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더위와 장마만 끝나면 좋은 계절이 올 겁니다. 저는 늘 바다를 다니기 때문에 계절 감각이 좀 늦습니다. 그래서 7월에는 섬에 가지 않고 집에 있었습니다. 8월 1일부터 10일까지의 바다가 제일 좋습니다. 15일 정도가 되면 저녁에 벌써 추위가 옵니다. 외롭고 쓸쓸하고 조용한 곳을 좋아하시는 분은 9월의 바다가 좋습니다. 안개가 좀 있는 바다는 5월이 좋습니다. 좀 춥지만 맑고 좋은 계절은 10월입니다. 용감한 바다를 보고 싶을 때에는 겨울에 찾아가시기를 권합니다.
저는 가끔 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1. 왜 시를 쓰는가?
2. 왜 너의 시는 쉬우냐?
3. 어떻게 하다가 여기까지 왔느냐?
4. 어떤 인물들을 좋아하느냐?
5. 너의 경제관은 뭐냐? 시인과 경제는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6. 시인과 건강은 어떻게 유지해야 되느냐?
7. 요즘 한창 없어서는 안될 시인과 컴퓨터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왜 시를 쓰는가? 저는 우선 정 때문에 쓴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정(情) 때문에 시를 씁니다. 헌 신발도 버리기가 아까워서 망설이는데, 하물며 평생 살아온 이 세상에 대한 마음이야 어떻겠습니까. 그걸 버릴 수 없어서 시인은 시를 쓰는 겁니다. 연애편지로 시작해서 아주 거대한 대서사시까지도 정이 없으면 죽어버리고 맙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언제 읽어도 변함없이 가슴이 찡해져 옵니다. 김소월의 [가는 길]이란 시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 한마디가 얼마나 우리들로 하여금 간절하게 만듭니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또 한번" 한하운이 절룩거리며 황토길을 가면서도 한 한마디가 있습니다. 햇볕이 잘 닦인 보석처럼 반질거리는 봄을 맞으니까 이런 생각이 샘솟았겠지요. "그래도 살고 싶은 것은 하나밖에 없는 자살을 아끼는 것이다" 정말 절실한 말인데, 역시 인생에 대한 정이고 그리움입니다.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정 때문에 시가 씌어지는 것인데, 쓰지 않아도 될 때 쓰기 때문에 좋은 시가 쑥 빠지지 않는 겁니다. 일부러 책상 앞에 앉다 보면 그 시는 아무래도 쓰고 싶어서 못 견디어 나온 시와는 다릅니다. 여러 가지 치장을 하고 좋은 어휘를 넣었다 하더라도, 그 시에는 어딘지 모르게 걸리는 대목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이상(李箱)의 시 가운데 [거울]이 있습니다. 이상 같은 모더니스트들은 정 때문에 시를 쓰지 않았을 것 같지만 실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의 시 모두가 정 때문에 쓴 것들입니다. 그 중에 [거울]이 가장 정이 짙은 시입니다. "거울 때문에 나온 거울 속의 나를 만져보지 못하는구료마는 거울 아니었던들 내가 어찌 거울 속의 나를 만나 보기라도 했을까" 나는 오히려 이 시 때문에 이상의 시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가 없었다면 나는 이상을 좀 멀리 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도 듭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어머니입니까? 아닙니다. 나 자신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거울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만나려고 했더니 앞에 있는 거울 때문에 만져보지도 못하고, 내가 오른손을 내놓으면 왼손을 내놓고, 내가 돌아서서 가면 저도 돌아서서 갑니다. 정말 서글픈 일입니다. 내 고생스러움, 어려움, 쓸쓸함, 고독함을 호소하고 싶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거울 때문에 엉뚱한 사람이 되었잖아요. 이 얼마나 절실한 정 때문에 쓰여진 시입니까. 시는 정 때문에 쓰이는 것이고 그릇은 용도 때문에 만드는 것인데, 그 그릇도 쓰다보면 정이 듭니다. 이것을 버리려고 하면 정 때문에 망설여집니다. 조선조 때 [조침문]에서 바늘이 뚝 부러지니까 그때 무슨 글을 썼습니까. 그 글을 등단하려고 쓴 게 아니라 쓰지 않고는 못 배기기 때문에 쓴 글이 [조침문]이 아닙니까. 글은 그렇게 써야 됩니다. 아무런 구속도 없이 아무런 목적 의식 없이 스스로 내가 시를 나오게끔 하는 그릇인 양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정을 잘 간직하고 잘 다스리면 우리 사회도 아름답고 정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정치의 정사 "정(政)"자를 애정이라고 하는 뜻 "정(情)"자로 바꾸어 놓았으면 좋겠습니다. 정치, 정(情)으로 다스리자. 여러분들, 정치가에게 맡겨서 통일이 될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더 멀어집니다. 정으로 다스려야 됩니다. 그 정치를 해야만 통일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정 때문에 여러분들이 시를 쓰기를 권합니다. 정 때문에 쓴다고 생각하시고 쓰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져 봤습니다.
