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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봉(鄭世峰) 프로필; 호(號); 묵주(墨晝)/ 1943년 12월 7일 중국 할빈시 도리구 신안가 24호에서 출생./ 주요작품으로 “하고싶던 말”, “빨간 크레용태양”, “볼세비키의 이미지“ 등 다수. 단편소설집 <하고싶던 말>(1985년, 북경 민족출판사), 중단편소설집 <“볼쉐위크”의 이미지>(1998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중편단행본 <“볼셰비키”의 이미지>(2003년 한국 “신세림”출판사), 평론집 <문학, 그 숙명의 길에서>(2017년 한국 “신세림”출판사)등 출간. 제1회 중국소수민족문학상, 제1회 <연변문예>문학상, 장백산문학상, 도라지문학상,미국 “해외문학상” 소설부문 대상, 2017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호 주최, <제37회 최우수예술가상(문학부문)> 등 수상. /“연변문학”월간지 소설편집. 미국 L.A 所在, “해외문학”지 편집위원. “사단법인 연변소설가학회” 회장 역임.
... 그러나 사회적 질환의 시기에 나타난 자들은 가련하다! 사회는 몇 년이 아니라 몇 세기에 걸쳐 존속되는데 사람에게는 생활의 순간만이 주어져 있다. 사회는 완치되어도 사회의 병적 위기를 표현하던 사람들과 고상한 정신의 그릇들은 영원히 파괴되는 생명의 요소 속에 남아 있을 수 있다! – 벨린쓰끼
아버지, 「볼세비키 윤태철」은 딱딱한 쇠침상 위에 주검처럼 길다랗게 누워 있었다. 반신불수로 죽지가 철썩 부러져 가지고 이제는 의욕의 생을 체념한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그 모습은 꼭 마치 추락된 전투기의 잔해같이 느껴지고 있었다. 워낙 날카로운 성격자였기 때문에 더더욱 참혹하게 보여지고 있는 것이었다. 아들, 「인간 윤준호」는 그러한 아버지를 마주하고 침상 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두 손을 공손히 무릎 위에 얹고서 숙연히 머리를 숙인 채 자세와 표정을 조금도 흐트러뜨림이 없이 긴긴 시간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었다. 불그스레한 전등빛에 조명이 되어 있는 그의 근엄한 프로필은 흡사 스승 앞에 자기의 불손을 속죄하고 있는, 그렇지만 끝내는 스승의 뜻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그런 당위성 때문에 심히 괴로워 하고 있는 날선 인격의 학도 같아 보였다. 그들 두 부자는 그런 자세, 그런 모습대로 마치 두 개의 생명 없는 정물처럼 숨소리도, 조그마한 미동도 없다. 그래서 그대로 거폭의 캔버스 위에 그려져 있는 유화같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뗑, 뗑, 뗑, 뗑...... 갑자기 벽에 걸린 괘종이 세차게 열두 점을 치고 있었다. 연속 때려대는 그 되알진 음향은 방안에 얼어붙어 있는 침묵의 공간을 흔들어대다 맥이 다한 듯이 꼬리를 떨며 사라져 버렸다. 다시금 무서운 적막이 귀뿌리에 윙-울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는 듯한 정적 속에 괘종 흔들이추의 「똑딱 똑딱」소리만이 절도있게 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 두 사람한테 우주의 운행과 시간의 무자비한 매진을 각성시키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저희들 아버지와 아들간「볼세비키」와 「인간」사이에 무서운 갈등을 이루어가지고 무척 끈질기게 대결을 해왔던 그 한마당 드라마의 현장에서 해탈되지 못한 채 심히 우울하고 비장한 연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싸움은 이제 곧 끝나게 되어 있다는, 또한 마땅히 결속이 되어야 하리라는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던 까닭에 거기에 열심히 매달려 있지 않으면 안되는 그들이었다. 침묵은 드라마의 격렬한 고조를 무겁게 잉태하고 있었다. 그들은 저마끔 이제 조만간에 이루어질 폭풍 같은 고조 속에 지푸라기처럼 휘말려버릴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거기에 휘말려 들어가지고 여지껏 서로간에 고집스레 지켜왔던 이질적인 자존심과 인격에는 도저히 맞지 않는 양해와 포용이라는 뜨거운 정애에 흐느껴 울고 감동적인 몸부림이라도 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십분 헤아리고 있는 듯이 창문으로 내비치는 한 가닥 전등불빛이 뜨락에 절진해 있는 어둠을 무척 조심스레 태우고 있었다. 한낮에 뜨겁게 달아올랐던 지열이 밤이슬에 서서히 냉각되어 가고 있는 밤이었다. 볕에 그을고 땀에 절고 일에 지친 농민들이 꿈나라에 혼곤히 묻혀있는 밤이었다. 이 밤, 이 순간순간에 아버지 윤태철의 아픈 회한이 무엇이며, 아들 윤준호의 깊은 사념이 무엇이드뇨? 「볼세비키 윤태철」의 최후의 집념은 무엇이며, 「인간 윤준호」의 절실한 인생수감은 무엇이드뇨?!...... 1 20세기 50년대의 아홉 번째 해는 중국의 광활한 국토 위에 천만코의 그물마냥 「인민공사」가 형성이 되어 있었던, 역사에 특기해야 할 연도였다. 그 때 미국의 덜레스 국무경을 비롯해서 지구 마을의 적지 않은 인사들이 심한 우려 같은 걸 표시한 적이 있었고 그들에 대한 견책으로 당시 중국의 정치가들이 사용하였던 언어 또한 아이러니의 향기 그윽한 것이었다. 「...... 미련한 사람들의 떼(群).」 그런데 그로부터 25년 후 이 나라 역사와 국민들이 스스로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는 가운데 「솟아오르는 아침해」라고 칭송되었던 「인민공사」가 갑자기 해체되었던 것이니 바로 그 이듬해, 그러니까 1984년의 어느 늦은 봄날이었다. 그 날 「볼세비키 윤태철」은 구렝이령 비탈밭에서 보탑을 잡고 있었다. 그의 「당원연계호」-매일 술취해 자빠져 있는 경출이 녀석네 콩파종이었다. 쇠보습으로 이랑 마루터기를 엇비스듬히 째고 나가는 뒤로 막내딸 정혜가 속자국을 꽁꽁 밟으며 따라나오고 돌아져 들어올 때에는 소겨리 앞에서 쫓기듯 하며 정혜가 늘이는 씨앗을 보습날에 떠올려지는 부드러운 흙밥으로 묻어나가곤 했다. 이러기를 자꾸자꾸 반복하는 일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곁눈팔 새 없이 소겨리를 따라 걷는 윤태철의 머리에는 다른 잡념이란 없다. 단지 허리가 극심히도 아프다는 감각, 그것뿐이었다. (아직도 두 쉼 걸릴텐데...... 이 허리가 용케 견뎌낼까?) 일을 마치고 밭머리에 나가 누워서 마침내 허리를 쭉-펴는 그 쾌감이 그립다. 그 쾌감을 누려보는 그 순간이 천금같이 소중한 것임을 쇠퇴상태의 윤태철의 생리는 놀라웁게 절감하고 있었다. 지난 해부터 윤태철은 허리의 통증을 극심히 느꼈다. 보탑을 잡아도 그렇고, 삽질을 해도 그렇고, 김을 매도 그렇고 허리가 꺾이는 것 같아 참으로 극난하였다. 그럴수록 자신에 화가 나가지고 의지력을 시험해 보기라도 하듯이 이를 악물고 쉬지 않고 일하는 무모한 짓을 감행하곤 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응당히 두 쉼이 걸려야 할 일거리를 자신에 대한 알 수 없는 불만과 그 어떤 오기를 가지고 단숨에 갈아버렸다. 그래서 소를 혹사시키고 자기의 허리를 혹사시켰던 것이다. (철탑 같던 이 윤태철의 몸이었는데 인젠 기둥이 좀먹은 게로구나!) 일을 끝내고 밭머리에 나와 앉았을 때 윤태철은 이런 실의와 서글픔에 젖어 있었다. 그런 기분은 이미 윤택을 잃어버린 주름살 투성이의 그의 얼굴과 기묘하게 어울려 있었다. 당신한테 언제 미끈한 체구와 성칼스런 인상의 미안으로 남성을 빛내던 시절이 있었더냐고 조롱하기라도 하듯이 붉은 낙조는 그의 얼굴의 노쇠를 낱낱이 비춰내고 있었다. 그는 숨을 돌리면서 엽초를 말아서 피웠다. 텃밭에 손수 재배한 것인데 잘 익은 생엽을 알뜰히 따서는 사이사이 쑥을 끼워서 채곡채곡 명심하여 띄운 맛나는 굴초였다. 알맞춤히 독하고 구수한 담배연기를 깊은 들숨으로 페부 깊이에까지 탐욕스레 흡수시키는 일이 아주 천천히 여유작작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가슴 속이 시원해 오고 고역에 아프게 눈떠있던 온몸의 세포들이 혼곤히 마취돼 가고 있는 푸근한 쾌감을 그는 향수하고 있었다. 담배 초기라는 것이 일종의 무서운 생리적 갈구임을 윤태철은 비로소 깨달은 듯싶었다. 인간이 짧지 않은 일생에서 그러한 쾌감을 누려보는 순간을 무수히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윤태철로서는 그저 새삼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산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었다. 평강벌 남쪽으로 10리를 올리뻗은 구룡골 전경이 눈 아래 놓여 있었다. 거무칙칙하게 춘경이 되어 있는 논벌과 드문드문 산재해 있는 일곱개의 자연툰과 용서산 밑 버들방천을 내리지르며 논벌을 적시고 있는 구룡천과 구룡골 복판으로 막치기까지 올리뻗은 신작로며, 가로세로 이어진 농도(道)며, 용서산의 침엽수 숲이며가 시야에 유정했다. 이 모든 것들은 예나제나 의구한 것이었지만 그 날 따라 느닷없는 감회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유독 자기만이, 「볼세비키 윤태철」이 혼자만이 느낄 수 있는, 또한 알알히 느껴야 하는 감회였기 때문에 긍지와 자부심따위보다는 오히려 쓸쓸해지는 마음이었다. 윤태철은 이 고장에서 태어나서 소작농의 자식으로 성장을 했던 사람이었다. 공산당이 천하를 얻는 사변이 눈 앞에 박두했을때 열혈청춘을 해방전쟁에 투신을 하여가지고 제4야전군 12종대를 따라 장강 이남까지 짓쳐나갔다가 허벅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고향에 귀환이 되었다. 중국공산당에는 1949년 여름 사시(沙市)를 공략하는 전투에서 「화선입당」으로 가입을 했던 윤태철이었다. 농업합작화운동에 열성으로 나서서 고급사주임으로 있다가 인민공사화 때부터 구룡대대 당지부 서기로 사업을 떠메고 왔던것이니 호도거리농사가 시작된 지난해까지이니까 꼬박 26년, 「문화대혁명」시기에 5년 동안이나 「한켠에 비켜서」있은 걸 제외하여도 당지부서기 실제 직무담당 연한만도 21년이나 되었다. 이것이 곧바로 61세의 「볼세비키 윤태철」의 이력이었다. 윤태철의 마음 속에는 늘 10리 구룡골 산천이 추억의 유적지로 펼쳐져 있었다. 그래서 언제든지 눈만 감으면 그 추억의 유적지에는 어김없이 윤태철 자신의 모습이 각기 다른 여러 가지 이미지로서 선명하게 투영이 되어 있었다. 그 곳에는 구룡동 부락 오막살이집에서 우렁찬 울음을 터뜨리며 태어난 갓난애가 있었고 헐벗음과 굶주림 속에서도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세상의 신비와 생명의 환희를 만끽하고 있는 벌거숭이 아동이 있는가 하면, 천대받는 자의 설움을 씹어 삼키며 나뭇짐을 지고 다니는 베옷 입은 덜먹총각이 있었으며, 도끼를 꼬나들고 지주집에 뛰어들려는 광기들린 반란자가 있었다. 총을 들고 포연탄우 속을 무찔러 나가는 격정의 사병이 있었고, 농업집단회의 희열에 잠 못 이루는 소박하고 강유력한 농촌의 당지부 서기가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윤태철은 그 추억의 유적지를 방황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눈 아래에 금방 펼쳐져 있는 고향의 산천에서 흘러간 역사를 떠올리고 있었다. 10리 구룡골을 질풍처럼 휩쓸고 지나갔던 중국 농촌사가 역사의 자욱한 안개 속에 선명히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었다. 농업집단화로부터 대약진을 거쳐서 「10년 동란」(문화대혁명)을 꿰지르고 인민공사의 해체에 이르기까지 그 30년 세월의 구체적이고도 생동하는 역사의 현장이 재현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당의 화신으로 군중을 휘동해 가지고 그러한 역사의 현장을 벌려가는 구룡대대 당지부 서기 「볼세비키 윤태철」의 모습이 나타나 있었다. 언제나 바쁜 걸음인 「따비행기 서기」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구룡골 어디에나 총총히 찍혀져 있는 자신의 발자국이 보이고 있었고, 고향 산천에 그어져 있는, 쳇바퀴 돌듯이 굴러온 볼세비키적 인생의 궤적이 보이고 있었다. 개량된 사득판이며 규격화된 논벌이며 구렝이령 비탈에 수축되었던 제전이며 용서산의 과원이며에 깃들어 있는 자신의 심혈이 피빛의 색조로 방불히 현시되고 있었으며 소학교 벽돌교사며, 정미소며, 트럭과 트랙터의 차고며, 궁정 같은 구락부며...... 그 모든 것에 슴배어 있는 자신의 땀이 영롱한 구슬 같은 실체로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십리 구룡골에다 창출하여 내려던 「지상낙원」의 꿈이 까막산 너머 저기 흰구름 피는 아득한 하늘 끝에 아직도 파랗게 살아 있음을 보고 있었다. <윤태철은 갑자기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었다. 그것은 전혀 「볼세비키 윤태철」답지 않은 감상(感傷)이었다. 그러한 감상은 갑자기 느낀 노쇠에서 오는 실망과 서글픔에서보다는 머리를 혼란하게 휘저어놓은 격세지감에서 유발된 것이었다. 인민공사가 해체되고 개체영농이 실시되고 있는 오늘날 자신의 모든 30년 간의 노력과 분투가 헛되이 흘러간 것만 같은 느낌...... 그리고 이제는 사람만 페우처럼 돼 가지고 댕그랗게 남아 있다는 실의와 비애에서 오는 축축한 감상이었다. 정혜의 뽀둥뽀둥 살진 손이 시들시들한 피부에 푸른 정맥이 지렁이처럼 노출이 돼 있는 윤태철의 팔뚝을 언제부터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부지, 당원 그만둬요! 그까짓 공산당원......」 정혜가 갑자기 응석부리듯 엉뚱한 소릴 했다. 그의 고운 입이 뾰로퉁 한 발이나 나와 있었다. 윤태철은 막내딸의 뜻을 금방 알 수가 있었다. 밤새껏 술을 퍼마시고 해가 궁둥이에 돋을 때까지도 취해 자빠져 있는 경출이를 보고 기분이 잡쳐가지고 아예 정혜를 데리고 일밭으로 올라올 때 정혜의 고운 입은 많은 불평을 쏟아내었던 것이었다. 그런 주정뱅이는 굶어 죽어도 마땅하다는 주장이었고 그런 머저리 일을 자기까지 끌어들여서 수행하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었다. 결국 공산당원이 아니면 그런 머저리 고생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정혜의 분명한 뜻이었다. 「아부지 이렇게 늙으셨는데...... 이제는 집일도 하지 말아요. 자식들을 가득 두고도 뭘......」 「한번 호강해 봤으문 좋겠다! 나두...」윤태철은 딸년의 갸륵한 응석을 선선히 받아 주고 깊은 한숨을 신음처럼 토해 내었다. 자기는 천진스러운 딸자식이 소망하는 그런 호강을 도저히 누릴 수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한시라도 일손을 찾아 쥐지 않으면 무료보다는 그 어떤 죄의식을 느끼게 되는 농사꾼의 타성을 아무 때든 버릴 수가 없을 것임을 분명히 깨닫고 있는 그였다. 그리고 그 본질이 타인에 대한 헌신성으로 파악되는 당성의 뿌리를-생명의 뿌리를-영혼의 토지에서 뽑아낼 수 없을 것임을 분명히 깨닫고 있는 윤태철이었다. 그러한 깨달음은 자기들 늙은 세대-희생세대-에 대한 야릇한 비감이 묻어 있는 그런 것이었다. 세상은 아직 「볼세비키 윤태철」이가 호강을 누려도 별일이 없게끔 되어있지 않았다. 아직도 세상은 윤태철이한테서 부단한 헌신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 술취한 경출이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윤태철의 시야에 아프게 뛰어드는 것이 있었다. 아직도 갈지 않은 채 허옇게 누워 있는 한 뙈기의 논답이 느닷없는 사념을 일으켜주면서 그의 시선에 엿가락처럼 묻어 늘어지고 있었다. 윤태철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듯한 기분이 돼가지고 급기야 소겨리를 끌고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용서산 저편 하늘에 빨갛게 물들어 있던 노을이 저절로 거의 다 타버리고 있었다. 2 그 날 오후 윤준호는 여덟 톤실이 디젤유 트럭을 정비해 놓고서 심심파적으로 삽을 메고 논에 나갔다. 아우 준필이가 논두렁을 감고 있는 걸 보고 돕고 싶었다. 자기 몫의 논과 밭 때문에 준필이가 더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느껴지기도 하였다. 추경을 해 두었던 논판의 흙은 물썩임이 잘 된데다가 재답이까지 되어 있어서 찰떡처럼 풀기가 져 있었다. 그걸 듬뿍듬뿍 떠서 논두렁 앞면에 척척 붙여놓고 그대로 슬슬 문지르니까 어렵지 않게 성벽처럼 미끈한 논두렁이 되어나갔다. 일에 재미가 나서 힘드는 줄 몰랐다. 조금만 거칠거나 고르지 않아도 다시 흙을 떠얹고 다듬곤 했다. 풋풋한 노동의 아름다움과 희열이 온몸에 넘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분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윤준호의 마음이 진눈깨비를 퍼붓는 하늘처럼 갑자기 찌프려졌던 것은 아래쪽에 아직도 갈지 않은 채 나자빠져 있는 한 뙈기의 논답이 시야에 나타났던 까닭이었다. 그것이 허수빈네 논인 줄 그는 당장 알아차렸다. 윤준호는 애써 그 쪽을 보지 않으려고 신경을 썼다. 하지만 마음속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오히려 묵은 벼뿌리가 허옇게 드러내 놓인 그 논바닥이 마치도 순정이의 아버지 허수빈의 황페해진 가슴같이 느껴져 오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당원연계호」를 한답시고 매일 술취해 자빠져 있는 경출이 녀석네 콩파종을 해주느라고 구렝이령 비탈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는 「볼세비키 아버지」를 두고 부아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윤준호의 일손이 원래의 흥겨운 리듬을 잃고 거칠어지고 있었다. 공연히 성급하게 안간힘을 써서 흙을 떠서는 논두렁 위에 붙여놓고 두드려 대었다. 흙탕물이 마구 바지에 뿌려져 왔지만 아랑곳 없었다. 그는 마치 논두렁 감기 경주에라도 나선 것처럼 일손을 다그쳐 대고 있었다. 이제 그것은 즐거운 노동이라기보다는 무모한 화풀이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정혜 오빠, 정혜 오빠!」 소아마비증으로 쌍지팡이에 의지해 다니는 막송이라는 녀석이 곤두박히듯 급한 행보를 감행해 온 것은 황혼무렵이었다. 「순정이 엄마, 농약 먹었다우. 자동찰 가지구 오래유. 빨리! 위급하다는 데두!」 막송이는 사람 목숨보다는 그런 특대소식을 전하고 있는 자기의 「공훈」을 인정받기 위해서 손저어 외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윤준호는 일순간 논갈이를 못하고 있는 것이 연고가 되어 목숨을 끊으려 했으리라는 직감에 가슴이 섬뜩했지만 「못가! 차가 고장난 걸 몰라서 그래?」 이렇게 벌컥 화가 나갔다. 크낙큰 동네에서 그런 불상사에 뛰어다니는 사람이 하필이면 병신인가 하는 것부터 알 수 없는 울분을 자아내었던 것이다. 허둥대며 논판에서 뛰어나간 것은 아우 준필이었다. 「가봐야잖수? 형님......가기우!」 애원에 가까운 재촉이 몇 번 떨어져서야 윤준호는 다리를 대강 씻고 신을 신었다. 아우의 재촉에 마지 못해 끌려나가는 것처럼 일이 꾸며진게 마음에 고마왔다. 그러나 서두르지는 않았고 마치 태평스레 퇴근하는 사람처럼 걸음걸이가 급하지 않았다. 시간을 늦추면 자칫하면 사람이 잘 못될 수 있다는 초조감이 가슴을 죄일수록 굼뜨게 걷는 것이 마치 그 어떤 어길 수 없는 의무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대형트럭을 허수빈네 오막살이 옆에 돌려 세우고 나서도, 환자를 싣고 병원문 앞에 당도하여서도 준필이와 몇몇 청년들이 환자를 싣느라 내리우느라 병원에 들여가느라 분주히 서두를 때에도 윤준호는 철저히 외면을 하고 운전석에서 내리질 않았다. 순정이 어머니 엄울순의 그 비참한 꼴을 보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보다도 사람들 앞에서 그 어떤 값싼 성의 같은 것을 보여 주고 싶지가 않았다. 가슴 속에 응어리져서 묻혀있는 순정이네 일가에 대한 남다른 인간애와 그들을 위해서 끓고 있는 울분을 남들은 다는 모르고 있다고 할 때 오히려 그것을 더 깊이 감추고 싶었다. 마침내 준필이가 병원에서 나오고 있었다. 다행히도 마신 농약이 낙과유이고 많이 마시지 않았기에 생명 위험은 없고 다만 며칠간의 입원치료를 요한다는 병원측의 결론을 알리고서 준필이는 딱한 표정이 되어있었다. 윤준호는 아우의 표정을 재빨리 파악하고 백 원짜리 지페 한 장을 입원치료비로 아우의 손에 넘겨 주었다. 버려진 헌신짝과도 같은 엄울순이를 위해서 제 호주머니의 단돈 한 푼이라도 성의껏 털어놓을 사람이 이 마을에 있으랴 하는 서글픔에 돈을 지니고 떠났던 그였다. 「형님, 뒷일은 걱정마우.」 준필이의 뜻있는 말을 윤준호는 눈물로써 체득하고 있었다. 형님의 마음을 대신해서 자기가 다 처리하겠으니 안심을 하라는 위로의 의미였다. 그렇지만 윤준호는 아우의 말을 들은둥만둥 초연히 트럭에 시동을 걸었다. 환자의 간호에 불필요한 몇 사람을 다시 태우고 올라가는 일을 생각 못한 바 아니었지만 알 수 없는 심술궂음이 가슴 속에 오기로 뻗쳐왔던 것이다. 윤준호는 드디어 트럭을 질풍같이 몰고 있었다. 쓰다듬고 아껴 부리던 트럭에 대한 처음으로 되는 혹독한 학대였다. 순정이의 얼굴이 환상 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사랑했던 처녀의 고운 얼굴이 몸부림치는 차체의 진동과 질풍 같은 속도 속에서만이 또렷이 떠오를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그리운 순정이는 종시 얼굴을 선명히 나타내주질 않고 있었다. 