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유럽의 인테리어와 가구는 고대 이집트에서 현대에 이르는 근 5천년이라는 장구한 역사 속에서 풍토조건, 민족문화, 사회조직, 생활양식 등의 제 조건에 영향을 받으면서 각양각색의 형태와 양식을 형성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역사적 유구의 대부분은 주로 상류계급의 소유물로서 발전하여 온 것인데 그들은 권력자의 지위나 권위를 표현하는 성격의 것이었다. 그러나 산업혁명에 따른 근대시민사회가 성립된 18세기말부터는 시민계급의 인테리어와가구가 점차 디자인 활동의 중심과제가 되고 장식적인 것보다 생활을 돕는 실용성과 기능성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즉 인테리어와 가구문제가 소수 지배계급의 전유물이 아니라 대중의 생활 속에 침투하여 온것을 의미한다. 생활의 급속한 변화, 생활형태의 기계화, 과학기술의 발전 등에 의하여 디자인 문제가 조직적으로 취급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었다. 이 장에서는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인테리어와가구의 양식적 발전을 고찰함으로써 인테리어디자인의 역사를 개관키로 한다.
2. 고대(The Ancient Age)
유럽문화의 원류를 형성하는 고대 애급의 주택과 가구, 메소포타미아지방의 기구, 그들의 양식을 이입하여 훌륭한 주택과 가구를 만들어 낸 희랍, 고대사회에 있어서 가장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한 로마인들의 주택과 가구를 역사적으로 살펴보자.
1)이집트(Egypt)
풍요로운 나일강의 수윈과 태양의 혜택으로 이집트는 기원전 3,000년경에 이미 국가가 세워지 고 파라오(Pharaoh)라 부르는 국왕을 비롯하여 귀족들은 문화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궁전이나 귀족들의 주택은 나일강의 점토를 소재로 햇볕에 말린 흙벽돌로 건조 되었으나 나일강의 정기적인 범람으로 인하여 거의 전부가 유실되고 말았다. 그러나 고대도시 아마루나 에 남아있는 유구(遺構)에 의하면 넓은 땅에 순림이나 정원으로 둘러싸인 저택에서 살았던 귀족이나 지배계급은 실내에서 의자를 사용하였고, 반면에 서민들은 땅바닥에 앉는 생활을 했다. 더구나 전제국가인 이집트는 사회계급에 따라서 실내의 생활방식이 달랐음을 알 수 있었 으니, 예컨대 제 18왕조의「투탄키아멘」(Tut-ankhe-men)의 분묘에서 왕이 소유하고 있던 금박 에 은이나 보석을 장식한 왕좌, 소의자, 걸상, 침대, 뒤주, 상자, 조명구 등이 발굴되었음을 들 수 있다. 의자나 침대의 다리에는 동물 의장이 사용되었고 가구의 표면에는 조각이나 상안(象眼) 이 사용되고, 가구는 그것을 소유하는 사람의 지위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투탄카아멘의 왕좌(이집트) ]
[ 카르낙 신전의 모형도(이집트) ]
2)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메소포타미아문화」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발달하였다. 이 지역은 석재가 드물기 때문에 주로 햇빛에 말린 흙벽돌이 건축재로서 사용되었으며 아치(Arch) 구조가 발달하였다. 이 지역의 가구는 이집트와 거의 같은 시기에 발생한 것으로 보이나 의자, 탁자, 침대 등의 다리가 선반으로 가공된 솔방울 모양의 조각과 펠대에 소응돌이 형을 새긴 점 등의 특색을 보이고 있다. 당시의 유적으로서는 앗시리아의 사르곤왕(B.C.772 ~705 ) 이 코르사바드에 세운 궁전이 알려져 있는데 이슐바니팔(B.C. 662~627)의 부조「향연도」에는 침대에 누운 왕이 왕비와 전승의 축연을 벌이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이 침대에서 음식을 먹는 습관은 뒤에 희랍이나 로마의 생활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3)그리스(Greece)
서구문화의 발생지라 할 수 있는 그리스는 기원전 6세기경까지만 하더라도 애급에서 이입된 이집트풍의 장식적인 가구가 대부분이었으나 기원전 5세기경 자유시민사회가 이룩되고 중정형식의 쾌적한 주거가 보급됨에 따라 합리적인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그것의 표준형이란 마치 한옥의 ㅁ자집같은 중정에 회랑을 두르고 거실, 침실, 주부실, 서고, 객용실과 노예실 등을 배치한 합리적인 주택이었다. 따라서 실내의 장식과 설비는 간소화되어져서 생활에 필요한 의자, 스툴, 탁자, 카우치, 체스트 가구 등 극히 필요한 가구만을 실내에 비치했다. 벽면에 물건을 거는 습관이 있던 희랍에서는 수납용 선반이 사용되지 않은 반면 의류나 귀중품의 보관은 뒤주나 작은 상자가 주로 사용되었다. 희랍가구의 특색은 의자와 침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오클라디아스」(Okladias) 라 부르는 접는 식의 의자는 관리용이고「디프로스」 (Diphros) 라는 4각식(四問式)의 실용적인 의자「클리스모스」(Klismos) 라 부르는 여성전용의 기능적인 소의자, 게다가 식사나 사교, 밤의 휴식에도 사용된「클리네」(KlMe) 라 부르는 침대 등은 장식적 요소가 제거되고 생활에 도움을 주는 실용적 기능을 단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희랍인들은 가구를 장식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일상생활에 적합하도록 실용적인 디자인을 한 것이 많은 유구에서 실증되고 있다.
