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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테제
그해 여름.
광기와 흥분의 열기가 휘몰아 치던 96년의 여름은 지루했
다. 한총련의 집회로 인해 학교출입이 통제되었기에 나는
집구석에서 비디오와 책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낼 뿐이었
다. 대학에 가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예전의 흥
분과 기대도 이미 사그러든지 오래였고 그나마 기대했던 방
학도 게으르고 준비성 없는 내겐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했
다. 가끔씩 친구들을 만나러 신촌에 갈때도 있었다. 버스
에서 내릴 때부터 코끝을 찌르는 매케한 최루탄 냄새와 8월
의 불볕 더위 아래에서 두꺼운 군복과 보호장비를 걸치고
움직이는 전경들. 작열하는 태양아래 아지랑이를 일으키는
아스팔트위에서 구호를 외치고 돌을 던지는 학생들. 이런
것들이 멀찌감치 보이곤 했다. 비록 내가 다니는 학교이고
나와 같은 학생들이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텔레
비젼의 뉴스프로를 볼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내가 하
는 것이라곤 전경들에게 학생증을 보여주고, 정답게 지나가
는 커플들을 무심하게 쳐다보는 것,그리고 지겹도록 자주
만난 친구들과 잠시 흥겨움에 취해 보는 것 정도였다. 남
는 것은 돌아오는 버스안에서의 두통뿐이었다.
만남.
8월의 밤은 무더웠다. 이불은 이미 제쳐 버렸고 창문과
방문까지 열어놓았는데도 온몸의 땀은 그칠 줄을 모르고 흘
렀다. 몸은 피곤하지만 찝찝함 때문에 잠은 좀처럼 오지 않
았다. 오늘, 어제 그리고 아득한 과거의 기억들이 다시 반
복적으로 연상될 뿐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잠을 청
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천천히 숫자를 세는 방법
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런 생각도 안 하는 상태, 즉 無의
상태를 시도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하
기로 했다. 솟아나려는 무의미한 기억들을 억누르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잠시 정신을 잃는 것처럼 가벼운 꿈
을 꾼다. 하지만 그것은 절반정도 인위적인 꿈일 뿐이다.
나는 꿈을 꾸는 시늉중이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다.
어딘가 다른 곳에서. 고독한 방을 벗어나 어딘가 다른 곳
에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러나
꿈은 이내 깨버리고 텅 빈 천장아래 나는 여전히 혼자 어둠
과 씨름하고 있었다.
한참을 뒤척이다 갑갑함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잠을 포기
하고 일어나 버렸다. 욕실에서 차가운 물을 콸콸 틀어 정신
없이 세수를 한다. 어차피 잠이야 깬 것 같아 속옷들 마저
벗어버리고 찬물로 샤워를 했다. 더위는 어느새 사라지고
물줄기가 닿는 곳마다 뼈 속까지 시린 냉기가 느껴진다. 샤
워를 마치고 타월로 몸을 닦으면서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바
라봤다. 예전에 비해선 몸이 좀 좋아진 것 같다. 아니, 그
냥 느낌이 그런 것 같다. 거울에 눈을 가까이 갖다 대고 건
너편의 또 다른 얼굴을 유심히 관찰한다. 언제나 느끼는 것
이지만 욕실의 백열등 조명아래에선 사람얼굴이 실제보다
준수하게 보이는 것 같다. 너무 밝은 조명이 비쳐지는 곳보
다는 약간은 어두운, 그래서 약간은 안보이게 감출 수 있
는 곳에서 사람들은 더 아름답게 보인다. 거울 속 얼굴의
입을 관찰하고 코를 관찰하고 볼에는 작은 티들이 새로 생
겼음을 발견했다. 여드름 같지는 않고 요즘 바르는 스킨
이 피부에 안 맞아서 생긴 부작용 같다. 그리고 눈 속을 들
여다본다.
전율…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오싹함..
거울 속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분명 나
와 똑같게 생겼고 내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이고 있었
지만 내가 아니었다. 눈동자는 내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
다. 불안한 느낌에 서둘러 몸을 닦고 욕실을 나왔다. 내 방
으로 돌아와 창가에 재떨이를 올려놓고 담배를 한 대 꺼내
피었다.
조용하다.
8월이 끝나갈 무렵 장마가 돌아왔다. 아침부터 비가 오
기 시작하더니 해가 지자 천둥번개까지 동반한 폭우가 쏟아
졌다. 폭우덕분에 오랜만에 시원한 밤이었다. 그러나 무더
위 대신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와 바람에 덜컹거리
는 소리가 여전히 나를 잠 못 들게 했다. 또다시 길고 고독
한 밤이다. 이번엔 마음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세어 본다.
하나, 둘,.... 잠은 오지 않는다. 이미 이백을 넘게 세고.
삼백 쯤 셀 무렵 졸음이 서서히 다가온다. 끈기 있게 계속
센다. 삼백 마흔 넷, 삼백 마흔 다섯, 삼백 마흔 여섯...
삼백 마흔 일곱......삼백......
밖에는 여전히 비가 오고 있다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시끄럽다… 소음… 나는 시끄러운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곤 했다. 예전에 살던 아파트는 건물 바로
앞에 8차선 대로가 나 있었다. 차가 막히는 날, 베란다에
서 내려다 보면 아래서 기어가는 차안의 사람들이 뭘 하는
지 관찰할 수 있었다.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는 사람, 조수
석에 앉아있는 친구인지, 애인인지 알 수 없는 사람과 얘기
하는 사람… 이렇게 차가 막히는 날 정말로 괴로운 것은 끊
이지 않는 경적소리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끄러울 때는 방
안에서 창문을 닫고 귀를 틀어막는 것보다는 아예 베란다
로 나와서 차들을 구경하는 게 낫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
냥 그게 차라리 편하다. 누군가 TV켰다. 누구지…? 집안에
는 나 밖에 없을 텐데… 소파에 누군가 앉아있다. 아니, 반
쯤 비스듬하게 누워있다. 마치 로마황제처럼 나태한 자세
로. 누구지…? 까맣고 긴 머리에 헐렁한 반팔 티셔츠. 그리
고 마치 남자옷같은 츄리닝. 방금 샤워를 했는지 머리에 물
기가 있다. 난 베란다 문을 열고 마루안으로 들어가려 했
다.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는다. 안에서 잠겨있다. 난 유리
문을 두들겼다. 열어줘 ! 그녀가 고개를 든다. 나를 쳐다
본다. 그녀의 얼굴. 그녀의 눈…
천정이 보인다.
낯익은 천정이다.
겨우 들었던 잠에서 깨어났다. 다시 잠들려면 얼마나 오래
있어야 될까.
그런데…
고독하지 않다. 곁에 누군가가 있다.
나는 순간적으로 놀라며 황급히 주위를 살펴본다. 어둠
에 익숙해진 눈에 주위가 또렷이 보인다. 발 아래의 방문
과 옷장, 내가 누운 자리 양쪽으로는 책상과 창문... 변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분명하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자리에서 튀어오르 듯 일어난 나는 형광등스위치를 눌렀
다. 형광등이 켜지기 전 내부물질이 방전되면서 주위가 번
쩍거린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댄 체 한동안 방안을 살펴본
다. 마치 처음 보는 방처럼.
