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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움직이는 눈물의 승부(사38:1-8)-2012.9.2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3가지 액체가 있는데 피와 땀과 눈물이라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 수상 처칠이 의회 하원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이 세상의 위대한 일은 모두 피와 땀과 눈물의 산물입니다. 피는 용기를 상징하고, 땀은 근면을 상징하며, 눈물은 정성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피를 흘려야 할 때가 있고, 땀을 흘려야 할 때가 있으며,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피를 흘려야 할 때 흘리지 아니하면 남의 노예가 되고, 땀을 흘려야 할 때 흘리지 아니하면 빈곤의 수렁에 빠지게 되며, 눈물을 흘려야 할 때 흘리지 아니하면 동물의 수준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인생의 3대액체인 피와 땀과 눈물을 얼마나 흘리느냐에 따라 사업의 성패가 결정되고, 개인과 국가의 운명이 좌우됩니다”. 얼마나 위대하고 멋진 말입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눈물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눈물은 인간을 움직이고, 원수를 움직이며, 하나님까지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눈물이 남자를 움직인다면, 성도의 눈물은 하나님을 움직입니다. 그래서 눈물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입니다. 성경은 우는 자가 복되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앞에 울 수 있는 사람은 양심이 살아있다는 증거요, 하나님앞에 울 수 있는 성도는 믿음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1) 눈물의 승부
도대체 눈물이 무엇일까요? 눈물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가장 평범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흔한 것 같지만 아무에게나 쉽게 보여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우리 주변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평생 한방울의 눈물도 보여주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자기 눈물을 아끼고 사랑합니다. 마치 자기 눈물을 자기 자존심의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울보가 아닌 이상 대개는 자기 눈물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 들지 않습니다. 가끔 우리는 눈물을 훔친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눈물의 흔적을 애써 가리우고 다른 사람에게 자기 눈물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행동입니다. 때로는 울고 싶을 때 장소를 이동하여 혼자서 울기도 합니다. 아마도 자기의 약한 모습을 안보여 주려는 의도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눈물을 나약함과 무능함의 상징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눈물은 인간이 가장 인간다움을 상징하는 액체입니다. 눈물은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보통 학자들은 인간의 170여가지 감정을 통해 눈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눈물은 꼭 슬플 때만 흘리는 것이 아니라, 감격과 감동, 기쁠 때도 흘리므로 종류가 무척 다양합니다. 눈물은 정직과 겸손, 진실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눈물의 주성분은 90%의 물과, 7%의 염분, 2%의 단백질, 1%의 점액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람의 메마른 정서를 순화시켜주고, 체내에 독성까지 제거시켜주는 에너지가 있다 합니다.
미네소타대학 연구팀에 따르면 눈물에는 자연적인 진통효과를 내는 호르몬 성분이 있어서 사람의 긴장과 불안을 해소시켜 주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울고나면 속이 후련하고 시원한 느낌이 드는 이유도 그런 이유입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양파나 고춧가루 성분 때문에 흘리는 눈물에는 그런 것이 없고, 기쁘고 즐겁고 슬프고 감정적인 현상으로 흘리는 눈물안에만 있다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는 것은 웃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답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사는 비결중에 하나도 잘 웃고 잘 울기 때문이라니까 오래 살고 싶은 분들은 눈물을 아끼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즘 웃음치료사라는 직업이 뜨고 있는데 조만간에 울음치료사라는 직업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누가 이런 말을 합니다.“비누로는 몸을 씻지만, 눈물로는 영혼을 씻는다”. 심리학자 프로이드는“사람이 병에 걸리면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한다. 때문에 눈물없는 사람이 가장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눈물의 현장입니다. 좋은 일이 있어서 울고, 좋은 일이 없어서 웁니다. 너무 행복해서 울고, 너무 불행해서 웁니다. 인간은 탄생에서 죽음까지 울음의 연속이 아닐까 싶습니다. 울며 태어나서 울다가 죽는 게 인생이니까요. 만남의 눈물이 있고 이별의 눈물도 있습니다. 합격의 눈물도 있고 낙방의 눈물도 있습니다. 눈물의 연속입니다.
또한 눈물은 자기마음대로 보여줄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보여 줄 수 없는 것이 눈물입니다. 아무 장소에서나, 아무 일에나 보여 줄 수 없는 것도 눈물입니다. 때문에 눈물은 가장 흔한 것 같지만 가장 보기 힘든 것인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눈물을 아끼지 마십시오. 그리고 절대 눈물은 마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눈물이 말랐다고 말하지만 눈물샘에서 하염없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고 울어야 할 때는 우십시오. 절대 살아 생전에 눈물이 말라서 울지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눈물은 소유하기가 쉽습니다. 눈물 주머니도 필요없고, 눈물항아리도 필요없습니다. 그냥 눈물을 자극할 수 있는 당신의 살아 있는 감정과 감성만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사람의 눈물은 자기의 수고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은 절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눈물은 인간에게 가장 평등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평등한 눈물을 선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악하게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눈물중에는 값으로 측정할 수 없는 눈물도 있고, 더럽고 추한 싸구려 눈물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싸구려의 눈물을 악어눈물이라고 부릅니다. 악어의 눈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집트 나일강에 사는 악어가 사람을 잡아먹고 난 뒤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는 고대 서양전설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처럼 먹이를 잡아먹고 거짓으로 흘리는 악어의 눈물을 거짓눈물로 빗대어 쓰기 시작하면서 위선자의 거짓눈물, 교활한 위정자의 거짓눈물 등을 뜻하는 말로 굳어진 것입니다.
