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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元曉)대사와 천안
작성자 : 임명순, 작성일 : 2002-04-30
원효대사(617-686)는 신라의 고승으로 성은 설(薛)씨이고, 아명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다. 원효대사는 태종 무열왕의 둘째딸인 요석공주와 결혼하여 이두문자를 만든 설총을 낳았으며, 스스로 복성거사(卜性居士) 또는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칭하고 속인행세를 하면서 불교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식한 대중에까지 잘 알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 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그의 사상은 일심사상(一心思想), 화쟁사상(和爭思想), 무애사상(無 思想)으로 볼 수 있으며, 그의 저서로는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대승기신론소(大乘起
信論疏) 등 100여부 240권이나 현존하는 저서는 20부 22권이다.
원효대사는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에서 불경을 공부하려고 유학의 길을 가다가 중도에 심한 폭우를 만나 토굴 사이에 몸을 숨겨 폭우를 피했는데 심한 갈증이 나서 토굴 주위에 샘물을 마셨는데 달고 시원하였다. 날이 밝아서 보니 어제 밤에 마신 물이 해골에 괸 물이었다. 마음이 불편하고 토 할 것 같았는데 그로인해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터득하여 의상대사와 헤어진 후에 당나라에 가지 않고 돌아왔다.
원효대사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득도하였다는 이야기는 대부분의 우리 나라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지난 초여름 밤에 직산위례연구소장 백승명씨와 함께 천안 향토사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중에 백 소장이 원효대사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득도한 곳이 직산이라고 하면서, 그 근거로 우리 나라에 있는 어떤 비문에 쓰여져 있다고 하였다. 그 비문에 는 직산의 직자가 피 직자(稷)로 쓰여져 있지 않고 문지방 직자( )로 쓰여져 있는데 이것은 원효대사가 깨닮음의 얻음은 문지방을 넘어 또 다른 세상을 얻은 것과 같아서 稷자 대신 자를 써서 직산( 山)으로 표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내용은 천안 향토사에서도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향토사에서도 귀중한 일이다. 또한, 우리 나라 사람이면 원효대사의 해골에 고인 물을 먹고 득도하였다는 것은 알고 있으므로, 그 장소가 직산이라는 사실로서 천안의 관광문화상품으로 개발할 수 있는 것으로 사료되어 그 내용을 밝혀보기로 하였다.
원효대사의 일대기가 쓰여진 문헌을 조사하여 보았다.
우리 나라에서 쓰여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그런 기록은 없었다. 원효가 득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은 송고승전(宋高僧傳 988년), 송의 각범혜홍(覺範慧洪 1071-1128)이 지은 임간록(林間錄), 연수(延壽 904-975)가 지은 종경록(宗鏡錄)이 있다.
종경록에서는 <…밤이 되어 황폐한 무덤 속에서 잤다. 원효대사가 갈증으로 물 생각이 났는데, 마침 그의 옆에 고여 있는 물이 있어 손으로 움켜 마셨는데 맛이 좋았다. 다음날 보니 그것은 시체가 썩은 물이었다. 그 때 마음이 불편하고 그것을 토할 것 같았는데 활연히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말했다. 내 듣건대, 부처님께서는 삼계유심(三界唯心)이요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고 하셨다. 그러니 아름다움과 나쁜 것이 나에게 있고 진실로 물에 있
지 않음을 알겠구나.…>라고 쓰여져 있다.
임간록에서는 <…황폐한 언덕길을 가다가 밤이 되어 무덤사이에 서 자게 되었다. 심한 갈증으로 굴 중에 샘물을 손으로 움켜 마셨는데 달고 시원하였다. 날이 밝아서 보니 그것은 해골이었다. 매우 역해서 모두 토할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크게 깨우치고 탄식하며 말했다. 마음이 생김에 갖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멸함에 해골이 둘이 아니구나. 여래께서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 하셨으니, 어찌 우리를 속이리오.…>라고 쓰여저 있다.
송고승전에서는 <…중도에서 심한 폭우를 만났다. 이에 길 옆의 토감(土龕), 즉 토굴 사이에 몸을 숨겨 회오리 바람과 습기를 피했다. 다음날 날이 밝아 바라보니 그곳은 해골이 있는 옛 무덤이었다. 하늘에서는 궂은 비가 계속 내리고 땅은 질척해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또 무덤 속에서 머물렀다. 밤이 깊기 전에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 놀라게 했다. 원효대사는 탄식하여 말했다. 전날 밤에는 토굴에서 잤음에 편안하더니 오늘밤은 귀신 굴에 의탁함에 근심이 많구나. 알겠도다. 마음이 생김에 갖가지 것들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감과 고분이 둘이 아닌 것을. 또한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이요, 만법이 오직 인식임을.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어찌 따로 구하랴.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소.…> 라고 쓰여저 있다.
송고승전, 임간록, 종경록에서도 원효대사가 득도한 장소에 대
한 기록은 나오지 않았다.
