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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과정
저는 세계적으로 ***이 많기로 유명한 함경북도 **군에서 태어났습니다. 1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저는 7살부터 어머니가 간염을 앓으시면서 살림살이를 맡아 부엌일을 하며 학교 다니면서 성장하였습니다. 제가 14살 되던 해, 북한은 ‘고난의 행군’이라는 극심한 식량난에 시작되었고, 저는 학교에 다니면서 부모님을 도와 장사에 길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학교생활을 충실하면서도 주말에는 빵을 백 개씩 큰 그릇에 담아 머리 우(위)에 얹고 차로 4~5시간 걸리는 고갯길을 걸어서 ** 이라는 시골에 가서 옥수수 교환해오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다 17살에 학교를 졸업하던 해, 어머님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었고 장사도 점점 어려워져 끼니까지 거르게 되자 너무 힘든 나머지 친정 오빠와 저는 중국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났습니다.
중국 ** 쪽 시골에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농사일을 해주고 하루에 중국 돈 5원을 받았습니다.
몇 달 동안 일을 하다 주인집도 생기고 친정 오빠는 돈을 집에 가져다주고 다시 들어오겠다고 주인집과 저와 약속하고 주인집에 남겨두고 북한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주인집에서 오빠가 오전에 떠나 몇 시간 만에 저를 인신 매매자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저는 의지와 상관없이 17세에 중국 **성 38세 된 시골 남자에게 팔리게 되었습니다.
그 집은 동네에서 제일 가난하며 빚도 많은 집이며 남자는 매일 술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남자의 어머니는 매일 아들과 술을 마시고 담배도 피우시고, 아버지는 페병(폐병)으로, 또 하반신 마비로 병을 앓고 계시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상황이 전혀 기가 막혀 팔려간 3일 만에 동네 뒷산으로 도망가다가 잡히고 말았습니다.
동네 사람들과 화가 난 남자와 그의 어머니가 욕을 하고 때리자 같이 달려들어 때리다 남자에게 매를 맞고 다리에 부상을 입게 되며 더 이상 무서워 도망가지 못하였습니다. 매일 눈물 흘리며 먹지 않고 죽으려고 하자 조선족 사람을 데리고 와서 저를 설득하였습니다.
조선족 사람은 이 집에(의) 사연을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남자의 아버지의 마지막 죽기 전 소원은 손자를 보고 죽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동네에서 돈을 모아 저를 사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도저히 머리로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남자의 아버지가 저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저는 그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짠하고 불쌍해 보였습니다. 조선족이 돌아간 다음 나는 아버지의 얼굴과 손을 닦아주고 손짓으로 내가 다시 도망가지 않겠다고 하고 겨우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팔려 간 6개월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매일 술 마시는 남자와 어머니는 저를 미워하고 때리며 집안에 며느리 하나 잘못 들어와서 아버지가 돌아갔다고 하며 동내에서도 여자 잘못 들어와 아버지가 돌아갔다고 욕을 했습니다.
저는 너무 억울하여 이렇게 살기보다는 죽기를 선택하고 농약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병원에 실려가 위 세척을 하게 되며 임신한 것을 알게 되고 유산하며 목숨을 구해지고(구했지만) 병원비와 (‘병원비와’라고 했으면 또 다른 비용을 말해야지 그 다음에 ‘등’이라는 말을 쓸 수 있지요.)등 더 많은 빚을 지게 되었으며 남자 어머니는 더욱더 욕을 하였습니다.
계속 술 먹고 때리는 남자와 어머니와 도저히 살 수 없어 바줄을 가지고 뒤산으로 올라가 죽기를 선택하였습니다. (‘밧줄’ ‘뒷산’ 등 ‘사이 시옷’을 넣어야 합니다.)
그러나 소 방목하는 동네 사람들에게 들키게 되며 죽는 것마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이 살았습니다.
몇 년 농사를 짓고 빚을 값(갚)으면서 고통 속에 살다가 중국말을 배우고 동네 사람들과 친해지며 나이 드신 한 분을 양 엄마라고 부르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양어머니 동생이 2년 만에 놀러 오셔서 저의 사연을 듣고 여기서 바보처럼 왜 매 맞고 머슴처럼 살고 있냐고 하면서 잘 사는 집에 시집 보내준다고 하며 또 그 집은 북한에 부모님에게 돈도 보내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리하겠다고 하여 양 엄마 동생의 도움으로 중국 ***시골에 다시 팔리게 되었습니다. **성 팔린 그 집은 생활은 좋은 집인데 남자의 키는 1미터 25인 난쟁이 장애인이었습니다. 그 집어머니는 잘 해줄 테니 자신의 아들과 평생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아들에게 즉 자신의 손자를 낳아주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낳은 아들은 자신들이 키우면 되니까 저보고 중국돈 3천원을 줄 테니 고향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이 집에서 매 한번 맞지 않고 사람 대접 받으면서 살다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게 되었는데 북한에 살 때 집에 옷 장문 안쪽에 어머님이 중국에 먼 친척이 있다고 하며 적어놓은 전화번호가 생생하게 나타났습니다.
