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 길상사’탄생하는 날
절집 찾아온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스님의 만남
법정스님이 1천억원대의 대원각터를
시주받아 탄생한 길상사의 개원법회가 열리던 날,
김수환추기경이 축하하기 위해 길상사를 찾았다.
종교의 벽을 넘어 이루어진 이 날의 만남은
이즈음 각박한 세태에 훈훈한 감동을 남기는 일이었다.
이날 축하 법회에서 김추기경과 법정스님은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고 가난한 마음을 서로 나누자고 입을 모았다.
글·한경심 기자/ 사진·최문갑, 전영한 기자
그 날, 새로운 절이 태어나는 날, 아침부터 종소리가 내내 울려퍼졌다.
절집 안마당 종각에는 새로 들여놓은 비천문양의 종이 있었고
그 앞으로 사람들이 종을 치기 위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사람들은 자기 차례가 되면 크고 맑은, 그러나 나지막하게 퍼지는 종소리를 내고 싶어했다.
겨울날치곤 푸근했던 12월14일 서울 성북동 삼각산 기슭에 자리잡은 길상사(吉祥寺)에서였다.
법정스님이 이 대원각터를 받아들이기로 했던 96년부터 길상사는 뉴스의 초점이었다.
시주한 이가 ‘김숙’이라는 이름으로 통했던 과거 대원각 요정주인이었다고 해서,
본명은 김영한인 8순의 이 할머니가 월북 천재시인 백석의 여인이었다고 해서,
그리고 법정스님과의 인연이 아름다워, 길상사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는
여러모로 흥미를 자아내면서도 기분좋은 뉴스였다.
무려 1천억원대에 이르는 재산을 시주한 지 1년 반 만에 마침내 길상사로 태어나는 이 날,
또 한가지 아름다운 소식에 사람들은 가슴 설레었다.
바로 김수환추기경이 개원법회에 참석하여 축하를 해주기로 한 것이다.
법정스님과 30년지교 장익주교가 주선한 일
평소 법정스님은 ‘시절인연’(時節因緣)이란 말을 자주 쓴다. 선가에서 쓰는 말로,
굳이 애쓰지 않아도 혹은 꼭 피하려고 해도 만날 인연은 만나게 된다는 말이다.
어느날 갑자기, 우연히 만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전에 만날 요인을 품고 있다가
시간적 공간적 연이 닿으면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아마 김수환추기경과 법정스님의 만남도 시절인연이었나 보다.
그러나 이 시절인연이 이루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
그 주인공은 춘천교구장으로 있는 장익주교. 법정스님과 장익주교의 30년 지교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장익주교가 김추기경에게 길상사 소식을 전하면서 뜻을 타진했고,
김추기경은 이 문제를 의논하러 온 길상사주지 청학스님에게
“법정스님은 우리신부님들과 수녀들도 참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이다.
주일미사가 있는 날이지만 기꺼이 참석하겠다”
는 뜻을 밝힘으로써 이 귀한 만남은 이루어졌다.
김추기경이 길상사의 개원법회에 참석한다는 소식이 전해져서인지,
아니면 본래 법정스님과 가톨릭과의 교분이 두터워서인지 모르지만,
이날 길상사 마당에는 수녀님들 모습이 꽤 보였다.
‘불자들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문을 활짝 열어놓겠다’
는 이 절의 회주 법정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오전에 예불이 있어서인지 개원법회가 시작되기 훨씬 전에 이미 사람들은 마당을
가득 채우고 넓은 대원각, 아니 길상사 경내 언덕까지 넘쳤다.
불교조각가 박찬수, 시인 류시화 등도 모습을 나타냈고,
대통령선거를 앞둔 직전이어서인지 각당 실무자들이 나와 있었다.
특히 국민신당측에서는 이인제후보 부인 김은숙씨가 직접 참석했다.
개원법회는 오후 2시에 시작했다. ‘삼귀의’ ‘반야심경’ 봉독으로 시작해 송광사
방장인 보성스님의 고불문(告佛文, 길상사는 송광사 서울 분원으로 정식 등록했다)이 있었고
직지사 조실인 관응스님이 노구를 이끌고 와 눈길을 끌었다.
관응스님은 불교계에서는 큰스님이다. 물론 송월주 총무원장의 치사도 있었지만
방장이나 조실스님들은 수행승이므로 좀처럼 나들이를 하지 않는다.
불교계에서 길상사나 법정스님에게 거는 기대를 엿보는 듯했다.
특히 관응스님은
“나는 늙은 사람인데 좋은 일이어서 오늘 특별히 축하말씀 드리려고 올라왔다”
면서 법정스님을 치하하고 길상사의 앞날을 기원했다.