이런 경험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꿈속에서 누군가와 대
화를 했고 꿈을 깼을 땐 왠지 모르게 그녀가 여전히 주위
에 있는 것처럼 느꼈졌다. 그러나 아련한 꿈의 기억속으로
부터 그녀의 온기, 은은한 향내, 아늑한 분위기만 생각날
뿐이었다. 어떤 때는 햇살이 화창한 봄날 잔디밭에서 그녀
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비오는 거리에서 함
께 우산을 쓰고 걷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과 나누었
던 얘기가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전혀 기억할 수 없었다. 답
답했다.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있는 상태에서도 시간은
흘러간다. 무더운 8월이 지나갔고 학교는 다시 개강을 맞이
했다. 8월의 치열한 싸움의 흔적은 며칠 새 흔적없이 사라
져 버렸고 캠퍼스에는 다시 여유와 즐거움이 충만한 듯 했
다.
그동안 공포는 점차 호기심으로 변했다. 꿈속의 그녀는
과연 누구일까? 그녀는 나의 자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일까,
아니면 과거에 좋아했던 사람의 기억이 형상화되어 나타나
는 것일까? 이런 수많은 물음들을 던지면서 매일같이 전날
밤 꿈에서 만난 그녀의 얼굴을 더듬어 보려고 노력했다. 그
러던 어느날 삐삐에 낯선 번호가 찍혔다.
" 하영씨인가요 ?“
전화기를 통해 내 또래 남성의 쾌할한 목소리가 들려왔
다. 같은 학교의 법학과 3학년인 김정환이라며 자기를 간단
히 소개했다. 그리고 언제 공강시간에 학생회관에서 잠깐
만날 수 있다면 자기가 빵과 우유라도 사겠다고 한다.
“ 무엇 때문에 저를 만나시려는 거죠 ?”
김정환이라는 사람은 어이없다는 듯 내뱉듯이 말한다.
“ 만나고 싶어하는 건 그쪽인데요. ”
별 황당한 사람도 다 있군…
“ 만나고 싶지 않습니까? ”
만나다....만나다... 만나다니 누구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거지?
누구를...
접근.
그는 정말로 우유와 빵을 사왔다. 11시 십분쯤 건장한 체
격의 남자가 양손에 빵과 우유를 두 개씩 들고 다가왔다.
그는 마치 나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인 것처럼 반가워하
며 다가왔다.
“ 9월인데도 날씨가 왜이리 더운지...”
빵과 우유를 내 앞에 던지듯 내려놓은 뒤 손수건을 꺼내
얼굴과 목, 가슴까지 후벼 닦았다. 말이 94학번이지, 외모
나 행동은 서른 살 정도는 된 아저씨 같았다.
“ 그녀는 누구죠? ”
그는 단팥빵을 한입 왕창 베어물고 우유의 마개를 딴다.
“ 저도 이름은 모르죠. ”
그리고는 입안의 빵을 우걱우걱 씹어 먹는다.
“ 아마 귀신일걸요. ”
갑자기 그는 아는 친구라도 발견한 듯이 내 등뒤를 향해
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계속 물어봤다.
“ 그녀는 어디에 있죠? ”
“ 우선 드시고 얘기하죠 ”
그리고는 다시 빵을 한입 베어 문다.
“ 그녀는 누구죠 ? 왜 내 꿈에 나타나는 거죠 ? 그리고
…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죠 ? ”
김정환이 입안의 빵을 우유와 함께 힘겹게 삼키고 입을 열
었다.
“ 우선 그녀의 이름이 뭔지, 몇살인지, 어디에 살았었는
지... 그것은 저도 모릅니다. 정 궁금하다면 당신이 직접
묻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단지 그녀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며 지금 바로 이곳에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 정도입니다. ”
“ 이곳에...? ”
“ 그렇죠, 바로 당신안에. ”
“ 내안에...? ”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계속했다.
“ 꿈속의 당신은 이미 그녀와 절친한 사이입니다. 꿈을
깨고 나면 당신이 기억을 못할 뿐이지요. 당신은 다시 잠
만 들면 전날밤의 의식으로 돌아가 그녀를 기다립니다. 그
리고는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아침이 되면 헤어지
죠. 그녀가 왜 당신을 선택하고 어떻게 당신안으로 들어왔
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단지 그녀가 지금 당신 안에 있고,
당신이 보는 것을 함께 보고 당신이 듣는 것을 함께 듣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
잠시 정적이 흘렀다. 김정환은 내 입장을 이해한다는 듯
한 표정으로 내가 생각하는 동안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
고 먹다 남은 빵을 서둘러 먹고 우유를 비웠다. 참 신기하
다. 영화나 소설에서 보면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주인
공은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당황한다. 하지만 난 별로 그
렇지 않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일을 맞이한 것처럼. 그
저 사태를 빨리 파악하려 할 뿐이다. 대중매체를 통해 이
미 간접적인 경험을 충분히 했기 때문일까 ?
“ 제게 위험한가요? ”
“ 그건 뭐라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죽은 영혼들의 심리
는 대게 평면적입니다. 극도로 우울하거나 외롭다든지...
경우에 따라서는 세상 모든이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똘똘 뭉
친 경우도 있지요. 만약 그 영이 극도의 증오심을 품은 영
이라면 지금 그쪽은 매우 위험한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
한 영들은 자기가 불행한 만큼 남도 불행해지길 원하고 실
제로 그런 일을 초래하니깐요. 쉽게 말하면 물귀신 작전이
죠. ”
그리고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지 물었
다. 나는 아는대로 대답해 줬다. 아침마다 어렴풋이 기억나
는 그녀의 이미지. 깨끗하고 청순하고... 향긋한 냄새가 나
고... 그리고 함께 있을때의 그 아늑한 느낌...
“ 이번의 경우는 그다지 위험한 것 같지 않군요. 아마도
그 영은 단지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당신 안으로 들어온
것 같습니다. ”
“ 그런데..."
“ 예? ”
“ 당신은 어떻게 나에게 생긴 일을 그토록 잘 알고 있
죠? 당신은 누굽니까? ”
그는 가볍게 웃었다.
“ 우리는 일상적으로 먹고 마시는 음식물들, 그리고 생활
용품들이 어떤 화학구조로 이루어 지고 얼마나 길고 복잡
한 과정을 통해 생산되었는지 의식하지 않고 살죠. 사람들
은 자신의 경험만으로 만들어진 틀에 세상을 끼워맞쳐 단순
하게 파악하려 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세상은 그저 자연스
럽게 물 흘러가듯이 유지되는 것 같지만. 그 과정은 상상
이상으로 복잡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의 결실이
죠. 저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고 앞
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같은 사람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그리고 놀랄만큼 가까운 곳에 있습니
다. ”
혼란스럽다. 이사람은 도데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
까 ?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 일단 그녀를 만나 보시죠. 그녀를 만나는 것은 생각보
다 쉽습니다. 노력해 보세요. 다음에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
다. ”
그는 자기가 먹은 우유팩과 빵껍질을 들고 일어났다. 그리
고 사람들속으로 사라져 갔다.
나는 그녀와 만날 방법을 궁리했다. 사실 만나기는 이미
매일 만나고 있었다. 그녀와 내가 만나는 것은 결코 현재
진행형이 되지 않고 언제나 희미한 과거의 일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날 이후 며칠간 길을 걸을 때나 버스 안에서
나 심지어 교수의 강의를 듣는 동안에도 그녀를 만날 방법
만을 생각했다.