솔직한 가슴의 말을 담은 시는 쉽다
시는 왜 쉬운가? 이건 제가 어느 평론가한테 들은 얘기입니다. 쉬운가가 아니라 "왜 그렇게 시가 어눌한가?" 하고 얘기해 준 것을 조금 부드럽게 하느라고 "쉬운가"라고 했습니다. 문장도 안되고 거칠고 조잡하고 그런 인상을 가졌던 모양인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정을 말하는데 어려운 말이 필요합니까. 나는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내 솔직한 정을 얘기하는데 그렇게 어려운 말을 많이 써야 됩니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시는 쉽다. 입으로 말하지 않고 가슴으로 말했기 때문에 내 시는 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다 이렇게 왔느냐? 내가 진흥원에 오면서 이런 강당에서 좋은 손님들을 모셔놓고 얘기한다고 하는 것은 생전 처음이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 이렇게 왔는가? 그 동안에는 떠돌았습니다. 물론 먹고살기 위해서 직장에도 있었지만 떠돌다 보니 오게 되었는데 왜 떠돌았는가? 떠돌아야 정을 알게 됩니다. 떠돌아야 절실한 정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인물을 좋아하는가?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추사 김정희 씨보다는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 씨같이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 좋습니다. 보길도를 좋아하는 고산 윤선도보다는 김삿갓을 좋아합니다. 걸어다녔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 짚신 많이 닳아졌을 겁니다. 요즘 같으면 김정호 씨도 프라이드 하나쯤은 타고 다니지 않았을까 생각하는데, 짚신이 얼마나 닳았겠습니까. 짚신이 닳아야 그 땅의 고마움을 알고 거기서 오는 기가 이 사람에게 주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지도로 보지 않고 시로 봅니다.[ 변신(變身)]을 쓴 카프카가 있습니다. 그 변신에 나오는 독충은 벌레인데 나는 카프카보다는 {곤충기}를 쓴 파브르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불란서에서 높다고 하는 2000미터가 넘는 산을 스물 다섯 번이나 왕복했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기서도 곤충기를 곤충기로 보지 않고 시로 봅니다.
몸은 배고프지만 영혼이 부자일 때
다음은 시인과 경제, 시인과 건강, 시인과 컴퓨터입니다. 시인도 먹고살아야 합니다. 이 먹어야 할 것은 오늘 먹을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노후에 시간이 많아질 때 시를 쓸 적에 굶어서는 안 됩니다. 그때는 최소한 두 끼라도 먹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천 원을 벌었다면 이백 원만 저축해 두십시오. 십만 원을 벌었을 때에는 이만 원이 많으면 만 원이라도 자꾸 눈 딱 감고 저축해 두십시오. 돈을 있을 때는 있지만 없을 때는 전혀 오지를 않습니다. 그게 시인인 저의 경제에 관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배불리 먹는 것은 안 됩니다. 시인이 배가 부르면 배고픈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고픔을 면할 정도로 조금 먹고, 건강은 그때 가서 유지하는 게 아니고 지금부터 유지해 가기를 권합니다. 그래서 돈이 들지 않는 건강법으로는 하루에 만 보씩 걸어 보십시오. 저는 하루에 매일 6킬로미터에서 8킬로미터를 매일 걷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두 발로 걸어서 돌아다닌 섬이 천 개 정도 되는데, 다닐 수 있는 섬은 다 걸어서 찾아다녔습니다. 제주도를 하루에 4시간에서 5시간씩 바닷가를 걸어서 18일이 걸렸습니다. 흑산도를 걷고 울릉도를 세 번 걸었습니다. 길이 없을 때에는 성인봉으로 넘었고, 요즘은 길이 있기 때문에 걷기가 좋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저에게 건강을 선물했습니다.
