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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등 7명의 왕을 섬기면서, 최고의 관직은 정2품까지 사사받으면서 능력과 인품을 인정받은 내시 김처선..... 그의 출생년도는 밝혀지지 않았고 다만 그는 연산군 11년, 1505년에 죽었다.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김처선, 역사에 등장하다
조선왕조실록에 처음으로 내시 김처선 (內侍 金處善)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1453년 단종 1년의 일이다. 문종 시절 영해(寧海)로 유배되었던 김처선이 그해 10월 풀려나 내시부(內侍府)에 복귀한다는 것이다. 단종 때 이미 내시의 길을 걷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으로, 그는 이후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등 다섯 임금을 섬긴다.
김처선이 왜 유배 당하였는지는 나와 있지 않는다. 하지만 이 명령이 내려진 날이 계유정난(계유정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이 있은지 불과 3일 후라는 점, 그리고 김처선에 대한 석방명령과 동시에 반대로 김종서 일파라는 이유로 유배당한 이들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처선은 김종서 등의 조정대신에게 찍혀 유배당하였을 듯하다.
단종 때 귀양이 풀리고 직첩이 되돌려졌으나, 1455년 (단종 3)에 금성대군의 단종복귀운동이라는 政變에 관련되어 삭탈관직 당하고 다시 유배되어 본향의 관노(官奴)가 된다. 세조 때 다시 복직되어 1460년 (세조 6)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추록되었으나, 다시 궁으로 돌아온 김처선의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내시의 목적은 왕을 보호하는 것이다. 내시직은 사소한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귀향 간 것만 두번이었다.
궁형(宮刑 .. 남근을 제거하는 형벌)이 없었던 우리나라에서는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한 자를 내시로 충원하였는데,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여 인위적으로 내시를 양산하였다. 사고에 의해 내시가 되는 경우는 어렸을 때 개가 어린 아이의 똥을 핥다가 고추까지 잘라먹어 고자가 된 경우인데 이는 극히 드문 것이다.
유께(兪棨)의 시남집(市南執)에 의하면, 북쪽 변경지역에 사는 주민 중에는 혹독한 병역이나 부역을 면하려고 부모나 자신이 직접 거세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거세를 하였을까? 유계(兪棨)의 기록에 의하면 명주실을 어린아이의 고추에 돌려 묶어 놓으면 피가 통하지못해 결국 썩어 떨어져 나간다고 한다.
그리고 기록에 의하면 여의도의 영등포쪽 샛강 근처 용추(龍湫)라는 연못 옆에 내시를 양산하는 움막 시술소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고종 34년(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되기 이전까지 있었다. 당시 시술과정에서 남근부분은 남겨 놓은 채 정낭 부분만 제거하였다.
우리나라에 내시(內侍)라는 직책은 고려시대 초기에 처음으로 생겼다. 고려 4대 왕인 光宗 때에 강력한 호족들의 정치간섭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하여 임금이 직접 자기 사람을 확보하여 활용할 목적으로 과거(科擧)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과거에 갓 합격한 젊은 인재들을 행정 견문도 넓히고 얼굴도 확실히 익혀 둘 양으로 궁중으로 불러 서류 정리나 심부름 같은 것을 시키면서 확실한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두고자 하였는데, 이들을 바로 "내시"라고 불렀다.
즉, 내시는 고려 중기 이전까지만 해도 거세한 환관이 아닌, 과거에 급제한 명문가 자제들로 구성된 최고 엘리트 관직이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 해동공자 최충의 손자 최사추, 주자학을 도입하고 성균관의 진흥을 꾀한 안향, 청백리로 유명한 임개 등이 모두 내시를 역임한 인물들이다. 그려 조정에서 내시 출신 관련 중 재상에 오른 인물만 무려 22명이나 되었다.
豪族의 견제, 內侍
고려는 태조 왕건부터, 왕건 자신이 " 가장 강력한 호족 " 출신이 아니었고, ' 가장 강력한 호족 "끼리의 힘 싸움 과정에서 어부지리로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약점을 지니고 출발한 왕이었기에, 그 후의 왕들은 대대로 호족들의 위세에 눌려 큰 소리 한 번 제대로 못해 보고 있던 처지이었다. 왕의 입장에서 볼 때 호족들, 또는 호족들이 추천한 관리들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웠으며 그리하여 호족들을견제할 수 있는 세력들이 필요하였고, 이로 인하여 광종은 과거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호족들이 왕의 이러한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고려 18대 의종 때에 ' 내시 "의 인원을 확대시키면서 호족들의 자제들까지 내시 자리에 들어 갈 수있도록 법을 고치게 되었다. 왕이 마음대로 독재를 못하게 하겠다는 호족들의 뜻이 반영된 것이다. 이리하여 과거 급제자들은 " 좌번 내시 "로, 호족의 자제들은 ' 우번 내시 "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물론 우번내시가 훨씬 더 힘이 강력하였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내시들의 숫자가 대폭 늘어나면서, 이때에 당시까지 " 궁중 노비"로 일하던 "성불구자"들도 특별한 재주만 있으면 내시가 될 수있었다. 어쨋거나 이때부터는 내시라는 직책이 과거시험의 우수 합격자 출신, 호족들의 자제 출신, 성불구자 궁중 노비 출신 등 세 가지 부류의 혼성 집단이 되어 버렸다.