안개에 휩싸인 듯 희미하기만 한 그 얼굴을 안타깝게 떠올리려고 애쓰다가 성공을 못한 채 윤준호는 마을에 당도하였다. 아버지, 「볼세비키 윤태철」네 집 옆에서 트럭의 엔진을 꺼버리고서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어진간해서는 발길을 돌리지 않던 아버지네 집문턱을 조금만 건드려도 무섭게 폭발할 작탄처럼 되어가지고 성큼 넘어섰던 것이었다. 3 일밭에서 내려온 윤태철은 소들을 말뚝에 매고서 서둘러 소짚을 썰었다. 준필이가 부재중이어서 정혜를 데리고 하는 서투른 짚새였다. 볏짚을 작두날 밑에다 단 채로 먹이면 정혜의 다리힘으로써는 싹뚝싹뚝 썰리지 않는 것이어서 자름자름 반단씩 갈라서 먹여야만 했다. 그래도 정혜의 맥빠진 다리 밑에서 작두날이 무시로 허둥거리는 것이어서 자칫하면 손가락 잘리기 십상일 듯했다. 이렇게 서투른 작두질에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판에 뭐나 다 퉁퉁하게 생긴 마누라가 짚새간에 나타났던 것이었다. 「순정이 에미가 농약을 마셨대유, 글쎄 그 큰 농약병사릴 거의 다 마셨다니, 에그-」 「그래서?」 윤태철은 일손을 멈추고 놀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가 다 뭐유. 준호가 싣고 갔다는데 그게 살겠수? 상기 밭갈이도 못하구 있는데 글쎄 남정이라는 <허귀신>은 암내 맡은 둥굴쇠처럼 해종일 하늘만 쳐다보며 히죽히죽 웃기만 하더라니 글쎄...... 에그, 일찌감치 목숨을 끊는게 상팔자지, 쯧쯧쯧.」 마누라는 큰 경사나 난 듯이 수선을 떨었다. 윤태철은 더 대꾸없이 묵묵히 짚새를 해나갔다. 그의 양미간에 주름이 모아져 있었다. 소들을 외양간에 들여매고 여물을 주고 저녁상을 물릴 때까지도 찌푸려진 양미간이 펴지질 않고 있었다. <st1:윤태철은 떨쳐 버릴 수 없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이었다. 말하자면 한 인간과 한 가정의 수난사를 처음으로 그렇듯 진지하게 떠올려 보고 있었다. 구룡동 마을 맨 뒤쪽에는 토끼꼬리처럼 붙어앉은 오막살이 한 채가 있었다. 모두들 우스개로「피독재자의 집」이라고 부르고 있는, 말하자면 무척 아이러니칼한 역사의 드라마가 깃들어 있는 집이었다. 원래 그 오막살이는 윤태철이네 집이었다. 그의 부친 윤치수가 지주 허영세네 소작살이를 할 때 쓰고 살던 빈고농민의 보금자리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토지개혁 직후에 그의 부친 윤치수가 땟국이 꾀죄죄한 일가 권속을 주르르 이끌고 지주 허영세네 팔간 기와집에 입택을 하고 깨끗이 청산을 맞아 버린 허영세네 가권이 그 오막살이에 강제택거를 당하게 되었다. 그 가권이란 토지개혁 초기에 -제1차 정치투쟁에서-허영세는 맞아 죽고 순사질 하던 맏아들은 광복 전해에 서울로 나간 뒤였으니까 그 마누라와 둘째 아들 허수빈뿐이었다. 후에 빈농집 딸이었던 엄울순이가 며느리로 들어와서 그 권솔을 이루었는데 순정이와 은정이 딸 둘을 낳았다. 은정이는 어려서 홍역으로 잃고 순정이 하나만 무남독녀로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옛날에 빈농 윤치수가 그 오막살이에서 지주 허영세의 「독재」아래 우마와 같이 살았다면 제2대에 와서는 거꾸로 되어 있었다. 지주의 아들 허수빈이 빈농의 아들이며 당지부 서기인 윤태철이한테서 「독재」를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피독재자의 집」이었다. 그 아이러니칼한 언어가 아들 준호 녀석의 비뚤어진 심통에서 지어져 나온 것임을 윤태철은 썩 뒤에야 알게 되었다. 허수빈과 그 일가가 당한 수난은 세인이 공인하는 끔찍한 것이었다. 지주 성분을 가진 사람들의 운명이 다 그러했듯이 허수빈도 예외 일 수가 없었다. 「유일성분론」이 아니라고는 했지만 그것은 「합리한 이론」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윤태철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건국 후의 역사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격랑과도 같은 정치운동의 연속이었으니까 그들은 늘 공포와 불안 속에서 떨어야 했고, 뭇사람들의 감시와 냉대와 우롱을 받아야만 했다. 지주 허영세의 본댁이었던 그의 모친이 60년대 초까지 생전이었던 까닭에 더구나 기시를 받게 되어 있었다. 「문화대혁명」시기에는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한 시기에는 매일이다시피 「개패」를 걸고 고깔모자를 쓰고 「투쟁」을 당했는데 그 「개패」라는 걸 무거운 널로 짜가지고 가느다란 철사로 끈을 달아 목에 걸었다. 고깔모자도 거칠은 널로 삼각형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한번 쓰고 「투쟁」을 당하고나면 얼굴과 머리가 온통 피투성이가 되곤 했다. 때론 얼굴에 먹칠을 해가지고 개처럼 목을 매어 끌고다니곤 했다. 지주의 아들인데다가 할빈 「대도관 고등국민학교」를 다닐적에 일본 센또보시를 쓰고 찍은 사진 때문에 그런 고초를 당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시달림을 받은 허수빈은 자기의 운명에 곱다라니 순종을 했다. 그는 늘 고개를 숙이고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조심스럽게 걸어다녔고 사람들을 만나면 기계처럼 허리를 곱싹거렸다. 서라면 서고 기라면 기고 짓밟아도 꿈틀거리지 않을 듯했다. 때려도 아픈 줄 모르고 아무리 못살게 굴어도 고통과 번민과 비애 같은 것을 전혀 느낄 줄 모르는 허수아비 같은 존재-그것이 바로 윤태철의 머리 속에 투영되어 있는 허수빈의 이미지였다. 그러다가 후에는 어디 가나 서면 선 자리에서 하늘을 쳐다 보면서 이따금 신비한 웃음을 빙긋빙긋 던지곤 하는 실성모양이 돼버렸던 것이었다. 사람들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걸「암내맡은 둥굴소의 웃음」이라고 비유를 했다. 원래 허수빈은 후리후리한 키에 깨끗한 얼굴을 가진 미남이었다. 더욱이 그 웃는 얼굴은 여인처럼 고왔다. 빈농의 딸이었던 엄울순이가 성분 같은 건 초개같이 여기고 허수빈한테 정을 쏟았던 까닭도 그의 미모 때문이었던 것이었다. 윤태철은 문득 예전에 자기가 몇 번이고 허수빈한테 달갑게 시집을 와서 불운한 운명의 멍에를 선뜻 나누어 맨 엄울순의 그 초시대적이고 헌신적인 애정을 두고 불가사의한 감동을 느끼곤 했던 일을 상기하였다. 그런 엄울순이가 이제는 떳떳한 공민으로 되어 평등한 인권을 누리게 된 마당에 음독자결을 단행했다는 사실은 윤태철에게 당연히 커다란 충격으로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문제의 심각성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적어도 그저 지나쳐 버릴 일이 아니며 뭔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하리라는 의무감 같은 것을 윤태철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바로 그럴 즈음에 아들 준호가 성큼 문을 떼고 들어섰던 것이었다. 「아버지, 허수빈네가 밭갈일 못하고 있는 줄 알고 있습니까?」 준호의 영준한 얼굴이 울분으로 꽉 차 있었다. 윤태철은 준호의 그런 도발적인 질문에는 상관없이 「사람이 어떠냐?」 「허수빈네가 밭갈일 못하고 있는 줄 알고 있는가 말입니다!」 준호는 재차 땅땅 을러메였다. 아들놈의 무례하고 불손한 언동에 윤태철>은 못들은 척 천천히 담배통 뚜껑을 열었다. 담배를 마는 손이 어쩔 수 없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당조직이 살아 있다는 마을에서 꼴보기 좋아요? 공산당원 명색을 달고 부끄럽지들 않습니까!」 「그런 게 아니다. 세진이가 맡기로 했는데......」 「아버지는 뭘 했어요? 아버지는 언제 한 번 그 집을 들여다보기나 했나요? 몇십 년을 천대 속에서 살아온 사람인데 그렇게도 감정이 없는가 말입니다. 아직도 허수빈을 원수로 보고 있는 겁니까? 허수빈>이란 사람이 무엇 때문에 저 꼴이 되었습니까? 누구 탓이예요? 도대체 누구 탓인가 말입니다!」 마침내 윤태철은 강한 성정을 드러내며 아들을 무섭게 노려 보았다. 그의 얼굴이 노기로 파랗게 질리고 있었다. 그 순간에 윤태철은 허수빈의 딸 순정이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들의 가슴 속에 제 애비에 대한 원과 한이 불티처럼 맺히게 했던 바로 그 장본인의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준호가 지금껏 그 원과 한의 응어리를 풀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보복적인 싸움을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에는 놀랍다기보다는 비애 같은 것을 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윤태철>의 마음을 읽었던지 준호는 일순간 웃이빨로 아랫입술을 잘근히 깨무는 듯 감빠는 듯하면서 비웃는 듯도 하고 쓰거운 듯도 한 미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윽고 눈물이 핑 괴어오르는 눈으로 배우처럼 세련된 말을 엮어내었다. 「아버지는 내가 순정이 때문에 그런다고 여기겠지요? 물론 저는 아버지에게 원한이 있어요. 죽어서도 잊지 못할 원한 말이예요. 아버지가 세상 뜬다 해도 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 점만은 이해해 주십시오. 아버지가 공산당원 허울을 쓰지 않았다면 이런 말도 하지 않을겁니다. <당원연계호>를 하라는 것은 당의 지시가 아닙니까? 당의 지시라면 개똥도 황금이라고 내리먹이던 아버지가 아니였던가요?」 다음 순간 윤태철은 자기가 어떻게 불끈 몸을 일으켰고 어떻게 몸을 날렸던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성깔치민 갈범처럼 돼 가지고 아들놈의 따귀를 무섭게 후려쳤던 것이었다. 4 ...... 일순간 윤준호의 왼쪽 눈에서 번개불이 번쩍 튀었다. 기이한 것은 바로 그 찰나에 윤준호는 순정이의 얼굴을 번쩍 보았던 그것이었다. 아무리 안타깝게 떠올리려고 애써도 안개속에 휩싸인 듯 어슴푸레 하기만 하던 얼굴이었는데 뺨을 맞던 그 순간에 그렇듯 또렷이 떠올랐던 것이었다. 윤준호는 아이처럼 와락 울음이 북받쳐서 마당문을 무찌르고 나왔다. 트럭을 질풍같이 달려서 집에 당도하여 가지고 핸들에 얼굴을 파묻어버렸다. 가까스로 참았던 울음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아끼기라도 하듯이 조금씩 조금씩 토해내던 설움의 덩어리가 차츰 통절히 뽑아내는 통곡으로 변하여가고 있었고, 폭풍같이 터져나오는 오열에 온 육신이 뒤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는 윤준호의 망막속에 순정이의 모습이 애처롭게 나타나 있었다. 순정이는 아름다운 인물의 처녀였다. 그녀의 매력은 체구의 곡선미거나 이목구비의 세부로써 나타내는 그런 것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특유의 미였다. 동탕하고 희디흰 얼굴과 풍만하고 보드러운 살결의 몸집은 그저 탐스럽기만 했다. 남자라면 누구나 욕심나는 여체였다. 거기다가 떨리는 듯한 고운 목소리와 웬간한 일에도 얼굴을 활딱활딱 붉히는 표정미와 그리고 늘 꿈꾸는 듯한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너무 고왔기 때문에 「계급의식」에는 눈이 멀어가지고 지주 성분의 가문에다 그처럼 고운 꽃을 무심히 피워놓은 「대자연」을 두고 사람들은 문득문득 그 어떤 불공평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윤준호가 순정이를 사랑했던 것은 결정적으로 그의 미모 때문이었다. 열혈의 생리 속에 눈뜨고 있었던 윤준호의 남성은 무의식 가운데 벌써부터 순정이를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윤준호>는 순정이한테 사랑을 표시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지주 성분 출신의 처녀라는 데서 꺼려서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윤준호쪽에서 오히려 만약 연애 같은 걸 건다면 필경 순정이는 자기를 값없이 여기고 하는 짓거리라고 분해할것만 같은 그런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윤준호는 순정이를 못 잊을수록, 외면적으로는 철저히 무관심한체 했다. 어떤 날 밤이면 이유 없이 순정이네 오막살이집 주위를 빙빙 방황하다가 한숨짓고 돌아서는 질정없는 걸음까지 하면서도 평소에는 늘 그녀를 멀리하곤 햇다. 그러한 자기 모순 때문에 윤준호는 무서운 번민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윤준호는 애정에서의 행운아였다. 그것이 결국은 자신의 남성적 매력과 인격으로 이루지는 것이었지만 그는 굳이 갑자기 나타난 기적같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1973년의 어느 봄날 저녁의 일이었다. 아우 준필이가 난데없는 서신 한통을 남몰래 전해 주면서 순정이가 부탁하더라는 말을 어줍게 했다. 순정이라는 이름에 윤준호는 대뜸 격렬히 뛰노는 가슴이 돼가지고 함부로 봉투를 뜯지 못하고 있다가 한참 뒤에야 조심스레 개봉을 했다. 인싸로프씨!(정혜 오빠, 부디 용서!) ... 저를 지켜 주세요, 한 남자가 짓궂게 집적거리고 있어요. 인격없는 거칠은 남자예요. 저 혼자서는 지켜내기 어려운 이 한 몸이예요! 지켜 주시기를!...저의 몸과 마음 굳건히 지켜 주시기를!...빌어요. 영원히!... 이 한 몸 지켜 줄 이 없는 세상이라면... -예렌나 그 날 밤 윤준호는 그 글월을 열 번도 더 읽고 또 읽고 했다. 그리고 가슴 속에 실린 폭풍 때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순정이의 그 애처롭고 핍절한 고백이 그의 심혼을 송두리채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었다. 준호는 자기를 우러러 볼 수 있는 남자로 여겨주는 것이 감격스러웠던 것이지마는 그보다도 그녀가 자신의 여성적 미모와 인격과 가치를 충분히 믿고서 그러한 대담한 고백을 하여왔다는 그 사실이 순정이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반면에 집적거리고 있다는 남자에 대해서는 질투보다도 까닭없는 분노를 느끼였다. 그 남자가 누구라는 걸 윤준호는 대뜸 짐작해 냈었다. 군부대에 갔다왔던 관계로 대대 민병련장질을 하고 있는 다른 마을 청년이었다. 당시 대대 공청단 총지서기로 있었던 윤준호는 옹근 인격으로 그 민병련장을 압도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윤준호는 드디어 숱한 종이를 허비해가면서 이런 글월을 정성껏 썼다. 짐! 내 인격이 그대를 지켜 줄 수 있는 마음의 탑이 될 수 있다고 믿어 준다면 그 이상 고마운 일 없겠소. 그보다 더 큰 행복 없으리다! 「그러면 나는 즐거운 등에가 되리니 살아서 그렇고 혹 죽더라도 나는 그러리!」 -알털 이렇게 시작되었던 그들의 애정은 깊고 뜨거웠다. 그것이 당연하였던 것은 순정이에 대한 윤준호의 애정이 모든 것을 희생시킬 각오가 돼 있는 무척 헌신적인 것이었다면 순정이의 그것은 윤준호가 희생시키는 대가를 눈물로써 헤아리고서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처녀의 순정을 뜨겁게 바치는 것으로써 거기에 보답을 하려는 그런 충직한 사랑이었던 까닭이었다. 자주 가졌던 밀회에서 그들의 대화는 자연 이렇게 돼가곤 했다. 「전... 미안스런 생각 자꾸만 들어요. 나 때문에 정혜 오빤 앞길을 망치는 거라구.」 「그런 말 말라구, 다시 그런 말 하면 화를 낼테야!」 윤준호는 짐짓 성을 내었다. 그러는 준호였지만 다음엔 또 제쪽에서 「나두 그래. 순정이는 농촌에 파묻힐 여자가 아닌데 성분 때문에 자기를 낮추고 나같은 사람한테 정을 주는 거라구...」 「그런 말 말아요, 그럼 싫어요!」 순정이는 손으로 윤준호의 입을 막으며 응석을 부렸다. 그녀에게서 교태를 볼 수 있는 순간이라면 단지 그럴 때 뿐이었다. 그들은 자연 뜨겁고 충격적인 포옹 속에서 오래도록 말이 없기가 일쑤였는데 기실 그들은 그 침묵 속에서 더욱 많고많은 말을 주고 받고 있었다. 「순정이, 우리들의 혼사를 부모들이 반대하면 어쩌겠느냐구, 왜 한번도 묻지 않지?」 「... 정혜 오빨 믿어요!」 「저희 아버지와 엄만 불쌍해요! 이 다음 크거들랑 아부지와 엄말 즐겁게 해드릴 거라고 어릴 적에 생각했댔어요.」 「염려 말라구. 순정이, 나는 내가 스스로 짊어진 의무가 무엇인가 알고 있어!」 「순정이, 절대 인생을 비관하지 말라구. 우린 평범한 백성으로 성실하게 사는 거야. 거기에서 인생의 참뜻을 찾는 거야.」 「그대의 사랑이 있는 한 저는 더 바랄 것 없어요. 우린 행복 할거예요.」 그들은 자기들의 미래를 막연하게나 확신하고 있었다. 애정의 성공여부는 애정의 힘에 달린 것이라는 신념을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행복했다. 사랑은 토종꿀처럼 달았고 막물딸기처럼 무르익어갔다. 순정이는 차츰 부끄럽게 두렵게 여체의 신비를 열어 주었고, 준호는 그 신비의 늪에 깊이 빠져서 청춘을 불사르고 있었다. 그렇게 2년이 흘러서 비밀의 장막 속에 노저어 가던 애정의 돛배는 드디여 엄연한 현실과 부딪쳐야 할 날이 닥쳐오고야 말았다. 말하자면 현실적으로 봉착한 문제를 풀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었던 것이다. 1975년 여름, 순정이는 이미 임신 5개월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임신이 되는 걸 두려워했지만 정작 그렇게 된 뒤에는 잘된 일이라고 바꾸어 생각했다. 임신까지 하게 되면 부모들은 속수무책이 되어 결국 동의하고야 말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준호의 아버지 윤태철은 실제상 넘기 어려운 담장과도 같았다. 그 시각에 와서 준호는 그걸 불안스레 느끼고 있었다. 아버지 윤태철>은 순정이의 조부 허영세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고, 또한 당시 당지부 서기였던 윤태철은 허수빈을 「산과녁」으로 「계급투쟁」을 하고 있는 때였던만큼 순순히 동의하리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에그 애두, 정신이 있냐? 많고많은 새애기를 두고 하필이면 그런 집 새길... 아버지하구 얘긴 하겠다만 승낙하겠니? 그만두는 쪽으로 생각해보는 게 옳지 않느냐?」 「글쎄 아버지한테 여쭤줘요.」 준호는 쓰라린 실망을 느끼며 일밭으로 나갔다. 그 날 황혼 무렵 일밭에서 돌아온 윤준호는 집안에서 들려 나오는 아버지의 고함소리를 들었었다. 「허귀신과 사돈을 맺다니? 내 눈에 아직 흙이 들어가지 않았는데 제 애비 얼굴에 똥칠을 하려구 들어!」 「이 사람, 순정이 그 애사 무슨 죄가 있다구. 하내비사 못된 양했지만서두.」 할머니가 두둔하는 소리에 이어서 어머니가 대꾸를 했다. 「어머이두, 자식의 장래를 망치겠슴둥?」 윤준호는 마침내 다가올 시각이 왔음을 숨가쁘게 느끼면서 아무때건 당할 일이므로 선뜻 문턱을 넘어섰다. 아버지는 아들을 무섭게 흘겨보다가 훌 외면을 했다. 피우고 싶지 않은 담배를 말고 있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게 앉거라.」 조금 후 아버지의 어조는 좀 부드럽게 되어 있었다. 「긴 말은 하지 않겠다. 너도 어린애는 아니니까... 관계는 즉시 끊어야 하구 잔치 같은 건 당치도 않은 소리다. 올 가을에는 네 입당문제도 의사일정에 오르겠는데 정신이 있느냐? 입당만 하면 현<후계자양성반>에도 가게 될지도 모르는 건데... 어서 방법을 대여 유산이나 시키도록 해라!」 윤준호는 아버지의 얼굴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쓸쓸히 돌아섰다. 「앉지 못하겠느냐?」 「아버지의 말씀에 조그마한 여지도 없는데 뭘 말하겠어요?」 「그래두 이상 사람의 말에 한마디 응대라도 하는게 옳지, 너 버르장머리부터 글러먹었다.」 「... <유일성분론>이 아니잖아요? 아버지가 회의때마다 <현실표현을 봐야 한다>던 말은 듣기 좋으라구 한 소립니까?」 「얘, 네가 그렇게 어리석은 줄 몰랐다.」 「저는 아버지가 자식의 의사를 그처럼 존중해 주지 못할 줄은 몰랐어요. 인젠 부모들의 의사를 무시해 버리고 마음대로 하겠으니 그리 아십시오. 우리는 외지에 도망가서라도 살겁니다!」 윤준호는 이런 최후통첩과도 같은 말을 남기고 유유히 집을 나와버렸다. 청천벽력이 떨어졌던 것은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푸름해서 일찍 기침하셨던 할머니가 준호의 방에 들어와서 어깨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웬 편진데... 방문 앞 툇마루에 놓엿구나.」 윤준호는 눈을 비비며 할머니의 손에서 어정쩡히 편지를 넘겨 받다가 깜짝 놀랐다. 분명히 순정이의 편지였는데 툇마루에 놓여 있었다는 게 괴이하게 여겨져 얼른 봉투를 뜯었다. 정혜 오빠! ... 저는 가요, 가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가요. 그대 곁을 떠나서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는, 태어나서는 안되는 어린 생명을 품은 채 가요. 정든 님의 핏덩이를 고이고이 지니고 이 몸은 영영 떠나갑니다. 부디 제가 이 길을 선택한 걸 용서하세요. 저도 그렇고 그대도 그렇고 어린 생명한테도 그렇고 다 좋을 거예요.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을, 허황한 꿈이었던 것을!... 날이 밝으면 구룡천 돌다리로 나오셔서 저의 이름 한 번만 불러 주세요. 그러면 죽어서도 눈을 감을 것 같아요. 부디 행복하세요! 1975년 7월 11일 새벽 -그대의 「짐」올림 윤준호는 화닥닥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옷을 부랴부랴 주워입고 정신없이 구룡천쪽으로 냅다 뛰였다. 돌다리에 이른 윤준호는 기가 떡 막혔다. 