다음으로 먹거리를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선 저는 담배는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웬만하면 담배를 피우시는 분들이라면 지금부터라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담배를 피우면 자기의 생명이 줄어드는데 그걸 모릅니다. 술은 조절해야 됩니다. 많이 먹고 시를 쓰는데 지장이 있으면 줄이면 좋습니다. 혼자서 한 잔 마실 것을 반 잔으로 줄이시고 책을 읽으면 머릿속에도 잘 들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건강을 유지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인과 컴퓨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육칠십을 넘은 사람이 컴퓨터 앞에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인터넷을 한다고 신청하니까 주민등록 번호를 얘기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집에서 전화로 얘기했더니 "예? 예?" 하면서 안내원이 몇 번이고 되물었습니다. 29년생이면 만 72세가 넘었는데 무슨 컴퓨터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3년 전의 일입니다. 요즘 내 주변에 있는 친구더러 컴퓨터를 하라고 하면 세월이 얼마 남았는데 하고 말합니다. 그래도 하라고 하면 제발 그 컴퓨터 소리 좀 하지 말라고 합니다. 컴퓨터의 속도가 얼마나 빠릅니까. 지금 육십이면 10년은 남았는데 1년 후면 후회할 겁니다. 이 스피드는 벌써 내가 10년 살 걸 100년은 가 있을 겁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쓴 하는 최영미 시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컴퓨터와 사랑하고 싶다" 그런데 아마 최영미 씨는 서른 잔치는 끝났어도 컴퓨터와의 사랑 잔치는 계속하고 있을 겁니다.
오늘 이 현실 공간에서는 독신으로 사는 남녀가 많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컴퓨터 속에서는 결혼은 했지만 독신처럼 사는 여자가 많습니다. 현실에서는 하루에 몇 쌍씩 이혼을 하는데 컴퓨터 속에 들어가서는 재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실 공간에서 돈을 못 번다고 하는 사람이 인터넷 속에 들어가서 돈을 무진장 벌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무시해야 됩니까. 멸시해야 됩니까. 멀리해야 됩니까. 거기는 포르노가 있고, 자살, 사기, 도둑, 강도, 마약 등이 있다고 거기를 안 들어가려고 하는 시인이 있습니다. 거기에 들어가서 정리를 해야 됩니다. 정서적으로 그 사람들의 갈증, 갈등을 정리해줘야 합니다. 사이버 세계의 홈페이지나 게시판이 올리는 글들을 보면 망가지고 있습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엉망입니다. 이걸 누가 고쳐줍니까. 우리 글을 쓰는 시인들이 가서 올바르게 고쳐줘야 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두 발로 사랑하며 다닌 2천여 섬들은 내 가슴에
이제 섬과 제 시에 얽힌 이야기를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지도를 보시면 군산 앞에 비안도가 있습니다. 비안도에서 제주도의 마라도까지 주변에 있는 섬이 약 2천여 개입니다. 마라도의 면적이 0.3평방 킬로미터입니다. 마라도에 가본 사람은 섬을 기준으로 할 적에 그 섬을 머리 속에 넣고 비교해 보면 재미가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저는 정 때문에 시를 씁니다. 제일 먼저 만재도는 전남 신안군 흑산도 만재에 딸린 섬, 크기는 0.59평방 킬로미터로 마라도의 2배가 됩니다. 제가 섬에 돌아다닌 중에 저에게 가장 시를 많이 준 섬이 바로 만재도입니다. 그래서 흔히들 섬에 가고싶은데, 어디를 가면 좋을지 몰라하는 사람들에게 시를 좋아하면 만재도를 가보라고 권합니다. 저의 시집 {하늘에 있는 섬}에 수록된 시들은 이 만재도를 찾았을 때 하루저녁에 다 쏟아진 작품들입니다. 나는 그 시집이 내 시집 가운데 가장 좋은 그야말로 내가 내 구미에 맞는 시를 썼다고 하는 시집이 만재도를 소재로 한 작품집입니다. 그렇듯 이 섬은 시인을 중독이라 할 만큼 사로잡았습니다.