그 동안에 쓰여진 원효대사의 일대기는 이 문헌으로 인용하였기 때문에 득도한 장소에 대해서 기록이 없어서 득도한 곳을 밝히지 않고 쓴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보물 360호로 지정된 월광사원랑선사탑비(月光寺圓朗禪師塔碑)는 원래 충청북도 제천군 한수면 동창리 월광사지(忠淸北道 提川郡 寒水面 東倉里 月光寺址) 에 있었는데, 현재 서울 중앙국립박물관 앞뜰로 이전하였다.
이 비는 원랑선사(816-883)의 일대기를 기록한 것인데, 그 내용 중에 『……선사는 내심 꼭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마멸…) 현묘한 이치를 알고싶어 직산에 가서 (…마멸…)에 거처하니 (…마멸…) 곧 신승(神僧) 원효(元曉)가 도를 이룬 곳이다.
석달 동안 습정 한 뒤에 관종대사에게 귀의하니……〔…師卽潛□憤 欲 玄微 爰抵 직山 寓□□□ □乃神僧元曉成道之所也 習定三月後 依廣宗大師…〕』기록이 되어있다.
이 내용을 보면 원랑선사가 현묘한 이치를 알고저 원효대사가 도를 이룬 곳 즉, 직산에서 삼 개월 동안 거쳐하였다는 것이다.
원효대사가 도를 이룬 곳이 직산이라고 하였는데 백 소장의 말대로 직산이 稷山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고 직山으로 쓰여진 것이다.
원효대사가 득도한 장소 즉 직산은 기념할 만한 장소로 인식되어 원랑선사가 석 달이나 우거하여 수행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 되었음을 비문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원효대사가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갈 때는 661년이었는데, 660년에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켰지만, 백제의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고구려의 정벌을 시도하는 시점이다.
그 당시 국내외의 여건에 따라 신라에서 당나라로 가는 길은 고구려를 통하여 갈 수 없었고, 백제를 통하여 갈 수도 없었다.
당나라로 가는 길은 오직 경주를 출발하여 충주, 여주, 이천을 거쳐 직산을 지나 남양만의 당항성(黨項城)에서 배를 타고 등주(登州)로 가는 길뿐이었다. 원효대사도 불경을 공부하려고 당나라로 갈 때에는 이 길에 따라 갈 것이다.
송고승전, 임간록, 종경록에서는 원효대사가 도를 이룬 곳을 기록이 되지 않았지만, 원랑선사의 비문에서 원효대사가 도를 이룬 곳이 직산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 당시의 교통로가 직산을 통과하여 당나라로 갈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세 가지를 종합하여 보면 원효대사가 의상대사와 함께 불경을 공부하기 위하여 당나라로 유학의 길을 갈 때에 신라의 수도 경주를 떠나 당항성(남양만)을 향하여 가다가 직산 지역을 지나갈 때에 비바람을 만나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머무른 곳이 무덤 속이었는데, 그 곳에서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나서 크게 깨우쳐 당나라로 가지 않고 깨우침을 두루 두루 교화하는데 힘을 드렸을 것이다.
원랑선사의 비문에는 원효대사가 득도한 곳이 직산이라고 하였지 직산 어디인가를 쓰여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직산의 옛 문헌과 전설로 그 위치를 추정해 보기로 하였다.
옛 직산은 지금의 직산면, 성거읍, 입장면, 성환읍의 지역으로 직산현이 있었던 곳이다.
직산현의 옛 문헌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직산현지, 호서읍지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문헌에서는 원효대사에 대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었고, 또한 직산 지역의 전설에서도 현재까지 수집된 내용에도 원효대사에 대한 전설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다만, 원랑선사의 비문에 의거하여 원효대사가 득도한 곳이 직산이라고 하였고 득도한 곳에서 3개월간 습정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원랑선사는 통일 신라 시대 말기의 승려이고, 원효대사는 삼국통일을 할 때의 승려이므로 직산에 통일 신라 시대에 창건한 절을 찾아보면 하나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
직산에 있었던 절들은 옛 문헌에 홍경사, 귀암사, 천흥사, 만일사, 미륵사 등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 중에 통일 신라 시대 때의 절은 천흥사라고 추측할 수가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직산현조(稷山縣條)에서 천흥사를 소개할 때 성거산 아래에 있었으며, 당나라 시대에 세운 구리 기둥(唐時所竪銅檣)이 있다고 하였다. 당나라시대는 통일 신라 시대와 같은 시대이기 때문에 천흥사는 통일 신라 시대의 절로 추정할 수가 있었다. 그외의 절들은 창건한 시대에 대한 문헌 사료가 없었고 있어도 통일 신라 시대에 창건한 것이 아니며, 유물 등으로 추정하여도 통일신라 시대의 절로 추정하기가 어려웠다.
구리 기둥이라고 한 것은 보물 제 99호로 지정된 천흥사지 당간지주에 부착되었던 구리로 만든 큰 기둥을 말하는 것인데,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도 구리 기둥이 표시되었고,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구리 기둥의 크기가 24마디(1마디가 10척)이고 둘레가 4파(四把)라 하여 대동지지가 편찬할 당시에 현존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으나, 고종 때에 당백전을 제작하기 위해서 구리 기둥을 철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지금은 구리기둥은 없고 구리기둥을 고정시켰던 당간지주만 남아 있을 뿐이다.
