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한두 주 동안 때맞춰 가야만 절경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이 내장산(內藏山) 단풍이 아니던가.
그래서 버스와 승용차, 오가는 사람이 지천으로 밀려드는 북새통을 마다하지 않고 반복해 오는 것이리라. 그러나 원색의 등산복 차림의 많은 인파 사이에서 정말 이 산의 그 내밀한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할 여유가 있을지는 회의로 남는다.
단풍이 물 좋은 시간대를 지나 이제 겨울의 문턱에 서 있는 막바지에 내장산이 아니라 내장사(內藏寺)를 보기 위해 필자는 나섰다. 공교롭게도 이른 아침부터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성급하게 잎을 모두 떨군 나무들은 가지에 물방울을 매단 채 우화(雨花)를 뽐내었고, 아직 단풍의 아름다운 자태가 어느 정도 남아있던 나무들은 화려했던 지난 날을 회상하는 듯 길가에 수북히 쌓인 자신들의 분신을 굽어 보고 있었다. 뿐더러 산 밑의 감나무에선 홍시들이 비를 머금고 빼곡이 매달려, 낙엽으로 돌아간 단풍을 대신해 뒤늦게 산을 찾은 이에게 오롯한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었다.
내장산의 협곡은 주차장과 위락시설이 모여있는 초입에서부터 3킬로미터에 이르지만 보행자들에게 지루함을 안겨줄 줄 모른다. 오히려 갈수록 강한 흡입력으로 발길을 안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는데, 도열하듯 길게 뻗어있는 단풍나무의 터널 때문일 것이다. 한데 가을에만 이 산을 예찬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가을 단풍의 황홀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두터운 신록으로 진한 그늘과 냉기를 드리우는 여름이나, 나목과 함께 푸근한 설경을 빚어내는 겨울 또한 내장산의 아름다움으로 꼽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길고 긴 단풍의 수해(樹海)가 끝나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내장산 내장사(內藏山內臟寺)’라는 일주문을 만날 것이다. 여기서부터 좀더 굵은 단풍이 촘촘히 늘어서 경내로 인도하는데 오른편 경사받이에 24기의 부도와 탑비 7개가 모셔져 있다. 부도 가운데는 신암(信庵), 해인(海印)으로 추정되는 무보당(無保堂)의 부도와 함께 한곡당(寒谷堂), 하월당(河月堂), 남월당(南月堂), 대익(大益) 스님의 부도가 있다. 흔히 오가는 행인들이 외면하기 일쑤이나 연혁이 흐릿한 내장사의 역사와 자취를 훑어보려는 이에게는 더 없는 더듬이 구실을 해주는 것이다.
학명 선사 사리탑명병서(鶴鳴禪師舍利塔銘竝書)에 따르면 내장사는 백제 무왕 37년(636) 영은 조사(靈隱祖師)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있으니 영은이란 이름으로 절의 이름을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초의 기록 가운데 세조 14년 성임(成任)이 정혜루 건립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정혜루기(定慧樓記)가 절의 연혁에 도움을 준다.
“그 가운데 큰 사찰을 영은사라 부르는데 고려 말에 지엄(智儼)이 처음 머물렀고 조선에 와서 신암 스님이 능히 그 자취를 이어 업적을 드날렸다.”는 기록이 있어 눈길을 끈다. 50여 동에 이르는 전각을 거느렸던 영은사가 위기에 처한 것은 조선 중종 때이다. 1539년 조정에서는 내장산에서 ‘승도탁란(僧徒濁亂) 사건’이 일어나자 내장사와 영은사가 도둑의 소굴임을 지목해 두 절을 소각시키도록 한 것이다. 이 기록은 조선 중기까지 적어도 내장사와 영은사가 각각 독립된 절로 존재했음을 증거해 준다.
한동안 방치되었던 절은 18년이 지난 후 명종 12년(1557) 희묵(希默) 대사가 법당과 요사채를 건립하고 내장사라고 고침으로써 일신하게 된다. 한데 이마저 정유재란시 전소됨으로써 다시 폐사화 된다. 영관(靈觀) 스님이 이후 다시 중수하고 개금불사를 행하는 등 한동안 불사가 연이어 이루어졌으나 6·25를 거치면서 내장사는 또다시 철저하게 소진, 파괴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그러나 절은 또다시 나름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천왕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벌어선 담장이 뚜렷하게 경내를 표시하고 정혜루와 천왕문 사이의 연못은 무미한 공간에 월인천처럼 부처의 자비를 함씬 드리워 주는 것만 같았다. 지금은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해 툭툭 낙하하는 활엽들이 일엽편주로 멋대로 떠다니고 혹간 행락객, 절 지붕 등을 얼비쳐 주고 있는데 영지(影池)의 피사체로서 정혜루만큼 기품 있게 어울리는 자태는 다시 없는 것 같다.
주변으로 느티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등의 거목 아래 덩치 큰 바위들이 벌려 앉아 있어 전래의 단순 소박한 정원미가 한 눈에 읽혀진다.
정혜루라는 편액은 몹시 흘림이 심해 안내문을 보고서야 자체를 헤아릴 수 있는데, 2층으로 된 건물 밑으로 공간을 들어서는 누구든 경거망동을 떨치게 할 요량이었다. 담장을 지나고서 다시 사방으로 담이 둘러쳐 있는 또다른 마당에 서게됨으로써 내장(內藏)의 의미를 거듭 강조하는 것이 이 절의 특이한 가람 배치이다.
정혜루 밑 계단을 오르고 나면 곧바로 대웅전이다. 이 건물은 부안에서 사서 이건한 것으로 대부분 근래 지은 다른 전각과 달리 중후한 맛이 일품이고 기둥을 돌로 앉혀서인지 안정감이 돋보인다. 이 절에서의 문화재는 5층 석탑 1기뿐이었는데 그나마 심하게 훼손된 채여서 안타까움이 컸다가 근래 대웅전 앞에 석탑을 건립함으로써 분위기가 일신되었다.
석탑을 중심으로 명부전, 극락전이 서로 마주한다. 대웅전 왼쪽으로 관음전이 작은 몸집으로 다소곳한 데 비해 왼편 널찍하게 펼쳐진 공간으로 요사와 향적원, 해운당이 큰 덩치로 들어서 있다.
정혜루 왼편에 바짝 붙어있는 범종각 안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49호 법종이 보관되어 있는데 전체 높이 80센티, 입지름 50센티의 크기로 영조 44년(1768)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원래 장흥 보림사에 있던 것을 시왕전에 옮겨 봉안해 오던 중 일제 강점기 동안 놋쇠공출로 강제 징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산내 암자인 원적암에 모셨고 6·25 동란시에는 잠시 정읍시내 포교당에 옮겨지는 등 민족의 시련만큼이나 숱한 곡절과 고비를 거친 것으로 유명하다.
내장사는 경내에서조차 산의 절경을 끝내 버리지 않는 절이다. 대웅전 마당에선 대웅전 뒤로 암벽을 날카롭게 벼려 위태롭게 절을 에워싸 천혜의 절경을 빚어내고 있었다. 거기다 양편의 또다른 갈색의 수해 역시 볼 만했다. 절경을 불심으로 끌어안고 있는 절, 그렇게 내장사는 가을의 끝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