장마통에 불은 싯누런 물은 와와 소리치며 어마어마하게 포효하고 있었다. 그런 물에서 시체를 찾는다는 게 막연하기만 했다. 「순정이, 왜 이래? 왜 이리 못났어? 나보고 말 한 마디 없이 이게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이냐구? 엉? 순정이, 순정이!......」 윤준호는 풀썩 무릎을 꺽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울고만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강변을 따라 내려갔다. 그렇지만 순정이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반나절이나 헤매다가 끝내는 지쳐가지고 실성한듯 멍하니 강물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순정이 어머니 엄울순이가 애읍을 터뜨리며 나타났을 때에야 준호는 정신이 들었다. 「에그-순정아!... 웬 일이우? 이 사람? 이게 웬 일이우?」 그러면서 꼬깃꼬깃 접은 종이쪽지를 윤준호한테 건네 주었다. 역시 순정이의 유서였다. 불쌍하신 아버지, 어머니! 이 글을 보시고 부디 놀라시지 마시고 너무 비감해 마시기를 불초소녀 비옵니다. 불행하신 아버지 어머니께 청천벽력으로 될 줄 모르는 바 아니오나 제 한 몸 평안코자 부모님 슬하를 하직키로 마음먹었아오니 너그러이 용서하세요. 이 딸자식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 어머니의 불운한 인생을 서럽게 목격하여 왔어요. 그래서 제가 크거들랑 아버지 어머니를 꼭 잘 모시옵고 만복을 누리도록 해드리자고 백 번도 더 맹세하였사온데 그 소망 실행치 못하고 급급히 하직하는 이 마음 괴롭기 그지없어요. 하오나 가지 않으면 안될 몸이오니 가엾은 딸자식 팔자소관으로 여겨 주시고 너무 상심치 마시기를 다시 한 번 비옵니다. 가엾은 어머니, 불쌍하신 아버님을 끝까지 잘 돌봐 주세요. -불초녀식 순정 올림 그 유서에도 갑자기 삶을 포기하게 된 원인 같은 건 똑똑히 적혀있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세요? 어제밤 무슨 일이 있었어요?」 「모르겠네. 엊저녁 집의 아버지가 순정이를 불러 내갔는데... 할말이 있다구.」 「우리 아버지가요?」 「밤중까지 들어오지 않길래... 기다리다 못해 잠들었는데... 에구, 이럴 변이 어디 있소?」 윤준호는 마침내 아버지의 수작임을 번쩍 깨달았다. 아들이 견결히 나오니까 순정이쪽을 협박하여 떼어버리려 했던게 분명하다고 느껴지고 있었다. 윤준호는 머리속을 꽉 채워오고 있는 의혹을 한시라도 급히 풀고싶어 부리나게 집으로 돌아왔다. 「...왜 죽었어요, 순정이가? 순정이가 왜 죽었어요?」 아버지는 잠간 당황한 기색이 되었다가 차츰 고집스런 얼굴이 되었다. 「엊저녁에 뭘 했어요? 순정이를 불러내다가 무슨 말 했는가 말입니다.」 「... 관계를 끊으라구 했다. 그리구 유산을 하라구 했는데 그게 못할 소리냐?」 「유산이요? 어떻게 유산을 해요? 아버진들 제 핏덩이를 긁어 치울 수가 있는가 말입니다. 그렇게 지독할 수가 있는가 말이예요!」 윤준호는 울분을 삭일 수 없어 아궁이 앞에서 도끼를 쥐어들고 가마뚜껑을 단박에 박살을 냈다. 그리고 찬장을 마구 부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울면서 빌고 말리고 해서야 광기를 멈추고 도끼를 떨어뜨렸다. 그 맵시로 벽에 이마를 붙이고 서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 후 윤준호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매일 강변을 오르내리며 헤매었지만 순정이의 시체를 찾지 못했다. 그러기를 열흘만에 윤준호는 마침내 포기하고 석동 저수지 공사장으로 일하러 가고 말았다. 더는 집에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뒤의 어느 날 순정이의 시체를 찾았다는 소문이 풍편에 들려왔다. 구룡천 돌다리에서 십여 리 되는 지점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미 모습을 알아볼 수 없는 여자의 시체였다는 것이고 순정이로 인정되었다는 것이었다. 윤준호는 즉시 주먹을 부르쥐고 마을로 돌아왔다. 순정이는 이미 구렝이령 위에 묻힌 지 사흘이 되어 있었다. 그는 죄없는 어머니에게 왜 알리지 않았느냐고 울화를 터뜨렸다. 어머니 말이 인정있는 마을 사람들이 준호한테만은 꼭 알려야 한다고 했으나 아버지가 주장하고 묻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윤준호는 순정이의 죽은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독하게도 그것마저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 준호는 그 걸음으로 순정이의 무덤으로 올라갔다. 무덤 앞에 술 한잔 부어 놓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조용히 순정이를 불렀다. 「순정이, 내가 왔어, 준호가 왔어... 순정이를 사랑하는 준호가 왔어. 그대를 행복하게 해주리라고 생명으로 맹세했던 사람이 온 거야. 그대 맘속의 탑이 되고 그대 인생의 기둥이 되리라던 사나이가 온 거야!... 순정이, 나는 못난이야. 나는 내 책임을 다하지 못했어. 순정이 앞에 죄를 졌어. 내가 순정이를 죽였어!... 그렇지만 순정이, 어찌 그럴 수가 있어? 왜 이렇게 가는 거야? 이런 법도 있느냐 말이야! 아버지가 아무리 관계를 끊으라구 협박하고 유산을 하라고 강요한대두 내가 있지 않아? 이 준호가 있지 않느냐구!... 나를 믿는다구 하구서, 굳세게 살겠다 하구서두 나한테는 말 한 마디 없이 이게 무슨 짓이냐? 엉? 순정이, 왜 죽어? 왜 죽느냐 말이야!」 순정이를 영영 잃어버린 윤준호는 갑자기 딴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침울한 울분이 얼굴에 진을 치고 있었고 해종일 가도 말 한 마디도 없는 「침묵의 괴한」으로 돼버린 것이다. ...아버지, 「볼세비키 윤태철」에 대한 윤준호의 원과 한은 이렇게 마음속에 새겨졌던 것이고 침전된 앙금처럼 가슴 속에 응어리로 맺히게 된 것이었다. 5 「말로 해도 될 일을 가지구 왜 이러우? 그 애 마음이 오죽하면 그러겠수? 그 애한테 누원을 끼친 게 누구게? 당신은 그래두 난 가슴이 아프오!」 아들의 뺨을 쳤던 <윤태철이 뿌리치듯 집을 나섰던 것은 눈물을 덤벙덤벙 쏟으며 불문곡직 아들 역성을 드는 마누라의 푸념을 듣기 싫은 것도 있었지만 그게 아니라도 금방 평형을 잃고 휘딱 뒤번져진 가슴으로 그대로 집안에 죽치고 앉아있을 수는 도저히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노기로 푸들푸들 떨리는 가슴을 주체 못한 채 마을 뒤로 무작정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을 걷다가 저절로 발길이 멈추어졌다. 질정없는 마음에 행방없는 걸음이였던 것이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서 집집마다 전등불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윤태철은 무심히 밤하늘을 아득히 바라보았다. 짙은 암록색의 야공에는 잔별들이 신비스레 깜빡이고 있었다. 그는 문득 자기가 참으로 오래간만에 이렇게 하늘의 성진세계를 구경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웬 일인지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눈언저리에 뜨겁게 맺혀오고 있었다. 그 때 술 생각이 났다. 술 마시는 일이 고역이나 진배없는 윤태철이었지만 이 순간에는 음주욕이 드세게 동해오고 있었다. 그는 식료품 상점에 들러서 떠파는 소주 석냥을 종지에 받아가지고 뜨거운 숭늉 마시듯 조심스레 불다가 쭉-기울였다. 그리고는 포도주 한병을 더 사가지고 나와서 마음이 지시하는대로 늘쩡늘쩡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면서 26년 전 어느 날 밤의 자기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날도 윤태철은 대대공소부에 들려서 배갈 반근을 다모토리로 마시고 역시 8도짜리 붉은 술 한 병을 사들고 손왈세 지서네 집으로 향하였던 것이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 때는 지금처럼 호기와 탄력을 잃은 늙은이의 행보가 아니고 젊음에 넘치는 씩씩한 발걸음이었다. 1948년도 비밀당 때에 당에 가입을 했던 「토개간부」이고 구룡골 농업합작화 운동의 선도자였던 손왈세 지서가 엄동설한에 기름진 논답을 석자 깊이로 심경을 하라는 당의 지시에 불복했던 탓으로 「흰기」로 뽑혀가지고 눈 깜박할 새에 철당철직을 당하던 대회석상에서 윤태철은 그만 머리를 푹 숙이고 말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뛰어나가서 연단이라도 탕탕 두들겨대며 울분을 터뜨리고 싶었지만 감히 그러지를 못하고 있는 자신이 괴롭고 슬펐던 것이다. 당 규율에 대한 자각성도 자각성이려니와 까딱 잘못하면 영광에 찬 당의 품에서 쫓겨나게 된다는 꿈 아닌 엄연한 현실 앞에서 그 충동적인 발걸음을 차마 내디딜 수가 없었던 그였다. 그 수치와 그 절망을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윤태철>의 정직한 생리였다. 게다가 당장에서 손왈세의 당지부서기 자리에 윤태철을 임명한다고 선포됐을 때 윤태철은 괴로운 곤혹에 모닥불을 뒤집어쓴듯 얼굴이 뜨거웠다. 손왈세 지서한테 미안하다기보다는 발등을 디디고 들어서는 것만 같은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죄의식을 느꼈다. 그 날 밤 윤태철은 술 한 병을 들고 가서 밤새껏 괴로움을 나누었던 것이었다. 윤태철이 손왈세 노인을 존중하는 까닭은 자신에 대한 그의 선배답고 연장자다운 사랑과 이해에 있었다. 상급 당의 지시를 거역한 죄로 「흰기」로 뽑혔던 자신에 대해서 일언반구 후회하는 일 없으면서도 윤태철한테는 절대로 자기의 길을 걷지 않도록 충고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였다. 그러면서 언제나 윤태철>의 사업을 뒤에서 성심껏 받들어 주었던 손왈세였다. 세월이 썩 흐른 뒤에도 기층 당 간부의 고민과 곤혹을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추고서 「흰기」로 뽑혔던 일을 윤태철 앞에서 과오로 뉘우쳤던 손왈세 지서였다. 그래서 윤태철은 괴로울 때마다 그를 찾아가서는 때론 심각하게 때로는 술주정을 부리는 체 농을 써가며 마음을 풀곤 했던 것이다. 손왈세 노인네 집에는 마침 아들과 며느리가 마실을 나간 모양으로 늙은 양주와 아이들만 있었다. 그들은 윤태철을 반갑게 맞아 주었고 손에 든 포도주병을 보고는 무척 즐겁게 웃었다. 윤태철은 안주인한테 술잔을 달래가지고 유리잔 두 개에다 포도주를 찰찰 넘치게 따라서는 두 양주에게 권했다. 「두 분이 이렇게 잔을 딱 마주치고 마셔야 합네다.」 「윤 서기가 권하는 술이사 마셔야지, 자, 당신두 드우.」 윤태철이 이제는 깡말라서 억센 골격만 남은 듯한 체구라면 손왈세노인은 너부죽한 얼굴에 둥둥 부은 듯한 살집 좋은 몸이었으나 높은 혈압에 헐헐 숨가빠하는 노약자였다. 그렇지만 그는 포도주 한잔을 흔쾌히 마셨다. 「손 지서 어른, 내 아무리 궁리해봐두 우리가 정말 못났수다. 손지서두 그렇구 나두 그렇구...제일 똑똑치 못한 사람이 바루 우리들이로소이다.」 윤태철은 고개를 깊이 꺽고 앉아 개탄하듯 입을 열었다. 손왈세 노인은 빙긋이 미소를 머금고 방문쪽을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끄덕하고 있었다. 「제 딴에는 잘 하느라고 몇십 년을 뛰어다녔는데 나중에는 <죄인>이 되었으니 어떡헙네까? 두뇌없는 <순복도구>로 됐으니 어떡헙네까? 강덕교처럼 도리머리나 흔들고 애나 맡겼으문 <영웅>이나 되지유.」 「흠...흠...」손왈세 노인은 여전히 머리를 끄덕끄덕거렸지만 그의 표정에 엷은 고소가 떠올라 있었다. 호도거리 농사가 시작되고 많은 경우 시비와 흑백과 음양이 예전과 위치가 뒤바꿔진 마당에서 당의 사업에 대해서 언제나 도리머리를 흔들며 집행하지 않았던 낙후 당원 강덕교가 갑자기 제가 언제나 정확하고 진리를 견지했던 영웅인 것처럼 우쭐하고 나서는 꼴을 보고 머금었던 바로 그 쓰겁고 가소로운 미소였다. 「마지막에는 아들놈한테까지 괄시를 당하구... 당의 지시라면 개똥도 황금이라구 내리먹인 쇠통 제 정신은 없이 살아온 놈이 됐으니 한심하지 아니하옵네까?」 「그 애들이 알턱이 있나? 우리 기층간부들의 속사정이야 아무도 모르지. 아무도 몰라! 음-」 손왈세 노인은 색색거리는 음성으로 힘겹게 말하고는 괴로운 한숨을 토해내며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의 머리 속으로 역사의 격류가 스쳐 흐르고 있음을 윤태철은 분명히 보고 있었다. 이제 윤태철은 노기가 사라지고 그 대신에 심각한 고민 속에 잠겨있었다. 자기 혼자만의 일로서가 아니고 손왈세 노인을 포함한 모든 양심적인 기층당원들이 당했던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것으로 그 고민을 가슴속에 수용하고 있었다. 「여기 누우소, 윤 서기.」 한 잔 포도주에도 소르르 취하는지 손왈세 노인은 먼저 목침을 베고 눕더니만 앓음소리 같은 한숨을 또 길게 토해 내었다. 윤태철이도 나란히 누워서 두 눈을 꾹 감았다. 또다시 26년 전 그날 밤에 손 노인과 이렇게 나란히 누워서 날을 밝혔던 일이 선해졌다. 그리고 자신이 꿰뚫고 달려온 격랑과도 같은 역사의 현장이 생생히 떠오르고 있었다. 윤태철은 급기야 역사의 자욱한 안개를 헤치고 먼 곳에 서서 전혀 새로운 시점에서 자신의 「볼세비키적 인생」을 돌이켜 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의식의 굴절을 거친 뒤의 자신의 과거에 대한 평가였고 검토인 것이었다. 군대에서 귀환된 후의 30년은 실지는 아득히 먼 세월이었지만 윤태철에게는 하루밤의 짧디 짧은 꿈결인 것처럼 자꾸만 느껴지고 있었다. 식을줄 모르는 정치적 격동과 혈색의 충성심으로 가슴을 끓이면서 눈코뜰새 없이 분전해 왔던 까닭에 그렇게 느껴지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해마다 시기마다 내려오는 중앙의 노선, 방침, 정책과 상급 당의 지령, 지시, 결의 등을 받아가지고 내려와서는 그것을 전달하고 집행을 하고 시달정황을 다시 위에다 회보하고 하는 일이 수십 번 수백번 반복이 되는 가운데 후반생이 꿈결처럼 흘러가 버렸던 것이다. 지나간 역사는 마치도 강력하고도 신묘한 기계와도 같이 숱한 정치술어와 명사들을 새록새록 지어내었고 그것들 다시 쭉 배열해 놓으면 지난 역사가 되는 것이었다. ...「인민공사」, 「대약진」, 「세폭의 붉은기」, 「위성발사」, 「심경」, 「공공식당」, 「강철제련」, 「3년재해」, 「대식품」, 「사회주의 교육운동」, 「4청운동」, 「계급투쟁」, 「노선투쟁」, 「기본고리」, 「혁명을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 「산과녁」, 「문화대혁명」, 「주자파」, 「노작을 학습활용」, 「임표와 공구를 비판」, 「유가와 법가」, 「소근장을 따라 학습」, 「소생산」, 「송강을 말에서 끌어내려 능지처참」, 「자본주의꼬리」, 「우경번안풍」, 「대채를 따라 배우는 운동」, 「대체평공」, 「제전」, 「대회전」, 「우경보수사상」, 「자본주의 복벽」... 이러한 숱한 정치적 술어와 낱말들 모두가 윤태철의 입에서 격동적이고 어마어마한 음향으로 변하여가지고 구룡대대 당원들과 간부들에게 전달이 되고 나중에는 군중운동으로 번져가곤 했다. 그런데 오늘날 지난날의 모든 시비와 흑백과 음양이 많은 경우 조화속에서처럼 그 위치가 휘딱 뒤바뀌어진 오늘날에 와서 뒤를 돌아다본즉 그렇듯 격동적이고 헌신적이었던 자신의 후반생이 기본적으로 그릇된 것으로 되어 있었고, 자기 「볼세비키 윤태철」은 「당의 말」(지금 보면 근본적으로 오류적인 그 말)을 그대로 받아 외우기만 한 「앵무새」로, 두뇌라곤 전혀없는, 준호의 말처럼 「당의 지시라면 개똥도 황금」이라고 내리먹인 어릿광대와도 같은 「순복도구」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피를 물려 준 아들한테서 「훈계」를 듣게 된 것이었고 공산당원으로서의 존엄과 부친으로서의 인격도 아들놈의 발밑에 헌신짝처럼 모욕을 당하는 순간이 빚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 그것이 나 일 개인의 책임으로 되어야 하는 것인고? 과연 불쌍한 우리 기층당원들의 죄일꼬?) 윤태철은 이러한 의혹에 찬 울분의 항의를 무심한 하늘에 대고 부르짖어 보았다. 그는 무엇인가 억울한 것만 같았고 그러한 평가가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았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당 규율을 무시하고 자기의 견해와 배짱대로 처사할수 있는 당원질을 하기란 기실 식은 죽 먹기인 것이다. 지난 세월에 당에서 하라는 일들이 윤태철의 마음에도 내키지 않았던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렇지만 윤태철은 무정무심의 강유력한 당규율과 다감다정하고 유분별한 마음과의 모순에서 오는 고민과 곤혹 속에서 결국은 일체를 무조건적으로 당 규율에 복종하는 것을 철 같은 삶의 신조로 삼아왔다. 그는 당을 믿었고 또한 당에서는 그렇게 하도록 가르쳤던 것이다. 허수빈 일가에 대한 문제에서도 그랬다. 윤태철은 마음 속으로 그들이 불쌍할 때가 많았다. 아픔을 아는 생명체로, 희노애락의 감정이 물처럼 출렁이는 인간으로 보아질 때 어쩔 수 없이 연민과 동정에 사로잡히곤 했던 것이지만은 그것은 한순간의 「인간적인 충동」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당의 계급론을 철저히 믿었던 것이다. 지주 아들 허수빈은 늘 제 애비적의 「천당」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기회만 성숙되면 복벽을 할 것이라고 믿었고 「무산계급강산」이 저런 사람들에 의해 뒤엎어질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허수빈과 그 일가에 대해서 인민대중의 사회에서 소외시켰던 것이고 사실상의 독재를 실시했던 것이었다. 아들 준호가 순정이와 짝을 지으려 했을 때 윤태철은 아들이 미친 놈으로밖에 보여지지가 않았던 것이고 「볼세비키 당지부 서기 윤태철」과 「귀신 허수빈」이 사돈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하늘 아래에서는 도저히 용납이 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당은 허수빈을 「귀신」이 아닌 떳떳한 사람으로 평등과 인권을 누리고 행사하도록 혜택을 주었다. 게다가「볼세비키」들이 「연계호」를 맺어가지고 그들을 위해 헌신까지 하도록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볼세비키 <윤태철」에 대한 역사의 짓궂은 희롱이었다. 이제 윤태철의 앞에는 그러한 역사의 희롱을 달갑게 접수하느냐 아니면 울분으로 거부하느냐 하는 하나의 선택문제가 가로놓여 있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또다시 당의 의지대로 「두뇌없는 순복도구」로 등장이 되어가지고 -아들놈의 조소와 풍자의 대상이 되어가지고- 허수빈이라는 이 빈곤호를 맡아나서느냐 아니면 그 어떤 자존심과 오기로써 철저히 외면을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들 윤준호와의 싸움이었고 「볼세비키」와 「인간」사이의 갈등이었다. 6 「준호야. 들어오너라 저녁 먹어야지, ...어서!」 폭풍같은 설움을 쏟아내고서 그대로 우두커니 앉아있을 때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호호백발에 한복차림의 온통 하얀 할머니가 어둠 속에 조그맣게 서 있었다. 윤준호는 아이처럼 순순히 트럭에서 내렸다. 자기 때문에 할머니가 퍽 시장하시리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쳐지났다. 언제나 손자가 오지 않으면 열밤이라도 밥상을 차려놓은 채 밥술을 들지 않고 기다리곤 하는 할머니었다. 준호는 세수를 하고 밥상에 마주앉았다. 할머니가 차려 놓은 밥상에는 언제나 준호를 위해서 마련된 별식이 있었다. 육류거나 어류, 알류로 만든 반찬이었는데 그것들은 윤준호가 할머니를 대접하려고 사들이는 음식재료들이었지만 거지반 준호의 입으로 들어가곤 했다. 오늘은 두부장과 햇배추김치 외에 닭알 네 알이 준호앞에 놓여 있었다. 할머니가 그저 잡수시는 시늉이나 내려고 닭알 한 알을 밥공기 위에 얹어놓고 있는 걸 보고 준호는 「할머니 더 잡숴요. 이걸...」 닭알사발을 들고 할머니 앞에 두 알을 부리우려는데 「에그-여기 있잖냐? 네나 먹어라.」 할머니는 밀막다가 방법이 없는 듯이 한 알만 부리우고 기어코 되밀어 주었다. 「그래, 순정이 에미 어떻냐?」 「별일 없을 거예요.」 「그럼 됐다. 한뉘 고생하던 게 죽어서야 쓰겠니? 사람 같은 게 없네라. 이 큰 동네에서 좀 돌봐줬으문 어떻겠냐. 순정이 할애비사 못된 양 했지만서두 그 자식들이사 무슨 죄가 있다구.」 할머니는 화가 난 듯이 세차게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이것은 할머니가 예전부터 늘 외우던 말이었다. 준호는 문득 할머니가 참 사리가 분명한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일자무식의 할머니의 입에서 너무나 쉽게 번져져나오곤 했던 그 말이 워낙은 이 세상의 진리였다는 점이 준호를 감동시키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위대한 이론」으로 사람들의 머리를 혼미하게 만드는 정치가들이 때로는 무지한 백성보다 명석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윤준호는 금방 쓸쓸해져 있었다. 「내 아까 가 보았다. 순정이 애비 그 사람 저녁획책두 없이 우두커니 문앞에 있는 걸 보구 밥과 찬을 갖다 주고 왔다. 내일 아침은 꼭 해자시라고 당부하구 왔지만서두... 그 곱던 사람이 글쎄 에휴!-」 할머니는 땅이 꺼지게 탄식을 했다. 