저는 얼른 전화로 꿈에서 나타난 전화번호를 눌러 연락했습니다.
친척분이 받으시고 **이라고 했더니 반가워하면서 북한에서 어머니가 애타게 찾고 있다고 하면서 잠깐 기다리라고 우리 어머니 넷째언니 저의 이모가 중국에 도망 오셔서 살고 있다고 연결하여 주셨습니다.
이모와 통화하는데 저는 그만 조선말이 머리에서 생각만 나고 입으로는 중국말만 하게 되고 서로 안타까워 울기만 하다 이모가 빨리 중국 ***성 쪽에 있으니 오라고 아니면 데리러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때 시어머님께서 들으시고 전화를 달라고 하시고 여기서 임신하고 잘 살고 있다고 연락하지 말라고 하시고 전화를 끓으셨습니다. 다음날 시어머님 농사일하러 나가신 다음 몰래 이모와 자주 통화하게 되며 결국 북한에 어머님과 통화 연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꿈에서 듣고 싶었던 어머니와 통화하는데 저는 조선말을 잃어버리고 자꾸 중국말을 하고 더듬더듬 조선말을 겨우 말하게 되며 어머니와 저는 계속 울기만 하였습니다.
시어머님께서 북한의 부모님께 돈을 보내주시고 전화 연락을 끓게 하시고 집 전화 없애 버리시고 연락을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다 이모와 북한에 어머니와도 연락이 끓어지게 되며 임신하게 되며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태어나자 시어머님은 약속한 대로 돈을 줄 테니 떠날 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정작 아들을 낳고 보니 떠나기 싫어져서 시어머님께 남편과 아들 키우면서 살겠다고 하였습니다. 시부모님들은 허락하지 않으시고 아들을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정말 부탁을 했지만 아들을 볼 수 없었으며 남편 누나와 같이 병원을 퇴원하여 시골집으로 돌아오게 되며 결국 시댁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모와 연락을 했지만 이모는 이미 한국으로 떠나셨고 중국에 있는 친척 집에서 북한에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셨습니다. 어머니와 연락하게 되고 저는 어머님에게 시댁을 떠나야 하는 사연을 조선말 할 줄 몰라 자세히 말은 못하고 대충 이야기하고 돈을 가지고 엄마한테 북한으로 가겠다고 겨우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우시면서 북한에 나오면 안 된다고 제가 죽었다고 실종 신고를 하셨다고 하시면서 이모와 연락하여 대한민국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족과 형제 친척들을 살리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어떻게 나를 낳은 엄마가 세상에 이런 일이 왜 나한테만 일어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 할 수도 없고 모든 것이 원망스럽고 살기 싫어졌습니다.
다음날 이모한테 연락하게 되고 빨리 한국에 와야 한다고 중국에서 큰 경기를 한다고 하면서 북한 사람들 다 잡아 북송한다고 하면서 내가 북한에 잡혀 나가면 우리 집뿐만 아니라 친척들까지 다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눈물 흘리며 아들 얼굴 다시 보지 못하고 중국을 떠나 고생 끝에 삼국을 걸쳐 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저는 2017년 27세 한국에 입국하면서 두고 온 자식은 마음 잠시 내려놓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제 더는 공안에 잡혀갈 일도 없고, 항상 나를 엄습하던 불안에 떨며 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한국에 나와 하나원 퇴소 이틀 만에 저는 식당에 취직하여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북한에서 어머니가 간암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돈을 벌어야겠다는 결심과 각오로 낮에는 고깃집에서 9시부터 9시까지 일을 하고, 밤에는 12시부터 5시까지 감자탕집에서 열심히 일하여 어머니에게 돈을 2년동안 보내드렸으나 결국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어린 나이, 17살에 부모님 품을 떠났던 저는 어머니를 영영 떠나보내고 이제는 오빠와 동생을 데려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낮과 밤을 이어 돈을 벌어야 내 가족을 데려올 수 있다는 생각에 악착같이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막내 여동생을 데려오고 또 오빠를 제 손으로 번 돈을 가지고 데려와서 기뻤지만, 제 마음속에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은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을 한국에 데려온 후, 저는 마음을 놓고 저의 삶을 살아보려 하였지만, 제 마음대로 행복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에도 많은 고생을 하였지만 한국에서 가족을 챙기고 데려오려고 몸을 혹사했더니 이제는 몸이 아프기 시작하였습니다. 식당에서 일을 하다 쓰러져 병원에 가보니 입이 삐뜰비뚤어지고 살짝 풍이 오고 간경화 초기에 이르렀다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좀 괜찮아졌나 싶었는데 몸이 병들어 말을 들어주지 않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두 달 정도 입원하는 동안 기적같이 삐뜰어진 입술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치료 끝나 퇴원하여 또 식당에서 일을 하는 여러 번의 과정을 걸치면서 저의 몸은 더 망가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막내 여동생이 한국에서 여명학교 생활을 하게 되면서 하나님을 믿게 되고 저를 두고 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눈물 흘리며 매일 기도하였습니다. 동생과 교회 분들의 오랜 중보기도 덕분에 어느 정도 건강은 나아졌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저는 모든 인생이 바닥을 치고 벼랑 끝에 서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힘들었던 고통의 시간들 속에 더 이상 살아가기가 싫어지고 죽으려고 하다 결국 죽지 못하고 여동생 담임 목사님을 만나게 되며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동생은 저에게 성경책을 선물해주고 한번 읽어 보라고 하였고 저는 믿기 힘들었지만 마지막으로 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읽다가 계속 궁금증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전화로 동생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다 교회로 자연히 나가게 되며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제일 먼저 기도한 제목은 아들을 만나게 해주시면 목숨까지도 내놓겠다고 하며 매일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정말 저에게 기적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정말 내가 낳은 내 아들을 길에서 만나도 알아볼 수 없는 내 아들을 3개월 만에 찾게 되고 영상통화하고 5개월 만에 중국에서 가서 만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들은 자기와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갔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 했지만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만 저는 엄마로서 매월마다 생활비를 보내주면서 아직도 아들을 제가 키우지 못하게 하시는 시어머님 언젠가는 저에게 내 아들을 데려가기를 허락할 때까지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말 말로 글로 어찌 다 쓰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제는 내가 세상 속에서 내가 바라고 의지하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성경공부를 시작하였고, 2018년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장신대학교에 3학년에 편입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장신대학교에 다니면서 불면증과 이명이 치유되었고, 간경화 초기에서 더 이상 나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재학 중에 몸에 5개의 돌이 있다고 조금 크면 수술하자고 하였습니다.
