 제대로 바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1246년(고종 33년), 1247년 몽골은 고려를 침공하였는데 이때도 홍복원은 선봉에 설 만큼 몽골 황실의 든든한 총애를 받았다.
""""홍복원과 왕준 사이의 사단은 1258년에 벌어졌다.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두 사람이 다투던 도중 홍복원은 왕준에게 "속담에 기르던 개가 도리어 주인을 문다더니 그 격"이라고 면박을 주었다. 이 말을 몽골 황족인 왕준의 부인이 들었다. "내가 개와 살고 있단 말이냐!" 부인은 즉각 황제에게 고했고 황제는 칙사와 장사 수십명을 보내 홍복원을 발로 밟아 죽여버렸다.
홍복원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 홍다구''(1244~1291년)가 매국노의 피를 이어받았다. 1261년 몽골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했고 황제도 홍다구에게 홍복원의 관직을 계승해 몽골 내 고려군민에 대한 관할권을 내려주었다.
※ 홍다구 (洪茶丘 중국 원 [元] 무장) 1244(고종 31)~1291(충렬왕 17).
고려 후기의 부원분자(附元分子), 원나라의 무장.
본관은 당성(唐城:지금의 南陽). 본명은 준기(俊奇). 할아버지는 1218년(고종 5) 몽골에 투항한 대순(大純)이며, 아버지는 몽골 침입의 길잡이 노릇을 한 복원(福源)이다. 몽골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몽골군에서 활약했다. 1261년(원종 2) 아버지의 뒤를 이어 관령귀부고려군민총관(管領歸附高麗軍民摠管)에 임명되었고 그뒤 고려 군민에 대한 관령권(管領權)까지 장악했다. 1269년 몽골군을 이끌고 고려에 와서 봉주(鳳州)의 둔전총관부(屯田摠管府)에 주둔하면서 부원세력의 부식에 힘썼으며, 1271년 삼별초(三別抄)를 진압하기 위해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진도·제주도에 출병했다. 1274년 원의 일본정벌 때 소용대장군 안무사 고려군민총관(昭勇大將軍安撫使高麗軍民摠管)에 임명되어 군량·선박을 징발하여 악명을 떨쳤으나 일본정벌에는 실패했다. 1275년(충렬왕 1) 원에 돌아가 왕권을 둘러싼 내전에 참가, 승상 백안편에서 상도(上都)를 공격했다. 1279년 제2차 일본정벌 때 고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용호위상장군 정동행성우승(龍虎衛上將軍征東行省右丞)에 임명되어 정벌을 지휘했으나 태풍으로 실패하는 바람에 다시 원으로 돌아갔다. 이후 고려에는 돌아오지 않고 요양행성(遼陽行省)의 관리로 재직하다가 죽었다.
홍다구가 고려에 끼친 해악은 아비 홍복원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원종 12년(1271년) 황제의 칙서를 갖고서 고려를 찾은 홍다구는 원종을 보고서 배례(拜禮)도 하지 않을 만큼 오만했다. 고려와 일본이 내통하고 있다는 거짓정보를 황제에게 올려 몽골이 두 차례에 걸쳐 일본정벌(東征·동정)에 나서게 만든 것도 홍다구의 공작이었다.
사실 지휘부 일부만 뺀다면 온전하게 고려의 국력을 동원한 정벌이었기에 고려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충렬왕 3년(1277년) 제3차 일본정벌을 획책했지만 몽골 내 상황으로 인해 실행되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홍복원에게는 홍다구 같은 매국노 아들만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홍다구의 아우인 홍군상(洪君祥·생몰년 미상)은 "영녕공은 원망할지언정 조국을 배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충렬왕 18년(1292년) 몽골이 재차 일본정벌을 계획하며 고려로 하여금 배를 비롯한 군수물자를 동원하려 하자 홍군상은 고려의 뜻을 존중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홍군상이 직접 사신이 되어 고려를 방문하고 돌아갔고 최종적으로는 일본정벌 강행이 결정됐으나 배를 짓고 있던 도중 1294년 황제가 죽었다. 홍군상은 몽골 승상 완택(完澤)을 간곡하게 설득해 일본정벌은 중단됐다. 이에 고려조정에서는 홍군상에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칭호를 내려주었다.[이한우]
*******상기,글에대한,왕식의설명!!!
윗글의주장한는바는,당시,음란과무능,사치로말미암아,백성은도탄에빠졌음에도~위무할능력도
없었고,신하들중에,권문세가들은~패거리를지어,부정부패와사적인욕심채우기에급급했던~
고려조정의주장이라하겠다.