준호는 놀랍게 할머니를 건너다보다가 머리를 푹 수그리며 다시 숟가락을 놀렸다. 코마루가 시큰하게 터져오는 설움에 입에 떠넣고 있는 것이 밥이 아니고 눈물인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허수빈한테 반찬을 갖다준 할머니의 고마운 소행이 10년 전의 옛일을 떠올려 주는 것이다. 순정이와의 연애가 아직 아무도 모르는 비밀로 되어있을 때 놀랍게도 할머니는 귀신처럼 그걸 눈치채고 있었다. 어느 날 할머니는 누구도 몰래 돈 5원을 화장품이나 사라며 순정이 손에 슬그머니 쥐어주었던 것이다. 그날 밤 순정이는 그 이야기를 숨가쁘게 준호한테 직고를 했다. 그러며 순정이는 눈에 띄게 감격과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할머니가 자기를 손자 며느리로 인정해 주고 있다는 그것이 순정이를 감격시켰던 것이다. 순정이는 그 돈을 쓰기가 아까워서, 그 돈을 함부로 써버리고 나면 뭔가 귀중한 것을 잃은 것만 같을까봐서 몇 달이고 꽁꽁 간수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밥상에서 물러앉은 윤준호<는 울분과 슬픔의 자취가 역력한 얼굴로 설거지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괴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언젠가 어릴 때 저렇게 작디작은 모체에서 어떻게 아버지와 같은 기골이 장대한 사나이가 낳아졌을까 하고 의뭉스런 생각을 해보았던 자신이 생각났다. 그처럼 워낙 왜소한 체격의 여인이었는데 이제는 춘추 79세로 삭정이처럼 깡말라서 불면 날릴 것만 같이 갑삭했다. 얼굴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쪼글쪼글하고 검버섯이 돋아 있었고 치아가 다 빠져 호물때기가 되어 있었다. 윤준호는 그런 고령의 할머니를 지금 자기의 「식모살이」를 시키고 있는 것이다. 준호가 할머니를 모시고 집을 잡고 따로 난 지도 벌써 3년이 지났다. 아버지와의 불화가 근본원인이었지만 분가의 직접적인 계기는 아우 준필이의 결혼이었다. 외토리로서의 자신의 청승맞은 꼴도 꼴이려니와 자기를 대할 아우와 제수의 처지를 고려해서 분가를 단행했던 것이었다. 장가를 들어야 할머니를 고생시키지 않겠는데 그렇게 되질 않고 있었다. 순정이를 못잊어서라기보다도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울분의 시위였다. 설흔 두 살을 먹도록 그저 노총각으로 늙어가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의 마음은 결코 평안스럽지는 못할 것이라 했다. 그는 그런 무모한 독신주의로서 아버지, 「볼세비키 윤태철」을 굴복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버지한테나 자기한테나 피차 잔혹하고 무모한 짓거리인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그런 가벼운 도리로서는 뿌리깊은 야심적인 오기를 도저히 짓눌러 버릴 수는 없었다. 이 때 어머니가 문을 떼고 들어섰던 것이다. 신발을 벗기 전부터 어머니는 눈물부터 덤벙덤벙 쏟고 있었다. 「얘야, 너무 섧게 생각지 말아라. 아버지라구 미워서 그러겠니? 그저 눌러 생각하구 예전의 일을 싹 잊어라.」 「... 어쨌게?」 「애비라는게 다 큰 자식 뺨을 치니 글쎄. 에그 한 번 이럴 적마다 속이 상해 어디 살겠슴둥.」 「인정머리 없네라. 네 애비... 지각머리 없네라!」 할머니는 노여워서 어머니를 훌 외면하고 돌아앉았다. 그 거동은 마치 어머니한테 화풀이하는 것처럼 보여지고 있었다. 「그리구 인젠 너도 성가를 해얄게 아니냐? 에미 속 좀 자그만치 태워라!」 어머니는 재차 북받치는 설움을 손수건으로 훔치고 있었다. 윤준호는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릴 수가 있었다. 어느 부모인들 서른살을 넘기도록 장가갈 기척이 없는 아들을 보고 가슴 아프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준호는 자기를 위로하러 온 어머니의 방문이 그닥 반갑지가 않았다. 어머니는 순정이와 그 일가에 대해서 감정이 없었다. 특히 순정이 어머니 엄울순이 앞에서 당지부 서기 여편네로서의 월등감을 풍기기 좋아했고 공공연히 업신여기곤 했다. 순정이와의 혼사도 아버지와 함께 음으로 양으로 반대했던 어머니였다. 단지 준호가 지금 아버지를 상대로 해서 버티고 있는 울분의 시위 앞에서 어머니도 함께 마음에 상처를 받고 있을 뿐인 것이다. 윤준호는 어머니의 푸념을 귀등으로 흘려듣고 있다가 어머니가 돌아가기 바쁘게 이부자리를 내어다 폈다. 그는 언제나 방에 올라가 자지 않고 정지간에서 할머니와 나란히 눕곤 했다. 할머니의 고독을 염두에 둔 것이라기보다는 할머니 앞에서 예전처럼 귀여움을 받는 어리궂은 손자로 되고 싶었다. 할머니 역시 지금껏 준호를 응석받이 손군처럼 여기고 귀여워하고 있었다. 단지 이제는 어른으로 장성한 손자가 면구스러워 할까봐 드러내 놓고 표현을 못할 뿐이었다. 준호가 자리에 누우면 할머니는 그가 잠들기를 기다려서는 몇 번이고 따뜻한 손바닥으로 이마의 땀을 훔쳐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하는 것이다. 윤준호는 그대로 잠든척하고 할머니의 애무를 받아주곤 했다. 준호는 옷을 벗고 자리에 누웠다. 내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차를 몰고 나가야 하기에 일찍 자야만 하였다.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고요하게 잠을 청했지만 아까 저녁에 아버지한테 울분을 터뜨렸던 일이 다시금 생각났다. 너무 무례하고 불손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울분을 풀 수가 없었던 것이다. 준호는 기실 노쇠한 아버지가 허수빈네를 맡아 밭갈이 할 것을 바라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남의 생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노릇만 하고 있는 다른 젊은 당원들에 대한 원망과 울분까지 아버지 한몸에 퍼부었던 것이다. 그리고 윤준호는 허수빈 양주의 기본생활 담보문제를 당원들에게 기탁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순정이 앞에서 맹세했던 스스로 짊어진 의무를 잊지 않았던 것이고 그것을 남몰래 이행하느라고 지금 억척같이 분투하고 있는 것이었다. 순정이가 죽은 후 윤준호는 석동 저수기 공사장에 민공으로 가서 자동차운전기술을 배웠다. 저수지 공사장에서 돌아와서 생산대대의 트럭을 몰다가 호도거리 농사가 시작되자 헐값으로 차를 넘겨 받았던 것이다. 작년 한 해에 석탄실이로 트럭값을 몽땅 뽑아내었다. 올해부터 버는 돈은 수입으로 되는 셈으로 만 원쯤 뽑아내는 것은 파악이 있는 일이었다. 준호는 그 돈을, 말하자면 1전 한 푼 곯지도 많지도 않은 지페 만원을 꽁꽁 묶어서 순정이 아버지와 어머니께 드릴 결심이었다. 그걸 한밑천 잡아가지고 돼지치기라도 벌리면 번다한 농사에 매달리지 않아도, 그리고 남의 힘을 빌지 않아도 살아가는 걱정은 없을 것이었다. 그 다음은 자식된 도리를 이행하는 절차로 또 한두 해 그만큼한 액수의 돈을 벌어서 부모님들한테 드리고 그런 연후에는 순정이의 무덤에 올라가서 하직을 고하고 고향을 훌쩍 떠나버릴 타산이었다. 그것은 흘러간 모든 과거와의 고별임과 동시에 새롭게 지향하는 그의 인생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준호는 이런 생각을 고요히 굴리다가 깊은 잠 속에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7 윤태철은 손왈세 노인의 집에서 그대로 통잠을 잤다. 깨었을 때 날이 희붐히 밝고 있는지라 슬그머니 일어나서 집에 돌아왔다. 뜨락에서 잠깐 머뭇거리다 외양간에 들어가서 우선 소여물부터 주기 시작했다. 삼태기로 썰어놓은 벼짚을 담아서 통나무 구유가 넘쳐나게 채워 놓고 뜨스한 물에 흐트러지게 퍼지운 콩깨묵을 자루달린 쇠바가지로 푹푹 떠서 소짚에 골고루 버무려 주었다. 소들은 여물 속에 주둥이를 틀어박고 맛나게 먹어대고 있었다. 집체우사를 헤칠 때 제비놀음으로 뽑은 나릅짜리 암소와 지난 겨울에 새로 세워 놓은 성깔있는 둥글소였다. 윤태철은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서 소들의 왕성한 식욕을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지켜보고 있는 그 얼굴에 울분으로 반죽된 깊은 사념이 고요히 진을 치고 있었다. 지난밤 윤태철은 자정이 넘어서야 잠들었다. 두 개의 선택점에서 어느 하나를 종시 선뜻이 결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아들 준호 앞에서 도저히 자신을 굽힐 수가 없었다. 무례하고 불손한 아들놈의 훈계에 좇아 이제 허수빈네 논갈이를 해 주고 그들을 「연계호」로 맡아나서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너무나 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들놈의 눈에는 당의 지시이기 때문에 「집행」을 하는 가련한 짓거리로 보여질 것이고, 자기는 역시 「순복도구」로 비쳐질 것이라는 걸 생각하자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모욕이었고 인격의 참혹한 패배로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가슴에 치솟았던 노기와 울분이 일단 수그러지고 차츰 냉정해짐에 따라 그의 생각은 달라져 가고 있었다. 성격 같아서는 아들놈과 끝까지 버티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허수빈네 실지 처지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호주가 실성 모양이 된 데다가 부림소는 물론 일절 농기구들이 갖추어져있지 않는 집이니까 제 손으로 농사를 짓지 못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곁에서 도와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살아갈 수가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당소조에서 세진이한테 맡겼던 것이었는데 그 녀석이 훌쩍 도시로 떠나버린 터여서 당분간 관계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제라도 누군가 나서서 허수빈네 농사를 걱정해 주어야 할 것이었다. 페농이 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노릇 못하는 것이 그의 탓이 아니고 지나간 역사가 빚어낸 결과라고 볼 때 그것은 더구나 외면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이 됐다. 문득 준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가 퍼부은 울분에 찬 언사들이 새삼 상기되고 있었다. 그의 말이 옳은 것만은 사실이라는 느낌이 어쩔 수 없이 갈마들고 있었다. 그것이 비록 무례하고 불손한 것이었으되 부정할 수 없는 쟁쟁한 정의의 항변이었음을 윤태철은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야릇한 비애와 불가사의한 자비감이 그의 가슴에 엄습해 왔다. 기이한 것은 그런 자비감이 불끈 솟구치는 굳은 결의를 유발시킨 그것이었다. 그는 허수빈네를 자기가 맡으리라 했다. 당소조에서 토론하고 다른 젊은 당원들한테 맡길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 짐을 자기가 기어이 빼앗아 메리라 했다. 자신에 대한 역사의 희롱을 달갑게 받아 안으리라 했고, 아들놈 앞에서 주저치 않고 「두뇌없는 순복도구」질 하리라 했다. 그것은 흘러간 역사에 대한 울분이었고 아들놈한테 향하여진 「볼세비키적 오기」였다. 윤태철은 지금 소들의 먹새를 지켜보면서 지난밤의 결단을 다시금 검토하고 음미해 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보슈, 오늘은 쉬여야지유?」 문득 윤태철은 둥글소의 어진 눈망울에서 이런 무언의 질문을 읽었다. 말못하는 짐승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마음을 아릿하게 찢고 스쳤다. 이 성실한 노동력들은 벌써 보름째 멍에를 벗어본 날이 없었던 것이다. 고역에 식미를 떨굴까봐 걱정되었다. 윤태철은 오른손 엄지와 식지로 턱 밑을 안타깝게 꾸깃거리다가 힘껏 쥐여 비틀었다. 「... 참아라, 이제 네댓새만 참거라!」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며 외양간을 나섰다. 그는 헛간에 들어가서 깨끗이 씻어서 정리해 놓았던 호리 두 대를 뜨락에 들어 내었다. 그리고 호리봇줄을 내여다 펴놓고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집안에서는 금방 일어나서 조반짓기를 서두르는 모양으로 떨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석탄재를 담아들고 나오던 퉁퉁한 마누라가 남정을 보더니 눈을 한껏 흘겼다. 지난밤 동네집에 나가 자고 온데 대한 항의였다. 재를 버리고 돌아들어오다가 남편이 하고 있는 짓거리를 보고 「불시루 호리는 왜 내다놓구 이래우?」 부르튼 의문을 내뱉으며 또 한 번 눈을 흘겼다. 윤태철은 못들은척 못본척 호리봇줄을 손질해 나갔다. 끊어진 등줄까지 마저 이어 놓고도 미진한 데가 없는가 찬찬히 살펴보고서야 일손을 놓았다. 윤태철은 마침내 마을 뒤 허수빈네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가슴속에서 한줄기 무서운 앙양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 가정에 대한 새롭고 신선한 인간애의 충동이었다. 자기가 독재를 했고 역사가 학대를 했던 그들이었던 까닭에 껴안아 주고 싶고 가슴이 뜨거워 오르는지 몰랐다. 당은 결국 지난날의 오류를 검토하고 그들을 버리지 않았구나 했다. 자기, 「볼세비키 윤태철」은 지금 당의 마음을 지니고 그들을 포섭해 주고 뜨겁게 포옹해 주러 가고 있는 것이라 했다. 허수빈네 오두막은 동녘을 금방 물들이고 있는 노을빛을 받으며 깊은 묵상에 잠겨 있었다. 비록 찌그러지고 헐망한 집이었지만 군데군데 떨어진 바람벽을 찬찬히 바르고 새로 회칠까지 하얗게 칠했다. 텃밭도 개바자를 알뜰히 둘러막고 여름채소도 꽁꽁 심어 놓았다. 엄울순의 삶의 의욕이 그런 것들에 아프게 묻어있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삶의 의욕이 남달리 이악스러웠던 까닭에 목숨을 끊는 일도 선뜻 결단했던 것이라고 느껴지고 있었다. 윤태철은 문득 이제라도 좋은 집을 쓰고 살도록 방법을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 「피독재자의 집」을 허물어버리라 했다. 타도된 지주네 집을 빼앗아들고 그 가권을 이 오막살이로 쫓는 것으로 노고대중의 승리를 확인했던 그 통쾌한 역사의 토막극은 이제는 윤태철의 마음 속에 거의 치욕에 가까운 괴로움을 주고 있는 것이었다. 윤태철은 잠깐 뜨락에 서 있다가 「... 계시유?」 이윽토록 대답이 없었다. 재차 몇번 불렀으나 집안에서는 아무 기척도 없길래 문을 열어 보았다. 펴놓은 이부자리도 보이지 않는 집안은 빈집처럼 싸늘했다. 「......」 윤태철은 밖으로 되나와서 헛일삼아 집뒤를 살펴보았다. 겨릅대처럼 깡마르고 길다랗기만 한 체구에 조그마한 머리가 붙어있는 허수빈은 논뚝 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저 사람이 저녁밥이나 지어먹고 잤는가?) 윤태철은 이런 생각을 하며 허수빈한테로 다가갔다. 우선 아침식사나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시켜야 하리라 했다. 「허동무?...」 「허동무」하는 부름이 자기의 입에서 처음으로 번져져 나왔다는 사실에 윤태철은 스스로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순간에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허수빈의 성명처럼 불리워졌던 「허귀신」이라는 호칭이 맨 처음 자기, 「볼세비키 윤태철」의 머리에서 지어져 나왔던 사실을 상기했다. 「허동무... 가기우! 집사람 일은 걱정말구 식사나 같이 하기우.」 윤태철은 허수빈의 얼음장같이 앙상한 손을 따뜻하게 잡아 끌었다. 허수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로보트처럼 잡아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 걸었다. 윤태철은 묵묵히 허수빈을 데리고 집에 당도하여 방문을 떼고 들어섰다. 미리 연통이 없이 문득 데리고 들어온 손님을 보고 아침상을 차리던 마누라는 얼굴색이 금시 변하며 울며 겨자먹기로 밥상을 달리 차려가지고 들어왔다. 손님 몰래 또 한 번 남정한테 눈을 한껏 흘겼다. 윤태철은 관청에 잡혀온 촌닭처럼 구속스러워하고 있는 허수빈을 밥상에 마주 앉히고 밥그릇에 밥도 더 떠얹어 주면서 아이처럼 얼려서 식사를 시켰다. 그는 옛날 일을 섭섭해하지 말라거나 자기가 「연계호」를 맡아서 농사를 돕겠다거나 앞으로의 일은 근심말라거나 하는 따위 말들은 일절 번지지 않았다.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실천을 하느라면 그들도 자기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라 했다. 손톱만큼의 거짓이 없이 그들한테 성심껏 헌신을 하느라면 그들도 속이 풀릴 날이 있을 것이라 했다. 당과 지나간 역사를 대신해서 자기 한몸으로 그들 앞에 속죄를 하리라 했다. 이제는 그것이 그의 삶의 내용으로 되었고 그가 새롭게 걸어나갈 인생의 길인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볼세비키 윤태철」은 필사의 투지와 무서운 집념으로 무척 고집스럽게 그 길을 걸어나갈 것이었다. 식사를 끝낸 후 윤태철은 허수빈을 데리고 일 나갈 차비를 서둘렀다. 호리 두 대를 수레에 싣고 둥글소를 메웠고 암소는 따라 걷도록 수레뒤에다 고삐를 늘게 매였다. 이윽고 윤태철은 수레를 몰고 마을길에 나섰다. 허수빈은 암소 뒤에서 수레를 따라 걷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도 배다른 쌍둥이처럼 되어가지고 마침내 사람들 앞에 등장이 된 것이다. 윤태철은 마을사람들의 눈길을 온몸으로 따갑게 느끼고 있었다. 혹자는 무척 놀랍게, 혹자는 의혹스럽게, 혹자는 익살기를 담고 자기네를 바라볼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이는 혀를 홀랑 내밀며 자라처럼 목을 움츠려뜨리며 웃을 것이며, 또한 감동을 품고 바라보는 이들도 있을 것임을 그는 분명히 보고 있었다. 마을 어귀를 벗어나서 신작로로 뻗은 길에 나섰을 때 준호의 대형트럭이 곧바로 마을로 들어오고 있었다. 윤태철은 느닷없는 울분과 수치감에 어쩔 수 없이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들놈의 훈계에 따라 배다른 쌍둥이처럼 되어가지고 아들놈의 눈 앞에 등장이 되어있는 자기의 꼴에 화가 났지만 태연자약하게 부딪치리라 다짐했다. 이 모든 것은 자기, 「볼세비키 윤태철」이가 응당히 겪어야 할 시련인 것이고, 그런 시련을 달갑게 겪을 수 있기 때문에 또한 「볼세비키」인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두뇌없는 순복도구」로 되는 것이 자기, 「볼세비키 윤태철」의 철석같은 삶의 신조임을 아들 준호 앞에 공공연히 시위하고 싶어지고 있었다. 언젠가는 준호 그 녀석도 공산당의 신념과 흘러간 역사의 구체상황을 깊이 헤아리고 「볼세비키 아버지」의 -늙은 세대 기층당원들의-고민과 울분과 곤혹과 신념을 이해할 날이 있을 것임을 믿어의심치 않는 윤태철인 까닭에 그러한 오기를 자신만만히 부리고 있는 것이다. 비좁은 길에서 수레와 마주치게 되자 준호는 트럭을 천천히 멈춰세우고 있었다. 윤태철>은 침착하게 수레멍에에 붙어서서 한쪽 바퀴를 배수구에 떨어뜨리면서 엇비스듬이 기울어지는 수레를 몰고 재빠르게 트럭을 지나쳤다. 그는 끝끝내 아들 준호를 쳐다보지 않았다. 8 윤준호는 새벽 4시에 어김없이 일어나서 차를 몰고 떠났다. 그렇게 일찍 서둘러야만이 S시 침직공장까지 하루 두 축을 여유 있게 뛸 수가 있다. 60리 상거한 은홍동 탄광에 올라가서 탄을 싣고 내려와서 아침밥 먹으러 마을로 들어오다가 아버지의 소수레와 맞띄웠던 것이다. 수레 위에 호리 두 대를 싣고 암소와 허수빈이 뒤를 따르는 장면을 일별하는 순간에 그는 대뜸 영문을 짐작할 수 있었다. 트럭을 천천히 멈춰 세우면서 그는 그들을 보지 못한 듯한 굳어진 얼굴로 애써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버지한테 시선을 던진다는 것은 너무나 참혹한 일로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불손하고 무례한 언사에 노기가 터져서 자기의 뺨을 쳤던 아버지가 아들의 훈계대로 그렇듯 급작스레 허수빈네 논갈이를 도와 나섰다는 것은 무척 의외로운 일이었다. 강한 성격자인 아버지가 아들앞에서 자신의 자존심을 굽히고 나선 장면을 일별하던 순간에 준호는 느닷없는 죄의식이 가슴을 찌름을 느꼈다. 그것은 피를 물려받은 자식으로서의 거의 본능과도 같은 양심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윤준호는 차츰 마음이 독해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허수빈네 일을 하는 것은 마땅히 치루어야 할 그 어떤 대가 같은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볼세비키 <윤태철」은 허수빈 일가 앞에 마땅히 머리숙여 속죄해야 하며 뒤늦게라도 양심주머니의 동통쯤은 느껴야 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또한 그래야만이 자기의 가슴속에 응혈이 진 원과 한도 풀릴 것만 같은 준호였다. 그렇지만 다음 순간 준호는 그러한 아버지가 보기 싫었다. 준호의 안목속에 등장이 되어 있는 아버지와 허수빈은 그대로 연극 속의 우스꽝스러운 두 배역처럼 보이고 있었다. 