[ 식사와 휴식에 사용된 크리네 라는 침의자(그리스) ]
[ 그리스 여성이 사용한 크리스모스(B.C 4세기경) ]
4)로마(Rome)
아테네문화의 우위를 인정한 로마인들은 헬레니즘시대의 주택형식은 물론 그들의 기술과 미술의 모든 형을 모방했다. 이러한 경향은 주거나 가구에도 적용되어 조각과 장식을 가미한 호화로운 고대양식의 실내나 가구를 완성했다. 폼페이의 주택유구가 보여주는 것과 같이 바닥에 깐 대리석의「모자이크」와 벽면을 장식한「식주」(師柱)나「프레스코화」가 신화를 주제로 하여 화려하게 처리되었다. 가구에는 목재 이외에도 브론즈나 대리석이 사용되어 로마의 실내나 가구의 양식은 지배계급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적 형식이 되어 있다. 이러한 귀족주택의 호화로움에 비하여 서민의 주거는 벽돌조의 조잡한 고층아파트로서 가구의 설비도 없이 한 방에 여러 가족이 잡거하는 형편이었다.
[ 로마 판테온 의 실내(A.D 2~3세기) ]
3. 중세 (The Middle Ages)
1)비잔틴(Byzantine)
로마제국이 붕괴됨에 따라 빛나는 로마의 인테리어와 많은 가구작품은 소멸되었으나 콘스탄티 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 도읍을 둔 비잔틴제국에서는 고대로마의 생활양식이나 가구의 전통 이 계승되고 그것에 오리엔트의 장식을 가하여 소위「비잔틴양식의 가구가 유행하였다. 비잔틴의 가구는 사본, 상아조각, 모자이크화 등의 자료를 통해 알려졌으나 로마시대의 가구에 서 볼 수 있는 곡선형의 다리나 반원형의 등받이 등의 자유로운 형태미가 상실되고 딱딱한 직 선형태의 작품이 많다. 이 시대의 주요한 가구로는 당시의 건축요소를 본따서 철판제 형태로 나무에 씌운「세인트 피 터의자」와 청동제의「다고베르의 의자, 그리고 상아조각으로 장식된 「막시아누스의 사교좌」 등이 손꼽히고 있다.
2)로마네스크(Romanesque)
한편 서유럽에서는 게르만민족의 지배가 확장됨에 따라 고대의 사회조직이나 예술의 전통은 상실되고 신분제도에 기인한 봉건사회와 그리스트교 문화가 보급되었다. 이러한 배경하에 5~6세기경이 되는 중세초기에 로마적 요소가 토착문화와 혼화되어「로마네스크양식」이 탄생하게 된다. 11~12세기는 사원건축이 눈부시게 진행되는 시기로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을 중심으로 발달하고 영국에서는 노르만식이라는 양식이 이에 해당한다.「로마네스크양식」은 비잔틴의「바질리카양식」이 발달한 것으로써 로마의 아치식 건축을 개량한, 벽이 두껍고 장중한 미를 표현한 것이며 교회건축으로는 창문이 적고 컴컴한 실내에 내부조각도 신비스런 표현을 한 것이 많다. 가구로는 목재를 선반가공한 간소한 형태의「농민의자」와 스칸디나비아식의「바이킹의자」, 그리고 철이나 청동장식의「목조궤」가 대표적인 것들이다.