실제로 악어는 먹이를 먹을 때 눈물을 흘리는 데, 이는 슬퍼서 흘리는 것이 아니라 눈물샘의 신경과 입을 움직이는 침샘의 신경이 같아서 먹이를 삼키기 좋게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거짓과 위선의 눈물을 악어의 눈물이라고 말합니다. 보통 세상의 많은 눈물들이 악어의 눈물에 속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성도는 눈물에 인색하거나 궁색하면 안됩니다. 성도가 눈물이 마르면 은혜가 마릅니다. 요즘 성도들의 눈에 눈물이 없습니다. 주안에서 흘리는 눈물 말입니다. 저는 그것을 영적안구건조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죽하면 스펄전 목사님은“마른 눈으로 천국에 들어가기는 정말 힘들다”고 말하겠습니까. 예수안에서 눈물없는 성도의 눈은 강퍅함과 완악함의 증거입니다. 더러운 세상에서 싸구려 눈물만 흘리지 말고 주님안에서 거룩한 눈물을 쏟으십시오. 더 이상 악어눈물만 흘리지 말고 주님의 거룩한 눈물을 흘리십시오.
성도는 주안에서 한없이 울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적 눈물을 아끼지 마시고 다 쏟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천국에 들어가십시다. 제발 영적인 눈물은 아끼면 안됩니다. 영적인 눈물은 꼭 눈으로만 흘리는 눈물이 아닙니다. 심령으로 우는 눈물입니다. 천국에는 눈물이 없는 곳이므로 이곳에서 모두 다 눈물을 쏟아내고 가십시다. 나중에 천국가서 우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때문에 이땅에서 영적으로 우는 자가 복된 성도입니다.
어린아이는 말이 통하지 않으면 울어 버립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울면 해결됩니다. 어린아이의 눈물은 그들의 언어입니다. 주님앞에서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울어야 합니다. 성도는 머리로 승부하는 자가 아니라 눈물로 승부하는 자입니다. 돈이나 말로 승부하는 자가 아니라 눈물로 승부하는 자입니다. 지식이나 경험으로 승부하는 자가 아니라 눈물로 승부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기는 최고의 무기는 눈물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도의 눈물에 최고로 약하십니다.
성도의 눈물은 나같은 죄인이 예수 믿은 것에 감사하고 고마워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억만가지 죄악중에 용서받은 감격의 눈물입니다. 잘난 것도 없고 볼품도 없는 나를 붙드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고마워서 우는 눈물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기대를 충족시켜 드리지 못한데 대한 죄송함의 눈물입니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자빠져도 여전히 나를 붙드시는 주님의 은혜가 고마워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울 일이 천지입니다. 성도는 이래서 울고 저래서 웁니다. 눈물에 인색하지 마세요. 남자는 평생에 3번만 울어야 한다는 소리는 사단의 소리입니다. 아무리 울보공주가 1년동안 펑펑 울어도 눈물의 양은 불과 0.5리터에 지나지 않다합니다. 때문에 아끼지 마시고 우십시오. 성경에는 우리에게 울라고 당부합니다. 요엘 선지자도“....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라”(욜2:12). 야고보도 부한 자들을 향해“....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약5:1)고 권면합니다.
(2) 눈물의 승부사 히스기야
성경에는 눈물로 승부하던 승부사들이 참 많았습니다. 모세는 자기 동족들의 구원을 향해 울었습니다. 자기 동족의 불평과 불만 때문에 가슴 졸이며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자기 조국과 백성들을 위해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눈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쏟아내고 갔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예레미야애가라는 성경까지 지어 바쳤겠습니까?
다윗도 우는 데는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앞에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얼마나 울었으면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요를 적시나이다(시6:6)고 고백하겠습니까? 또한 시편56:8절에는 자기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 달라는 고백을 하겠습니까? 바울도 우는 데는 선수입니다. 그는 자기 동족을 향해 애통하며 울었습니다. 우리 주님도 예루살렘 때문에 우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우셨습니다.