머리를 수그리고 걷는 「볼세비키 윤태철」과 이따금 하늘을 쳐다보면서 빙긋빙긋 신비한 웃음을 던지곤 하는 「귀신 허수빈」은 진짜 살아 움직이는 한 폭의 만화였다. 허수빈네 대해서 여태껏 독재를 했던 아버지가 오로지 당의 지시라는 이유로 갑자기 「연계호」를 맡아가지고 허수빈과 평등 관계를 이루었다는 것은, 아니, 평등을 초월해서 봉사까지 하게 되었다는 것은 미상불 해괴한 인연이 아닐 수가 없었다. 준호는 또다시 격류처럼 흘러간 역사와 더불어 자기의 마음속에 투영이 되어 있는 아버지, 「볼세비키 윤태철」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준호의 느낌 속에서 아버지는 다정다감한 감정인이 아니고 쇠기둥처럼 굳세고 냉혈적인 정치인이었다. 준호의 예민하고 미묘한 관능은 아버지의 걸음걸이에서 일어나는 정치바람과 아버지의 몸에서 풍기는 정치의 냄새를 혐오를 가지고 맡아 내곤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두뇌가 명석한 고급정치인인 것이 아니라 무식하고 머리가 텅텅 비어 있는, 말하자면 당의 말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받아외우고 당의 지시대로 로보트처럼 움직여 온 「두뇌없는 순복도구」였다. 당의 규율과 의지 앞에서 독립적 사유체로서의 「인간 윤태철」은 정녕 죽어 있었고 -혹은 전혀 무시되어 있었고- 오직 「볼세비키 윤태철」이라는 아버지의 다른 한 분신만이 살아서 존재해 있는 것이었다. 「흰 것이 진리올시다!」오늘은 이렇게 외치고, 「검은 것이 진리입네다!」내일은 이렇게 외치고, 「푸른 것이 진리인 것이요!」모레는 이렇게 외쳤을 때 어제와 그저께는 흰 것과 검은 것이 진리라고 외쳤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추호의 부끄러움과 가책도 없이 같은 군중 앞에서 오늘은 푸른 것이 진리다, 라고 천연덕스럽게 외치고 있는 희극의 주인공을 윤준호는 문득문득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러한 아버지, 「볼세비키 윤태철」이가 농민들에게 적지 않은 재난을 주었던 것이고 허수빈일가로 하여금 수난을 겪게 하였으며 사랑하는 순정이를 죽였던 것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윤준호는 예나제나 그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당의 규율을 생명처럼 여기고 당에 대한 우상적인 충성심을 가졌다한들 당에서 하라는 일이 내키질 않고 꼴사나움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불평 불만도 없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듯이 그렇듯 천연덕스럽게 군중 앞에서 외치고 내리먹일 수 있을까 했다. 어떻게 한두 번도 아닌 거의 30년 세월을 걸쳐 인간 본체의 마음을 속이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외치면서 영혼이 없는 로보트처럼 살아올 수가 있을까 했다. 하기에 그는 아버지가 마음에 없는 연극을 놀고 있는 것을 더는 용서할 수 없으며 응당 그런 짓거리를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준호는 자기가 무엇 때문에 허수빈네 생사를 아랑곳하지 않는 아버지를 울분으로 들부셔 놓고서 막상 아버지가 허수빈네를 맡아나서자 혐오와 비애와 분노를 가지고 외면을 하고 거기에서 떼쳐버리려 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도 자기의 비뚤어지는 심통을 알 수가 없었다. 준호는 차를 몰고 마을로 들어오다가 당 소조장 봉춘이를 곧바로 만났다. 그는 차문을 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 소조는 뭘 해? 범 무서워 내 놓았어? 그래 육십먹은 늙은일 논갈이를 시키겠어! 저걸 봐, 꼴 보기 좋으냐구!」 봉춘이는 어정쩡해 섰다가 신작로로 나가고 있는 윤태철과 허수빈을 보고서야 영문을 짐작하고 뭔가 말하려는데 준호는 쓰거운듯 차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는 애당초 당 소조에서 어느 한 당원에게 「연계호」를 맡겨서 허수빈네 농사일을 거들어 주는 것으로 허수빈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고 있었다. 그는 그저 당원들한테 울분과 역정을 터뜨리고 싶을 뿐이었다. ... 그 때 윤준호는 다시금 스스로 짊어진 자신의 인생의 의무를 생각했다. 9 윤태철은 굴개논에 당도하여가지고 호리 한 대에 암소를 메워서 맡기고 자기가 둥글소를 쥐었다. 무척 순하고 걸음이 느린 암소가 허수빈이 부리기에는 좋을 것이었다. 윤태철은 허수빈을 장두렁쪽에다 호리를 대게 하고 자기가 논판 중간에다 새로 금을 긋기로 예산하고 호리를 논판에 들여다 세웠다. 잠깐 밭머리쉼으로 담배를 피우며 논판을 둘러보았다. 400평 면적은 훨씬 넘을 것으로 두 사람 몫으로는 너무 많이 차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산대에서 토지를 나눌 때 값없는 허수빈네 집에다 몹쓸 굴개논을 곱면적으로 주어 버렸음이 분명하였다. 그 때 윤태철은 촌당지부 서기로서 전반을 돌보다보니까 생산대의 구체적인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윤태철은 한숨을 깊이 토하고나서 허수빈을 보고 「때를 놓쳐놔서 갈기 퍽 힘들 건데 아마 호리날을 자주 긁어야 할거우, 이걸 호리탑에다 거우.」 미리 만들어 가지고 온 나무주걱을 건네어 주고서 일어섰다. 굴개논 논갈이는 예상보다 더 힘들었다. 굴개논이란 워낙 3월 중순 좀 넘어서 얼음선을 밑에 깔고 갈아야 하는 건데 시기를 놓치고 보니 애를 먹게 생겼다. 호리날에 곱같은 개똥질흙이 들어 붙어 벗겨지지 않아서 호리날은 땅탐을 못하고 흙퉁구리가 된 채 불끈 빠져나와서는 주르르 그대로 미끄러져 나갔다. 와! 와! 소리쳐 소를 세우고 나무주걱으로 자심히 호리날에 엉켜붙은 흙을 긁어낸 뒤 다시 호리날을 땅 속에 들이박으면 거퍼 한 발도 채 못나가서 다시 빠져나오곤 했다. 소란 놈은 뒤의 사정은 상관없이 제 성깔대로 냅다 문지르는 것이어서 항아리만큼만 흙퉁구리가 매달려 천 근 무게로 된 호리를 그대로 들어서 논두렁을 넘겨야 했다. 어떤 때에는 미처 들어넘기지 못하여 그대로 논두렁을 뭉청 끊으면서 나가기도 했다. 소를 쳐죽이고 싶게 화가 났다. 두 오리를 뜨고나니 땀벌창이 되었고 허리가 끊기는 듯했다. 맥이 쭉 빠져버려 다리가 후둘거렸다. 그것은 논갈이라기보다 화가 터지는 땅과의 투쟁이었다. 윤태철>은 한숨을 몰아쉬며 허수빈을 바라보았다. 허수빈은 허리를 굽히고 호리날의 흙을 긁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아직 한 오리도 채 못나가고 있었다. (내가 이럴진대 저 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 윤태철은 3분의 2의 면적은 자기가 갈아야 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논두렁굽까지 시원히 추자면 자칫하면 하루품으로 늦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는 다시 이를 악물고 달라 붙었다. 한쉼일을 마쳤을 때 윤태철은 처참하게 질린 얼굴이 돼가지고 논머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한참이나 숨을 돌리면서 아무 생각도 없이 앉아 있었다. 허수빈은 몇 오리 뜨지 않고 멍청히 서서 하늘을 쳐다보며 이따금 신비한 웃음을 던지고 있었다. 윤태철은 혼자 앉아서 쉴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무거운 몸을 일으켜가지고 허수빈한테로 걸어갔다. 「허동무, 쉬게오.」 어깨동무나 하듯이 허수빈의 잔등에 팔을 얹고 장두렁에 데리고 나와 앉았다. 「참, 맥빠지는 일이구먼... 갈리는 대로 대강 해놓구 논삶이할 때 품을 더 넣는 수밖에 없겠구먼.」 윤태철은 허구픈 미소를 얼굴에 떠올리며 한숨을 짓고서 담배를 말았다. 그리고 담배쌈지를 무심히 허수빈한테 건네 주었다. 허수빈은 쌈지를 받아들고 무척 당황한 기색이 되어 있었다. 「한 대 피우우.」윤태철은 그가 담배를 피우지 않음을 금방 깨달았으나 후덥게 권했다. 뭔가 따뜻한 인정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허수빈은 마치 그 무슨 위태로운 실험이나 하듯이 도정신을 해서 담배를 말고 있었다. 두손이 후들후들 떨려서 담배가 종시 말려지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만 두우. 안되겠구만... 담배는 안피우문 좋다우.」 윤태철은 굳이 허수빈에게 담배를 피우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는 윤태철의 머리에 10년 전의 일이 떠오르고 있었다. 1974년 어느 여름날 바로 이 굴개논에서 「기본고리를 틀어 쥐고 제초를 촉진」하는 전 공사현장회의가 열렸다. 각 대대 당지부의 정, 부서기와 공청단, 민병, 부련회의 책임자는 물론 각 생산대의 정, 부대장에다 하방간부들까지 참석한 굉장한 규모의 현장회의였다. 그 회의의 성공을 위해서 윤태철은 주밀한 계획을 짰고 구체적이고 유력한 포치를 했다. 김매기 현장에 붉은 기며 구호판이며 흑판보며가 나가고 독보원과 대비판원들까지 알쭌히 조직해 놓았지만 <윤태철의 「왕패」는 허수빈한테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산과녁」을 내세우는 것으로써 현장회의의 성공을 꾀하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이 웃음만 나는 일이지만 그 때 허수빈은 뜻밖에도 출중한 연기로써 배합을 하여 주었다. 사전에 발언고를 준비시킨 대비판원들이 허수빈의 「죄행」, 말하자면 토지개혁 때 맞아 죽은 지주 허영세의 무덤에 비밀리에 올라가서 청명에 가토를 하고 추석에 벌초를 하며 제를 지내는 것은 제 애비의 원한을 뼈에 새기고 복벽을 꿈꾸는 것이라는 것, 방금전 이 자리에서도 생산 파괴의 목적으로 돌피를 세워두고 벼포기를 뽑아버렸다는 것 등등의 조목들을 만들어내어 「대비판」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워낙 「정책에 주의」하여 내세우지 않기로 되어 있었던 허수빈이 자기 절로 움쭐 일어나서 장두렁 위에 올라섰다. 그런데 어느 틈에 그렇게 분장을 했던지 까막귀신처럼 얼굴에 온통 시꺼먼 개똥질흙을 바르고 나선 것이어서 회의장소에 박장대소가 터졌던 것이었다. 「문화대혁명 반란파」들이 그의 얼굴에 먹칠을 해가지고 끌고 다녔던 일이 있었는데 아마도 이럴 때에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라고 착각했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허수빈의 정채로운 연기로 해서 그번 현장회의는 무척 생동하고 인상적인 것으로 인기를 모았다. 덕분에 윤태철은 「기본고리」를 잘 틀어쥐는 당지부 서기로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윤태철은 문득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허수빈의 얼굴에서 무서운 고요를 느끼였다. 암자에서 염불하는 수도승과도 같은 그런 거창하고 움직임없는 고요가 그의 얼굴에 진을 치고 있음을 윤태철은 비로소 발견을 했다. 그리고 여직껏 자주 보아오면서도 그 실상을 파악 못했던 그 불가사의한 고요에서 윤태철은 놀라운 사실을 소스라치듯 깨달았다. 말하자면 허수빈의 육신과 영혼은 이미 속세의 차겁고 뜨거움에는 마목처럼 무감각한 것이며, 그의 영혼은 그 어떤 환상세계에 생명의 뿌리를 박아두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하늘을 쳐다보며 신비한 미소를 빙긋빙긋 그리는 것은 그 환상세계에서 희노애락을 향수하고 있는 것이라고 느껴지고 있었다. 허수빈은 분명히 그 환상세계에서 사랑하는 딸 순정이와 상봉을 하고 있는 것이며 부녀지락을 누리고 있는 것이었다. 윤태철>은 사뭇 침중한 심정이 돼가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논갈이에 달라붙었다. 날선 호리날로 토지를 갈아엎는 일이 끈질기게 시작되고 있었다. 깊숙히 박아누르는 호리날이 개똥질흙덩어리가 되어서 불끈 빠져나오면 급히 소를 멈춰 세우고 호리날의 흙을 긁어내고 다시 호리날을 깊숙히 박아대고... 하는 일이 무서운 인내로써 진행되어 나가고 있었다. 10 S시 침직공장에 당도하여 석탄을 부리우고 난 윤준호는 번화한 중앙거리를 지나치다가 트럭을 천천히 멈춰 세웠다. 생기와 환락에 넘치고 있는 도시의 일상에 마음이 끌렸던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흐르는 차량들과 끝없는 자전거 행렬과 물결치는 인파가 시야에 약동적으로 현시되고 있었다. 밝은 햇빛과 늦은 봄의 따가운 더위 속에 각양각색의 시체옷들을 차려입은 싱싱한 여인들이 꽃송이처럼 피어 흐르고 있었다. 준호는 적의를 품은 듯한 세찬 눈빛으로 거리의 번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출렁이는 생활의 현장에다 순정이를 등장시켜 보고 있었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순정이가 택시에서 척-내리고 있었다. 오렌지빛 양복에 오렌지빛 스커트를 받쳐입은 순정이가 자전거 행렬 속에 끼어 달리고 있었다. 진분홍 한복을 산뜻하게 차려입은 순정이가 인행도를 걷고 있었다. 「정혜 오빠!」준호를 발견한 순정이가 트럭을 향하여 손을 저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눈앞에 무섭게 확대되어 오는 순정이의 얼굴... 준호의 오른발이 트럭의 악셀을 힘있게 밟고 있었다. 차체의 진동과 함께 차가 앞으로 움직여 나갔다. 준호는 트럭에 속도를 가하면서 지금이야말로 순정이가 동경하던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가 아닌가 생각을 했다. (순정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준호는 이런 생각을 안타깝게 굴렸다. 그가 살아만 있다면 이 도시에 들어와서 살 것이라 했다. 고급주택에 살림을 차려놓고 멋지게 살겠는데 했다. 순정이를 여왕처럼 차려 입히고 저 거리에 나서게 할 것인데 했다!... 시내를 벗어나자 윤준호는 트럭을 질풍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차체의 진동과 속도가 주는 장쾌감이 울적한 기분을 가셔주고있었다. 그러면서 준호는 올라가다가 향 병원에 들려 순정이 어머니한테 병문안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순정이가 죽은 후 여직껏 따뜻한 위로의 말 한 마디라도 별로 해드리지 못한 그였다. 마음 속으로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웬 일인지 겉으로는 그걸 표현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마음 속 깊은 곳에 자기의 진정을 파묻어 두고 허수빈과 엄울순이를 멀리 해 왔었다. 마을길에서 혹시 마주쳐도 무척 부자연스럽게 외마디 인사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머리를 숙이고 그저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다. 순정이 어머니쪽에서 매양 준호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기색이고, 만났다 해도 눈을 내리깔고 조마조마하게 지나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준호는 삼라만상이 다 잠든 깊은 밤에 순정이네 오막살이집에 탄을 실어다 부리워 준 적이 두 번 있었다. 그렇지만 그 때마다 탄을 실어왔노라고 집주인을 깨우지도 않았고 홀로 부리우고는 차소리에 잠이 깨여 달려나온 엄울순이의 인사도 받는둥 마는둥 떠나가곤 했다. 물론 준호는 순정이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기의 진정을 헤아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자기의 깊은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구나 만나기도 딱해 하고 있는 것이라고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섭섭한 생각이 더 많으리라는 점을 준호는 금방 깨닫고 있었다. 금옥 같은 딸만 죽여 놓고 퍼렇게 살아 있는 사위감을 볼 적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떠하랴 했다. 얼마나 통분하고 얼마나 서러우랴 했다. 그리고 순정이가 넋이라도 있어서 그걸 안다면 얼마나 유감해하랴 싶었다. 이제라도 순정이 어머니 앞에서 자기의 진심을 털어놓고 속이라도 풀게 함이 도리라고 생각을 했다. 스스로 짊어진 자신의 의무와 타산을 세세히 말씀드려서 삶을 비관하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해야 하리라고, 남은 여생이나마 근심 걱정없이 생을 누리도록 해야 하리라 했다. 윤준호가 향 소재지에 도착 되었을 때는 열한 시가 좀 넘어서였다. 여러가지 음료와 통조림과 과일들을 한 구럭 가득 사들고 병원에 들어갔는데 엄울순은 이미 퇴원하여 나가고 없었다. 환자 본인의 퇴원요구가 무척 고집스럽고 또 건강상황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인정이 되어 승낙하였다는 것이 병원측의 해석이었다. 병원을 떠난 지 반 시간 정도 될 것이라 했다. 준호는 가벼운 실의 같은 것을 느끼며 30분 전이라면 버스로 언녕 마을에 돌아갔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병원에서 나온 준호는 시장을 지나가다 돼지고기 한덩이와 소갈비를 사가지고 트럭을 몰고 떠났다. 그런데 한참을 달리다가 준호는 문득 트럭을 급정거시켰다. 순정이 어머니 엄울순이가 가로수 그늘 밑에서 쉬고 있었던 것이다. 준호는 트럭에서 뛰어내려 엄울순이 앞에 다가가서 공손히 앉았다. 「순정이 어머니, 어때요. 몸이? 며칠 더 입원해 계셔야 할텐데 그래요.」 「일없네, 거기 어찌 편히 누워 있겠소. 주사와 약을 갖고 가서 먹으면 될거우.」 「준필이는 올라갔습니까?」 「아침에 내가 올려 보냈네. 죽지도 못하면서 곁사람들만 고생시키구... 정혜 오래비 돈만 축냈소!」 엄울순이는 머리를 숙이고 옷섶으로 눈굽을 찍어내고 있었다. 이제는 시들어 버린 피부에 주름살 많은 엄울순의 파리한 얼굴을 지켜보면서 윤준호는 그녀의 젊은 날의 미모를 상상해 보았다. 한창때에는 예쁜 미모를 가지고 초시대적이고 헌신적인 성애를 추구했던 불의 여성이었다는 사실이 준호를 감동시키고 있었다. 저 풍만한 젖가슴과 여체의 신비와 성애의 불길로써 허수빈의 황페한 가슴을 녹여 주고 생명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게 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준호는 트럭 운전실에서 식품 구럭을 들어내려가지고 엄울순이 앞에 헤쳐놓았다. 과일즙 한 병을 뚜껑을 열어 드리며 「시원히 반병 마시셔요. 오다가 병원에 들렸댔습니다. 점심식사라도 한 끼 대접하고 싶었는데.」 「뭘 돈을 자꾸 파우? 그렇지 않아두 미안한데... 자네가 그러면 난 괴롭다우.」 엄울순이는 과일즙을 받아들고 마시지는 못하고 눈물만 흘린다. 준호는 강권하다시피 하여 과일즙을 마시게 하고 사과 한 알을 손칼로 정성껏 깎아드렸다. 그리고 자기도 한 알 깎아서 자못 심각하게 한입을 떼어먹고서 「순정이 어머니, 여직껏 섭섭한 생각 많으셨을 거예요. 아버지 어머닐 잘 모시려는 것이 순정이의 간절한 소망이었는데 제가 남 보듯 했습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잘 되지가 않아요.」 「왜 모르겠소. 순정이를 잊지 못해 여직껏 홀몸으로 있는 자네 마음을 왜 모르겠소. 우린 지금도 정혜 오래빌 사위처럼 생각한다우.」 「순정이 어머니, 저는 아무 때건 순정이의 소망을 내가 꼭 성취시켜 주리라고 맹세한 사람이예요. 그래서 실은 맘 속에 계산이 있습니다. 올가을에는 꼭 만 원을 묶어 드리겠어요. 그러니 절대 자비심을 가지지 마시구 이 고비만 넘겨 주십시오.」 「마음만 해두 고맙네,... 순정이는 복하우, 단 한 해를 살아두 똑똑한 남자하구 정을 묻었으니 그 앤 원이 없을거우, 저승에 가서라두 눈을 감을거우!」 엄울순이는 한참을 그렇게 울다가 주저주저 실토정 이야기를 했다. 「나두 살아갈 궁리를 많이 해봤다우. 생각엔 그저 돼지를 칠 밑천이나 잡았으면 했소. 농사를 짓자니 막연하기만 하우. 어찌 번번이 남의 신세를 지겠소. 순정이 아버진 돼지치기에는 이력이 있다우. 돼지만 해놓으면 그이는 재미나서 돼지굴에 붙어있을 거우. 어떻게 버는 돈인데 만원씩이나 그저 받겠소. 돼지 칠 밑천이나 선대해 줬으면 한시름 놓겠소. 돼지만 잘 되면 능히 갚을 수 있을텐데...」 「그 생각 옳은 것 같애요. 저도 돼지 생각은 해봤지만 한꺼번에 만원을 묶어드릴 궁리만 했군요.... 이렇게 합시다. 우선 재료를 사다가 돼지우리를 서너 채 짓구 장날에 여나문 마리 먼저 사다 넣읍시다. 사료는 제가 차로 전문 책임질 수가 있어요. 그리구 밭은 누구한테 양도해 주고 식량만 국가에 바치는 값으로 달라구 하면 될 겁니다.」 「에그,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소. 나보다도 순정이 아버지가 즐거워 하실거우. 그랬으면 발편잠을 자겠소.」 엄울순의 얼굴이 금시 희색으로 피어올랐다. 돼지를 기르는 재미와 그 희열을 벌써 맛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남편 허수빈의 즐거움과 열성을 자기의 가슴으로 뻐근히 경험해 보고 있음이 확실했다. 그들의 노동열정과 드센 생의 의욕을 이렇듯 간단히 지펴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윤준호는 오히려 슬퍼지고 있었다. 이윽고 준호는 엄울순이를 트럭 운전실에 태워가지고 마을로 떠났다. 11 윤태철은 어슬녘에야 굴개논갈이를 억지다짐으로 끝마칠 수가 있었다. 