그후 고려 말 공민왕 때에는 중국의 경우처럼 내시들의 숫자를 120여 명으로 대폭 확대하여 아예 " 성불구자"들만으로 이루어진 "내시부"라는 관서를 따로 만들었다. 벼슬도 정2품까지 올려버리는 바람에 이때부터 " 높은 관직의 성불구자" 즉 환관(宦官)이라는것도 생겨나게 되었다.
내시와 환관
환관(宦官)은 출발점부터 "내시"와는 크게 다르다. 삼국사기의 통일신라 흥덕왕 원년(826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첫 부인인 장화부인이 세상을 뜨자 정목황후로 추존되었다. 왕이 낙담하여 궁녀를 포함한 어떤 사람과도 만나지 않았으며, 왕 주위에는 다만 환수(宦竪) 몇 명만 있었을 뿐이었다. 이 당시에는 왕비의 호칭이 따로 없었다. 생전에 부인이라고 불렀다. 00마마라고 호칭한 것은 고려시대 충렬왕 이후 원나라 호칭을 받아들이고 난 후의 일이었다.
여기에서 환수(宦竪)라는 것은 " 더벅머리의 미천한 벼슬자리 "라는 뜻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 성불구자를 궁중의 노비로 불러다 쓰는 것 "을 의미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중국처럼 죄인을 강제로 거세하는 궁형(宮刑)이라는 형벌이 없었기 때문에 성불구자가 거의 없는 나라이어서, 아주 어렸을 때에 마루나 마당에서 대변을 보다가 변을 먹으로 왔던 강아지에게 고추를 물렸던 성불구자들에게만 이 환수의 자리를 맡기곤 하였다. 장애인에 대한 생활보호 정책의 일환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고려 의종시절에 내시들의 숫자가 대폭 확대되면서, 이 환수들에게도 내시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 성불구자들이 7품 이하의 낮은 관직이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정규직으로 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충렬왕비로 있던 제국대장공주 때에 성불구자들에게 중대한 변화가 있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충렬왕비인 제국대장공주가 중국 황실에서 필요한 환관 요원으로 고려의 성불구자 몇 명을 차출하여 중국 황실에 바쳤는데, 이들이 중국 황실에서 높은 관직의 환관으로 승진하여 고려에 있는 가족들이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중국 황실의 권력을 등에 업고 고려 왕실에 각종 압력을 가하는 막강한 사람이 되어 버렸고, 고려 백성들 사이에서도 원나라처럼 자진하여 성불구자가 되어 환관이 되고자 하는 풍조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급기야는 공민왕 때에 원나라의 환관제도를 그대로 도입하여 내시부가 성불구자들로만 채워지고, 벼슬도 고위 관직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內侍의 다른 이름 그리고 孝子洞
그 동안은 궁중의 성불구자들이 환수(宦竪), 엄인(閻人), 화자(火者), 고자(鼓子) 등으로만 불리어 왔는데, 이제부터는 당당히 환관(宦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엄인이라는 말은 그냥 성불구자라는 뜻의 말이고, 화자(火者)라는 말은 사람의 고환 두 개가 사람으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가 있다는 의미에서 人이라는 글자 바깥에 점 두 개가 따로 노는 火 글자를 사용하여 만든 말이다.
이들이 火者라는 말을 극히 싫어 하자, 이번에는 "속이 텅 빈, 즉 알맹이가 없는사람 "의 뜻으로 북 고(鼓)자를 집어넣어 고자(鼓子)라는 말을 만들어서 일반인들이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권력이 있건 없건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저 놀림감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조선시대에 이들이 모여사는 경복궁바로 옆의 동네를 화자동(火者洞)이라고 불리어졌다. 그러다 좀 너무했다..라는 여론이 있어서 요즈음은 동네 이름이 孝子洞으로 바꾸어서 사용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 달리 궁중에서 성불구자들의 수요가 많아졌고, 한강변에서 전문적으로 거세해 주는 장소도 있었다고 한다. 고종 34년(1897) 갑오경장으로 네시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영등포 방면 "용추"라는 연못 옆에 내시를 양산하는 움막 시술소가 있었다. 이를 내자원(內子院)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남성의 성기보다는 주로 고환을 잘라내는 방법을 많이 사용했다고 하는데, 수술 일자는 비 오고 천둥 치는 날로 잡았다고 한다. 이유는 비명 소리가 멀리 안 나가기 때문이었다.
내시의 역할
성종 때 편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조선시대 내시는 최고직인 종2품 상선(尙膳 . 2명)부터 종9품 상원(尙苑. 5명)까지 총 140명이 내시부(內侍府)에 속하여 일반 관료들과는 별도로 임명, 관리되었다. 내시들의 교육 역시 내시부에서 맡았으며, 궁궐 내 내반원(內班院) 건물이 교육장이었다. 조요 교재는 "대학연의"로, 중국 왕들을 보필하였던 충신들 사례를 소개하였다.