<나란 누구인가. 도망질을 할 만한 곳이 어디인가. 시정배들이 발목을 잡은 것도 아닌데 도심 한복판에서 비명을 질러야 할 처지도 아닌데, 왜 외로운 엉겅퀴 앞에 서 있는가. 만재도, 만재도가 나를 도망자로 몰지나 않을지 살금살금 이장 댁 돌담 넘어 창문을 두들긴다. 나여 나. 나라니. 나도 몰라. 달밤에 나갔다 돌아오는 나야.>
처음 찾았을 때에는 마을의 이장이 내가 누군가 하고 잔뜩 의심의 눈으로 보더니, 나중에 두 번째로 갔을 때는 의심을 풀고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세 번째 갔을 때는 두 번째 갔을 때의 그 시의 원고를 가지고 가서 다시 한번 그 시가 있었던 자리에 가서 큰 소리로 한 번씩 읽으며 확인했습니다. "이 시가 현장과 일치가 되는가, 안 되는가." 그렇게 해서 전부 돌아다니며 확인한 다음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갈 때는 이 시집이 나왔기 때문에 제일 먼저 이장 윤씨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제가 간다고 했습니다. 가서 보니까 내 시집을 자기 머리맡에 놓고 내가 들어갈 민박집의 조그만 방에 모기장을 펴놓고 얼마나 깨끗이 청소를 해놓았는지 모릅니다. 내가 시인으로서 대우를 최고로 잘 받은 곳이 여기입니다. 이렇게 고마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자기는 시를 몰랐는데 시집을 제일 먼저 열어놓으면 윤씨 이장 얘기가 나오니 자기를 시의 주인공으로 써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부인은 홍합이니 해삼 등을 삶아서 내놓았습니다. 너무나도 배불리 먹었습니다. 저는 그러한 경우에 대한 예방 대책으로 정로환을 가지고 다닙니다. 이장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쓴 윤선도 등 문장가로 소문난 해남 윤씨 잡안의 후손이었습니다.
<아무에게나 옷을 벗어 보이지 않은 섬, 해남 윤씨가 5대째 지켜온 돌담, 150년 전에 들어온 조상의 얼굴, 그 얼굴은 왜 들어왔을까. 자식들 다 육지로 보내고 갯가에 남은 두 늙은이, 주름살에서도 파도소리가 난다. 아내는 교회에 나가고 남편은 깨알만한 수첩 돋보기로 넘기는 이장. 앞으로 몇 해 더 살면 윤씨의 만재도는 끝이 나는가.…잡았던 손 섬으로도 놓지 않고 정이 입을 막아 말 못하는 손. 나는 시끄러운 서울에서 온 남자, 이 사람 앞에서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이력. 왜 왔어. 그 말에 눈물이 난다.>이 사람이 보잘것없는 이 섬에 왜 이렇게 자꾸 오느냐고 내 손을 붙들고 왜 왔느냐고" 자기 속은 그렇지 않으면서 고마운데 서울에서 이런 사람이 어찌 자기를 보고 싶어서 두 번, 세 번 오느냐는 얘기입니다. 정말 그 사람은 눈물이 글썽글썽했고 나도 눈물이 글썽글썽해졌습니다.
다음은 여소도 이야기입니다. 시 쓰기 좋고 동백꽃이 아름답고 1년 열두 달 꽃이 피어 있습니다. 제주도와 완도 중간에 있는 섬으로 지역적으로 제주도보다 추울 것 같은데 더 따뜻하더군요. 여소도를 찾은 때가 마침 겨울이었는데도 산꼭대기에 냉이나물이 파릇파릇 귀여운 싹을 내밀고 있더군요. 저는 그것을 한 줌 캐가지고 와 주인집의 된장을 얻어서 끓여먹었습니다. 그리고 쑥이 얼마나 연한지 그 쑥을 뜯어다 냉장고에 일 년 열두 달을 넣어둔다면 민박집 주인 아주머니는 그걸로 빚은 쑥떡을 내놓았습니다. 책이 나왔을 때 고마운 마음에 섬아줌마한테 책을 보내 주었습니다.