더구나,권문세가,중에서도,공민왕과충혜왕의외갓집,광정공r가문,역시,윗글의부패한권문세가와
마찬가지였다.뿐이랴???고려말의충신,문정공홍언박의친손자2명은,자제위사건으로~
공민왕시해에연루되어,이인임에게.발각되어,사형되지않았는가??
더구나,광정공의손자이자.공민왕의처남염홍방의매제인.당성군홍징,마져도,이성계의가병에게
죽임을당하던,려말,선초의위기의홍가들을~조선초기에들어와서~누가??이들을.배려했는가??
**당성군홍징은,광정공의친손자.공민왕.충혜왕은,광정공의외손자!!!))
그렇게,려말에,홍가들이고초를겪을때~~우리의홍대순,홍복원.홍다구의후손이신,린주도령중랑장파
12세대종손,문경공홍길민은.고려의전제를어지럽히는.정몽주를정승에임명하라는,고신에서명을거부
하다가,파직을당하여~은거하지않았던가?
더구나,광정공,홍규께서.명덕태후의아비가될수있었던겄,역시~~광정공홍규의맏따님을,원나라승상
아고대에게시집을보냄으로써,작은딸은명덕태후가될수있었는데~
그~아고대에게.맏딸을시집보내게된배경에는,종친을아끼는마음이계셨던,홍다구공의배려였던것이다!
홍다구할아버지께서,비록,고려왕실이나.고려조정에는,원한이많았으되~종친을사랑하는마음은~
이렇게깊었던것이다.
더구나,린주도령중랑장파의선조들께서는,예로부터.고려조정의신하가아닌지라~
고려조정의말을들을이유가없었고,특히.4세(3세)린주도령諱德할아버지는,고려의서경낭장,으로
계실때,조위총의亂을평정,하셨는데~당시,린주도령휘하의반적,강부를역참하면서~대동문을부수워
후군총관,두경승과더불어,고려에功을세웠고~그럼에도~
6세린주도령,대순(공손할인)할아버지께서,고려를대신하여,원나라와대적하다가,
중과부족상황으로~고려에도움을,청했을때~~고려조정은,린주도령의요청을묵살하였거늘~
그리하여~눈물을머금고~부득이....원나라에게.린주도령의령지를모두바치며항복하였거늘~
그렇게,우리의린주도령중랑장파는,고려조정에게,철천지원한이있거늘~어찌상세함도
알지못하면서,함부로...평하는가??
그럼에도,종친을아끼며.사랑하는마음은,종친을.한나라의국모와두임금을배출하는
배려를하였거늘~
이후에도,조선을개국하는.새로운시절에임하여도~
바로,린주도령중랑장파12세대종손,집현전대제학,남양군,문경공,길민할아버지께서.조선개국공신이
되신이후에,비로소,홍가들이~~부역을면제받고,특별대우를받게되었던것이다.
이러함에도~바보같은,어떤,홍가는,잘알지도못하면서~상기의글을써서~사람을했갈리게만든다.
왕식의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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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연구와 평가는 공정해야 하니...
우리 남양홍씨 문중의 변명도 들어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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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랬글은,내가(왕식)카폐에쓴글을조금,각색한듯하지만,역시,내글이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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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조(派祖): 홍 후(洪 厚)
파조(派祖)는 고려 인종시인(仁宗時人)이시며, 관명은 중곤(仲坤), 중랑장(中郞將)인주도령(麟州都領))후(厚)이다.
고려조 무신으로 옛 고구려 영토였던 인주(麟州)의 도령(都領)이요 직함은 중랑장(中郞將)으로 인주(麟州)일대를 수호 하고 외세침입을 방어 하는 요새지의 수령(首領)이다.
몽고세력의 완충지대에 속하였던 이 지역을 지배하는 수령(首領)을 도령(都領)이라 하였으며, 패권은 고려 왕조의 임명직이 아니었다.
고려사절요 명종 26년 서기 1196년11월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있다.