그들의 주요 임무는 국왕의 음식을 감독하는 상선(尙膳, 주방을 관리하는 상온(尙溫), 기호품인 차를 관리하는 상다(尙茶), 약을 관리하는 상약(尙藥) 등 국왕의 건강과 직결되는 왕실의 음식 총 관리가 주된 임무이었으며, 두 번째가 왕명 출납을 맡은 승전색(承傳色)이 있다. 그밖에 궁궐의 열쇄 관리, 청소 관리, 등불 관리, 궁녀 관리 등을 꼽을 수 있다. 물론 왕실 소유의 전답관리도 있으나, 중국의 환관들처럼 조선시대 내시에게는 인사권, 군사권과 재정권이 없었다.
내시가 권력을 갖게 되는 배경은 바로 왕명출납권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물론 법제상 국왕의 명령을 각 부처에 전하는 권한은 비서실인 승정원 승지(承政院 承旨)들에게 있었다. 하지만 승지에게 전해지는 국정 현안은 환관 내시를 통하여 국왕에게 전달되니 이로써 내시는 마음만 먹으면 왕에 대한 정보를 독점하거나 정보를 왜곡시킬 수 있는 위치를 점한 셈이다. 이로 인해 국왕의 두 측근 승지와 내시 간의 업무분장은 늘 국왕의 골칫거리의 하나이었다. 내시들의 거처는 궁궐 밖에 있었다. 단 국왕이 부르면 쉽게 달려갈 수 있는 곳에 살아야 했다. 그래서 주로 창덕궁 앞 봉익동부터 종묘가는 길에 거주하였다.
내시의 결혼, 기타
내시들도 엄연히 한 가족의 가장이었으며, 부인과 자녀도 있었다. 때로 첩을 두기도 하였다. 내시들의 부인은 일반 사대부 부인들처럼 남편의 품계에 따라 정경부인(1품), 정부인(2품) 등 높은 봉작을 받았으며, 물질적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자녀를 낳을 수는 없었던 까닭에 당연히 양자를 들였다. "경국대전"에는 내시의 경우, 3세 이전의 고자 아이를 데려와 양자를 삼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 대개는 어린 나이에 궁궐에 들어와 내시 훈련을 받고 있던 어린 내시들 가운데 눈여겨 두었다가 양자를 삼는 경우와 자신의 고향에 내려가서 선발해 오는 경우가 많았다. 내시가 죽으면 내시가 되기 위해 잘라낸 뒤 말려 항아리에 담아보관해 두었던 "남성"을 함께 묻었다.
김처선 때문에 특히 골머리를 앓은 사람은그 누구보다도 수양대군 즉 世祖라 할 수 있다. 연산군도 김처선을 불쾌하기 생각하기는 하였지만, 세조의 경우에는 감정의 차원이 조금 달랐던 듯하다. 세조는 툭하면 말썽을 일으키는 김처선 때문에 상당히 골머리를 앓았지만, 그러면서도 그를 내치지는 못하였다. 세조 치하에서 김처선이 말썽을 많이 일으키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세조 6년(1460년) 5월 25일에 원종공신(原從功臣) 3等의 반열에 오른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원종공신 原從功臣
원종공신이란 조선시대에 왕을 수종(隨從)하여 공을 세운 사람에게 준 공신 칭호이다. 본래는 元從功臣이었으나,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章)의 이름에 들어있는 "元"자를 피하여 "原"자로 고쳤다. 한번 책봉되는 수는 정해져 있지 않으나, 선무(宣武) 원종공신이 9,060명인 것에서 보듯이 대체로 매우 많은 편이다.
이들 원종공신들에게는 그들이 공신임을 증명하는 원종공신 녹권(錄券)과 함께 여러가지 특전이 주어졌는데, 개국 원종공신들은 전지(田地)와 노비를 받았으며, 이들이 받은 원종공신 전(田)은 세금이 면제되었다. 그러나 그후 원종공신들의 특전은 음서(陰敍 ..과거를 통하지 않고 벼슬에 오름), 사면, 특징 등에 국한되었다. 조선의 왕들은 많은 수의 인물들을 원종공신으로 책봉함으로써 지지세력을 광범위하게 확보하고, 이를 통해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했다. "세조실록"이 전하고 있는 내시 김처선의 非行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눈,비가 온다고
세조 6년 10월에 세조는 순안현(순안현)이라는 곳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그 날 눈비가 크게 내렸다. 그 때문인지 김처선을 포함한 몇몇 측근들이 임금을 제대로 호위하지 못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내시생활을 해온데다, 몇 개월 전에 공신 반열에까지 오른 김처선의 긴장이 약간 이완되었던 것이다.
이에 화가 난 世祖는 초저녁에 어가(御駕)가 순안현에 당도하자, 내시 김처선 등을 불러 곤장 80대의 형벌을 가하였다. 곤장 80대이면 꽤 무거운 형벌이었다. 그 외의 일반관료들 중에는 곤장을 피하는 대신 의금부의 국문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임금의 행차에도 불구하고
세조 10년, 1464년 6월27일에 세조가 화위당(華瑋堂)이라는 곳에 행차하였다. 그런데 김처선을 비롯한 몇몇 내시들이 世祖를 미처 시종(侍從)을 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임금의 일정을 사전에 확인하지 못하고 깜빡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임금의 분노를 자초한 이들은 모두 다 곤장의 형벌을 받게 되었다.