그러던 중 고 3 시절 ‘가위’를 눌렸던 경험이 기억났다.
사람들중에는 ‘가위’를 눌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복받은 사람들이다. 가위를
눌린다는 것은 몸이 매우 피곤한 날 잠자리에 누웠을 때 환
청이 들린다거나 호흡이 곤란한 것, 또는 의식을 차린 상태
에서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유승준의 노
래제목인 ‘가위’도 자르는 가위가 아닌 아마 이 가위를
뜻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 형제들은 비교적 가위를 많이 눌
리는 편이었다. 특히 큰 형이 재수시절에 많이 겪었다고 한
다. 큰형 말에 의하면 늦게까지 공부하고 잠자리에 드는 날
이면 사람들의 웃음소리 같은 환청과 호흡곤란 등을 경험했
고 심할때는 어둠속에서 미소짓는 파란 얼굴의 윤곽까지 봤
다고 한다. 그정도로 심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고 3 때 비슷
한 경험을 몇 번 했었다. 몸이 몹시 피로할 때 잠자리에 누
우면 귀에서 서서히 사람들의 아우성소리. 그리고 얼굴근육
이 부들부들 떨리곤 했다. 왠지 두려워져 일어나길 간절히
바라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만에 몸을
움직여 일어나 보면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러
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이런 현상들이 귀신과 관련되
어 있다고는 생각지는 않는다. 그저 몸이 극도로 피로해서
이런 착시, 착란 현상이 일어나고 뇌의 명령을 신체각부위
로 전달해야 할 신경이 일시적으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대학에 온 뒤론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었다. 잠도
못 자야 할만큼 각박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어쨓든 이번
에는 가위눌림을 역으로 이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나는 그녀를 매일 만난다. 하지만 꿈속의 나는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목표는 나의
의식을 잃지 않고 그대로 꿈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
고 지금 내가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들. 그것들을 물어보
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난 밀려오는 기대와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난 다음날부터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
다. 우선 몸을 극도로 피로하게 만들어야 했다.
며칠간 잠을 자지 않았다. 밤새도록 책을 읽고, 통신을 하
고… 사흘째 되던날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그
야말로 녹초가 되어 있었다. 바로 내가 기다리던 순간이
온 것이었다. 난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 사지에 힘을 빼
고 쭉 피자 온몸이 풀리는 것처럼 이불위로 녹아 들어간
다. 그리고는 감미로운 수면의 유혹이 다가왔다. 하지만
난 의식을 지키고 있어야만 했다. 불행히도 그점에 대해선
특별한 계획이 없었다. 의식이 점점 엷어져 갔다. 육체는
끊임없는 이완의 늪으로 빠져들며 아늑해 졌다.
‘그녀를 만나야 한다.’
생각만 해도 왠지 모르게 가슴 설레이는 청순함, 향기로운
냄새, 그리고 따뜻함. 그 실체를 내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
다. 나의 정신은 거짓말처럼 맑아지고 서서히... 내가 수면
으로 빠지고 있음을 관조하듯 느끼고 있었다.
느껴진다...
그녀가 곁에 있음이 느껴진다...
그것은...
나만의 아름다운 공주님을 만나기 전의 설레임과 더불
어...
거울속의 내 모습을 보고 놀랄때의 그 두려움이 섞인 느낌
이었다.
...?
그녀가 곁에 있다.
교류.
난 우리집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 식탁은 새 집으
로 이사를 오면서 어머니가 우리 형편에 다소 무리하게 장
만한 고급식탁이었다. 우아한 목조무늬와 은은한 색깔이 품
위있게 조화가 된 식탁이었다. 식탁위에는 접시가 있고...
접시위에는 껍질을 벗긴지 꽤 시간이 되었는지 약간 색깔
이 바랜 사과가 몇 조각 있었다. 누군가 포크로 사과를 찍
어든다.
난 바로 오른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을 쳐다본다. 방금
머리를 깜았는지 약간은 촉촉하고 뭉쳐진 긴 쌩머리에 하
얀 피부를 가진 예쁘장한 여자애이다. 정말로 방금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헐렁이는 반팔티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사과
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 난 하영이야. ”
난 그 애에게 대뜸 소개했다.
그녀는 약간 깜짝 놀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눈빛
이 반짝이는데. 약간은 백치처럼 멍청해 보이기도 하고 투
명해 보이기도 했다.
“ 알고 있어. ”1
당연하다는 말투이다.
“ 나는 전에도 너를 여러번 만났었지? ”
그녀가 세 조각째 사과를 찍어들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 난 너와의 만남을 기억 못해. 그러니 너에 관해 다시
한번 소개해 줘. ”
그녀는 사과를 삼킨 뒤 말했다.
“ 재희. ”
“ 몇살인지도 가르쳐 줄래? ”
“ 스무살. 하지만 태어난 연도는 너보다 훨씬 빨라. ”
그녀의 이름을 알았다. 난 그토록 바라던 일이 서서히 이
루어지고 있음에 흥분되고 기뻤다.
“ 넌 내안에 속에 있지? ”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 하지만 너는 아냐. ”
“ 어떻게 들어왔지? ”
잠시 말이 없다.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맑고 투명하면서
도 약간은 멍한 눈빛. 마치 아름다운 백치를 보는 듯한 느
낌이었다.
“ 네가 한강다리에서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을 때. ”
난 당황했다. 저애를 보고 있었다니...
“ 제작년 가을 말야. ”
그애가 귀찮다는 듯이 내뱉듯 말한다. 제작년 가을이라
면...
내방의 천장이 보였다. 난 학교에서 돌아온 옷차림 그대
로 이불위에 누워 있었다. 시계를 보니 저녁 8시 정도였
다. 두시간 반정도를 잤다. 그러나 그녀와의 대화중 생각나
는 부분은 체 몇분도 안된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말은 그
녀가 제작년 가을에 내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제작
년이라면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그제서야 난 생각났다.
난 그 또래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나름대로의 고민
이 있었고 모든 것을 깨끗이 끝내버리고 ‘무’로 사라져
버리는 죽음이라는 해결책을 생각해 보기도 했었다. 아주
일시적이었지만. 그래서 버스가 한강다리위를 건널 무렵 정
거장에서 내려 다리 가운데로 달려 갔었다. 그 위에서 한참
동안 수십미터 아래 출렁거리는 강물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
냈었다.
‘ 그때 들어왔었군...’
하지만 내가 그녀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불과 한 달도 안
되었었다. 2년동안 그녀는 내 안에서 침묵하고 있었단 말인
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들어왔었지? 그리고 지금은 왜
나와 접촉하는 것일까?... 나에게서 무엇을 원하는 것일
까? 아직도 찾아야 할 해답들이 많았다. 하지만 다시 그 어
려운 준비를 하기엔 나로서도 일단 지켜야 할 기본생활이
있었다. 나는 그녀처럼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
었다.
며칠간 아침에 그녀를 체온을 느끼지 못했다. 꿈을 전혀
기억못하거나 무언가에 쫓기기만 하는 엉뚱한 꿈이 기억나
곤 했다. 난 김정환을 찾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법과대 사
무실을 통해 어렵게 그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
“ 기억하고 말고요, 안 그래도 연락오기를 기다리고 있었
습니다.”
