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천국에서 쫒겨나는 아담과 이브

나의 첫 사랑은 내가 철없는 스무 해를 지내고서야 찾아 왔다. 기묘하고 뜨거운 열병을 앓듯이 사랑을 시작했고, 그 밤들은 날들을 잊게 했다. 타인들이 알 수 없는 비밀들은 깊은 수렁 속에 빠져 들 듯이 잠겨가기만 했다. 감정들은 항상 내가 예상했던 것 보다 더욱 들떠 있었다.
그러한 들뜬 마음이 지독했다는 것은 모두 움츠러들던 겨울마저 차갑게 기억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 이외의 어떤 사람과도 연관되지 않았으며, 어떤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았고, 어떤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허름한 자취방엔 살 곳 없는 곰팡이들이 들어와 숨어 지냈다. 속삭이지도 않는 그들 틈에 조용히 누워 있으면 그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높은 힐을 신은 여자. 또각 따각, 왼발과 오른 발의 소리가 달라서 기묘한 화음을 이룬다. 그 소리 때문에 첫 사랑에 대한 기억은 기묘하고 뜨거운 것이다. 나는 다섯 걸음을 앞두고, 잠시 멈춰선 그녀를 향해 방문을 연다. 나는 한 겨울의 바둑이다. 그런 생각으로 한 없이 반가운 꼬리를 흔들고 혀를 빼어 문다. 방 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는 생각도 않는다.
푸른 곰팡이 같은 장판 위에 누렇게 찌든 솜이불을 펼쳐 놓는다. 아니, 이미 펼쳐져 있다. 그녀는 체크무늬의 미니스커트를 입고, 검정색 스타킹을 두르고 있다. 스타킹에는 바로크나 아니면 로코코나, 어떻든 그런 풍의 고전적인 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사이로 살짝 보이는 짙은 살색이 자극적이다. 그녀의 회색 자켓을 살짝 벗겨 준다. 썰렁해서 잠시 움찔 하지만 그녀는 이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목을 덮은 까칠한 니트는 길고 마른 목을 적당히 가려주고 있다. 양반다리로 앉은 후에 담배를 문다. 나는 집에 놔둔 성냥으로 불을 붙여준다. 담배는 성냥으로 불을 붙여주어야 맛있어.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마지막 한 모금을 깊게 삼키다 내뱉은 그녀는 아직도 가시지 않은 담배냄새를 가지고 이불안으로 파고든다. 나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역설적으로 당시의 나는 그녀 외에 아는 것이 없었다. 그 뜨거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그녀는 사라졌다. 어디 사는지도, 어디에서 왔는지도, 어디로 갔는지도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누구를 만났던 것인가. 나는 무엇을 알고 있었던 것인가....... 스물 한 살의 나는 영혼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찾는 것은 이미 부질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녀를 찾을 수 있는 실마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나름의 상처는 나를 냉소 적으로 변하게 했고, 그 해 나는 어렵게 들어간 그 하찮은 대학을 쉬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 있었을까. 나는 그 골방이 차갑게 식었다가 다시 더위를 느낄 때가 되어서야 활동을 시작했다. 동면을 끝낸 직후, 아직 풀리지 않은 손발과 투명할 정도로 흰 피부는 초여름의 빛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고, 동공은 항상 수축되고 미간은 찌푸린 상태였다. 팔 다리는 비쩍 말라서 뼈 사이가 불룩 불거져 나와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 있을 수 있는 만큼만 필요하던 에너지를 내 공복감이 참지 못 한 것이다. 나는 길거리에서 어렸을 때나 먹던 따끈한 번데기를 집어 들었다. 더위쯤은 아랑곳없었다. 이미 땀샘을 메울 수분조차 몸에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여름 따위 두렵지 않았다.
그 동안의 기억이 남아있던 교정과 학교 주변의 거리를 걸었다. 대부분은 모르고 지나갔으나 몇몇 만이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반갑지 않은 미소를 내보이고는 이내 사라져간다. 그동안에 세상은 많이 변해 있다. 지난 가을 이후로 세상에 대한 기억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 달을 오로지 걷는데 투자했다.
이제 좀 얼굴이 사람 같으시군요. 피부색이 허옇더니, 이제는 좀 구리빛 같으시네요. 그런데 왜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길만 걸어요? 매일 창밖으로 보여요. 처음엔 이상한 사람 같아서 말 붙일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매일 보니까 그 얼굴도 익숙해지던데요. 웃음. 그리고 같이 일하는 언니가 그쪽이랑 저랑 닮았다면서 재밌어 했어요. 처음엔 아니라고 했는데, 자꾸 보니까 정말 닮은 것 같더군요. 잃어버린 오빤가 싶었죠. 웃음. 들어오셔서 차 한 잔 하실래요? 무적 알바의 힘으로 커피 한 잔 대접해 드릴게요. 커피 말고.
그녀는 다정다감하고, 감정이 충만해 있었으며, 항상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학교와 내 골방 사이의 가운데 지점의 찻집에서 일하는 그녀는, 웃을 때 항상 웃음이라고 말하며 눈가에 미소를 띠는 그녀는 말린 바나나 같은 푸석함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항상 블루마운틴이며, 헤이즐넛이며, 국화차까지, 그녀의 체취와 조화를 이룬 깊고 상큼한 냄새를 이끌고 다녔다. 내 이유 없이 지루하기만 하던 세계에 새로운 한 자리가 불쑥 솟아올랐다.
냉소적인 여름이 조화를 찾아 가기 시작했다. 비로소 지나던 길들 마다 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있었고, 찌는 더위가 시작 되었다. 목줄기와 팔에, 오금에 땀이 배어들기 시작했다. 땀을 식히기 위해 그녀에게 갔다. 그녀는 항상 무적의 알바로서 차를 제공했다. 커피 말고. 웃음.