“나는 법정스님을 존경합니다. 효봉스님의 법통을 이어받은 법정스님은 출가법을 그대로
지키면서 욕심 없는 무소유의 삶, 청정한 삶을 사시는 스님이어서 평소 우러러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 대원각이 절이 되니 정말 기쁘고, 절로서 흥하기를 기원합니다.”
노스님의 칭찬과 축하에 법정스님은 특별히 나중 인사말에서 감사의 뜻을 전했다.
관응스님의 법어가 진행되는 동안 김수환추기경이 법당으로 들어섰다.
김추기경은 장익주교와 법정스님의 인사를 받고 곧 법정스님,
김영한할머니와 함께 법당 맨 앞 줄에 앉았다. 장익주교는 그 뒷줄에 자리하고 있었다.
김추기경의 축사 차례가 되자 추기경은 일어나 제단 앞으로 갔다.
스님이나 불자들이 하듯 불상을 향해 합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조용한 몸짓으로 나아가 대중들을 향해 섰다.
김수환 추기경의 뒤로 불상과 탱화가 배경그림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참으로 묘한 감동을 주는 장면이었다.
이 날 김추기경은 독감으로 목이 잠긴 상태였다.
하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축사를 계속하는 동안 목소리가 차차 진정되었다.
“평소 존경하는 법정스님이 회주로 계신 길상사는 과연 도심에서 멀지 않군요.
이렇게 도심 속에 새 소리 물소리 들리는 수려한 경관이 있고
그 가운데 길상사가 자리하고 있어 기쁩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은 복잡합니다
특히 도시생활은 잠시도 우리에게 안정을 주지 않아 늘 바쁘고 시간과 일,
근심걱정에 쫓기고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것이 살아가는 건가,
이렇게 사는 게 사람다운 삶인가… 잠시라도 멈춰서 자신을 돌이켜보는
시간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요즘 정치 경제적으로 어지럽습니다.
난국에 마음은 더욱 심란해집니다. 이러다 우리나라 운명은 어떻게 되나 염려도 됩니다.
우리 모두 잠시 멈춰서서 우리 자신을 생각하며 삶을 바로잡고 회의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진정 명상하는 쉼터가 아쉽고, 그런 장소를 가졌으면 하는 소망이 절실합니다."
바로 이런 면에서 길상사의 의미는 참으로 큽니다.
이름대로 길하고 상서럽고 평화스런 느낌을 주며,
우리 정신에 안정을 심어주리라고 믿습니다
법정스님과 청학스님은 우리 마음과 세상 탁함을 정죄하고자
맑고 향기롭게 살기 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부디 맑음과 향이 샘처럼 솟아나는 도량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법정스님이 도심 한가운데 길상사를 세우는 까닭을 그대로 파악한 듯한 내용이다.
김추기경의 축사가 끝나자 그 어느 때보다 큰 박수가 나왔다.
독선과 아집으로 대립하기 쉬운 종교계에서 보기 드문 아름다운 인사가 아닐 수 없었다.
회주스님 인사말씀 순서가 되자 이번에는 법정스님이 나아갔다.
법정스님은 모처럼 가사와 장삼을 제대로 차려 입고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거칠 것 없는 말투로 말씀을 이어갔다.
“오늘 날씨도 궂은데 여러분께서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산중에 계신 관응스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주일 미사로 바쁘실 텐데 축하말씀 해주시기 위해 오신 추기경님,
오늘 축일 맞은 장익주교님도 감사합니다.
시절인연을 만나 오늘 이곳이 길상사로 바뀌게 됐습니다.
이곳이 절이 되기까지는 김영한 길상화(吉祥華)보살님의 소원과
몇몇 불자들의 지극한 발원이 어우러져 열매를 맺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이 일에는 불사에 자신의 소유물을 아무 조건 없이,
기꺼이 내놓은 시주자와 그걸 무심히 받아들인 저의 마음,
그리고 묵묵히 따라준 이곳의 터와 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그 세가지가 한곳 집착하거나 매인 데 없이,
이름 그대로 청정하고 공적(空寂)한 보시와 공양이 된 것입니다.
새삼 오늘 이 자리를 빌어 시주자의 착하고 장한 뜻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 절이 가난한 절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교회나 절이나 모두 호사스럽게 치장하고
흥청거리는 것이 시대의 유행처럼 되어 있습니다.
절이란 안으로는 수행하고 밖으로는 교화하는 청정한 도량입니다.
호사스러움과 흥청거림에서는 진정한 수행과 교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어떤 종교든 시대와 후세에 모범이 된 신앙인이나 종교 단체는
하나 같이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신앙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송광사의 가풍도 그러했습니다.
주어진 가난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지만,
스스로 선택한 맑은 가난 즉 청빈은 삶의 미덕입니다.