“ 그녀를 만났습니다. ”
그리곤 난 그녀와의 만남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만나
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부터 만난 뒤에도 풀리지 않은 의문
점들까지 모두를 얘기해 주었다.
“ 그녀를 만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나요? ”
수화기에서 잠시 말이 없었다.
“ 그렇게도 만나고 싶습니까? ”
“ 예. ”
“ 만나지 않은 것이 서로에게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그
저 기다리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입니다. ”
“ 나중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 그녀를 만나야 합니
다. ”
“ 당신은 지금 호기심과 허왕된 기대에 사로잡혀 있습니
다.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인가요? 그녀의 존재가 감미로운
유혹으로 다가오던가요? 하지만 당신이 실제로 살아가야 하
는 곳은 꿈속이 아닙니다. 햇살이 따뜻하고 산새들이 지저
귀는...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을 만날 수 있는 자의식 속
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날씨는 후덕지근하고 지나쳐 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하영형을 마치 사물 대하듯 무관심한 이
곳, 그러한 모든 고통과 외로움을 이겨내며 억척스럽게 살
아야 하는 바로 이곳 현실입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안될 도
피는 시작하지 않는 것이 현명합니다. ”
이 사람은 도데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가. 마치 자
기가 내 마음을 훤히 알고 있다는 듯이. 그 누구도 나만큼
나 자신을 잘 알 수는 없다. 불쾌하다.
“ 순수하지 못한 은밀한 유혹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전 그
녀를 원합니다. ”
잠시 말이 없었다.
“ 그녀를 불러 보시죠. 그녀는 대답할겁니다. ”
그리고 수화기를 끊는 소리가 들렸다.
‘ 그녀를 불러보라...’
잠시 그 말의 뜻을 생각해 보았다. 그냥 말 그대로인 것
같다.
‘ 재희 ! ’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뒷사람이 공중전화박스 문을 두들
겼다. 난 전화카드를 빼들고 나왔다.
나는 다시 예전의 방법으로 그녀를 만나기로 했다. 대신
실험 리포트를 못 내고 퀴즈시험 답안지를 백지 내는 희생
을 치러야 했지만. 그녀는 내가 자던 이부자리 머리 아래쪽
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무릎을 가슴팍으로 모아 팔로 감
싸고 앉아 있는 모습은 상큼해 보이기도 했지만 외로워 보
이기도 했다. 머리카락과 피부는 여전히 촉촉히 젖어 있는
모습이었다.
“ 다시 만나게 되어 기뻐. ”
재희가 가볍게 웃는다.
“ 난 너와 친해지고 싶어. 그리고 자주 만나고 싶어. 하
지만 이런 방법으론 자주 만나기가 힘들어. ”
“ 그래서? ”
재희가 약간 퉁명스럽게 묻는다.
“ 김정환은 네가 언제나 나와 함께 있다고 했어. 그리고
나를 듣고 있다고 했어. ”
재희는 그냥 쳐다보기만 한다.
“ 다음에 내가 너를 부르면 대답해줘. ”
아무말도 없다.
“ 제발. ”
“ 어렵지 않아. 하지만 하기 싫어. ”
“ 이유가 뭐지? ”
잠시 침묵이 흐른다.
“ 말하기 싫으면 말할 필요 없어. 어차피 지금 내게 가
장 중요한 것은 너 뿐이니깐. ”
“ 후회하게 될거야. ”
“ 할 땐 해야겠지. 그렇다고 피해가기는 싫어. ”
재희는 잠시 침묵을 지킨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
니면 나에게 대답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생각
할 시간을 주는 것일까. 창밖은 어두웠다. 방안을 한번 둘
러봤다. 모든 것이 현실의 내가 잠들어 있는 방안과 조금
도 틀리지 않았다.
어둠속에서 내 방 천장이 보였다. 그때만큼이나 증오스러
운 천장이었다.
‘ 대답을 듣지 못했어. ’
시간은 아직 자정도 안되었었다. 난 일어나 불을 켰다. 재
희가 앉아있던 자리엔 대충 접어놓은 우산이 내팽개쳐져 있
었다.
다음날 수업시간에는 오로지 재희 생각뿐이었다. 그녀가
앉아있던 자세. 그녀의 하얀 얼굴. 나를 바라보던 투명한
눈동자. 분홍빛 매니큐어를 깜직하게 발라놓은 가는 손가
락.
버스는 시청을 지나가고 있었다. 아직 5시 정도밖에 안 되
었지만 퇴근길이 슬슬 시작되는지 버스안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난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재
희를 생각하는데 방해가 됬기 때문이다. 아무생각없이 창밖
을 보던 나는 다시한번 마음속으로 조용히 불러봤다.
‘ 재희... ! ’
맨 뒷자리 고등학생들의 떠드는 소리만 들린다. 마음 밑바
닥이 한동안 침묵의 늪에 잠긴다. 그녀는 정말 나와 함께
있는 것일까. 내가 이토록 원하는데도 왜 침묵하는 것일
까.
‘ 나 듣고 있어. ’
귀를 통해 실제로 들리는 것 같기도 하면서 동시에 꿈결
에 들리는 것처럼 희미한 대답이 느껴진다. 아니, 너무나
순간적이라서 잘못 들은 것 같기도 했다.
‘ 너 방금 대답한 거니? ’
‘ 응. ’
그리고 그녀의 맑은, 약간은 비웃음 같은 웃음소리가 들렸
다. 난 이제 원하는 것을 얻게 된 것이다.
그 후 하루에 서너번씩 잠들지 않은 상태에서 재희와 대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봐도 대답이 없을 때 역
시 여러번 있었다. 그때 왜 대답을 안했는지는 물어보지 않
았다. 사실 우리 관계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에 관해서는 전
혀 얘기를 안했다. 이를테면 너는 왜 내 안에 있는지, 귀신
이 되면 기분이 어떤지, 그리고 나와 대화하지 않는 시간에
는 내 안에서 뭘 하고 있느냐는 등. 그런 이야기는 일체 물
어보지 않았다. 약간의 호기심을 위해 다시 그녀와 단절될
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버스안에
서 창밖의 경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하고. 교수가 입에
서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가르치고 있다는 등. 언제나 가
볍고 즐거운 대화만 했다. 난 그것으로 만족했다.
주말이면 그녀와 함께 야외로 놀러가곤 했다. 우리는 기차
안에서, 산길을 걸으면서, 그리고 시골의 허름한 수제비집
에서 식사를 때우면서 쉴 새 없이 얘기했다. 내가 보는 것
은 그녀도 보고, 내가 먹는 것은 그녀도 느꼈었다. 왕복 기
차표도 한 장만 끊고 수제비도 한 그릇만 시켜도 되었기 때
문에 경제적으로는 절약이었다. 그녀의 성격은 약간은 짓궂
으면서 명랑했다. 가끔씩은 나를 정말로 당황하게 만들면
서 재미나다는 듯 까르르 웃곤 했다. 확실한 것은 그녀 역
시 나와 대화하는 것을 무척이나 즐긴다는 것이다. 꿈같은
시간들이 흘러갔다.
