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
조선시대 선조때의 사상가로서 당시에 역모를 획책했다는 모함으로
멸문지화를 당했던 인물로 근대에 들어서 재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절대왕권에 대하여서는 일말의 재고의 가치도 없었던 그 시대에
그는 이런 말들을 하였다
"천하는 공물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겠는가"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고 누구를 부린들 백성이 아니겠나"
등등의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지금으로선 너무나 당연한 얘기이지만
당시로서는 반체제적인 생각이었다.
현시대에 정여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를 두고 서구의 올리버 크롬웰보다
60여년 앞서 공화주의를 주장한 선각자라고 칭하기도 한다.
또한, 군신강상론을 타파하려한 동양의 위인으로서 <<민약론>>을 저술한
루소와 같이 불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평가 받지 못하는 이유는
루소의 사상은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지지만 정여립의 경우엔 그렇지 못하다는
데 있다고 평한다.
결국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생각을 가졌던
그의 사상은 역모를 꾀했다는 정적들의 모함으로 조선왕조가 막을
내릴때까지 입에 담는것 조차 금기시 되었다.
이렇게 그의 사상이 죽음으로해서 조선사회는 내부적 모순을 치료하고
사회가 발전해 갈 기회를 잃게 된다.
또한, 정여립이 죽고 난 후 3년후 겪게되는 임진왜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크나큰 국가적 재난을 입게 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율곡 이이만이 왜의 침입을 예상한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 지식인들중에는 왜의 침입을 미리 예상했던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정여립과 같이 역모 사건에 연루됐던 최영경,정인홍은 남명 조식의 제자로서
평소 남명은 제자들에게 외침을 예견하고 제자들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한다
임란 당시 의병장으로서 활약한 남명의 제자가 50여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런것으로 볼때, 국제정세에 능통하고 뛰어난 혜안을 가졌던 자들이
정여립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조정에서 거세 되었던 듯하다. 당시
사건으로 1000여명이 넘는 숫자가 죽음을 당했다.)
정여립은 대동계라는 600여명에 달하는 조직을 만들어 외침에 대비한
군사 훈련을 하였는데 1587년 정해왜변 당시에는 전주부윤 남언경이
도움을 요청해와 하루도 안되서 군사를 모아 왜구를 격퇴했다고 한다.
관군이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공개적인 조직으로써 역모를 위한 조직이
아님이 분명함을 말해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지금으로부터 400여전 전의 이야기지만 우리에게 많은것을 생각하게 하는
인물임에 분명하다.