<나이 칠십, 1929년생. 일제 강점하에 태어난 것도 억울한데 말년에 남편이 중풍으로 쓰러져 3년 동안 간병하느라 다 죽어가던 세월, 영감은 산언덕에 묻고 나니 휘 방안에는 찬바람만 그득하다. 그래도 아침에는 동백꽃처럼 단단하다가 저녁에는 호박꽃처럼 시들해진다며 아랫목에 누울 무렵, 뭍으로 간 자식들에게서 전화가 온다. "어머니, 저에요." "응, 부산이냐" "어머니, 인천이에요" "응, 너냐" "어머니, 안양이에요" "응, 애들은 잘 놀고" "어머니, 저에요" "응 목포냐" 그 다음엔 산에서 흐르는 물소리와 바위를 치는 갯바람 소리, 그밖에는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문풍지 우는 여소도, 나이 칠십, 아직은 차돌같이 강하다만 "응, 걱정 마라" 막내의 전화를 끝으로 자리에 눕는 어머니, 여소도에서 태어나 함께 초등학교에 다니던 남자를 부모가 맺어줘 아들 다섯에 딸 하나, 부산으로 목포로 인천으로 안양으로 다 내보내고 섬에서 혼자 사는 어머니. "응, 걱정 마라. 나는 예가 좋다">
1946년에서 1975년까지 살다간 김만옥은 시인이면서 소설가입니다. 스물아홉에 아깝게 요절한 사람입니다. 그는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리 여소도 365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소도 초등 학교를 마쳤는데 워낙 머리가 좋아서 천재라고 그 마을 사람들이 애는 여기에 있으면 안되고 육지로 가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원양어선을 타고 사고가 나 이 사람이 10세 미만에 죽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애를 데리고 완도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완도중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그릇을 닦았습니다. 광주 조선대학 부속 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장학금을 주기 때문에 어머니는 일을 해가며 생활비를 조달했습니다. 다음은 조선대학교 문리대 국문과 3학년을 형편이 어려워서 중퇴를 했습니다. 김만옥은 1964년에 첫 시집을 냈는데 그때가 18세였습니다. {사상계}에 [아침 장미원] 등 네 편의 시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20세 때였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취직을 하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증이 없어서 신문사에 합격은 했지만 밀려 나갔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광주까지 내려왔습니다. 광주에 흙을 뭉쳐서 자기의 집을 지었습니다. 거기서 살다가 도저히 견디지 못해서 농약을 먹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읽어 드리는 시는 이 김만옥 이야기입니다.
<초면인데, 정도은 씨 64세. 한순정 씨 69세. 김정환 씨 69세. 이경희 씨, 김영구 씨 모두 실명이다. 나하고 이들 다섯 사람은 낯선 사람들이다. 전라도 완도군 청산도 여소리 509번지에 모여앉아 김만옥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가 살았으면 52세, 그의 생가는 외딴섬 외양간이다. 한밤중 시인의 이야기를 뒤뜰에서 동백나무가 듣고 있다. 달을 보는 것도 동백나무다. 시인이 되려고 서울에 갔던 김만옥이 시인이 되었으나 살 수가 없어서 광주까지 내려와서 자살을 했다. 차라리 광주에서 머물지 말고 청산도까지만 왔어도 죽음까지는 가지 않았을 텐데. 여소도 김만옥의 생가, 뒤뜰에 핀 동백꽃만 보고 있어도 죽음까지는 가지 않았을 텐데. 시인이 아닌 섬사람들은 시가 뭐길래 목숨까지 바치느냐고 시를 쓰는 나를 보고 묻는다. 김만옥이 이곳에 있었던들 마을 사람들은 시인이 뭐냐고 묻지 않았을 것을. 김만옥이 죽은 책임 내게 묻는 것 같다.>
여러분들 절대로 문학을 핑계로 자살하지 마십시오. 죽을 때까지 죽을 힘을 다해서 바쳐서 문학을 하십시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제 시집 {혼자 사는 어머니}가 나왔을 때 제일 먼저 이 어머니에게 보냈습니다만, 비관한 나머지 자살로 생을 마감해서는 안 됩니다.
다음은 비안도입니다.