동11월 설팔관에 하고 왕칙북계제 도령 관락 할새 인주도령 인주도령(麟州都領)중랑장 자충, 견, 판함문사 왕규, 장읍불베하야 유사핵주 무례하니 왕왈여빈동락총지야라. 이죄가호아 유사,재청윤지 하니 자충,초발, 제도령왈, 국가 소오배 하야 개유지, 의오입조 어늘 욕이미사로 시지여장죄하니 아,시, 조정유인부즉, 시외아야 로다.
11월에 팔관회를 베풀고 왕이 인주도령을 위시하야 북계 제 도령을 초청하여 팔관회에서 절을 하지 아니하고 읍만 올리는 것을 본 유사판함문사 왕규가 그 무례함을 탄핵하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변방백성을 사랑하여 같이 즐기고자 한지라 어찌 허물을 묻겠는가 하니 유사가 다시 주청하여 윤허 하니 좌충 본주인주(麟州)를 비롯하여 제도령(都領)이 말하기를 나라에서 우리를 초대하였으니 다 같이 그 뜻에 따라 우리가 입조했는데 작은 일로서 우리를 시해하고자 하니 우리는 본시 조정의 사람이 아닌 즉,
나에게 죄를 주려하니 두려운 일이로다 하였으니 그들의 지위와 고려와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즉, 그들은 고려조정의 사람임을 부정하였으며 오직 선린관계임을 은연중 부곽 시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요동과 고려와의 완충지대로서 어느 정도 독립된 지배권을 향유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다만 고려에서는 변방을 회유하기위한 책략으로 중랑장(中郞將) 벼슬을 제수하고 일정보수를 시해하여 변방직무에 방책을 삼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이 지역은 공의 현손인 휘 인공의 일이기까지 백삼십여년 간을 세세 계승하여 인주에서 도령을 세습하였다.
자(子) 휘 유기(惟己) 공은 중윤으로 추봉삼중대광하고 인주도령을 하였으며, 손(孫) 휘 덕(德)공은 중랑장 인주도령(麟州都領)으로서 명종4년 갑오 서기1174년에 반적강부를 역참하고 서경유수조위총의 난을 막았다.
증손(曾孫) 휘 제선(濟先)공은 검교비서에 중랑장 인주도령을 하고, 현손(玄孫) 휘 인(湮)공은 초휘, 대선 사작 대순(大純) 고려정관은 청광록대부상서 좌복야 응양상장군 이시며 인주도령이었다.
고종18년 신묘 1231년에 몽고 살리탑을 총수로 인주를 침공해 오니 휘 인공은 인주도령으로서 몽고군을 맞아 결사항전 하였으나 중과 부족으로 몽고군에게 패하였다.
고종18년 임진 고려조정은 몽고의 침략에 적극적인 대항이 없이 스스로의 생존만 생각하고 강화도로 천도하여 당시 직권자 최우가 강화도에서 호화로운 생활과 농민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로 민심을 잃었고,
고종20년 계사1233년에 평북 일대에서는 고려조정의 반기를 들었다. 그 이유를 인주도령의 위치에서 살펴볼 때, 자기종족의 생존을 위하여 몽고와 타협하고 고려를 멀리한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이다.
몽고는 약30년 동안에 여섯 차례나 침입하여 고려가 입은 피해는 막심하여 20만명이 포로로 잡혀가고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으며,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고종 45년 무옥 서기1258년 고종이 태자전 원종을 몽고에 보내서 원에 항복하고 속국으로 전락한 후에 원나라에서는 고려를 다스리기 위하여 정동성사 및 고려군사를 평양에 주설하고 고려를 통치하였다.
초대 정동성사가 휘 인공의 장자 복원공 이었다. 그 후 복원공의 아들 다구공이 고려군사로 부임하여 고려를 강권통치 하였으며 원종 15년 갑술 서기 1274년에 다구공은 여몽연합군을 지휘하여 왜를 침공하다가 폭풍으로 실패하고,
충렬왕 칠년 서기1281년에 제2차 일본정벌을 하였으나, 이번에는 태풍을 만나 참패하고[이 태풍을 일본에서는 가미가제라고, 즉 신풍이라고 한다.] 원세조의 부름으로 원나라로 귀국하였다.