3)고딕(Gothic)
세기말에서 13세기초에 걸쳐서 새로운 사원건축양식으로서「고딕양식」(Gothic Style) 이 시대의 실내장식은 화려하고 밝은 색조에다 여러 가지 색을 사용하는 마무리가 유행되기 시작했다. 13세기부터 영주들의 주거는 성곽형식에서「매너하우스」(Manor-house) 라 부르는 순수한 생활을 하기 위한 주거형태로 변하였다. 생활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가구의 종류는 증가하고 그 제작기술도 발전하였다. 특히 생산분야에 있어서 길드(Guild) 조직이 발생하여 석공, 목수, 조각사, 직물사 등 직종별로 길의 세분되어 생산의 분업화가 실시되었다. 가구제작에 있어서도 표면을 장식하는 조각사는 가구를 조립하여 완성하는 목수와는 다른 조직이었기 때문에 중세의 가구는 극히 기술적으로도 높은 수준에 달한 것이었다. 고딕가구의 특색의 하나는「레일조」에 앓은 판을 삽입하는 소위 레일프레임에 판자붙임의 기법이 가구제작에 채용된 결과, 가구표면에 자유롭게 정교한 조각을 하기가 용이한 동시에 대형가 구의 제작이 가능케 된 것이다. 가구디자인은 고덕건축의 형식에 따라 수직을 강조한 맷시브한 형태와 풍부한 조각이 표면에 이용된 점에 특색이 있다. 표면의 장식조각에는 Linenfold, Tracery, Flamboyant를 특히 좋아하였다. 등받이가 높은 의자, 지붕이 있는 의장의재 침대 등은 어느 것이나 소유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성격을 표시하고 있다. 평시 사용하는 의자는 판자붙임의 걸상인데 중세의 의자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모두 좌부에 덮개가 붙어있는 상자형 으로 되어있는 것이 특색이며 의자가 물건을 덮는 기능을 겸하고 있었다.
4. 근세(The Modern Age)
1)르네상스(Renaissance)
「르네상스」란 재생이란 의미의 이탈리아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고 고대 문화를 재생시키고자 일어난 운동을「르네상스」라 부른다. 그것은 그리스도교회와 봉건제도 에 의한 지배체제에서 벗어나서 문화의 창조는 물론 정치, 경제, 생활양식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전개된 개혁운동이다. 15세기 초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이 운동이 시작되어 국내는 물론 프랑 스, 핀란드, 독일과 영국 등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 양식은 각국의 풍토, 민족성, 문화, 생활양식 등의 조건에 따라 각기 특색 있는 양식으로 발전되었다.
①이탈리아 - 15세기초 이탈리아 토스카니지방의 피렌체(지금의 프로렌스) 에서 르네상스운동 이 일어났다. 건축가 부르넬레스키(Filiippo Brunelleschi)에 의해 설계된 도시중심에 있는 꽃의 성모사원의 무우드라보는 고대 로마양식의 부흥이「르네상스양식」의 심벌인 것이다. 이 양식은 나중에 로마나 베네치아(지금의 베니스) 에 전해지고 16세기에는 유럽전역에 전파되 었다. 이탈리아의 부유한 귀족들은 팔라쪼(Palazzo) 라 부르는 석조의 호화저택을 지었고, 그 실내에는 식주(飾柱) 나 격자형 천정으로 장식되고 요소요소에 고대장식으로 조각을 하고 모자 이크 붙임의 대리석 바닥에 화려하게 싼 융단을 깔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테리어디자인은 귀 족사회적 지위나 권력을 나타내기 위한「시메트리」와 「프러포션」이 강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구의 배치방법도 철저하게 대칭적으로 처리함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탈리아의 가구 중에서는 특히 의자의 디자인에서 우수한 것이 많다.「단테의자」(Dantesca) 나 「사보나롤라」(Savonarola) 라 부르는 접는 식의 안락의자는 로마의 「셀라 쿠루리스」 (Sella Curdis)를 기본으로 뼈 팔걸이와 등판을 덧붙인 곡선다리의 의자인데 디자인 적으로도 모던하고 식당, 서재, 침실 등에서 특별히 애용된 것이다. 그 외에도 수납용 상자, 가각식의 대형 탁자, 방석과 등받이를 아름다운 천으로 싼 걸상 스가벨로(Sgabello) 라 부르는 작은의자, 장식 선반, 침대, 기도대 등이 르네상스시대의 가구들이다.
②프랑스 - 15세기말엽 프랑소와 1세 시대에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양식」이 수입되어 풍텐블 로궁(Fontainebleau)의 건축이나 실내, 그리고 가구에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 르네상스의 대표 적인 인테리어는 풍테블로궁의 프랑소와 1세의 갤러리인데 이는 고전양식과 시메트리의 법칙으 로 철저하게 통일되었다. 천정은 격자천정(格子天井) 에다 벽면의 하부는 「월닛트」의 조각판자를 붙이고 상부는 플라스 터 바름위에 「프레스코화」로 구성했다. 바닥에는 쪽매널이 깔려져서 호화로운 분위기를 더욱 빛나게 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이 되면서 이탈리아가구에서 보인 지나친 장식성이 배제되고 정확한 프러포션의 아름다움이 중시되어 프랑스 나름의 세련된 양식으로 발전되었다. 부인용 의자, 테이블, 의상용 벽장, 침대디자인에서 그와 같은 특색이 인정된다.