<이 세상의 슬픔은 여자만의 것인가. 여자가 사는 곳에는 슬픔이 사네. 섬에서 태어나 섬에서 갈 사람, 어머니 눈물이 내 눈물일세. 열 일곱에 시집 와 우리 남매 낳고 살 만할 때 아버지 풍랑에 끌려가, 우리는 바다만의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했네. 오라버니 장가들어 한시름 놓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오라버니 풍랑에 끌려가 우리는 또다시 바다만한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했네. 시집이 뭔지, 칠갑산 산골에서 홀어머니 바닷가에 두고 칠갑산 산골에서 콩밭을 매노라면 콩꽃이 필 때마다 눈물이 났네. 끌어가데요. 물이 끌어가데요. 딸 자라서 뭍으로 시집가고, 아들 자라서 장가들어 지애비처럼 배부르면 삼형제 낳고 살 만할 때 이번에는 아들을 끌어가데요. 지금은 며느리하고 살지요. 그 며느리 고마워도 고맙다는 말 못하고 살지요. 혼자서 손주 셋을 키우며 살아준 그 며느리에게 무슨 말을 합니까. 내 나이 일흔 다섯, 늘 이렇게 꿀 따며 살았지요. 자고 일어나면 파도소리 저 멀리 딸 걱정, 앞을 보면 컴컴한 부엌에 들어서는 며느리 그 슬픔 무엇으로 달랩니까. 그래도 이때까지 감기 한 번 앓지 않은 게 고맙다고 원수 같은 바다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만 이제는 다 갔네요. 그것도 세월이라고 다 갔네요. 앓지 않고 살면 다 뭐합니까. 다 간 걸요.>
-[여자의 슬픔] 전문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난 떼어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서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혼자 등대 밑에서 코를 곯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 눈으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수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절망을 만들고
바다는 그 절망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절망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절망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 이를 못 보겠다
온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만을 보고 있는 꼴이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에는 빨래가 마르고
빈집에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에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나타난 버스에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술을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산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놓아주었다
365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 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또 기다리는 사람
-[그리운 바다 성산포] 전문
백석의 유지에서 진정한 시의 길을 읽으며
서울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에 가보면 "나누는 기쁨"이라는 찻집이 있습니다. 거기에 가보면 백석 시인의 애인이 자기 평생 시 한 수 백석이 써준 [나와 나타샤와 신당락]이라는 시가 걸려 있습니다. 그것을 품고 있었던 여자인데, 죽을 때까지 백석을 사랑하고 그리워했습니다. 길상사의 원주인이자 백석의 애인이었던 자야 여사의 생각으로는 백석이 1963년에 세상을 떠난 줄 알았는데, 최근에 조선일보 2001년5월 4일자 신문을 보니까 백석은 1996년까지 살았더군요. 그리고 그 증명으로 사진과 편지를 한국에 있는 소설가에게 주었고 일본의 NK리포터에 얘기했던 게 있습니다. 그래서 자야가 1963년에 백석이 죽은 줄 알았는데 내가 신문을 보고 아니다 그러면 이것을 알려줘야지 그래서 자야가 살았던 그 집에 찾아가서 쓴 시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백석의 입장에서 간 겁니다. 그러나 이게 맞아야 되기 때문에 그 두 편을 읽어야 하겠습니다. [그 사람을 사랑했던 이유]라는 작품입니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는 백석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김아녕이라고, 그런데 백석은 한때 그녀를 자야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3년 동안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천 억의 재산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그 사람 생각을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다시 태어나신다면 어디서?" "한국에서요"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천 억이 그 사람의 신 한 편만 못합니다. "나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를 쓸거야" 이번에는 시를 쓰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사랑을 간직하는 데는 시밖에 없다는 말에 시 쓰는 내가 어리둥절했다.>
이렇게 하고서 열흘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음은 [나타샤]라는 작품입니다. 자야 여사는 흔히 보는 기생이 아니었습니다. 기생 하기 싫어서 얼마나 도망을 다녔는지 몰랐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조선어학회에서 이 여자를 동경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졸업할 무렵이 되어 아무도 오지 않고 소식이 없어서 함흥으로 갔습니다. 조선어학회 사람들이 모두 감옥에 들어갔기 때문에, 만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도저히 면회가 이루어지지 않자, 자신이 기생 출신이니까 기생을 해봐야겠다고 함흥에서 제일 큰 "함흥관"에 들어갔습니다. 함흥관에 들어간 첫날 거기에서 백석을 만난 거지요. 백석이 첫눈에 반해서 "내 마누라가 여기에 있다"고 선언했답니다. 당시 백석은 스물 여섯, 자야는 스물 둘이었답니다. 하지만 방랑벽이 있던 백석은 만주로 떠돌고, 자야는 서울로 와 명월관의 기생이 되었습니다. 이제 분단이 되어, 두 사람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운명으로 갈라놓았습니다만, 다음의 시는 시속의 화자가 백석이 되어 자야를 찾아가는 것을 상정하고 쓴 시입니다.