다구공의 아우 군상공은 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원세조의 사랑으로 글을 배우고 고려원종 칠년 병인 서기1266년에 고려인삼백호로 군단을 만들어 통과했다.
그 후 원세조가 죽자 고려로 환국하여 고려의 많은 공을 세우니 충렬왕이 그의 공을 가상히 여겨 삼중대광 익성후 첨의중찬 정승에 봉작하였다.
고려에서는 휘 군상공을 위하여 관향인 익주를 강령이라 개칭하고 강령부로 승격시켜 이후 중랑장파에서는 강령군이라는 군호가 조선 중기까지 세습 된 것 이다.
상고컨대, 우리 중랑장파는 12세기 이전부터 이 일대를 지배하였던 호족으로 창성하여 13,14세기동안 원을 대신하여 고려를 통치하던 실세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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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남양홍문은,예로부터삼한의갑족이라하였읍니다.
상계를더듬어본다면,돈황의공공씨에서부터9년홍수를다스려,
물수변을얻어서洪성이되었다는사실이있고.
그로부터,선계를이어오시다가
다음으로는.고구려영류왕22년잠시당나라와화평할시기에고구려의요청으로,
당태종이.(이세민이)
8학사(종중에따라서5학사라는,글도있으나,주로8학사로인정함)를보내서,
동국을교화,하신학사공,諱홍천하공이계시고~
학사공휘천하공과일곱분의학사가계시니
(이역시각종중마다이름이서로다르며
참고로,홍,은.봉.길.방.위.목.기.등.이라는설과 원주원씨도포함된,
좌우간여러가지8학사를주장하는
종중이있으나,우리의홍천하공은여러곳모두에포함됩니다)
이러한선조어르신들이우리의은수포에당도하시니,이를후세에당곳이라하였으며,
현재경기,화성,서신면의구봉산성이라고도하나,일설에는이곳은나중에만들어진곳이라고도하며,우리의지명자체가고려시대
와조선시대.일제를거친,지금에까지,불일치된다는학설이우세합니다
어쨋건 각설하고.
홍천하공은연개소문의난을피하여신라,지리산덕산촌으로피하셔서.
신라선덕왕으로부터국빈으로예우받으시며
우리신라의신하가아닌唐臣이라는당시최고의존칭을받으셨읍니다.
이후효소왕에의하여덕산촌주를봉함받으시고,
10여세대를계보를이룬이후,실전되었고,
일설은다시중국으로돌아가셨다합니다.
우리는고려때에태조를도와고려개국에익대의공이있으셔서18자의공신호를하사받으신,
태사공諱은렬公을비조로모시게됩니다,
이후 고려인종때의麟州지역의세습패주의호족으로서,
麟州都領중랑장공 을派祖로모셔오던중랑장파에서
麟州都領중랑장公할아버님이,고려개국이후인종때의어르신임으로
太師公을1세鼻祖
로높이모시고,麟州都領中郞將公은후손으로하여2세로 모신집안이되고.
그외태사공휘은렬공의주손임을
주장하는남양군(주손이면태사공파가되어야함)휘 주 의부친,
장간공휘융의네아드님에서13세분파조.
네분이나오시며,(장자휘주,남양군파.제2자휘언박,문정공파,제3자휘언유,판밀직파,제4자휘언수,판중추파)9세휘사윤 의제3자라는예 의아들로서홍자번과그의후손임을자임하는
대언공파.시중공파.시랑공파.상서공파.감영공파.익산군휘순의아들로서당성군이신,운형공의당성군파.운수의익산군파,그외
옛적의자료에는남양군파2세동주와관계가없었던
예사공휘복.파조께서도남양대보에4세분파조로하여
합보되셨고,(예사공파의종가계열과강경공휘빈의계열동일하게합보되심)
역시,휘동주와상관없던부림문중의휘란 의후손조차도,
재신공파라는이름으로3세분파조로합보되셨읍니다.
근래에이르러,남양의각문중이옛적의자료가미비함에도,
남양대보에합보하여옛선조어르신들의
별도로계보를정립하신,뜻을알지못하고.다만세력불리기에동참하는것을,
어떻게읽어야할지?