그는 쓰러질듯이 지친 몸을 간신히 운신하여 호리를 수레에 싣고 허수빈과 같이 수레에 합승이 되어 가지고 귀로에 올랐다. 혹사된 육신을 건들건들 굴러가는 수레 위에 기분좋게 맡겨 버리고 왈랑절랑 소방울소리를 무척 흥겹게 듣고 있었다. 그러면서 윤태철은 내일 하게 될 논갈이는 신선놀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늘 무서운 고역을 치렀던 까닭에 잘 갈리는 땅에서의 논갈이는 무척 재미나고 흥겨울 것이었다. 고생이란 겪고 보면 무척 달고 아름다운 것임을 윤태철은 절실하게 실감하고 있었다. 그는 굴초를 피우면서 내일은 논갈이를 끝내고 모레와 글피 이틀에 한전갈이를 마쳐야 하겠다는 계획을 짰다. 그 연후에는 시급히 논에다 물을 대고 물썩임을 기다릴 사이 없이 억지다짐으로라도 논두렁을 감아놓고 일절 모내기 준비를 세세히 살펴가며 해야 하리라 했다. 그러노라면 자기 집일은 전폐를 해야 할 것이었다. 준필이 내외와 마누라와 정혜-이렇게 네 손포면 자기가 없어도 담배모로부터 벼모내기까지 무난히 진척해 나갈 수 있을 것이어서 시름을 놓아도 될 일이었지만 마누라의 지청구를 들을 각오는 해야 하리라 했다. 「담배모는 안내겠수?」 점심을 먹고 일밭으로 떠날 때 마누라는 허수빈이 듣건말건 이렇게 트집스런 두 마디를 고래터지듯 토해 내고는 눈을 무섭게 흘겼던 것이다. 윤태철은 그것이 무서운 경고임을 직감했다. 이제 적어도 모내기철까지 허수빈네 농사일에 매달려 있을 기미만 느끼면은 마누라는 필경 생사결판 낼 것임을 그는 예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윤태철은 그 싸움을- 그 말썽과 성가심을- 두려워 하지는 않고 있었다. 자신이 「볼세비키」인 까닭에 그런 시련도 겪어야 하는 것이고 일단 무찌르고 나가면 그만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연후에 마누라의 속을 훌 풀어 주면 되는 것이다. 윤태철은 퍽 늦어서야 집에 당도해서 소들을 외양간에 들이었다. 준필이가 짚새를 해놓고 한창 통나무 구유가 넘쳐나게 소짚을 담아주고 있었다. 외양간을 말끔히 쳐내고 소구유가 깨끗이 청결해진 흔적을 윤태철은 눈으로서가 아니라 코끝으로 싱싱히 맡아낼 수가 있었다. 그것은 무슨 일이나 직심으로 해나가는 둘째 아들의 진한 내음이었다. 맏아들 준화와는 달리 성품이 무척 어질고 성실한 준필이를 윤태철은 마음속으로 각별히 사랑해 왔지만 이 순간에는 웬일인지 그런 둘째 아들이 불쌍히 여겨지고 있었다. 「어떠냐? 사람이......」 엄울순의 일이 궁금해서라기보다 그런 직순한 아들한테 일푼의 인정이라도 기울여 줘야만 부친으로서의 아픈 마음이 달래질 것만 같아서 번져낸 물음이었다. 「별일 없어유. 오전에 퇴원했는데유.」 윤태철은 한숨을 짓고 외양간을 나왔다. 집에는 둘째 며느리가 손자놈을 재워놓고 가마목에서 저녁을 갖추어 놓을 차비를 하고있을뿐 마누라와 정혜는 보이지 않았다. 웃목과 아래목에 수저와 반찬들을 갖추어 놓은 밥상 두 개가 고즈넉이 식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을 먼저 먹지, 애에미 견디우? 이렇게 늦도록......」 윤태철은 며느리가 떠다 놓은 세수물에 세수를 하고 발을 씻고서 어조에 인정을 담아 말했다. 자기-시아버지를 기다려서 저녁을 먹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고, 그런 며느리의 갸륵한 마음씨에 말로라도 인정을 기울여 주고 싶었다. 「어마이도 들어오시지 않구 해서......」 「여태 뭘 한다우?」 「곧 들어오실 거예요. 정혜가 데리러 나갔는데... 먼저 저녁 받으세요.」 며느리는 제쪽에서 죄송한 듯이 미소를 지어보이며 밥과 국을 떠서 밥상에 올려 놓는다. 지치고 몹시 허기졌던터라 음식맛이 각별히 달았다. 술목이 부러지게 이밥을 떠넣고 국물을 훌훌 불면서 마시었다. 시큼한 햇배추김치와 고추장에다 깨끗이 씻은 파를 뚝뚝 무쳐서 우적우적 감식을 했다. 그렇지만 식사 자세에서는 침착함과 묵직한 점잖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 때 정혜가 뽀로통한 기색이 되어가지고 들어왔다. 「배고파 죽겠네, 밥 먹자요!」 정혜가 아래목 여자식구들 밥상 앞에 투정부리듯 주저 앉는데 며느리가 은근한 눈빛으로 「어마이는?」이렇게 묻고 있었다. 「내버려둬요. 아이들 투정질도 아닌데 낸들 어쩐담?」 정혜는 고운 입을 뽀로통 내밀고 도도거리다가 가마목에 달려들어 밥 두 공기와 국 두 사발을 불이 번쩍 나게 떠놓고 「어서 잡숫자요. 어간에서 형님이를 죽이겠네!」 이러며 밥을 우겨대였다. 그러다가 윤태철이쪽에 눈을 곱게 빨며 응석부리듯이 힐책을 해왔다. 「아부지!... 아부지도 그 집일 그만둬요. 정말 성가셔 못살겠네!」 윤태철은 비로소 마누라가 늦도록 담배모상판에서 들어오지 않고 있는 연유를 깨달았다. 말하자면 마누라는 지금 제 집일을 전폐하고 허수빈네를 돕고 있는 남정한테 본격적으로 트집을 걸어 오고 있는 것이었다. 못난 「볼세비키 남정」때문에 여편네가 이렇게 저녁 늦도록 홀로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며 그래도 못난이질 해보려면 어디 끝까지 해보라! 이런 배짱임에 틀림없었다. 그것은 엄중한 경고였고 소나기를 쏟아붓기 전의 천둥소리와도 같은 그런 것이었다. 이제 그녀는 스스로 제 몸을 한껏 지치게 만들고 마음을 탕약처럼 사납게 끓여가지고는 아주 자연스럽고 실감적으로 싸움을 도발해올 것이었다. 윤태철의 눈 앞에는 지금 담배모상판에서 눈물범벅이 돼가지고 부득부득 심화를 발동하고 있는 마누라의 모습이 방불히 보이고있었다. 윤태철의 직감은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식사를 끝내기 전에 마누라는 바당문을 떼고 들어섰는데 그 얼굴부터가 상상하던 바와 같았던 것이다. 땀과 눈물자국으로 얼룩이 진 얼굴에 비분이 꽉 차 있었고 두 눈이 적의같은 것을 시퍼렇게 켜들고 있었다. 마누라는 울음덩이를 울먹울먹 입안에 그득 물고 조용한 동작으로 대야에 물을 떠서 붓고는 돌아앉아 세수를 하고 발을 씻었다. 그 거동이 너무나 조용하고 세련되어 있어서 오히려 집식구들의 숨을 죽이게 했다. 답답하고 괴로운 고요가 갑자기 온 집안을 누르고 있었다. 누구나 수저질소리와 음식물 씹는 소리를 낼까봐 겁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누라는 발씻은 물을 구정물 바께쯔에 조용히 붓고서 마침내 구들로 올라오더니만 찬장쪽에 머리를 놓고 사이벽을 마주하고 시위할 듯이 척 누워버렸다. 「어마이, 저녁... 잡수셔요.」 며느리가 무척 조심스럽게 식사를 권했으니 등져누운 채 대꾸도 없었다. 기어코 사단을 일으키고야 말 잡도리다. 윤태철은 마음 같아서는 한 마디 관심어린 말을 보내고 아이처럼 얼려서라도 우선 식사나 시키고 싶었지만 그것이 공연히 도화선이 될까봐 겁났다. 누구든 조금만 건드리기만 하면 일촉즉발의 작탄처럼 터지고 말것임을 그는 아짜아짜하게 느끼고 있었다. 윤태철은 될수록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지연이라도 시키고 싶었다. 엉망이 될 가정 분위기보다는 며느리 보기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식사를 일단 끝내놓고 무척 심각하게 양치질을 하다가 구렝이 담 넘듯이 슬그머니 일어나서 신을 찾아 신었다. 그 때 허수빈네 집에 엄울순의 병문안을 가봐야 하리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어딜 가유!」 마누라의 이런 고함소리가 고막을 쳤던 것은 금방 문턱을 넘어서려던 찰나였다. 벌떡 일어나 앉은 그녀의 두 눈이 시퍼런 불을 켜들고 있었다. 그 시선이 어쩐지 싫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윤태철은 답답하다는 뜻으로 어조를 부드럽게 누그러뜨리고 응대를 했다. 「뭘, 어쩌라구 그러우?」 「몰라서 묻수? 담배모를 당장 내겠는데 매일 흔들거리고 뭘해유?」 「논갈이를 못해서 좀 방조를 하는건데 뭘 그러우? 우린 일손이 많지 않소?」 「누구는 힘이 남아돌아서 매일 헤매는 줄 아우? 제여편네는 불쌍하지 않구 동네집년만 불쌍하지! 그만큼 부려먹었으문 됐지, 나두 내일부턴 드러누워 놀겠수다!」 윤태철은 마누라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누라는 사실 농사일로 늙어온 노동여성이었다. 그것도 당지부 서기의 아내였기에 맥이 진하고 몸이 아파도 남편의 위신을 염두에 두고 집단일에도 빠짐없이 출근을 해왔다. 사회일 나선 남편을 귀족처럼 모시면서 집일도 안팎으로 도맡아 해온 그녀였다. 지금도 윤태철은 오직 그 점만은, 말하자면 자기, 「볼세비키 남편」에 대한 아내의 헌신과 지성만은 내심 잊질 않고 있었다. 도리로 보나 인정으로 보나 이제는 자식들도 장성을 했으니 마누라는 응당히 손자들이나 보고 가사나 돌보면서 편안히 쉬어야 할것이었다. 자기, 「볼세비키 남편」은 빈말이라도 이제 쉬라고 인정을 기울여줘야 할 것이었다. 그럴 대신에 마누라의 손포를 믿고 자기만이 뽁 빠져서 「당원의 모범작용」을 하고 있으니 그녀인들 분통이 터지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마누라가 아무리 트집을 걸고 강짜를 부린대도 이해해 주고 양해해 주리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마누라가 당분간 자기를 이해해 주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종국에는 이해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윤태철은 마누라와 더 맞장구치기를 그만두고 마누라한테 져주는 셈으로 말없이 밖으로 나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마누라한테는 그녀를 무시하는 공공연한 행동으로 오인이 될 줄은 윤태철은 미처 염두에 두지 못하였다. 허수빈네 집을 바라고 마을길로 걷고 있는 윤태철의 곁으로 미친 년처럼 허둥허둥 달려지나는 마누라를 일별하던 순간에야 비로소 윤태철의 뇌리를 무섭게 치는 깨달음이 있었다. 마누라는 분명히 허수빈네 집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며 이제 엄울순이와 대판거리 싸움을 벌릴 것이고 온 동네를 웃기고야 말 것이었다. 남편의 얼굴에 똥칠을 하고야 말 것이었다. 「왜 이래?」 「놔유, 이거!... 그년을 가만둘 줄 아우? 그년이 꼬리치니까 그러지!」 게거품을 문 마누라의 묵중한 몸뚱이가 광기들려 몸부림치다가 윤태철의 손에서 벗어져 나갔다. 그 순간에 윤태철은 마누라의 두 눈에 쌍심지로 켜져 있던 시퍼런 불의 의미를 문득 깨달았다. 그것은 시샘이었고 이유없고 도저히 이해할수가 없는 늘그막 씨앗싸움이었다. 엄울순의 젊은 모습이 떠올려졌다. 마누라를 토스레라고 한다면 엄울순이는 섬세한 비단이었다. 마누라는 분명히 예전부터 엄울순의 미모를 질투하고 시샘했음이 틀림없었고 엄울순이가 기나긴 세월을 천대받던 나날에 그것은 변태적인 쾌감과 업신여김으로써 나타났던 것이었다. 윤태철은 갑자기 구토를 느끼었다. 자기가 여직껏 탐닉을 해왔던, 때와 땀내로 끈적끈적한 마누라의 육체가 왈칵 악취를 풍기면서 구토를 자아올리고 있었다. 윤태철은 다시 한달음에 뛰어가서 마누라의 어깨를 왁살스럽게 잡아챔과 동시에 등줄기를 후리쳤다. 「어째? 매는 왜 대우?」 마누라의 항의에 윤태철은 재차 뺨을 쳤고 등줄기를 연거푸 후려쳤다. 그것은 이미 치명적인 타격을 삼가하는 「사랑의 매」가 아니었다. 평생을 함께 살아오면서도 자기, 「볼세비키 남편」을 이해못하고 남편의 심정과 번민과 신념을 헤아릴 줄 모르는, 몰상식하고 무식한 여편네에 대한 격노와 혐오와 울분의 폭발이었다. 「죽이우, 죽여!... 죽이우!」 마누라가 온 동네가 들으라고 째지는 듯한 소리를 질러대는 대로 윤태철은 숨돌릴 사이없이 따귀를 후려치고 옆구리를 발길로 내질렀다. 그리고도 성차지 않아서 땅바닥에 나동그라진 마누라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가지고 뺨을 찰싹찰싹 쳐가며 「소리쳐봐, 어디... 더 크게 소리쳐보라구. 온 동네가 다 듣게... 어서!」 갈범처럼 소리질렀다. 그것은 마누라한테는 동네를 웃겨도 두렵지 않다는 선언이었다. 마누라의 육중한 몸뚱어리가 땅 위에 맥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뒤미처 절의와 통분에 절은 구슬픈 울음이 마누라의 목구멍에서 뽑혀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그녀의 기세가 꺽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마누라는 이제는 엄울순이한테로 달려가지 않을 것이고 더는 강짜를 부리지 못할 것임을 윤태철은 알고 있었다. 그제야 윤태철은 손을 떼고 집쪽으로 향해서 되돌아섰다. 엄울순이한테로 가려던 계획이 저절로 체념이 되어 버렸다. 구석구석 어둠 속에 구경하러 나온 동네사람들이 모여 서 있었다. 그는 자기의 모습이 동네사람들의 안목 속에 어떻게 새롭게 비쳐지고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자꾸만 실룩실룩 일그러지면서 까닭모를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자기의 꼴을 어둠이 감춰주고 있는 사실에 다행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윤태철은 이제는 마누라와의 이불 속에서의 유희 같은건 다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 평생을 함께 탐닉하고 향수해왔던 부부지락은 이로써 끝을 보는 것이라는 것... 이런 따위를 생각했다. 12 점심 후에 윤준호는 은홍동 탄광에 올라가 탄을 싣고 내려오면서 줄곧 스스로 짊어졌던 자신의 인생의 의무를 이행하는 일을 놓고 다시금 생각을 굴려보았다. 만 원 묶음을 척 드림으로써 순정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깜짝 놀라게 하고 그들한테 생의 의욕을 지펴 주리라던, 그리고 순정이에 대한 자신의 애정과 충심을 눈물겹게 보여주리라던 타산은 당연히 옳은 것이었고 지금도 꼭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 때까지의 생활보장에 대해서는 그래도 당원들을 믿었던 준호였다. 믿었기보다는 잔뜩 비뚤어진 심사로 「볼세비키」들이 도대체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엄울순이가 농약을 마셨을 때 울분이 터졌던 것이고 아버지한테 불손한 훈계를 퍼부었던 것이다. 지난날에 대한 속죄로 아버지가 그들을 맡아야 한다고 대성질호하였고 그래야만 자신의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는 원과 한도 풀릴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순정이 어머니의 속심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준호의 생각은 달라져가고 있었다. 단 한 해 동안이라도 허수빈네를 방치해 둔 자기 자신이 우선 잘못이었다. 당원들이거나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농사는 그럭저럭 지을 수는 있겠지만 그들로 놓고 말하면 그것이 살점이 뜯기는 것처럼 괴로운 일일 것임을 알았다. 한시 급히 자립을 하게 하고 제 힘으로 살아가게끔 돼야 함이 그들의 진정한 해방이고 행복일 것이었다. 만 원을 한꺼번에 묶어 주려던 야심적이고 충동적인 타산이 아쉬운대로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밭을 양도해 버리고 양돈업 기초를 당장 마련해 주리라는 결단이 일어서고 있었다. 한편 윤준호의 마음 속에 그러한 결단이 영글어지게 된 데는 다른 하나의 무서운 추진력이 있었으니 그것은 아버지쪽에서 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농토를 다른 사람한테 양도해 버리면 아버지, 「볼세비키 윤태철」은 「당성발휘」의 터전을 잃게 된다는 사실이 준호를 무섭게 흥분시킨 것이다. 끈 떨어진 망석중이 되고 보면 아버지는 더는 「살아 움직이는 만화」로 되어 있지 않을 것이고, 인정을 가진 순수농민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심신상의 노고에서 해탈이 되고 자기 집일이나 심심찮게 거들어 주는 편안한 백성이 될 것이었다. 준호는 갑자기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일었던 것은 차를 몰고 내려오다가 허수빈을 데리고 굴개논에서 논갈이를 하고있는 아버지를 보게 된 순간부터였다. 찬찬히 여겨본 것은 아니고 피끗 일별하였던 것이지만은 호리질을 하고 있는 구부정한 그 모습이 머리속에 자꾸만 살아오고 있었다. ... 흙투성이에 땀벌창이 되어가지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기진맥진한 모습이었다. 쇠잔해진 근력과 생명을 땅과 시간속에 소모시키는 모습이었다. 몇십 년간 이어온 아버지의 옹근 인생의 모습이었다. 문득 십여 년 전에 마을에 내려왔던 「하방간부」들의 희디흰 얼굴들이 떠올랐다. 월급은 월급대로 타먹으며 이밥생활을 하다가 다시 도시로 돌아갔던 그들이 농촌에서 지낸 그 몇해를 정배살이나 갔다온 것처럼 외워대던 것을 준호는 여러번 들었었다. 그들도 공산당원 간부들이었지만 농촌을 사람이 못살 지옥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런 「지옥」에서 아버지, 「볼세비키 윤태철」은 평생을 살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그런 불공평을 전혀 모르는 듯이 무척 달갑게 삶을 열심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간부들 같으면 이제는 퇴직을 하고 편안히 마작이나 놀 연세이지만 아버지는 저렇게 땅과 씨름하여 「선봉모범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철저한 이타주의로서 자기의 생명을 불태워 버리고 있는 것이다. 준호는 갑자기 아버지가 불쌍해졌다. 그리고 괴로워지고 있었다. 마음속 심처에 뿌리로 살아 있던, 여지껏 아버지에 대한 원과 한 때문에 애써 그 존재를 망각하고 무시해왔던 피를 이어받은 자식으로서의 천성적인 효성의식이 감연히 반기를 쳐들고 있었다. 말하자면 사업과 노동으로 평생을 고달팠던 아버지한테 응당히 말로라도 효도해야 할텐데 그럴 대신에 무서운 대항을 이루어가지고 불손하게까지 굴었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찢어놓고 있는 것이다. 어릴 적 일이 문득 떠오르고 있었다. 여덟 살 나던 해의 어느 함박눈이 푸실푸실 내리던 날에 준호는 괴롭고 침침한 복통에 식은땀을 흘리며 시래기처럼 나부러졌다. 아침에 쌀가루 한줌 섞이지 않은 「송기떡」을 허기지게 먹고 체식을 당했던 것이다. 담임선생이 알렸던지 아버지가 교실에 나타나서 준호를 업고 나왔고 박초시라 불리우는 늙은 의원네 집에 가서 배침을 맞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준호를 업고서 「... 이제는 괜찮지? 그래그래, 안아프지 인젠... 우리 준호 용쿠나 용해... 용쿠 말구! 저녁에 이밥 해 준다. 아부지 이밥 꼭 해주마. 이밥 맛있지?... 우리 준호 용타, 참 용하지!」 아버지는 흥흥 군소리까지 해가며 쉴새없이 말을 했다. 준호는 아버지의 잔등에다 뺨을 꼭 붙인 채 아버지의 위안의 말을 자장가처럼 듣고 있었다. 그러면서 새하얀 입쌀밥을 환상했다. 집에 쌀 한알 없는 줄 알고 있는 준호였지만 이밥을 해주겠다는 아버지의 말을 확고히 믿었다. 아버지에게는 동경과 환희에 찬 화려한 꿈을 애어린 자기한테 창출해줄 수 있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느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준호는 그 꿈을 획득했다. 저녁에 그는 새하얀 입쌀죽을 먹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비록 쌀밥이 아니고 쌀죽이었지만 기적과도 같이 획득한 아름다운 꿈이 곧 깨질까봐 천천히 아주 천천히 먹었다. 「배침을 맞아놔서 밥 먹으문 또 언칠라, 그래서 죽 끓였다. 어서 먹어라.」 이밥을 해주겠다 했던 자기의 낙언과는 조금 틀려진 것이 아들애를 실망시킨 것만 같아서 허구픈 변명을 하는 아버지와 「그래, 이럴 땐 죽이 좋단다. 어서어서 많이 먹어라. 그래두 아버지가 쌀 한 줌 용케 얻어왔구나!」 하면서 한 사발밖에 없는 죽을 놓고 많이많이 먹으라며 눈물 훔치는 어머니와는 상관없이 빨리 먹어 버리기 아쉬워서, 먹어 버리고 나면 몹시 서운할까봐서 그렇게 오래오래 달게달게 먹었다. 그러면서 자꾸자꾸 앓았으면 했다. 자꾸 자꾸 앓으면 아버지가 자꾸자꾸 입쌀을 얻어올 것인데 자꾸자꾸 입쌀죽을 먹을 수 있을 건데 했다!... 그 날 밤 준호는 자주 잠을 깼다. 한 것은 아버지의 뜨거운 손이 자기의 엉덩이를 두드려 주고 사타구니에 들어와서 불두덩을 어루쓸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윤준호는 성장을 해오면서 문득문득 어릴 적의 자기에 대한 아버지의 숨은 통애(痛愛)를 실감해 보곤 했다. 지금도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서 어릴 적과 꼭 같은 아픈 애정을 지니고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순정이를 잃은 원과 한을 품고서 여직껏 장가들기를 거부하면서 버티고 있는 까닭도 아들에 대한 통애를 이용해서 아버지를 괴롭히고 자기 앞에 속죄시키려 함이었던 것이니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괴롭고 아플가 했다. 준호는 당장이라도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울고 싶고 용서를 빌고 싶은 충동을 느끼었다. (아버지가 이런 내 마음을 알고 있을까? 이 아들이 결코 불효자식이 아님을 인정하고 있을까?... 모르시겠지, 다는 모르시겠지! 벌써 도리깨 아들로 치부해 버렸을 건데!) 그럴진대 자기의 효심을 더 깊이 묻어두고 싶은 스스로의 마음가짐에 준호는 걷잡을 수 없이 울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면서 생각한 것이 허수빈네 토지를 남한테 양도해 버리는 방법으로, 우선 아버지의 일감을 빼앗아 버리고 그의 노고라도 덜어주려는 것이었다. 