" 왕의 여자 "와 술 마시고 길에 드러눕다
1465년, 세조 11년 9월3일의 일이다. 世祖가 승지를 급히 불렀다. " 환관 김처선이 시녀(궁녀)를 데리고 가다가 술에 취해, 길 한 가운데에 누워있다는데, 이것이 어찌 된 일이냐 ? 어서 가서 알아보라 " ...는 것이었다. 내시가 왕의 여자인 궁녀를 데리고 술을 마시다가 길 한가운데에 드러누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왕으로서는 기가 막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마 김처선은 궁녀와 함께 일을 보러 가다가 술을 한잔 마신 듯하다.
승지 이영은과 오응이 김처선에게 가서 일의 연유를 따져 물었다. " 처음에는 주방(술을 맡은 내시부의 한 분과)에 가서 한잔 하였고, 다음에 부대 막사에 가서 또 한잔 하였습니다 " 직무를 수행하던 중에 술을 두 곳에서 마시고, 그것도 모자라 길 한 가운데에 드러누워 왕궁의 체통을 깎아내린 김처선에 대하여, 세조는 " 그를 단단히 가두라 "는 명령을 내렸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사례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세조 시절의 공신인 김처선은 상당히 군기가 빠진 내시이었다. 눈비가 내린다고 왕의 호위를 게을리 하고, 왕의 행차에 아예 나가보지도 않고, 궁녀를 데리고 출장을 가다가 술을 마시고 大路에 드러눕기까지 하는 정도이었다. 실록에 기록되지 않은 소소한 사건들도 있었을 것임을 감안한다면, 세조 임금이 김처선 때문에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위에 언급한 몇 몇의 사례만으로 김처선의 품성을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김처선이 그리 성실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조가 죽고, 뒤를 이은 예종은 요절하여 成宗이 즉위한 후로 김처선의 인생도 조금 순탄해졌다. 이 때에는 김처선이 자헌대부(資獻大夫)를 제수받아, 관직이 지나쳤다는 史官의 평도 실려 있고, 내시에게 높은 품계를 내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말도 있었지만, 김처선은 성종의 신임을 받아 성종의 명으로 대신들을 방훈하거나, 刑獄을 둘러보면서 때로는 賞으로 말도 하사 받는 등 호사를 누리며 순탄하게 지낼 수 있었다.
자헌대부가 되다
성종 9년(1478), 궁궐 안에 비상이 갈린다. 인수대비(仁粹大妃 ... 성종의 어머니)가 병에 걸렸는데, 典醫가 갖가지 약과 침을 놓아도 인수대비의 병은 낫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김처선이 지극정성으로 인수대비의 약을 다려 간호하여 마침내 인수대비의 병이 낫게 되었고, 그 공이 인정되어 김처선은 종2품에서 정2품으로 벼슬이 올라간다. 하여튼 김처선에 대한 성종의 신임은 각별하였다.
성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김처선은 성종의 陵을 돌보는 시릉내시(侍陵內侍)로 임명되었는데, 이 역시 성종이 김처선을 아낀 결과로 보인다. 이렇게 연산군 전반기에는 시릉내시로 있으면서, 김처선은 " 燕山君日記 "의 전반부에는 성종의 능인 宣陵에 대한 일이나 말 한 필을 하사 받은 일을 제외하고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성종의 3년喪이 끝난 뒤 궁궐로 복귀한 듯하다.
성종이 죽은 뒤에도 김처선의 입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김처선은 연산군 3년까지 연산군을 대신하여 성종의 묘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새 왕은 국정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시묘를 대신하는 것이었다. 시묘살이는 가장 신임하는 신하에게 맡기는 것이 조선의 관례이었다.
시묘살이를 마치고 김처선은 연산군이 하사한 말을 타고 궁으로 돌아왔다. 복귀 후에도 김처선은 상선내시로 8년동안 연산군의 손발이 되어 일했다. 성종에서 연산군까지 2대 왕에 걸쳐 김처선은 상선내시로 일하였다. 그만큼 신임이 두터웠던 것이다.
연산군, 內侍를 통한 왕권 강화
왕위에 오른 후 연산군과 대신들 사이에 첫 충돌이 일어났다. 연산군이 죽은 아버지 성종을 위해 죽은 이를 위로하는 불교의식, 수륙재(水陸齋)를 지내고자 하는데, 신하들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은 수륙재에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연산군은 수륙재를 지낼 제문을 지어오도록 대신들에게 명령하였지만 대신들은 왕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연산군은 왕의 명령을 왕의 비서기관인 承政院에 전달하는 대신 승전색(承傳色)이라는 내시부를 통해 전달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승정원을 약화시키고, 승전색을 통하여 왕명을 전달하고 보고하게 함으로써 왕권강화를 도모하였다. 즉, 왕과 승정원 사이에 승전색이라는 내시부가 중간에 개입하게 된 것이다.
대신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연산군은 승전색의 내시들을 우대하는 절목(節目)까지 만들어 공포하였다. 또한 승전색 내시들에게 승명패(承命牌 ... 왕의 명령을 받든다는 표시로 만든 패)까지 부여하였다. 승명패는 그 힘이 막강하였다. 대신들도 말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어야 했으며, 대신들도 승전색 내시를 무시하지 못하였다. 연산군이 承傳內侍를 자신의 분신으로 내세워 조정 대신들을 압박한 것이었다.
