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13강
XI. 세상 권세에 대한 복종
세상 권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관해서 바울은 특히 다음의 본문에서 가르쳤다: 롬 13:1-7; 딤전 2:1-4; 딛 3:1. 그 중에서 로마서 13장 본문이 가장 중요하다.
바울은 세상 권력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에 대해 많은 해석이 쏟아져 나왔다. 이 문제를 접근함에 있어서 13장 본문에서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보다 더 강하게 기독론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어 왔다. 그렇다면 이 로마서 본문이 문맥과 관계가 적으며 갑자기 나타난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을 전체 문맥에 맞추어 사고하고자 한다.
리덜보스는 이곳에서 많은 학자들의 의견을 나열하면서 이것을 일일히 반박했는데, 우리는 이를 다루지 않고 그의 의견만을 다룬다:
1. 롬 13:1-7은 12:1에서 시작하는 로마서 권면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2:1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일상생활에서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다. 그러므로 사도가 13장에서 말하려는 의도는 분명하다. 국가권력에 대한 순종도 롬 12:1 이하에서 말하는 영적 제사행위에 속한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보여주신 자비하심을 얻은 사람으로서 자기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 순종하는 것이 제사이다. 순종이란 하나님이 제정하신 질서에 복종하는 것이다. 로마서 13장은 12장에서 시작하는 바울 권면의 큰 맥락에서 보면, 교회는, 교회 테두리를 벗어난 일상적인 삶에서도 하나님이 제정하신 질서는 유효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받았으며, 또한 이 질서를 존중하도록 명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 권세에 순종하라는 권면은, 바울이 우연히, 혹은 지나가다가 덧붙여서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의 새로운 순종의 중요한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2. 바울이 계속해서 이방의 국가권력과 결부해서 하나님의 질서를 대단히 강조한 것이 눈에 두드러진다: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므로 세상 권세에 대하여 불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고(2), 세상 권세는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이다(4). 따라서 단순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것이 두렵기 때문만이 아니라, “양심을 위해서”도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 이 마지막 말 속에도 세상 권세에 대한 복종은 하나님이 정한 의무의 문제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사도가 세상 권세에 대해 이렇게 긍정적인 태도를 가진 것은, 세상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며, 그분이 세상을 버리시지 않았으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질서에 따라야 한다는 그의 믿음 때문이다. 세상의 권세가 자기 권세를 남용할지라도(참조: 고전 2:7-8) 바울은 이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이 세상 권세를 통해 세상에서 정의를 확립하고 질서를 잡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보고 있다.
3. 바울이 이러한 근거를 들면서 그러한 권면을 하는 것은 명백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반복해서 자연적인 삶(사회생활)에 관해 권면할 때,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연관시켜 엄격하게 말하는 이유는, 교회가 그리스도 사건을 잘못 이해해서 그때까지 유효했던 모든 규례를 그리스도 안에서 극복된 것으로(더는 지킬 필요가 없는 것으로) 오해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주가 되시므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의무와 규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 세상은 선할 때도 있지만, 때때로 우리에게 악한 것도 요구하지 않는가? 바울은 영성주의 위험 때문에 세상 권력에 복종할 것을 이렇게 강력하게 요구하게 되었다. 사도는 “각 사람”이라는 말을 본 단락에서 제일 처음에 둠으로써 이것을 강조했는데, 각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또한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3)라는 말씀도 이와 의미적으로 같은 방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 단락을 긍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아무리 교회의 “생명”과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할지라도(골 3:3; 빌 3:120), 교회의 자리와 부르심은 이 세상의 질서(규정)에 있다는 것을 가르침으로써 영성주의적 이해와 종말 기대에 대한 오해를 배격한다. 종말에 대한 기대는 하나님이 정한 현재의 질서 속에서의 삶과 관련된 것들을 상대화시키는 요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로 하여금 그 질서 속에서 더욱 더 책임 있는 태도로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4. 바울은 이 모든 권면을 위해 하나님이 세상 권력을 세우셨다는 사실 하나만을 근거 삼았다. 그러므로 이 권면은 기독론과는 관계가 없다. 그가 하나님의 질서에 대해 가르친 것은, 자기의 이스라엘 신앙, 즉 하나님은 세상 창조주시며 또한 구속주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구속 사역 가운데서도 여전히 타락한 세상의 질서를 그대로 유지하신다는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질서는 그리스도에 의해 상대화 되지 않고 오히려 강력하게 뒷받침 되고 있다.
5. 그렇다고 해서 바울은, 교회가 세상 권력에 대해 “맹목적으로” 순종하라고 명한 것이 아니며, 세상 권세는 불가침의 권세라고 선언하는 것도 아니다. 국가권력은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으로서, 자기 자신의 역할에 대해 자기 권위에 순종하면서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는 사람들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며 또한 순종할 의무가 있다. 이러한 경계가 어디에 놓여있는지 원초적으로(a priori) 자세히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울이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순종하라는 원칙(행 4:19; 5:29; 참조 22:21)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특별한 관심은, 세상 권세가 설정한 경계선 밖에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그분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교회에게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6. 고전 6:1 이하와 고전 2:8에서 나오는 국가권력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로마서 13장 말씀과 모순되지 않는다. 비록 사도가 고린도전서 6장에서 신자들이 분쟁을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가서 “성도들 앞에서 하지 않고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여” 시비를 가리는 것을 책망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로써 이방 권력과 사법기관이 불의하다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 “불의한 자”는 이곳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롭게 된 자)가 아닌 “이방인”을 의미하는데 – 그리스도인에게 자기들 사이에 일어나는 분쟁을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기들이 국가의 존속을 위협하지 않는 한 국가에 관여하지 않아도 되므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자기 자신의 부르심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자기들의 분쟁을 세상의 재판관 앞에 가져가는 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고귀한 부르심과 책무를 잊었다는 것을 불신자에게 공공연하게 나타내는 것이다(3 이하).
7. 마지막으로 고전 2:8에서 사도는 세상의 권력자들에 대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적이고 인간적인(마귀적이라고 하지 않았다) 권력자라고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로마서 13장과 모순되지는 않는다. 바울이 로마서 13장에서 다스리는 자는 언제나 정의 편에 서 있고 불의를 행하지 않는다는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
과제:
1. Covid19 때에 교회 예배를 금지하거나 상당히 제한한 정부의 규제에 대해 교회는 어떤 입장을 가져야 했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2. 교회가 차별금지법에 맞추어 설교해야 하는가?
*강의자 : 송다니엘 교수
*본 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13강은 2024년 8월 25일(주일)과 9월 1일(주일)에 실시된 부천개혁교회의 사경회와 부천개혁성경신학교의 집중강의를 겸하여 강의된 내용에 수록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