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와 이슬람의 관계
우리의 이웃나라 중국이나 일본 외에 이 세상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알고 찾아와 교제한 사람들은 과연 누구들일까? 서양사람들이 우리를 세상과 동떨어진 호젓한 ‘은둔의 나라’라고 하니, 우리들도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겨버렸으나 알고 보면 그렇지가 않다.
학계에서는 1254년 경 프랑스 루이 9세가 원나라 헌종 황제에게 파견한 사신 루브루크가 돌아가 쓴 여행기에서 ‘섬의 나라 까우레’라고 한마디 한 것이 유럽에 알려진 첫 한국 소식이고,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스페인 선교사 더 세스페데스가 1593년 12월 임진왜란 때 왜군을 따라 남해안 웅천항(熊川港)에 도착한 것이 유럽인으로서는 최초의 한국 행이며, 1627년 일본 나가사키로 항행하다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우연히 표착한 네덜란드 상선 오우베르케르크호가 한국 해안에 나타난 최초의 서양 배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루브루크보다 4~5백년, 더 세스페데스보다는 무려 7~8백년 앞서 신라에 많은 아랍인들이 오갔을 뿐만 아니라, 정착까지 했다는 기록과 더불어 신라에 관한 귀중한 사료들이 중세의 아랍문헌에 기록되어 전해오고 있다. 처음으로 한국(신라)을 알고 그 존재를 세계에 알린 사람들은 9세기 중엽의 아랍인들로서 그 역사는 1천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면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의 모습은 과연 어떠하였으며, 그들은 어떻게 신라를 기록하고 있을까?.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룩하기 60년 전, 아라비아 반도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도 모하메드의 선교가 시작되어 634년에는 전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시키고 세계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었다.
이어642년에는 페르시아에, 651년에는 당에 이슬람이 전파되면서 통일을 이룬 한반도와 접촉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무슬림들이 한반도와 접촉한 최초의 시기는 통일신라 말기 (서력 661-935)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가 당과의 협력으로 통일을 실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 또한 당나라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신라는 정치 경제 문화적 관계에서 고도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당나라와의 교류를 통하여 당시 중국의 남동부지역에 커다란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던 무슬림들은 지역적인 근접성을 이유로 바다 건너의 신라와 접촉할 가능성을 크게 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능성이 구체화되어 역사에 기록된 것은 우선 신라 사가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슬림 사가들에 의해서 이다.
9세기 중엽 이븐 쿠르다드비이 쓴 "키타브 알 마살릭 왈 마말릭"은 한반도에 무슬림 진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중국의 건너편 콴수를 가로지르는 곳에 많은 산들과 금이 풍부한 '신라'라고 불리는 나라가 있었다. 우연히 그곳에 갔던 무슬림들은 좋은 환경에 매혹되어 영구히 그곳에 정착하고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건너에는 무엇이 있는 지 알 길이 없다."
이상의 기록에서 추론되는 가정 중에 하나는 처용에 관련되는 것이다. 곧 처용이 무슬림 상인이었다는 설인데, 위의 기록과 삼국사기등에서 처용은 4명의 일행과 함께 외국에서 상륙하여 나머지는 사망하고 처용만이 생존한 실제인물이었다는 사실에 주의하여 처용의 무슬림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상의 이슬람측 기록과는 달리 한국측 기록에 나타난 무슬림들과의 최초 접촉시기는 11세기초 고려시대 초로 나타나고 있다. 고려 현종 15년 (1024년) 9월에 열라자(Al-Raza)등 100여명, 다음 해 하세라자(Hassan Raza) 등 100여명과 정종 6년 (1040년) 11월에 보나합(Barakah)등이 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9월에 Tashi라는 이방국에서 Hasan, Raza와 다른 수 백 여명의 사람들이 왔고 그들의 자국 생산품을 왕에게 바쳤다."
이들은 대식(중국음으로는 Tashih로서 아랍어의 타-지르-상인-에서 유래한 당송시대의 음역)국에서 온 사람들로서 의심할 여지없이 전형적인 무슬림들이다. 대식이라는 명칭은 12세기에 들어와 회회(중국음으로는 Hui-Hui)라는 명칭으로 대체 되었는데 이는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의 영향으로 이슬람교 명칭이 회교 또는 회회교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명칭이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다.
한국이 이슬람 세계와의 최초의 접촉들은 이상과 같이 국제무역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이는 무슬림들을 부르는 당시의 명칭 곧 대식으로도 음미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에 이슬람 종교와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 되는 시기는 고려말 조선초인 13-14세기이다.