③영국 -「르네상스양식」을 가장 늦게 받아들인 나라이다. 16세기초 헨리 8세 시대로부터 건 축, 실내장식, 가구분야에 이탈리아「르네상스양식」이 도입되었으나 본격적인 「르네상스양 식」이 전개된 것은 엘리자베스 1세(1558~ 1603)시대부터이다. 중세풍의 귀족저택 (Manor H- ouse) 은 이탈리아풍(Palazzo)의 호화저택으로 변하고 판자붙임의 고덕풍 의자는 상자에 의한 경쾌한 4각식 (四脚式) 의자로 바뀌었으며 시트나 등받이는 천으로 감싸게 되었다. 침대는 멜론형의 기둥과 캐노피를 두른 호화스런 「엘리자베스 양식」이 유행했다. 여기서「엘리자베스양식」이라 함은 영국의 르네상스 가구를 총칭하는 말이다.
[ 노틀담 사원의 실내 ]
[ 비그놀라가 작도한 건축도면 ]
2)바로크(Baroque Style)
「바로크」란 이탈리아어의 Barocco (찌그러진 진주) 에서 유래한 말인데, 르네상스 고전양식 에 충실한 구성인데 반하여 「언밸런스」하면서 생명력에 넘친 17세기 유럽의 미술양식에 적 용된 명칭이다. 「바로크양식」은 로마 바티칸시에 조영된 성베드로 대성당의 그리스도교적 권위를 나타내는 양식으로서 생긴 것이다. 이 양식은 17세기 후반에 프랑스, 독일, 핀란드, 스페인 및 영국 등 유럽각국에 보급되었다. 「바로크양식」의 인테리어와 가구는 17세기 후기로부터 18세기초에 이르는 유럽제국의 궁정을 중심으로 한 왕후귀족층에 유행한 격조 높은 귀족취미적인 양식으 로 볼 수 있다.
①이탈리아 - 르네상스말기에 기교에 젖은 예술가들이 엄격한 고전의 범주에서 벗어나려는 시와「바로크양식」(Baroque Style) 을 낳았고 그 발흥의 중심은 이탈리아의 로마였다. 로마법황은 카톨릭 교회의 권위를 세계에 나타내기 위해 바티칸법황청에 웅대한 성 베드로 대성당을 세웠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성당의 큰 돔(dome), 건축가 베르니니(Giovanni Lo- renzo Bernini) 에 의한 호화스런 조각과 색채로 된 인테리어와 외부광장의 다이내믹한 공간구 성은 대표적인「바로크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보통 사람을 압도하는 것 같은 디자인의 호화 로움은 17세기 카톨릭 교회의 인테리어에 한하지 않고 왕후나 귀족의 저택실내나 가구에도 나타나는 공통된 성격이었다. 특히 가구디자인에서는 대형의장상, 식기선반 등의 정면장식에 비틀어 놓은 것 같은 기둥이라든가 격식에 구애되지 않고 두꺼운 부조법(浮彫 法) 이 쓰인다는 점이「바로크양식」의 특징이다.
②프랑스 - 이탈리아에서 비롯된「바로크양식」은 17세기 후반 프랑스의 루이 14세 시대에 베 르사이유 궁전의 정원, 건축, 실내의 종합적인 디자인에서 훌륭하게 완성되었다. 루이 l4세는 프랑스의 국위와 왕의 권력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베르사이유(Versailles) 에 웅 대한 궁전을 세웠고 왕궁의 실내장식과 가구 장비품을 제작하기 위해 1663년 왕립 고블랭공장 을 설립하고 직물공장 외에 가구공장도 병설했다. 여기에는 당시 프랑스의 명공들이 많이 모여 들었는데 미술장식가인 샤를르 르브랭(Charles Lebrun)은 공장지배인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후기 르네상스나 「바로크양식」을 연구하고 그러한 의장을 베르사이유 궁전 의 실내와 가구디자인에 응용했다. 바닥에는 대리석과 나무가 사용되고 벽면에는「고블랭직」 을 붙이고 실내에는「바로크양식」의 힘찬 장식효과가 강조되었다. 베르사이유궁전 중앙에 있 는 루이 14세의 침실은 왕이 접견에 사용하는 공식응접실로 벽면 중앙에 금박과「고블랭직」 으로 장식된 권위의 침대가 놓여 있다. 이 실내장식은 르브랭의 설계로서 프랑스의 「바로크양 식」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왕실가구의 장식은 짙은 감색에 구갑(龜甲). 진유(眞 鍮) .상아 등의 3상안(象眼) 이나 금도금의 브론즈 표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호화로운 가구 를「루이 14세양식」이라 부른다.