승명패 承命牌
연산군은 처음에 상아(象牙)로 패(牌)를 만들게 하여 임사홍(任士洪)으로 하여금 한쪽에는 승명(承命) 두 글자를 쓰고, 반대쪽에는 중관(中官 .. 內侍의 다른 호칭) 두 글자를 쓰게 하여 어압(御押)을 누르고, 그 이름을 승명패라고 하여 내시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말하자면 암행어사에게 주는 마패와 같은 권능을 가진 것이 승명패라는 것이었다.
연산군이 갑자년 사화 때 추상같은 명령을 내리거나 사람을 잡아들일 때 통용할 목적으로 고안한 것이었으나, 史禍가 크게 악화되면서 승명패는 더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처음에 상아로 30개를 만들었는데, 얼마 후에는 100개를 더 만들게 하였고, 상아가 부족하여 오매(烏梅)로 만들기도 하였다. 가짜 내시 소동으로 한때 곤욕을 치르고 기가 꺾여 있던 내시들이 뜻밖에 때를 만난 것이다. 내시들이 목에 줄을 걸어 신언패(愼言牌)를 늘어뜨리고, 허리에는 승명패를 차고 마상에 높이 앉아 전도(前導)로 하여금 " 승명이오! "하고 외치게 하고 기세좋게 돌아다니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래고 조정의 대신들은 내시를 천한 무리라고 백안시하는 습관으로 그들의 존재를 두려워 하지 않았다. 연산군은 노하였다. 들으니 조정의 대소 관원들이 길에서 승명패를 찬 내관을 만나면 기롱(譏弄)하여 웃거나, 다만 길가에서 말을 멈추고 서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옳은 일인가. 봉명(奉命)한 자는 어압(御押)을 받들고 가는데 만나는 자가 말에서 내리지 않는 것은 불손하다. 승명패를 차고 가는 내관을 인도하는 전도(前導)들에게는 주석(朱錫 ..놋쇠)으로 만든 인로패(引路牌)를 만들어 주고, 內官과 朝官이 일시에 왕명을 받들어 나아가게 되더라도 內官이 조관보다 앞어야 할 것이니, 명을 받지 않은 조관은 마땅히 말에서 내리고 내관이 지나기를 기다려서 움직여야 할 것이다. 만일 이를 어기는 자는 어떻게 죄를 줄 것인지 사헌부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이런 명령이 내리자 사헌부에서는 부랴부랴 의논하여 서계(書桂)하였다.... 무릇 조관이나 내관을 막론하고 승명패를 가지고 외방에 나갈 적에 말을 탄 채로 지나가는 자는 "불응위사리중(不應爲事理重 ... 사리가 중한데 행하지 않은 죄)"으로 논하고, 승명한 내관을 기롱한 자는 " 제서유위율(제書有違律 ... 제서를 어긴 죄)로 논하소서.....
김자원 金子猿
당시 연산군이 신임한 승전내시는 김자원(金子猿)이었다. 대싡들도 김자원을 통하지 않고는 왕을 볼 수 없을 정도이었기 때문에 김자원은 막강한 군력을 행사하였다. 왕명 출납을 맡은 후로 김자원은 가는 곳마다 뇌물을 받았다. 조선은 내시들의 정치 개입을 금지한 나라이었지만, 연산군 시대 김자원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였다.
김처선은 문무 양반관료들도 하지 못하는 직언을 임금이었던 연산군에게 하는 충신이었다면, 김자원은 연산군을 폭군으로 이끌었던 대표적인 간신 내관이었다. 김처선은 임금의 수라상의 이상 유무를 점검하는 종2품 상선 내시이었고, 김자원은 왕명의 출납 등을 담당하던 정4품 상전 내시이었다. 직책은 김처선이 높았지만, 영향력은 김자원이 더 컸다.
김자원은 원숭이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남의 눈치를 발 살피고 말주변이 뛰어나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 망므대로 바꾸는 데 능하였다. 그는 성종과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오랫동안 왕명을 전달하는 승전 내관으로 있을 수 있었다. 비록 품계는 4품에 지나지 않았으나, 왕명을 사칭하여 위세를 부리는 일이 종종 있었고, 말 한마디에 벼슬을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며 위세를 떨쳤다. 羅州 출신인 그를 위해 나주 관아에서는 여러 채의 집을 지어주기까지 하였으니,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는 계집종을 아내로 삼았는데, 그 처족이 궐내의 각 색장(색장)에 많이 소속되어 그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이 마치 옛날 당나라의 권신 환관 고력사와 같았다고 한다. 결국 반정으로 연산군의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한그는 왕을 속이고 바깥동정을 살핀다는 핑계로 달아나 숨은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왕조실록은 그를 간신으로 기록하였다.