풍요 속에서 사람은 오히려 병들고 퇴화하기 쉽지만,
맑은 가난은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하고 진실한 정신을 가져옵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이 어려움은 그동안 물질적 풍요에 집착하여
눈 멀었던 우리에게 분수를 헤아리게 하고 맑은 가난을 되새기게 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길상사는 가난한 절이면서도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길상사가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려면
이 절에 몸담아 사는 스님들이나 신자들뿐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
오셔서 상서로운 인연을 맺으신 여러분들의 충고와 격려,
꾸짖음이 뒤따라주어야 합니다.
끊임없는 관심으로 지켜보고 이끌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법정스님은 큰 소리로 덧붙였다.
“이 자리에 함께한 은혜로 오늘 길상사가 태어났습니다.
좋은 절이 되도록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하겠습니다.”
3시 넘어 법회가 끝난 뒤 법정스님은 이날 참석한 송월주 총무원장 등 불교계 인사들과
김수환추기경, 장익주교를 모시고 자리를 옮겨 차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김수환추기경은 법정스님에게
“좋은 일을 하시고 또 이렇게 뜻깊은 자리에 초대해주시니 참 좋다”고 인사를 했고
법정스님은 “이렇게 와주셨으니 저도 오는 크리스마스에 ‘평화신문’에 기고를 해야겠습니다”
라고 감사의 뜻을 전하며 환담을 나눴다. 김추기경은 30분 정도 머물다 자리를 떴다.
요정이 절이 되기까지의 ‘시절인연’
이날 또 한가지 인연에 얽힌 이야기가 있있다.
법정스님이 김영한보살에게 염주를 선물한 것이다.
관응스님의 법어가 끝난 뒤 시주자인 그를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냥 인사하고 들어가려는 김할머니를 불러 법정스님이 염주를 그의 목에 걸어준 것이다.
아울러 10년 전 김영한보살과 법정스님를 만나게 해준
대도행보살에게도 법정은 염주를 선물했다.
운집한 대중 앞에서 스님의 선물을 받은 김영한할머니는 늘 조용히,
말없이 인사만 하고마는 평소와는 달리 기쁜 표정으로 자신의 소감을 피력했다.
“오늘 이렇게 많은 분들이 와주시고 어른들 좋은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할 말이 없어요. 80평생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똑 같은 고해 속에서 살며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런데 누구의 도움인지 이 터를 만났고…적재적소라고,
이 터가 절이 아니고는 유지하기 어렵다고 봤어요.
학교시설도 생각해봤지만 학교에 준다한들…전 무식하고 게으르게 살아왔어요.
불교도 모르고, 제가 모르는 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았습니다.
이제 부처님 한분 모시자고 해서 한분 모시고…
절이 되고부터는 내 한을 풀기 위해 인경(종)을 마련했는데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다소 들뜬 목소리로 두서없이 말했지만 김할머니의 떨리는
행복감이 대중에게 그대로 전달됐다.
법정스님이 김영한할머니에게 이 대원각 터를 시주받은 것은 10년 전인 87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송광사 분원 고려사에서 대도행보살 주선으로
법정스님을 만나게 된 자리에서 김할머니는 이 대원각 터를 시주할 뜻을 비쳤다.
하지만 40년 넘도록 수도생활을 하면서도 한 번도 주지노릇을 하지 않았던,
아니 절집도 번잡하다며 강원도 화전민촌으로 들어가버린 법정이
선뜻 시주를 받을 리가 없었다. 법정스님은 계속 거절했고,
김할머니는 다른 곳에서는 오히려 기부를 해줬으면 하는 요구를 물리치며
“이 곳을 받아줄 사람은 법정스님밖에 없다”고 졸랐다.
시절인연이란 그런 것인가. 받지 않으려고 해도,
이 터가 절터의 명을 갖고 있기에 기어코 절이 되고말아야 하는지.
94년 ‘맑고 향기롭게 살기 운동’을 시작한 법정은 마침내 96년 도시민의 수련도량으로,
승속이 함께 하는 실험적인 도량으로 이 터를 가꾸기로 하고 김할머니의 대원각 터를 받았다.
10년만에 이루어진 시주였다. 그동안 고기집으로 이용돼온 대원각은 지난해 10월 말,
임대기간이 끝나자 보수에 들어가 한달 보름 만에 절로 탈바꿈했다.
요정과 고기집이라는 과거를 갖고 있지만 시절인연의 바람을 타고
청정도량으로 태어나면서 가톨릭 지도자의 축하말씀까지 받은
길상사의 문은 아주 넓고 담은 아예 없는,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절이 될 것 같다.
첫댓글 편집을해서 올리려 했는데 자료 준비실에 글이 없어져 어디로 갔나? 건망증이 시작되더니만 ......정리도 안된체 이동을 했었네여 읽기에 불편 해도 어쩔 수없게 되었습니다.......나무아미타불
길상사와 법정스님 길상화보살님 모두모두에게 화이팅!하고 소리쳐보고 싶은 심정이에요.너무나도 감동적인 내용에 박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