③영국 - 1660년의 왕정복고시대로부터 프랑스의 「바로크양식」이 이입되고, 명예혁명 이후에 는 홀랜드의「바로크양식」이 도입되어서 상류계급의 저택실내나 가구의 유행양식이 되었다. 영국에서는 이 양식을「William and Mary Style」이라 부르고 있다. 17세기말에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궁정 건축가인 다니엘 마로(Daniel Marot)정부의 신교도 탄압정책 때문에 영국에 망명하 여 「루이 14세양식」의 실내장식과 의자, 테이블, 침대 등 화려한 디자인을 유행시킨 것은 주목 되는 일이다.
[ 성베드로 대성당의 내부 ]
3)로코코(Rococo Style)
①프랑스 - 18세기 초 로부터 건축, 실내, 가구디자인 영역에서 새로운 양식이 유행했는데 이것을 미술사상으로는「로코코양식」이라 하고 프랑스에서는 루이 15세가 통치하던 시대에 해당하기 때문에「루이 15세양식」이라고도 한다.「로코코」란 베르사이유 궁전의 정원에 만들어진 환상적인 바위동굴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로카이유」(Rocaille)라 부르는 인공의 패곡장식(貝?裝飾)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어의 머릿글자 「Rock과 「Cockleshell」로부터 그 어원을 찾게 된다. 「바로크양식」의 다이내믹하고 남성적인 아름다움에 비해「로코코양식」은 로카이유와 같이 우아하고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양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로코코양식」은 부드러운 곡선이 디자인 구성의 주가 되고 있다.
(i) 루이15세시대 루이 14세 시대에는 격식을 존중하는 형식에 찬 궁정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으나 루이 15세시대의 귀족들은 너무나 엄격한 궁정생활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이 향락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파리교외에「샤또」(Chateau) 나 「패빌리언」이라 부르는 산뜻하고 맵시있는 저택을 세웠다. 이와 같은 저택의 실내는 찬 느낌을 주는 대리석 바닥 대신에 나무 결이 아름다운 쪽매마루 깔기를 좋아하고 벽면에는 플라스터를 바르고 아칸서스나 화초문양의 장식을 하여 곡선이 주는 자유스러움과 부드러움을 만끽했다. 바로크양식의 육중한 식주나 직선적인 딱딱함이 제거되고 벽에서 천정에로의 이어짐도 곡면으로 처리되었다. 바닥에는 꽃모양의 화려한 융단이 깔리고 실내전체가 관능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미를 나타내고 있다. 「로코 코시대」의 주택은 외부장식보다도 실내장식이나 가구설비에 중점을 두었다. 특히「붓드와르」(Boudoir) 나 「알코브」(Alcove) 라 부르는 상류부인들이 사교용으로 쓰는 사실(私室)은 그 실내장식과 기구, 일상생활용품에서 최고도로 세련된 취미를 표시하고 있다. 「로코코시대」의 가구는 모두 흐르는 듯한 곡선을 주체로 한 구성이다. 의자는「캐브리올」 (Cabriole) 이라는 곡선각(曲線脚)을 사용하고 팔걸이에서 등받이에 이르는 곡선구성 등 의자전체가 여체와 같이 아름다운 형태를 나타내었다. 시트나 등받이도 꽃모양의 「고블랭직」으로 싸여 있고 시트의 편안함과 형태의 아름다움이 훌륭하게 조화되어 가히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 또 침대의 종류가 많은 것과 그 형태의 미가 인정되는 것은 「로코코시대」이다. 귀부인이 사용하는 침대로는 알코브 침대, 폴로네이즈 침대, 왕비의 침대, 천사의 침대 등이 있고 왕이나 귀족이 사용하는 것으로는 권위의 침대, 왕관의 침대, 돔의 침대, 도르코 침대 등이 있다. 그 외에 실내의 벽면을 장식하는 콘솔형 탁자, 식탁, 화장테이블, 사무용 책상, 옷장 등 상류계급의 생활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가구의 종목은 점차 많아지게 되었다.
(ii) 루이 16세시대 18세기경부터 실내와 가구디자인에 있어서「신고전주의」(Neo-Classicism)라 부르는 새로운 양식이 유행했다. 이것은 고대 로마유적의 발굴, 독일의 미술사가인 빈켈만의 고미술연구와 귀족들의 희랍어나 이탈리아행 여행열 등이 계기가 되어 실내나 가구디자인이 복고조의 경향을 띄움을 뜻한다. 따라서 실내나 가구의 디자인은 곡선에서 직전으로 바뀌고 다시 엄격한「프러포션」(Proportion)이 중시되었는데 이것을 「루이 16세 양식」이라고 부르고 있다. 의자나 테이블의 다리는 끝이 가늘어진 직선형식으로 변하고 다리에는 홈새김(構彫)을 하고 인테리어나 가구의 표면장식에는 나무쪽세공(寄木細工)을 좋아했다. 리즈넬(Jean Herni Riesener : 1734~1806)이나 렌트겐(David Roentgen : 1743~1807)등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넷뜨의 가구를 제작한 18세기 후기의 대표적인 가구작가였다.