꿈속에서도 그녀를 만나고 그녀와 교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꿈속에서 나의 자의식을 깨운 것인지, 나의 잠재의
식이 스스로 통제력을 갖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꿈속
에서의 데이트는 현실보다 실감은 떨어지지만 훨씬 낭만적
이고 아름다웠다. 나 또는 그녀가 원하는 곳 어디든 우린
갈 수 있었다. 거친 파도가 밀려와 부서지는 겨울 바닷가에
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사랑을 속삭이기도 했고 산새들
이 손등과 어깨위에 내려와 노래하는 동화속의 그림같은 들
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녀의 피부는 감미
로울 만큼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말했
다.
“ 너와 함께 가야 할 곳이 있어….”
슬픔.
1.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그녀는 줄곧 나에게 이야기를 하
고 있었다. 서울 지하철의 편리함, 자기는 중학교때부터 지
하철을 타고 서울을 구석구석 쏘아 다녔다는 이야기, 그녀
의 고등학교 친구들….많은 것들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정
작 중요한 것.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고 당장 다음 어
떤역에서 내려야 할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물어볼 때마
다 웃음으로 일관할 뿐.
“다음 역은 방배, 방배역입니다…”
“지금 내려…”
내가 걷는 동안 그녀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여기서 횡단보도를 건너… 저기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
지하철 역을 나와 15분 가량 걸었다. 우리가 결국 도착한
곳은 우면산 아래에 있는 경남 아파트였다. 302동.
“저기 벤치에 가서 앉어.”
시간은 저녁 6시쯤이었다. 우면산 너머로 해가 지면서 하늘
이 붉게 물들어 갔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리
고 고요하다.
“하늘이 참 예쁘지?”
“응….”
한대의 차가 천천히 다가온다. 검은색 쏘나타. 다소 구형
이긴 그런대로 중형차다. 차가 내가 앉은 맞은 편 주차장에
서 멈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로 주차시키고 잠시뒤
차문이 열린다. 한 남자가 내린다. 50살을 약간 넘은 듯.
허름하긴 하지만 단정한 복장에 약간은 굽은 허리이다. 얼
굴에 비해 몸이 상당히 노쇠해 보인다.
그 사람이 천천히 내게로 걸어온다. 난 약간 당황스러웠
다. 저 사람이 왜 내게로 오는 거지.. 뭐라고 말을 해야하
지…난 그 사람의 질문도 예상못하면서 답변부터 생각하려
했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는 나를 지나쳐 옆의 아파트
출입구로 들어간다. 그리고 나오지 않는다. 다시 고요하
다. 아까처럼. 바람이 불고 길바닥에 뒹굴던 신문지가 약
간 밀려 날아간다. 다소 춥다.
나도 이유를 모른다. 무엇 때문인지. 내가 왜 슬퍼해야 하
는지. 알수 없는 눈물이 내 볼위를 타고 내린다. 마치 냄비
의 끓는 물이 넘치듯 뜨겁게 흐른다. 가슴 한 구석이 저려
온다. 아주 소중한 것을 잃은 사람처럼.
“이만 가자….”
그녀가 말했다.
돌아오는 기차안에서도 그녀는 내게 말했다. 넌 오늘 자
기 아버지와 인사한 것이라고. 그리고 오늘 만나지는 못했
지만 자기의 다른 가족들을 소개했다. 어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언니 한명. 언니도 원래 그때쯤 올 시간이었는데 회
사가 바쁜지 늦는 것 같다고. 자기가 진작에 연락했더라면
만날 수 있었을 거라며 명랑하게 얘기했다.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도 나의 미소를 보았을 것이다. 지하철 유리창
에 비친 모습을.
2.
10월이 되었다. 날씨는 약간 쌀쌀해 졌다. 그녀와의 즐거
운 만남은 그때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하루중 내가 나누
는 대화의 절반 이상은 그녀와의 대화였다. 주위 풍경을 같
이 구경하며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그녀의 살아있던 시절
얘기, 학창 시절 얘기, 또는 오늘 밤 꿈속에서 어디를 갈건
지 의논하기도 했다. 마치 주말계획을 짜는 연인들처럼. 그
러면서 나는 그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
가 공무원이라는 것과 학창시절 공부는 중간정도 했으며
학교 때부터 남자친구를 여럿 사귄 적이 있다는 것. 그리
고 XX여대 불문과를 1년정도 다녔었다는 것 등. 그러나 그
녀에 죽음에 관해서만큼은 얘기하지 않았다. 나 역시 물어
보지 않았다.
잠들지 않은 시간의 대부분을 그녀와 보내면서 자연히 주
위 친구들, 가족들과의 대화량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나에겐 그녀만으로 충분했다. 그녀는 이미 내 생활
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하루는 김정환이 우리집에 전화했다. 요즘 그녀와의 일을
상세히 들은 그는 말했다.
“ 하늘에서 떨어지는 행복은 무엇인가 대가를 요구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단지 공짜
가 아니라는 것, 그것만은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김정환의 말은 어느 늦은 오후, 버스안에서 현실로 나타나
기 시작했다. 저녁 노을이 천천히 움직이는 버스안으로 스
며 들어오고 있었다. 앉아있는 승객들은 대부분 졸거나 멍
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가 약간 속력을 내
며 달리기 시작할 무렵. 귓가에 아주 또렷이, 그리고 갑작
스럽게 들려오는 것. 그것은 아기 울음소리였다. 너무도 크
게 들려서 마치 바로 뒷자석에 아기를 안은 아주머니가 한
분 앉아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뒤에 앉아 있
는 사람은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 뒷자리에도, 다시 뒷자리
에도... 버스 어디에도 어린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은 없었
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울음소리는 버
스를 내려 집을 향해 걸어오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그리
고 그 소리는 그저 엄마의 주위를 끌어보려는 갓난아기의
천진한 울음소리가 아니라 마치 호흡이 곤란한 듯, 아니면
다리나 팔이 차바퀴에라도 끼어 고통스러운 듯 절규하는 비
명에 가까운 울음소리였다. 한동안 잠잠해 지던 소리는 밤
늦게 숙제를 마치고 재희를 만날 것을 기대하면서 잠자리
에 들자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까지 계속 들렸
는지는 기억할 수 없다.
“ 요즘 아기 울음 소리가 들려. ”
학교 잔디밭에 앉아있는 재희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 너는 뭔가를 알고 있지? 내게도 가르쳐 줘. ”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잔디밭 넘어 교내 한길에는
폴로티에 면바지, 또는 검은 기지바지에 이스트 팩 가방을
맨 전형적인 요즘 대학생들이 바삐 지나가고 있었다.
“ 아기 울음 소리가 그렇게도 듣기 싫어 ? ”
그녀가 내뱉듯이 말했다. 약간 냉랭하게.
“ 싫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미쳐버릴 것만 같아. ”
그녀는 나를 뚫어지게 쏘아 보았다. 눈매가 약간 매섭다.
나는 그녀가 귀신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한순간 오싹해 지
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를 두려워 하기엔 이미 너무
친해져 있다.
“ 생각을 해봐. 24시간, 시도 때도 없이 아기 울음 소리
가 들리는데. 그것도 아주 절규하듯이 귀가 찢어질 정도로
크게 들려. “
“ 너는 어떻게 …아기가 왜… 왜 우는지는 생각해 보지
도 않고 그저 듣기싫다고만 말할 수 있니 ? 더구나 그 앤
내 아이인데 ! ”
그녀 눈에 눈물이 글썽거린다. 자기 아기라고…? 잠시 당
황했던 나는 곧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전혀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그녀의 죽음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었다.