지기의 이런 효성을 알건 모르건 오로지 아버지가 편안한 만년을 누릴 수만 있다면 그만이라고 준호는 생각을 했다. 윤준호는 S시 침직공장에 석탄을 부리우고 돌아오던 길에 향 소재지에 있는 목제품 놀이감 공장에 들려서 돼지 우리 서너 채 지을수 있는 분량으로 걸불이널(통나무를 켜낸 겉잎)을 샀다. 기둥감과 틀을 짤 이깔나무 같은 건 자기 집에 얼마든지 있었으므로 그걸 쓰기로 했다. 트럭을 몰고 올라와서 허수빈네 집에다 걸불이널을 부리우고서 품값을 후이 주기로 하고 마을의 도끼 목수 두 사람을 방문하여 돼지우리 짓는 일을 맡기었다. 그리고 변창도 농민을 청들어 허수빈네 논과 밭은 양도해 버렸다. 그러고 나니 밤 열 시도 넘었다. 집에 돌아와서 준호는 초저녁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네를 웃기면서 싸움을 한데 대한 할머니의 푸념을 잠자코 듣다가 「태산을 지고 온 아이」처럼 달게달게 잠들어버렸다. 13 새벽녘에 윤태철은 자동차의 엔진소리를 꿈결에서처럼 듣고 있었다. 첫 시동을 걸고 있는 준호의 트럭이었다. 새벽마다 들리곤 했던 엔진소리였지만 그 날 따라 심사를 자아내고 있었다. (저놈이 뭘 바라고 저렇게 악을 쓰고 일하는 걸까?) 기름투성이 돼가지고 억척스레 트럭을 부리고 있는 준호의 모습이 선해왔다. 서른 살을 넘기도록 장가들 생각도 않고 무모하게젊음을 허비하고 있는 아들놈이 불쌍해지고 있었다. 문득 어린 시절의 준호 녀석이 망막 속에 떠올려졌다. 포동포동 살찐 젖내나는 알몸뚱이를 환각 속에 금방 안아보고 있었다. 품속에 들어서 쌔근거리고 꼼지락거리고 발버둥치는 어린 생명체를 윤태철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고 엉덩이를 두드려 주고 사타구니 사이에 입술을 들이밀고 그 놈을 간지럽혀 주던 그 모든 내음과 기쁨을 생생하게 실감해 보고 있었다. 윤태철은 아내의 모체에서 신기스레 분만이 되어 나온 첫 아들을 무척 귀여워 했다. 생사를 천운에 맡기던 전쟁고를 겪은 사람이기에 더욱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밤이면 밤마다 가운데 눕혀 놓고 그답지 않게 늑장도 부리고 처음 경험해 보는 부성애를 한껏 쏟아 주었다. 어린 준호도 부모들의 애정에 습관이 되어서 간혹 부부사이의 정사 때문에 아내의 등 뒤에 눕혀 놓으면 소외감을 느껴 가지고 떼를 쓰며 기어 넘어오곤 해서 한바탕 웃어보는 열락의 장면도 가져 보았다. 그 시절에 윤태철은 아들애를 두고 문득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말하자면 요 어린 생명을 금방 까난 햇병아리처럼 언제까지고 품어주어야 하리라는 것, 어른으로 장성을 시켜도 품어주지 않고는 마음이 놓이지 않으리라는 것!... 그런데 지금 그는 아들 준호 녀석을 품어주고 싶어도 품어줄 수가 없게 되었다. 그 놈은 이미 부모권(圈)을 뛰쳐 나가서 부모들이 자기를 품어주기를 완강히 거부하면서 아버지와 대항을 하고 세상을 저 혼자 날아보려는 것이다. 세상의 어려움과 인생의 노고를 제 혼자서 감당해 보려 하는 것이다! (저를 두고 가슴 아파하는 제 애비의 마음을 저놈이 알기나 할 것인가!... 모를 거지, 몰라. 알면 저럴까? 부모 아홉번 생각할 적에 자식놈 한번만 생각해도 효자라는 말이 백 번 지당한 게지.) 윤태철은 갑자기 깊은 비애를 느끼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부모들이 느끼는 공통된 비애에 기초한 것이지만 「볼세비키 아버지」로서의 남모르는 특수한 비애였다. 그런 아들과 「싸움」을 하고 있으며, 또한 그 「싸움」에서 아들놈을 패배시키고 자기가 꼭 이겨야만 하는 그런 오기와 당위성 때문에 그만큼 깊고 괴로운 비애인 것이었다. 엊저녁에 윤태철은 마무리를 한바탕 패주고서 집으로 되돌아오다가 당소조장 봉춘이를 만났다. 당소조회의를 손왈세 노인네집에 불렀다며 곧장 끄는 바람에 출석을 했다. 허수빈네를 「연계호」로 맡을 사람을 새로이 결정을 하려고 부른 회의였다. 아침에 윤준호가 무섭게 역정을 내었고 또한 저녁에는 윤태철>이가 여편네와 크게 싸운 뒤였으므로 당소조장 봉춘이는 다른 사람들이 맡는 쪽으로 토론을 이끌어나가고 있엇다. 윤태철은 고개를 꺾고 땅바닥만 무섭게 응시하고 앉아서 열탕처럼 끓어올랐던 가슴을 잠재우고 있었다. 그러면서 회의 출석자들의 토론이야 어떻게 돼가건 그것과는 상관없이 울분에 젖은 뜨거운 상념을 거의 숙명적인 기분으로 외골수로 휘몰아가고 있었다. 진작 야심적으로 접어든 일이었지만 이제 와서는, 말하자면 여편네를 패주고 동네까지 웃긴 지금에 와서는 더구나 허수빈네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 이제는 벽이면 벽을 무찌르고 가시덤불이면 가시덤불을 헤치고 곧추 나가야 하리라 했다. 이제는 그것이 자신이 걸어나갈 유일한 인생의 길인 것이었고 얼마 남지 않은 그의 분투적 삶의 내용이고 생명의 의미로 되어 있음을 윤태철은 보다 명료히 깨닫고 있었다. 이제 와서 중도에 포기하거나 물러앉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아들 준호와의 싸움에서 손들고 투항을 하는 거나 다름없는 것이고「볼세비키 윤태철」의 무참한 패배인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이제 윤태철은 아들 앞에서 계속 「당의 말」대로 하는, 또는 「당의 지시」이기 때문에 집행을 하는 「두뇌없는 순복도구」로 되어가지고 자신의 신념과 의지와 노고를 아낌없이 헌신을 하여 허수빈 양주한테 희망을 주고 기쁨을 주고 복을 주어야 할 것이었다. 그들을 감동시키고 그들 마음 속에 옥맺히고 응혈이 져 있는 「볼세비키 윤태철」에 대한, 흘러간 역사에 대한 그 모든 원과 한과 유감 같은 것들이 봄눈 녹듯이 소실되도록 해야 할 것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순정이와 상실한 애정 때문에 「볼세비키 아버지」한데 혐오와 원한과 울분을 품고서 무모한 대항과 독신주의로서 아버지의 마음을 굴복시키고 제놈 앞에 용서를 빌 것을 바라고 있는 아들 준호도 마침내는 머리를 떨구고 「최하층 볼세비키」들의 고민과 곤혹과 신조를 깨닫게 될 것이고, 「볼세비키 아버지」의 신념과 의지와 진정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 했다. 어쩌면 제 애비 앞에 그 모든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불효했던 자신을 뉘우쳐 통절한 울음이라도 뽑아낼 수도 있을 것이라 했다. 그러면 「볼세비키 윤태철」은 아들놈과의 대결에서 당연히 승리자로 되는 것이고 준호 그놈을 패배시킨 것으로 될 것이였다. 그 때에 가서는 자기, 「볼세비키 아버지」도 순정이를 죽게 하고 애정을 잃게 했던 장본인으로서 자신의 소행과 비리를 두고 아들 앞에 달갑게 속죄를 하고 용서를 빌 것이라 했다. 불가항력적이고 심히 오묘한 자연의 법칙대로 부자지간에 통일을 이루고 화애를 도모하게 될 것이었다. 그 때에 가면 그는 다시금 아들놈을 햇병아리같이 따뜻이 품어 주고 눈물겨운 부성의 정을 마음껏 쏟아줄 것이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그 날을 획득하고 싶어서 윤태철은 이미 자진으로 맡고 있었던 「연계호」를 남한테 내어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회의결론이 이미 당소조장 봉춘이가 맡는 것으로 기본상 영글어진 무렵에 생각을 중단하고 회의토론에 뒤늦은 개입을 했다. 그의 언품이 어찌나 고집스럽고 참다왔던지 온 저녁 헛토론을 한 것처럼 회의가 맹랑스럽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따위에는 탓함이 없이 모두들 윤태철이가 계속 허수빈네를 「연계호」로 맡도록 흔쾌히 가결을 지었다. 윤태철은 새로이 부여된 권한으로 한술 더 떠서 당소조에 향해 몇가지 요건을 제출했다. 3천여 원 되는 허수빈네 묵은 빚을 면제시켜줄 문제를 연구하여 줄 것, 새 주택을 마련해 줄 방도를 시급히 대보자는 것, 필요시에 허수빈네 생산자립에 수요되는 자금으로 대부금을 내어다 쓸 수 있도록 협력해 줄 것 등등이였는데 마지막 사항은 내실을 감춘 것이어서 회의참석자들한테 신비감과 궁금증을 주기까지 했다. 윤태철은 금년은 그럭저럭 농사를 짓고 명년부터는 양돈업을 시킬 타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윤태철은 자동차의 엔진소리가 잦아지듯이 멀리 사라졌음을 느끼며 딱딱한 쇠침상 위에서 기침을 했다. 워낙은 정지간에서 마누라와 나란히 이부자리를 펴고 잤던 것이었는데 한바탕 싸운 뒤라 정혜를 정지간으로 내려보내고 한웃방 침상을 차지했던 것이다. 외양간에 나가 스위치를 당겨 전등을 켜고서 우선 소 구유를 깨끗이 청소해 내었다. 한참이나 역사를 하여 소여물을 주고서 작두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담배를 피웠다. 그러면서 지난밤 마누라가 어떤 기분으로 어떻게 잤을까 했다. 그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누라는 틀림없이 아침밥 먹는 일도 거절을 하고 오늘부터는 일밭으로 나가지도 않고 누워서 버틸것이라 했다. 이번에는 밉살스러운 「볼세비키 남편」이 굴복을 하고 자기한테 빌든가 아니면 이불 속에서의 「성애의 기습작전」을 몰렴치하게 해올때까지 아주 판가리를 할 것임을 그는 의심치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부질없고 무모한 짓거리일 것이었다. 아무리 그녀의 몸이 상하고 마음이 엉망이 된다 해도 자기의 마음이 흔들지 않을 것임을 윤태철은 고요히 깨닫고 있었다. 「볼세비키 남편」의 신념과 진정을 그녀가 이해하고 헤아려 주기 전까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인정에 흐트러지지 않을 것임을 윤태철은 다짐한다기보다는 깨닫고 있는 것이었다. 조반을 치른 뒤 윤태철은 호리에다 암소를 메워가지고 논으로 향하였다. 오늘부터 담배모를 내야 하므로 준필이에게 둥글소를 넘겨주었다. 산더기로 물통을 싣고 올리끌어야 하므로 소가 실하지 않고서는 안 될 것이었다. 오늘은 허수빈을 상관하지 않았다. 소도 없거니와 잘 갈리는 논에서 홀로 고적히 자신의 울적한 기분을 향수해 보고 싶었다. 얼마 후 윤태철은 논머리에 이르렀다. 그저께 오후에 윤준호가 아우 준필이를 도와 논두렁을 감다가 심화를 일구었던 그 논답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사정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니 한낱 평범하고 무심한, 흐르는 세월 속의 그 한순간이 그의 운명을 돌변케 하고, 아들 준호와의 대결에서 쓰디쓴 패배감을 절감케 하게 될 줄을 윤태철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데없는 중년 농민 변창도가 허수빈네 논을 갈고 있는 걸 보고 얼굴에 의혹을 떠올리며 「창도는 왜...」 「내가 맡았수꾸마, 오늘부터 내 땅입지유.」 「내 땅이라니?」 「내가 양도받았수꾸마, 국가에 바치는 값으루 민식을 주기로 하구.」 「누가 그래, 그건?」 「나도 욕심나 맡은 게 아닙꾸마. 준호가 사정사정하길래 대답한 일인데...」 준호라는 소리에 윤태철은 무작정 「창도, 이건 당조직에서 결정한 일이니 누구도 관계 못하우, 돌아가우.」하고 소를 몰아 호리를 논판에 들여다대었다. 「헝! 당조직이 무슨 쓸데있습두? <허귀신>네는 이제는 농살 안짓구 돼지치기를 한답꾸마. 윤서기 아바이는 정말 밤중이네, 저걸 봅소, 준호가 재료를 산더미같이 사다놓고 목수들을 삯내어 오늘부터 궁궐 같은 돼지우리를 세운답꾸마. 저기 보이지 않습두?」 <윤태철은 변창도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마을 맨 뒤 토끼꼬리처럼 붙어앉은 허수빈네 뜨락에 작업을 벌리고 있는 목수들과 구경꾼들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비로소 윤태철은 어떻게 돼먹은 판국인지를 깨달았다. 준호 그놈은 자기, 「볼세비키 아버지」와 당조직을 향해서 허수빈네 문제를 두고 항변을 하고 울분을 퍼붓고 수모까지 서슴지 않고서도 막상 당조직과 「볼세비키 아버지」가 성심껏 헌신을 하고 나서니까 이제는 당조직을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제 애비를 끈떨어진 망석중이 되게 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놈은 고약하게도 당조직을 우롱하고 제 애비를 희롱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가! 당장 걷어가지구 가라구!」 윤태철은 천둥같이 노기가 터져올랐다. 버럭 소리지르며 마을쪽을 세차게 가리켰던 팔을 그냥 내리우지 않은 채 무섭게 노려보며 변창도를 협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변창도는 오히려 능글거리며 「윤서기 아바이, 나하구 왜 이럼두? 준호와 밭임자한테 가서 시빌 붙이쇼.」하고는 유유히 호리를 돌려대었다. 윤태철은 무섭게 질리고 푸들푸들 경련을 하는 얼굴로 변창도의 배포유한 거동을 노려보다가 갑자기 들이박은 뜨개소처럼 씽하니 달려들어 변창도를 밀치고 호리를 뽑아치며 힘껏 팽개쳐 버렸다. 바로 그 순간에 윤태철은 뜨거운 불줄기가 정수리에 뜨끔하니 치솟아 오름을 느끼었다. 머리속이 휭!-돌아감과 동시에 그의 육척장신이 맥없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땀과 근력과 애정과 숙망을 쏟아부었던 기름진 농토 위에 밑둥썩은 고목처럼 꺽이어 넘어졌다. 몇십만년 전 인도양 밑바닥에 침몰된 광대한 대륙으로부터 인류가 직립보행을 해왔던 풍요하기도 하고 가난하기도 한 이 땅덩어리 위에서 윤태철은 다시는 활개치며 걸어 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14 윤준호는 온 하루 울적한 기분과 뜨거운 사념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트럭을 몰고 부지런히 뛰었다. 점심식사도 여느 때는 한 축을 싣고 S시에서 하였댔는데 오늘은 두 번째 축으로 탄을 싣고 내려오다가 탄광촌의 어느 호젓한 식당에서 국밥을 간단히 먹고는 쉼없이 트럭을 S시로 질주시켰다. 한것은 얼른 두 축을 실어버리고 돌아와서 허수빈네 돼지우리 짓는 걸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S시가 시야에 굽어보이는 모아산 마지막 고개 내리막길에서 트럭엔진에 이상이 생겼다. 석탄을 만재한 채로 생겨난 고장이어서 품이 먹고 애가 났다. 지나가는 빈차를 사정해서 탄을 옮겨싣고 남의 차에 코를 끌리워서 자동차수리부까지 당도했다. 차수리가 끝났을 때는 어둠이 깔린 늦은 저녁이라 일을 빨리 끝내려던 계획이 저절로 체념이 되어버렸고 자동차수리공들을 모시고 식당에까지 가다보니 거의 밤중이 돼서야 집에 돌아올 수가 있었다. 아버지가 중풍을 맞았다는 사실을 윤준호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문을 떼고 무심히 들어서다가 할머니가 낙누하시고 있는 걸 보고 준호는 크게 놀랐다. 종전에 없었던 일이었던 것이다. 「웬일이세요, 할머니?」 준호는 의혹스레 지켜보다가 조심히 물었다. 할머니는 치마폭을 주름살 투성이의 얼굴께로 올려다 눈물을 찍어내면서 「얘야, 어서 가보거라. 네 애비... 중풍을 맞았다.」 「언제요?」 「아침에 순정이네 논갈이를 나갔다가 그리됐다는데... 창도가 밭을 가는 걸 보고 무세(무섭게)화를 냈다는구나. 아무때고 그 성질이 탈이지.」 할머니는 콧물을 훔치고 또 다시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준호의 가슴이 섬찍하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뇌출혈을 일으킨 까닭을 금방 깨달을 수가 있었다. 허수빈네 농토를 변창도한테 양도해 버린 자기의 소행이 아버지를 쓰러뜨린 치명적인 일격이 되었다는 사실에 윤준호는 멍해져서 한동안 얼빠진 듯이 서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렇게 서 있지 말고 얼른 자리를 떠야 하리라는, 말하자면 할머니 앞에서 아버지에 대한 일말의 효성이라도 보여 줘야 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같이 장대한 사나이를 거짓말같이 분만을 시킨 할머니 -그 조그마한 모체가 지금 아들을 잃는 비애에 깊이 빠져 있음을 보고 있노라니 아버지한테 불효한 자신이 할머니 앞에 죄송해졌다. 할머니가 자기의 불효를 탓하는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고 있기에 더구나 괴로워지고 있는 것이었다. 밖에 나왔으나 윤준호는 웬일인지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고 있었다. 뭔가 마음의 준비가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음이 도무지 걷잡아지질 않아서 왔다갔다 뜨락을 거닐다가 트럭 위에 올라가 쿠션에 몸을 파묻고 두눈을 꾹 감았다. 그렇게 언제까지고 있을 듯한 부동의 자세였다. 그는 애써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심신을 안정시키고 싶었다. 그러노라면 문득 어느 한순간에 마음에 준비가 다져지고 분연히 몸을 일으키게 될 것임을 윤준호는 확신하고 있었다. 15 윤태철은 저녁 후에야 비로소 심신의 안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변창도의 수레에 실려서 주검같이 들어왔던 그 시각부터 이름할 수 없는 육신의 고통을 겪었다. 중풍을 맞아도 아주 철저히 맞은 것이어서 입이 비뚤어지고 왼쪽 반신이 마목처럼 죽어 버렸다. 집식구들이 울며 뛰어다니고 의사가 와서 치료행위를 하고 마을사람들이 연속부절히 문병을 오는 가운데 악몽과도 같은 하루해가 기울었던 것이다. 윤태철은 쇠침상 위에 반듯이 누워서 각일각 잠에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잠인지 혼미인지 딱히 분간할 수는 없었으나 아무튼 오래간만에 누려보는 듯한 무한한 평안에로 잠겨들고 있었다. 절대적 안정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분부 때문이었는지 집식구들과 문병객들도 이제는 환자곁에서 물러나서 정지간에서 한담이나 하고 있었다. 오로지 마누라 혼자만이 남정곁에서 찰떡처럼 떨어지지를 않고 있음을 윤태철은 눈으로써가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침에 남편이 주검처럼 되어 들어왔을 때 음식을 전폐하고 이제는 일하지 않고 누워서 버틴다던 선언과 짓거리를 거짓말같이 팽개치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더냐 싶게 털고 일어나서 울고불며 남편의 불행을 슬퍼하고 있는 마누라였다. 슬퍼한다기보다는 방금 엊저녁에 남편한테 강짜를 부리고 동네를 웃기었던 자신을 두고 마지막 길일지도 모르는 남편 앞에 용서를 빌고 있는 그녀였다. 그렇지만 윤태철은 그런 것들에 전혀 무감각한 듯이 주검처럼 초연히 누워있기만 했다. 마누라의 심정이 어쩌면 고맙지 아니한 것이 아니고 또한 유명을 달리하는 마지막길을 간다고 할지라도 가슴 속에 주먹같이 뭉쳐져 있는, 마누라에 대한 노여움과 아들 준호와의 싸움에서 받은 쓰디쓴 패배감과 노기를 아직 풀지 못하고 있는 그였다. 그 노기를 풀기에는 그의 「볼세비키」적 울분과 오기가 너무나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마누라의 얼굴이 다시금 가슴 위에 파고들고 있었다. 비비는 듯 마는 듯 뺨을 꼭 대이고 울먹거리며 「어쩌문!... 어쩌문 이런 변이 있겠소? 내가 천벌을 받은 게지, 내 가슴에 못을 치느라구......」 소리를 죽인 원통하고 애달픈 흐느낌이 볼편의 미세하고 간헐적인 흔들림으로 가슴에 전해왔다. 어느새 마누라의 두툼한 손이 적삼깃을 헤치고 들어와서 윤태철의 가슴팍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차츰 복부쪽으로 서슴서슴 더듬어 내려가다가 두꺼비처럼 잠깐 움츠려 있었고 이어서 스스럼없이 미끄러져내려가 그의 성기를 애무하고 있었다. 애무한다기보다 고집스럽게 움켜쥐고 있었다. 윤태철은 혼곤한 가운데서도 그것을 감각하고 있었다. 평생을 부부로 살아오면서 아내가 탐닉을 해왔던 인체의 부위였고 남편에 대한 최대의 신임으로, 불가분리의 깊은 의미로 매양 행하여 왔던 바로 그 짓거리다. 마누라는 그런 짓거리로서 옛정을 되살리고 끝없이 용서를 빌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윤태철은 이제 성해 있는 오른팔을 움직여서 남근을 움켜쥐고 있는 마누라의 손을 물리쳐야 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낮에 치료행위를 하려는 의사를 물리치려 했던 것처럼 단호히 물리쳐 버려야 하리라 했다. 그러면 마누라는 틀림없이 절망하고 말 것이지만은, 그리고 자기 또한 양해와 용서를 바라는 아내를 무정하게 거부한데서 오는 아픈 회한에 시달릴 줄 모르는 바 아니지만은 아직은 마누라의 짓거리를 곱도록이 받아주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윤태철은 성한 오른팔로 아내의 손을 물리치는 일을 수행해내지 못한 채 잠속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윤태철은 구렝이령우에 숱한 고고학자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윤태철의 묘혈을 헤쳐놓고서 무슨 굉장한 변론을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들어본 즉 「... 그래도 화석인류라고 볼 수 밖에 없지요.」 「아니올시다. 이건 절대 우리 인간의 화석은 아니올시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인간은 아닙네다. 참으로 흥미있는 연구과제가 생긴 것 같습네다.」 <윤태철은 그만 깜짝 놀랐다. 자기가 인간도 인류도 아니라?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웬 싱겁쟁이들이 하릴없이 모여와서 더운 밥 먹고 허튼소릴 줴치고 있는건가?... 윤태철은 벌떡 일어나서 그 어중이 떠중이 학자량반들을 썩 쫓아버리고 싶었으나 잠간 꾹 참았다. 