김처선의 첫번째 위기
조선 왕조 역사상 유례없이 왕이 내시에게 막강한 권력을 실어주는 상황 속에서도 김처선은 변함없이 내시의 본분에 충실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10년 (1504년) 7월 16일, 상선내시 김처선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연산군이 상선내시 김처선을 옥에 가둔 것이다. 왕에게 무례를 저질렀다는 것이 이유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김처선이 하옥되기 4개월 전, 연산군에게 피 묻은 적삼이 전해졌다. 연산군의 생모가 죽을 때 남긴 것이었다.
왕위에 오른지 10년만에 연산군은 생모 폐비 윤씨(1445~1482)가 사약을 받고 피를 토하며 죽어간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분노한 연산군은 직접 생모 폐비 윤씨 사건을 조사하였다. 피바람을 이으킨 갑자사화(연산군 10년. 1504년)의 시작이었다. 폐비 윤씨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이미 죽은 자들은 무덤을 파 헤쳐 다시 죽였다 (부관참시). 침묵을 지킨 자들도 화를 당하였다.
연산군의 피의 보복은 광기로 치달았다. 성종 때부터 상선내시를 지낸 김처선은 폐비 윤씨 사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다. 김처선은 7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외롭게 자라난 연산군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김처선은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폐비 윤씨 사건만큼은 함구하였다. 연산군에게 그러한 김처선은 자신의 생모를 죽인 아버지 성종의 충복에 불과하였다. 생모 페비윤씨 사건에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잡아와서 사약이나 처형을 시키는 등 아주 불안한 정국이 초래되었다.
연산군의 입장에서 김처선은 성종 때에도 상당히 고위직에 있었던 내시이었으니, 당연히 왕명 전달이나 대비전에도 수시로 드나들었을 것이고, 어머니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을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갑자사화 이후 김처선을 옥에 가두지만, 연산군은 곧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 옥에 가둔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풀어주게 하였다.
內官金處善有無禮事當罪之 然無都薛里姑杖一百 ... 내시 김처선이 무례한 일이 있으니 마땅히 죄를 줘야 하나, 도설리가 없으니 곤장 백 대를 쳐라... 하옥되었던 김처선은 곤장 100대를 맞고 풀려난다. 도설리, 즉 궁궐에 음식을 감독할 사라미 없다는 것이 연산군의 감형 이유이었으나 연산군에게 김처선은 필요한 존재이었던 것이다.
연산군의 폭정은 더해가고...
그러나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파국을 향해 치달았다. 연산군은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향락에 빠져 들었다. 상선내시 김처선의 고민도 깊어갔다. 연산군의 분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김처선에게 왕은 바른 길을 가도록 섬기고 보필해야 하는 지존이었기 때문이었다.김처선은 왕을 모시는 내시부의 최고 수장으로 연산군이 성군이 되기를 누구보다 기대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연산군은 김처선의 바램과는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연산군은 신언패(愼言牌)를 관리들의 목에 걸고 다니게 하고, 말을 잘못하면 죽을 수 있다는 무언의 압력을 가하였다. 왕명에 반하는 말은 곡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하들은 연산군의 비행에도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신언패(愼言牌)에 쓰인 글은 .... 구시화지문 설시참신도 ( 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 즉, 입은 禍를 부르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폭풍 전야처럼 궁궐의 현실은 위태로웠다. 연산군을 보필하는 김처선의 하루하루는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이었다. 방탕한 생활을 일삼으면서도 연산군은 백성을 의식하였다. " 남산 인왕산에 잡인이 올라가면 걸 안과 성 밖이 모두 바라보이므로 매우 좋지 않으니 산기슭에 담을 쌓아 다니지 못하도록 하여라 "는 연산군의 명령이었다. 향락생활을 감추기 위해 아예, 궁궐 주변의 민가까지 헐어버렸다. 백성들은 삶터에서 쫓겨났다. 그러던 어느 날 경기도 광주에서 연산군을 비판하는 한글 벽보가 붙었다. 연산군을 향한 백성들의 경고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민심을 외면하였다. 벽보 사건을 보고 받고 반성은 커녕 도리어 백성들의 한글 사용을 금지 시켰다. 연산군의 폭정을 말릴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김처선의 고민은 거기에 있었다. 신하된 자로서 왕의 잘못을 바로 잡을 것인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보고도 못 본 척 침묵할 것인가. 김처선은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만약 자신이 선택과 결정에 가족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것을 안다면 결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김처선은 우리가 상상하기 조차 힘든 고민과 갈등 속에 나날을 보냈을지 모른다. 내시를 남편으로 섬기며 살아온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효자로 살아준 양아들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이자 아비이기 이전에 어린 나이에 내시 교육을 받고 관직을 제수받은 내시이었다. 1505년 4월 1일, 김처선은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왕을 진정으로 섬기고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마지막 결단을 내리게 된다.
조선왕조실록 연산조 기록에는 김처선이 어떤 直言을 고했는지 설명되어 있지 않는다. 그저 연산군이 김처선의 말에 분노하여 그의 가족을 멸하고, 처(處)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연산군일기에는 주석을 통해 " 외인들이 말하기를 왕이 처선에게 술을 권하매 처선이 술에 취해 규간하는 말을 하니 왕이 노해 칼을 들고 그의 팔다리를 자르고 쏘아 죽였다 "고만 기사화하였다.