그리고 그 여름이 다가기 전에 파국 따위는 생각지도 못한 채 그녀에게 아직은 다마르지 않은, 아직 살아 꿈틀거리는 영혼으로 고백을 했다. 그녀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내 고백에 깊은 의미가 있다며 내 머리를 살짝 감싸 주었다. 그리고 진짜 여름이 왔다. 인생에서 진정 뜨겁게 살았던 적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그 여름이다. 내 육체도 정신도 모두 지나치게 과열되어 있었다. 조금 더 흥분하거나 열에 노출되면 곧 모든 신경회로가 끊어져 아무런 느낌도 얻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 골방은 전에 없던 열기 때문에 빛바랜 꽃무늬 바닥 장식이 녹아내릴 지경이 되었다. 그녀의 작은 탄성 같은 신음은 내 모든 열기와 신경을 잡아끌었고, 내 마지막 숨결마저 타 없어질 정도로 흡입력이 있었다. 우리는 인력에 의해 이끌리고 당기고 있었다. 서로의 사이 어디에 균형의 점이 있는지는 몰랐지만 우리의 거리는 작은 틈도 내비치지 않았다. 틈이 모두 끓어 증발해 버렸음이 분명했다.
매일의 걸음과 매일의 만남과 매일의 차와 매일의 섹스는 매일 하는 것이 의례 그렇듯 지겨울 만도 하였으나 그 해의 장마가 끝나고, 그 해의 갈빛 가을이 다 갈 때까지 지칠 줄 몰랐다. 바람이 점점 서늘해지고 있었다. 매미들은 짝짓기에 성공했는지 다 말라 죽어 버렸고, 단풍뿐만 아니라 다른 나무들도 완연한 가을을 가졌으며 추위를 많이 타는 나무들은 다른 해 보다 좀 더 일찍 동면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상큼한 향을 지니고 있었다. 얼어붙지 않는 미소도 그대로였고, 비록 감정들이 가끔 돌출되었다 하더라도 안정된 행복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파국은 허름한 슬레이트 지붕 틈에 새어든 빗물에 천장이 썩어 들어가 듯, 작은 틈을 비집고 찾아 든다.
나 이제 떠날 때가 되었어. 지쳐가는 나를 확인하는 것도 힘들고, 너도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언젠가 너의 갈비뼈가 변해서 내가 되었다고 한 것은 옳은 말일 지도 몰라. 하지만 갈비뼈가 변하듯 나도 변해. 내 감정들이 하나같이 변화를 외치고 있어. 이유는 크게 묻지 마. 나도 잘 몰라. 세상의 모든 것들은 모르는 것으로만 되어 있잖아. 왜 변하는지, 왜 같이 사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조차. 그래서 나는 나에게 민감해. 미안해. 그래도 그 동안 나는 거짓말을 하진 않았어. 오로지 너만이 내 삶의 이유였던 건 분명해. 웃음.
방문이 닫히고, 그 때 나는 왜 그녀를 잡지 않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후회에 빠졌다. 곰팡내가 그제 서야 코를 찌른다. 오만 감정이 치솟아 오르다가 가라앉는 것이, 청룡열차에 탄 듯이 멀미가 난다. 그리고 감기에 걸렸다.
그녀는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떠났다. 그녀의 감정들이 모두 남김없이 떠나고 말았다. 나의 실의는 살의로 부분 부분 바뀌었으나 결국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니, 감정이 사라져 버렸다. 가끔 미진한 그리움이 미칠 듯이 차 오르기도 하였으나 세상의 모든 것은 이미 감정을 잃고 있었다. 세상은 감성보다는 현실, 이성만이 살아있었다. 감정들은 믿을 수 없는 것뿐이다. 세상에 믿을 수 있는 것이란 거의 없었으나, 여전히 내 육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가끔 치솟아 오르는 기분 나쁜 감정들은 금방 죽여 버렸다. 오히려 그녀가 떠나가며 닫았던 그 방문에 내 감정들이 끼어 죽어버렸던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내가 죽일 감정들은 이미 남아 있다고 할 수 없었다.
매일 공원에 나간다. 더 이상 누군가와 또 다른 만남을 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최소한의 에너지를 밖에서 얻기 위함이었으며, 골방에서 나는 죽음 같은 냄새들이 견딜 수 없게 했기 때문이다. 밤이 되어서야 그 냄새들은 잠잠해 졌으므로 밤에만 약간의 온기가 있었을 뿐이다. 대신 밤에는 수음의 흔적들이 쌓여갔고, 그 것은 아무런 감정 없이 낮의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집을 나선다. 도저히 나올 수 없었던 장마가 지나고 처음으로 나선 그 날, 나는 또 다른 파국을 예감할 수 있었다. 예감 따위도 믿지 않았지만 그날은 이상했다. 항상 걷는 거리가 조금씩 어긋나 있는 느낌, 거슬리는 매미 소리, 항상 앉던 자리에 앉아 있는 기괴한 느낌의 노인. 여전히 해는 지지 않았고, 나는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고, 어지러운 가운데 내 신경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고, 주변엔 부서진 보도 블럭들이 널려있다. 나는 이상한 살의에 휩쓸리기 시작했고, 세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블럭을 집어 들어 두 걸음을 더 가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당황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나는 그의 몸을 살짝 밀쳐내고 항상 앉던 두 번째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드디어 해가 저물고 있다. 나를 억제하던 무거운 족쇄들이 풀려나간 느낌이다. 이제 더 이상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