그들이 하는 수작들을 좀 더 지켜보고 싶은 호기심이 동하였던 것이다. 그 하회를 은밀히 들어보다가 궁금증을 충분히 푼 뒤에 닭무리처럼 쫓아버려도 결코 늦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윽고 코맹녕이 웅글진 목소리가 웅얼거리기 시작하였다. 슬그머니 눈 떠보니까 코안경을 걸고 머리에 프랑스식 실크햇트를 쓴 서양인 학자었는데 라틴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건 곧바로 <볼세비키화석>이지요. 틀림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이 혈색의 딴딴한 갑각이 그걸 충분히 실증해 주고 있지요. 여러분들이 좀 더 상세히만 관찰한다면 복부부위에 누른빛의 낫과 마치가 새겨져 있는 걸 무난히 발견할 수가 았지요. 이건 시신우에 덮었던 볼세비키당 기폭이 수만년 동안 수성암속에서 그대로 화석으로 굳어진 겁니다. 이 적색의 갑각속에서 인간은 언녕 죽어 있었지요. 말하자면 독립적 사유체로서의 인간, 다정다감한 감정체로서의 인간은 전혀 무시되어 있었다 그겁니다. 그 대신 볼세비키당의 집단적 신념과 의지 같은 것이 로보트처럼 움직이고 있었지요.」 갑자기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시신의 이른바 복부부위를 다시 관찰하느라고 다투어 법석대고 있는 것 같았다. 뒤미처 환성이 일고 박수갈채가 터지는 가운데 윤태철은 자기의 몸이 허궁 뜨는 듯한 감각을 느끼었다. 깜짝 놀라서 보니까 사태는 무섭게 비약이 되어서 자기의 시신이 헬리콥터에 실려지고 있는게 아닌가! 이제는 완전히 「볼세비키화석」으로 결론이 되어가지고 아마도 대영박물관쯤에 실어가는 모양이었다. 윤태철은 더는 곱도록이 누워서 한가로이 궁금증을 풀 여유가 없었다. 그는 발버둥질쳤고 무엇인가 목이 터져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는 결코 난데없는 「볼세비키화석」으로 오인이 되어서 고고학박물관에 진렬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학자선생들, 이게 웬 장난이오니까? 멀쩡한 사람을 인간이 아니라니 그게 어디 될 말이오이까? 본인은 윤태철이라 부르옵는데 자초부터 인간으로 태어났던 것이고 타계할 때에도 인간이었소이다. 중도에 <볼세비키>로 있긴 했지만서도 <인간>으로 다시 회귀하여 가지고 이 묘혈속에 묻힌 것이오이다. 당신들 학자들은 그래 <인간>이 <볼세비키>로 될 수 있고 <볼세비키>가 다시 <인간>으로 전화할 수 있다는 유물변증법을 모르고 있다는 말씀이오니까! 이런 상식적인 자연변증법도 모르고 있다는 말씀이오이까?...」 하지만 그의 항변은 아무런 효험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저승의 육성이 이승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그들 속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고 윤태철은 그대로 유유히 헬리콥터에 실려지고 말았다. 그들은 그의 그 여러가지 「변증법」을 끝끝내 들어 주지 않았다.윤태철은 발버둥질치고 필사의 악을 쓰고 있었다... 윤태철의 몸이 누구의 손엔가 흔들리고 있었다. 번쩍 깨여서 눈을 뜨니 마누라의 슬픈 얼굴이 눈앞에 확대되어 있었다. 그제야 악몽이었음을 깨달았다. 윤태철은 두 눈을 스스르 감으며 깊은 한숨을 길게 토해내었다. 이때 속삭이는 듯한 마누라의 다급한 일깨움이 들렸다. 「준호 왔수! 여보...」 16 윤준호는 마침내 트럭에서 내렸다. 예상보다 빨리 마음이 정리되었고 아버지가 중풍을 맞았다는 그 갑작스런 사실을 자신의 진실한 감정으로 확인을 했다. 그는 활보로 걸어서 아버지네 정지문을 떼고 성큼 들어섰다. 정지간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던 집식구들과 몇몇 문병객(마실군)아주머니들이 벌떡 벌떡 몸을 일으키며 뭔가 반갑고 기대에 찬 눈길로 맞이했다. 준호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사뭇 근엄하고 비장한 얼굴로 곧추 중간방을 질러서 한웃방으로 올라갔다. 어머니도 한마디 군소리없이 마땅히 그리해야 하는 것처럼 슬픈 얼굴로 소리없이 준호한테 자리를 내주고는 정지간으로 내려갔다. 윤준호는 잠간 서서 쇠침상 위에 주검처럼 누워 있는 아버지의 몰골을 처참한 눈으로 뜯어보고 있었다. 추깃내와 비슷한 불가사의한 신선치 못한 냄새가 방안에 떠 있었다. 그것이 곧바로 죽음의 냄새일 것이라고 그는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윤준호는 무너져 내리듯이 풀석 무릎을 꺾으며 침상 아래 온돌바닥에 꿇어 앉았다. 두 손을 공손히 무릎 위에 얹고서 고개를 약간 숙인 채 한 점을 무섭게 응시하고 앉은 그 자세와 틀거지는 결코 몸을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강건한 결심을 보이고 있어서 목격자들의 눈물을 자아내고 있었다. ... 숨가쁜 침묵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침묵 속에서 시간은 똑딱똑딱 더디게 흘렀고 윤준호는 각일각 깊은 골짜기로 빠져들고 있는 뜨거운 사념에 무섭게 매달려 있었다. 17 아들 준호의 출현은 윤태철이한테 가슴 속에 뭉쳐 있는 울분과 노기를 새삼 실감케 했다. 자기를 패배시키고 밑둥썩은 고목처럼 꺽이어 넘어지게 했던 아들이었다. 아들한테 패배당하고 생명이 꺽이운 자기, 「볼세비키 윤태철」었다. 그는 다시금 쓰디쓴 패배감을 느끼었고 무섭게 격노하였다. 아들놈한테라기보다는 패배자로 되어 이렇게 누워있는 자기 자신에 격노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준호가 왔다는 소릴 듣고서도 눈을 떠서 보는 일 없었고 아들의 존재를 몸 가까이 느끼면서도 전혀 모르고 있는 듯이 초연히 주검처럼 누워 있었다. ... 흘러간 역사가 격류처럼 윤태철의 머리속에 굽이쳐 오고 있었다. 800만 대군을 가진 장개석 정부를 대만도에 구축해 버리고 인민공화국을 세우던 그 격정의 연대로부터 구룡골을 격류처럼 쉽쓸고 흘러갔던 중국농촌사의 장려한 화폭이 눈 앞에 생생하게 재현이 되고 있었다. 그 역사 속에서 윤태철은 언제나 당의 충직한 사병이었다. 중국이라는 이 광활한 국토를 거대한 함선마냥 역사의 강에 띄워 놓고 공산당은 키를 잡았고 윤태철은 함성을 지르며 돌진하는 전사로 되어 있었다. 수천 수만의 자기와 같은 「볼세비키 전사」들의 마음과 힘에 받들리어 함선은 풍랑을 헤쳤고 역사는 추진되었던 것이었다. 그 역사의 행정에 당은 키를 옳게 잡지 못하고 굽은 길을 걸은 적도 있었다. 어찌보면 많은 경우 재난을 들씌우고 민중에게 아픔을 주었으며 억울한 희생과 댓가를 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당은 자기 실책과 과오를 감출 줄 몰랐고 과감히 검토하고 시정을 해서 다시 항로를 옳게 잡았던 것이고 민중의 아픔을 위로해 주고 희상자들을 추모하면서 사회주의라는 이 위대한 실험 항해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었다. 역사의 행정은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을 했다. 일찍 선언을 했던 기성신념에 따라 자기의 충직한 선봉전사들을 강유력한 규율로 묶어 세우고 통일적인 의지 아래에 민중을 둔 당은 새롭게 방황을 하고 좌절을 당하고 오류도 범하면서 그리고 그에 동반되는 민중의 고민과 아픔과 희생을 피치 못하면서 전진을 할 것이었다. 거듭거듭 그렇게 반복이 될 것이고 더욱 높은 차원에서 항해는 계속될 것이었다. 당은 절대로 함선을 침몰시키지 않을 것이며 풍요하기도 하고 가난하기도 한 이 국토 위에다 바람직한 민중의 낙토를 창출해 낼 것이었다. 인류공동의 숙망을 역사의 강하위에 -역사의 밖이 아닌- 아름다운 실체로서 구축해 놓고 끊임없이 그것을 완미시켜 나갈 것이었다. 그 때에 가면 민중은 당의 이념과 의지를 보다 친근히 이해하게 될 것이고 당의 기치 밑에 헌신적인 돌진을 했던 수천 수만의 「두뇌 없는 순복도구」들의 신념과 노고를 깊이깊이 터득할 것이었다. 자기, 「볼세비키 윤태철」이도 그 때에 가면 행복의 미소를 지을 것이었다. 윤태철은 자기의 일생은 그렇게 되어 있었다고 총결을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어 있을 것임을 자신하고 있었다. 달리는 될 수가 없으며 달리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라 생각을 했다. 말하자면 「두뇌없는 순복도구」질을 해야 하는 「볼세비키」를 포기하고 「자유로운 인간」으로 진화를 하여 혹은 회귀를 해가지고 묘혈 속에 묻히지는 않을 것이라 했다. 그대로 「볼세비키」로서 속세의 진구를 털어버리고 죽어서도 「볼세비키 화석」으로 굳어질 것이라 했다. 그것이 곧바로 그의 삶의 참모습이었고 생명의 본질이었으며 정신의 자아였던 것이다. 준호 녀석이 자기, 「볼세비키 아버지」에 대한 원한과 울분을 품고 증오하고 멸시하고 불손을 부리고 있지만 방법이 없는 일이었다. 아들놈의 원과 한을 풀어 주고 양해와 용서를 받기 위해서 신념과 지조를 꺾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들 앞에 굴복을 하고 「인간」으로 될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수치스러운 자기배반인 것이고 그의 생명의 실질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 외의 다른 것이 아닐 것이었다. 그는 아들의 양해와 용서를 받지 못한 채, 아들의 가슴 속에 응혈이져 있는 원과 한과 아버지에 대한 그의 유감과 소망을 풀어주지 못한채 눈을 감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바로 「볼세비키 아버지」때문에 순정이와 애정을 잃었고 마음 속에 깊은 상처를 받았으며 원과 한을 품고서 울분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아들의 애처로운 모습을 전생의 죄로써 받아 안고서 조용히 떠날 것이었다. 그런 아들에 대한 부성의 통애와 아픈 회한과 속죄의 정감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오히려 깊이깊이 감추어 품고서 무정하고 냉혹한 모습으로 이 세상을 하직할 것이었다. 윤태철은 자기의 일생이 최후의 한점에 이르렀음을 비로서 깨달았다. 돌이켜보니 사람의 한 생이 아득히 먼 세월이기도 하고 하루밤 꿈결인 듯 싶기도 했다. 보람과 의미로 충만되었던 인생이기도 하고 그 인생이 거짓말같이 허무하기도 했다. 윤태철은 이런 감상에 젖어들다가 문득 준호의 존재가 궁금히 여겨지고 있었다. 뒤늦게 나타난 아들을 분명히 몸 가까이 감각을 했던 것이었는데 언제까지고 한 마디 문병언사도 없고 자취소리마저 뚝- 끊기었음이 기이했다. 윤태철은 급기야 슬며시 눈을 떴다. 온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금방 보이었다. 놀라운 깨달음에 그는 못볼 것을 본 것처럼 다시금 눈을 슬며시 감아 버렸다. 그렇지만 그 모습이 망막속에 그냥 떠 있었다. 두 손을 공손히 무릎 위에 얹고서 고개를 깍듯이 숙이고 있는 그 부동의 자세와 뜨거운 표정이 갈수록 뚜렷하게 눈앞에 찍혀지고 있었다. (저놈이 여직껏 저 모양으루 있었던가!...) 윤태철의 마음 속에 아들을 갑자기 인식한 듯한 감동이 일어서고 있었다. 비록 애비한테 원과 한을 품고 대항을 하고 울분을 터트리던 아들이었지만, 애비를 패배시키고 비참하게 꺾이어 넘어지게 했던 아들이었지만 강건히 꿇어앉은 그 모습이 눈물겨웠고 그 마음가짐이 갸륵했다. 아들은 지금 저렇게 감연히 자기를 숙이고서 부주(父主)앞에 달갑게 죄인으로 되고저 하고 있는 것이며 자신의 불효를 꾸짖어주고 처벌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구구한 언사로써가 아니고 인격적인 강개한 거동과 제몸의 고초로써 천금 같은 효도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었다.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설움이 북받치고 있었다. 샘처럼 솟아나는 눈물이었고, 눈물이 그처럼 뜨거운 줄 이제 느껴보는 듯 싶었다. 양쪽 눈귀로 줄쳐 흐르는 눈물이 얼굴을 뜨겁게 데우며 연속 베개깃을 적시고 있었다. 아들에 대한 부성의 통애와 아픈 회한과 속죄의 정감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오히려 깊이깊이 감추고서 무정하고 냉혹한 모습으로 이 세상을 하직하리라던 다짐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동시에 윤태철은 자기가 여태것 아들 준호와 순정이 앞에 머리를 숙여 사죄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생각을 했다. 순정이의 원혼이 눈을 감도록, 아들 가슴 속에 맺혀있는 원과 한이 뜨겁게 녹아 풀리도록 빈말 한마디 한 적이 없었음을 통감했다. (저 애의 가슴에 원과 한이 맺히지 않을 수 있을꼬? 제 애비의 일이 얼마나 유감했을꼬?) 이제 윤태철은 아들 앞에 달갑게 죄인이 되어서 속죄를 하리라 했다. 순정이와 준호 앞에 자기 자신과 흘러간 역사와 당을 대신해서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어야 하리라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임을 아프게 깨달았다. 금방 깨난 햇병아리처럼 장성을 한 뒤에도 영원히 품어주어야 마음이 놓이라라던 아들이었음을 이제 다시 절감을 했다. 「얘야!... 그만... 일어나거라!」 마침내 윤태철은 힘겨운 입을 열었다. 18 ... 벽에 걸린 쾌종이 열두 점을 친 지도 이슥했다. 궂은비가 구질구질 내리고 있었다. 쥐 죽은 듯한 정적 속에 비 내리는 소리가 마음의 자리를 뜨겁게 두드리고 있었다. 이제는 코고는 생명들은 다 혼곤히 잠들고 영혼들이 춤추는 시간이었다. 윤준호는 자세와 표정을 조금도 흐트러뜨림이 없이 사념의 깊은 골짜기를 배회하고 있었다. 행복했던 연애시절로부터 순정이의 죽음과 첫애정의 상실, 그리고 허수빈네를 놓고 벌어졌던 아버지와의 대항과 갈등의 옹근 과정을 회고했고, 가슴 속에 응어리져서 사납게 연소되고 있는 「볼세비키 아버지」에 대한 원한과 혐오와 울분을 다시금 실감해 보았으며 자기 자신보다는 순정이를 위해서 아버지를 용서할 수가 없다는, 그것은 순정이를 배반하는 것 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꿋꿋한 주장을 새삼 날을 세워 보았다. 그렇지만 준호는 이 시각에 와서 그러한 주장을 운운함은 곧바로 최대의 불효임을 깨닫고 있었다. 벼락에 맞은 고목처럼 무참하게 꺾이어서 잔폐가 되어 누워 있는 아버지를 앞에 두고 못할 짓거리임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오직 달갑게 죄인이 되어서 아버지 앞에 아들의 불효를 꾸짖어 주고 뺨이라도 쳐주기를 소망하는 마음가짐과 아버지에 대한 모든 대항적인 감정을 풀어 버리는 내실한 관용만이 곧바로 효도임을 알았다. 그래서 윤준호는 처음으로 사유의 기초점을 자기의 울타리로부터 아버지쪽으로 그 위치를 옮겨보았다. 말하자면 여태것 아버지한테서 받은 원한과 아픔과 울분만을 부둥켜안고서 세상과 역사와 「볼세비키 아버지」를 투시해 보았고, 진리와 정의를 외치고 허위와 부조리를 질타했으며, 가슴속에 대항적인 정서만을 길러왔던 그였는데, 바꾸어서 당에 매인 몸인 아버지의 입장과 처지에다 자기를 세워놓고 문제를 정시하고 생각을 해본 것이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이해되고 있었다. 꼭 마치 여태껏 아는 주정이라도 부린 것처럼 그것은 이미 마음 속에 이해되어 있는 것이었다. 당의 강유력한 규율과 의지 앞에서 아버지가 당하고 겪었던 그 모든 곤혹과 번민과 울분이 실감이 되었고, 인간본체의 마음을 속이면서 무조건적으로 「순복도구」질했던 아버지의 삶의 신조와 신념이 헤아려지고 있었다. 순정이와의 혼사를 반대하고 순정이를 죽음에 몰아넣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 당시의 정치적 기후와 당지부 서기라는 위치에 있었던 아버지의 처지와 그 당위성도 헤아려지고 있었고, 아들의 가슴에다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겨 주고서도 또한 그것 때문에 자기의 마음이 괴롭고 아프면서도 아들 앞에 인격을 굽히기를 거부해온 아버지의 「볼세비키」적 자존심과 오기도 이해되고 있었다. 비록 그 모든 것이 마음에 받아들여지질 않고 그러한 인생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마는, 그리고 그러한 당위성 때문에 심히 괴로운 것이었지만은 이제는 그한테 아버지 「볼세비키 윤태철」은 혐오감보다는 쓰라린 연민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준호의 환상 속에 느닷없이 충실하고 끈질긴 기질의 역우(役牛)가 떠오르고 있었다. 한 생을 달갑게 멍에를 메고 끌다가 부역에 지쳐서 쓰러진 황소였다. 그것이 아버지의 참모습처럼 보이고 있었다. 천대받는 자의 설움과 낡은 사회를 뒤엎는 격정의 사변을 몸소 겪은 세대였던 까닭에 공산주의라는 꿈같은 세상에 대한 신앙과 신념을 거의 숙명으로 받아들여가지고 평생을 거기에 매달려서 -혁명의 멍에를 메고서- 희생적인 헌신성으로 자신을 혹사시켜 왔던 아버지였다. 평생을 편한 세상이 없이 노동과 사업과 투쟁으로 고달팠던, 그것을 삶의 보람으로, 행복의 의미로 누려왔던 아버지의 인생이었다. 더욱 측은한 것은 그런 아버지의 염원과 본의와는 다르게 그의 「볼세비키적 얼굴」은 그렇게 썩 「혁명적」이 못되었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분명히 그것 때문에 고민과 울분과 비애를 느꼈던 것이고, 이제라도 새롭게 공산당원의 참신념과 참정신을 빛내고저 뜻을 다지고 「볼세비키적 오기」를 부리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불손하고 모욕적인 아들의 훈계대로 야심적으로 자신을 굽히고 오히려 아들 앞에 보란듯이 시위를 하면서 허수빈네를 맡아 나섰던 것이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민주가 압살이 되어 있었던 사회적 질환의 시기는 이미 역사로 흘러가고 사회가 바야흐로 완치일로를 걷고있는 마당에 아버지, 「볼세비키 윤태철」은 부역에 혹사된 역우처럼 쓰러지고 만 것이다. 곧 바로 아들 때문에 갑작스레 생명이 꺾이운 것이다. 윤준호는 오직 그러한 부성(父性)을 마주하고 꿇어 앉아서 자신의 불효를 죄로써 절감하고 있는 것이며, 무서운 책벌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며, 용서를 빌고 있는 것이었다... 「얘야!... 그만... 일어나거라!」 마침내 석쉼한 목소리로 변성이 돼가지고 띄엄띄엄 힘겨웁게 번져내는 아버지의 떨리는 말소리가 무겁게 드리운 침묵을 깨뜨렸다. 준호를 머리를 번쩍 들어 침상 위로 바라보았다. 담이 끓는 듯한 거센 숨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가슴이 심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벌창하는 늪물처럼 눈물이 넘쳐서 골을 이루어 흐르고 있었다. 눈물이 저렇게 맑을 수가 있으며 그토록 풍족할 수가 있을까 싶었다. 「준호야!... 내가 순정이한테... 죄를 졌다. ...네게 미안하다... 다 지난... 일이지만... 이 애빌... 용서... 해다구... 다 잊어다구!...그리구... 너도 이제는...장가를 들도록... 해라... 지난 일은... 지난 일이구... 일생을 그르쳐서는... 안되느니라!... 네 에밀... 봐서라두... 명심을 하여라. 」 굳어진 혀로 힘겨웁게 번져내는 분명치 못한 발음이었지만 준호는 또박또박 들었다.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부성의 뜨거운 육성이었다. 준호의 가슴에서 마침내 설움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그리구... 우리 당원들을... 이해해다구... 역사를...존중해다구!... 세상일이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니라.」 윤준호는 그만 억제력을 잃고 고개를 한쪽으로 제친 채 아이처럼 헉! 헉!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용서를 빌지 않기만 못했다. 그것이 그가 울분으로 바라오던 것이었지만 막상 아버지가 자신의 강한 개성을 아들 앞에 굽히고 용서를 빌어오자 준호는 오히려 아버지에 대한 원과 한이 이처럼 쉽게, 한순간의 감동과 열도에 봄눈처럼 녹아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서러웠다. 거기에 바쳐진 자기의 대가가 너무나도 크고 아픈것이었기에 끝없이 서러워지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좀더 일찍 용서를 빌고 자신의 행동으로써 그것을 보여주었더라면 불손하고 울분에 찬 언사로써 아버지를 훈계하고 야유하지 않았을 것을... 허수빈네를 놓고 새롭게 대항을 하고 싸움을 벌리지도 않았을 것을... 차라리 용서를 빌지나 말았으면 이처럼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을 것을... 자신의 불효를 씻지 못할 죄로써 통감하지 않았을 것을!... 윤준호는 침상 모서리에 이마를 붙이고서 구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그 울음이 차츰 창자와 허파를 훑어내는 듯한 통곡으로 변해지고 있었다. 그 통곡 속에서 준호는 최후로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흘러간 역사의 시간과 공간 속에 뜨겁게 투영이 되어있는 아버지, 「볼세비키 윤태철」의 이미지를 마음 자리에 아프게 찍어넣고 있었다. 그리고 적멸의 역사 속에, 밑창없는 망각의 심연에다 끝내는 순정이를 묻어 놓으면서 울었고, 그 모든 과거와 마음 속으로 고별을 하면서 윤준호는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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