‘ 가슴아픈 사연이 있었군…’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흐느껴 울고 있었다. 어찌나 서럽
게 우는지 어깨가 들석거린다. 난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 그런데… 아기 울음 소리가 왜 내게 들리는 거지…?”
그녀가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본다. 얼굴이 눈물범벅이었
다. 마치 산 사람처럼.
“ 혹시… 네 아기가 너와 함께 내 안으로 들어온 거니?
“
“ …”
황당한 노릇이다. 내 몸속에 귀신이, 그것도 하나가 아니
라 둘 씩이나 들어와 있다니.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
다.
“ 아니… 아기는 내 안에 있어. “
나는 그제야 이해를 할 수 있었다. 혹시 독자들은 진작에
이해한 것을 나만 모르고 있었나 ?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녀
는 아기를 낳기 전에 한강물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미처
태어나지도 못했던 아기는, 마치 그녀가 내 안에 있듯이,
아기는 그녀안에 있었던 것이다. 예전부터 줄곳. 그리고 그
녀가 내 안으로 들어오면서 자연적으로 함께 들어오게 되었
다. 내안의 그녀안의 아기…그렇다면 내가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녀도 함께 들을 수밖에 없었겠군. 그런 것도 모르
고 혼자 고생하는 마냥 죽는 소리를 했으니 화낼 수 밖에.
하지만 나로선 좀 억울하다. 그녀는 죽은 사람이지만 난
산 사람이고. 그녀는 분명 아기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
고 있지만 나는 사실 무관하지 않은가.
“ 어떻게…그렇게 이기적일 수가….”
그녀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잠시
말랐나 싶었던 두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인다. 어떻게 된거
지…?
“ 너…내 생각을 읽은 거야? ”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알람시계가 요란하게 울어댄다.
3.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한동
안은 울음소리가 들릴때마다 극도로 짜증이 났었지만 이제
는 그런 단계를 지나 거의 무감각해졌다. 이러다가 정말로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기도 했다. 공부가
손에 잡힐리 없었고 주위 모든 것이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가슴속에는 알수없는 분노와 증오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내 생각을 읽고 있다… 약간 모호하면서도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 사실 이건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생전 남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나만
의 은밀한 세계. 꿈을 그녀와 나눠 갖게 된 걸로 모잘라 내
가 순간순간 하는 생각 전체가 그녀에게 개방되어 있다는
것.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그녀가 내 생각을 읽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창밖에는 넓은 논과 들판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나
는 그녀에게 물어봤다.
“ 너 말이야… 내 생각을 읽고 있니 ?”
창이 넓은 밀짚모자 같은 것을 쓰고 발할한 체크무늬 남방
을 입고 있는 그녀. 한순간 얼굴이 경직되다가 다시 활짝
웃으면서 대답한다.
“ 아니야. 난 니 생각을 국어책 읽듯이 낫낫이 읽을 수
는 없어. 하지만 느낄수는 있지. “
“ 느낄 수 있다고 ?”
“ 그래… 네 생각을 자세하고 알 수는 없지만. 느낌으로
전해져. 마치 춥고 더운 것처럼. 너의 기분과 너의 고민과
너의 소망…그런것들…”
“ 흠… 재미있겠구나…”
그녀가 까르르 웃는다. 재미있다는 듯이.
“ 나만 할 수 있는게 아냐. 나한테 느껴지는 만큼 너도
느낄수 있어. 나의 마음을. 어차피 우린 한 몸이잖아.”
한 몸이다…그래 하나의 육신을 공유하고 있으니 당연한
말이지. 하지만 다소 헷갈린다. 한 몸이라… 그리고 나 역
시 그녀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니...
“ 호~ 너 내마음을 엿볼려고 집중하고 있구나 ? “
그녀가 장난치듯 내 얼굴을 살피며 말한다.
“ 억지로 하려고 하면 더 안되. 나도 사실 처음엔 몰랐
어. 네 마음이 내게 느껴지리라곤. 네 안에서 워낙 오래 있
다 보니 어느날 깨닫게 된거야. 네가 느끼는 것을 나도 느
끼고 있다는 걸…그냥 마음을 편하게 먹고 있는 그대로 느
껴봐…”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여전히 즐겁다. 적어도 꿈속에서
는. 하지만 눈이 떠지는 순간부터 다시금 들려오는 아기의
울음소리. 간간히 끊기기도 하지만 거의 하루종일 들린다
고 봐야 할 것이다. 이제는 그녀와 함께할 꿈속의 시간을
위해 깨어있는 순간을 버티는 격이 되었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갔다. 그 날은 모처럼
하루종일 아기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은 날이었다. 혼자서 소
주를 두 병 정도 비우고 나니 슬슬 취기가 돌면서 어지럽
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기계공학이라는 전공에 관해 열심
히 토론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들이 얘기를 듣는 척
하면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친구들의 대화가 점점 멀게 느
껴지면서 나만의 침묵의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재희가
눈믈을 흘리고 있다... 왜 내가 가슴이 쓰라리지? 왜 가슴
이 이토록 끓어 오르지? 그 갓난애기는 무엇 때문에 그토
록 처절하게 울고 있는 것일까... 태어나지 않은 아기에게
도 죽음은 서러운 것일까...
이상하게도 멀리 벽쪽에 앉아있는 학생들의 대화에 귀가
이끌린다. 특히 목청이 큰 남자가 한명 있었다. ...생긴 거
야 A급이었지. 그런데 걔가 애를 배어가지고... 가시나가
센스도 없이 그런거 하나 알아서 관리 못하고... 어쨌든 그
래서 딴 애를 찾아봤는데 걔만 못하더라구...아, 그거? 몰
라... 나중에 혼자 병원에 가서 지웠나 봐... 돈이야 어떻
게든 구해서 했겠지...응? 아냐... 걘 얼굴만 예쁘지 부잣
집 딸년은 아니었어...내가 알게 뭐야, 어디서 빌렸는지,
훔쳤는지...
무엇때문일까 ? 손이 떨린다.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뜨겁
게 끓어오르는 것. 세상을 불살라 버릴듯한 분노와 사지가
찢어지는 증오가 끓어올랐다. 가슴 밑바닥부터 스며나오는
듯한 신음을 길게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다가오는 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난 그의 얼굴을
발로 걷어 찼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주먹으로 얼
굴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의 일행들이 당황하며 일어나
나를 밀쳐내려 했다.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
면서 양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끈질기게 늘어잡고 무릎으
로 찍어 올렸다. 순간 퍽하는 소리와 함께 순간 정신이 아
찔해졌다. 뒤늦게 달려온 친구들이 쓰러지는 나를 받아주었
다. 코에선 붉은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친구들과 저쪽
일행들이 옥씬각씬 다투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쪽이 사과하
는 상태인데 상황이 너무 거칠다 보니 서로 음성이 점점 커
진다. 저 죽일 새끼 !... 목청 큰 사내의 고함소리가 들려
온다. 난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했다. 그때 가슴팍에 강렬
한 통증이 느껴진다. 명치를 정통으로 채인 것 같았다. 온
몸으로 퍼지는 통증에 바닥에 웅크린 체 꼼짝도 할 수 없었
다. 발길질은 몇번 더 계속되었다.
‘ 약하다... 너무 약해...’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덩어리가 이글거렸지만 추잡하
고 더러운 세상을 불살러 버리기엔 너무도 약했다.