②영국 - 앤여왕(Queen Anne) 의 통치시대로부터 곡선을 주체로 한 로코코풍의 디자인이 유행하였다. 의자, 테이블, 하이보이(키가 큰 장롱), 로우보이(화장대)등에 사용된 다리는 「캐브리올」이라 부르는 곡선각(曲線脚)으로 되고 가구디자인은 점차 세련된 형태를 갖게 되었다. 1740년경 프랑스의 「로코코양식」이 도입되어 가구작가 치펜데일(Thomas I Chippndale)은 루이 15세 양식을 기본으로 하여 도시생활을 영위하는 중산계급의 사람들을 위한 기능적인 가구를 제작하였다. 그는 고덕이나 증국의 가공디자인을 채용하여 화려한 영국의 「로코코양식」의 가구를 넓혔다. 특히 「리본.백」을 등받이 의장에 적용한 치펜데일의 의자는 18세기 의자를 대표하는 훌륭한 디자인이라 하겠다. 고전주의의 건축가인 아담(Robert Adsm)은 때마침 고전양식의 유행에 앞장서서 실내장식이나 가구디자인을 희랍의 엄격한 고전양식의 법칙에 따른 형으로 통합하였다.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에 활약한 쉐라톤(Thomas Sheraton)은 「신고전주의양식」의 가구를 제작한 가구사전 등의 디자인 책을출판하여 인테리어나 가구디자인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 로코코 양식 ]
[ 전형적인 로코코 양식의 의자 ]
[ 조세핀 보나말트의 왕관침대 ]
[ 하이보이 ]
5. 근대(The Nineteen Century)
1)엠파이어양식 (Empire Style)
프랑스 혁명후 파리를 중심으로 전개된「엠파이어양식」은 19세기초에는 유럽의 여 러나라와 미국에까지 보급되었다. 프랑스어로는「앙삐르」라고 하는 이 양식은 새로 등극한 황제 나폴레옹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특히 고대로마의 디자인을 고고학적으로 정확하게 모방하고 그것에 다 고대 이집트제정기의 디자인을 가미한 호화스런 양식으로서 궁정건축가인 페르시 에(Percier) 와풍텐느(Fontiane)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나폴레옹이 살고 있던 풍텐블로 궁전(Fontainebleau) 의 실내는 소위「앙삐르양식」으로 개장되고 바닥 에는 빌로드의 빨간 융단이 깔렸으며 마호가니에 금의 브론즈표장을 한 왕좌, 스툴 , 콘솔, 주형침대(舟形寢台) 등 호화로운 가구가 설비되었다. 빌로드의 빨간색, 마호가니의 검정색, 브론즈표장의 황금색, 즉 빨강과 검정과 금색은 「엠파이어양식 」을 상징하는 색채가 되고 있다. 「리젠시 스타일」 (Regency Style) 이라고 불려진 영국에서의 「엠파이어양식」 은 호프(Thomas Hope) 나 스미스(George Smith) 등에 의해서 보급되었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크게 유행한 이 양식은「비더마이어양식」(Biedermeier Style) 이라 불렸고 실용적 기능을 가진 중산계급용 가구로서 새로운 유행을 만들 었다.
2)빅토리아시대(Victorian Period)
영국에서는 빅토리아여왕이 즉위한 1837년에서부터 야년 동안의 통치기간에 나타난 실내나 가 구의 양식을 총칭하여 「빅토리아양식」 (Victoria Style) 이라 한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고덕, 희랍, 로마, 르네상스, 루이 14세, 루이 15세와 루이 16세 등 각 시대의 양식이 기목세공(寄木細 工) 과 같이 통일도 없이 모방되어 혼란한 시기였다. 한편 산업혁명에 의해 발전한 기계생산이 가구제작에 채택된 후로 가구양식은 전통미를 잃고 품질의 저하현상이 초래되고 말았다. 또한 철을 사용한 의자나 탁진유로 만든 침대 등이 제작되었으나 엄격히 말하면 그것들의 디자 인은 로코코 풍이었다. 19세기 중엽에는 코일스프링이 의자나 침대에 사용되어서 기능이 현저 하게 강조된 것은「빅토리아가구」의 특색이라 볼 수 있다.