이는 고려가 몽골 원제국의 간섭을 받으면서 몽골관리와 함께 원 제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중앙 아시아 계 무슬림들이 대거 고려로 몰려오면서 가능하였다. 이들 무슬림들은 고려에 정착하여 그들만의 종교 민족적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한국사회에 이슬람 문화의 이식에 기여하였다.
수도 개성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공동체 내에는 예궁이라 불리는 이슬람 성원이 존재하였으며 Doro라 불리는 종교 지도자들은 이슬람의 법률과 관습에 의해 예배의식을 수행하기 위해 공동체에서 선출되었다. 때때로 무슬림 지도자들은 공식적인 궁중의식에 초대되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꾸란 암송이나 왕의 장수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아랍식 Dua-기도 와 같은 그들 고유의 종교의식들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 의식들이 그 어떤 주목할 만한 영향력을 미쳤을 것이라는 주장을 뒷바침 할 만한 어떤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고려 여인과의 결혼이나 주위 한국인들과의 일상적 교류를 통해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문화적 핵심요소들이 한국 사회에 유포되고 있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결혼을 통한 접촉과 동화의 예는 흔히 오늘날 덕수 장씨의 시조로 일컬어 지는 회회인 삼가(Samga)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고려 충렬왕의 부인이 된 원 공주를 따라 1274년 한국에 온 시종들 중에서 아랍인(혹은 위구르인이란 설도 있다) 삼가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고려에 와서 높은 벼슬에 올랐고, 한국 여인과 결혼해서 충렬왕에 의해 장순룡이란 이름을 하사 받았다. 결혼을 통해 한국 사회에 동화된 무슬림 장순룡은 덕수 장씨의 선조가 되었고 당시 이름은 1277년 왕명에 의해 바뀌어 지게 되었다. 현재 이 가문의 후손들은 50.000명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그리고 삼가라는 인물의 출처에 관해 그가 아랍인이었는지 터키계 위구르 무슬림이었는지에 대해 의견들이 있다. 위구르 무슬림이었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근거는 조선 초의 기록들에서 보이는 무슬림들의 궁중 의식 참여와 사역원의 외국어 시험 과목이 위구르어 였으며 공식 외국어로서의 위구르어가 교습되었음을 감안한 것이다.
많은 무슬림들이 한반도에 정착하면서 당시 사회에 이슬람적 영향을 끼쳤다. 이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이슬람력(히즈라)의 도입과 사용의 흔적이다. 세종이 농업의 획기적 발전을 위해 역법을 정비하고자 했을 때 종래 중국의 역법은 낡고 오차가 심하여 우리 실정에 맞지 않아 중국에서 회회역법(이슬람력법)을 얻어 그 원리를 깨우쳐 새로운 여법을 완성하니 그것이 바로 순 태음력인 칠정산외편이다.
다시 말하면 칠정산외편은 세종이 완비한 한국식 이슬람력법인 셈이다. 이 외에도 조선 초기의 과학기기 발명과 과학 서적 편찬에 관련된 많은 이슬람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15세기 중엽 이후 한반도와 이슬람의 교류관계는 급격히 냉각되고 만다. 이는 대체로 15세기 이후 유럽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주도하는 지리상 발견시대로 접어들면서 지금까지 교량적 무역을 담당하던 아랍 무역권의 쇠퇴와 동북아시아의 정세 변동에 따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명의 건국에 따른 유교 사상의 부흥이 있었는데 이와 함께 무슬림들의 상대적 역할 감소가 두드러졌다.
한국과 중국과의 긴밀한 역사적 유대관계로 볼 때 이같은 중국 대륙의 변화는 한반도에도 영향을 끼쳐 1427년 유교주의 이념에 따라 이질적 문화요소에 대한 일대 소탕이 이루어 졌고 여기서 무슬림들의 활동은 상당히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이어 중국에 등장한 청조의 무슬림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 그리고 지리상의 발견 이후 동아시아에서의 유럽 해상세력이 무슬림 세력을 압도하는 국제 정치 환경의 변화도 한반도에서의 무슬림들의 고립화와 단절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절연의 시기는 20세기 초의 개화의 물결이 일어날 때지 계속되었다.
첫댓글 지식 정보를 함께 읽을수 있어 감사합니다. 서울에서의 짧은 여정 잘 마치고 다시 하노이로 가실줄 압니다. 건강하시고, 즐거운 일상 맞이 하도록 하십시요.
덕숭산의 시원한 바람과 싱그러운 내움이 아직도 코끝에 감도는 것 같은데 이곳 하노이는 연일 38도를 오르내리는 찜통 더위에 공짜로 매일 썬탠과 사우나 하는 기분으로 감사히 지내고 있습니다. 회원님 모두 건강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