‘ 이 더러운 것들...’
고개를 들고 가장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옆테이블의 맥
주병이었다. 본능적으로 그쪽에 손길을 뻗었다. 그리고 다
시 의식을 차렸을 때... 손목을 타고 팔꿈치까지 길게 흐르
는 핏 줄기. 그 끝에 쥐여있는 맥주병 역시 붉은색이었다.
갈 등.
파출소 유치장안의 밤은 시간이 무척이나 더디게 흘렀
다. 10월의 유치장 바닥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마치 한겨
울에 밖에서 지새는 듯 했다. 부모님들이 오시고. 조사를
받고. 다음날 난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에 합의를 봤는지
물어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보고 요즘들러 혼
자 히죽히죽 웃고 가족들하고 얘기도 안 할 때부터 알아 봤
다며 있는대로 퍼부으셨다. 난 아무 대답도 않고 듣고만 있
었다.
그 뒤로 이상하게 아기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애석
한 것은 재희의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꿈도 예전
같지 않았다. 무더웠던 8월의 여름밤처럼 재희의 희미한 이
미지만 남아있는 꿈뿐이었다. 답답했다.
눈이 내린날 난 김정환을 만나러 법대로 찾아갔다. 나를
반갑게 맞아준 김정환은 다짜고짜 지난번에 자기가 빵을
사 줬으니 이번엔 나보고 맥주를 사라고 졸라댔다. 우리는
학교근처의 싼 술집에 가 맥주 네 병을 시켰다. 대충 얘기
를 들은 김정환은 여전히 유쾌하게 지껄여댔다.
“ 생각보다 터프한 분이셨군요. 그래도 2주 진단만 나왔
다니, 맥주병으로 쑤신 거 치고는 운이 좋았습니다. ”
“ 이런... 오해하지 마세요. 전 중학교 때 이후로 생전
싸워본 적도 없습니다...”
“ 그런 분이 처음 본 사람을 그렇게 늘씬하게 두들겨 패
다니... 그리고 깨진 맥주병으로 찌르기까지 하고... 놀랍
군요.”
“ 저도 이해가 안되네요. ”
김정환이 웃음을 거두고 다소 정색을 하며 말했다.
“ 이번 일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저쪽과 합의를
봤다고 해서 이번일이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아직 풀어야
할 매듭이 있습니다. ”
“ 무슨 말씀이시죠? ”
“ 하영형도 신기하게 아시겠지만 그때 당신을 그렇게 난
폭하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죠.”
난 김정환의 얼굴을 응시하였다.
“ 적어도 그 친구에게 처음 달려들 때의 하영형은 자신이
었을지 모릅니다. 그것도 장담할 수 없지만요. 그러나 맥주
병으로 상대방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하영형 내면에는 자신
의 분노뿐만 아니라 남자에게 버림받고 서럽게 죽어간 재
히,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태어날 기회
마저 박탈당한 그녀 아들의 분노도 함께 있었습니다. ”
“ 그렇다면 결국 그 두 명 때문에 제가 유치장 신세를
진 셈이군요. ”
“ 그렇죠. 더구나 그 두 번째 영은 사회에서 최소한의 윤
리나 가치관조차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저 자기 존재가 부
당하게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한 강한 울분과 분노만을 지니
고 있을 뿐입니다. 매우 위험하죠.”
“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
“ 아기의 영은 재희에게 일체로 붙어있습니다. 유일한 방
법은 재희를 돌려 보내는 방법뿐이죠. ”
“ 그건 못합니다. 전 그녀 없이 못 삽니다. ”
“ 신중하게 생각하세요. 제가 지금 당장 재희를 쫓아내거
나 어쩌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그녀는 당신이 원할
때면 언제든 내보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선택입니다. ”
“ … “
“ 아름다운 그녀에 대한 달콤한 유혹 때문에 결단을 못 내
리고 시간을 끌 경우 당신에게는 파멸만이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다소 으시시하고 공포스러우면서도 로맨틱한 그리
고 비극적인 소설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
“…”
“ 결단을 빨리 하셔야 합니다. 어쩌면 이 소설의 바로 다
음장이 비극의 결말의 대단원일 수도 있거든요. 이 소설은
아마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짧을 지도 모릅니다.
“
나는 생각했다. 나의 인생… 나의 가족, 나의 미래, 나의
꿈…그리고 그녀.
“ 어떻게 하면 그녀를 내보낼 수 있죠? “
“ 우리 어렵게 생각하는 것도 사실 알고보면 아주 쉽게
해결되는 수가 많죠. 여기 계약서가 있습니다. 빈칸에 당신
의 이름과 학교, 학년 그리고 주소, 연락처를 적으세요. 그
리고 지시에 따라 그녀의 이름, 이건 당신이 알고 있는 이
름이겠지요. 그 이름과 그녀를 만난 시기와 과정을 적으세
요. 아주 상세하게. 그 밖의 것들은 지시대로 적으면 됩니
다. “
“ 신기하군요…난 굿이라도 한판 벌여야 될 줄 알았는
데. “
그가 약간 웃으며 말한다.
“ 사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제 선배들은 정말 무당을 고
용했었죠. 이젠 옛날 얘기입니다. 얼마 안 있으면 웹 상에
서 신청하면 처리되는 시스템도 개발될 걸요.”
그리고는 재미있다는 듯이 혼자 껄걸 웃는다.
“ ….그런데 이 서류를 작성하면 그녀는… 그녀는 어떻
게 되는 겁니까? ”
“ 서류의 지시대로 기입한뒤 뒷면의 주소로 부치세요.
단 등기로 부쳐야 합니다. 우편물이 도착한 시기부터 5일
이내로 그녀는 사라질 겁니다. 아들과 함께.”
“ 사라진고요? 내게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라질
뿐이라고요?”
“ 하하…떠난다고요 ? 어디로 ? 저승의 세계로? 그런것
은 존재하지 않아요.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속에서나 존재하
죠.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사람죽은 것이나 길거리의 개가
죽은 것이나 본질적으로 다를 것 없습니다. 둘다 생명활동
이 정지하고. 후세의 생태계를 위해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다만 존재하는 것은… 이
미 사라졌어야 할 것이 불필요하게 남아있는 경우죠. 본인
의 불합리한 처신으로 인해. 바로 그녀와 아들처럼요. 그들
은 이미 몇 년전에 사라졌어야 합니다. 그게 자연의 순리이
고 모두를 위하는 길이죠.“
사라진다… 마치 글씨를 지우개로 지우듯…
“ 사실 미리 얘기 안 했지만 전 이 분야에서만 7년을 일
해왔죠. 고등학교때부터. 군대에 있을 때도 저의 본분은 변
함없었죠. 전 전문가입니다. 그녀는 당신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나와 함께 있는 동안은. 그녀
는 우리를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당신이 나와 헤어
질 때까지, 당신 내부의 깊숙한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지
요. 왜냐면 그녀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거든요. 그녀는
새벽녘, 동이 틀 때 잠시 사고가 정지됩니다. 아무리 당신
안에 숨어있더라도 육신이 없는 혼령이 일출을 볼 수는 없
기 때문이죠. 그때 서류를 작성하십시오. 그리고 아무 일
도 없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세요. 그녀의 응답이 없
을 때까지. 조심하셔야 합니다.”
조심해라…조심…약간 두렵다.