성경에 인물들은 모두가 다 영적인 일 때문에 울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조국 이스라엘과 자기 백성들을 위해 주님앞에서 울었습니다. 정말 고상한 울음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쏟아내는 육신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버거워서 우는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인간관계의 속상함 때문에 우는 싸구려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더러운 이권 때문에 우는 억울함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순결하고 고결한 눈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히스기야의 통곡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아하스의 아들로서 유다의 13대 왕입니다. 25세에 왕으로 등극하여 29년간을 왕으로 봉직하면서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치적과 업적에 있어 누구 못지않은 혁혁한 공을 세운 왕입니다. 무엇보다 종교와 정치를 잘 조화시켜 나라를 부강케 하고 하나님과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은 왕입니다.
그런 히스기야에게 청천벽력같은 하나님의 사형선고가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네 집을 처치하라, 너는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사형선고를 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기막힌 일입니다. 사실 히스기야의 나이는 죽을 나이는 아닙니다. 죽음을 통고받은 당시 나이가 39세밖에 안됩니다. 어찌보면 이제 세상에 대해 눈을 뜰 나이 정도밖에 안됩니다.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이 부르시는 데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히스기야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앞에 나아가서 눈물로 탄원했습니다. 더 이상 그는 머뭇거릴 수 없었습니다. 지금 절박한 자기 운명을 부둥켜 안고 하나님앞에서 목을 놓아 통곡하던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십시오. 누가 히스기야의 눈물을 싸구려의 눈물이라고 하겠습니까? 감히 누가 히스기야의 눈물을 악어의 눈물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마도 히스기야의 눈물은 막다른 코너에 몰린 모든 인간의 공통된 눈물이 아닐까요? 어찌보면 세상에서 가장 절박한 눈물이요, 최고로 진솔한 눈물이 아닐까요?
히스기야의 눈물에 무슨 간사한 인간의 모사가 들어 있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앞에서 인간의 가장 연약하고 정직한 눈물이 아닐까요? 결코 히스기야의 눈물은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눈물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눈물의 당위성을 분명히 고백합니다. 그의 눈물의 기도에는 자기 생명을 연장시켜 달라는 노골적인 표현은 없습니다.
(3) 눈물에 약하신 하나님
무엇보다도 우리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눈물에 약하십니다. 자기 백성들의 흐르는 눈물을 절대 외면치 아니하십니다. 비록 작은 신음까지도 다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흐르는 눈물을 친히 닦아주십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을 들으셨습니다. 그의 기도는 통곡이었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는 자기 죽음의 억울함을 탄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명연장을 위하여 협상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자기나름대로 지금까지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위해 살아왔던 삶을 기억해 달라고 추억했습니다. 아마도 주마등처럼 하나님앞에서 자기 삶이 펼쳐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과거의 자기의 선한 행실들이 마치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려는 듯이 추억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히스기야는 다행입니다. 무언가 하나님앞에 보고 드릴만한 선한 행적이라도 있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는 히스기야처럼 하나님앞에 고백할만한 선한 행적이 있을까요? 미안하지만 하나님앞에 내세울만한 선한 행적이 없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어라고 기도할까요? 얼마나 뻔뻔한 기도를 드려야 할까요?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히스기야가 참으로 부러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저에게는 그렇게 기도할만한 선한 행적이 한가지도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부끄럽고 송구스러웠습니다. 아마 제가 그런 입장에 처했다면 부끄러운 통곡만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냥 불쌍히 여겨 달라는 생떼쓰기식 기도가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찬찬히 묵상하며 연구하다가 큰 은혜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작은 선행을 기억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게 저에게는 정말 큰 감동과 은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선행을 기억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어떤 선행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에는 어떤 영향력도 미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일 뿐입니다.
비록 히스기야가 자기의 선행을 가지고 하나님께 협상하듯이 기도했지만, 결코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선행 때문에 당신의 의지를 꺾으신 것이 아니라, 히스기야의 눈물 때문에 당신의 뜻을 돌이키신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5절에 보시면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고, 눈물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의지를 꺾은 것인 히스기야의 눈물 때문입니다. 통곡의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눈물없이는 드릴 수 없는 기도입니다. 눈물이 범벅이 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목을 놓아 통곡하던 기도소리를 들으시고,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던 히스기야의 눈물을 친히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의지를 굽힐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즉시 히스기야의 생명을 15년이나 더 연장시켜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앗수르왕의 손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주실 것과, 성을 보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징조로 선친 아하스의 해시계를 뒤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결국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이겼습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히스기야의 눈물이 하나님을 이긴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도의 눈물에 약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이기는 방법은 눈물로 승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방법보다 눈물로 승부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정확합니다. 지금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기다리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성도의 눈물은 하나님앞에서 가장 겸손하고 정직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신의 눈물을 점검해 보십시오. 그리고 영적인 눈물로 하나님께 승부하십시오. 할렐루야(20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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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를 보게 하는 말씀이네요 뽀송뽀송한 내 눈이 넘 부끄럽습니다. 근데 목사님 제목이 화악~~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