원래세보나족보라는것은정확하게,알고있는최상계의선조부터모시는것이응당할터임에도,
정확히,고증을확인할한근거도부족한근세에,갑자기.합보에만신경을쓴다면.
혹시나중의災가되지않을까두렵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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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쓴들을각색하여~~~다른주장을펴ㅡ는바...홍은렬과홍유는분명다른인물이고,더구나공훈자체가
틀림에도~~억지로동일인시하는것은,오류이다~~왕식주서....
남양홍문의 중시조 태사공(은열공?)은...
""분명 태조 왕건이 궁예를 배신하고 황제에 등극할 시기의 최고 공신 "홍유"일 확률이 많습니다.
위의 글들을 종합해 볼 때...
홍씨 문중은 대대로 당성(唐城,당항성?) 인근을 봉지로 받은 지역 호족인데...
""""고려를 배신한 몽골 제후시절의 이들 봉지는...내내 "인주"로 ...관직은 "도령(都令)"으로 나옵니다.
어느 연구엔...당성(당항성)은 돈황 인근이랍니다.
현재도 당항성이란 지명은 그 남쪽 청해성 인근에 현존하고여...
""또한 "홍대순"이 고려를 배신했단 시기의 정황은...
몽골이 타타르(거란)을 정벌하려 갈 시기..첨엔 막다가 굴복,,, 길을 빌려준 혐의 입니다.
몽골에서 카자흐스탄 일대 거란(카라한) 을 치러 가려면...반듯이 통과해야 할 지점이 돈황등의 신장 위그루 지역입니다.
홍씨들이 대대로 봉지로 받아 작위를 세습했던 지역은...
그 황조가 발해든...서발해 격인 거란(요)이든...몽골이든...고려(당고려)이든...내내 요 신장지구 근방였단 얘기가 됩니다.
그래 조선의 홍경례등이 반란을 일으킨 서북도(평안도???) 는...요 돈황 인근일 확률이 많다 예상합니다.
""홍길동의 그 도술도...이 지역의 유불선 합일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와 비슷한 "마니교"일 확률이 많고...
""'홍씨들의 시조 홍천하(洪天河) 가...8학사의 일원으로 고구려에 드려왔단 "도교"라고도 하고...유교'라고도 하는 그 종교는...
""현재 돈황인근에서 젤 많이 나오는...서역식 불교유적의 "마니교(미트라교,미륵불교)"가 아닐까 싶습니다.
중원을 흔든 태평천국의 홍수전이... 객가(커자)족인것도...
이들의 종교가 기독교로 오인되는 것도...이들의 본고장인 돈황일대 불교는...유불선 합일의 미륵교(미트라교,마니교)였고...
이의 분파가 남방 벽련교였기에 그렇다 예측됩니다.
커자..즉,객가(客家)족들의 본고향도...돈황일대 랍니다.
당과 고구려의 요동벌 싸움때...발해 멸망후 거란(카라한)의 침공 때... 몽골의 침공 때...청나라의 박해 때...점점 남부로 밀려나...
남부인들관 격리된 생활을 유지했던게 객가들이요...그 대표적 예가 당성홍씨가 남양홍씨로 둔갑하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이들이 대륙남부에 설치한 객가촌들도...
이미 거란과 몽골이 송(고려)의 남부 왜인들도 있던 역을 치고 설치한 남한성...쌍성총관부등의 총독 집성촌격을 재 사용한 것일지 싶고여...
남양홍씨의 시조 홍천하는...
신라 선덕여왕이 당의 신하라 하여... 하대하질 못해 당신(唐臣)으로 불리고...현 한반도 당성(남양)에 봉해졌다 하나...
이미 고구려 때 받은 직책이 당성백(唐城伯)이고...
당과 고구려의 싸움때 난처해져...남쪽으로 피신... 지리산(덕산)으로 은거했다 선덕왕의 초빙을 받았다 함은...
돈황인근 당성에서...
고구려와 당의 전투때...신라와 당의 국경 청해성의 당항성을 거처... 사천성 덕산을 거처 호남성 덕산(지리산)에 은거했단 얘기로 들리고...
당시 신라의 위치가 사천성,양자강 이남였단 예측도 하게 만드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못 믿으시겠다면...홍씨 일가가 대대로 도령직을 역임했단 "인주(麟州)""의 몇 않 되는 위치추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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