이처럼 실록에는 김처선이 그저 술주정을 벌이다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연산군을 몰아낸 中宗 역시 김처선이 한 일을 " 술에 취해 망령된 말을 했다. 바른 말을 하는데 뜻을 둔 것이 아니다 "라고 못을 박고 있다. 이러한 김처선의 죽음을 연산군 200년 후인 英祖 때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영조는 김처선을 충신으로 인정한 최초의 왕이다. 영조실록에는 김처선의 죽음을 " ... 호랑이 굴에 던졌으나 호랑이가 잡아먹지 않자 이에 결박해 살해하니 ... "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와같이 실록에는 김처선의 죽음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다. 충신보다는 술주정뱅이 이미지가 다분하다.
연려실기술 練藜室記述
1505년 4월 1일, 이날 김처선의 행적은 연려실기술에 자세히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출근에 앞서 김처선은 가족들을 불러 모았다. " 내 오늘 이 한 목숨 바쳐 주상전하의 마음을 잡을 수만 있다면 내 오늘 반드시 죽을 것이다 "라고 김처선은 말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유언을 남긴 채 죽음을 각오한 출근 길, 아내와 아들 이공신은 눈물로 김처선을 보냈다. 김처선의 생각이 옳다고 믿었기에 가족들은 그를 붙잡지 못했다. 김처선이 궁궐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술판,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처선은 내시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연회가 끝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춤판을 멈추지 않았다.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던 김처선은 자신의 소임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한다.
" 전하 ! 이 늙은 놈이 네 분의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개 통하지만 고금에 전하같이 행동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 김처선이 말했다. 이에 연산군이 " 뭐라 했느냐? 네 아비처럼 여기어 지금까지 목숨을 살려주었건만 지금 뭐라 했느냐 "고 소리 쳤다. 김처선이 이어 말한다. " 이제부터라도 백성들을 생각하여 바른 정치를 펴시옵소서 " 연산군, " 이것이 입 닥치지 못할고. 여봐라 이 놈을 당장 끌어내어라 " 김처선의 직언에 연산군은 분노하였다. 직접 활시위를 잡았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김처선은 피하지 않고, 연산군의 화살을 받았다.
김처선은 관직이 정2품이었다. 연산주가 어둡고 음란하였으므로 김처선이 매양 정성을 다하여 간하니, 연산주는 노여움을 속에 쌓아 둔 채 겉으로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궁중에서 임금이 처용놀이를 하며 음란함이 도를 지나쳤다. 김처선은 집안 사람에게 " 오늘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고 들어가서 거리낌없이 말하기를 " 늙은 놈이 네 분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통하지마는 고금에 전하처럼 행동하는 이는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연산주가 성을 참지 못하여 활을 당겨 쏘아서 갈빗대에 맞히자, 김처선은 " 조정의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오래도록 보위에 계시지 못할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고 하였다. 연산주는 화살 하나를 더 쏘아 맞쳐서 공을 땅에 넘어뜨리고, 그 다리를 끊고서 일어나 다니라고 하였다. 이에 김처선은 임금을 쳐다보면서 "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다닐 수 있습니까 "고 하자, 또 그 혀를 자르고 몸소 그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 내었는데, 죽을 때까지 말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김처선이 죽임을 당한 3일 후, 1505년 4월4일의 연산군일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데는 그 정성과 공경을 다해야 하거늘, 요사이 간사한 내시 김처선이 나의 은혜를 잊고 변변치 못한 마음을 품고 분부를 꺼리고 나를 꾸짖었으니, 신하로써의 죄가 무엇이 이보다 크랴 ... 迅之事君 當盡其誠敬 而近者奸邪金處線 忘覆載之恩 懷不肖之心 厭敎詰君 人臣之罪執大於是 ... 즉, 지신의 본분을 잊고 임금을 꾸짖었다.. 김처선이 바른 말을 하다가 분노를 샀다는 것이다.
처 (處) 字 사용금지
김처선을 향한 연산군의 분노는 집요했다. 處字乃罪人金處善之名也, 自今凡文書 勿用處字 .........
"처"자는 죄인 김처선의 이름이다. 이제부터 모든 문서에 "처"자를 쓰지말라 (연산군일기. 1505년 7월19일). 김처선의 이름자를 영원히 없애려 한 것은 그만큼 연산군의 김처선에 대한 분노가 컸던 것이고, 앞으로도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영원히 쓰지 못하게, 영원히 지워지게 하려는 처절한 분노가 연산군의 명령에 의해 반영된 것이다.
사인(舍人) 성몽정(成夢井)이 교서를 지을 때, "處"자를 썼다고 하여 사헌부의 국문을 받게 되었는데, 그 날짜를 조사해 보니 법이 선포되기 이전에 작성된 것이었으므로 다시 국문하지 말도록 한 일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동,서반(東,西班)의 대소 관원 및 군사 중에 김처선과 이름이 같은 자가 있거든 모두 고치게 하였으며, 일력(日曆)의 처서(處暑)의 처(處)자도 김처선의 이름과 같다고 하여 조서(凋暑)로 고치도록 하였다. 연산군 자신이 즐기던 처용무(處容舞)도 풍두무(豊頭舞)로 바꿔 쓰게 하였다.