3)미술공예운동(Art & Craft Movement)
이와 같이 인테리어디자인이 그 전통성을 잃고 혼란하던 빅토리아시대 후기에 공예가인 윌리 엄 모리스(William Morris)는 과거의 양식적 모방을 지양하고 대중생활에 도움이 되는 성실하고 실용적인 디자인을 창조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공예품의 기계생산을 비난한 그는 중세와 같은 수공기술에 의해 서민계급을 기쁘게 해주었다. 모리스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활동을 미술공예운동(Art & Craft Movement) 이라 불렀다. 특히 이 운동은 가구형태의 단순화와 기능적 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디자인운동으로 발전하고 그것은 영국 뿐만아니라 여러 유럽제국에 퍼져 디자인운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4)식민지양식 (Colornial Style)
세기 후반부터 19세기말까지 유행한 아메리카의 인테리어나 가구의 양식을 총칭하여 「컬러니얼 스타일」(植民地樣式) 이라 부르고 있다. 아메리카에로의 이주초기에 영국인들은 뉴잉글랜드 지방, 화란인들은 뉴욕, 독일인들은 펜실바니아 지방에 정착하여 있었다. 그러나 이주민으로 근면하기로 이름난 영국인들이 각지로 진출하여 17세기 후반에는 그들이 식민지 전체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영국의 인테리어나 가구양식이 아메리카의 지도적인 양식이 되었다. 따라서 영국의 「샤코비안양식」(Jacobean), 「윌리엄.메리 양식」(William and Mary) 과 「퀸엔양식」 (Queen Anne) 이 연속으로 유행하였으나 양식이나 제작기술이 영국의 모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이보이 (Highboy), 로우보이(Lowboy), 버터플라이 테이블(Butterfly Table) 등은 영국의 영향권을 벗어난 독특한「컬러니얼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 영국의 윈저지방에서 제작된 「윈저체어」(Windsor Chair)는 18세기초 미국에 수입되어 식민지 가구작가들에 의해 개량되어 1740년대부터 1820년대에 걸쳐 유행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 치펜데일, 헤플화이트, 예라톤의 가구양식이 유행하였다. 이때가 되어서야 겨우 아메리카의 가구디자인과 제작기술이 크게 향상되었다.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에 활약한 뉴욕의 가구작가 던칸 하이프(Duncan Phyfe)는「쉐라톤양식」의 마호가니에 의한 의자나 테이블에 훌륭한 디자인을 표시하고 있다. 19세기 전기에 프랑스의 「앙삐르양식」이 유행하였으나 그 이후 아메리카의 디자인은 점차 쇠퇴하였다. 이와같은 식민지의 전통적인 인테리어나 가구디자인의 발전과는 고립된 상태에서 오늘날 주목되고 있는 것이 쉐이커(Shaker)교도가 제작한 극히 소박한 가구이다.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에 걸쳐서 쉐이커들이 제작한 가구는 일체의 외면적 장식을 배제하여 실용적 기능에 근거한 직선구성에 의한 단순한 형태의 것이다. 「쉐이커가구」라 불리는 의자, 선번 테이블, 침대 등은 그 표현이 명석한 점에서 현대적인 감각을 표시하고 있다.
5)아르누보(Art Nouveau)
벨기에나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여 모리스나 미술공예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1890년대로부터 1910년경에 걸쳐서 과거의 양식과 결별하고 식물이 갖는 단순한 곡선형태를 인테리어나 가구 디자인 구성에 이용한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이 유행하였다. 벨기에의 건축가 오르 타(Victor Horta : 1861~1947) 나 베르데 (Henri Van de Verde : 1863~1967), 프랑스 건축가 기우 마루(Hecmr Gurnard) 등이「아르누보」의 대표적 작가이다.독일에서는 청년양식이라 하여 「유겐트스틸」(Jugendstil) 이라는 극히 대담한「아르누보양식」이 전개되었다. 영국에서는그라스고우의 건축가 맥킨토쉬(Charles Rennie Mackintosh, 1862~1928)를 중심으로 하여 고덕을 기반으로 한 직선구성과 오오가닉한 장식을 교묘히 융합시킨 독특한 양식을 발전 시켰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는 가우디(Antoni Gaudi, 1852~ 1926) 가 건축이나 가구디자인 에 「네오.고딕풍」의 극히 환상적인 「아르.누보」를재생시켰으나 구조나 재료의 성질을 무시 한 관계로 1920년경에는 급격히 쇠퇴되고 말았다. 「아르.누보역사」양식에서 모던디자인에로 전환하는 과도기의 디자인운동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아르누보 양식으로 장식된 브라이튼 관의 뮤직 룸 ]
6. 20세기 (The Twenty Century)
1)분리파 (Secession)와 바우하우스 (Bauhaus)
