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헵시바와 쁄라(사 62:1-5)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오늘 이 자리에 나온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십니다.
바벨론은 바사 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바벨론을 정복한 바사제국은 바벨론에 끌려와 있는 포로들에게 자유를 선포했습니다.
바벨론에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풀려났습니다.
바벨론에서의 삶을 완전히 청산하고, 고국 이스라엘도 돌아온 사람들도 있었고, 바벨론에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삶의 고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70년의 포로생활을 하면서, 지겹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내었습니다.
그들은 하루라도 빨리,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가, 행복한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늙고 병들었지만, 그들의 후손들만이라도 자유의 삶을 살게 하고 싶었습니다.
비록 짧은 삶이지만, 남은 세월을 보람 있게 살고 싶었고, 진정한 평화 속에서 정의롭게 살고 싶었습니다.
무시당하고, 멸시당하면서 살아왔던 포로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당하게 살고 싶었던 것이, 그들의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비록 일부 사람들이 포로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몸으로,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왔으나, 현실의 삶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생활이나, 이스라엘의 자유의 몸이나 매한가지로 고달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이런 고통의 문제를 호소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가난의 문제를, 정치적으로는 불안정의 문제를, 사회적으로는 모욕과 소외의 문제를 계속적으로 제기하였습니다. 그들이 간구하는 문제는 어떤 초월적인 문제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삶의 문제들이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구에 대하여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경제적인 곤궁을 해결해 주겠다. 정치적인 불안정도 더 이상 없게 하겠다. 점점 가중되는 모욕을 받지 않도록 해주고, 오히려 기쁨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60:17-18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금을 가지고 놋을 대신하며 은을 가지고 철을 대신하며 놋으로 나무를 대신하며 철로 돌을 대신하며 화평을 세워 관원으로 삼으며 공의를 세워 감독으로 삼으리니 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국경 안에 다시 없을 것이며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부를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60:10-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노하여 너를 쳤으나 이제는 나의 은혜로 너를 불쌍히 여겼은즉 이방인들이 네 성벽을 쌓을 것이요 그들의 왕들이 너를 섬길 것이며 네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들이 네게로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가져오며 그들의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6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몫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그들의 땅에서 갑절이나 얻고 영원한 기쁨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오늘 이 자리에 나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 포로 되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버림받고 이혼 당한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로생활을 청산하지 못하고, 억압과 곤욕을 당하면서 살고 있었고, 이스라엘로 돌아 온 사람이라 할지라도, 경제적인 가난과 사회적인 혼란과 정치적 불안정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삶은 마치 이혼 당하고, “버림받은 여자”의 형편과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버림받은 그들을 신부로 맞이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나 큰 죄를 범하였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돌이키지 않을 때, 바로 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셨습니다.
솔직히 표현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먼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집 나가”라고 해서, 집을 나온 것이 아니라, 부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서, 자기 스스로, 집을 뛰쳐 나온 것입니다. 집에 다시 돌아가고 싶어도, “부모가 나를 받아 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 않고서, “나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범죄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에게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3)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먼저 버리신 것이 아니라, 사울이 먼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돌아오라”고 하는데, 돌아오지 않고 “나는 버림받았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징계 중 가장 엄중한 것이 버리심입니다.
어찌되었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했다”고 하는 것은 가장 무서운 심판이었습니다.
다윗은 “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시 119:98)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리움을 당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일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음으로 내몬 것을 시인 한 후에,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12)라고 고백했습니다.
범죄한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하고, 버림받을까봐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용서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잘못을 했을지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용서 못할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품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결코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요, 하나님께 기쁨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라는 음성을 들었던 것처럼, 여러분 모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5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아멘.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들으면 들을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얼마나 아름다운 축복의 말씀인지 모릅니다.
“너는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아름다운 면류관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이 될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면류관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아름다운 왕관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황무지”라는 말은 “버림받은 아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는 어느 누구도 이스라엘을 두고, ‘버림받은 자’라고 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이스라엘의 땅을 일컬어 ‘버림받은 아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무엇이라고 부르실까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헵시바”란 “하나님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다”는 뜻입니다.