각성.
봄이 돌아왔다. 겨울철 내내 화석처럼 굳어가던 길가의 빙
판도 녹아버리고. 햇살도 이젠 그런대로 따스해졌다. 해 학
년을 맞이하는 캠퍼스. 지난 여름의 광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전히 밝고 명랑한 대학생들. 그들 사이에 내
가 있다.
불과 반년의 일이었는데 마치 몇 년이 지난 것 같다. 그
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동안 믿지 못할 일이 얼마나 많
이 있었는가? 20년간 살아와도 별로 새로울 것이 없던 인생
에. 지난 몇 달간 몇번씩이나 내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갖고
지금껏 도데체 무엇을 믿고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왔는지 혼
란을 겪어야 했다. 오래 전에 보았던 영화가 생각난다.
‘초원의 빛’ . 눈부신 햇살에 반짝이는 초원처럼 아름답
던 젊은 시절. 그 빛을 잃고 현실적인 세상을 배워나가는
주인공들. 느낄 수 있다. 나 역시 달라졌음을.
김정환을 만나러 법대로 찾아갔다. 그는 로비에서 기다리
고 있었다. 우리는 근처 벤치에 앉아 얘기를 시작했다. 자
판기 커피 한잔씩 들고.
“ 하영형, 얼굴이 아주 바싹 말랐군요. 마음 고생이 심했
나 봅니다. “
언제나처럼 그가 쾌활하게 말한다.
“ 하긴요… 지난 몇 달간은 제게 몇 년과도 같았습니다.
“
“ 그래도 여건이 나이지면 금방 다시 젊어질 겁니다. 하영
형은 아직 군대도 안 다녀왔잖아요. 젊음이란 언제나 희망
을 가질 수 있다는 것, 그런 것이 아닐까요.”
여전히 명랑한 사람이다.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역겹다.
“ 제가 정환씨를 만나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길 바랍니
다.”
난 긴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아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가
다소 굳어진 표정으로 말한다.
“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때는 제 말을 제대로 이해한 걸
로 알고 있었습니다. 도데체 뭐 때문에 마음이 바뀐 겁니
까 ? “
나는 가볍게 웃었다.
“ 저는 당신에게 돈을 준적이 없습니다.”
“ 무슨 말이죠 ? ”
“ 잘 아시겠지만. 나는 당신의 고객이 아닙니다. 당신
의 그동안 내게 접근하고 나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리
고 지금 이렇게 나와 벤치에 앉아 있는 것도 저를 위해서
가 아니죠. 오로지 당신의 고객을 위해서죠. 당신에게 돈
을 주는 고객.”
그의 표정이 약간 경직된다.
“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저는 하영형에게서 돈을 받은 적
이 없고 사실 내가 하영형을 도와주려는 것도 그렇게 하라
고 지시받았기 때문이지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은 아니죠. 하
지만. 결과적으로는 전부 하영형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왜냐고요 ? 하영형의 아버지는 평생동안 일을 하며 회사가
번창하는데 일익을 담당했고 매달 세금을 내며 사회인으로
써의 의무를 다해왔습니다. 그리고 하영형 역시 앞으로 아
버지처럼 교육을 받은 뒤 졸업을 하고 직장에서 배운 지식
을 써먹으려 일을 하고 거기서 번 돈으로 후세를 이어 갈
겁니다. 제가 당신을 도와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
다. “
나는 웃었다. 소리 내서 아주 통쾌하게. 그와 내가 만나면
언제나 긴장하는 것은 내 쪽이고 명랑하고 여유있는 태도
는 그쪽이었다. 하지만 이젠 위치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다. 이젠 그가 모르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
“ 저를 혼동시키려 하는군요. 그 말이 꼭 틀린 말은 아니
죠. 하지만. 나는 이제 당신이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고
있어요. 우리 아버지가 그랬듯이 나 역시 대학을 졸업한 뒤
에 직장을 갖고, 평생을 노동에 허덕이다가, 노년에는 아무
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피곤한 늙은이로 주위의 눈치를 보
며 늙어갈 겁니다. 그리고 땅에 묻혀 사라지겠지요. 물론
그 동안에 나의 전철을 밟을 후세를 양성하여 언제가는 그
아이가 나 대신 누군가를 위해 일하게 만들겠지요. 당신의
고객이 원하는 것, 그것은 어제와 같은 내일입니다. 진보
토 후퇴도 없는 반복의 연속. 그 안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지켜가는 게 그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어떠
한 이질적인 요소도 존재해서는 안 되겠지요. 태어난 사람
은 생산력이 없는 동안 보호 받으며 적당한 교육을 받다
가, 시기가 되면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도 모르는 채 열심
히 땀을 흘리고… 더 이상 노동가치가 없게되면 주위의 소
외 속에서 사라져 가는 것. 흙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바
로 당신의 고객이 원하는 것이며 당신 역시 저와 같은 처지
의 사람이죠. 인정하기 싫겠지만. “
그가 내 말을 듣고 있다. 아마도 대답할 말을 찾고 있으리
라.
“ 어처구니가 없군요. 제 주위에도 하영형 같은 친구들이
많이 있어요. 나름대로는 책을 꽤 읽었다고 생각하고 자기
생각만을 주장하는 녀석들이죠. 나름대로 이론적으로는 그
럴 듯 하지만 결국엔 전부 말장난에 지난지 않는 개똥철학
을 하나씩 끼고 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자기생각만을 앞세우
려 하죠.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도데체 하영형이 원하
는 게 뭐죠? 그 꿈속에나 존재하는 여자와 결혼이라도 할
생각인가요? 당신 부모님들께는 뭐라고 설명할 거죠? 그리
고 근본적으로 그런 비정상적인 생활이 지금처럼 각박한 사
회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
“ 물론 힘들겠죠. 하지만 노력할 겁니다. 우선을 부모님
을 설득하는게 가장 큰 문제겠죠. 힘들것이고 상당한 시간
을 필요로 한다는 것,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가능
한 것은 아닙니다. 무슨 일이든 일단 방향을 결정하면 방법
은 있기 마련입니다. 단지 두려워서 시도도 해보지 않고 물
러서는 것, 그게 바로 우리를 구속하는 당신 고객의 실체입
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이 뭔지 알고 있고 두려움에 그
것을 버리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 역
시 저를 사랑합니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와 완벽한 일체
를 이룬다는 것, 그것도 서로가 원하는 존재와 일체, 이것
은 내 평생 다시는 얻을 수 없는 축복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에도 아기의 울음소리는 들리고 있지만 앞으로는 나아질 겁
니다. 당신이 예전에 말해죠. 귀신의 심리는 평면적이라
고. 이번의 경우는 아닙니다. 그녀는 변하고 있습니다. 그
녀가 나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우리는 서로를 변화시키
고 있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증오와
분노로 찬 존재가 아닙니다. 저를 사랑하고 우리의 아름다
운 미래를 꿈꾸고 있습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그녀의 마음
을 느끼기에 알 수 있습니다. 우린 함께 할 겁니다. “
더 이상 그와 함께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가방을 들
고 일어섰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 예전에는 정환씨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
고 살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저역시 혼자가 아닙니다.
저와 같은 고민을 하고,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그리고 저
와 같은 결심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
그가 빙그레 웃는다. 마치 나의 험난한 앞날을 축복이라
도 하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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