「아르.누보」의 전성기에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는 건축이나 기구디자인에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도입하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건축가인 호프만(Joseph Hoffman, 1870 ~ 1956) 은 1897년 빈에서「세세숀(분리파)운동」을 일으켜 새 시대에 맞는 공예양식의 창조를 의도하고 1903년에는「빈공방」을 설립하였다. 그것은 직선을 주조로 한 수평과 수직에 의한 단순한 기하학적 구성의 인테리어와 가구의 디자인을 표시하여 제작 생산을 꾀하였다. 2O세기 모던디자인의 과제는 형태의 기능성, 구조의 단순성, 작품의 양산화의 세가지로 요약된 다. 이와 같은 과제를 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l907년 독일 퀼른에서 결성된 「독일공작연맹」 (Werkbund) 이다. 여기서는 가구의 양산화를 위한 규격화의 문제가 연구되었다. 이 사고방법은 「독일공작연맹」의 지도자 였던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에 의하여 계승되 었다. 그는 1919년 와이말에 혁명적인 디자인학교인 「바우하우스」 (Bauhaus)를 설립하고 재 료의 연구와 합리적인 조형연구를 통하여 기능주의 (Functionalism) 라는 모던디자인의 이론을 확립하였다.「바우하우스」로부터 브로이어(Marcel Breuer) 의 강관의자(鋼管椅子), 조립가구, 성형합판가구나 로에 (L.Mies Van der Rolle)의 바로셀로나체어, 그리고 그로피우스의 유니트 가구 등 훌륭한 작품이 많이 나왔다. 화란의 로테르담에서는 「데 .스틸파」의 리트펠트(G. T. Rietveld) 는 수평과 수직의 부재와 원색을 사용하여 입체파 이론에 근거한 추상적인 가구를 제 작하였다. 그는 장부맞춤이라고 하는 과거의 접합법을 거부하고 볼트와 너트에 의한 접합을 채용하여 가구양산의 규격화를 행하였다. 1917년에 제작된 그의 「적과 청의 의자」는 모던디 자인의 선구적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르.꼬르뷔제(Le Corbusier)는「집에 비치하는 도구」를 의미하는 「가구」(Mobilier) 라는 개념을 부정하고 그 대신에「장비」(equipment)라 는 말을 사용 가구를 실내공간구성의 설비요소로 생각하여 유니트 구성의 가구디자인을 전개 하였다.
[ 입체구성의 적과 청의 의자 ]
[ 초기 토넷트 의자 ]
1)시카고파와 현대디자인의 경향
모던디자인의 메카였던 「바우하우스」는 1933년 나치스의 대두로 폐쇠되고 그곳에서 활약하던 많은 디자이너는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로피우스와 브로이어는 하바드대학에 정착하고 로에는 M.I.T 공대, 모흘리.나기등은 시카고에 「뉴레牟하우스」를 개설하여 각각 공업화를 위한 디자인 활동을 추진하였다. 한편 미국의 건축가 셜리반(Louis Sullivan)이나 라이트(Frank Lloyd Wright)의 기능주의 디자인이 배경이 되어서 제2차대전으로부터 전후에 걸쳐서 미국은 모던디자인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뉴욕의 근대미술관은 근대디자인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 「 실내설비에 있어서의 유기적 디자인 」(1940년)과 양산에 따른 「저렴가구」(1948년)에 관한 범세계적 디자인 콤페를 주최하여 에임즈(Charles Eames와 사리넨(Eero Sarinen) 등의 뛰어난 디자이너를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미국의 근대디자인은 에임즈와 사리넨의 기능성을 해결한 형태미 추구를 바탕으로 플라스틱, 합판, 그래스 화이버, 경금속등의 새로운 재료의 연구와 인간의 생활자세를 과학적(人間工宇)으로 해식함으로써 현대생활에 적합한 기능적인 인테리어나 가구를 디자인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나갔다. 한편 북구의 덴마크,스웨덴이나 핀랜드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래 목재의 아름다움과 수공예적 표현을 조화시킨「휴머니즘 모던」(HumanismModern) 이란 독특한 북구스타일의 가구를 만들어 냈다. 이태리나 프랑스에서는 고전양식을 현대화한 소위「클래식 모던」(Classic Modern) 이라는 새로운 가구가 유행하여 유럽인들의 애호를 받고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면서 공업생산의 발전과 그로 인한 고도성장의 산업사회화는 인간성의 상실로 말미암은 드라이함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건축이나 인테리어에 적극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아울러 그 회복의 가능성을 환경의 순화와 미화에서 찾으려고 한다. 이에 우리가 앞으로 전개시켜야 할「인테리어디자인」은 과학적이고 인간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여 생활의 다양화와 합리화를 추구함으로써 인테리어의 복잡한 과제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해 나가지 않으면 않되겠다. 그것이 곧 인간화된 인테리어 환경을 조성시키는 근본개념이 되어야 함은 물론 인테리어가 인간 환경의 쾌적성을 추구하는 공간창조에 있음을 실증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