" 處 " 를 사용했다고 과거 합격을 취소
내시 김처선이 죽은 직후, 조선의 촉망 받던 선비이었던 권벌(權벌)은 예상하지 못한 통지문을 받는다. 그 통지문은 청천벽력 같은 내용이었다. 과거 합격이 취소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마지막 관문인 책문까지 당당히 통과하여 문과에 급제한 권벌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합격이 취소된 것일까? 경상북도 봉화군 닭실마을 .. 이곳에 권벌의 종택이 있고 여기에 그 내막을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합격 취소 이유는 권벌의 글과 연보를 수록해 놓은 문집에 기록되어 있다.
이유는 너무 뜻밖이었다. " 연산군께서 명령하기를 모든 문자에서 "처"와 "선"자를 쓰지 말도록 하였다. 그런데 선생의 과거 답안지 중에는 "처"자가 있었으니, 이러한 까닭으로 삭제(합격 취소)되기 된것이다 "라고 적혀 있다. 단 하나의 글자로 과거 합격이 낙방으로 바뀐 것이다.
김처선의 흔적을 모두 지우다
연산군은 김처선을 죽인 뒤 그의 가산(家産)을 적몰하고, 그 집을 파서 연못을 만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연지(蓮池)라고 불렀다. 즉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은 1505년 조선의 행정구역에서 없어진 것이다. 17세기에 제작된 "전의현지도(全義縣地圖)"에도 김처선을 향한 연산군의 보복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라진 집터에는 연못이 그려져 있을 뿐이다. 옛날에 대역죄인은 집을 허물고 그곳에 물을 채워 아예 연못을 만들었었다.
그리고 양아들인 이공신(李公信)과 7촌까지의 친족들도 모두 연좌시켜 처형하고, 본관의 충청도 전의(全義)도 없애버렸다. 그 후 1506년(중종 원년)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폐위된 뒤 연산군이 없앴던 전의(全義)를 복구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부모의 무덤을 파헤치고 석물(石物)을 모두 없앴다.
그리고 연산군은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김처선에 관한 일로 어제시(御製詩)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백성에게 잔인하기 내 위 없건만 / 내시가 난여를 범할 줄이야 / 부끄럽고 통분하여 정서 많아서 / 바닷물에 씻어도 한이 남으리 ..... 분해서 바닷물에 씻어도 한이 남는다...고 표현하였는데, 김처선에 대한 연산군의 분노가 뚝뚝 묻어나는 것만 같다. 사실 김처선은 역모를 꾀한 것도 아니고, 더욱이 연산군을 해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연산군의 조치는 너무 가혹하였다, 그리고 집요하였다.
중종반정 직후 사림(士林)들 사이에서는 연산군에게 직언하다 죽은 김처선의 행적을 기리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나 모두 이루어지 않았다. 연산군을 쫓아낸 中宗 역시 김처선의 일애 대하여 " 술에 취해 망령된 말을 하였다. 바른 말을 하려던 뜻은 아니었다 "고 못을 박아버렸다.
中宗의 거듭된 반대
먼저 1506년 (중종 원년) 11월24일, 헌납 강중진(康仲珍)이 아뢰기를, " 폐왕 때 만조의 군신이 모두 거짓을 따라 구차스럽게 영합하였으되, 유독 김처선은 직언하다가 죽었고, 권달수(權達手)의 아내는 정조를 지키다가 죽었으니, 이와같은 사람을 포상하여 사풍(士風)을 장려하소서. 즉위하신 처음에 마땅히 善을 포상하시고, 惡을 깎아 내려야 합니다. 청컨데 그 방을 피하고, 그 사람을 내쳐서 사습을 새롭게 하소서 "하고 청하였으나, 중종은 이를 윤허하지 않았다.
또 1512년(중종 7) 12월 4일, 찬집청(撰集廳)에서, " 듣건데 환관 金處善과 김순손(金順孫) 등이 폐조 때에 모두 바른 말을 하다가 베임을 당하였는데, 그 실적을 자세히 알지 못하니 바라건데 그때 일을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 아울러 싣도록 하소서 " 라고 하면서 찬집 중인 "속삼강행실(續三綱行實)"에 그 행적을 싣기를 청하였으나, 중종은 역시 이를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중종은 이 일에 대하여 " 김처선이 술에 취하여 망령된 말을 해 스스로 실수하였다 "고 말한다.
英祖의 복권
그러다가 140여 년이 흐른 1751년 (영조 27) 2월 3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려(旌閭)를 하사받게 되었다. 이때 英祖는 " 王된 자가 충성한 이에 대하여 정문(旌門)을 세워 주는 것은 세상을 권면하는 큰 정사이니, 사람이 비록 미천하다 하더라도 없을 수 없는 일이다. 중관(中官) 김처선(金處善)이 충간을 하다가 운명(殞命)을 하였다는 것은 일찍이 지난 날에 아주 익숙히 들었다. 그러므로 내부(內府)로 하여금 2백 년 뒤에 후사(後嗣)를 세우도록 하였으니 뜻이 대강 깊다 할 것이다. 이러한 末世에 마땅히 포양(褒揚)하여 권면해야 할 것이니, 해조(該曺)로 하여금 특별히 정문을 세워주게 하라 "고 명령하여 김처선의 고향에 공적을 기리는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