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입은 화이트 트러플 파스타, 끝맛은 알리오 올리오."
영화 《호프》를 보고 남긴 한줄평입니다. 초반 인상과 후반 인상이 그만큼 달랐습니다.
초반: 왜 압도적인가
산불 신고를 받고 마을로 향한 범석(황정민)이 폐허가 된 호포항을 목격하는 도입부는, 정보를 조금씩 흘리며 공포를 축적하는 방식이 정확합니다. 동물 사체 → 사람 시체 → 지인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단계적 노출은 설명 대신 발견으로 공포를 전달합니다.
무기라고는 장총 한 자루뿐인 범석이 다리를 후들후들 떨면서도 정체 모를 존재를 쫓아가는 시퀀스는,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며 한 방을 위해 압력을 쌓아 올리는 나홍진 감독 특유의 리듬 연출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곡성》, 《추격자》 이후 왜 그가 한국 최고의 추격 장면 연출가로 꼽히는지, 이 도입부 하나만으로도 다시 증명됩니다.
후반: 무엇이 무너지는가
문제는 156분이라는 러닝타임을 이 밀도로 끝까지 밀고 가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크리처의 실체가 외계인으로 드러나는 중반 이후, 장르가 크리처물에서 SF로 전환되면서 영화가 쌓아온 공포의 논리 대신 설명이 늘어납니다.
외계인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지지만, 정작 그 관계가 왜 지금 이 방식으로 봉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은 약합니다.
결말에서 인물의 선택이 감정보다 플롯의 필요에 따라 움직인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 지점부터 몰입이 눈에 띄게 흐트러졌습니다. CG 역시 크리처의 실루엣과 원거리 액션에서는 위력적이지만, 근접 숏에서 질감이 무너지는 구간이 반복돼 초반이 만들어놓은 사실감을 스스로 깎아먹습니다.
욕설과 티키타카로 채워진 대사는 현실감을 노렸겠지만,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장면에서까지 반복되면서 리듬을 끊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평가
나쁜 영화는 아닙니다. 오히려 잘 만든 영화에 가깝습니다.
다만 첫 30분이 세워놓은 기준이 너무 높아서, 그 기준으로 되돌아가 스스로를 채점하게 만든다는 점이 이 영화의 역설입니다.
화이트 트러플 파스타로 시작해서 알리오 올리오로 끝난 식사. 그 자체로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코스입니다. 하지만 첫입의 강렬함이 마지막 만족도의 기준점을 너무 높여버렸습니다.
결국 《호프》의 가장 큰 적은 다른 영화가 아니라, 영화 초반부의 압도적인 완성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영화의 SF 도전이 처음은 아닙니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괴수영화의 외피를 빌려 결국 가족 드라마와 사회 풍자로 귀결되었고,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은 한국적 판타지와 SF를 결합하려는 야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최근 《미키17》 역시 거대한 SF 세계관 자체보다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문제의식에 더 무게를 두었습니다.
돌이켜보면 한국 SF는 대부분 장르 자체를 정면으로 돌파하기보다, 다른 장르나 문제의식을 통해 우회해 온 측면이 있습니다.
《호프》는 이 계보에서 벗어납니다. 사회 풍자나 판타지로 에두르지 않고 크리처 SF 스릴러 자체를 정면으로 완성하려 한 흔적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범죄물과 스릴러에서는 이미 세계적 경쟁력을 증명한 한국영화가 SF에서는 여전히 우회로를 택해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시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호프》는 완벽하게 봉합된 작품은 아닙니다. 그러나 안전한 선택 대신 어려운 길을 택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첫입은 화이트 트러플 파스타, 끝맛은 알리오 올리오."
아쉬운 수작입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한국 SF 영화가 자기만의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기억될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성자 로더리고
첫댓글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오 이해가 되네요!
대체로 초반 호평 후반 악평이네요
함 보고 싶긴 하네요
오늘 보고 왔습니다. ‘만약 봉준호 감독이 편집했다면?’ 로더리고 님 글을 읽고 이런 생각이 드네요.
저도 흡입력 있고 좋았는데 뭔가 설명이 다 안 끝나고 마친 기분이었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