천흥사가 있던 마을 이름은 절의 이름에 따라 지금도 천흥리라고 부르고 있으며, 천흥리는 성거산 아래에 있는 큰 마을이다.
천안 문화원이 발간한 천안지역의 땅이름 이야기를 보면 천흥리에는 성거산 아래에 자연 동굴이 있다고 하였으며, 또한 백제문화 개발 연구원에서 발간한 충남 지역의 문화유적을 보면 천흥리에 시대를 알 수 없는 고분유적도 있고 천흥리 주변에 백제시대의 고분유적이 있다고 하였다. 천연 동굴이나 백제 시대의 고분들이 원효대사가 직산에 왔을 때에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장소라고도 추정 할 수 있었다.
성거산은 고려 태조가 일찌기 고을 서쪽 수헐원(愁歇院)에 거둥했다가 동쪽을 바라보니 산 위에 오색구름이 있는지라, 이는 신이 있는 것이라 하여 제사를 지내고 산을 성거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온양에 목욕행차 할 적에는 성스러운 산이라고 인정하여 반드시 성거산에 꼭 제사를 지냈다. 고려 태조가 산 위에 오색구름을 보고 신이 있는 것이라 하였다고 하나 원효대사가 득도한 곳을 다른 표현으로 산 위에 오색구름이 있다고 표현하지 않았는가 추측하여 보았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 근처에 있는 산 가운데에 이름이 직산에 있는 성거산과 같이 성거산이라고 부르는 산이 있다. 이 산에 대한 전설은 고려 문인인 이색(李穡)이 기록한 성거산문수사기(聖居山文殊寺記)에서 원효대사와 함께 중국에 갈려고 한 의상대사가 득도한 장소라 하여 성거산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이것과 같이 원효대사가 득도한 장소도 성거산이라 이름하였을 것으로 추측이 되며, 고려 태조도 이 사실을 은유적으로 오색 구름으로 표현하여 성스러운 산으로 인정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았나 사료된다. 이런 이유로 천흥사가 큰 절이 되었고 천흥리 인근인 저리(苧里)까지 절들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당나라에 가기 위해서 경주를 떠나 충주를 거쳐 여주 이천을 지나 당황성(지금의 남양만)으로 가기 위하여 바다에 가까운 쪽으로 가야 하는데, 내륙 쪽인 직산으로 왔다는 사실은 직산에 교통에 편리한 시설이나 수원 쪽으로 가지 못할 이유가 있어야 직산으로 올 것이라 생각된다. 수원 쪽은 고구려의 접경 지대로 인하여 교통로가 생기지 못하였다고 할 수가 있었으며, 직산 쪽에 교통에 편리한 것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하였다.
천흥리에서 가까운 곳에 성거읍 모전리(茅田里)가 있다. 모전리 중에 자연 부락 이름이 모곶리(茅串里)가 있는데, 마을 이름의 끝에 붙여진 곶은 바다나 강에서 튀어나온 장소를 말하는 것이며 대개 그곳에는 나루터가 있었다. 예를 들어 장산곶 나루터와 같은 것이다. 모곶리에도 전해 내려오는 전설로 앞들이 바다였으며 배를 띄웠던 나루터가 있었다고 한다.
100여 년 전에는 서해 바다 고기배가 아산만을 따라 안성까지 배를 타고 와서 생선을 팔고 생필품을 사 갔었던 것이 사실이며, 이런 것을 미루어 보면 원효대사가 당나라에 갈려고 한 1500여 년 전에는 바다 물이 아산만을 따라 모곶리까지 들어왔을 것이다. 모곶리에는 나루터가 있었고, 지금은 땅이 높아져서 바다물이 들어오지 못하여 배도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그 사실이 전설로 전해오고 있다고 생각된다. 모곶리에서 바다의 썰물 때 에 배를 탄다면,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물의 힘을 이용하여 아주 빠른 속력으로 당황성에 도달할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이 당황성에 가는 교통에 편리함이라고 생각되어 이천에서 수원 쪽으로 가지 않고 직산에 와서 배를 타고 당황성으로 갔을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아산만에서 바다의 밀물과 썰물을 이용하면 육로로 가는 것보다 빨리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이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한 천흥사와 천흥리 부근에 천연동굴과 백제시대의 고분군이 산재한 것과 고려 태조가 성거산을 오색구름이 있어 신이 있다는 말은 은유적으로 원효대사가 득도하였다는 암시에 의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아산만을 통하여 바다 물이 천흥리 부근 모곶리까지 들어 왔기 때문에 바다의 밀물과 썰물을 이용한 편한 항로가 있었으므로 원효대사가 득도한 장소는 직산의 동쪽에 있는 성거산 아래 천흥리라고 추정하였고 득도한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천흥사를 창건하지 않았나 추측할 뿐이다.
장소에 대한 더 많은 고증이 필요하겠지만, 직산이 원효대사가 득도한 곳으로도 큰 문화 관광 상품이므로 이것을 계발하여 문화의 도시로 발전하기를 빌 뿐이다.
첫댓글 소중한 자료라서 더 발굴하여 역사가 숨쉬는 관광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