<나는 갔다. 백석이 되어 찔레꽃 꺾어들고 갔다. 간밤에 하얀 까치가 물어다 준 신발을 신고 갔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데 길을 몰라도 좋았다. 마당의 느티나무 아래서 젊은 여인들은 날 알아채지 못하고 차를 마시며 부처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까치는 내가 온다고 반기며 자야에게 달려갔고, 나는 극락정 마당 물 위를 밟으며 갔다. 하얀 눈이 내리면 재로 뿌려달라던 흰 유언을 밟고 갔다. 참나무 밑에서 달을 보던 자야가 나를 반겼다. 느티나무 밑은 대낮인데, 참나무 밑은 우리 둘만을 위한 밤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울었다. 죽어서 만나는 서러움이 무슨 기쁨이냐고 울었다. 한참 울다보니 그것은 장발이 그려놓고 간 그녀의 스무 살 때 치마였다. 나는 그 치마를 잡고 울었다. 죽어서도 눈물이 난다는 사실을 손수건으로 닦지 못하고 울었다. 나는 말을 못했다. 찾아오라던 그녀의 집을 죽은 뒤에 찾아와서도 말을 못했다. 찔레꽃처럼 속이 타들어갔다는 말을 못했다. 나는 말을 못했다. 찾아오라던 그녀의 집을 찾아와서도 말을 못했다. 찔레꽃 향기처럼 속이 타들어갔다던 말을 못했다.>
이제껏 섬을 떠돌아다녔지만, 저의 섬 기행은 저를 보헤미안으로 만들기보다 저에게 맑은 정신과 세상을 멀리 보는 눈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앞으로도 한 자리에 머물기보다 시의 비밀을 찾아 부단히 발걸음을 옮길 것을 약속드리며 제 강의를 마칩니다. ◈
이생진님의 '성산포'가 좋아서 이 글을 또 옮겨놓고 읽습니다..아마 며칠은 자꾸 읽고읽고 할 것 같습니다..흡사 독해력 부족한(사실임)한 초등생처럼 몇 번이고 읽습니다..그래서 이렇게 가져옵니다..수메르님처럼 같이 읽어 주시는 님이 계시면 또 반갑고요..그냥 '내 식'..이란 표현에 동감입니다...ㅎㅎㅎ
전 11월의 바다를 제일 좋아 합니다....차고,조용하고,그리고 용감해지기 시작하지요^^*^^*잿 빛 하늘을 가끔은 동반하면서.....섬은 언제나 내안에서 떠 다니는데 한번도 만나지 못하는 섬을 ....시인이 만난 섬들이 그리워 지네요....갈수없어 더둑더......^^*
첫댓글 같은 현상을 두고도 느끼는 마음의 작용은 개개인마다 다 다르겠지요. 시인의 마음을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있기나 한건지, 어떻게 하면 그럴 수가 있는지, 아니면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기는 한건지..... 그냥 내 식으로 마음에 담습니다.
이생진님의 '성산포'가 좋아서 이 글을 또 옮겨놓고 읽습니다..아마 며칠은 자꾸 읽고읽고 할 것 같습니다..흡사 독해력 부족한(사실임)한 초등생처럼 몇 번이고 읽습니다..그래서 이렇게 가져옵니다..수메르님처럼 같이 읽어 주시는 님이 계시면 또 반갑고요..그냥 '내 식'..이란 표현에 동감입니다...ㅎㅎㅎ
전 11월의 바다를 제일 좋아 합니다....차고,조용하고,그리고 용감해지기 시작하지요^^*^^*잿 빛 하늘을 가끔은 동반하면서.....섬은 언제나 내안에서 떠 다니는데 한번도 만나지 못하는 섬을 ....시인이 만난 섬들이 그리워 지네요....갈수없어 더둑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