자다가 통증이 일어나 응급실도 실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수술비가 많이 든다고 하여 교회 성도님들과 가족과 아시는 지인분들과 학교 동기생들 수많은 사람들 중보기도 해주셨습니다. 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가끔 통증은 있었지만 응급실 갈 정도는 아니며 견딜 수 있는 정도였으며 2년 만에 몸에 돌이 2개만 남았다고 의사 선생님께서 이 정도는 수술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면서 따로 치료 받았는지 무슨 약을 먹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이 병원 외는 다른 병원 다니지도 않았고 따로 먹는 약도 없다고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 하였고 하나님께서 치료하여주셨다고 했더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저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병원 검사에서 몸에 결필성 철분이 부족하고 피가 너무 부족한 상태라고 하면서 수혈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피가 6.4 정도면 머리를 들고 힘들다고 이 정도면 쓰러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저는 1년 동안 끄떡없습니다.
그리고 은혜동산이라는 집회에서 주님께서 파란 하늘에 뒤 모습을 환상을 보여주시고 음성으로 신명기 6장 4절과 5절 말씀을 들려주시고 방언을 주셨습니다.
정말 여러 차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교회를 다니면서 나를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였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중국 땅에서 팔려가고 사람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그토록 부모님을 원망하고 죽지 못해 겨우 험난한 세상을 살아오면서 자기 자신만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온 죄인이었지만 이제 내가 하나님을 만난 이후부터는 인생의 참 맛과 참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 번의 힘든 고난과 환난을 맛보고 나니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친부모에게서조차 받을 수 없었던 참 사랑을 주셨고, 제가 치유할 수 없었던 마음속의 깊은 상처도 치유해 주실 뿐 아니라 그 사랑을 가지고 다른 어려운 이웃들을 섬길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함께 자라온 저의 어릴 적 친구들과 친척들, 우리의 이웃들이 살고 있는 저 북한 땅을 돌아보게 하시고 그 땅에 생명의 복음을 전할 사명도 주셨습니다.
성격의 장단점 :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나에게도 많은 장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챙기고 그들의 기쁨과 어려움을 같이 공감하며 공동체의 친목을 다져가는 소통과 배려, 섬김은 저의 장점인 것 같습니다.
단점은 제가 좀 완벽주의와 원칙에 강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의 단점을 잘 알기에 스스로 고치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올해는 목사님과 사모님과 같이 심방 전도사로 심방을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현재 교회에서 배우고 있는 ‘1907성경학교’에서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있으며 갓피플 성경 어플에서 통독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다시 시작하여 15일 동안 구약과 신약 각각 1독씩 하기로 계획을 변경하고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앞으로 다가올 남북의 복음 통일을 준비하며 저처럼 중국에서 팔려 다니며 상처받고 또 많은 우울증에 시달리는 탈북민들을 품는 상담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이제 통일이 되면 우리 사회는 저희들처럼 북한에서 많은 아픔과 고통을 겪었고, 또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마주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다가가 마음을 함께 나누고 같이 슬퍼하며 그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며 주께로 인도하는 것이 저의 비전입니다.
또한 이 남한에는 3만 5천여 명의 탈북민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아직도 어둠에 갇혀 진리를 모르고 참 생명을 모르고 세상 속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저처럼 이들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면서 많은 세상 짐을 지고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방황하던 저를 불러주시고 이 자리로 불러주신 주님의 사랑으로 한 영혼을 사랑하고 살리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저의 고향인 동양의 예루살렘인 평양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데 앞장 설 것이며 더 나아가 중국과, 미국과 세계열방에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전파하는데 앞장서는 주님의 군대가 되고 용사가 될 것입니다!!!
저희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섬겨주시는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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