“쁄라”란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이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헵시바”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여인, “쁄라”란 하나님과 결혼한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기뻐하시고, 그들의 신랑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의 신랑이 되어 주시겠다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고 기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고, “나의 헵시바”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헵시바”란 “나의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고, “나의 헵시바, 나의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고, “나의 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쁄라”란 “나와 결혼한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누구랑 결혼합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달리 말하면, “나의 쁄라”란 “나의 사랑하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고, “나의 쁄라,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쁄라”는 버림을 받은 여인이었으나, 다시 용서함을 받은 여인을 말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쁄라”란, 이제 더 이상 버림받은 자가 아니라, 사랑을 받은 자요,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본래 우리는 죄인이요, 사단의 자녀요, 본질상 진노의 대상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나의 기뻐하는 자여, 나의 사랑하는 자여!”라고 부르셨습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4-17) 아멘.
스바냐 선지자는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낙심하고 실의에 빠져, 낙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너를 기뻐하시므로,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즐거이 노래하라고 했습니다.
아가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나의 어여쁜 자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아 1:16)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기쁨이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헵시바요, 쁄라임을 잊지 마십시오.
1-3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아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헵시바와 쁄라”의 놀라운 일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2절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가리켜,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말씀하시고, 그 축복이 이루어지도록, 쉬지 않고,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황무지가 변하여 장미꽃이 필 때까지, 버림받았던 자가 하나님의 기쁨을 입은 자가 될 때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때까지,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하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열심으로 일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날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날 위해 피 흘리시고, 날 위해 십자가를 지시며, 날 위해 부활하시고, 날 위해 일하십니다. 날 위해 성령을 보내 주시며, 날 위해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시며, 날 위해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주님처럼 이런 열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도 주님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뜻과 정성을 다하여,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는데, 우리도 하나님을 위하여 일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 멸망 받을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쉬지 않고 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오직 너를 헵시바라, 쁄라라 하리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이름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이름은 “헵시바, 쁄라”입니다.
그 이름은 “나의 기뻐하는 자, 나의 사랑하는 자”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은 새 이름을 부여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헵시바, 쁄라”라는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새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지나갔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 우리는 본질상 죄인이요(롬 5:8), 불법의 자녀요(딤전 1:9), 죄의 종(요 8:34)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성도(롬 1:7), 하나님의 아들(롬 9:4), 심지어 예수님의 친구(요 15:14)로 불리워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죄악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깨끗이 씻음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뿐만 아니라, 새 이름을 부여받았다는 것은 그 이름에 걸맞은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공의를 행하여야 합니다.(2절)
우리는 결혼한 신부로서의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4-5절).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4절)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사울은 바울이 된 후, 순교하기까지,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마태복음 5:13-16절을 보면,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처럼, 세상의 빛처럼 살아야 합니다.
옛날, 알렉산더 대왕 휘하에 알렉산더라는 졸병이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얼마나 유명한 사람입니까? 나중에 그가 정복한 땅을, 자기의 이름을 붙여서,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지었는데, 그런 도시가 자그마치 70개나 됩니다.
그런데 알렉산더라는 이 졸병의 생활은 너무나 형편없는 생활이었습니다. 늘 술에 취하여 있을 때가 많았고, 그의 말과 행실이 깨끗하지 못했습니다. 형편없는 그의 생활로 말미암아, 알렉산더라는 이름이 마구 더럽혀지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알렉산더 대왕은, 어느 날 예고 없이, 이 졸병의 막사를 방문했습니다. 겁에 질려 졸병 알렉산더에게, 알렉산더 대왕이 말했습니다.
“네가 알렉산더인가?”
“네. 그렇습니다.”
“내가 너에게 두 가지를 명령한다. 너의 이름을 바꾸어라. 이름을 바꾸기 싫거든, 네 삶을 바꾸어라.”
여러분!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르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이 이름이 언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안디옥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며, 그리스도를 위해 충성을 다하며, 세상의 소금과 빛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행 11:26)
“그리스도인”이란 말 속에는 “그리스도”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된 삶을 살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헵시바, 쁄라”라고 불러 주시는데,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나의 헵시바여, 나의 쁄라여!”
“나의 사랑, 나의 기쁨, 나의 어여쁜 자야!”라고 부르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요, 심판 받아, 멸망 받을 죄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죄인을 이처럼 어여삐 여기시며, 사랑하시고 귀히 여겨 주십니다.
어찌된 은혜입니까? 어찌된 사랑입니까?
우리 모두, 그 놀라운 사랑, 그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은혜로우신 주님!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여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며 살고자 합니다.
이 마음 변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귀한 말씀을 들었사오니, 이 말씀을 붙들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