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울음소리 요란했던 호명산(虎鳴山)을 찾아
세상의 모든 시작은 늘 가슴을 설레게 한다. 호랑이 해인 병인년(丙寅年) 새해를
맞아 첫 산행지로 호랑이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을 만큼 산세가 깊고 숲이 울창했다는
가평(외서면) 호명산을 찾았다. 새해 벽두부터 쏟아진 폭설과 기록적인 한파로 전국
의 산이 눈에 덮인 채 꽁꽁 얼어붙은 상황에서 장거리, 높은 산이 부담스러워 서울에서
비교적 가까운 산을 선택한 것이다.
호명산은 청평에서 진입이 용이해 열차를 이용한 산행지로 적합한 산인데 이 날은
산악회 버스로 회원들을 태워 청평검문소 지나 오른쪽 대성사 가는 길목에서 내려
산행을 시작했다. 10시 정각 산행길에 나서니 도로엔 눈이 하얗게 쌓여 아이젠을
착용해야 했다. 모촌교를 지나고 마직이 마을을 통과, 작년 말에 포장공사를 마친
넓은 도로를 따라 대성사 쪽으로 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도로는 물론 주변이 온통 흰눈으로 덮여 은빛 설원의 한적한 시골 풍경이다. 저 멀리
호명산의 설경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과연 산을 제대로 오를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몇 년 전 여름에 한
번 왔던 경험만으로 회원들을 인솔하고 온 것이다. 10여분후 대성사 입구에 도착했다.
오른쪽 언덕길로 대성사 일주문을 통과하면 진달래능선을 타고 정상(632.4m)으로
오르는 가파른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전한 코스로 가기로 하고 곧장 이어지는 우무내길을 따라 올라갔다.
오른쪽으로 호롱불주막이 있고 포장길은 감로사까지 이어진다. 반야교와 극락교를
건너자 미륵대불이 우뚝 서있는 감로사가 나타났다. 소신공양(燒身供養)으로 열반에
든 충담 대종사가 수행했던 산사로 지금도 매년 그를 기리는 영산재가 봉행되고 있다
한다.
등산로는 절 앞에서 왼쪽 계곡 길로 이어지는데 커다란 바윗덩이가 들어찬 우무내계곡
길은 온통 눈으로 뒤덮인 채 사람이 지나간 흔적조차 없다. 이 산중에 우리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호젓해서 좋기도 하지만 약간의 두려움마저 들었다. ‘적막강산’이라더니 실감
이 난다. 선두가 앞에서 길을 내었다. 완만한 오르막이지만 눈길이라 몇 배로 힘이 든다.
낮다고 얕볼 산이 아니다. 춥고 세찬 바람이 몰아쳐도 새해엔 소나무처럼 살자고 다짐했
는데 다른 나무에 비해 유독 눈이 많이 쌓인 소나무가 고상하기도 하지만 왠지 안쓰러워
보인다.
11시 10분경 대성사 출발 이후 처음으로 만난 갈림목(대성사2.1km, 정상3.3.km, 호명
저수지1.1.km)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우측 계류길 대신 곧장 뻗은 길을 따라 올라 갔다.
계곡을 벗어나 왼쪽 사면으로이어지던 산길은 거의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로 마치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는 듯 했다. 한 발짝씩 전진해가니 전방에 철조망 울타리와
자물쇄가 달린 철문이 가로막고 나섰다.
원래 이 길은 등산로가 아니었다. 잘못 왔다 싶어 돌아가려다 혹시나 하고 다가가보니
문이 조금 열려있었다. 그래서 호기심에 그곳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중간에 길이 희미해져 만들어 갔다. 얼마 후 비탈길을 올라서 보니 눈앞에 호명호 댐이
거대한 장벽처럼 솟아오르고, 등 뒤로 호명호에서 오른쪽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그 뒤로 여러 봉우리들이 이어지는 산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릉은 골을 이루고
마치 백설기를 뿌려놓은 듯 수려하다.
설산의 풍광에 취해 걷다가 널찍한 평지위로 올라선다. 순백의 ‘미로공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산중 호수도 그렇지만 공원 또한 예사롭지가 않다. 세상엔 눈꽃보다 아름다운
꽃이 없다고 하는데 식재된 듯 한 주목나무들이 가지마다 눈꽃을 매달고 도열한 채
우리를 맞아 주었다. 나무에는 눈꽃이 우리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공원 한가
운데는 무지개 빛 직육면체 상자 모양의 조각들이 하늘을 향해 서 있다. 하얀 캔버스
위에 그려진 소인국의 도시처럼 보였다. 잠시나마 딴 세상에 와 있는 듯 하다.

공원 이름처럼 눈에 덮인 길이 미로처럼 찾기 힘들어 이리저리 배회하다 콘크리트 댐
오른쪽으로 다가가 급경사로 된 수백 개의 철 계단을 오르기로 했다. 강화 마니산 계단,
중국 황산의 돌계단을 오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힘들게 올라서니 눈앞으로 너른
호수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두꺼운 얼음 위에 흰눈이 덮여 있다. 깨끗하고 신비로운
모습이다. 백두산 천지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산정에서 이런 호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국내 최초의 양수발전소인 팔당발전소 상부저수지인 이 호수는 정상 북동쪽 수리봉
일원에 자리 잡고 있는 가평 제2경으로 주변에 탐승로가 조성돼 있고 육각정의 홍보관
과 2층 전망대가 있다. 산중호수의 이색적인 풍광도 볼만하지만 그보다 여기서 바라
보는 조망이 더 일품이다. 잠시 숨을 고르고 주변 경치를 즐긴다. 산과 산들이 서로
손을 잡은 듯 하나로 이어지고 그 아래 눈 속에 파묻힌 미로공원이 보인다.
산은 말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자연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한 마음을
안고 여기서 그만 하산키로 결정했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위험해서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약간의 간식을 먹고 호수 주위를 한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뽀드득뽀드득 눈길
을 걸으며 잠시 옛 추억에 잠긴다. 20분 정도의 산책을 즐긴 후 우리는 바로 하산코자
길을 찾았다.
상천역 쪽으로 가다보니 미로공원으로 내려가는 진입로가 있었다. 이걸 모르고 무모
하게 댐 계단을 밟고 올라온 것이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은 재미없지만 다시
눈길을 걸어 하염없이 내려갔다. 오면서도 다른 등산객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이렇게 큰 산에 우리 일행뿐이라니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하긴 아내 말대로 “이런
날 산에 가는 사람이 당신 말고 또 있겠느냐” 고. 그러나 이렇게 와보면 좋은걸 어떡하나.
한낮이 지나면서 날씨가 많이 풀렸다. 버스가 기다리는 곳으로 내려오니 오후 2시 반이
되었다. 총무단에서 떡국을 푸짐하게 끓여 홍어회무침과 함께 내놓았다. 산행 후 출출
한 상태에서 먹는 뒤풀이 음식과 약간의 반주는 언제나 맛나고 즐겁다. 멀리 보이는
호명산을 바라보며 올 한해 우리 산악회 회원님들 호랑이처럼 용맹하고 또 무엇보다
무사고 산행이 되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첫댓글 경인년 새해에 호명산을 다녀오셨네요.설경이 정말 아름다웠겠습니다.
그런데 배꼽만 보이고 사진이 안보이네요.
잘 보고 갑니다 ,몇년전 처음 개방할적 산행이 그리워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